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유마경(維摩經)의 이해

수선님 2019. 8. 25. 11:33

오른쪽은 유마거사의 설법모습과 왼쪽은 병문안을 온 보살들의 모습을 그린 것




유마경(維摩經)


<유마경>은 대체로 1-2세기에 성립된 대승경전으로 중국에서는 무려 7번이나 번역 되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후한(後漢)시대에 엄불조(嚴佛調)가 번역한 것이다. 이어 오(吳)나라 때 지겸(支謙)이, 다음에는 서진(西晋)의 축법호(竺法護) 축숙란(竺淑蘭)이, 그 다음에는 동진(東晋) 시대의 우전인(于]人)이었던 기다밀(祇多蜜.Gi-tamitra) )이, 요진(姚秦)에서는 구마라집, 그후에 당(唐)의 현장(玄奘)이 각각 이 경을 번역했다.

이 번역본 가운데 '고(古)유마경'이라 불리는 엄불조역 <유마힐소설법문경(維摩詰所說法門經)>, 축법호 역 <유마힐경(維摩詰經)>, 축숙란과 기다밀역의 4본은 유감스럽게도 흩어져 아직껏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널리 읽혀지고 있는 것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 일명 불가사의 해탈 - 이다. 현장역은 역경명이 <무구칭경(無垢稱經)>인데 일반적으로 <유마경>이라 할 때 이 현장 번역본은 지칭하지 않는다. 구마라집 번역본과 현장 번역본을 대조하면 흥미있는 점이 많다.

구마라집과 현장역

구마라집이나 현장은 중국의 역경 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겼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번역한 경론에는 각각 한 시대를 구획할 만큼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유마경>과 <무구칭경>도 그렇다. 예를 든다면 구마라집은 원전의 뜻을 쉽게 전달하려 한 흔적이 있지만 현장역은 원문에 충실하려 한 면이 발견된다.

이 경이 인도에서 널리 읽혀졌던 일은 <대지도론(大智度論)>등에서 이 경을 인용하고 있는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원전이 단편적인 형태로밖에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이 경에 대해서구마라집과 현장역을 원전에 대조해서 비교한다는 것은 완벽한 원본을 볼 수 없는 한 어려운 일이다. 따라 두 번역본 외에 다른 번역본과 대조를 통해 그 대강의 사실을 알아 낼 수 있다.

유마힐의 의미

이 경은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이라고 칭하고 있듯이 유마힐이 마라고 있는 내용이 중심이 되고 있다. 수많은 대승경전 중에서 유마힐(줄여서 유마라고도 한다)이라는 재가의 한 거사가 대승불교의 심원한 철학을 많은 불제자들을 상대로 종횡자재로 연설하고 있는 점은 실로 보통 사람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이 경이 널리 읽혀지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유마힐이란 Vimala-Kirti 의 음사로서 Vimala 는 정(淨) 무구(無垢)등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Kirti 는 명(名) 칭(稱)등으로 번역한다. 현장이 이 경을 <무구칭경(無垢稱經)>이라 제목한 것은 이런 직역에 의한 것이다. 이를 좀더 자세하게는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이라 번역하는데 그것을 Vimala-Kirti 와 Nirdesa 로 되어 있는 것에 따른 것이다. Nirdesa 는 '설(設)'이라는 뜻이다.

Vimala_Kirti 는 비마라힐저 비마라계리제 등으로 음사되었다. 그것이 유마힐 음사로 낙착되어 일반적으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호한역경음의동이기(胡漢譯經音義同異記)>에는 이런말이 나온다.

"예 번역과 새 번역에는 대동소이가 있다. 천축의 말로는 유마힐이라 하는데 옛번역에서는 풀어서 무구칭이라 한다. 이것을 다르게 번역한 것이 정명이다. 여기서 정(淨)은 무구(無垢)이고 명(名)은 칭(稱)이다. 이렇게 볼 때 말은 다르지만 뜻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유마거사라 하거나 정명거사라 하거나 같다는 뜻이다. 수나라 때 길장(吉藏) 쓴 유명한 <정명현론(淨名玄論)>이라는 논문이 있는데 이는 경의 주석서이다.


유마경



2. 유마의 등장

유마힐이라는 사람

이 경의 제목이 되는 주인공 유마가 등장하는 것은 '방편품(方便品)'에서다. 그 일절을 옮기면 이렇다.

"...비야리의 큰 성 가운데 장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유마힐이라 하는 사람이었다. 과거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부처님을 공양하여 깊은 선근을 심었다. 그는 이미 무생인(無生忍)을 얻었고 변재무애(辨才無碍) 했으며 신통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모든 총명한 지혜를 얻었다. 두려움이 없었으며 악마의 분노를 물리치고 진리를 깊은 곳까지 알았다. 또한 이치에 막힘이 없고 방편에 통달해 있었다..."

이 표현대로라면 유마힐이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여기서 비야리는 비사리라고도 하는데 비사리란 범어로 바이살리(Vaisali) 빠알리어로 비사리(Visali)를 소리대로 옮긴 말이다. 이곳은 부처님 재세시대부터 중인도에서 큰 도시를 이루었던 곳이다. 거사는 이곳에 살았던 장자, 즉 부자였고 일찍부터 수많은 부처님을 공양하여 선근을 심었고 깨달음을 얻었다. 또한 그는 뛰어난 웅변가이며 신통력을 가지고 있었고 남을 교화함에 있어 불법의 깊은 뜻을 요해(了解)하고 있어서 두려운 것이 없었다. 또 그는 악마에게 유혹당하는 일이 없었으며 불법의 깊은 가르침을 닦고 지혜로서 사람들을 제도하기를 잘했다. 다시 말해 온갖 교육수단에 통달해 있었던 사람이었다. 경전은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대원을 성취해서 중생들의 마음의 향방을 명확하게 알고 또 능히 감감기관의 이둔(利鈍)을 분별했다. 오랫동안 불도를 닦아 이미 마음이 성숙해 있었으며 대승을 배워 모든 행동을 능히 선하게 사려했다. 또 부처님과 같은 위의로 살며 마음의 위대함이 바다와 같아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즉 유마힐은 사람들을 제도하려는 대원을 품었으며 상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분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불도를 닦아 마음에는 더러움이 조금도 없었으며 불교의 가르침을 몸에 익혀서 무엇 하나 과오를 저지르는 일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으로서의 권위를 구비하고 있었으며 마음의 위대함이 바다와같고 모든 부처님을 예배하지 않음이 없고 부처님의 제자는 물론 제석천왕 범천왕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왕조차도 그에게 예배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경전은 이 밖에도 그의 위덕을 최고의 찬사로 묘사하고 있다. 즉 그는 수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보시의 마음이 후하여 재물을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계율을 지켜서 청정했으며 인내심이 강하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일이 없었고 올바른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사물의 판단함에 그릇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재가자였으면서도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육바라밀을 겸비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경전을 좀더 읽어 보자.

"백의(白衣 = 재가자라는 뜻)라 할지라도 출가자처럼 청정한 율행을 받들어 행하고 세상에 머물고 있다 하더라도 삼계에 집착하지 않았다. 처자가 있음에도 항상 범행(梵行)을 닦았으며 권속이 있으나 그에 얽매이지 않았다. 많은 보물이 있었지만 검소한 정도의 몸치장을 했다. 또 음식을 먹어도 맛을 탐하는 일이 없었다. 만일 그가 도박을 하는 곳에 가면 즐겁게 놀면서도 그곳에 있는 사람을 제도했다. 또 음란한 곳에 들어가면 애욕의 과보를 설했다."

이 표현들은 유마힐이 백의 즉 재가의 불교신자였지만 출자자와 마찬가지로 청정의 계율을 가졌으며 재가에 살면서 이 세상 일에 집착하지 않았고, 처자가 있음에도 성스러운 수행을 하였고, 친척이 있었지만 그 친애의 정에 빠지는 일이 없었음을 말한다. 또 옷을 입고 있었으나 그것을 물질로서가 아니라 부처님의 상호로서 몸을 감싸고 있었으며, 또 먹고 마시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진미로서가 아니고 마음을 안정 통일하는 정신적 기쁨으로서였으며 도박장에서는 노름을 하면서도 그곳에 있는 사람을 제도하기 위해서였다. 또 수많은 환락가에 가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사람의 음욕으로 인한 과오를 가르치기 위해서였고 술집에서 술을 취해 듯을 잃고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유마힐에게 처자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설월상녀경(佛設月相女經)>등에도 나타나 있는 바이지만 거사는 처자를 가진 재가지이면서도 훌륭한 불교인이었음을 여기서 말하고 있다. 이 점은 이 경의 각 품에 걸쳐 설해지고 있는 설법의 중요한 복선을 이루고 있다.

이 경의 '방편품'을 보면 유마힐은 사람들을 제도함에 있어 교육적 방편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그 수단으로써 거사는 무엇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 '육신의 질병'이었다. 즉 스스로 신병으로 누워 많은 문병객이 찾아 오도록 하고 그들에 대해 설법함에 '이 몸은 무상한 것'일 뿐이라는 것을 누누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물거품과 같이 덧없는 육신이 아니라 불신(佛身) 또는 법신(法身)이라 할 수 있는 진신(眞身)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법은 많은 감동을 주어서 문병을 왔던 수천 명의 내방객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게 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위없는 깨달음(無上正等正覺)' 이라고 번역 하는데 그것은 곧 부처님이 깨달은 정각의 세계를 말한다. 이 정각을 추구하며 불도를 행하는 마음이 곧 보살심이다.

3. 질병을 묻는다

거사의 출가론

'제자품'은 부처님께서 유마거사의 질병 소식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 문병을 하게 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때 거의 모든 제자는 과거에 거사 때문에 몹시 애를 먹었던 일이 있어서 도저히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없음을 누누이 말하고 있다.

제자들이 거사에게 혼났던 이야기들 중의 하나는 이런 것이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 낳았던 아들인 라훌라인데 어느날 그는 출가의 공덕을 설법하였던 모양이다. 이에 대해 거사는 출가는 무위(無爲)의 법을 위해서 하는 것이며 무위의 법 가운데는 이익과 공덕도 없는 것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는 일이야말로 참된 출가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라훌라는 유마힐로 부터 '출가의 공덕과 이익을 말하지 말라'고 힐책을 받았던것이다. 공덕과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은 유소득(有所得)이란 생각에서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도를 추구하는 무위의 법을 수행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직심(直心이 바로 도량(道楊)이다

'제자품'과 함께 유마힐 거사가 불법의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살품'이 있다. 이 품에서 부처님은 미륵보살, 광엄동자, 지세보살, 선덕동자 이 네 보살에게 명해서 거사를 문병케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보살도 모두 그것을 사양하면서 '저는 그곳에 가서 문병을 하지 않겠다'고 부처님께 말씀 드린다.

이 품 중에서 유마거사는 광엄동자로부터 도량(道楊)이란 어떤 곳이냐고 질문 받는데 '직심이 곧 도량'이라고 대답한다. 즉 흐트러지지 않는 곧은 마음 이것이 도량이라는 것이다. 이 한마디는 널리 세간에도 알려져 있는 말인데 그 출처가 바로 <유마힐 경>이다.

이렇게 볼 때 많은 불제자도 그리고 보살도 문병을 가기 꺼리는 것이었다. 즉 이 거사에게 대등하게 맞상대할 수 있는 불제자들은 일단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문수와 유마힐의 대결

그러자 부처님은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인 문수보살(文殊普薩)을 불러 그에게 유마거사의 문병을 맡게 한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의 말씀인 이상 그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없어 유마거사의 집을 찾아가게 된다. 그러자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이 만나면 큰 구경거리가 생길 것이라는 예측에서 이 보살을 따라 여러 보살과 출가비구 제석.범천.사천왕과 수많은 사람이 줄줄이 이어서 유마힐의 집으로 찾아가게 된다.

이 품에 와서 장면은 비야리성의 거사의 내실로 바뀐다. 유마거사는 문수보살이 많은 대중과 함께 오고 있음을 알고 신통력으로써 실내를 몽땅 치우고 오지 그 속에 자리 하나만 깔고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문수보살이 실내에 들어오자 거사는 잘 오셨다고 인사하고 곧바로 '불래(不來)의 상(相)으로 오셨고 불견(不見)의 상(相)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손님을 맞이하는 대목부터 범상치 않음이 느껴지지만 이 정도는 문수보살도 태연하게 받아 넘긴다. 그런 다음 문수는 유마에게 무엇 때문에 병이 났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한 유마의 대답은 나중에 불교인들에게 널리 희자된 명답이었다. 그 대답은 이렇다.

"나의 병은 대비심(大悲心) 때문에 생겼다. 일체 중생이 병들어 앓기 때문에 나도 앓는다". 그리고 그는 "일체 중생에게 병이 없어지면 보살도 또한 아픈 일이 없을 것이며 자신의 병은 보살을 맞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병이란 무엇인가

그럼 그 병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해 유마는 '나의 병은 형태도 없고 볼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병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병은 분명 육신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만 육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이며 그 사대가 거짓으로 모여 있으므로 육신은 본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대도 또한 실체가 있는게 아니며 따라서 사대에 기인된 병이라는 것은 가정의 병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병이 일어나는 것은 사대가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데서 병의 근본이 일어나게 된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유마는 '가정(假定)의 육신''가정의 병'뿐만 아니라 공(空)이라든가 열반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가정의 이름일 뿐 그 가정의 이름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도 병이라고 말한다.

유마거사가 여기서 '일체 중생의 병으로 그 때문에 내가 앓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이고 사람들과 병을 같게 해서 굳이 자신이 열반을 취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4. 신기한 해탈의 경지

법을 구하라

'불가사의품(不可思議品)'은 문자 그대로 거사의 방 즉 불가사의 해탈의 경지가 계속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장(章)이다. 이 품에서 사리불은 거사 방안으로 여러 보살과 대제자를 이끌고 들어간다. 그런데 좁은 방이다. 모두 앉을 만한 자리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도대체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하고 생각을 한다. 이때 유마는 재빨리 사리불의 의중을 알고는 사리불을 향해 '그대는 법을 위해 왔는가, 앉을 자리를 찾기 위해 왔는가'라고 다그쳐 묻는다. 그리고는 '법을 구하는 자는 생명까지도 아껴서는 안되는데 좌석을 찾는다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힐난한다. 그리고 유마는 다시 '법을 구하는 일은 부처님에게도 법에게서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한다는 것은 어디에 집착하는 것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법은 구해지지 않는다'고 훈계한다. 즉 법을 구한다는 것은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구한다는 것은 구하는 마음 없이 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대체로 법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은 법은 무상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상을 구하려는 것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법은 무주(無住)의 것이며 견문각지(見聞覺知)의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고 법은 무위라는 것이 유마의 설명이다.

다음에는 유마와 문수가 먼저 문답을 주고 받는다. 거사의 질문에 문수가 대답한다. 이때 문수는 자리 문제와 관련해 수미등왕이라는 부처님의 사자좌가 훌륭하기 그지 없고 대단히 크다고 말한다. 그러자 유마는 신통력으로 수미등왕 부처님에게 3만 2천의 사자좌를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수미등왕은 즉시 거대한 수에 달하는 사자좌를 보내 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많은 사자과가 거사의 방으로 들어와도 조금도 비좁지 않았다. 이것은 불가사의한 해탈에 머무는 사람은 수미산과 같이 높고 넓은 산을 겨자 알맹이 속에 넣어도 조금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부사의(不思議)한 것이다.

이 품에서는 대갑서도 등장하여 유마거사가 설법하는 불가사의 해탈 법문은 미증유의 것이라고 찬탄한다. 그는 성문(聲聞)들이 이 법문을 신해(信解)한다면 어떤 마군중이 몰려와도 어쩌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들은 3만 2천 대중은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5. 중생을 관찰하는 마음

환상으로 만든 사람

'관중생품((觀衆生品)'은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에서 유마가 일체 중생의 병으로 인해 자신이 앓는 것이라는 말에 대해 '보살은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생사(生死)에 든다. 생사가 있으면 즉 병이 있는 만일 중생 병을 떠날 수 있다면 즉시 보살 또한 병드는 일이 없다'면서 그 설법을 수용한다. 그러나 보살이 중생을 봄에 있어 거기 만약 특정한 사람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따라서 이 품에서는 중생을 관찰하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게 된다. 유마는 이런 점에 관해서 문수보살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한다.

"이를테면 환사(幻師)가 거짓으로 만든 사람을 보듯이 보살은 중생을 보기를 이와같이 해야 한다"

거짓의 사람이란 본래 실재 인물이 아니다. 실재 인물이라면 그를 사랑하거나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실재 인물이 아니면 사랑이나 집착도 없게 된다. 그래서 사랑이나 집착을 특정인에 대해서 갖지않게 된다는 것이다.

천녀의 출현

이 이야기와 관련해 매우 흥미 있는 이야기가 이 품에 들어 있다. 그 의미 파악을 위해 먼저 경전을 인용해 보고자 한다.

"당시 유마힐 방에 한 천녀(天女)기 있었다. 그녀는 모든 천인과 함께 설법을 듣고 기뻐하여 하늘의 꽃(天花)을 많은 보살과 훌륭한 제자를 향해 뿌렸다. 그런데 이 꽃은 여러 보살에게 이르면 즉시 모두 떨어 졌으나 대제자(聲聞.성문)에 이르면 떨어지지 않았다. 성문의 제자들은 신통으로서 꽃을 떨어지게 하려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의 장면은 유마의 방에 한 천녀가 있었는데 여러 천인과 함께 유마의 설법을 듣고 그 몸을 나타내 그곳 여러 보살과 큰 제자들에게 하늘꽃을 뿌렸다. 그 꽃은 모든 보살들에게 내리면 곧 떨어졌지만 큰제자에게 내린 것은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신통력으로 떼어버리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하면 모든 보살들에게는 집착하는 것이 없는데 큰제자에게는 그것이 있었기에 그렇게 핀 것이라는 것이다. 즉 '여러 보살을 보니 꽃이 붙지 않는 것은 일체 분별하는 생각 끊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직 끊어지지 않으면 꽃이 몸에 붙고 집착이 없는 자는 꽃이 붙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습(結習)이란 번뇌의 습기 즉 여훈을 말한다. 그 여훈까지도 없어져 버리면 이제 꽃은 몸에 붙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이 품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문수보살의 질문에 대한 거사의 대답 가운데 '보살의 자.비.희.사(慈悲喜捨)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다. 유마는 특히 자(慈)에 대해서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자(慈)란 무상진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비(悲)는 스스로 쌓은 공덕을 많은 사람에게 보시하여 사람들이 가진 괴로움을 구원하려 하는, 다시 말해 자타의 구별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희(喜)는 자타 모두 같이 환희하며 후회가 없는 것이며 사(捨)는 다시 어떤 복락도 희망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구하는 것은 어떤 집탁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품에서는 또 천녀가 나타나 사리불과의 문답을 하면서 매우 재미있는 상황을 연출한다. 쯕 사리불이 천녀에게 '그대는 어째서 업장이 깊은 여신(女身)을 변전(變轉)하지 않는가'라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12년 동안 여인의 모습을 구했으나 끝내 얻지 못했다. 왜냐하면 여자든 남자든 그것은 우리의 집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여자의 몸을 바꾸라는 말인가."

즉 천녀는 여자라는 것도 정해진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점은 <법화경>에서 변성남신(變成男身)'을 말하는 것과 비교되는 지극히 흥미로운 장면이다. 이 품으 결론은 유마힐이 사리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 이 천녀는 이미 수많은 과거세에 92억의 부처님을 공양하고 이 미 능히 보살의 신통에 유희하며 소원을 구족하였고 무생인을 얻어 불퇴전에 머물고 있다. 본원(本願)을 얻었으므로 인연에 따라 세간에 나타나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마힐은은 이 천녀를 크게 찬탄하고 이 천녀의 비범함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 품은 천녀를 등장시켜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가. 이 경에는 보살이라는 개념에 여성이 포함되고 있는데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암시를 준다. 여성이 크게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다른 경전과 크게 대조되는 점이다.

이 품에 이어 '불도품(佛道品)' 에서는 어떻게 해서 불도에 통달하게 되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 가운데 남녀의 개념이 대등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착안해 보면 '관중생품(觀衆生品)'에서의 천녀의 설정은 이 경이 말하고자 하는 주도면밀한 배려에 의한 것임에 틀림없다.

6. 번뇌 즉 보리

독을 바꿔 약으로 하다

'불도품(佛道品)'은 유마거사와 문수보살과의 문답으로 엮어져 있다. 여기서 설하고자 하는 취지는 다음 일절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큰 바다로 가면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보물을 얻게 되듯 이와같이 번뇌의 대해로 들어가면 즉시 일체지의 보물을 얻을 것이다."

유마는 보살이 불도에 통달하기 위해서는 비도(非道)를 행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도란 독이지만 그것이 변화하면 약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독이 약으로 변하는 것인가. 오역죄를 범했어도 그 죄를 만드는 원인이 성냄(嗔.성낼 진)이 없고, 지옥에 가더라도 그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 되는 죄업이 없고, 축생이 되더라도 그 원인인 무명교만의 죄과가 없다면 오역죄도 작용을 하지 않는 것이고 독도 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을 더럽히지 않고 보물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사람들을 교화함에 있어서 탐욕이면 탐욕을 분명히 제시하고 더욱이 탐욕의 대상이 되는 모든 집착을 떠나도록 가르치는 인이 탐욕에 유혹되지 않는 것이 된다.

유마는 처자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처첩이 있음에도 항상 오욕의 수렁을 멀리 했다.'고 한다. 유명한 말이지만 '고원육지(高原陸地)에서 연꽃은 피지 않는다. 더럽고 음습한 진탕에서만 이 꽃이 핀다'는 말은 이 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참뜻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처자도 가족도 보살행에 방해가 되는 존재가 아니다. 지혜는 보살의 모친, 방편은 부친이며 '법희(法喜)는 곧 아내로 삼고 자비심으로서 여인을 삼는다.'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아내를 보고 기뻐하듯이 법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다. 또 세상사람이 여인에게 정을 느끼듯이 자비심은 갖는 것은 보살의 여인이라는 것이다.

묵연하고 말이 없다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은 이 경의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일품이다. 앞의 품에서 번뇌 즉 보리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여 여기에서는 불이론(不二論)을 전개하고 있다. 법자재보살에서 문수보살에 이르는 수많은 보살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불이의 법문을 말한다. 즉 더럽고 깨끗한 것은 둘이 아니고 선과 악은 둘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유마는 묵묵히 말이 없었다. 이를 후세 불교에서는 '유마의 침묵 (維摩一默.유마일묵)'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불이의 법문이란 언어와 논리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수보살은 이 유마의 침묵을 보고 '옳도다 옳도다 글과 언어가 필요없도다. 이것이 진정 불이법문(不二法門)이로다'라고 찬탄하고 있다. 아울러 이 자리에 있었던 5천명의 보살도 유마의 묵연한 침묵을 보고 모두 참다운 불이법문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한다.

7. 대비가 풍기는 곳

무엇 때문에 먹는가

'향적불품(香積佛品)'은 앞의 '불가사의품(不可思議品)'에서 사리불이 좌석에 대해 생각하자, 유마거사가 방장의 거실로 3만 2천개의 사자좌를 신통력으로서 들어오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에 대응한다. 즉 식사 시간이 되자 그곳에 모여 있던 여러 보살이 식사를 마음먹고 있음을 재빨리 눈치채고 '이제 그대에게 미증유의 음식을 대접하리라'면서 향적불(香積佛)이 계신 중향국((衆香國) 으로 부터 향기가 넘쳐 흐르는 음식을 가져오게 한다. 그 음식은 '바다끝이 있어도 이 음식은 끝이 없도다'라는 표현처럼 아무리 먹어도 처음 그대로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 식사의 자라에 앉았던 사람은 9백의 보살들이었는데 유마거사는 그들을 위해 신통으로사자좌를 방장에 넣어 모든 보살들을 자리에 앉게 했다. 유마는 또 중향국에서 막대한 양의 식사를 가져오면서 화신(化身)의 보살로 하여금 서비스를 맡도록 했다. 그런데 그때 가져오게 한 밥의 향기는 베살리와 삼천대천 세계에 퍼졌다. 그리고 그 향기로 인해 성중(城中)의 바라문과 거사들은 심신이 상쾌해져 모두 기뻐했다. 또 성중의 많은 장자들도 이 향기에 끌려 8만 4천 명을 거느리고 거사의 방으로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지신. 천신과 욕계.색계의 여러 신들도 또한 거사의 방으로 찾아오는 대소동이 일어났다.

여기서 유마는 사리불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향해 '여러분은 지금 중향국에서 보내온 이 감로맛의 밥을 먹고 있는데 이것은 대자대비가 담겨 있는 것임을 깊이깊이 알야 한다'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부처님의 대비심에서 나온 것이며 이 밥을 먹는 것은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이 아니라 열반(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감로미의 감로(甘露)란 문자 그대로 달콤한 이슬인데 맛있다는 것이며 열반을 뜻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다.

향기의 나라

이런 감로맛의 일대 파티가 끝나자 유마는 중향국에서 찾아온 보살들에게 중향국의 교주인 향적여래는 어떤 가르침을 설교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보살들은 향적여래는 문자로서 교리를 설교하지 않고 다만 중향(重香)을 피움으로써 대중들로 하여금 덕행을 얻게 할 뿐이라고 말한다.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 이처럼 힘들이지 않고 교화가 이루어진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마는 여기에서 중대한 말을 한다. 중향국에서의 일은 그렇다 하고 이 지상의 사바세계에서는 그런 쉬운 일로 사람들을 교화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지상에서 그런 꿈과 같은 일을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훈계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대비심

중향국의 보살들이 이번에는 거사에게 이 지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떤 식으로 교리를 설교하시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유마는 이 지상 사람들은 강건하여 좀처럼 현혹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석가모니불은 강건한 언어로서 교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석가모니불이 교화를 위해 많은 노고를 쏟고 있다는 말이다. 중향국 보살들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감복한다.

유마거사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지상 사람들을 교화하려면 도저히 보통 수단으로는 어려운 만큼 교화에 임하는 데에는 대비심을 가져야 한다. 결코 중향국의 경우처럼 향기나 풍기는 것으로서 자연히 교화가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비심은 보다 견고한 것이 아니면 도저히 쓸모 없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마는 대비심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향국 보살들은 그러면 이 지상에서 정토가 건립될 가망이 있느냐고 유마에게 묻는다. 유마는 이 지상의 보살들이 팔법(八法)을 행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경전은 그 팔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중생을 요익하여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일체 중생을 대신해 모든 고통을 받고 지은 바 공덕의 전부를 남에게 베푼다.

(2) 마음을 중생과 같이하여 겸손하게 갖는다.

(3) 모든 보살 이것을 보기를 부처님과 같게 한다.

(4) 아직 듣지 못한 경이 있으면 이것을 듣고 의심치 않는다.

(5) 성문과는 서로 다투지 않는다.

(6) 남의 공덕을 시기하지 말고 나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로써 그 안에서 나쁜 마음을 조복한다.

(7) 항상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는다.

(8) 항상 일심으로서 모든 공덕을 구한다.

이 8개조항을 일일이 해석하지는 않겠다. 이 중에는 구마라집 번역본과 현장 번역본을 대조해 보면 범어원전 외에도 다른 책이 있었던게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 있다. 길장(吉藏)은 <유마경의초((維摩經義抄)>에서 8개 조항 중 앞의 4개는 화타(化他) 뒤의 4개는 자행(自行)이라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다섯번째인 '성문과 서로 다투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승조(僧조)는 <주(誅) 유마힐경>에서 '삼승(三乘)이 다를지라도 종(宗)에 돌아오는 것이며 대소로서 위배하지 않는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성문은 근기가 저열하다 하여 이것을 멸시할 것이 아니라 대승의 보살도 소승의 성문도 그 돌아가는 바는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어쨌든 이 일품의 취지는 지상의 보살은 이 지상에 모든 정토를 현실로 건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관념의 정토인 중향국과 대비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향기가 사라질 때

"보살행품'은 무대가 거사의 방에서 암라수원(唵羅樹園)의 부처님 설법장으로 옮겨진다. 이 장면에서 유마는 부처님을 예배하고자 한다. 그때 중향국에서 보내온 감로의 밥을 먹은 자는 털구멍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를 아직 간직하고 있어서 이 사실이 먼저 부처님 앞에서 화제가 되었다.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다는 중향국에서 감로의 밥이 보내왔었던 자리에 없었던 까닭에 이 밥의 향기가 어떤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유마와 문답을 하게 된다. 이때 유마는 아난다의 질문에 대답한다.

"이 감로의 밥을 먹음으로써 몸에서 나는 향기는 그것을 먹은 각자의 입장에서 나름대로의 효과를 있게 하고 7일 뒤에는 밥이 소화되는 동시에 향기도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아직 정위(正位)를 얻지 못했던 성문은 이 밥을 먹음으로써 정위를 얻고 이미 정위를 얻고 있던 자는 마음의 해탈을 얻는다는 것은 부연의 설명이다. 그러자 이 감로의 밥이 사람들을 잘 교화하게 되었음을 아난다는 듣고 찬탄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일은 교화를 위한 좋은 불사임에 틀림 없지만 보살이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는 데는 꼭 감로의 밥을 먹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쁜 일이 아닌 일이라도 그것을 근심으로 삼지 말 것이고 좋은 것만 탐닉하고 더러움을 기피하는 그러한 마음은 중생의 마음에는 있어도 부처님에게는 없다는 것이라는 점을 아난다에게 훈시한다.

때마침 중향국 보살들도 그곳에 와서 부처님의 말을 듣고 합장했다. 그들은 자기들은 처음에 이 지상에 찾아와 중향국에 비교되는 하열한 땅이라 생각했었는데 땅이 깨끗하고 더러운 차별은 있을지라도 깨끗한 것을 기쁨으로 알고 더럽다고 걱정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들으며 참으로 옳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중향국으로 돌아가 전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앞서 말한 '향적품' 이야기의 계속처럼 느껴진다.

8. 여래를 본다

부처님을 뵙고

'견아촉불품((見阿촉佛品)'은 '관여래신품(觀如來身品)' 이라고도 하는데 아촉은 번역하면 '부동(不動)' 또는 무등등(無等等)'이라 한다. 여기서는 이 아촉여래의 몸을 어떻게 볼 수 있는 것이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여래(부처님)를 뵙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보살행품'에서 유마가 문수보살에게 '함께 부처님을 뵙고 모든 보살과 예배하고 공양하라'고 말할 때의 '부처님을 뵙고'란 어떤 일인가를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이 품 첫머리에 '그때 부처님은 유마힐에게 물었다. 그대는 여래를 보려고 원하는데 무엇으로 여래를 볼 것인가.'라는 표현에서도 짐작이 간다. 이에 대해는 유마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신의 실상을 바라 보듯이 부처님을 바라보는 것 이것 입니다."

여기에서 부처님을 바라 본다는 것은 법신을 본다는 것에 다름아니지만 법신은 무상(無相)이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보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마는 '스스로 자신의 실상을 바라보듯'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바라본다'는 데에 대한 토론이 계속된다.

한편 유마의 이같은 말을 듣고 있던 사리불은 유마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깜짝 놀란다. 그러자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말하기를 '유마힐이란 사람은 무동불이 계신 묘희국(妙喜國)에서 생애를 마치고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 자'라고 일러준다. 그러자 사리불은 비로소 거사의 전생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사리불은 그런 청정한 나라에서 어떻게 이 더러운 사바세계로 일부러 오게 되었는가 하고 묻는데 유마힐의 대답은 이 세상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묘희국(妙喜國)

이 유마와 사리불과의 문답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유마가 살던 곳이 묘희국이라는 나라와 거기에 무동여래(無動如來)가 계시다면 그 여래 주위에 있는 보살 성문의 무리와 함께 그 여래를 뵙고 싶다고 원했다. 부처님은 모두다 그렇게 원하는 것을 아시고 유마에게 그 국토를 현출(現出)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유마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신통력으로서 오른손으로 그 묘희국을 이 사바세계에 나타내 보였다. 그러자 놀란 것은 묘희국의 사람들이었다. 그러자 무동불은 이것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고 유마의 신통력에 의한 것이므로 별로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위로한다.

그때 석가모니 부처님은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묘희국의 놀라움을 보고 무동여래 밑에 있는 보살이나 제자의 수행하고 있는 바가 청정 결백함을 보고 그 나라로 가서 살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그곳으로 가도 좋다고 말씀하신다. 특히 사리불에게 '그대는 이 묘희세계와 무동불을 보았느냐. 못 보았느냐'라고 묻는다. 부처님은 사리불의 '이미 보았다'는 ㄷ애답을 듣고 안심했다. 그리고 사리불은 부처님을 향해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의 땅을 얻음이 무동불과 같고 신통력을 얻음이 유마힐같이 하게 하소서'라고 원하고 이 청정한 땅의 실현을 이 사바세계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발원한다. 그러자 이 묘희국의 무동불의 세계를 이 지상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유마경>에서 교시하고 있는 바로 석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받는 것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 경이 갖고 있는 의의를 힘주어 강조하는 것이다.

법의 공양

계속되는 '법공양품(法供養品)'은 이 경의 흉통을 강조한다. 이 품은 <유마경>만큼 '불가사의자재신통결정 실상의 경전(不可思議自在神通決定實相經典)' 을 아직껏 들어 본 적은 없다고 찬탄하고 있다. 제석천은 이 진리는 지상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고 찬탄의 말을 한다.

그리고 이와같이 이 경이 교시하고 있는 바를 듣고 신해수지(信解受持)하여 독송하고 그것을 여러가지의 교육수단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 알기 쉽게 설명 제시하는 일이 올바르게 이루어진다면 그 교시가 보전되어 전해질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것은 참다운 법의 공양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법의 공양이란 십이인연을 인용해 상견(常見) 단견(斷見)에 빠지지 않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양견에 빠지면 불교의 근본 사상을 상실하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공양이라 함은 법공양보다 더 큰 것은 없다는 것이 이 품의 강조점이다.

미륵의 출현

최후로 '촉루품(囑累品)'인테 촉(囑)이란 부촉으로 이 경이 교시하고 있는 바를 넓히고 보호하도록 부촉한다는 것이다. 루(累)는 힘든 노력이며 그 노력을 자기의 임무로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미륵보살이 나타나서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당신이 입멸한 후 말세에서도 신력으로서 이 경을 지상에 널리 홍포하여 단절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부촉을 받는다.

미륵보살은 이 부촉을 수지함에 있어서 수호를 맹세하고 있는데 부처님은 다시 아난다에게도 이 경을 수지하고 널리 유포해야 할 취지를 맡긴다. 이에 아난다가 이 경을 무엇이라 명칭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부처님은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또는 <불가사의해탈법문경(不可思議解脫法文經) >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끝난다.

대부분의 경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해서 '개대관희 신수봉행(皆大觀喜 信受奉行)'으로 맺어지는데 이 경 역시 구마라집 번역에 따르면 '장자유마힐. 문수사리. 사리불. 아난다 그리고 여러 천인 아수라 일체의 대중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고 신수봉행했다'고 끝을 맺고 있다.

<유마경>에 대해서는 옛부터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혔으며 주석서 또한 적지않게 쓰여졌다. 중국의 경우 문헌 자료를 보면 이 경은 승조, 길장과 같은 학자에 의해 주석 되었으며 수없이 강설(講設) 되었다.

 

 

 

 

 

 

 

 

실론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gikoship/15780676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