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생명사상에 관한 한 고찰
조 수 동*
1. 머리말
생명이란 일반적으로 모든 생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속성, 또는 특성이다. 이것은 감각적으로는 어느 누구나 다 쉽게 느낄 수 있지만, 생명현상의 핵심적 물질이라 하는 DNA 구조가 밝혀지고, 그것의 합성 나아가 유전자 조작에 의한 복제 생명체가 탄생하고 있는 지금에 있어서도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완전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한 사정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유전자 정보가 완전히 해독된다 해도 생명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왜냐하면 유전자 정보가 완전히 해독되어 유전자 합성과 그 역할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생명이 어떻게 형성되느냐 하는 것은 여전히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생명이라 할 때 그것은 이 지구상의 생태계를 구성하는 모든 種이 삶을 누릴 수 있는 절대적 권리를 말한다. 세균을 제외하고 모든 고등생물은 유성생식을 한다. 유성생식은 동물의 짝짓기와 식물의 꽃가루받이에서 시작된다. 사람의 존재는 모태 내에 수태된 그 순간부터 독립된 개체라는 생명체로서 엄숙히 선언된다.
종래 생명은 우리들이 그것에 의해서 생겨나서 살아가는 것으로 人智를 넘어선 신비한 것, 그리고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과학이 개입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렇지만 현재의 과학기술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생명의 문제에 적극 개입하고 있다. 그 한 예가 생명복제이다. 그것은 유성생식이 아닌 시험관내에서 사람이나 동물의 조직에서 떼어낸 세포, 그리고 그 세포내의 염색체를 첨단 과학기술로 수정란의 염색체와 치환함으로써 똑같은 개체인 사람과 동물이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 기술은 상상의 단계가 아닌 구체적으로 이미 동물실험에서 성공한 실례로 나타났다. 이러한 기술은 인간이 자식을 낳기 위한 필수조건인 사랑의 힘에 의한 남녀의 결합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보면, 生은 (식물의) 눈이 트다, 생기다, 태어나다, 살아가다, 만들어 내다, 생기 발랄하다, 싱싱한 것 등과 같이 무생물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命은 살아가는 힘, 수명 등의 의미 외에 가장 중요한 것, 본질, 중심, 진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생명과학에서는 무생물과 확실하게 구별되는 생물의 특징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 그 몸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 자기를 보존하기 위한 활동 즉 에너지대사와 물질대사를 한다. 셋째, 자신과 같은 자손을 만들기 위해 세포분열 즉 DNA 복제를 한다. 넷째,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진화한다.
이같이 생명은 유기적 생장성, 성장변화의 활동 기능, 내·외적 조건에 순응하는 적응성, 자체 보존을 위한 활동성, 생식작용을 위한 활동성 등을 그 특징으로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생명이란 살아 움직이면서 자기 보존을 위해서 끊임없이 활동하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거기서 일단 생명은 무기물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견해와는 다른 입장도 등장하고 있다. 지구는 생물과 무생물의 복합체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그것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제임스 러브럭의『가이아의 시대』에 의하면 그는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라 보고, 그것을 가이아라 부르고 있다. 가이아란 그리이스 신화의 대지의 여신인데, 이것이 생명의 개념과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해서 설명하는 입장과는 분명 다른 견해이며, 불교에서의 一切有情의 개념과 유사점이 있다고 보여진다.
불교에 있어서도 생명에 대한 구체적인 경론의 언급이 없어 명확하게 그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불교에서는 의식 및 만유의 실상에 대한 심오한 이론 전개는 있었지만, 생명의 본질적 구조나 생명과 자연환경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론적 전개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생명의 개념과 가장 유사한 有情論을 중심으로 불교에 있어서의 생명의 문제를 고찰하고자 한다.
2. 불교의 생명관
1) 우주의 성립과 유정업
인도에서는 생명의 기원으로 창조설, 外界飛來說, 자연발생설 등 여러 학설이 주장되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생명의 생기를 연기설에 의해서 설명한다. 불교에서는 세계를 有情世間, 器世間, 智正覺世間으로 나눈다. 기세간은 유정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欲界, 色界, 無色界의 三界로 이루어진다. 이 기세간에 살고 있는 자가 유정세간이며, 이 유정들이 미혹의 생사 유전을 거듭하여 초래하는 과보의 세계가 欲界, 色界, 無色界이다. 욕계는 일체유정이 탐욕, 음욕 등의 근본적인 욕망으로 인하여 성립되는 세계이다. 색계는 욕계를 초래하는 그러한 근본욕심은 없어졌지만, 아직은 더 이상 욕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수승한 물질이 남아 있는 세계이다. 무색계는 수승한 물질의 존재도 없는 정신상태의 세계를 의미한다. 먼저 有情들이 살아가는 기세간 즉 우주의 성립이론부터 고찰해 보자.
{구사론}에서는 우주 창조에서부터 괴멸에 이르는 成住壞空의 四劫說을 말하고 있다. 사겁설은 일종의 불교 시간론인데, 각각의 겁에 다시 각 20겁이 있어 합계 80겁 동안에 우주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즉 기세간이 80겁을 주기로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成劫 vivarta-kalpa은 이 세계가 성립하기 시작하여 완성될 때까지를 말한다. 이 세계가 시작하는 최초의 원동력은 사트바까르만(sattvākar- man, 일체 유정의 業增上力)으로 이것에 의해서 허공 중에 있는 微細風이 점차 생겨나고, 이 미풍이 漸增하여 一大風輪이 생기고, 이것이 다시 大雲雨를 일으켜서 풍륜상에 灌注하여 水輪을 형성시킨다. 수륜에 다시 大風이 일어나 그 수면을 응결시켜 金輪을 이루고, 이 금륜에서 九山과 八海가 구성되어 비로소 유정이 살아갈 수 있는 기세간이 완성된다. 둘째 住劫 sthiti-kalpa은 기세간에서 유정세간이 유지 상속되는 기간이다. 壞劫 saɣvarta-kalpa은 주겁이 다한 후에 이 세계가 파괴되기 시작하는 기간이다. 먼저 19겁에 걸쳐 유정세간이 파괴되고, 최후 일겁에 기세간이 파괴된다고 한다. 그리고 空劫 saɣvatsara-kalpa은 공허한 공간만이 잔존하는 기간으로 20겁이다. 이 기간이 모두 경과하면 또 유정의 업력에 의해서 다시 허공 중에 미풍이 일어나 세계를 구성하는 成劫이 시작되어 住·壞·空劫 등의 四期가 순환하여 끊어지지 않는다.
{구사론}에서는 또 전 우주를 三千大天世界라 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밖에도 무수한 우주가 펼쳐져 있다고 한다. 이 사겁설에서는 우주 생성의 원동력이 사트바까르만이라 하고 있다. 즉 이 우주는 유정의 업이 원동력이 되어 성립, 전개, 발전된다는 것이며, 무수히 많은 우주에서 다른 우주에 생존하고 있는 중생의 활동이 새로운 우주 형성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인간이 바로 우주 창조의 주체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주를 생성하는 힘과 한 개체, 한 인간의 행위는 근원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우주생성의 원초적 힘인 사트바까르만은 생명체 특히 인간의 활동을 의미하는 데, 그것은 유정의 업의 증상력이고, 또한 전 우주의 成住壞空에 있어서의 증상력이다. 중생이나 천체가 절멸해도 그 업력은 강대한 잠세력으로 남아 있어 그 강대한 잠세력으로부터 일진의 미풍이 불기 시작한다. 즉 업력이 바람이 되고, 이 바람vāya으로부터 천체가 생기고, 일체 중생이 성립해 간다. 그러므로 천체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인간의 성립은 모두 일진의 미풍에 귀착한다. 여기서 風이란 자연현상으로서의 風을 포함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개체를 포함한 전 우주에 넘치고 있는 생명력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風을 통해 개체와 우주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그것은 생명 및 생명의 깨달음의 세계에 관여해 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고찰한다.
2) 일체유정의 존재요인
붓다의 과거세의 이야기를 적은 본생담 즉 {자타카}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다양한 중생으로 등장하고 있다. 예컨대 귀족, 바라문, 고행자, 상인, 정원사, 이발사, 코끼리, 사자, 원숭이, 새 등등이다. 석가모니 붓다가 이같이 과거세에 다양한 유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즉 하나의 생명이 다양한 모습으로 재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본생담의 이야기는 생명은 삶과 죽음에 의해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한 생명체는 자신의 행위에 따라 사람과 동물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주는 드넓은 생명의 바다이며, 우리는 이 생명의 바다에서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그가 받는 과보에 따라 갖가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원래 생명이나 형이상학적 실체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다. 단지 현실에서의 인간의 실상을 생사고뇌로 보고, 그것을 벗어나 해탈하기를 가르친다. 그것은 석가모니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생노병사로부터의 이탈이었다는 것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생노병사를 일관하고 있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 생명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라고 하는 물음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현상에 대해 불교에서는 연기설에 의해서 조건 지워진 모든 것들은 마치 폭포수가 끊임없이 흘러내리듯이 흘러간다고 본다. 정신적 현상이나 물질적 현상 모두 무상하게 변화해 가고 있음을 말할 뿐이다.
불교에서 생명과 가장 일치하는 개념은 有情이다. 유정은 sattva로 중생으로도 번역되는데, 생명을 갖고 존재하는 것, 살아 있는 것(生物), 감정이나 의식을 갖고 있는 것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유정은 많은 생명 있는 것, 一切生類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인간과 동물, 그리고 그 밖의 존재와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유정은 또 부처의 구제의 대상이 되는 인간, 즉 地 水 火 風의 사대로 합성된 육체를 가진 것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래서 때로 유정은 생존 주체, 불성이 있는 자 등의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迷界의 生類는 모두 생명적 존재라고 보고, 일체유정이라 할 때는 十方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을 가리킨다.
유정이란 생존하는 것 일체 즉 감정과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는 존재를 말하기 때문에 그 자체에 이미 집착하고, 染著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탐욕에 의해서 染著되는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정은 보통 우리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서 설명된다. 그래서 유정은 찰나에 생멸 하는 오온의 계속이라 한다. 유정이라 말해지는 것은 색·수·상·행·식에 대해서 欲있고, 貪있고, 喜있고, 갈애 있으며, 거기에 집착하고, 染着함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유정론은 인간 존재를 정신과 육체, 命과 非命의 2원으로 이해하는 자이나교도, 물질의 집합체로 이해하는 유물론자, 신체 즉 영혼으로 보는 쾌락론자들과는 분명히 다른 견해이다. 유정의 구성에 대한 학설로는 六界, 五蘊, 四食, 十二處, 十八界설 등이 있다. 이러한 이론들은 우리들의 신체를 정신적 방면, 영양적 활동, 인식활동의 여러 양태에 중점을 두고 관찰한 것으로 유정 성립을 분명하게 하려고 한 것이며 다분히 기계론적인 설명이라 볼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유정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정신(名)과 물질(色)이다. 명은 受, 想, 行, 識이고, 색은 지 수 화 풍의 四大와 이 사대가 만든 물질이다. 그러므로 명색이란 心身합성의 존재이다. 이러한 명색의 이론이 발전된 것이 五取蘊說이다. 오온은 색, 수, 상, 행, 식으로 수는 감수작용, 상은 표상작용, 행은 의지, 의지적 행위, 식은 인식주체, 인식작용을 의미한다. 이 오온이 무명, 갈애에 의해서 구체적인 유정의 개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온인 것에 의해서 유정, 중생이라는 이름 있으며, 오온 그 자체를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온에 대해서 탐착하고, 집착하고, 염착하는 유정이 바로 중생이라는 것이다. 염착하고 집착하는 대상이 오온이다. 우리들은 오온의 무상, 고, 무아에 대해서 常이며, 我라고 집착한다. 그러나 유정은 오온의 가화합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거기에 어떠한 실체성도 없다.
오온이 무상, 고, 무아임을 아는 것은 오온에 대한 取著을 遠離하는 것이다. 유정의 유정성은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여실하게 알지 못하여 탐욕을 일으키고 오취온이라는 존재자로서 건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온설의 진실성은 유정을 오취온적 존재라 보고 무상, 고, 무아인 오온에 있어서 존재하는 자기를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붓다가 유정을 오온설로 설명한 진의는 중생이 오온이라는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 유정의 가치성을 찾아내려고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을 포함한 일체는 인연의 산물로 절대적 존재라고 할 것이 없다. 유정 즉 생물적 존재도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고정적 靈體로서의 자아와 같은 것은 공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유정은 물질과 정신의 양대 요소가 인이 되고, 연이 되어 구성된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풀이한 것이 12연기설이라 할 수 있다. 유정이 연기하는 근본 원인은 무명이다. 무명은 생명의 원동력으로서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끊임없이 무엇을 욕구 하여 그것을 충족시키려는 활동성이다. 오온 결합의 제일조건도 무명 즉 살겠다는 의지이다. 무명을 지적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無始의 無知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생명론에 연관시켜 고찰하면 그것은 오히려 情意的 의지를 갖는 것이다. 살려고 하는 의지 즉 무명이 근원이 되어 오온을 유기체로 결합하여 생명현상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근원적 의지 즉 무명의 힘에 의해서 의식활동을 일으키고, 그 활동이 이윽고 유정 자체의 성격을 형성하여 미래의 자체를 규정해 가는 경과가 업이다. 우주생성 원인과 마찬가지로 유정을 성립시키는 직접적 원인도 역시 유정 각자의 업에 의존한다. 우리들의 신체는 우리들의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다. 이것들은 조작되고, 사념되고, 감수된 이전의 업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업을 자기로 하고, 업의 상속자이며, 업을 모태로 하고, 업을 의지처로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업에 의해서 중생 사이에 분별이 있고, 우열이 있게 된다.
업에 의해서 유정의 상속 전회가 있다는 것은 六界, 혹은 五蘊에 의해서 성립한 유정의 단위가 개체화하고, 특수한 성격을 갖고, 과거의 일체의 경험을 자기에 모아서 그 힘에 의해서 미래를 규정하고 창조해 가는 과정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정의 활동은 갖가지 조건에 의해서 지배되기 때문에 적어도 그 본질로부터 보면 유정은 실로 無始 이래의 존재라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제일조건인 무명 즉 살아야겠다고 하는 의지가 無始로서 그 기원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무명이 동력인이 되어서 오온, 육계를 취합시키고, 근본의지가 갖가지로 활동하여 생명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정의 성립은 많은 인연이 화합한 결과라 해도 결코 부분의 파괴에 의해서 수레의 관념이 멸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것이라 할 수 없고, 오히려 본질상에 있어서는 일종의 혼연일체로서 無始無終으로 상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가령 이것을 오온의 기계적 결합이라 볼 때, 인연의 근본이 무명, 업인 한 생멸인 것은 무시무종으로 상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수레와 같이 용이하게 해체하고 집성하는 것은 아니다.
六界說은 주로 물질적 요소, 즉 신체적 조직을 분명하게 하려고 한 이론으로 유정은 地·水·火·風·空·識의 6대로부터 성립하였다는 것이다. 지·수·화·풍·공에 의해서 신체적 기관 및 그 작용이 드러나는데, 地는 骨肉, 水는 血液, 火는 熱氣, 風은 呼吸, 空은 각가지 空隙이다. 識大에 의해서는 갖가지 정신적 활동이 현출된다. 지 수 화 풍의 사대가 이 공간을 토대로 육체를 성립시키고, 이 육체에 정신이 들어가 유정이라는 개체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부처, 인간, 자연계는 모두 六大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 3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상위가 없으며 또한 세계 전체가 물질적 존재의 상징인 五大와 정신적 존재의 상징인 識大 양자가 혼연해서 일체가 된 것이라 하고 있다.
12處설은 六根과 六境에 의해서 중생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處는『구사론』에 "心과 心所의 법이 生長하는 문이라는 뜻이 바로 處이다. 이 말을 해석하면, 心과 心所의 법을 생장할 수 있기 때문에 處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것은 그 작용을 생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라고 하고 있는데, 處는 心, 心所의 모든 종류의 心識과 심리작용을 생장시키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들의 정신작용은 감각기관과 거기에 상응하는 대상과의 관계에 의해서 일어난다. 즉 갖가지 정신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각기관과 거기에 상응하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식기관인 육근은 眼 耳 鼻 舌 身 意이며, 여기에 상응하는 육경은 色 聲 香 味 觸 法이다. 이러한 분류는 유정을 주관적 요소와 객관적 요소라는 입장에서 분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六根 중의 意根은 비물질적 심적인 존재이며, 오근은 이 意根에 의지해 있다. 그러므로 의지의 작용을 긍정하게 된다. 12처설이 오온설과 다른 점은 12처설에서는 무위법을 포섭한다는 것이다. 즉 意根은 삼세의 일체법과 무위법도 所緣의 경계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18界설을 살펴보자. 界 dhatu는 層과 요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층이라는 것은 극도로 미세한 규모의 요소들이 단순한 물질 덩어리의 기계적이고 外揷적인 축소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이유에 의해서 중층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 복합 구조상의 존재로 파악한다. 그리고 요소라는 것은 전체를 이루는 구성요소를 말한다. 『구사론』에서는 이 界를 설명하여, "법의 종족이라는 뜻이 바로 이 계의 뜻이다. 한 산 중에 구리, 철, 금, 은 따위의 종류를 많은 界라고 말함과 같이 이 하나의 몸에서 혹은 하나의 상속에서 18종류의 갖가지 법의 종족이 있기 때문에 18계라 한다. 이 중 종족이라는 것은 生本의 뜻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것에 의하면 界는 生本의 의미와 종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종족은 根 境 識 등의 18종류의 제법의 자성이 각기 다른 것을 말하고, 생본은 18계의 제법이 心 心所의 작용을 반영시키는 근본이 됨을 말한다. 18계설에 의하면 우리들의 정신작용은 근이 경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토대로 인식작용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근과 경은 대상을 받아들이는 기관과 대상이며, 식은 주관적 입장이다. 이 根 境 識의 三事和合에 의해서 우리들의 인식이 성립되며, 이 삼사화합에 의해서 나타난 세계가 一切이다.
12처설이나 18계설은 인간의 인식활동을 중심으로 유정을 설명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독립된 인간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어떠한 생물에도 적합한 것이다. 단 인간 이하의 동물에서 보면 그 정신력에 있어서 인간만큼 명백하지 않고, 물질적 요소의 힘이 강하게 기능하고, 인간 이상의 천인의 존재에서 보면 물질이 희박하고 정신 생활 쪽이 강할 뿐인 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유정을 구성하고 있는 원리는 어느 것이나 정신적 요인과 물질적 요인의 결합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양자는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유정들은 이같이 물질적 정신적 제요소의 결합에 의해서 출생되지만 그 동인을 찾아보면, 그것은 자신의 미혹에 의해서 그 미혹이 업이 되고, 그것이 부모나 사회의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 조건에 의해서 결합되어 현재의 자기가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생겨날 수 있는 여러 원인과 조건이 관계하여 그것이 성숙되었을 때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정이 세간에 출생하는 것은 胎生, 卵生, 濕生, 化生의 네 가지가 있다. "중생의 종류에 알로 생기고, 태로 생기고, 습기에서 생기고, 변화하여 생긴다. 이를 네 가지라 말한다. 생이란 생기는 종류를 말함이니, 온갖 중생 중에는 비록 딴 종류가 섞이었다 하더라도 생기는 종류끼리는 평등하다." 난생은 알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닭, 오리, 참새 등이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태생은 모태의 태를 빌려서 태어나는 것으로 인간이나 동물 등을 말한다. 습생은 벌레같은 것들이 습기에서 생기는 것을 말한다. 화생은 다른 것에 의해서 생겨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갑자기 생겨 나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나비가 번데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는데, 곤충은 화생이 아니라 난생이다. 경전에서는 중생으로서 천국이나 지상에 있는 신령들이나 지옥에 살고 있는 혼령 같은 것이 화생하는 중생이라고 하고 있다.
앞서 말한 육취의 유정과 그들의 출생을 연관시켜 보면,『구사론』에 "그 중에는 네 가지로 생기는 난생 따위의 중생이 있는데, 사람과 방생은 넷을 갖추었고, 지옥과 모든 천인은 오직 화생 만으로 생기고, 귀신은 태생, 화생 둘에 통한다."라고 하고 있다. 사람과 축생은 四生 모두에 통하고, 지옥과 천인 등은 오직 화생 할뿐이며, 귀신은 화생, 태생이라고 한다. 사람이나 축생은 태생에 근거하는데, 사생 모두에 통한다고 하는 입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이 사생설을 통해서 보면 인간은 일종의 생물로서 태생이며, 정신도 단지 인간에게만 있지 않고 동물일반 뿐만 아니라 식물에게도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식물에 있어서는 정신의 현현이 불충분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는 정신적 지능이 가장 잘 발달되어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개아는 그 본성에 있어서는 동등하지만, 신체, 감관 등과 결합해서 個的 존재로 나타날 경우에는 매우 다른 모양을 띄게 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유정은 食없이는 살 수 없다. 食의 종류에는 段食, 觸食, 思食, 識食의 4종류가 있다. 단식은 香·味·觸 등 삼종으로 일반동물이 먹을 수 있는 물질적 식물을 말한다. 촉식은 감각기관인 根과 인식의 대상인 境과 인식자인 識의 삼자가 화합하여 일어나는 촉을 식으로 한다. 思食은 사람의 의식적 작용을 말하며, 識食은 사람의 인식생활 즉 안식 등 6종의 감각적 인식작용을 식으로 하는 것이다. 단식은 일반적인 음식물, 뒤의 3식은 감각, 사념, 지식 등을 의미하는데, 이와 같은 것이 모두 우리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영양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 사식설은 생명 즉 유정체의 유지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 되는 요소를 말한 것이다. 즉 段食은 식물에 의해서 양육되어야 할 부분으로 육체적 요소이고, 瘗食, 思食, 識食의 세 가지는 정신적 요소를 말한다.
유정의 성립요소를 이와 같이 갖가지로 분석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관찰의 결과로부터 본 견해이지 실제상에 있어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붓다는 이미 身과 命과의 一異를 논하는 것조차 잘못된 태도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유정이 이와 같은 제요소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그 결합의 의미를 단지 막연하게 수레에 있어 수레의 부품이 결합하여 수레가 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레의 경우는 부분이 먼저 있고, 뒤에 전체가 있지만, 유정은 소위 유기적 결합으로서 오히려 전체가 먼저 부분이 뒤에 있다. 유정에 있어서는 전체와 부분은 관념 이외에는 분리할 수 없다.
3) 인간생명의 근원
우리들 자신의 생명은 윤회전생 속의 一環이다. 윤회 전생의 과정 중 우리들이 분별 가능한 것은 모친의 태아에 머물 때부터이다. '태내에 머문 자신'이 태내에서 점차 성장하여 이윽고 태어난다고 하는 과정은 무리 없이 추상할 수 있다. {상응부경전}에 의하면 유정이 존재함에 있어서 가장 근원이 되는 것을 kalala라 하고 있는데, 이 kalala가 태내에서 점점 성장하여 하나의 개체가 된다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이 骨과 肉이 생겨나느냐? 어떻게 해서 이 [살아 있는 자]는 모태에 머물게 되는가? 붓다가 말하기를,
처음 카라라가 있다. 카라라로부터 abbuda가 생기고,
아붓다로부터 pesī(혈육)가 생기고, 혈육으로부터 ghana(堅肉)가 생긴다.
堅肉으로부터 肢節이 생기고, 머리, 털, 손톱이 생긴다.
이와 같이 하여 어머니가 식물과 음식물을 먹으면
그것에 의해서 어머니의 태에 머물면서 생장한다.
카라라의 성장 과정은 카라라(凝結), 아붓다 abbuda(胞), 페시 pesī (血肉), 가나 ghana(堅肉)의 순서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태내에 있어서의 존속상태이다. 카라라로부터 심장, 뇌, 신체, 정신 모두가 생겨나므로 카라라는 실로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카라라의 성립에 대해서는 {대집경}에 "精血二滴이 합쳐서 一滴이 된다. 큰 豆子와 같고, 카라라라 이름한다."라고 하고 있다.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합쳐서 하나가 되는 것을 카라라라 한다는 것이다.
{보적경}에 의하면 카라라는 지, 수, 화, 풍이 화합한 것이다. 地는 堅性, 水는 濕性, 火는 熱性, 風은 動性이다.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카라라는 성립하지 않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풍의 動性이다. "오직 地·水·火만 있고, 風界가 없다면 즉 增長 없다. … 만약 풍력이 없다면 끝내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四大는 서로 의지해야 건립될 수 있다." 이것에 의하면 지·수·화·풍 어느 것 하나라도 없다면 카라라는 성립하지 않는다. 地의 堅性, 水의 濕性, 불의 熱性과 風力이 화합해야만 발육한다. 그것이 없다면 카라라는 사멸해 있는 것과 같다. 특히 풍력은 카라라 발육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카라라는 命, 識, 煖이라는 3개의 요소로 이루어진다. 命이란 수명이며, 또 風道, 入出息이라고도 한다. 命이란 풍력 다시 말하면 카라라가 발육하는 힘 그 원동력이다. 識은 의식이며, 정신적인 것이다. 煖은 熱이라고도 하고, 따스함(체온)이다. 명과 식과 난이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 생명체이며, 살아 있는 것이다. 이 3가지가 분리되어 수명과 의식과 체온이 이탈되면 죽음이 온다.
유정의 근원은 카라라이지만, 카라라가 생장하게 하는 동력인은 풍력이다. 이 카라라가 태내에서 발육하여 在胎 기간을 거쳐 탄생하면, 入息, 出息의 호흡이 시작된다. 그렇게 보면 카라라가 살아 있는 것, 카라라의 생명력은 현재 우리들이 호흡하고 있다고 하는 생리현상에서도 알려진다. 入出息念定이 붓다의 중요한 가르침으로서 설해지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붓다의 고행 중에 호흡을 멈추는 고행이 있는데 즉 無息禪이 그것이다. 이 무식선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는데, 먼저 입과 코의 호흡을 막으면 귀로 숨이 드나들게 되어 귀가 크게 울리면서 격심한 고통이 일어난다. 귀의 호흡마저 막으면 날카로운 칼로 정수리를 얻어맞는 것 같은 고통이 일어나고, 나아가 질긴 가죽끈으로 머리를 조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되며, 이어서 그 숨은 하복부로 내려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호흡을 막고 있으면, 마지막에는 마치 힘이 센 남자가 약한 남자의 팔을 꺽어 불 속에 넣고 지지면서 괴롭히는 것같이 몸 속에 타는 듯한 고통이 온다고 한다. 이같이 우리들의 몸 속에는 휘몰아치는 것과 같은 바람이 있다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머리도 마음도 몸도 하나로 되어 가는 전인격적 영위 속에서 호흡을 점차 진정시켜 가면, 처음에는 몸 전체가 호흡하는 것처럼 되고, 이윽고 호흡하고 있다고 하는 것도 잃어버린다. 더욱 깊이 진행되면 전신의 감각이 점차 感受만으로 된다. 즉 진실이 감수 속에 융합되는 것이다. 더욱 익숙하게 되면 단 '하나의 덩어리'로 된다. 다시 말하면 입태시의 카라라와 흡사하게 된다. 이른바 전인격 일체 통일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윽고 '하나의 덩어리'도 망각하고, 자기와 우주와의 경계의 눈도 없어지게 되면 어느 틈에 열려진 세계가 된다. 해탈에 도달한 것이다.
{보적경}에 의하면 인간의 在胎 기간은 38주이고, 한 주 한 주마다 태아의 상황이 극히 생리학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태하여 이루어진 카라라는 지·수·화·풍이 결합한 것인데, 각각의 주에서 특히 風界가 강조되고 있다. 더구나 풍계를 業風이라 하고, 각 주마다 이 업풍에 고유한 명사를 붙이고 있다. 예컨대 2주는 遍滿, 3주는 藏口, 4주는 攝取, 5주는 攝持 등등이다. 이 업풍 즉 풍력을 발육의 원동력으로 하여 지·수·화를 재료로 하여 혈액이 되고, 피부, 뼈, 수족, 體, 뇌, 심장을 이루어 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전 인격체의 모든 곳까지 풍력이 침투해 간다. 15주를 예를 들면, 여기서 업풍은 蓮花라 하는데, 이 풍력에 의해서 脈이 생긴다. 身體의 전후 좌우 각각에 五脈이 생겨 20맥이 되고, 이 각자의 맥에 枝脈인 40개의 소맥이 생겨 800맥이 되며, 또한 그것이 백 개의 지맥으로 나누어져 팔만개가 된다. 이 대소 팔만개의 맥이 생물체에 둘려 싸여 있으며, 각각의 지맥에 一孔 내지 十孔이 생겨서 각각의 孔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38주 사이에 모든 구조가 정비되어 인간으로 탄생한다. 이같이 볼 때 인간의 생명력은 肢體의 모든 곳에까지 충만하고 있는 풍력이며, 수명이다. 살아 있다는 것 즉 통일적 생명체는 풍력을 축으로 해서 전 인격체가 통괄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 전인격의 통괄체를 붓다는 業異熟 kamma-vipāka이라 이름하고 있다. 무한의 과거로부터 생겨나 살아가면서, 모든 것과 교류하고, 생사가 교체하며 윤회전생 하여 지금 여기에 나타나 있는 생존의 통괄체, 그것이 업이숙체 이다. 그것은 자기의 생존이면서 자의식도 미치지 않는 한없이 깊은 통괄체인 동시에 모든 것과 교류하는 중에 있기 때문에 우주 공동체를 결합하는 눈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생과 사를 의식을 중심으로 고찰하는 경향성이 많다. 즉 정자와 난자의 결합만으로 생명이 잉태되는 것이 아니라, 업식이라는 본래 생명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식이 전생의 업과 그 연에 따라 인연 생멸 한다는 것이다. 나란 생명은 업에 끌려 육도윤회의 인연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의식이란 어디까지나 顯在的이다. 다시 말하면 자각되고 반성되어 얻는 표층의 의식이다. 이 표층의 의식에는 잠재적인 의식이 동반되고 있다. 예컨대 사람이 꿈꾸지 않는 숙면을 하거나 기절했을 때 顯在的인 의식은 없다. 불교에는 의식이 없게 되는 두 종류의 선정 無想定과 滅盡定을 말하고 있는데, 어느 선정에 있어서도 호흡이나 心拍은 있더라도 의식은 완전히 끊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고, 선정에서 깨어났을 때 의식은 회복된다. 이러한 熟睡, 昏睡, 특수한 선정은 무언가의 형태로서 잠재의식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 한 설명될 수 없다.
상좌부는 有分識의 이론을 말하고 있다. 有分은 생존의 일부분의 의미로, 유분식은 표층에 나타나지 않는 잠재의식이다. 유정이 입태하는 순간의 心(結生識, 生有와 같다)과 죽을 때의 심(死有와 동일) 및 다섯 감관에 의한 인식이나 의식에 의한 사유가 일어나지 않을 때 있는 유분식은 자각적인 의식은 없지만, 잠재의식은 있다. 그것은 顯在의식이 기능하지 않는 사이로 지속하고 있는 동일한 흐름의 의식이다.
이 유분식과 비교해서 대승의 유식파가 말하는 아라야식은 안·이·비·설·신·의에 의한 인식 및 자아의식(染汚識)과는 층을 달리하는 의식이다. 아라야식은 지각, 사유, 자아의식이 기능하고 있는 사이에도 그들의 하층에 있어서 잠재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 잠재의식으로서의 아라야식은 표층의 의식이 없어진 숙수, 혼수, 특수한 선정, 죽음과 탄생(입태)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다. 아라야식은 개체의 심신의 기능과 그 환경세계를 執持하는 식, 즉 개체의 생명의 유지자 이다. 일체생류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자기의 환경을 형성하면서 선악의 업을 짓고, 목숨이 끝나 내세에 다시 태어나서 윤회전생을 반복하는 것은 육체의 내부에 아라야식이 존재하여 끊임없이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라야식에 의해서 유지되어지고 있는 한 개체는 살아 있는 것, 즉 생명이 있는 것이며, 그 유지가 없게 되면 개체는 사멸하여 다음의 세계로 옮아간다. 아라야식의 유지가 있는가 없는가가 생과 사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아라야식은 표층의식이 만든 번뇌와 업의 종자를 저장하고, 또 새로운 표층의식을 산출한다. 그리고 사람의 죽음과 재생 사이를 연결하기 때문에 윤회적 생존의 원리가 된다. 그러나 수행을 통하여 이 아라야식이 근원적으로 전환될 때에는 이 동일한 아라야식에 의해서 해탈할 수 있다. 이 때 비로소 사람은 윤회적 생존으로부터 해방되고, 그것을 절멸할 수가 있다.
3. 생명의 가치
유정은 자기 자신의 현세의 업의 상속에 의해서 다음 세에 육취 중의 하나로 태어난다. 세계와 생명의 실상을 알지 못한 관계로 욕망의 대상에 이끌리고 집착하여 이와 같은 생존의 양식을 바꾸어 가면서 생사를 반복하는 것이다.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 생을 가진 존재들은 그 생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생에 대한 맹목적 집착(渴愛) 속에서 생의 지속을 위한 행위를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이 행위들은 그 행위의 결과(업보)들을 윤회하는 다양한 생존양식 속에 보존하면서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나가는 것이다.
인간은 이법에 의해서 행동하는 존재이므로 인간은 자신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이법에 의한 행위와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이 인간과 다른 유정과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아닌 일체중생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해탈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같은 견해는 초기 불교이래 일관된 견해이다. 그러나 일체유정은 원리상 평등하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智力이나 형상의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중생들에게까지 구원의 손길을 보내어 그들을 구제하겠다는 것이 붓다의 자비정신이다. 붓다는 "모든 여기에 모인 일체의 생명 있는 것들은 지상에 있는 것이건, 혹은 공중에 있는 것이건 모두들 기뻐하여라.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라."라고 선언하고 있다. 붓다의 자비는 인간만을 위한 독선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조차도 넘어선 보편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불교의 인간주의가 인간적인 것의 제요소를 긍정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어져야 할 미망의 존재로 보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인간과 자연계의 뭇생명체와의 일체감을 강조하는 불교에서는 당연히 생명의 가치를 절대시한다. 인류는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생명은 다같이 그 생존권과 존엄성이 동등하며, 어떤 생명도 다른 생명에 의하여 침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구제되어야 할 개체는 이미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일체 생류는 모두 동일한 가치를 갖는 것이어서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상하 귀천의 차별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각각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체 유정은 서로 서로의 관계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지구 한 모퉁이에서 펼쳐지는 조그마한 하나의 사건도 세계 전체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 된다. 또한 이곳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은 개체로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무한한 상호 관련를 통해서만 존재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주는 모든 사물들이 상호 연관된 통일체다. 우주적 질서란 서로간의 평등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며, 상호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 삶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관계 지워진 모든 것들이 평등한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 존재의 세계인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세계의 생명의 실상을 일심동체로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서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이 모두 하나라는 동체대비의 사상이 성립된다. 그것은 우주의 모든 존재 그 자체가 일심동체의 연기이며, 평등한 가치의 존재라는 인식의 관점에서 현실을 살아가게 하는 원리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서 완전성과 궁극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뜰에 핀 한 송이 들꽃도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자기 개성과 가치를 갖고있다는 사실을 아울러 자각할 때 우리는 생명의 가치가 평등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세계, 산천, 초목, 부처, 보살, 중생, 유정과 무정 등 모두가 함께 어울러 출렁이는 생명의 큰 바다는 그야말로 장엄하다는 {화엄경}의 이야기는 부처의 지혜는 모두에게 평등하고, 그 몸은 일체세간에 충만하며, 그 음성은 온 우주의 국토에 隨順하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하겠다. 거기서는 생명의 가치와 생명의 역할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각자의 존엄성이 손상당하거나 손상시키는 일이 없다. {화엄경}의 법회에 참여하고 있는 대중들의 모습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생명의 세계의 모습은 한 마디로 개체와 개체, 개체와 전체, 유정과 무정, 부처와 중생이 모두 빠짐없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4. 결 어
DNA 합성에 의한 인간 복제의 실현 가능성이 인간에 대한 위기적 상황으로 다가오고 있는 현실에서조차 생명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구 환경이 피폐화 되어 가고 있는 이 때, 지구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려는 입장은 우리들에게 생명의 고귀함과 자연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하겠다.
불교에 있어 생명에 가장 적합한 개념은 有情이다. 유정이란 一切生類를 총칭하며, 迷界의 생류는 모두 생명적 존재라고 본다. 생명의 주거처인 우주는 成住壞空의 80겁의 순환을 반복한다. 그러한 우주 생성력의 원동력은 유정의 업이다. 유정의 활동력이 우주를 생성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순환하는 기세간에 살고 있는 생명이 유정이다. 유정의 구성요인으로는 오온설, 육계설, 12처설, 18계설, 사식설 등이 있다. 이들 중 어느 것이거나 모두 물질과 정신이 유정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 요인이라 하고 있다. 무명에 위해서 맹목적인 의지가 작용하면 의식적 작용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개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가 형성되는 최초의 근원은 카라라이다. 카라라는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중 풍력은 카라라가 발육하는 원동력이다. 카라라는 수명과 의식과 체온의 3요소를 가지고 있다. 풍력이 작용하여 전 인격체를 형성하고 하나의 완전한 개체를 이루어 간다. 즉 풍력을 중심으로 전 인격체가 통괄되어 있으며 이것을 업이숙이라 한다.
일체만물은 또 相依相資의 연기에 의해서 상호 연관성을 맺으면서 존재하고 있다. 인간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가치가 있고 존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환경세계의 모든 유정들도 모두 다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자연과 연관성 없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새삼 물을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우주 만유에 존재하는 개개의 사물 하나 하나가 각각의 가치와 존엄성을 갖는 것으로 보는 불교적 입장은 대우주에 충만한 전일적 생명의 구현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입장은 오늘날 과학만능과 物神主義적 상황에서 메몰 되어 가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참된 의미와 또 뭇생명에 대한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그것은 잃어버린 인간 존재와 참된 생명을 다시 찾고 일체생류가 하나로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하겠다. 우리들의 일상의 눈으로 보면 인간과 산천초목, 인간과 대지, 인간과 우주는 별개의 존재로서 각각 그 가치가 다르게 보인다. 오직 인간 생명만이 존귀한 것이며, 인간만이 행·불행을 느끼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와 만물은 인간을 위해서만 그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지극히 교만한 인간 중심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즉 만물의 영장임을 내세우는 인간들은 우주와 산하대지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생류들이 평등한 동체의 생명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공통성은 자유에 있다. 인간만이 해탈을 얻어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 생류는 모두 생명 본연의 자유를 자기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 인간은 우주의 대생명과 하나의 흐름 속에 있음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명의 질서엔 나만이 사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同體적이고 평등한 원리에 입각한 생명질서를 자각하고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출처] 불교의 생명사상에 관한 한 고찰-조수동|작성자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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