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관상법의 형성과정

수선님 2019. 8. 11. 11:58

觀想法의 형성 과정

차 상 엽1)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초기대승불전 이전의 念佛

1.『增壹阿含經』의 念佛(buddhānusmṛti)

2.『坐禪三昧經』의 念佛三昧

Ⅲ. 초기대승불전의 관상법

1.『팔천송반야경』의 一行三昧

2.『般舟三昧經』과 般舟三昧

3.『수습차제』의 관상법

Ⅳ. 나오는 말

Ⅰ. 들어가는 말

티벳 불교 현교(顯敎)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람림(Lam rim, 道次第)의 체계에 입각한 삼사도(skyes bu gsum po, 三士道)의 수행체계이다.2) 출리심, 보리심, 공성에 대한 명확한 지혜라는 이 세 가지가 완벽하게 구비되었을 때, 유가행자는 금강승(Vajrayāna, 金剛乘)의 길로 나아간다. 2006년 1월 3일부터 2주간 달라이라마 14세의 칼라차크라(kālacakra, 時輪) 법회가 남인도 아마라바티(Amaravathi)에서 봉행되었다. 이 때, 티벳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 법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밀교 수행의 핵심은 삼밀수행법이며, 그 중에서도 관상법(visualization, 觀想法)이3) 그 중심이다.

관상법과 관련한 국내의 중요한 연구 성과로 金星喆을 언급할 수 있다. 인도신화와 종교의 ‘효력성’에 주목한 김성철은 인도 고유의 신화체계 중에서 특히 대승신화와 관상법을 독특한 안목에서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자비관(maitrī)’, ‘부정관(aśubha)’과 ‘예비수행(sngon 'gros)’, ‘생기차제(skyed rim)’, ‘원만차제(rdzogs rim)’의 관상법을 현대의 사이버 시대와 배대해서 ‘가상수행(假想修行)’이라는 용어로 새롭게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초기불전의 수행체계 중 ‘자비관’과 ‘부정관’ 등도 관상법 체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이것은 운동선수들의 ‘이미지 트레이닝’과 흡사하다고 밝히고 있다.4)

국외에서는 폴 해리슨을 언급할 수 있다. 폴 해리슨은 대승불교운동의 두 가지 이질적인 흐름의 긴장 관계를『반주삼매경』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두 가지 이질적인 흐름이란 통찰을 통한 무아(無我)의 전통으로 대변될 수 있는 반야의 완성(Prajjñāpāramitā)과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는 구원(救援)의 전통이다. 이러한 두 가지 이질적인 전통의 긴장관계가『반주삼매경』을 통해 새롭게 해석된다는 것이다. 즉 공성(Śūnyatā, 空性)의 관점에서 대승적인 염불(buddhānusmṛti, 念佛)을 해석한 것이 그 실례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5) 폴 해리슨의 이 논문은 관상법의 기원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붓다에 대한 마음지킴[염불]의 방식이 오늘날 티벳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금강살타 관상법과 천수천안관자재 관상법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반주삼매경』에는 구체적인 관상법의 방식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본 고는 기존의 연구업적을 바탕으로 티벳불교의 수행체계 내에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관상법의 형성 과정을 인도불교 텍스트 내에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Ⅱ. 초기대승불전 이전의 念

1.『增壹阿含經』의 念(buddhānusmṛti)

오늘날 한국과 일본에서 대중적으로 보급된 정토수행체계의 특징이 염불(buddhānusmṛti)이다. 염불(buddānusmṛti)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붓다(buddha)에 대한 반복적인(anu) 마음지킴(smṛti)이다.6) 이러한 염불이 초기불전에도 언급이 되고 있을까?

『증일아함경』제34권「칠일품(七日品)」에서는, 반복적인 마음지킴(anusmṛti) 혹은 마음지킴(smṛti)의 대상으로 여섯 가지와 열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여섯 가지 대상은 佛, 法, 僧7), 戒, 施, 天이고, 열 가지 대상으로 앞의 여섯 가지에 安般, 死, 身, 休息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혹은 열 가지에 대해 믿음이 끊이지 않고[信心不絶], 마음을 반복적으로 지킨다면, 그 공덕이 헤아릴 수 없음을 붓다는 아난에게 설하고 있다. 그리고 바이샬리의 장자 毘羅先(Vīrasena)은 7일 뒤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운명이었지만, 붓다의 교단에 출가한 후,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열 가지를 대상으로 한결 같이 마음지킴을 지녔기 때문에 죽어서도 천상에 태어났다고 한다.8)

『증일아함경』제34권「칠일품」에는 열 가지 마음지킴의 대상 중 하나로 붓다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증일아함경』제2권의「광연품(廣演品)」에 염불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내용이 언급된다.9)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습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의 법[一法]을 수행하고 하나의 법을 널리 펴야할 것이다. 하나의 법을 수행하면 명예가 있게 되며, 큰 과보를 성취하여, 온갖 善이 널리 모이며, 감로의 맛을 얻어, 無爲處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곧 신통[력]을 얻고, 온갖 산란한 생각(亂想)을 제거하고, 沙門果를 체득하고, 스스로 열반에 이를 것이다. 어떤 것을 하나의 법이라 하는가? 붓다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지킴[念佛]이다.” … “만약 어떤 비구가 몸을 바르게 가지고 뜻을 바르게 하여 결가부좌하고 앉아, 생각을 매어 앞에 두고 다른 생각 없이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한다. ①여래의 형태[形]를 관찰[觀]하되 잠시도 눈을 떼는 일이 없게 하고, 눈을 떼지 않고 ②여래의 공덕을 생각한다. 여래의 본체는 금강(金剛)으로 이루어졌고 十力을 원만하게 갖추었으며, 네 가지 두려움이 없어[四無所畏] 대중들 속에서 勇健하다. 여래의 얼굴[顔貌]은 단정하기 짝이 없어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戒의 덕을 성취한 것이 마치 金剛과 같아서 부술 수 없고 티가 없이 청정하기는 마치 유리와 같다. 또 여래의 三昧는 일찍 줄어진 일이 없다. 이미 쉬고 영원히 고요하여 다른 생각이 전혀 없다. 교만하고 사납던 모든 마음은 편안하고 고요하며 욕심이 없게 되었고,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과 망설임과 교만하게 구는 모든 번뇌도 다 없어졌다. 여래의 지혜로운 몸[如來慧身]은 그 지혜가 끝도 없고 밑도 없으며 걸리는 데도 없다. 여래의 몸[如來身]은 해탈을 성취하여 모든 세계[諸趣]가 이미 다해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어져서 ‘나는 다시 生死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일이 없다. 여래의 몸은 해탈을 아는 인식의 성(城)을 지나고 다른 사람의 근기[根]를 알아 제도할 것과 제도하지 못할 것을 구분하여 그에 따라 호응하시며, 여기에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고 두루두루 오가면서 生死의 경계를 해탈하는 이와 해탈하지 못하는 이를 모두 다 아신다. 이것이 이른바 '붓다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지킴[念佛]을 수행하면, 명예가 있게 되고, 큰 과보를 성취하며, 온갖 선이 널리 모이고 감로의 맛을 얻어 無爲處에 이르게 되며,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산란한 생각을 없애며, 사문과를 체득하고 스스로 열반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너희들이 항상 사유하면서 붓다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지킴을 여의지 않으면 곧 이런 온갖 훌륭한 공덕을 얻을 것이다. 이와 같으니 비구들아,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비구가 붓다에 대한 마음지킴[염불]을 수행한다면, 온갖 善이 널리 모이며, 감로의 맛을 얻어, 無爲處에 이르며, 신통력을 얻고, 온갖 산란한 생각을 제거하고, 沙門果를 체득하고, 스스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내용이『증일아함경』에 존재한다.10) 여기서 수행자의 붓다에 대한 마음지킴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인용문 중 ①여래의 형태[形]와 ②여래의 공덕이 그것이다.

여기서 여래의 형태란 구체적으로 붓다의 형상이 새겨진 조각이나 그림-즉, 구체적인 像-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닌지 명백하지 않다.11) 더욱이 직접적인 형상을 눈으로 보면서 의식을 집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가부좌를 행한 후 마음 속에 띄워진 여래의 형태(혹은 특징)에 의식을 집중적으로 모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붓다에 대한 마음지킴이 결국 열반으로 이끈다는 사실은 生天의 과보를 얻은 毘羅先 장자의 예와 대조된다.

그리고 여래의 공덕이란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특성들이다. 즉, 금강으로 이루어졌다는 여래의 본체와 십력, 사무소외, 여래의 얼굴, 여래의 계, 삼매, 지혜의 몸, 해탈, 해탈지견 등이다. 이러한 여래의 특성에 대해 수행자는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표1>『증일아함경』의 염불과 관련한 구조

七日品

廣演品

설법 대상

특정한 대상으로서의 毘羅先 장자

모든 比丘

의 대상

여섯 가지 대상일 경우는 , , , , , , (열 가지 대상일 경우는 安般, , , 休息까지 포함)

오직 (, 공덕)

수행의 과보

生天

涅槃

『증일아함경』「七日品」의 비라선 장자는 열 가지 대상에 대한 마음지킴으로 인해 生天의 과보를 받는다. 하지만 대중부에 귀속될 수 있는『증일아함경』의「廣演品」에서 대승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법 즉, 붓다에 대한 마음지킴[念佛]이 가장 현저하게 강조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비구들에게 설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붓다에 대한 마음지킴이 열반의 길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리고「七日品」은 비라선 장자라는 특정한 인물에 대한 설정에서 「廣演品」에서는 비구들로 확대하여서 붓다에 대한 마음지킴을 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12)

2.『坐禪三昧經』의 念佛三昧

염불관은 붓다를 관상하는 순서를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으며, 주로 소승전적에 속하는 禪觀經典 계통에서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염불관이 명확하게 설해져 있는 것은 鳩摩羅什 번역의 禪觀經典이다. 선관경전 중에서 염불관을 설하고 있는 것은『坐禪三昧經』,『思惟略要法』,『禪秘要法經』의 3部이다. 이 3부 중 구마라집의 번역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은『좌선삼매경』뿐이다. 이 경전은 카슈미르 有部系瑜伽行師의 禪觀의 내용을 전하고 있다.13) 상하 2권으로 이루어진 이 경전은, 상권은 聲聞禪에 대해서 설하고 있으며, 하권은 菩薩禪으로서 觀佛法을 설하고 있다.『좌선삼매경』상권에 五門禪 중 염불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14)

다섯 번째 법문은 等分을 다스리는 수행이다. 중죄를 지은 사람은 佛을 찾아야 한다.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一心으로 念佛三昧를 가르쳐야 한다. 염불삼매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처음 수습을 행하는 사람과 이미 수습을 행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오랫동안 수습을 행하고 있는 사람이다. 만일 처음 수습을 행하는 사람이라면, 佛像이 있는 곳에 이르게 하거나 스스로 가게 하여 불상의 상호를 잘 관찰하게 한다. 각각의 모습이 명료해지면 일심으로 지니고 고요한 곳으로 돌아가 마음의 눈으로 불상을 관찰하여 마음이 변하지 않게 하고, 생각을 묶어 불상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한다. 다른 생각이 그것을 수용하면 항상 불상에 머물게 한다. … 이 때 문득 마음의 눈을 얻어 불상의 모습과 光明을 보게될 것이다. 눈에 보인 그대로이며, 다름이 없다. 이와 같이 마음이 머물면 이것을 처음 수습을 행하는 사람의 사유라고 이름한다. 이 때 다시 생각해서 ‘이것은 누구의 모습인가? 바로 과거 석가모니불의 모습이다. 내 이제 부처님의 형상을 보았듯이, 형상도 오지 않고 나 역시 가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마음의 이미지[心想]로 過去佛을 본다[見]. … 이와 같이 산란하지 않으면, 한 분의 佛 두 분의 佛 내지 시방의 헤아릴 수 없는 세계에 있는 諸佛의 色身을 볼 수 있다. 마음의 이미지 때문에 모두 그것을 볼 수 있다. 이미 佛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설법의 말씀을 들었다. 혹 스스로 묻기를 청한다면 佛은 설법을 하여 여러 가지 의심의 그물을 풀어 주신다.

『좌선삼매경』을 통해서 重罪를 지은 사람은 五門禪 중 여타의 수행법이 아니라 염불을 통해 수습해야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염불을 처음 행하는 이는 木像이나 石像 등이 있는 佛像으로 가서, 불상의 상호를 면밀하게 관찰해야만 한다. 그리고 고요한 곳[閑居靜處]으로 돌아와 붓다의 상호를 觀想한다. 그러면 붓다의 형상과 光明을 여실하게 보게 된다. 그리고 과거불인 석가모니가 눈 앞에 현전하게 되며, 32상 80종호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한 분의 佛 두 분의 佛 내지 시방의 헤아릴 수 없는 세계에 있는 諸佛의 色身을 마음의 형상, 즉 이미지[心想]로 관찰한다.15) 이러한 염불을 오랫동안 수행하는 이만이 佛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설법을 듣고, 혹은 스스로 묻기를 청한다면 佛은 설법을 하여 여러 가지 의심을 풀어준다. 이러한 것은 모두 삼매 체험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단순한 신화의 맥락에서 언급되는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결국『증일아함경』의 내용과 달리『좌선삼매경』의 염불삼매는 명백한 佛像을 전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텍스트에 나타나는 염불삼매는 시대적으로 불상 조성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염불삼매는 붓다에 대한 觀想을 통해, 붓다의 형상과 光明을 여실하게 보게 되는 것이며, 신비주의적이고 긍정적인 삼매체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타의 佛이 아니라, 과거의 붓다인 석가모니불을 삼매 체험 속에서 명백하게 본다는 것은 붓다의 사후 본받을만한 대상에서 종교의 귀의 대상으로 변경된 대승적인 요소의 반영일 것이다.16) 결국 소승계통의 선관경전에도 이미 대승적인 선정 체험의 요소가 함의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그때 수행자가 비록 일심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아직 선정의 힘을 완성하지 못했으므로 오히려 욕계의 번뇌 때문에 혼란하게 된다.17)

이러한 염불관은 욕계의 번뇌에 묶여있는 수행자의 삼매이며, 그것에 의해 얻을 수 있는 見佛의 체험도 욕계의 禪定에 지나지 않는다. 관법으로서의 염불관은 욕계의 선정임을 알 수 있으며, 아직 완벽한 선정상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욕계의 번뇌를 끊기 위해서는 初禪에서 四禪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염불관 이후에 四無色定․四無量心․五神通․四念處觀․四諦十六行相觀․四善根位․無漏十六心 및 見道에 들어가는 순서와 四向四果를 얻고 나서, 최후에 阿羅漢의 究竟位에 이르기까지 해탈열반을 얻는 과정이 순차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有部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18)

그리고『思惟略要法』에는 초선에 들기 위한 수행법으로 五門禪을 제시하고 있으며, 염불삼매도 초선에 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언급하고 있다.

무릇 初禪을 구함에는 먼저 여러 가지 觀을 배운다. 혹은 사무량심을 행하고, 혹은 부정을 관하고, 혹은 인연을 관하고, 혹은 염불삼매와 安那般那를, 그런 연후에 초선에 드는 것은 쉽다.19)

그리고『思惟略要法』에는 觀佛三昧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땅히 좋은 像을 觀하기를 참 부처님[眞佛]과 같이 하라. 먼저 肉髻와 眉間과 白毫로부터 밑으로 내려가 발에 이르고 발에서 다시 육계에 이른다. 이와 같이 모습을 분명하게 취하여 고요한 곳으로 돌아가 눈을 감고 사유하여 마음을 像에 묶어두어 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만약 그 밖의 것을 생각하면 이를 거두어 들여라. 마음의 눈으로 관찰하여 뜻과 같이 볼 수 있게 되면 이를 觀像의 定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마땅히 이와 같은 생각을 지어야 한다. ‘나는 아직 가지 않았고, 像도 또한 오지 않았으며 볼 수 있는 것은 心定想에 머물기 때문이다’고. 그러한 다음에 나아가 生身을 관하여 곧 이를 볼 수 있게 되어 얼굴을 마주 대한 것과 다름이 없다.20)

불상을 관할 때 마치 내 앞에 참 부처님이 계신 듯 믿음(śraddhā)을 가지고 관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불상의 위에서 밑으로 그리고 밑에서 위로 관찰한 후에 분명하게 모습을 취한 후에 고요한 곳에 가서 사유하는 방식은『좌선삼매경』의 방식과 동일한 맥락임을 알 수 있다. 이것도 역시 불상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삼매 체험임을 알 수 있다.

수행자가 心定想 속에서 生身을 觀하여 얼굴을 마주 대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구절은 마치『반주삼매경』에 언급되는 반주삼매의 특성과 아주 흡사하다.21)

Ⅲ. 초기대승불전의 관상법

1.『팔천송반야경』의 一行三昧

『8천송반야경(Aṣṭasāhasrikāprajñāpāramitā)』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제시한다.

고요한 곳에 살며 산만한 마음을 버리고 사물들의 현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붓다에게 정신을 집중하고 붓다의 이름을 한 마음으로 염송해야 한다. 수행자들은 몸을 똑바로 세우고 붓다와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고 계속 붓다를 명상해야 한다. 만일 매 순간마다 방해받지 않고 붓다에게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면, 매 순간마다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붓다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22)

기존의 텍스트가 과거의 불인 석가모니불을 삼매 체험 속에서 본 것에 반해,『8천송반야경』은 과거․현재․미래의 불을 삼매 체험 속에서 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一佛 二佛 등을 확대해서 헤아릴 수 없는 佛을 본다는 선정 체험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붓다의 이름을 일심으로 암송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이전에 없었던 내용의 새로운 첨가라고 할 수 있다.

수보리여, 그리고 더 나아가 보살마하살이 비록 꿈속에 있는 상태일지라도, 허공으로 솟구쳐서 중생들을 위하여 교법을 설하고 그 양팔을 벌린 길이의 빛을 觀想化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다른 세상들에서 붓다로서의 의무를 하고 교법을 설하는 비구들을 마술로서 만들어낸다. 이러한 방식으로 비록 꿈속에 있는 상태일지라도 보살마하살은 관상한다. 이 또한 불퇴전의 보살 마하살이 지니는 불퇴전의 특징이라고 알아야만 한다.23)

그리고 불퇴전 보살의 특징과 꿈, 그리고 보살마하살의 관상법을 연계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실제 수행에서 뿐만 아니라, 불퇴전의 보살은 꿈 속에서도 구체적인 관상을 행한다는 사실은 이전의 체계에서 볼 수 없었던 요소이다. 특히 소승계열의 선관경전인『坐禪三昧經』과『思惟略要法』에 나타난 염불삼매가 초선에 들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사실과 명백하게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수보리여, 그리고 더 나아가 보살마하살이 비록 꿈속에 있는 상태일지라도, 수백이〔모인〕집회, 수천이〔모인〕집회에서 수 만의 俱胝那由他(1000만×100만)가〔모인〕집회의 가운데에 있어 원형의 높은 땅에 앉아서 비구승가에 의해 둘러싸이고 보살승가의 앞에서 여래·아라한·정등각자로서 교법을 설하고 있는 자신을 본다면, 수보리여, 이 또한 불퇴전의 보살 마하살(avinivartanīyasya bodhisattvasya mahāsattva)이 지니는 불퇴전의 특징이라고 알아야만 한다.24)

비록 꿈속일지라도, 불퇴전보살은 여래․아라한․정등각자로서 비구승가와 보살승가의 앞에서 교법을 설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것은 마치 티벳불교의 생기차제에 나오는 이담과 수행자를 하나로 관상하는 방식과 흡사하다.

2.『般舟三昧經』과 般舟三昧

『般舟三昧經(Pratyutpanna-buddha-sammukhāvasthita-samādhi-sūtra)』은 기원을 전후로 1세기 정도에 편찬되었으며, 이 경전은 정토 경전의 선구로서 주목할 만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赤沼智善은 평가하고 있다.25)『반주삼매경』은 문헌적으로 가장 먼저 아미타불과 아미타불의 불국토, 즉 서방정토를 언급한 경전이다.26) 특히 Schmithausen은 ‘三界唯心’이 나타나는 최초의 문헌으로『반주삼매경』을 제시하고 있다.27)

이 텍스트에서 다루고 있는 독특한 내용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般舟三昧이다. 텍스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에 불(pratyutpanna-buddha)이 눈 앞에(saṃmukha, 現前) 머무르는(avasthita) 삼매(samādhi)를 말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賢護여! 좋다, 좋다, 현호여! 그대도 좋다. 현호여! 그것은 그와 같다. 말한 대로 매우 청정한 색으로부터 영상이 현현하게 된다. 그와 같이 저 보살도 이 삼매를 열심히 수습함에 의해 어려움 없이 저 여래들을 저 보살이 본다. 본 후 질문하고 질문한 것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 기뻐하게 된다. 그는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 여래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나는 어디로 가는가?’ 생각한 후 그는 그 여래가 어디로부터도 온 것이 아님을 잘 안다. 자신의 몸도 어디로도 가는 것이 아님을 인식한 후 그는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 三界는 唯心이다. 왜냐하면, 내가 분별하는 대로 그와 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28)

앞의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좌선삼매경』의 내용에서 한층 더 진일보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좌선삼매경』은 수행자가 ‘이것은 누구의 모습인가? 바로 과거 석가모니불의 모습이다. 내 이제 부처님의 형상을 보았듯이, 형상도 오지 않고 나 역시 가지 않는다’고 자신의 삼매 체험에 국한시켰음에 반해,『반주삼매경』에서는 전형적인 삼계유심의 구조가 등장한다.

즉, 수행자의 삼매 체험 속에 인식대상으로 명백하게 나타나는 여래 뿐만 아니라, 수행자 자신까지 온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님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이러한 삼매 체험을 일반적인 현상으로 까지 확대해서 삼계유심의 구조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다.

3.『수습차제』의 관상법

카말라쉴라는『수습차제(bsgom rim)』에서 관상법과 관련한 내용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 뒤 유가사는 먼저 그와 같이 보고 들은 바의 여래의 색신에 마음을 안치해서 샤마타를 수습토록 한다. 여래의 색신은 황금빛이며, 三十二相과 八十種好로 아름답게 장엄되고, 사부대중이 에워싼 가운데 좌정하여 계시면서, 갖가지 선교방편을 베풀어 중생들을 교화하고 계심을 끊임없이 觀想해서, 여래의 공덕을 얻고자 하는 바람을 일으켜서, 마음의 가라앉음과 들뜸을 털어내고, 나아가 그 색신의 영상이 실제로 앞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뚜렷하게 볼 때까지 선정을 닦도록 한다. 그 뒤 여래의 색신의 영상의 오고 감을 사유해서 비파샤나를 수습토록 한다. 즉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니, “이 여래의 색신의 영상은 또한 어디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어디로 향해서 가는 것도 아니다. 비록 눈앞에 머물고 있을지라도 또한 자성은 공한 것이어서, 나와 나의 것이 없는 것처럼, 일체의 법들도 역시 자성이 공해서 오고 감을 벗어남이 그림자와 같아서, 거기에는 있고 없음 등의 자성을 여의었다.”라고 관찰한 뒤, 사량과 언설이 끊어진 한 덩이 투명한 마음으로 법의 진실을 수습하되, 나아가 원하는 만큼 선정에 머물도록 한다.29)

인용문의 내용에서처럼,『수습차제』의 관상법은 앞에서 살펴본『반주삼매경』의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삼계유심의 구조는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32상 80종호에 마음을 두고 관상하는 방식은30) 결국 샤마타에 의한 방식이며, 여래의 색신의 오고 감을 사유하는 방식은 비파샤나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해심밀경』이래의 영상문 유식설의 방식에 입각해서 샤마타와 비파샤나를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Ⅳ. 나오는 말

이상으로 관상법의 형성과정을 인도불교 텍스트 내에서 살펴보았다. 앞에서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관상법의 기원으로서 대승불전 이전의 붓다에 대한 마음지킴(buddhānusmṛti, 念佛)에 대해『증일아함경』과『좌선삼매경』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증일아함경』「七日品」과「廣演品」을 살펴보았는데,「廣演品」에서는 대승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법 즉, 붓다에 대한 마음지킴[念佛]이 가장 현저하게 강조되며,「廣演品」은,「七日品」의 내용과 달리 붓다에 대한 마음지킴이 명백한 열반의 길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리고『좌선삼매경』의 염불삼매는 명백한 佛像을 전제로 이루어진 삼매이다. 그리고 여타의 佛이 아니라, 과거의 붓다인 석가모니불을 삼매 체험 속에서 명백하게 본다는 것은 대승적인 요소의 반영일 것이다. 결국 소승계통의 선관경전에도 이미 대승적인 선정 체험의 요소가 함의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思惟略要法』에서는 初禪에 들기 위한 수행법으로 五門禪을 제시하고 있으며, 염불삼매도 초선에 들기 위한 하나의 방편임을 알 수 있었다.

3장에서는 대승불전이라고 할 수 있는『반주삼매경』과『팔천송반야경』, 그리고 티벳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수습차제』를 중심으로 관상법 관련 개소를 살펴보았다.

『8천송반야경』은 과거․현재․미래의 불을 삼매 체험 속에서 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염불에 대한 개념이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불퇴전 보살의 특징과 꿈, 그리고 보살마하살의 관상법이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 측면을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불퇴전보살의 특징 중에 꿈 속에서도 관상한다는 방식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측면이 부가된 것이다. 이것은 소승계열의 선관경전인『坐禪三昧經』과『思惟略要法』에 나타난 염불삼매가 초선에 들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사실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비록 꿈속일지라도, 불퇴전보살은 자기 자신이 여래․아라한․정등각자로서 비구승가와 보살승가의 앞에서 교법을 설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반주삼매경』에서는 전형적인 삼계유심의 구조가 등장한다. 즉, 수행자의 삼매 체험을 일반적인 현상으로 까지 확대해서 삼계유심의 구조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다.『수습차제』의 관상법은 앞에서 살펴본『반주삼매경』의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해심밀경』이래의 영상문 유식설의 방식과 관상법을 접목해서 샤마타와 비파샤나를 정의하고 있다.

이상으로 관상법의 형성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현재 티벳불교 내에서 대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금강살타 관상법이나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관상법과 관련한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못한 점과, 마음작용 중 作意와 勝解의 관상법 관련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못한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것은 향후 과제로 남겨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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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2) 『菩提道次第論(Lam rim chen mo)』은, 아티샤의 『菩提道燈論(Byang chub lam gyi sgron ma)』에 입각해서, 초급 단계의 사람(skyes bu chung ngu, 下士)과 厭離心․중급 단계의 사람(skyes bu 'breng ba, 中士)과 菩提心․고급 단계의 사람(skyes bu chen po, 上士)과 正見 등 세 가지 단계의 사람(skyes bu gsum pa, 三士)을 중심으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순차적 방식을 설정한다. 이것이 티벳불교의 가장 큰 수행특징인 람림의 수행 체계이다. 구체적인 삼사도의 수행체계에 대한 내용과 관련해서는 양승규[1991], 金星喆[2001] 참조.

3) 관상법이란 마음을 오로지 일정한 대상에 기울여 어떤 想을 일으키게 하여 번뇌를 없애는 일이다.

4) 金星喆[2006, 1-15]

5) Paul M. Harrison[2005, 84-107]

6) smṛti의 한글번역으로 ‘마음지킴’이 적절함에 대해서는 임승택[2001, 79] 각주 54 참조.

7) 특이할만한 내용은 한역본 增壹阿含經卷第34(大正2, 740a2ff)에는 ‘念比丘僧’이라고 표기되어있음.

8)『大正』2, 739b10ff. 정토 경전에서 흔히 말하는 7일간의 稱名念佛의 기원이『증일아함경』「칠일품」의 毘羅先 장자와 밀접한 연결관계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7일 후라는 죽음에 대한 설정과 7일 후 끊이지 않는 마음지킴으로 인해 결국 천상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 정토 경전의 칭명염불과 極樂往生思想과 아주 흡사한 측면이 있다.

9)『大正』2, 554a4ff.

10) 그렇다면 니카야와 아함경의 모든 내용이 붓다 당시의 直說로 귀속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슈미타우젠(Schmithausen)과 훼터(Vetter) 등 서구의 학자들은 끊임없이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초기불전의 불일치와 관련한 문헌학적 검토에 대해서는 Schmithausen[1981, 200ff] 및 독일불교의 문헌학적 방법론에 대해서는 안성두[2002] 참조; 증일아함이 大衆部에 귀속됨에 대해서는 정승석[1994, 235] 참조.

11) 붓다의 형상 대신 붓다를 상징하는 보리수, 빈대좌, 불족적(佛足跡) 등이 나타나는 ‘무불상(無佛像) 시대’와 연계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인도불교 미술사 내의 ‘무불상 시대’에 대해서는 이주형[2003, 79-84] 참조.

12) 현존하는 대승경전에서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즉, 염불]을 중요시하게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붓다에 대한 반복적인 마음챙김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에 대해 폴 해리슨은 하나의 가정을 하고 있다. 붓다가 처음에는 본받을만한 존재였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기억에서 사라지면서 종교적 예경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Paul M. Harrison[2005, 86] 참조. 만일『증일아함경』이 대중부의 텍스트로 귀속될 수 있다면, 平川彰처럼 대승불교의 기원이 佛塔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재가보살에 의해서가 아니라, 經典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부파교단 내의 삼매 체험에 전념하는 출가자 집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삼매 체험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결국 대승불교의 관상법 전통이 단순히 신화적인 체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반주삼매와 일행삼매 등의 삼매 체험 속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기원설과 관련한 네 학자의 견해에 대해서는 小谷 信天代[1996, 22-34] 참조.

13) 明神 洋[1993, 59ff]

14)『大正』15, 276a6ff.

15)「성문지」의 부정관 수습과 까시나(kasiṇa) 수행의 방식과 상통한다. Schmithausen[1982, 138-144]

16) 각주 12의 내용 참조.

17)『大正』15, 277b13ff.

18) 明神 洋[1993, 61-62]

19)『大正』15, 298a1ff.

20)『大正』15, 299a9ff.

21) ‘saṃmukha’는 現前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주삼매의 ‘saṃmukha’가 여기에서 말하는 얼굴을 마주 대한 것과 동일한 용어로 추정된다.

22) 폴 윌리암스[2000, 279]

23) Aṣṭa[W]764.20ff

24) Aṣṭa[W]764.11ff.

25) 赤沼智善[1944, 388-422]

26) 平川彰[1991,307-312]은 아미타불에 대한 信(śraddhā)이 Bhagavad-
Gītā등에서 설하는 信愛(bhakti)의 영향으로 성립되었다는 설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대승불교의 기원설과 관련한 인도 내부 기원설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즉, 기존의 아미타불 신앙이 이란의 태양신 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설에 대한 반박이라고 할 수 있다.

27) Paul M. Harrison[2005, 92];『반주삼매경』에 나타난 삼계유심 구조와 초기유가행파의 관념론에 대해서는 Schmithausen[1976, 246-247] 참조.

28) Paul. M. Harrison[1978, 36.9ff]

29) bsgom rim[123.15ff]; 중암[2006, 381-382] 참조.

30) 수행자가 불상을 눈으로 보면서, 삼매를 취할 수는 없을까? 이에 대해 총카파는 눈[眼] 등의 감각기관에 의해 삼매가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명백하게 설명한다. LR[2001, 202.13ff]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앞에 둔 불상을 눈으로 보면서 수습하지만, 스승 예셰데(Ye shes sde)가 물리친 것은 실로 당연하다. 왜냐하면 삼매는 감관에 의한 인식에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한 인식에서 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삼매의 직접적인 인식대상은 마음에 의한 인식의 직접적인 대상이며, 따라서 그것에 마음을 묶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인식대상은 대상 그것의 형상(image) 혹은 현현한 影像을 인식대상으로 삼아야만 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2327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