불교와 인문과학 1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수행에 관한 용어와 개념의 검토

수선님 2019. 7. 28. 11:54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수행에 관한 용어와 개념의 검토(Ⅰ)

-止․觀을 중심으로-*1)

조준호**2)

마음의 삼매가 없으면 諸法이 드러나지 않는다***3)

Ⅰ. 들어가는 말


본 학회에 拙稿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를 발표한 이래 止․觀의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진전된 논의가 있어왔다. 그 이전의 논문들에서 있어 초기불교의 止․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분명하게 제시되질 못했다. 이는 초기불교이래 대승 그리고 중국불교에 이르기까지 止․觀의 내용과 관계에 있어서도 일관되지 않게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최근에 天台 止觀 사상의 배경을 연구하기 위해 초기불교에서부터 초기불교의 부파 그리고 대승과 대승의 부파에 나타난 지관사상을 개괄적으로 잘 정리하고 있는 한 논문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4) 이러한 점으로 볼 때 拙稿의 경우에서처럼 초기불교에 있어 근본적인 의미의 止․觀을 四禪과 四念處로 각각 한정적으로 보고, 四禪과 四念處를 중심으로 止․觀 次第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기존의 연구성과들과 비교해 볼 때 그리 익숙한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와 검토가 앞으로 계속 있었으면 한다. 그러나 졸고에 대한 논평이나 비판논문에서 보여준 것은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라는 말로 압축되는 sati개념에 대한 異見과 함께 이러한 개념에 따른 일방적인 止․觀 次第 수행을 강조하는 졸고에 대해 觀에서 止나 止․觀이 처음부터 동시에 兼修할 수 있다고 하는 전통적인 주장에 편승하며 이를 재확인하려는 데에 집중하였다.5) 나아가서 졸고의 주장에 대한 반론형식의 어떤 논문에서는 졸고의 주장이 단지 “개인의 주관적 견해”, “새로운 것”, 또는 “독창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상당히 단정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모두 止는 四禪을 그리고 觀은 四念處를 의미한다고 하는 졸고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전제되거나 또는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의 목적은 이전의 졸고에 대해 좀 더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즉, 본 학회의 창간호에 실린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의 논지와 보조사상연구원 제 39차 학술발표회의 「Vipassanā의 인식론적 근거」의 한 단락6)을 경전의 총체적인 맥락 속에서 증명해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현존하는 초기불교의 여러 부파들의 문헌이 비교 분석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止․觀이라는 말이 전문용어로서 한 쌍으로 사용된 용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계속해서 좀 더 진전된 典據가 제시되기를 바라며, 이로써 止觀수행과 관련한 여러 가지 문제를 풀어냈으면 한다.

먼저 본고에서는 논자에 의해 止․觀 次第 성격임을 강조했던 이전의 주장들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한역 四阿含과 빠알리 니까야을 비교 분석하여 한 쌍의 전문용어로서 止․觀이라는 말이 사용된 용례를 중심으로 검토하여 본다.7)


Ⅱ. 본론

1. 止․觀의 의미

止와 觀의 빠알리어는 Samatha와 Vipassanā이다. 일반적으로 Samatha는 ‘고요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sam’이라고 하는 어원으로 설명된다. calm(고요, 조용함, 잔잔함, 평온)이나 peace(평화)나 tranquility(침착, 차분함) 또는 serenity(淸明, 淸澄)등으로 英譯된다. 한역 止로 옮긴 이유는 止를 설하는 佛典에서 번뇌망상이 ‘그쳐야’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다는 이해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나아가 빠알리 경전에서 samatha가 ‘(sabba) saṅkhārasamatha(行의 止滅)’로 쓰이는 용례가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한역 止의 경전적 맥락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Samatha가 쓰이는데는 주로 수행과 관련해서이다. 즉 , ‘마음이 지극히 안정되어 맑아진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四禪이 지향하는 목표가 성취된 경지이고, 또한 완전한 三昧의 경지에 대한 다른 말로 볼 수 있다.

Vipassanā는 ‘vi’와 ‘passanā’라는 말로 분석할 수 있다. 서구학자들에 의하면 앞의 ‘vi’는 기본적으로 ‘separation(갈라내는 것)’, ‘difference(다름)’, ‘opposition(반대)’8)으로 더 나아가 이와 함께 ‘intensity(강렬함, 열렬함, 강화, 증대)’를 더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Vipassanā의 동사형인 Vipassati를 이러한 의미와 관련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9)

최근 빠알리어에 권위 있었던 인도학자 고 Mahesi Tiwary교수는 Vipassanā와 관련된 글에서 ‘vi’에 담고 있는 뜻을 ‘minutely(면밀하게, 정밀하게, 끊임없이)’, ‘perfectly(완전하게, 완벽하게)’, ‘exactly(정확하게)’, ‘sincerely(충심으로, 성의를 다해)’, ‘inwardly(안으로)’, ‘intrinsically(본질적으로)’로 설명하고 있는 것10)은 Vipassanā수행의 성격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passanā’의 어원은 ‘dis’로 ‘보다’와 관련된 많은 빠알리에 사용된다. 마찬가지로 고 Mahesi Tiwary교수는 passanā를 ‘looking(바라보기)’, ‘observing(관찰하기)’, ‘analysing(분석하기)’, ‘introspecting(내관하기)’, ‘investigating(조사․검사하기)’ 등으로 풀어내고 있다.11) 이러한 어원분석은 흔히 서구인들이 Vipassanā를 “Insight(‘통찰’이나 ‘안을 꿰뚫어 보는 것’)”라는 말로 대신하는 것으로도 이 말이 본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즉, 모든 초기불교경전에서 四念處의 본격적인 수행으로 말미암아 五取蘊이 無常하고 苦인 것을 그리고 無我인 것을 진실로 보고 아는 것이 Vipassanā임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五取蘊이란 일체 존재를 의미하고 다시 四念處로 분류되어 그 속성이 三法印으로 如實知見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대로 Samatha가 四禪이나 三昧라는 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면, Vipassanā는 般若智慧(Paññā)나 知見(Ñāṇadassana)이라는 말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Vipassanā가 수행법이라는 말로 쓰인다면 般若知慧나 知見이라는 말은 Vipassanā의 결과이며 내용을 지시하는 말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는 다시 涅槃․解脫로 바로 연결되는 말로서 Vipassanā수행을 통해 般若知慧나 知見을 성취하여 연달아 涅槃․解脫로 간다는 뜻이다.

문제는 초기불교경전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止․觀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止觀 次第論뿐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觀에서 止로 이행할 수 있다거나 또는 동시에 닦을 수 있는가 하는 성격이 좌우될 것이다. 다시 이는 Sati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五蓋에 사로잡혀 있으며 尋伺가 작용하고 있는 일상 생활 또는 일상적인 의식 상태 속에서도 Sati가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이를 쉬거나 벗어났을 때에만이 발현되는 것인지 하는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만약에 觀(法)이라는 말을 ‘일상적인 의식 상태’에서 사유하는 것으로, 어떤 개념을 분석하고 응용하거나 적용시키는 것이나 또는 의도적으로 의식에 떠올린 어떤 대상에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 또는 일상적인 의식 상태로 이치를 窮究하는 것을 觀이라면 그것은 초기불교가 말하는 Vipassanā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의도적으로 떠올린 형상이나 개념을 또는 이치를 窮究하는 것으로 마음이 가라앉고 주의가 집중되어 고요해진 상태를 samatha이고 그래서 觀에서 止로 이행이 가능하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대상은 ‘있는 그대로’도 아니고, 다만 주관적인 감정과 사고에 의해 ‘조작된 것(有爲法 saṅkhata dhammā)’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불교가 말하는 Vipassanā가 해이하게 사용된 용례라 밖에 할 수 없다. 다만 초기불교가 강조하는 Vipassanā란 어떤 형식과 방법에 있어서든 간에 조작을 쉬는 止가 될 때 ’드러난 있는 그대로 존재상황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깊은 삼매를 통하지 않고서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세계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 따르면 ‘드러난다는 것’은 마치 거울이 맑아질 때 갑자기 사물이 나타나는 이치와 비교된다. 마치 옹기에 담긴 물이 움직일 때 얼굴을 비춰볼 수 없다는 것으로, 긴 경12)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이 감각적 욕망에 들떠 있거나 강한 열망에 사로 잡혀 있거나 미워하고 해치려는 마음과 五蓋(pañca nīvaraṇa)등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있는 그대로를 인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옹기에 담긴 물에 갖은 종류의 염색물질이 첨가되거나, 불에 덮여져 부글부글 끓을 때, 또는 거품이 일어날 때, 옹기에 이끼나 다른 물풀들이 살 때, 휘 저어 잔물결이나 소용돌이가 일 때, 바람이 불어 출렁일 때는 있는 그대로의 얼굴이 비추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만이 자신의 얼굴이 수면 위에 비추어 질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도 물론 yathābhūta와 pajānāti라는 말이 사용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적어도 이러한 여덟 가지 마음 상태- 감각적 욕망에 들떠 있거나 강한 열망에 사로 잡혀 있거나 미워하고 해치려는 마음과 五蓋등이 제거되었을 때만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어원적으로 볼 때도 Vipassanā라는 용어의 선택이 일상적인 의미의 봄이 아니라 ‘안까지 속속들이 투명하게 꿰뚫어 본다‘는 의미로 쓰였음을 보여준다.13) 다시 말해, 일상적인 사유작용 즉, 尋伺(vitakkavi cāra)가 지속적으로 작용하거나 喜怒哀樂과 같은 주관적인 감정이 쉴 때만이 투명한 의식상태가 형성되고 이때에 이르러서만이 비로소 대상이 저절로 드러나 있는 그대로를 맑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경전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고 있다. 제방에 서 있는 사람이 물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바라보고자 할 때는 물이 맑아질 때에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만이 물 속의 온갖 것들, 예를 들면, 물고기가 움직이는 것이나 물고동이나 조가비 또는 자갈 등이 뚜렷하고 환하게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물고기의 움직임 또한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경우로 비유하고 있다.14) 그리고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맑고 환하게 보여야 만이 움직이는 물고기 떼를 향해 작살을 던져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비유15)는 삼매의 상태에서 드러나는 번뇌망상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수준의 봄의 상태 속에서만이 번뇌망상의 뿌리가 차츰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수준이 그리고 아는 정도가 바로 般若知慧라는 것이다.16) 그래서 이를 설하는 같은 경에서 이러한 비유에 곧바로 반야지혜의 다른 동의어인 知見(Ñāṇadassana)이 언급되어 대비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먼저 止에 해당하는 四禪 다음으로 항상 언급되는 三明속에 나타난다. 즉, 三明의 漏盡智(āsavakkhayañāṇā)는 Vipassanā와 관련 있음은 Vipassanā의 사념처 가운데 법념처에 四聖諦가 공통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四念處를 설명하는 경전에서 한결같이 수행의 내용으로 yathābhūtaṁ pajānāti(있는 그대로 진리를 아는 것)라는 진리에 대한 참된 인식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漏盡智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말로 yathābhūtañāṇadassana (如實知見)이다. 나아가 pajānāti 또한 그 명사형으로 Paññā(般若知慧)라는 점이다. 여기서 Vipassanā와 Ñāṇadassana 그리고 Paññā라고 하는 말이 어떻게 긴밀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四禪에 곧바로 이은 이러한 비유와 함께 漏盡智가 마지막으로 설명되는 것은 초기불교가 본래 의미했던 止․觀 次第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확인시켜주고 있다.

2. 한역 四阿含에 나타난 止․觀

1) 長阿含

초기불교 부파 가운데 法藏部 소속으로 판명되는 장아함은 모두 30개의 긴 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오로지 2 경에 걸쳐서만이 止觀이 짤막하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빠알리 대응경에 대응 구절이 모두 나타나지 않는다.

(1) ꡔ大本經ꡕ(1경)

“止觀具足 成就正覺”이라는 말이 正覺을 이루는 직접적인 수행법으로 언급되나 止․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다. 또한 빠알리 대응경의 Mahāpadāna Suttanta에 대응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

(2) ꡔ沙門果經ꡕ

“止觀具足”과 “止觀成就”라는 말이 阿闍世왕의 입을 통해 언급되나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설명이 없이 갑자기 언급되며 빠알리 대응경인 Sāmaññphala Sutta에 대응되는 구절이 없다.

2) 中阿含

說一切有部소속의 중아함은 222개의 중간 길이의 경전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가운데 3경에서 止․觀이 언급되는데 앞의 장아함에 비하면 약간의 설명을 보여준다. 그리고 3개 경 가운데 2개의 빠알리 대응경전이 있는 반면에 하나는 찾을 수 없다. 그 중에 止․觀 次第를 조건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경과 이에 반해 止가 결여된 채 觀의 성취가 한 경에서 나타난다. 그렇지만 Nikāya 성립에 있어 늦은 시기를 보여주는 Aṅguttara Nikāya에 대응되는 경이다. 그리고 대응되는 구절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는 다른 Nikāya와 아함에 비해 늦은 시기로 論書들의 성립시기와 맞닿아 있다.

(1)ꡔ三十喩經ꡕ(69경)에 단 한번 언급되는 듯 하다.

“비구․비구니는 止․觀으로서 수레를 삼는다. 사리자여, 만일 비구․비구니가 止․觀으로서 수레를 삼는다면”17)과 같은 구절로 나타난다. 四正斷과 四如意足에 이어 설명되면서 언급된다. 왕이나 대신이 여러 종류의 수레(車)를 가진 것과 같이 비구․비구니도 四如意足으로 수레를 삼고, 止․觀으로 수레를 삼으라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止․觀이 후에 수레의 양 바퀴로 동시에 兼修할 수 있다는 근거로 생각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앞의 四正斷과 四如意足에도 쓰였다는 사실이다. 초기불교에서 車나 乘의 원래 의미는 yāna로서 실천 수행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 경전의 빠알리 대응경은 없다.

(2)ꡔ自觀心經ꡕ(109경)

止․觀에 관한 네 가지 가능성이 나타나 있다.

a.止는 이루었는데 觀을 얻지 못한 경우,

b. 觀은 얻었는데 止를 이루지 못한 경우,

c.止․觀 모두 이루지 못한 상태 그리고

d.마지막으로 止․觀 모두를 얻은 상태를 들고 있다.

한역 아함 가운데 이례적으로 止가 결여된 채 觀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경전이다. 빠알리 대응경으로 Aṅguttara Nikāya의 Dasaka Nipāta에 나타나는 경전으로 내용이 일치한다. 여기서 특이하게도 止․觀을 각각 “內止”와 “最上慧觀法”으로 한역되었는데, 이는 대응되는 빠알리 경전의 “ajjhttaṁ cetosamatha”와 “adhipaññādhammavipassanā”에 대응될 수 있는 번역이다. 하지만 adhipaññādhammavipassanā라는 복합어는 다른 Nikāya에 나타나지 않는 발전을 보여준다. 이는 止․觀이라는 말이 초기경전에 정착된 이후보다도 더 늦은 시기에 더해진 말일 것이라는 것은 후대 논서들에 이 문구와 함께 이 말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이후에 다시 설명된다.

(3)ꡔ牛角娑羅林經ꡕ(185경)

“삼림 속과 같이 고요한 곳에서 坐禪하여 마음의 행이 止하고, 좌선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면(不廢坐禪) 觀을 성취한다”라고 하여 한적한 곳에서 좌선을 통해 止를 성취하고 끊이지 않고 계속 심화시키면 觀이 성취된다고 한다. 좌선을 통한 四禪과 이후의 觀이 조건적이며 차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이에 대한 빠알리 대응경인 Majjhima Nikāya의 Mahāgosiṅga Sutta 또한 좌선을 통해 Samatha를 이루고 좌선을 계속 심화시켜 나가게 되면(anirākatajjhāna) Vipassanā를 성취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不廢坐禪에 대응되는 말은 anirākatajjhāna이다. anirākata는 niraṅkaroti의 과거형에 부정형이다. niraṅkaroti란 ‘소홀히 하다’, ‘경시하다’라는 뜻으로 소홀히 하지 않고 계속 심화시켜 나가는 것에 대한 강조의 말로 쓰였다.

3) 雜阿含

중아함과 함께 說一切有部 또는 有部系 소속으로 이야기된다. 1,362개 가량의 비교적 짧은 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약 11개 가량의 경에서 止․觀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 중에는 약 2개 또는 3개가 빠알리 대응경전과 일치하고 나머지는 대응경전은 있되 대응구절이 없는 경우와 함께 경이 끝난 부록에도 3번이나 언급된다.


(1) ꡔ求大師經ꡕ(제7권)

4경의 말미에 여러 전문 불교 용어와 수행법과 함께 나열되는 가운데 止․觀이라는 말이 나타난다. 이 경의 빠알리 대응경은 없다.

(2) ꡔ止經ꡕ(제7권)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과거․현재․미래의 無常으로 五取蘊을 끊는 데에 마땅히 止․觀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빠알리 대응경은 아예 없다.

(3) ꡔ同法經ꡕ(제17권)

森林이나 閑地 또는 조용한 방에서 止․觀 수행이 이야기되며, 여기서 "止를 닦으면 결국에는 觀이 이루어지고, 觀을 닦아 이미 성취하면 역시 또한 止가 성취된다"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止觀俱修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18) 이와 달리 觀→止를 시사하는 해석으로 받아들일 때도 止가 실린 觀으로서 이전의 止을 완성한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해석과 같이 止→觀, 觀→止, 止⇄觀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에 대한 문제는 대응경전과 관련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Akanuma Chizen에 따르면 이 경의 빠알리 대응경은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Aṅguttara Nikāya의 Paṭipada Vagga와 내용상 유사하다는 점은 이 경의 성립시기가 결코 이른 시기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adhipaññādhammavipassanā라는 전문용어의 쓰임새와 관련해서 다시 논의된다.


(4) ꡔ度量經ꡕ(제21권)

“調伏心止觀”이라는 말과 함께 “止觀和合俱行”으로 모든 부림을 끊게 된다는 간단한 말이 나타난다. 여기서 지관화합구행이라는 말이 동시에 止․觀을 닦는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앞의 ꡔ同法經ꡕ의 설명에서처럼 止를 닦아 관이 이루어 질 때 止가 실린 觀으로서 앞의 止觀和合俱行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짧은 경구를 가지고 구체적인 止․觀의 관계를 설명하기는 힘들다. 이 경에 대한 빠알리 대응경을 Akanuma Chizen은 Aṅguttara Nikāya의 Paṭipada Vagga을 제시하나 차라리 앞에서 언급한 ꡔ同法經ꡕ이 더 가깝다고 할 것이다.

(5) ꡔ伽摩經ꡕ(제21권)

이 경은 대응경전인 Saṁyutta Nikāya의 Kāmabhū Sutta19)과 함께 이전의 졸고에서 인용된 것20)으로 Samatha와 Vipassanā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止․觀수행에 있어 三行이 쉬는 순서와 다시 활동하는 순서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四禪과 四念處의 차제 수행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止․觀 내에 想受滅이 포함되어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두 마지막에 Samatha-Vipassanā 또는 止․觀이라는 말이 언급되는 것으로 경을 맺고 있다. 이는 모든 수행을 포섭하는 체계로서 止․觀이라는 전문용어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경은 또한 滅盡定과 죽음과의 차이를 설명하는 구절로도 유명하다. 빠알리 대응경전에 있어 내용은 거의 일치하지만 意行의 내용에 있어 경미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6) ꡔ二力經ꡕ(제26권)

여러 ꡔ二力經ꡕ가운데 경의 일반적인 형식상 말미를 장식하는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이라는 경구 이후에 부록처럼 37조도품과 같은 실천 수행법이 언급되면서 끝으로 止․觀이라는 말이 나타난다. 이에 대한 빠알리 대응경은 언급되지 않았다.

(7) ꡔ三學經ꡕ(제30권)

위의 ꡔ二力經ꡕ과 같은 경이 끝난 부록에 37조도품과 함께 언급되었으며 빠알리 대응경은 있으나 이에 대한 부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8) ꡔ三愛經ꡕ(제31권)

여기서도 앞의 경들과 같이 경이 끝난 뒤 부록에 나타나며 빠알리 대응경 또한 없다.

(9) ꡔ出家經ꡕ(제34권)

“止․觀을 많이 닦아 익히면 갖가지 界를 꿰뚫어 알게 될 것이다.21) 이 경은 Majjhima Nikāya의 Mahā-Vacchogotta Sutta에 대응되는 경전으로 대응 경구 또한 일치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別譯 雜阿含에서는 止․觀이라는 말 대신에 “智定“이라는 비슷한 말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를 말하는 앞뒤 문맥을 한역과 빠알리 경을 비교해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止․觀수행에 四禪․三明六通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止․觀으로 갖가지 界를 꿰뚫어 알게된다는 것은 止․觀을 통해 모든 수행덕목들의 완성으로 간다는 의미이다.

(10) ꡔ補樓低迦經ꡕ(제35권)

여러 가지의 방편이 나열되는 가운데 “止․觀을 닦지 못한 것을 닦게 하는 것”이라는 말로 짧게 나타난다. 빠알리 대응경은 없고 대신 별역잡아함에 있으나 止․觀이라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11) 제44권ꡔ失牛經ꡕ

경의 시작에 있어 소 찾으러 온 바라문이 나무 밑에 앉아 있는 세존을 표현함에 있어 마음이 적묵(寂黙)하고 止․觀을 성취한 분으로 언급되는데서 나타난다. 이로 보아 止․觀을 성취했다는 것은 궁극적인 경지를 나타내는 말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빠알리 대응경으로 Saṁyutta Nikāya에 나오나 止․觀이라는 말이 쓰인 문구 대신에 ‘몸을 바로 세우고 현전(現前)에 sati를 확립하고 있는 것’22)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고대 불교인들의 경전 성립과정에서 止․觀이라는 말이 쓰이기 이전의 본래의 또는 대응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 경에 대한 다른 부파 소속의 別譯 雜阿含도 대응 경전은 있으나 止․觀이라는 말은 생략된 채 빠알리 문구에 가까운 표현이 나타나 있다. 止․觀이라는 말이 후대에 삽입되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4) 別譯 雜阿含

飮光部 소속으로 보는 견해 외에 여러 가지 異說이 있다. 漢譯者 역시 未詳이고 完譯이 아니고 중도에서 그친 것으로 약 552개 이상의 경으로 모아져 있다. 그렇지만 대응되는 다른 부파의 대응경전에서는 止․觀이 나타나는데 반해 여기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5) 增一阿含經

소속 부파에 대한 정설은 아직 없다. 오랫동안 大衆部로 생각되어져왔던 것이 현재는 法藏部 등의 부파일 것으로도 추측되고 있기도 한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이것이 대승불교도의 손을 거친 후 한역되었음은 내용분석으로 증명할 수 있다. 약 472개의 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止․觀이 언급되는 경우는 모두 6개의 경전으로 전채 경전 수에 비해 다른 漢譯 아함보다 높게 나타난다. 그리고 빠알리 대응경전으로 약 2개의 경전이 있다.

(1) 제6권 15 有無品의 ꡔ正見經ꡕ

正見을 내는데 법의 교화를 받는 것과 “內思止觀”이라는 말이 언급된다. 이는 두 가지 法들이 모아진 品에 나타난 것으로 이러한 法數에 따라 후대에 止․觀개념이 확립되면서 더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빠알리 대응경은 없다.

(2) 제11권(20 善知識品)

삼림에 거주하는 비구가 닦아야할 두 가지 법으로 止․觀이 언급된다. 다른 경과는 달리 止를 성취하는 것이 곧 戒律을 성취하는 것으로, 觀은 사성제의 如實知見으로서 解脫智23)를 얻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설해졌다. 이에 반해 Aṅguttara Nikāya24)의 대응되는 경전의 내용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빠알리는 samatha로 欲貪(rāga)이 제거되는 cetovimutti(心解脫)을 그리고 vipassanā는 無明이 제거되는 paññāvimutti(慧解脫)로 말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四禪을 닦기 위해 이전에 戒行의 성취와 初禪에서의 五蓋의 제거가 이야기되는 經說을 볼 때 止가 四禪을 통해 탐욕이 그치는 心解脫이 곧 戒行의 완성으로 볼 수 있으며 無明으로부터 혜해탈은 바로 四聖諦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3) 제15권 高幢品

제15권 高幢品에 속한 한 경의 말미에 止․觀수행으로 첫째가는 이를 상가섭(象迦葉)비구니가 언급되는 가운데 간단히 나타날 뿐이다. 이는 ꡔ律藏ꡕ에서 석가모니 붓다가 성도 후 우루벨라 카사파를 교화시킬 때 毒龍과 신통력을 경쟁한 부분에 해당하는 부분과 비슷한 전반부와 함께 석가족의 정반왕을 만나게 되는 후반부에 止․觀이라는 말이 나타나는데 경의 내용과 구성이 같은 초기경전 가운데서도 상당히 상이한 분위기를 담고 있어 그렇게 이른 시기의 경으로는 볼 수 없다.

(4) 제29권 37품 六重品

“한적한 곳에서 좌선하여 더불어 지․관과 서로 相應하면”이라는 경구로서 止․觀 수행의 장소와 좌선과의 관계가 언급되어 있다. 이 경은 Majjhima Nikāya의 Mahāgosiṅga Sutta에 그대로 일치하여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한역 대응경인 ꡔ牛角娑羅林經ꡕ에도 나타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5) 제42권 46 結禁品十念

제42권 46 結禁品十念 가운데 하나로 언급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다른 경전에서는 十念 속에 止․觀은 들어가 있지 않는다.

(6) 제48권 50 禮三寶品

止․觀이 짧은 경 안에서 언급될 뿐 빠알리 대응경 또한 찾아 볼 수 없다.

먼저 이상과 같이 한역 四阿含에 나타난 止․觀이라는 용어의 쓰임새를 검토하는 것으로 다음의 몇 가지 점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첫째, 漢譯 阿含經에 있어 止․觀이라는 용어에 대한 개념을 구체적으로 설명을 보여주는 경구는 찾아볼 수 없다.

둘째, 그렇지만 이미 무엇을 지시하는 말인지 암묵적으로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셋째, 止․觀을 언급하고 있는 四阿含에 대한 빠알리 대응경전은 드물다. 나아가 같은 한역의 다른 부파 소속 別譯雜阿含의 대응경전에서도 止․觀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넷째, 설사 한역 四阿含의 빠알리 대응경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止․觀이라는 용어가 언급되는 정확한 대응구절 또한 드물게 나타난다. 용어와 함께 내용까지 거의 정확한 경우는 중아함의ꡔ自觀心經ꡕ과ꡔ牛角娑羅林經ꡕ정도이다. 그리고 잡아함의 ꡔ同法經ꡕ과 증일아함의 善知識品은 내용이 비슷하다.

다섯째, 중아함의ꡔ牛角娑羅林經ꡕ에서 止가 坐禪을 통해 성취된다는 언급은 빠알리 대응경과도 일치하며 이때 四禪을 의미하는 jhāna라는 말이 쓰인 것으로 止가 四禪의 완성을 의미하며 다시 좌선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면 觀이 성취된다고 하여 초기불교의 일반적인 止․觀차제론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고있다.

여섯째, 하지만 異例的으로 중아함의ꡔ自觀心經ꡕ이 止→觀, 觀→止, 止⇄觀관계을 분명히 보여준다. 雜阿含의ꡔ同法經ꡕ은 그와 같이 해석하는데 있어 약간의 문제는 있지만 이 두 개의 한역 아함을 제외하고는 觀→止, 止⇄觀관계가 가능함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경전은 없다.

일곱째, 止․觀수행이 모두 고요한 환경에서 좌선과 함께 언급되며, 그리고 많은 경전에서 涅槃․解脫 그리고 正覺과 같은 불교의 최고의 목표 또는 궁극적인 경지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수행법으로 서술된다.

여덟째, 잡아함의 ꡔ失牛經ꡕ에 언급되는 止․觀이라는 말 대신에 이에 내용상 이에 대응되는 빠알리경에서는 'sati의 확립‘ 즉, 四念處라는 말로 나타난다. 이는 止․觀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四念處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는 止․觀이라는 말이 전문용어로 정착하여 보편적으로 쓰이기 전의 止․觀개념의 내용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3. 빠알리 Nikāya에 나타난 Samatha와 Vipassanā

1) Dīgha Nikāya

총 34경이 세 묶음으로 구분되는데 첫째가 Sīlakkhandha, 둘째가 Mahāvagga 그리고 세 번째가 Pātheya 또는 Pāṭikavagga이다.


(1) Sīlakkhandha와 Mahāvagga는 각각 13개와 10개의 경전으로 도합 23개의 긴 경전 가운데에서도 모두 Samatha와 Vipassanā가 함께 언급된 적은 한번도 없다.


(2) 마지막 Pātheya는 11개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두 두 경에서만 언급된다.

Saṅgīti Suttanta는 Dīgha Nikāya의 34개 경전 가운데 33번째에 해당하는 경이다. 10법까지 法數가 나열되는 것으로 경전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名과 色으로부터 시작하여 33가지로 두 가지 쌍을 이루는 그 법을 나열하는 가운데 23번째에 단지 “samatho ca vipassanā ca”라는 짤막한 말이 언급될 뿐이다. 그와 함께 대응 경전인 한역 長阿含의 ꡔ衆集經ꡕ에는 止․觀의 언급을 찾아 볼 수 없다.

Dasuttara Suttanta는 Dīgha Nikāya를 닫는 마지막 34번째 경전이다. 바로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經名에서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듯 앞의 Saṅgīti Suttanta와 함께 10법까지의 法數로 경이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2법으로 Samatha-Vipassana가 짤막하게 언급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한역 대응경전인 長阿含의 ꡔ十上經ꡕ이지만 止․觀의 언급이 없다.

경전에 쓰인 언어상의 문제나 내용상의 문제를 통해 성립순서를 가늠해 볼 때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음은 흔한 논의이다. 그러한 점에서 Dīgha Nikāya의 마지막 Pāṭikavagga의 11개 경전은 모두 같은 초기 불교 경전 가운데에서도 그리고 Dīgha 가운데에서도 마찬가지로 조금 색다른 내용과 분위기를 풍기는 경전들로 모아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 Vagga의 마지막 부분을 이루는 2개의 경 가운데에서만 Samatha-Vipassana라는 용어가 나타나고 나아가 한역 대응경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더 나아가 이 2개의 경전 모두 Aṅguttara Nikāya처럼 法數로 경이 구성되어 있다는 점등은 이 경들의 성립시기가 Aṅguttara Nikāya의 성립시기와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모두 초기 불교 경전 가운데에서도 그 성립이 늦을 뿐더러 Dīgha로의 수용 또한 매우 늦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은 Samatha-Vipassana가 한 쌍의 전문용어로서 Nikāya에 수용되기 시작한 때는 Aṅguttara Nikāya의 성립 시기와 같이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다시 Aṅguttara Nikāya에Samatha-Vipassana가 다른 Nikāya에 비해 빈번하게 나타나는 맥락과도 일치한다.

2) Majjhima Nikāya

총 152경으로 Dīgha Nikāya와 마찬가지로 3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Mūlapaṇṇāsa와 Majjhimapaṇṇāsa 그리고 Uparipaṇṇāsa이다. Mūlapaṇṇāsa는 mūla라는 말이 나타내듯이 Majjhima Nikāya에서 가장 오래된 성립 시기를 갖는 것으로 이야기되나 Samatha-Vipassanā와 관련해서는 오히려 중간의 Majjhimapaṇṇāsa에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은 이 Nikāya의 성립 순서 전채를 다시 검토해 볼 수 있는 점인지도 모른다.

(1) Mūlapaṇṇāsa

모두 76개의 경으로 이루어졌는데 약 3번에 걸쳐 언급되었다.

Ākaṅkheyya Sutta

먼저 性慾을 단절한 청정한 생활의 梵行(Brahmanacārīna)이 그리고 戒行의 성취가 언급되면서 앞의 한역 中阿含의 ꡔ牛角娑羅林經ꡕ과 바로 뒤에 언급될 대응경인 Mahāgosiṅga Sutta와 함께 “戒를 성취하고 안으로 마음의 Samatha가 이루어지고 계속되면 Vipassanā를 성취한다”라는 문구가 나타난다.25) 앞의 ꡔ우각사라림경ꡕ에서 강조되었듯 ‘anīrākatajjhāna’라는 말을 통해서 볼 때도 止․觀이 조건적인 차제법임이 다시 확인되고 있다. 한역 대응경으로 中阿含의 ꡔ願經ꡕ에서는 빠알리와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Samatha를 뜻하는 말이 보이지 않고 대신 禪이나 第四禪이라는 말이 나타난다. 그리고 Vipassanā에 해당하는 말은 觀行이다. 여기서 다시 빠알리문이 cetosamatha나 catunnaṁ jhānā에 해당하는 한역은 四禪으로 止가 본래 四禪을 의미했음을 보여준다.

Mahāgosiṅga Sutta

이 경은 바로 앞의 경과 중아함의 ꡔ우각사라림경ꡕ과 같은 문구로서 앞에서 설명이 충분히 되었다.

Mahā-Vacchagotta Sutta

samatho ca vipassanā ca, anekadhātupaṭivedhāya saṁvattissanti"(止․觀은 많은 界의 통찰로 이끈다)”가 나타난다. 앞에서 말한 잡아함의 ꡔ出家經ꡕ과 정확하게 대응되는 구절이다.26)

(2) Majjhimapaṇṇāsa

모두 30개의 경으로 구성되었는데 Samatha-Vipassanā의 용례를 찾아볼 수 없다.

(3) Uparipaṇṇāsa

나머지 46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졌는데 2번 언급된다.

Mahāsaḷāyatanika Sutta

이 경은 Majjhima Nikāya 마지막에서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경으로 완전한 지혜(abhiññā)를 위해서는 samatho ca vipassanā ca가 수행되어야 한다는 짧은 문구에 나타난다.27) 한역 대응경으로 雜阿含 제13권 ꡔ六入處經ꡕ이 제시되나 Samatha-Vipassanā에 대응되는 止․觀이 아니라 Vipassanā만 의미하는 正觀만이 언급된다.28)

Piṇdapārisuddhi Sutta

이 경은 Majjhima Nikāya 마지막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경으로 Samatha-Vipassanā를 닦지 않는 것을 알게 될 때 닦도록 노력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역 대응경으로 잡아함과 증일아함이 제시되나 대응구절은 찾아볼 수 없다.

3) Saṁyutta Nikāya

모두 2,872경이 포함된 다섯 Vagga(品)로 구성되어 있다. Sagāthavagga, Nidānavagga, Khandhavagga, Saḷāyatanavagga 그리고 Mahāvagga이다. 학자들에 따라서 내용과 언어에 따라 첫 vagga의 성립시기를 가장 이르게 보고 다음의 Nidānavagga 또한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찬가지 순서로 갈수록 다른 경전과 비교했을 때 내용상 새롭거나 이색적인 그리고 좀 더 발달한 용어와 개념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과 함께 Saṁyutta Nikāya에서 Samatho-Vipassanā가 함께 나타나는 곳은 Saḷāyatanavagga와 마지막이 Mahāvagga이라는 사실은 앞의 Dīgha Nikāya의 Pāṭikavagga 그리고 이후의 Aṅguttara Nikāya와 같은 맥락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 Saḷāyatanavagga

Kiṁsukā Sutta(Saḷāyatana Saṁyutta 204번째)

: sati는 수문장으로 비유되고 두 사자(使者)로서 samatha와 vipassanā가 비유되어 나타난다. 대응경으로 한역 잡아함 제43권 ꡔ緊獸喩經ꡕ이다. 대응 구절에 있어 정확히 止․觀 대신 正觀으로 Vipassanā만 나타난다.29)

Kāmabhū Sutta(Cittasaṁyutta 6번째)

: 이 경은 앞에서 설명한 한역 잡아함의 ꡔ伽摩經ꡕ이 그 대응경전이며 내용상 거의 일치한다.

Samatha Sutta(Asaṅkhatasaṁyutta 2번째30))

: 매우 짧은 경으로 無爲(asaṅkhata)로 가는 수행법으로 Samatha Vipassanā가 소개된다. 無爲는 涅槃의 다른 말로 止․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한역 대응경은 없는 듯이 보인다.

(2)Mahāvagga

Āgantukā Sutta(Maggasaṁyutta 159번째)

: 정확하게 Majjhima Nikāya의 Mahāsaḷāyatanika Sutta와 일치한 문구로 나타나며 대응되는 한역 경전은 없다.


4) Aṅguttara Nikāya

11개 Nipāta에 2,308개 가량의 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Nikāya는 앞의 다른 세 Nikāya와 달리 전체가 法數로 편집되어 있다. 그리고 많은 경전과 구절이 다른 Nikāya로부터 수입되었다는 점 그리고 Abhidhamma Piṭaka의 논서들과 그 내용이 겹쳐 있는 부분은 이 Nikāya의 성립 시기가 다른 Nikāya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것으로 파악된다. 더 나아가 내용이나 전문 용어의 쓰임새에 있어서도 다른 Nikāya에는 나타나지 않는 후대의 論書류에 겹쳐 있는 경우가 두드러지게 많다. 또한 내용에 있어 이전의 다른 Nikāya에 비해 신화적인 성격의 경전이 많으며 개념의 발달 면에서도 좀더 진전된 면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아래의 Dhammikavagga에서는 일반적인 五根의 내용과 달리 定(samadhi)과 慧(paññā) 대신에 止와 觀으로 대체하고 있으며 이는 대응 한역인 增一阿含에서 十念가운데 止觀을 삽입하는 것은 다른 Nikāya나 아함에서 볼 수 없는 변화이다. 더 나아가 붓다 개념이 상당히 승격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 그리고 僧團의 전개과정에 있어 僧伽가 완전히 자리를 잡아 승가에 대한 보시가 강조되고 있다는 점 등 이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이 Nikāya가 다른 Nikāya에 비해 후대에 성립했다는 증거들은 넘쳐나고 있다. 이러한 성립시기와 일치하게 다른 Nikāya에의 경의 수나 분량과 비교해 보았을 때도 Samatha-Vipassanā가 쓰인 용례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즉, 모두 13개 가량의 경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전과 달리 縱橫自在한 法數로 나열하는 경 속에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후대의 논서류에서의 Samatha-Vipassanā의 쓰임새와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후대로 갈수록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Nikāya가 그러한 문헌들과 성립시기가 맞물려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그러한 典據들 또한 결코 부족하지 않다.

(1) Duka Nipāta

① Bālavagga(10번째 경)

Samatha로 cetovimutti (心解脫)를, Vipassanā로 paññāvimutti(慧解脫)가 성취된다는 것을 설하는 경으로 Samatha-Vipassanā 수행의 내용과 결과를 설명해주고 있는 유명한 경전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增一阿含 41권, 20 善知識品의 한 經에 대응되는 경전으로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② Khodhavagga (15번째 경)

2법이 나열되는 가운데 Samatha-Vipassanā 용어만이 나타남. 한역 대응경은 없다.

③ Atthavasavagga (17번째 경)

2법 Samatha-Vipassanā로 欲貪(rāga)이 완전한 이해를 위해, 완전한 滅을 위해 消滅을 위해 닦아야 함이 그리고 더 나아가 온갖 종류의 부정적인 심리 사항들 또한 완전히 이해하고 완전히 제거하고 소멸하기 위해서 Samatha-Vipassanā를 닦아야 함이 많은 분량에 의해 강조되었다.

(2) Catukka Nipāta (Asuravagga의 92번째)

④ Asuravagga (2-4번째 경)31)

이 vagga에는 같은 Nipāta 소속의 뒤의 Paṭipadāvagga와 함께 논자의 한결같이 증명하려는 止․觀 次第論에 예외적으로 이의(異義)를 제기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경구이다.

止․觀과 관련한 4가지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a. 止를 성취했으나 觀을 성취하지 못한 경우.

b. 觀을 성취했으나 止를 성취하지 못한 경우.

c. 止․觀을 모두 성취하지 못한 경우.

d. 止․觀을 모두 성취한 경우.

문제는 두 번째 ‘觀을 성취했으나 止를 성취하지 못한 경우이다. 이것이 후대 첨가일 것이라는 문헌분석은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⑤ Paṭipada Vagga (10번째 경)32)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a.止를 먼저 닦고 다음으로 觀을 닦는

b. 觀을 먼저 닦고 止를 닦는

c. 止와 觀을 동시에 함께 닦을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을 설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Paṭisambhidāmagga33)에 나타나는 경구이다. Khuddaka Nikāya에 속해 있지만 사실은 후대에 성립한 논서의 하나이다. 그리고 Vipassanā에 대한 복합어로 adhipaññādhamma vipassanā라는 말의 사용은 Aṅguttara Nikāya의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초기불교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여러 가지 맥락은 이 經說이 후대에 부가되었을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觀→止와 止⇄觀과 같은 止․觀 수행체계는 순수하게 초기 불교적이라기 보다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 자세한 문제는 이후에 논의된다.

⑥ Ābhavagga (6번째 경)

별 주목할 바는 없이 Samatha-Vipassanā가 언급되고 있다.

⑦ Abhiññāvagga (첫번째 경)

진리에 대한 인식(abhiññā)과 관련하여 Samatha-Vipassanā가 언급되고 있다. 한역 대응경은 없다.

(3) Pañcaka Nipāta

⑧ Pañcaṅgika vagga (5번째경)

正見(sammādiṭṭhi)은 계율, 학습, 논의 그리고 止와 觀의 5가지에 의해 촉진된다고 한다.

(4) Chakka Nipāta

⑨Dhammikavagga (12번째 경)

일반적인 五根의 내용과는 다르다. 5개중 마지막 두 개의 定(samadhi)과 慧(paññā) 대신에 止와 觀으로 나타난다. 定을 초기경전에서 四禪으로 보고 慧 또한 觀의 내용으로 볼 때 충분히 대응시킬 수 있는 말이다. 즉, paññā가 Vipassanā로 바로 대응시키는 발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한역 대응경 中阿含 제30권의 ꡔ敎曇彌經ꡕ은 正定과 正觀으로 오히려 일반적인 五根의 내용에 더 가깝다.

(5) Navaka Nipāta

⑩ Sambhogavagga (4번째 경)

앞의 Catukka Nipāta에서처럼 adhipaññādhammavipassanā라는 말이 쓰이고는 있지만 止․觀 次第 수행론이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자신감 또는 믿음(saddha)은 있으나 계(sīla)를 이루지 못한 단계

둘째, 자신감과 계는 갖추어졌으나 止가 성취되지 못한 단계

셋째, 자신감과 계 그리고 止가 성취되었으나 觀이 성취되지 못한 단계

마지막으로 모두 구족한 단계이다.

한역 잡아함 제11권 ꡔ難陀經ꡕ이 대응경으로 볼 수 있으나 내용상 비슷하지만 위와 같은 단계로 설명은 나타나지 않는다.

(6) Dasaka Nipāta

⑪Sacittavagga (4번째 경)

마찬가지로 adhipaññādhammavipassanā라는 말과 함께 4가지 경우가 나열된다.

a. 止는 성취하되 觀을 성최하지 못한 경우.

b. 止에 이어 觀을 성취한 경우.

c. 止와 觀을 모두 성취한 경우.

d. 觀은 성취했으나 止가 성취되지 않은 경우.

문제는 마지막 경우이다. 한역 중아함 제27권 ꡔ自觀心經ꡕ과 내용상 일치한다. 한역에서 adhipaññādhammavipassanā를 最上慧觀法 그리고 cetosamatha를 內止로 옮긴 것으로 볼 때도 확실히 같은 기원을 가진 경으로 볼 수 있다.

⑫Sacitta-vagga (5번째 경)

위의 경전과 같이 adhipaññādhammavipassanā라는 말로 止․觀이 언급된다. 한역 중아함 제23권 ꡔ無經ꡕ에 대응경전으로 되어있지만 정확한 대응 구절은 없다.

⑬ Ākaṅkhavagga (첫번째 경)

앞의 Majjhima Nikāya의 Ākaṅkhayya Sutta와 같은 문구로서 止․觀 次第 수행을 보여주고 있다.

5) Khuddaka Nikāya

Khuddaka Nikāya 가운데 이른 시기에 성립된 경전으로 흔히 이야기되는 Suttanipāta, Udāna, Itivuttaka, Dhammapāda 그리고 Theragāthā, Therīgāthā 등에서 Samatha-Vipassanā가 함께 사용된 경우는 몇 예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가운데 몇 개의 경전들은 다른 Nikāya보다도 오히려 이른 시기의 불교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논의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이른 시기의 불교문헌에서는 Samatha-Vipassanā가 한 쌍의 전문용어로 사용되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문용어가 나타나지 않는 다는 것을 통해 止․觀수행의 내용 자체까지도 후대에 성립․완성된 발전 개념을 보려고 하는 데는 주의를 요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주로 운문으로 쓰여져 있는 데에 있어 형식상의 한계는 물론 원래 있었던 내용을 전문용어로서 좀 더 정비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Theragāthā에 나타나는 한 게송은 주목할 만 하다.34) 지금까지에 있어 Theragāthā가 다른 초기경전에 비해서 이른 시기에 성립했다고 하는 것은 내용상에 있어 붓다의 1세대 제자들의 게송과 함께 승원(僧院)의 정주화(定住化)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을 보여주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경전성립사에 있어 TheragāthāTherīgāthā가 하나의 경전으로 성립하기까지 그 내용이나 체계에 있어 전혀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두 이른 시기에 성립되었다고 볼 수 없는 예 중의 하나가 불멸(佛滅) 후 100 또는 200년 후의 아소카왕의 형제들의 이름으로 지어진 게송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경전에 대한 유명한 주석가 Dhammapāla의 언급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TheragāthāTherīgāthā의 성립은 아소카왕의 제 3 결집 시기나 또는 그 이후로 보기도 한다.35) 이 때는 불교 교단의 근본분열에 이어 지말분열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 시기이다. 이러한 점이 아니더라도 같은 초기 불교경전이라도 경전 전체가 주문이나 진언 또는 여러 종류의 귀령들로 치장되어 있어 마치 후대의 밀교경전을 연상시키는 경전이 없지는 않다. 진정한 초기불교 전공자라면 이를 초기불교 시대에 성립했다고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한역 사아함과 빠알리 니까야의 비교를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나 초기불교의 각각의 경전이 소속 부파의 영향이 그리고 한역 아함의 경우는 대승의 영향까지 묻어 있는지를 잘 가늠할 수 있다. 이들이 초기불교 문헌 속에 있다하더라도 초기불교로 결코 포함시킬 수 없다. TheragāthāTherīgāthā의 경우는 이러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현재의 형태로 성립하기까지는 신구층(新舊層)이 서로 중층적으로 뒤섞여 있다는 것은 니까야와 중복되는 게송들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가늠할 수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Theragāthā에서 Samatha와Vipassanā가 쌍으로 나타나는 - 어쩌면 예외적인 한번 - 경우는 본고가 보여주려는 데에 전체적인 맥락을 흔들만한 큰 비중을 가질 수는 없다.

또 하나의 예외는 Itivuttaka의 산문부분에서 Samatha와 Vipassanā가 쌍으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Majjhima Nikāya의 Ākaṅkheyya Sutta나 Aṅguttara Nikāya의 Dasaka Nipāta와 같은 문구로서 이는 앞에서 止․觀 次第說의 경증으로 제시된 경구 가운데 하나이다. Itivuttaka등의 산문부분은 운문에 대한 주석으로 운문보다 늦은 시기에 더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운문부분에서도 Samatha→Vipassanā→Nibbāna 차제관계를 보여주는 표현이 주목된다.36) santacitta nipakā나 satimanto ca jhāyino라는 표현으로서 그대로 四禪을 나타내고 있으며 곧바로 Vipassanā는 동사형의 sammādhamma vipassati가 그것이다. 이는 Samatha와 Vipassanā의 내용적인 의미가 韻律이 제약된 운문 형식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의 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Pāli Nikāya는 현존하는 초기불교 문헌 가운데 유일하게 三藏이 완전하게 전승되어왔다. 이는 단일한 한 부파의 문헌으로 부분적으로 잔존하는 다른 초기불교 부파들의 문헌들과 비교를 통해 초기불교문헌 성립사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표본이 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나타나는 Samatha- Vipassanā의 경우에서도 그 용어와 그에 대응되는 여러 부파들의 한역 경전 등과 비교해 보았을 때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Dīgha Nikāya 34개의 긴 경 가운데는 매우 늦은 시기에 성립했을 Vagga에서도 다시 늦은 경으로 생각되는 두 개의 경전에만 짤막하게 언급된다. 또한 이에 대한 한역 대응경전은 있지만 대응구절이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Majjhima Nikāya는 첫 Mūlapaṇṇāsa 76개의 경전과 마지막 Uparipaṇṇāsa 46개 각각 3경 그리고 2개의 경에 나타난다. 모두 152개의 중간 길이의 경 가운데 5개의 경에 나타난다. 그 중에서 첫 3개의 경들에 대한 한역 대응경은 찾아 볼 수 있는 반면에 Uparipaṇṇāsa의 2경은 일치하는 한역 대응경전을 찾아볼 수 없다.

셋째, Saṁyutta Nikāya는 56 Saṁyutta의 2,872경 가운데 고작 4경에서 나타난다. 한역 대응경과 비교했을 때 두개는 비슷하거나 거의 일치하고 나머지 두 개는 아예 대응경전을 찾아 볼 수 없다. 일반적으로 앞에서 언급한 Khuddaka Nikāya의 몇 개의 경전을 제외하고 다른 Nikāya보다 성립시기가 이른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에 대응되는 한역 잡아함과 비교해 보았을 때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을 통해 확실히 Samatha-Vipassanā가 한 쌍이 되는 전문용어로서의 수용은 늦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넷째, Aṅguttara Nikāya는 11개 Nipāta의 2,308경 가운데 13개의 경에서 Samatha-Vipassanā가 다른 Nikāya에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사정은 Aṅguttara Nikāya의 성립시기가 상대적으로 늦다는 것과 관련하여 후대의 첨가나 부가되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다른 Nikāya에 비해 Samatha-Vipassanā가 많이 쓰였으며 더 나아가 개념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약간의 설명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Nikāya에서 사용되지 않고 오로지 후대의 논서류에만 나타나는 adhipaññādhamma vipassanā라는 말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Vipassanā가 복합어로 전개된 단계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Khuddaka Nikāya의 TheragāthāItivuttaka에서 각각 한번씩 사용된 용례가 있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불교의 이른 시기부터 사용한 한 쌍의 전문용어로서 Samatha와 Vipassanā의 반영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가 이른 시기부터 Samatha와 Vipassanā가 한 쌍의 전문용어로 사용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할 만큼 큰 비중을 가진다고는 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논자가 계속되는 이전의 拙稿에서 止․觀개념은 초기불교 전체적인 맥락과 관련하여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지만37) 여기서 다시 여러 초기불교 부파의 문헌의 비교분석을 시도하는 것은 이전의 졸고의 주장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고 이는Samatha와 Vipassanā라는 말 또는 止․觀이라는 말이 한 쌍의 전문용어로 對稱되어 사용된 시기는 초기불교문헌이 각 부파마다 거의 완성된 시기에 더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확실히 초기경전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Nikāya나 경전에서는 Samatha-Vipassanā가 서로 대칭 되어 전문 용어로 쓰이지 않았다. 그것은 Dīgha나 Saṁyutta의 후반부나 늦은 성립의 Aṅguttara Nikāya에 주로 나타난다는 점 그리고 예외적인 몇 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Khuddaka Nikāya나 別譯 雜阿含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한역 四阿含 가운데서는 경이 끝난 뒤에 부록처럼 첨가되어 있는 경우는 물론 部派간의 대응경전을 중심으로 비교해 볼 때도 止․觀의 쓰임새가 많은 경우에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초기불교 部派 가운데에서도 止․觀이라는 말의 수용의 시차가 모두 달랐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헌들은 Pāli Nikāya를 제외하고 단일한 부파들에 의해 전승된 것들이 아니다. 적어도 다섯 개 이상의 초기불교 부파들이다. 그리고 문헌들이 각기 격리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승되어 왔다. 하지만 A. D. 4세기 후반에서 5세기에 이르러 중국에 소개될 시기까지도 서로 합의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현재의 문헌 비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점에 있어 인도 본토에서는 止․觀이 중요한 주제어가 되어 다양하게 설명되고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대승불교 또한 이를 물려받아 갖가지 종류의 지관수행체계를 새로운 경전 속에 속속들이 심어놓았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은 중국불교에 이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止․觀이라는 용어가 불교수행 가운데 중요한 무게로 느끼게 하는 요인이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부파간에 불일치는 초기불교 시대의 이른 시기부터 이미 止․觀이라는 말이 각각 따로 초기경전에서 쓰여졌다고 하더라도 쌍을 이루는 전문용어로 본격적으로 첨가된 시기는 이미 초기경전이 성립한 이후의 시기이거나 아니면 한참 무르익은 부파 시대일 것이다. 차라리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adhipaññādhammavipassanā라는 복합어와 함께 止가 바탕 되지 않은 채 觀에서 止로 향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經句는 바로 Pāli Nikāya가운데 Aṅguttara Nikāya에서만 약 3번에 걸쳐 나오고 더 나아가 동시에 止․觀을 함께 닦을 수 있다는 것도 한번에 걸쳐 나타난다. 이는 초기불교경전의 전체에 걸친 止․觀 次第論에 반하는 분명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본 논문의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문제삼고 있는 점이다. 먼저 4 개의 Nikāya와 Khuddaka Nikāya 가운데 이른 시기에 성립된 경전에는 나타나지 않는 반면에 오직 Aṅguttara Nikāya에만 나타난다는 점으로도 ‘觀은 성취했으나 止를 이루지 못한 상태나 止의 기초가 없는 觀에서 止로 닦는다’(觀→止)는 것이나 ‘止․觀을 처음부터 동시에 함께 닦을 수 있다는 것’(止⇄觀)의 가능성은 초기불교의 전반적인 분위기인 修行次第說과는 다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止․觀이라는 말이 정착되기 전의 그 내용이 되는 수행체계의 전반적인 맥락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후대에 부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와 대응되는 하나 또는 두 개의 漢譯 阿含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이 쉽게 단정할 수 없게 한다.

이처럼 Pāli Nikāya와 한역 阿含의 초기불교경전을 통 털어서 모두 4개 또는 5개의 경에 나타나고 있는 문제의 경구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Nikāya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데 다음과 같다. 먼저 ‘觀은 성취(lābhī)했으나 止를 성취하지 못한 경우’에 대해 Aṅguttara Nikāya에서만 모두 나타난다. 두 번은 같은 Catukka Nipāta에 그리고 한번은 Dasaka Nipāta에 나타난다. 그리고 Dasaka Nipāta는 한역의 中阿含ꡔ自觀心經ꡕ와 내용적으로 일치한다. 다음으로 ‘止․觀을 동시에 함께 닦을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경전 또한 Aṅguttara Nikāya이다. Catukka Nipāta의 Paṭipada Vagga이고 한역 아함에 있어서는 그와 비슷한 내용의 雜阿含ꡔ同法經ꡕ이다. “止觀俱修”라는 말과 “yuganaddhaṁ bhāveti”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렇게 觀→止를 말하는 한역과 Nikāya는 모두 4 또는 5회 그리고 止⇄觀을 말하는 경전은 한역과 Nikāya에 있어 각각 한 군데씩 발견될 뿐이다. 그런데 같은 이러한 문제의 경구와 경전을 담고 있는 Pāli Nikāya를 다른 Nikāya인 초기경전과 후대의 논서류와의 비교를 통해 볼 때, 이러한 경전들이 초기경전에 편입된 시기는 결코 이르다고 볼 수가 없다.

이처럼 觀→止나 止⇄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典據는 이상하게도 모두 후대 논서류인 Puggalapaññatti38)Paṭisambhidāmagga39)와 겹쳐 있거나 대응되는 經句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Puggalapaññatti는 論藏에 속하고 Paṭisambhidāmagga는 Khuddaka Nikāya에 속해 있지만 사실은 논서의 하나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그 성립시기도 앞의 論藏 보다도 훨씬 늦다. 이러한 사실이 시사하는 것은 觀→止나 止⇄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초기불교의 거의 모든 경구와 경전은 이와 같은 논서류의 성립시기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모두 후대의 전승과정에서 첨가되거나 改作되어 초기경전에 編入되었을 높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Aṅguttara Nikāya에 속해 있는 이러한 모든 문제의 Nipāta들은 모두 후대 論書인 Puggalapaññatti와 서로 많은 부분에 있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리고 Paṭipadā Vagga40)에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의 경설 또한 Khuddaka Nikāya에 속해 있는 Paṭisambhidāmagga와 겹쳐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이 같은 문제의 Nipāta들이 Aṅguttara Nikāya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늦게 성립 또는 첨가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부파불교의 일반적 특징인 도식적인 설명 방식과도 서로 통해 있다는 점이다.

남은 문제는 한역 中阿含의 대응경이다. 공교롭게도 한역 中阿含의 대응경에 내용이 일치하여 나온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같은 漢譯 中阿含에 觀에 대한 수식어로서 最上慧觀法이라는 말이 쓰인 것을 단서로 이 경 또한 Aṅguttara Nikāya의 성립시기와 관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역 最上慧觀法이라는 Vipassanā가 adipaññādhammavipassanā라는 특별한 복합어로 쓰인 말에 정확히 대응되는 번역이다. 그리고 이 말은 문제의 Aṅguttara Nikāya의 두 Nipāta외에는 빠알리 律藏이나 (Puggalapaññatti를 제외한) 論藏 그리고 Dīgha․Majjhima Saṁyutta와 (앞에서 검토한) Khuddaka Nikāya와 같은 經藏,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자면, 빠알리로된 초기불교문헌 가운데 오로지 Aṅguttara Nikāya에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漢譯 四阿含에 있어서도 문제의 中阿含을 제외하고는 最上慧觀法이라는 말이 다른 어떤 阿含에서도 사용된 예가 없다. 대신에 Puggalapaññatti41)Paṭisambhidāmagga42)에서만 나타난다. 이 같은 觀이라는 용어가 兩者간에 새롭게 복합어로 사용된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Aṅguttara Nikāya와 이러한 두 論書들이 서로간에 많은 부분에서 중복되는 내용 가운데에서도 증명된다. 그리고 adipaññādhammavipassanā라는 말과 관련한 觀→止나 止⇄觀도 그 가운데 한 한가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말할 것 없이 초기불교가 정착된 후에도 한참 뒤에 쓰여진 용어로 볼 수 있다. 따라서 止․觀 次第的 입장에 반한 觀→止나 止⇄觀의 가능성을 말하는 문제의 이러한 경들은 비록 초기경전의 범위 속에 포함되어있다 하더라도, 사실은 모두 교법이나 수행체계를 번쇄하게 분류하여 도식화시키기를 좋아했던 부파불교 시대의 발상이었고 그리고 뒤늦은 시기에 경전에 편입되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설령 그것이 맞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제까지의 경우처럼 몇 개의 경전을 근거로 초기불교의 次第的 수행체계의 전체적인 맥락을 뒤 흔들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못한다.

Ⅲ. 마치는 말

이전에 拙稿에 의해 초기불교에서 Samatha-Vipassanā라는 말의 쓰임새는 “止는 四禪을 通稱하는 용어로, 觀은 四念處를 通稱하는 평이한 말43)이며 “止없이 觀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觀의 쓰임새가 해이하게 사용된 예에 지나지 않는다44)라고 보았고, 이를 초기경전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교리적인 측면을 들어 충분히 검토하였다. 그리고 “慧를 이루는 觀에서 거꾸로 定의 止로 간다는 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를 낳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45)라는 표현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이렇듯 止․觀으로 압축되는 불교수행의 핵은 기본적으로 三學의 엄격한 차제구조에 놓여있다. 즉, 戒의 완성이 곧 定의 시작이며, 定의 완성이 곧 慧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戒는 定에 실려가고, 定은 다시 慧에 실려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3개가 필요충분조건으로 갖추어질 때 涅槃․解脫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의미의 초기불교 수행론이며 수행체계이다. 마찬가지로 止․觀의 관계도 정확히 이러한 구도 속에 놓여 있다. 止없이 觀부터 닦는다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止․觀을 - 마치 수레의 양 바퀴처럼, 새의 양 날개처럼, 동전의 양면처럼 - 동시에 닦을 수 있는 성격이라고 하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止觀具足이니 止觀兼修니 또는 止觀雙修라는 말도 사실은 ‘止가 실린 觀’ 또는 ‘定의 완성으로서 慧’라는 의미의 止觀具足이며 그로서 止觀兼修나 止觀雙修하여 열반․해탈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 본래 의미일 것이다. 다시 말해, 止의 四禪에서 발현되고 완성되는 ‘수동적 주의 집중의 상태’를 말하는 ‘sati의 확립 또는 완성(satipaṭṭhāṇa)'의 단계에 가서야 만이 비로소 Vipassanā가 가능하다.46) 그리고 이는 초기불교 전체에 흐르고 있는 근본적인 의미의 止→觀의 次第 修行論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통해 볼 때 극히 한정적으로 觀→止나 止⇄觀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몇 개의 경구가 초기불교의 근본적인 또는 전체적인 맥락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다시 止․觀이라는 전문 용어가 언제부터 한 쌍으로 쓰여지기 시작했는가하는 하는 점과 함께 풀어내야 할 문제이기에 本考는 초기불교 부파들의 경전분석을 통해 止․觀이라는 전문 용어가 한 쌍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초기불교에서도 비교적 늦은 부파 시대였다는 점을 , 그리고 이렇게 한정된 초기불교 경전에서 觀→止나 止⇄觀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지만, 사실은 부파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이러한 經句들이 후대 첨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같은 몇 개의 경전만을 가지고 초기불교의 전체적인 맥락인 止․觀 次第論과 다른 觀→止나 止⇄觀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으로 곧 바로 받아들이는 무리라는 것이다.


(주제어 : 止觀, Samatha, Vipassanā, 如實知見, 最上慧觀法, 四念處, 三學, 四禪, 般若, 수동적 주의집중)


<略號>

빠알리경전은 Pāli Text Society 본에 의거

A. : Aṅguttara Nikāya

D. : Dīgha Nikāya

M. : Majjhima Nikāya

S. : Saṁyutta Nikāya



A Critique of the Technical Terms and Concept of Meditative Practice : on Samatha and Vipassanā

Cho, Joon-ho

Since discussion of 'Problem of Samatha and Vipassanā in Early Buddhism', the present Journal of Korean Seon Studies, Dec. 2000(vol.Ⅰ), there have been arisen controversies on some points. Among them the crucial point is that in the beginning of practice, a meditator would develop only vipassanā preceded by samatha, but not samatha preceded by vipassanā, and samatha and vipassanā not coupled together. Definitely, my argument is contrary to the traditional understanding of samatha and vipassanā. Because there have been traditionally said that the all three modes are possible in the beginning of practice. The first is that a meditator would develop vipassanā preceded by samatha, the second, a meditator would develop samatha preceded by vipassanā and the last, a meditator would develop samatha and vipassanā coupled together. However, the present writer argues that the combination of samatha and vipassanā as the technical terms are added into late layers of early Buddhist texts. In parallel with the last two modes are also late addition. For the purpose, the present work attempts to analyze the technical terms and concept of samatha and vipassanā in early Pāli texts correspond to Chinese Āgamas. All comparative accounts show that the combination of samatha and vipassanā is to have interval times among various chronical layers which belong to different period, within same Nikāyas or different Nikāyas. Moreover, the last two modes appear almost in Aṅguttara Nikāya. Modern scholarship had found the Nikāya is later than other three or four Nikāyas. In conclusion, the possibilities of last two modes are the final outcome of a gradual growth, and are almost probably added from a period of sectarian or Abhidhamma Buddhism or after maturity of Nikāya composition.


1)* 본 논문의 완성을 위해 논평해준 고려대장경 연구소의 김재성에 감사를 드린다. 본 고의 주장에 있어 몇 가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빠알리 경전의 전거를 들어 더 나은 설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을 감안하여 분명한 설명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하지만 김재성을 포함한 다른 연구가들과 그 동안의 논의를 통해 도달한 결론은 지․관 이해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는 어느 문헌을 중심으로 어떻게 보느냐하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분히 다른 연구가들이 후대의 논서나 주석서를 통한 초기경전의 지․관 이해인 반면 본인은 초기경전 안에서조차 시기적으로 다른 층을 전재하는 연대기적 접근 때문에 서로간에 간격이 있다고 생각된다.

 


2)** 동국대 강사

 


***3)S.Ⅳ. 78.: “asamāhite citte dhammā na pātubhavanti”.

 


4) 이는 최근에 천태 지관 사상의 배경을 연구하기 위해 초기불교에서부터 초기불교의 부파 그리고 대승과 대승의 부파에 나타난 지관사상을 개괄적으로 잘 정리하고 있는 한 논문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오지연, ꡔ천태지관이란 무엇인가ꡕ, 서울 : 연기사, 1999).

 


5) 임승택과 황미향의 논평문과 보조사상 연구원 제39차 학술발표회(ꡔ보조사상ꡕ 제16집 예정)의 임승택, 「사띠(sati)의 의미와 쓰임에 관한 고찰」과 인경스님, 「初期佛敎에서의 止觀과 四禪」.

 


6) ꡔ불교수행론 연구(Ⅰ)ꡕ 보조사상연구원 제39차 학술발표회(ꡔ보조사상ꡕ제 16 집에 예정) p.27.

 


7) 이러한 점에서 논자가 이용하는 자료(전산화된 경전)의 기술적인 측면이나 이용자마다의 운용 능력에 따라 결과는 달리 나올 수 있다. 본고에서 이러한 오차를 최소화하려고 노력을 하였으나 앞으로도 계속해서 예외적인 경우가 발견될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 현재의 분석은 논자의 자료 이용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본고의 止․觀의 용례에 대한 비교분석은 확정적인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본고의 발표 시 도움말을 준 한 고려대장경 연구소의 김재성은 Khuddaka Nikāya의 Theragāthā(p. 60)에서 止․觀이 한쌍으로 쓰인 용례에 대해 알려주어 새롭게 첨가하게 되었다. 매우 귀중한 정보로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에 따른 약간의 수정도 이루어졌다.

 


8) R. C. Childers, Dictionary of the Pali Language, 1875(rpt. New Delhi India : Cosmo Publication, 1979) p.565.

 


9) D. Andersen, A Pali Glossary, 1901(rpt. New Delhi India : Award Publishing House, 1979) vol.Ⅱ. p.232.

 


10) “Pāli Tipiṭka as the Source of Vipassana”, Vipassanā Its Relevance to the Present World, Maharashtra, India : Vipassana Research Institute, 1994, p.81.

 


11) 앞의 책.

 


12) A.Ⅲ. 230-236 ; S. Ⅴ. 542.

 


13) 이는 天台大師의 「六妙法門」에서 觀을 정의하는데 있어 “心眼開明 撤見…”이라는 표현과 결코 다르지 않다.

 


14) 長阿含의 제13권 ꡔ阿摩晝經ꡕ; D.Ⅰ.84 ; M.Ⅰ. 279 ; Ⅱ.22 ; A.Ⅰ.9.

 


15) A.Ⅰ.9.

 


16) 송대의 ꡔ坐禪儀ꡕ에 念起卽覺 覺之卽失이나 최근의 Vipassana에 관한 서적으로 ꡔ보면 사라진다ꡕ는 서명이 바로 이러한 수준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17) “比丘比丘尼以止觀爲車 舍梨子 若比丘比丘尼成就止觀以爲車者”.

 


18) “修習於止 多修習已 當何所成 修習於觀 多修習已 當何所成 上座答言 尊者阿難 修習於止 終成於觀 修習觀已 亦成於止 謂聖弟子止觀俱修”.

 


19) S. Ⅳ. 294

 


20) 졸고의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 ꡔ한국선학ꡕ 제1호 pp.345-350.

 


21) “samatho ca vipassanāca. Anekadhātupaṭivedhāya saṁvattissanti“.

 


22) S.Ⅰ. 170 : “ujuṁ kāyam paṇidhā ya parimukhaṁ satim upaṭṭhapetva.”.

 


23) 아마 慧解脫(paññāvimutti)에 대한 다른 한역일 것이다.

 


24) A.Ⅰ. 61.

 


25) “Ākaṅkheyya ce bhikkhave bhikkhu 'sabrahmacārīnaṁ piyo cassaṁ manāpo garu bhāvanīyo cā'ti sīlesvevassa paripūrakārī ajjhattaṁ cetosamathamanuyutto anirākatajjhāno vipassanāya samannāgato brūhetā suññāgārānaṁ”.

 


26) “所謂止觀 此二法修習多修習 得知界果 覺了於界 知種種界 覺種種界”.

 


27) “Samatho ca vipassanā ca, ime dhammā abhiññā bhāvetobbā”.

 


28) 하지만 正자는 板本이 전해오면서 止에 대한 誤字일 가능성이 있다.

 


29) 하지만 앞의 경우처럼 止觀에 대한 板本상의 誤字일 가능성이 있다.

 


30) 바로 잇따라 Samatha SuttaVipassanā Sutta도 내용상 반복되어 나타난다.

 


31) A. Ⅱ. 92-95.

 


32) A. Ⅱ. 157.

 


33) Ⅱ. 92

 


34) p.60의 v. 584 ; 주) 5에서 밝혔듯이 이는 본고에 대한 논평자께서 알려준 전거이다.

 


35) B. C. Law, A History of Pāli Literature, Delhi India(rpt. Delhi India : Indological Book House, 1983), vol.Ⅰ. p.40 ; K.R.Norman, Pāli Literature, Otto Harrassowitz․Wiesbaden, 1983, p.73.

 


36) Itivuttaka, Dukanipāto Ⅱ. 8.

 


37) 본 ꡔ韓國禪學ꡕ의 제1호의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와 보조사상연구원 제39차 학술발표회(ꡔ보조사상ꡕ 제16집 예정)의 「Vipassanā의 인식론적 근거」.

 


38) 1장 9절.

 


39) vol.Ⅱ. 92.

 


40) A. Ⅱ. 157.

 


41) pp.7-8(Ⅱ.18), pp.61-62(Ⅳ.26).

 


42) Mahāvagga에 빈번하게 나타난다.

 


43) 앞의 ꡔ韓國禪學ꡕ, p.323.

 


44) 앞의 보조사상연구원 제39차 학술발표회(ꡔ보조사상ꡕ 제16집 예정). p.33.

 


45) 앞의 졸고, p.35.

 


46) 이는 ꡔ한국선학ꡕ제 1호의 졸고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이래 다른 논문에서도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로서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본고를 논평해 준 김재성은 보조사상연구원에 발표한 졸고「Vipassanā의 인식론적 근거」를 인용하면서 구체적인 경증을 들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Majjhima Nikāya의 Anupada Sutta(M. III, 25-9)에서 붓다에 의해 사리불이 15일만에 아라한이 되는 것을 次第의 觀法(anupadadhammavipassanā)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여기서 sati는 초선의 단계에서부터 다른 심적인 요소들과 함께 작용을 하고 있는 것으로 4선정과 그 이후의 4무색 가운데 無所有處까지 觸(phasso), 受(vedanā), 想(saññā), 思(cetanā), 心(citta), 欲(chanda), 信解(adhimokkho), 精進(viriya), 念(sati), 捨(upekhā), 思惟(manasikāra)가 언급된다. 따라서 初禪에서부터 念(sati)이 있어 Vipassanā는 四禪이후에야 가능한 수행이 아니라, 초선에서부터 가능한 수행법이라는 것이다. 사실 초기경전의 범위로 보자면 초선에서부터 念(sati)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여길 만한 몇 개의 경전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이 경전만을 한정하여 설명한다면 anupadadhammavipassanā라는 말에서 이미 보여주듯이 vipassanā를 중심으로 四禪과 四無色이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 내에서도 논평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선정체험에 수반되는 심적요소”로서 대상화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四禪의 止가 확립되고 난 후에 생멸하는 관찰의 대상으로 四禪과 四無色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四禪의 각 단계에서 보여주는 지분들과 서로 겹쳐 있거나 상치되어 있는 경우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念(sati)이 第三禪 이후 불필요하게 중복되는 것은 차지하고서라도 捨(upekhā)가 止수행의 단계인 四禪 가운데 初禪이나 第二禪과 함께 한다는 것은 내용상에 있어 어불성설이다. 이미 捨는 不苦不樂으로 初禪이나 第二禪에서부터 가능한 상태가 아니고 第二禪 이후라야 성립할 수 있는 情緖상의 문제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念이나 捨가 第三禪이나 第四禪 이전에 初禪이나 第二禪에 이미 있다면 굳이 四禪이 네 발전적인 단계로 구분되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에 대한 문제는 이미 「Vipassanā의 인식론적 근거」에서도 후대 논서들과 관련하여 보충 설명이 되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경전의 전체적인 맥락과 함께 더 설명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더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같이 初禪에서부터 念을 말하고 있는 몇 개의 초기경전의 성격을 고려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Anupada Sutta만 하더라도 사리불과 관련하여 경 자체가 후대의 아비달마 논서 성격을 보여주는 사실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I. B. Horner의 지적처럼 이 경은 DhammasanganiPaṭisambhidāmagga와 같은 논서들과 관련이 깊은 경이다.(PTS의 The Collection of The Middle Length Sayings, vol. Ⅲ. xiv) 이 경에서 이야기되는 수행상의 심리 내용의 분석이 이 들 논서에서 집중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비교적 다른 초기경전보다는 그 성립시기가 늦으며 논장의 성립 시기와 가까운 비교적 후대에 성립된 경으로 볼 수 있다. 순수한 빠알리 전통의 부파적 경전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것은 논서들과 관련성은 물론 이 경이 다른 경과는 달리 한역 대응경이 없다는 것이다.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1319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