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가 깨달은 중도는 무엇일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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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민
기사입력 2018-08-14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이는 고통스러운 인생을 어떻게 하면 극복을 할 수 있을까를 진정으로 고민한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도는 치우치거나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삶을 말한다.[1]이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충동과 욕망이 있는데 이것이 그대로 인간생활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되며, 부족과 과도(過度)의 중간으로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는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이 양 극단 사이의 중간을 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수치나 수량적인 중간치가 아니라 현실적인 상황에 맞는 최상의 절충점을 찾는 것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석가가 말하는 중도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양극단을 피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감각적 쾌락에 관해 탐착하는 것을 일삼는 것이니 저열하고 비속하고 범부의 소행으로 성현의 법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괴롭힘을 일삼는 것이니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법이 아닌 것으로 무익한 것이다.[2]
법륜 스님은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양극단을 피하려는 이러한 석가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타마는 출가수행의 본래 목적을 상기하면서 독자적인 방법을 찾았습니다. 육체의 욕망에 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쾌락주의는 아니지만 고행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고행주의를 부정하고, 육체를 쫓아다니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극복하는 의미에서 쾌락주의를 부정하면서 선정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선정을 받아들여 새로운 수행을 준비했습니다.[3]
이와 같이 석가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비결은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를 중도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중도의 깨달음이 바로 열반과 해탈에 이르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사성제, 즉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거룩한 진리의 네 번째는 석가가 깨달은 중도에 관한 가르침인 것이다.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이 생기게 하고 지혜가 생기게 하며 고요함, 곧 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4]
<불교성전>은 중도에 대한 석가의 가르침을 이렇게 묘사한다,
부처님은 다섯 사문들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였다.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사문들아,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극단으로 치우치는 길이 있다. 사문은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두 가지 치우친 길이란 하나는 육체의 요구대로 자신을 내맡기는 쾌락의 길이고 또 하나는 육체를 너무 지나치게 학대하는 고행의 길이다. 사문은 이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배워야 한다. 여래는 바로 이 중도의 이치를 깨달았다. 여래는 그 길을 깨달음으로써 열반에 도달한 것이다. 여래는 육체의 쾌락을 따르는 길과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의 길을 넘어선 곳에서 가장 올바른 길을 찾아낸 것이다.[5]
그렇다면 석가는 중도를 어떻게 깨달았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석가는 고행을 통해서는 열반에 이를 수 없다는 깨달음을 통해서 중도의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석가가 어떠한 고행의 길을 걸었으며, 왜 고행의 길을 중단하고 중도의 길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불교성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몸과 마음이 탐욕과 집착을 떠나 고요히 자리 잡고 있어야 그 고행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싯다르타는 참담한 고행을 다시 시작했다. 싯다르타는 그 당시 인도의 고행자들이 수행하던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고행만을 골라 수행했다. 먹고 자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고 몇 톨의 낟알과 한 모금의 물로 하루를 보내는 때도 있었다. 그의 눈은 해골처럼 움푹 들어가고 뺨은 가죽만 남았다. 몸은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로 변해갔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아직도 완전히 번뇌를 끊지 못했으며 삶과 죽음을 뛰어 넘지도 못했다. 그는 여러 가지 무리한 고행을 계속했다...... 고행을 시작한지 다섯 해가 지나갔다. 지독한 고행을 계속해보았지만 자기가 바라던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그가 지금까지 해 온 고행에 대해 문득 회의가 생겼다. 육체를 괴롭히는 일은 오히려 육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를 괴롭히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맑게 가짐으로써 마음의 고요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고행을 중지하고 단식도 그만 두기로 했다. 그리고 지나치게 지쳐버린 육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네란자라 강으로 내려가 맑은 물에 씻었다. 그때 마침 강가에서 우유를 짜고 있던 소녀에게서 한 그릇의 우유를 얻어 마셨다. 그 소녀의 이름은 수자타였다. 우유를 마시고 나니 그의 몸에서는 새 기운이 솟아났다.[6]
그 후로 석가는 숲 속에 들어가 그가 간절히 바라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석가가 말하는 중도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양극단을 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가 말하는 중도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 사이의 중간적인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석가가 말하는 중도는 쾌락주의를 거부하지만 다소 고행주의 방향으로 치우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석가가 말하는 중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러니까 석가가 말하는 중도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딱 중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중간적인 위치보다는 고행주의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필자의 입장에서 석가가 말하는 중도가 생겨난 역사적 배경을 종교학적으로 추론하고자 한다.
석가모니가 살던 시절의 쾌락주의는 인도 유물론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인도 유물론은 당시 유행하던 무신론적 철학사상으로 감각 유물론이라고 한다. 감각 유물론은 초월적이고 영적인 세계를 부정하고 단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이해되고 파악이 되는 현실 세계만을 긍정한다.쉽게 말해 우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로 맡고 그리고 손으로 만져서 확인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과학적인 사고를 가졌다는 것이다. 정세근 교수는 인도 유물론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한다,
이러한 감각론과 무신론은 인도 사유의 특질을 잘 보여주는데, 이런 사유의 시원에 차르바카 학파가 있다. 차르바카 학파는 종교에 대해 철저히 냉담했다. 그들의 주장은 ‘로카야나’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이 세상만이 참이라는 것으로, 우리의 지각이 지식의 원천이다. 그들에게, ‘지각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조차 지성에 의해 질적으로 승화된 몸뚱이일 뿐이다. 따라서 신도 없다...... 차르브(Carv)의 어원은 ‘먹는다’는 뜻이다. 먹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먹어야 산다. 먹어야 힘을 쓰고 기쁘다. 그 밖의 형이상학은 모두 가짜다. 따라서 그들은 건강과 쾌락을 받아들였고, 법과 해탈을 부정했다. 그들은 노래한다.
삶이 너의 것인 동안 즐겁게 살아라.
아무도 죽음의 부리부리한 눈을 피하지 못하네.
그들이 우리의 이 껍데기를 태워버리기만 하면
어찌 이것이 다시 돌아오리오?
우리는 다시는 이 육신을 지니고 태어나지 못한다. 죽음을 외면할 수도 없지만 죽음 뒤에 다시 삶이 오는 것도 아니다. ‘짧은 인생 즐겁게 살다가라’는 뜻이다.
정통 힌두사상에서 강조되던 업도 부정했다. 행위만 있을 뿐, 행위의 누적이나 누적으로 인한 응보는 없다. 내가 잘못했다고 꼭 죄를 받는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나쁜 놈이 잘사는 꼴을 어디서나 본다. 그런데도 왜 선을 행해야 하는가? 철학적으로 가장 대답하기 힘든 이 문제를 그들은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들은 완전히 영혼이 없다는 주장과 영혼은 있지만 육체에 딸렸다는 주장으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윤회는 강력하게 부인된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주어지는 책임감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따라서 삶의 목적은 쾌락의 추구라고 보았다.[7]
석가 당시에도 불교와는 다른 사상들이 있었다. 이른바 육사 외도설이 그것이다. 이들은 석가와 같은 시대의 인물들로 모두 자신들만의 특징을 가진 6명의 자유로운 사상가들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인도 유물론이다. 인도 유물론을 대표하는 사상가는 아지따 께사깜발린이다. 그는 지(땅), 수(물), 화(불), 풍(바람)의 4가지 물질적인 요소들 만을 진정한 실재로서 받아들였고 영혼의 존재는 부정하였다. <불교사상의 이해>는 이런 그의 유물론 사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단멸하고, 신체는 4가지 원소로 환원된다. 내세와 같은 것도 있을 수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으며 현세가 인생의 전부라 하였다. 그는 철저한 유물론자였으며 생의 가치 면에서는 쾌락주의의 입장을 취했다.[8]
그렇다면 석가의 사상과 인도유물론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그 공통점과 다른 점은 아래와 같다. 이들의 공통점은 크게 세가지다. 첫째로 신이 없다고 믿는 무신론이고, 둘째로 영원히 불멸하는 영혼은 없다고 주장하는 무아론이고, 셋째로 사후세계의 부정이다. 그리고 이들의 차이점은 첫째로 인도유물론은 쾌락주의를 지향하는데 석가는 금욕주의를 지향한다. 둘째로 인도유물론은 업(선행과 악행)과 과보(선한 행위에 대한 보상과 악한 행위에 대한 보상)를 드러 내놓고 표면상으로 부정하는 반면 석가는 업과 과보를 표면상으로는 인정하는 듯하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셋째로 인도유물론은 윤회사상이나 사후세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반면 석가는 윤회나 사후세계를 말하지만 그것을 실제적인 것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 석가는 인도유물론의 사상을 상당할 정도로 많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무신론, 무아론 그리고 그로 인한 윤회나 사후세계의 부정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석가는 인도유물론의 사상 중에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쾌락주의다. 석가는 인도유물론의 쾌락주의적 성향을 과감하게 부정하였던 것이다. 그는 유물론의 쾌락주의 대신에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고행과 금욕주의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바로 석가가 말한 중도의 길이 이렇게 열리는 것이다. 한국의 학승 윤호진 스님은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그리고 인도유물론의 사상적인 차이점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윤회사상은 인도의 거의 모든 종교와 철학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각 종교와 철학에서 내세우는 윤회설에는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면 힌두교와 자이나교는 윤회할 수 있는 주체로서 아뜨만이나 지와(영혼)를 내세운다. 그러나 불교는 그와 같은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자이나교에 의하면 까르만(업)은 미세한 물질적인 입자(원자)로 이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영혼에 달라붙어 영혼과 결합한다…… 그러나 불교는 까르만(업)을 ‘일종의 행위’ 또는 그 결과로서 초래되는 어떤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해탈에 대해서도 힌두교에서는 ‘범아일여 상태 (신과 인간의 영혼이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는 상태)’를 가리키는데, 자이나교에서는 ‘영혼이 모든 업에서 벗어나 우주의 정상에 올라가 그곳에서 영원한 안락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뜨만도 지와도 인정하지 않는 불교의 열반은 이들과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윤회사상은 인도인들에게는 거의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 같은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인간의 사후운명에 대한 의문에 답을 준다…… 윤회가 없다면, “죽은 후 보상도 벌도 없다. 공덕을 닦기 위한 모든 노력도 헛된 것이다. 해탈을 얻기 위해 이 생에서 고생하는 것 역시 아무 의미가 없다. 모든 악으로부터의 해방은 죽음과 함께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똑같이 이루어진다.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오직 감각적인 만족을 취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하는 ‘외도’들의 주장(인도 유물론)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9]
그렇다면 불교와 자이나교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자이나교는 불교와 함께 브라만교를 개혁하고자 했다. 자이나교는 신적인 존재와 제사의식을 모두 부정했다. 이들은 브라만교에서 행해지는 동물희생제를 반대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영혼과 육체를 철저하게 분리하는 이원론을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에 더럽혀진 영혼을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영혼의 정화를 위해서 엄격한 계율을 따랐다. 이 계율을 지키므로 그들은 업을 씻게 되고, 결과적으로 육체적인 죽음과 함께 해탈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불교사상의 이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하위라(자이나교의 창시자)라는 이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윤회하는 생존으로부터의 해탈의 길을 가르쳤다. 업을 비영혼, 즉 물질로 보고, 이 업물질에 의해 영혼이 속박됨으로써 윤회가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고행을 실천할 것이 강조된다. 과거의 업을 소멸하는 한편 새로운 업의 유입을 방지하여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육체에 고통을 주는 고행이 최상의 방법이라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고행을 비롯하여 감각의 억제, 정욕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세상으로부터의 초연함, 무소유 그리고 나체, 참회와 같은 수행이 강조된다.[10]
정세근 교수는 불교와 자이나교의 공통점과 차이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불교는 자이나교와 닮았다. 엄청난 흡사점이 있다.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주장의 내용도 그렇다. 형이상학적으로는 둘 다 무신론이고, 현실적으로는 둘 다 계급타파를 주장한다...... 첫째, 자이나교는 물질과 구별되는 영혼, 순수성, 불멸성을 말하지만, 불교는 영혼의 부재를 말한다. 자이나교는 이원론에 충실하다...... 비영혼의 것들이 영혼을 구속한다..... 그러나 불교는 영혼을 말하지 않는다......
둘째...... 자이나교는 원자(물질)가 미세하게 (영혼에) 달라붙는다는 설정으로 영혼과 비영혼의 교섭을 설정한다......자이나교는 업을 만드는 물질(원자)에 신경을 많이 쓰지만, 불교는 사물에 항상성(불변함)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관 작용에 더욱 관심을 쏟는 것이다......
셋째, 자이나교는 윤회를 말하면서 그것에서 벗어나는 방도로서 실천적 행위의 중요성을 부각하지만, 불교는 연기를 말함으로써 신에 의해 결정된 윤회가 아닌 인간행위의 윤리적 인과성을 강조한다. 인도사유 가운데 가장 윤리적인 학파는 자이나교와 불교를 꼽을 수 있다...... 자이나교도에게 윤회는 신이 개입하지 않는 자연의 진정한 모습으로, 일종의 자연법칙과도 유사하다......윤회라는 영혼의 현상이 있고 내가 쌓은 업에 의해 윤회가 결정될 뿐이다...... 그런데 불교는 윤회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 불교는 영혼의 불멸을 믿지도 않고, 세계가 물질적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도 믿지 않고, 윤회가 신에 의해 주어진다고 믿지도 않았다. 자이나교는 물질과 대비되는 영혼이 있었기 때문에 영혼이 떠돌다가 돌아갈 물질세계를 상정했다......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 영혼이 갈 곳을 찾는 것은 추론의 과정상 자연스러워 보인다. 보통의 영혼은 돌고 돌지만, 수행을 통해 업(원자)을 모두 떼어내면 드디어 윤회에서 벗어나 해방을 얻는다. 그러나 불교는 영혼을 부정하면서도 불변하는 물질적인 실체도 긍정하지도 않았다.[11]
그렇다면 자이나교와 불교의 공통점은 무신론과 고행을 통한 거룩한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의 차이점은 첫째로 자이나교는 유아론이지만 불교는 무아론이다. 둘째로 자이나교는 윤회와 사후세계를 인정하지만 불교는 윤회와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석가가 쾌락주의(인도유물론)와 고행주의(자이나교) 사이의 중간적인 입장을 표명했지만 실제로는 고행주의로 기울어져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석가는 감각기관의 억제, 정욕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세상으로부터의 초연함 그리고 무소유의 삶을 가르쳤다. 이는 바로 자이나교의 특성과도 거의 동일한 것이다. 자이나교가 신을 부정하면서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업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자이나교는 윤회를 실제로 믿었고, 그들은 많은 무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풀이나 나무 그리고 벌레들도 영혼을 갖고 있어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을 가진 것들을 죽이는 것은 악업을 쌓는 것이기에 불살생은 이들이 지켜야 할 최고의 원칙이다. 비록 석가가 실체적인 윤회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도 모든 생물과 무생물에 대한 비폭력과 불살생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그리고 인도유물론의 차이를 도표로서 확인해보자.
| 힌두교 | 자이나교 | 불 교 | 인도유물론 |
신관 | 유신론 | 무신론 | 무신론 | 무신론 |
인간관 | 유아론 | 유아론 | 무아론 | 무아론 |
내세관 | 윤회론 | 윤회론 | 반윤회 | 반윤회 |
구원관 | 업을 제거 제사와 수행 | 업을 제거 수행 | 수행을 통한 깨달음 | 없음 |
도덕관 | 거룩한 생활 | 거룩한 생활 | 거룩한 생활 | 없음 |
신비주의 | 신과 합일 | 영혼의 정화 | 없음 | 없음 |
금욕주의 | 고행주의 | 고행주의 | 금욕주의 | 쾌락주의 |
결과적으로 석가의 사상은 인도유물론의 특징가운데 쾌락주의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무신론, 무아론 그리고 반윤회 사상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반면 석가는 자이나교의 영혼불멸사상(유아론)과 업 사상(원자)을 강조하는 윤회론을 거부하였다. 그 대신 자이나교의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강조하는 석가의 도덕철학은 참으로 신비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선행이나 덕을 쌓는 동기나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힌두교처럼 사후세계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 좋은 신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냥 고통스럽고 허무한 인생이기에 아무런 소유나 감각적인 쾌락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고통스러워지니까 그 고통의 원인이 되는 모든 소유욕과 감각적인 욕망을 버리라는 것이다. 특별히 성적인 욕망은 버리라고 한다. 결국 거룩하게 살라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거룩한 떠돌이로 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동기부여나 보상이 없이 선행을 추구하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자이나교처럼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이런 면에서 석가의 도덕철학은 참으로 의아한 것이다.
힌두교처럼 사후세계의 보상이나 아니면 자이나교처럼 영혼의 정화를 통해 윤회를 벗어나는 것도 아니라면 인도 유물론처럼 차라리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석가가 주장하는 거룩한 삶은 상식적으로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아주 ‘비현실적인 사상’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를 쉽게 설명하자면, 무신론과 쾌락주의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조합이요 짝이다. 그리고 유신론이나 유아론은 윤회설이나 사후세계의 실재와 자연스러운 조합이다. 즉 아주 잘 맞는 궁합이다. 더 나아가 윤회설과 사후세계의 긍정은 고행이나 금욕적인 삶과는 더욱 자연스러운 조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신을 부정하고 영혼의 실체도 부정하고 또한 사후세계조차도 부정하는데 고행이나 금욕주의 그리고 거룩한 삶을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납득하기가 어려운 조합이라는 것이다.즉 그렇게 짝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이는 앞서 인용한 윤호진 스님의 주장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이 된다.
윤회사상은 인도인들에게는 거의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 같은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인간의 사후운명에 대한 의문에 답을 준다…… 윤회가 없다면, “죽은 후 보상도 벌도 없다. 공덕을 닦기 위한 모든 노력도 헛된 것이다. 해탈을 얻기 위해 이 생에서 고생하는 것 역시 아무 의미가 없다. 모든 악으로부터의 해방은 죽음과 함께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똑같이 이루어진다.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오직 감각적인 만족을 취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하는 ‘외도’들의 주장(인도 유물론주의자들)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석가의 중도적 사상은 서로 반대가 되어서 도저히 조합이 불가능한 두 가지 사상들, 즉 무신론과 신비주의, 무아론과 금욕주의를 자의적으로 혼합시켜 만든 한 비범한 철학자의 창의적인 시도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12] 다시 말해, 인도유물론의 무신론과 무아론 그리고 자이나교의 금욕적인 생활, 즉 서로 조합이 맞지 않는 두 사상들을 합성하여 만든 비현실적인 사상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1]중도, 곧중용의개념은우리에게도잘알려져있다. 공자의손자인자사(BC402~?)가 <중용>이라는책을저술하였기때문이다. 자사는인간행위의이상적기준으로중용의원리를체계화하였는데, 중(中)이란지나치거나미치지못함이없이꼭알맞은것을말하며, 용(庸)은언제나변함이없이바른것을말한다. 즉, 중용이란덮어놓고중간적인것이아니라, 인간행위의가장참되고불변하는원리인것이다.
[2]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90.
[3]인간붓다, 278.
[4]Ibid, 91.
[5]종교간의대화, 142-43쪽에서간접인용.
[6]Ibid, 140-41쪽에서간접인용.
[7]윤회와반윤회, 157, 160-62.
[8]불교사상의이해, 47.
[9]무아, 윤회문제의연구, 28-29.
[10]Ibid, 48-49.
[11]윤회와반윤회, 178-81.
[12]무아, 윤회문제의연구,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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