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고려시대의 불교입니다. 현재 한국불교의 성격이 이 때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말에 전래되고 수용된 선은 고려에 와서 독자적인 전재를 하여 구산선문으로 완성되었고, 현재 조계종의 원류가 이 시대에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에 없었던 천태종이 성립되었고, 선종과 함께 교종도 발전하여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체제가 갖추어졌습니다. 태조의 호국신앙이 계승되어 국가의 안녕과 복을 비는 법회가 빈번하게 개최되어 불교의식이 가장 성행하였으며, 외적의 침입을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판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계율을 어기는 일부 승려들이 민심을 현혹시켰고, 불교교단의 확대와 함께 지나친 사찰의 건립은 많은 피해를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
신라말에 이르러 귀족간에 왕위쟁탈이 계속 일어나 왕실의 세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정세를 틈타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세력권을 형성하였고, 민중은 거듭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백제의 옛 영토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북방에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였습니다. 신라는 이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쇠망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고려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켰고, 이듬해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켜 한반도를 통일하였습니다.
태조 왕건은 건국 초기부터 민심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를 건국 이념과 국가신앙으로 정착시켰는데, 이는 호국신앙의 전통을 계승한 것입니다. 또 도선(道詵)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그의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에 의거하여 많은 사찰과 불상, 탑을 건립하였고, 태조는 도선의 사상을 그대로 신봉하여 즉위 원년(918)에는 팔관회를 개최하여 연례행사로 규정하였고,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그 곳에 10개의 사찰을 창건하였으며, 유언으로 훈요십조를 내렸는데 이 가운데 3조가 불교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제4대 광종은 즉위 2년(951)에 태조와 그의 왕비인 유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봉은사와 불일사를 창건하였고, 958년에는 과거제도를 채택하면서 이에 준하여 승과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광종 또한 태조와 마찬가지로 호족을 비롯한 적대세력을 저지하여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963년에 귀법사를 창건하고, 이곳에 구호기관인 제위보를 설치하여 각종 법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는 귀법사의 균여(均如)와 탄문(坦文) 등을 통하여 호족 세력에 반발하는 민중을 포섭하여 개혁을 지지해주는 사회기반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968년에는 자신의 죄를 소멸하려는 뜻에서 홍화사, 유엄사, 삼귀사를 창건하였고, 이 해에 혜거(惠居)를 구사에, 탄문을 왕사에 임명함으로써 국사와 왕사를 제도화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불교계의 큰 과제였던 선교 융합을 시도하였으나 광종 이후에는 중단되었습니다.
제8대 현종은 12세에 승려가 되어 숭교사, 신혈사에 머물다가 강조(康兆)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라 고려왕조의 기틀을 다지는데 주력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하였으나, 현종 1년(1010)에 거란의 침입으로 왕은 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적을 물리치고자 대장경 판각에 착수하여 제작된 5000여권을 부인사에 보관하였습니다. 또 이 시기에는 승려들을 궁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공양하는 반승(飯僧)이 연례행사로 베풀어졌는데, 이러한 불교행사와 대장경 판각 등은 국난을 극복하려는 호국정신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10대 정종 12년(1046)에 처음으로 경행(經行)이라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경행이란 질병이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불교행사로서 대중을 세 무리로 나누어, 맨 앞 받침대에 <인왕반야경>을 올려놓고 걸어가면, 그 뒤에서 승려들이 <인왕반야경>을 독경하고, 그 뒤에는 관리와 백성들이 뒤따르면서 개경의 거리를 도는 의식이었나 불교의식이 성대해지면서 점차 사치와 타락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제11대 문종 10년(1056)에는 부역을 피할 목적으로 출가하여 돈을 모으고 농축업을 하는 승려들이 늘어나자 이들을 환속시키고 모든 사찰에는 계율을 잘 지키는 승려들만 머물도록 하는 칙명을 내렸습니다. 문종 19년에 왕은 넷째 아들을 출가시켰는데 그가 바로 대각국사 의천(義天)입니다. 문종 때에는 수많은 법회나 불사가 성행하여 불교의식이 전성기를 이루었다. 한편으로는 승려들의 사치와 부패도 심하여 일부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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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은 선종 2년(1085)에 송으로 가서 천태와 화엄을 배우고 이듬해 귀국하여 흥왕사에 머물면서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나라 안팎의 불서를 수집하여 속장경을 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숙종 2년(1097)에 자신을 위해 건립된 국청사에서 처음으로 천태교학을 강의하였습니다.
또한 숙종 4년(1099)에는 처음으로 천태종 자체 내에서 승과를 실시하였고, 숙종 6년에는 국가에서 천태종 대선(大選)을 행함으로써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은 하나의 종파로 공인되었습니다. 그러나 미신적 주술로써 민심을 현혹시키는 승려들이 계속 늘어났고, 반승을 비롯한 기복적인 불교행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제17대 인종 때에도 기복, 주술적인 불사만을 빈번히 행하여 궁정에는 승려들이 가득하였고, 사찰에서는 자주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또 서경출신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왕의 고문에 추대된 묘청(妙淸)은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에 의거하여 서경천도를 주장하였으나 개경의 김부식 등 사대주의자들의 반대로 좌절되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고 부하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묘청의 난을 계기로 개경의 문신들이 득세하여 무신이 차별을 받게 되자 의종 24년(1170)에 이의방은 정중부, 이고 등과 합세하여 무신정변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켰다. 명종 4년에 이의방은 승려 종참과 정중부의 아들 균에게 살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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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혼란 속에서 보조국사 지눌은 조계산 수선사를 중심으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하여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으며, 그는 제자들을 지도할 때에 <금강경>, <육조단경>, <화엄경>을 중심으로 강의하였는데 이는 한국 선종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지눌의 제자인 수선사 제2세 진각국사 혜심(慧諶)은 <선문염송>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공안 1125칙을 불경이나 조사의 어록에서 발췌한 다음 그에 대한 요지를 제시하고 송(頌)을 붙인 것입니이다
제23대 고종 재위 46년 동안에는 거란과 몽고의 침략으로 호국적인 기복불교가 더욱 성행하여. 현종 때에 판각하였던 대장경판이 고종 19년(1232) 몽고군에 의해 불타버리자 16년에 걸쳐 다시 새겨 재조대장경을 완성하였습니다.
제25대 충렬왕 히우 몽고의 지배하에서 자주적인 발전 역량을 상실했던 불교계는 격심한 타락과 분열, 대립의 양상을 보였습니다.
제31대 공민왕 때에 보우(普愚)는 임제종을 도입하여 선문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였고 그와 동시대의 인물로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승려로는 경한(景閑)과 나옹(懶翁)이 있었습니다. 경한은 무심선(無心禪)을 제창하였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저술하였습니다.
보우의 문하에서는 혼수, 찬영 등이 배출되었고, 나옹의 문하에서는 자초, 축원, 법장 등의 고승들이 배출되어 조선 초기 불교의 명맥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불교를 비판, 배척하는 배불운동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며, 정도전은 이론과 실제의 두 가지 면에서 대대적인 불교배척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불교도의 윤리적 타락에 관한 비판은 조인옥에 의해서도 신랄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불교도들의 물욕과 음욕을 밝히는데 집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