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불교의 구사학으로 풀어본 무의식과 명상

수선님 2019. 9. 8. 12:33

불교의 구사학으로 풀어 본 무의식과 명상

- 상담을 통한 무의식의 폭로와 사성제 명상을 통한 실상의 통찰 -


김성철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1.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1.1 지그문트 프로이드

1.2 칼 구스타브 융

2. 무의식, 아뢰야식, 번뇌

2.1 아뢰야식이 무의식인가?

2.2 무의식과 ≪구사론≫의 번뇌

2.3 번뇌의 정체

3. ≪구사론≫의 명상수행과 번뇌론

3.1 사성제 명상을 통한 번뇌의 제거

3.2 명상수행에 근거한 번뇌의 분류

4. 심리적 문제의 해소 - 상담인가 명상인가?

4.1 논의의 혼란

4.2 의식이란 무엇인가?

4.3 무의식을 드러낼 때 치유되는가?

4.4 예화를 통한 비교



1.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1.1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


프로이드는 ‘심리적 인격의 해부’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인간의 마음을 ‘의식(Conscious mind)’, ‘전의식(Preconscious mind)’, ‘무의식(Unconscious mind)’의 세 단계로 구분한 후 전의식과 무의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림1) - 의식, 전의식, 무의식

 

… 두 가지 무의식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데, 하나는 매우 빈번히 발생되는 상황에서 쉽사리 의식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러한 변환이 매우 힘든 것으로서 대단한 노력을 들인 후에나 겨우 성공하거나, 아니면 아예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 그저 잠재되어 있을 뿐 쉽게 의식될 수 있는 무의식을 ‘전의식(前意識)’이라고 부르고, ‘무의식’이라는 표현은 그와는 다른 것에만, 의식으로 떠오르기 힘든 무의식에만 한정하기로 하겠습니다.1)


그림2) - 마음의 구조

전의식은 지금의 의식에서 소재로 삼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의식에 떠오를 수 있는 생각들이다. 예를 들면, 과거의 기억과 같은 것들이다. 한편 무의식이란 심리적 억압으로 인해서 의식화하기 힘든 생각들로 ‘관찰자에게는 직접 드러나지 않고, 인성을 결정짓는 힘’2)이다(그림1). 프로이드적인 정신분석(Psychoanalysis)의 과제는 이러한 ‘무의식의 과정을 의식의 과정으로 해독함으로써, 의식적 지각의 빈틈을 메우는 것’이었다.3) 무의식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담자의 ‘꿈’에 나타난 상징을 분석하기도 하고, 우연한 듯이 보이는 ‘실수’에 깔린 저의를 폭로하기도 하며, 자유연상법(Free associations)을 사용하여 내담자의 성향을 탐구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내담자가 자신의 무의식을 자각할 때, 다시 말해 무의식을 의식화 할 때 심리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

 

그림3) - 빙산의 비유

초창기의 프로이드는 ‘의식-무의식’의 이원구조에 근거하여 무의식의 탐구에 집중하였으나, 후기에 와서 무의식의 중요성은 감소되고 ‘의식-무의식’의 이원구조는 ‘이드-자아-초자아’라는 삼원구조로 대체된다.4) ‘이드(Id)’는 ‘인격을 이루는 구성요소 가운데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고통을 피하며, 성욕을 충족하고, 공격하는 것과 같은 생물학적인 근본 충동이나 욕구’의 중심이며 ‘쾌락원리(Pleasure principle)’에 따라서 작동한다.5) ‘자아(Ego)’는 “몸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인 충동이나 욕구를 현실과 결합시켜서 적절한 행동을 유발”하는 기능을 하며 ‘현실원리(Reality principle)’에 따라 작동한다.6) 초자아(Superego)는 ‘개인의 내적 가치와 도덕’을 나타내며, 그런 “가치체계에 따라서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7) 요컨대 이드는 ‘본능’, 초자아는 ‘양심’에 해당하며 자아는 양심에 어긋나지 않고 현실에 맞추어 본능을 실현케 하는 ‘영민한 조절자’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드는 ‘심리적 인격의 해부’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의식-전의식-무의식’과 ‘이드-자아-초자아’의 관계를 ‘그림2’8)와 같이 도시했는데9), 무의식에 대해 설명할 때 흔히 사용되는 ‘빙산’의 비유와 연관시켜 마음의 구조를 다시 그리면 ‘그림3’10)과 같다. ‘그림3’에서는 이해의 편의를 위해 이드와 자아, 초자아의 영역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놓았지만 프로이드가 말하듯이 이 셋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있는 것은 아니다.11)

프로이드는 ‘전생식기(前生殖期: Pregenital stage)’라고 명명했던 ‘생후 5년까지의 시기’에 입, 항문, 성기라는 ‘성감대(性感帶)’에 대한 자극과 통제의 과정을 통해 성격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입의 경우 ‘집어넣기, 붙잡기, 깨물기, 뱉기, 다물기’ 등의 기능을 하는데, 순서대로 ‘획득, 끈기, 파괴, 배척, 거부’의 성격으로 이어진다.12) 예를 들어 어릴 때 일찍 젖을 뗀 사람은 ‘빼앗김’의 충격적 경험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사물에 강하게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13) 또 배설의 경우 ‘긴장의 해소’와 연관되기에, 엄격한 배변훈련을 받은 사람에게서는 인색함, 냉담함, 결벽증 등의 성격이 보인다.14) 영유아기인 ‘전생식기’에 우리가 겪었던 입과 항문과 성기의 외상성(外傷性) 체험이 초자아와 자아로 빚어져 ‘무의식’에 잠재함으로써 성인이 되어서도 나의 성격과 행동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1.2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 1975~1961)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무의식은 ‘개인의 무의식’이었는데, 융은 이에 덧붙여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라는 개념을 창안하였다. ‘집단무의식’은 진화와 유전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종 모두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는 공통된 성향을 의미한다. 사람의 성격은 영유아기의 개인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인류의 과거를 포함하여 더 멀리는 인류 탄생 이전의 생물의 진화와도 관계된다. 융은 심리학에 집단무의식 이론을 도입함으로써 “진화와 유전이 신체의 청사진을 제공하는 것처럼 정신의 청사진도 제공한다.”15)는 점을 보여주었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토로한 바 있다. “나는 먼 미래에 [진화생물학]보다 더 중요한 연구를 위한 [새로운] 분야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은 새로운 토대 위에 서게 될 텐데, [그 토대는 생명체] 하나하나의 정신적인 능력 역시 필요에 의해서 [진화과정에서] 점차적으로 획득된다는 점이다.”16) 인간의 심리 역시 진화론적 토대 위에서 해명될 것이라는 다윈의 예측을 실현이라도 하듯이, 최근 들어 ‘진화심리학’ 분야에서 창의적인 연구 성과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진화 과정에서 뇌와 유전자에 각인된 인간 종의 공통적 성향’을 발견하여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는 점에서 융에 대해 ‘진화심리학의 선구자’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무의식을 분석할 때, 융은 프로이드와 달리 콤플렉스(Complex)라는 개념을 주로 사용하였다.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설명할 때 한하여 프로이드가 사용하던 용어였는데, 융은 ‘무의식에 잠재된 심리적 핵’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외연을 확장하였다. 융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면 ‘감정을 띤 콤플렉스(feeling-toned complex)’에 대해 과학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것은 감정의 악센트가 들어간 정신 상태의 이미지로, 의식의 습관적 태도와는 완전히 반대된다. 이런 이미지는 강력한 내적인 응집력을 가지며, 그 자체가 독립적인 단일체로, 스스로 작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의식으로 이를 조절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이물질처럼 작용한다.17)


강한 감정의 기미가 배어 있는 여러 가지 정신상태들이 콤플렉스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마치 살아있는 개체처럼 작용하기에 의식적으로 이를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콤플렉스를 갖는 것이 아니라, 콤플렉스가 인간을 갖는다.”18) 정신분석의 목적은 이러한 콤플렉스를 해소하고 콤플렉스의 포악한 지배로부터 환자를 해방시키는 것이다.19) 프로이드의 영향 아래 있을 때 융은 콤플렉스의 기원이 영유아기의 외상성 체험에 있다고 보았는데, 연구를 진행하면서 콤플렉스는 그 보다 더 깊은 수준의 무엇에 기인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집단무의식이라고 불렀던 것이다.20)

집단무의식에는 인간의 행동이나 성격을 지배하는 원초적인 이미지나 상징들이 내재한다. 이를 태고유형(Archetype)이라고 부른다. 융에 의하면 태고유형은 “내용이 있는 이미지의 형식이 아니라, …… 어떤 타입의 지각과 행동의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21) 예를 들면, ‘출생, 재생, 죽음, 권력, 마법, 영웅, 어린이, 사기꾼, 신, 악마, 늙은 현인, 어머니인 대지, 수많은 거인, 나무, 태양, 달, 바위’등이 그것이다.22) 이런 태고유형과 연관된 기억이나 해석이 하나의 그룹을 이룰 때 콤플렉스가 된다.23) 예를 들어 ‘어머니’라는 태고유형과 관계된 개인적인 여러 경험들이 모이면 ‘어머니 콤플렉스’를 형성하고, ‘신(神)’이라는 태고유형을 중심으로 콤플렉스가 형성되어 의식에 침투할 만큼 강력해지면 모든 것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지각하고, 판단하고, 요구하게 되는 ‘신 콤플렉스’를 형성하게 된다.24)

그림4) - 집단무의식과 통일세계

인격에 큰 영향을 주는 태고유형으로 ‘자아(Self), 그림자(Shadow), 아니마(Anima), 아니무스(Animus), 페르소나(Persona)’의 다섯을 들 수 있다. ‘자아’는 정신활동을 조절하는 구심점이면서 개체화를 촉진한다. ‘그림자’는 자신의 성격 가운데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모든 것, 즉 무의식 전체를 의미한다.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부정적인 내용도 포함하지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의 경우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장점’과 같은 긍정적인 내용도 포함한다. 아니마는 남성의 정신에 내재하는 여성의 이미지이고, 아니무스는 여성의 정신에 내재하는 남성의 이미지다. 페르소나는 ‘바깥세상에 나타내는 자신의 이미지’로, 마치 가면과 같으며, 자아의 부정적 이미지를 가린다.

 

융의 이론 가운데 집단무의식과 관련하여 중요한 이론이 하나 더 있다. ‘동시성(Synchronicity)’ 이론이다.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한 사건들이 물리적인 인과관계를 초월하여 동시에 체험되는 경우가 있다. 융은, 자신의 환자가 황금 풍뎅이 꿈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황금 풍뎅이가 창문을 두드렸던 일화를 동시성의 한 예로 든다.25) 융은 이와 유사한 체험사례들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한 후 ‘비(非)인과적인 관계의 원리(Acausal connecting principle)’가 작용한다고 추정한 후 ‘동시성’의 법칙을 창안하였다. 그리고 ‘집단무의식’ 이론은, ‘동시성’과 ‘태고유형’을 근거로 삼아 ‘통일세계(Unus mundus, one world)’ 이론으로 발전한다. 통일세계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곳으로부터 나타나고 그곳으로 돌아가는 통일된 실재’를 의미한다.27) 이상과 같은 설명을 도시하면 ‘그림4’와 같다. 앞의 ‘그림3’에서 보듯이 프로이드가 발견한 것은 우리의 의식이 ‘빙산의 일각’과 같다는 점이었는데, 융은 그런 빙산들이 ‘집단무의식’을 통해 심층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 개인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은 ‘통일세계’의 일원으로서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2. 무의식, 아뢰야식, 번뇌


2.1 아뢰야식이 무의식인가?


정신분석학의 무의식과 유관한 이론을 불교에서 찾으려면 대부분 유식학(唯識學)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떠올릴 것이다. 사실 무의식과 아뢰야식을 비교하는 연구는 참으로 많이 이루어졌다. 국내의 경우 특히 석사학위논문에서 많이 다뤘으며, 일반학술지에 실린 논문 역시 적지 않다.28) 따라서 무의식과 아뢰야식을 연관시켜서 새삼스럽게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것은 ‘학문적 낭비’이겠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아뢰야식이 무의식과 동일할 수 있는지 검토해 보자.

우리가 매일매일 짓는 행위는 모두 열매(=씨앗)와 같이 변하여 마음 속 깊은 곳에 저장된다. 이 때 ‘씨앗과 같이 변화한 행위’를 업종자(業種子)라고 부르며 그런 ‘업종자가 저장되는 깊은 마음’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부른다. ‘아뢰야’는 산스끄리뜨어 알라야(Ālayaⓢ)의 음사어로 ‘집, 거주, 수용소, 저장소’ 등의 뜻을 가지며 ‘장(藏)’이라고 한역한다. 아뢰야식이란 장식(藏識)이다. 우리가 짓는 모든 행위를 저장하는 ‘창고와 같은 마음’이다. 그런 행위의 씨앗들이 번뇌의 자양분을 받아 성숙하다가 시기가 무르익으면 우리가 체험하는 세상만사로 싹을 틔운다. 이 때 행위의 씨앗인 업종자는 ‘원인’이 되고 우리가 체험하는 세상만사는 ‘결과’가 된다. ‘씨앗’과 ‘저장’이라는 비유를 사용했지만, 그릇 속에 과일이 들어가듯이 아뢰야식 속에 종자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아뢰야식에서 제각각 결과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종자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지 종자와 아뢰야식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29)

프로이드의 이드(Id)나 융의 콤플렉스(Complex) 등과 같이 내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나의 성격과 행위에 영향을 주는 ‘심리적인 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의식’이기에, 유식학에서 말하는 ‘아뢰야식’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아뢰야식은 이러한 ‘심리적 핵’이면서 동시에 나의 몸(有根身)이기도 하고, 내가 살아가는 물리세계(器世間)이기도 하다.30) 따라서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든, 융의 집단무의식이든 아뢰야식이 완전히 동일한 것이 아니다. 장타오(蒋韬)31)는 “장식(藏識)과 무의식: 잠재의식에 대한 현장(玄奘: 602~664)과 프로이드 비교연구”라는 논문에서, 프로이드의 경우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성욕덩어리(sexual being)이지만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정신적으로 되려고 애쓰고 있는 존재’라고 본 반면, 현장의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인간이란 망상덩어리(deluded being)이며 그런 망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유가행파의 가르침대로 명상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양자의 인간관을 대비시킨 후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32)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현장(玄奘)의 아뢰야식과 프로이드의 무의식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토마스 쿤의 용어로 표현하면, 현장과 프로이드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 속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자체로만 말하면, 양자의 잠재의식 이론에서는 전혀 다른 규칙을 따르면서, 전혀 다른 청중들을 향해서, 전혀 다른 관심사에 대해 설명한다. 유가행파에서는 주로 불교 수행자들에게 깨달음의 가능성에 대해서 설명하는 반면에 프로이드는 우울증을 문제로 삼아서 토로하며 그 대상은 주로 신경증 환자들이다. 양측의 이론이 고유영역을 넘어서 그 바깥으로 손을 뻗치면 반드시 문제가 일어나게 마련이다.33)


유식학에서 아뢰야식이론을 고안하게 된 동기와 프로이드가 무의식이론을 고안하게 된 동기가 전혀 다르듯이 두 이론의 패러다임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와 같은 통찰 하에서는 시대와 지역을 달리 하는 두 사상을 비교하는 일은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내에서는 무의식과 아뢰야식의 관계에 대해 긍정적으로 조명하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어떤 연구에서든 무의식과 아뢰야식을 무모하게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양자의 공통점에 대해서도 논의하지만 아울러 차이점 역시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만, 김성관, 묘주, 남수영 등의 연구 가운데 유의미한 것을 추출하여, ‘정신분석의 무의식’과 ‘유식학의 아뢰야식’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내면 다음과 같다.


공통점

① 무의식의 내용물이 선악(善惡)과 무관하듯이, 아뢰야식 역시 무부무기(無覆無記)의 것이다.34)

② 무의식이 잠재의식이듯이, 아뢰야식 역시 심층심리와 관계된다.35)

③ 무의식 내의 콤플렉스가 부단히 바뀌듯이, 아뢰야식의 업종자 역시 전변하면서 존재한다.36)

④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 또는 각각에 속한 콤플렉스는 유식학의 신훈(新熏)종자와 본유(本有)종자에 대응된다.37)

⑤ 무의식과 아뢰야식 모두 각성시에든 수면 중이든 의식의 저변에서 항상 작용한다.38)

⑥ 의식과 행동이 무의식과 아뢰야식에 이식된다.39)


차이점

① 아뢰야식은 삼생의 윤회상속과 관련되지만 정신분석에서는 심리적 문제에만 집중한다.40)

② 아뢰야식은 업력의 소장처인 반면에 무의식은 의식화 되지 않은 심리다.41)

③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의 (유루의) 업종자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하지 않지만, 융은 콤플렉스가 긍정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본다.42)

④ 아뢰야식 이론은 수행자들이 선정을 통해 이론화 한 것이지만, 정신분석 이론은 경험과학의 범위 안에 있다.43)

⑤ 아뢰야식은 종자를 저장하면서 동시에 인식대상이 되지만 무의식은 인식대상이 아니다.44)


장타오가 주장하듯이 아뢰야식과 무의식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설혹 융의 집단무의식이라고 해도 그렇다. 유식학과 달리 정신분석 이론에서는 윤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물리적 세계에 대해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영향을 끼치는 의식 이전의 ‘심리적 핵’이라는 점에서 무의식은 아뢰야식의 범위 내에 들어온다. 다시 말해 무의식은 ‘아뢰야식의 한 단면’일 수 있다. 무의식 이론은 ‘아뢰야식 이론의 정교한 각론’일 수 있다.


2.2 무의식과 ≪구사론≫의 번뇌


인도에서 불교사상은 ‘초기불교→ 아비달마→ 중관학→ 유식학’의 순으로 발전하였다. 초기삼장에 산설(散說)된 교학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비달마 교학이었고, 아비달마 교학의 ‘법(法)’에 대한 고착을 타파한 것이 반야중관학의 공사상이었으며, 반야중관의 토대 위에서 ‘식(識)’에 의해 불교전반을 재해석한 것이 유식학이었다. 유식학 이론은 불멸 후 7백년 이상 지나서 성립한 대승불교 사상이기에 원시성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앞 절에서 보았듯이 정치(精緻)한 아뢰야식 이론에서 정신분석의 무의식 이론과 유사한 측면을 찾을 수 있긴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이 원래 그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불교사상사의 흐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중관학의 경우 ‘언어와 분별로 이루어진 모든 이론’을 타파하는 일종의 테크닉이기에, 그 사상 중에 무의식 이론 중에 직접 대비되는 것이 있을 수 없다.45) 그러나 아비달마교학의 ‘번뇌론’에는 프로이드나 융의 ‘무의식이론’에 비견할 만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일반적으로 괴로움이 있을 때, 그 원인과 해결책을 외부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돈이나 명예, 권력을 획득할 경우 괴로움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신분석과 불교 모두 그런 괴로움의 원인이 마음속에 있으며, 이를 해소할 때 괴로움에서 해방된다고 본다는 점에서 방법을 같이 한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이드, 태고유형, 콤플렉스’와 같은 무의식 속의 ‘심리적 핵’과, 불교에서 말하는 ‘탐욕, 분노, 교만, 어리석음’과 같은 번뇌들이, 괴로움을 야기하는 ‘마음속의 원인’인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 즉 불교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사성제(四聖諦)로 요약된다. 순서대로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의미한다. ‘탐욕, 분노, 교만, 어리석음’과 같은 번뇌는 이 가운데 ‘괴로움의 원인’, 즉 집성제에 속한다. 초기불전에서도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아비달마 문헌 가운데 세친(世親: 4세기경)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śa)≫에서는 수행론과 연관하여 번뇌의 종류와 성격 등을 잘 정리하고 있다.

번뇌(煩惱)의 산스끄리뜨 원어는 끌레샤(kleśa)다. “괴롭히다.”거나 “괴로움을 겪다”는 뜻의 어근 ‘끌리슈(√kliś)’에서 파생한 명사다. 혹(惑)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였다. ≪구사론≫에서는 불전에서 발견되는 번뇌의 이명(異名)으로 수면(隨眠: anuśaya), 전(纏: paryavasthāna), 누(漏: āsrava), 폭류(瀑流: ogha), 액(軛: yoga), 취(取: upadāna) 등을 소개하는데 이 가운데 ‘수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번뇌에 대해 설명한다.46)

≪구사론≫에서는 먼저 근본번뇌로 ①탐(貪: rāga), ②진(瞋: pratigha), ③만(慢: māna), ④무명(無明: avidyā), ⑤의(疑: vicikitsā), ⑥견(見: dṛṣṭi)의 여섯 가지를 든다. 그리고 이렇게 여섯 번뇌 가운데 ‘⑥견’을 다시 ⑹유신견(有身見: satkāya-dṛṣṭi), ⑺변집견(邊執見: anta-grāha-dṛṣṭi), ⑻사견(邪見: mithyā-dṛṣṭi), ⑼견취(見取: dṛṣti-parāmarśa), ⑽계금취(戒禁取: śīlavrata-parāmarśa)의 다섯으로 세분하면 총 열 가지가 된다. 이런 열 가지 근본번뇌를 십수면(十隨眠)이라고 부른다.

이 가운데 ①탐은 탐욕으로 오욕락(五欲樂)47)에 대한 욕탐(欲貪)과 내생에 태어나 다시 존재하고 싶은 욕망인 유탐(有貪)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②진은 분노, ③만은 교만한 마음을 의미하며, ④무명은 사성제에 대한 무지, ⑤의는 사성제에 대한 의심이다. ⑹유신견이란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심신복합체에 변치 않고, 단일하며, 자유자재한 내가 존재한다고 보는 착각이며, ⑺변집견이란 죽음 이후에 ‘지금의 나’와 같은 내가 그대로 존재한다거나, 아니면 완전히 사라진다고 보는 편견이고, ⑻사견은 인과응보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이며, ⑼견취는 ‘유신견, 변집견, 사견’의 세 가지에 대해서 올바른 사상이라고 집착하는 것이고, ⑽계금취는 잘못된 수행을 천상에 태어나는 원인으로 착각하든가, 지계(持戒)만으로도 해탈이 가능하다고 오해하는 것이다.48)

이런 열 가지 번뇌가 프로이드나 융의 이론에서 말하는 무의식 속의 ‘심리적 핵’들과 그대로 일치하지는 않지만, ‘①탐욕’은 프로이드의 ‘이드(Id)’에 대응되고 ‘⑻사견, ⑼견취, ⑽계금취’는 초자아(Superego)와 연관시킬 수 있으며, ‘③만이나 ④무명과 ⑹유신견’은 융의 페르소나(Persona) 또는 자아(Ego)와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무의식이든 번뇌든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심리적 핵’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수면(隨眠)의 산스끄리뜨 원어는 ‘아누싸야(anuśaya)’다. “잇따르다.”는 의미의 ‘아누(anu, 隨)’와 ‘잠’을 뜻하는 싸야(śaya, 眠)가 합쳐진 단어로 보아 수면이라고 한역하였다. ≪구사론기(俱舍論記)≫에서는 수면의 어의에 대해 풀이하면서 “유정을 따라다니기에 ‘수(隨)’라고 이름을 붙이고, 그 작용이 은밀하기에 ‘면(眠)’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마치 사람이 잘 때 그에게 무엇이 떠오르는지 알기 힘든 것과 같다.”49)고 쓰고 있다. 유정은 ‘감정이 있는 존재’라는 뜻으로 산스끄리뜨 원어는 삿뜨와(sattva)다. 중생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인간과 짐승을 포함한 생명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불교용어다. 잠을 자는 사람의 경우 그가 무슨 꿈을 꾸는지 알 수 없다. 간혹 일어나는 잠꼬대나 표정을 보고서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번뇌의 경우도 스스로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화(瞋)가 날 때든, 욕심(貪)이 날 때든, 잘못된 종교관(癡)을 갖고 있을 때든 그런 감정이나 생각에 파묻혀 있을 때에는 그것들이 나에게 뚜렷하게 자각되지 않는다. 그런 감정이나 생각의 와중에서 순간적으로 반성이 일어나든지, 그런 감정과 생각이 없어진 다음에 회고해 보든지 해야 비로소 나에게 화, 욕심, 잘못된 종교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열 가지 근본번뇌가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잠재되어 있으며 적절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 조건이 어우러질 때 몇 가지 번뇌만 나타나 작용하며 그것이 자각된다. 그래서 번뇌의 종류를 더 나누어서, 마치 잠자는 것(睡眠)과 같이 잠재(潛在)되어 있는 번뇌를 ‘수면(隨眠)’, 의식에 나타나 작용하는 번뇌를 ‘전(纏, 얽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50) 잠(睡眠)에 비유하는 이유는 번뇌가 [아직 발아하지 않은] 종자(種子)의 상태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51) 전(纏)은 ‘빠리아와스타나(paryavasthāna)’에 대한 현장의 번역어다. 접두사 ‘빠리(pari)’가 ‘두루’나 ‘완전’을 의미하고 ‘아와스타(avasthā)’는 ‘머무름, 거주함’을 의미하며 접미사 ‘아나(ana)’는 ‘작용’을 뜻하는데, 현장은 ‘얽힘’을 의미하는 전(纏)이라고 번역했지만 ≪구사론≫의 이역본인 ≪구사석론(俱舍釋論)≫의 번역자 진제(眞諦: 499~569)는 상심(上心, 위로 떠오른 마음), 상심혹(上心惑, 위로 떠오른 마음인 미혹), 도기혹(倒起惑, 뒤집힌 마음) 등으로 번역하였다.52)

어쨌든53) 대부분의 번뇌는 잠재되어 있고, 매 순간 몇 가지 번뇌만 작용하며 그것이 나에게 의식된다. 프로이드 정신분석의 용어로 설명하면 대부분의 번뇌는 ‘전의식’이나 ‘무의식’ 상태로 잠재되어 있는 ‘수면(隨眠)’들이고, ‘의식’에 나타난 것은 ‘전(纏)’이다.


2.3 번뇌의 정체


불교수행의 목표는 모든 번뇌가 사라진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열 가지 근본번뇌를 완전히 제거한 최고의 성자,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와 같은 종교적 가르침을 모르는 인간이나, 짐승들은 탐욕, 분노, 교만과 같은 번뇌의 추동으로 악을 지으며 살아간다.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권하지만, 사실 ‘번뇌와 악행’은 ‘동물적 행복의 원천’이다. 찰스 다윈의 용어로 표현하면 번뇌와 악행은 먹이 획득에 성공하게 하여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의 적자(適者)가 되게 하고, 새끼를 낳아 잘 키우게 함으로써 성선택(Sexual selection)의 경쟁에서 승자(勝者)가 되게 해준다.

불전에서는 열 가지 악행을 열거한다. ‘ⓐ살생(殺生), ⓑ투도(偸盜: 훔치기), ⓒ사음(邪淫: 삿된 음행), ⓓ망어(妄語: 거짓말), ⓔ양설(兩舌: 이간질), ⓕ악구(惡口: 욕), ⓖ기어(綺語: 꾸밈말), ⓗ탐욕(貪欲), ⓘ진에(瞋恚: 분노), ⓙ사견(邪見: 종교적 어리석음)’의 열 가지다. 과거의 사람들 역시 짐승과 다를 게 없었다. 종교적 가르침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인간사회 역시 밀림과 다름없었을 게다. 알렉산더대왕, 진시황, 칭기즈칸 모두 인간의 모습을 한 잔인한 살륙자, ‘라이온 킹’이었다. 탐욕, 분노, 교만과 같은 강력한 번뇌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인과응보를 부정하기에 내생의 과보에 대한 두려움 없이(⑻邪見, ⑺변집견) 무참하게 살륙을 저지른다(ⓐ살생). ‘라이온 킹’이 그렇듯이 수많은 암컷 후궁들을 거느린다(ⓒ사음). 지금도 금력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 중에는 그 속내가 짐승과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짐승 또는 짐승과 같이 ‘몸의 행복’,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의 경우 10번뇌의 토대 위에서 10악을 지향하며 살아간다. 물론 현대의 인간사회에서는 ‘법’이 ‘악행’을 처벌하기에 노골적으로 10악을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법망(法網)에 걸려들지 않게 교묘하게 10악을 지으면서 동물적 ‘행복’을 만끽한다. 일시적으로는 승승장구하며 최강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상대적 행복은 언젠가 결국 스러지고 만다. 진정한 행복은 그런 투쟁의 세계에서 벗어날 때 찾아온다. 번뇌와 악행을 끊는 것이다.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3. ≪구사론≫의 명상수행과 번뇌론

3.1 사성제 명상을 통한 번뇌의 제거

이런 예비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사론≫의 수행론에 대해 검토해 보자. 10번뇌와 10악이 동물적 행복의 원천이지만, 그런 행복은 일시적이고 언젠가는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짐승과 반대로 살 것’을 가르치며, 그런 가르침 가운데 최정상에 위치한 것이 불교다. 불교에서는 10악을 금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근원인 마음속의 10번뇌까지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삼는다. 10번뇌의 완전한 소멸을 위해서 ≪구사론≫에서 제시하는 수행과정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⑤부정관

↗ ↘

⑥별상념주→ ⑦총상념주→ ⑧사선근→ ⑨견도→ ⑩수도→ ⑪무학도

↘ ↗

⑤지식념

 




①문혜→ ②사혜→ ③신기청정→ ④수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계(戒)를 철저하게 지킬 수 있어야 한다.54) 그 후 ‘사성제에 대한 통찰(satya-darśana)’에 대해 학습한다. ‘이름(nāma, 名)’과 ‘대상(ālambanā, 境)’을 귀로 들어서(聞) 배우는 것이기에 이를 ①문혜(聞慧: śrutamayī prajñā, 聞所成慧)라고 부른다. 그 다음에는 사성제의 ‘이름’과 ‘대상’은 물론이고 그 ‘의미(artha, 義)’에 대해서 깊이 숙고한다[②사혜(思慧: cintāmayī prajñā, 思所成慧)]. 이름에 대한 암기가 끝났으면 단지 ‘대상’과 ‘의미’만을 소재로 삼아 수행한다. 이 이후의 수행에서 얻는 지혜를 ④수혜(修慧: bhāvanāmayī prajñā, 修所成慧)라고 부른다.55) 그런데 본격적으로 수혜에 들어가려면 몸(kāya)과 마음(citta)을 세속에서 멀리 하고, 적은 욕망(alpeccha)에 만족하며, 의복(cīvara)과 시주물(piṇḍapāta)과 거주처(śayanāsana)에 만족하면서 ‘끊음의 수행(prahāṇa-bhāvanā)’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현장(玄奘)은 수혜를 위한 이런 세 가지 조건을 차례대로 신심원리(身心遠離), 희족소욕(喜足少欲), 주사성종(住四聖種)이라고 번역하면서 총괄하여 ③신기청정(身器淸淨)이라고 명명하였다.56)

이렇게 몸과 마음과 조건이 모두 정리되면 ④수혜의 수행에 들어가는데, 탐욕(貪: rāga)이 많은 사람은 ⑤부정관(不淨觀: aśubhā)을 닦고 생각(尋: vitarka)이 많은 사람은 ⑤지식념(持息念: ānāpānasmṛti)을 닦는다.57) 부정관이란 남이나 자신의 몸이 시체나 백골이 된 상태를 떠올리는 수행이며, 지식념이란 들숨(āna)과 날숨(apa-āna)을 살피는(念, smṛti) 수행이다. 이런 두 가지 수행의 목적은 마음을 집중(samādhi)하는 것이다.

그 후 마음을 평정히 하고(śamatha: 止) 몸(身)과 느낌(受)과 마음(心)과 생각(法)에 대해 관찰하는(vipasyanā, 觀) 지관(止觀) 수행에 들어간다. ‘사념처에 머무르는 수행(smṛti-upasthāna-bhāvanā)’으로 ‘사념주(四念住)’라고 한역하였다. 먼저 몸(身)과 느낌(受)과 마음(心)과 생각(法) 각각의 특성에 대해 살펴본다. 예를 들어 ‘몸(身)’의 경우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그 특성이다.58) 이런 특성을 ‘자상(自相: svalakṣaṇa)’이라고 부른다. 신, 수, 심, 법 각각의 개별적인 특성, 즉 자상에 대한 관찰을 ≪구사론기≫에서는 ⑥별상념주(別相念住)라고 부른다. 별상념주의 수행이 끝나면 이들 네 가지의 공통점, 즉 공상(共相: sāmānyalakṣaṇa)에 대해 관찰(vipasyanā)한다. 이는 ‘신, 수, 심, 법’의 네 가지 대상 모두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공(空)하고, 무아(無我)’라는 점이다. 이런 관찰을 ⑦총상념주(總相念住)라고 부른다. 앞의 세 가지인 ‘신, 수, 심’의 경우는 각각에 대해서 네 가지 관찰을 별도로(asambhinna) 닦지만, 마지막인 ‘법’에 대해 관찰할 때에는 별도로 닦기도 하고 ‘신, 수, 심’과 결합하여(sambhinna) 닦기도 한다.

⑦총상념주 가운데 마지막인 법념주의 수행이 무르익으면 ⑧사선근(四善根) 수행에 들어간다. 앞의 ⑥별상념주나 ⑦총상념주의 수행 모두 사성제 가운데 고성제의 네 가지 행상(行相: ākāra)인 ‘무상, 고, 공, 무아’만을 관찰하였는데, ⑧사선근에서는 사성제 전체를 소재로 삼는다. 먼저 고성제에 대해서는 사념주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상(無常: anitya), 고(苦: duḥkha), 공(空: śūnya), 무아(無我: anātma)’라고 관찰한다. 그리고 집성제에 대해서는 ‘인(因: hetu), 집(集: samudaya), 생(生: prabhava), 연(緣: pratyaya)’이라고 관찰하고, 멸성제에 대해서는 ‘멸(滅: nirodha), 정(靜: śānta), 묘(妙: praṇīta), 리(離: niḥsaraṇa)’라고 관찰하며, 도성제에 대해서는 ‘도(道: mārga), 여(如: nyāya), 행(行: pratipatti), 출(出: nairyāṇika)이라고 관찰한다.59) 사성제 각각에 대해서 네 가지 행상으로 관찰하기에 총 16가지 행상을 관찰하게 된다. 이러한 16행상의 관찰은 ‘난(煖)→ 정(頂)→ 인(忍)→ 세제일법(世第一法)’의 순서로 진행된다.

난(煖: ūṣman)은 ‘따스함’이란 뜻으로 ‘번뇌를 모두 태우는 사성제’를 불길에 비유하여60) 그 ‘따스함’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단계다. 처음에는 ‘신, 수, 심, 법’ 가운데 ‘법’에 대해서만 16행상으로 관찰하다가 나중에는 네 가지 모두에 대해 16행상으로 관찰하는데, ‘욕계’의 사성제에 대해서 16행상, 색계와 무색계를 하나로 묶은 상계(上界)의 사성제에 대해서 16행상으로 관찰하기에 총 32행상을 관찰한다. 그 다음 단계인 정(頂: mūrdha)은 ‘정상(頂上)’이란 뜻이며 그 수행방법 역시 난과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법’을, 나중에는 ‘신, 수, 심, 법’을 모두 관찰한다. 악취에 태어날 가능성을 갖는 상태 중에는 최고의 단계이기에 ‘정(頂)’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다음인 ‘인(忍: kṣānti)’의 단계에 들어가면 결코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61) ‘인(忍)’의 원어인 ‘끄샨띠(kṣānti)’의 의미에 대해서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62) 그 사전적 의미는 ‘참음’이다. ≪구사론≫에서 ‘난(煖)’에 대해 설명할 때 ‘성도(聖道: ārya-mārga)’를 ‘번뇌를 태우는 불(火)’에 비유하는 데서63) 알 수 있듯이 ‘인’의 단계에서는 성도의 출발점인 ⑨견도(見道: darśana-mārga)를 목전에 두고 그 불길의 ‘뜨거움’을 참으면서(忍) 수행정진하기에, 문자 그대로 ‘참음’이라고 명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성제에 대해 완벽하게 통찰하여 ⑨견도 이상의 단계로 올라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성자(聖者)의 대열에 합류하려면 ‘동물적 행복의 원천’이었던 ‘탐욕, 분노, 교만, 종교적 어리석음’ 등의 번뇌를 모두 태워 없애야 하는데, 번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어리석은 아쉬움’을 ‘참음(忍)’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을 것이다.

‘인(忍)’은 하인(下忍), 중인(中忍), 상인(上忍)의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특징적인 것은 ‘신, 수, 심, 법’ 가운데 오로지 ‘법’만 소재로 삼는 관찰이라는 점이다. 하인과 중인 모두에서 욕계와 상계의 사성제에 대해 총 32행상으로 관찰하는데, 중인의 경우 32행상을 되풀이 할 때마다 마지막의 1행상을 감소시킨다. 요컨대 첫 번에는 상계 도제(道諦)의 4행상인 ‘도, 여, 행, 출’ 가운데 ‘출’을 감소시킨 31행상만 관찰한 다음에, 매 주기(週期)마다 1행상씩 감소시켜서 마지막에는 욕계 고제의 4행상인 무상, 고, 공, 무아 가운데 ‘무상’의 1행상만 남긴다. 이렇게 마지막 남은 ‘욕계 고제의 1행상’에 대한 관찰이 바로 상인(上忍)이다. 그리고 상인의 관지(觀智) 작용으로 이런 1행상에 대해 투철하게 자각할 때 1찰나의 세제일법(世第一法: laukika-agra-dharma)을 자각하며, 곧이어 ‘욕계의 사성제’와 ‘상계(색계, 무색계)의 사성제’ 각각을 ‘무간도(無間道: anantarya-mārga)인 인(忍: kṣānti)’과 ‘해탈도(解脫道: vimukti-mārga)인 지(智: jñāna)’의 2단계로 통찰하는 ‘16찰나의 마음’이 발생한다. 앞의 15찰나를 ‘⑨견도’라고 부르고, ‘상계(上界)의 도성제에 대한 해탈도의 지(智)’가 생한 마지막의 제16찰나의 경지가 ⑩수도(修道: bhāvanā-mārga)의 시작이다. 수도에 오른 첫 단계의 성자를 수다원(須陀洹)이라고 부른다. 산스끄리뜨어 ‘슈로따-아빤나(śrota āpanna)’의 음사어다. ‘흐름에(śrote) 들어온 분(āpanna)’이란 뜻으로 ‘입류(入流)’ 또는 ‘예류(預流)’라고 의역한다. 이어서 ‘한 번(sakṛt) 오는 분(āgamin)’인 사다함(斯陀含, 一來)을 거쳐서, 오지(āgam) 않는(an) 분(in)인 아나함(阿那含: anāgamin, 不還)의 경지로 올랐다가, 번뇌를 모두 제거하면 아라한(阿羅漢: arhat)이 된다. 아라한의 경지를 ⑪무학도(無學道: aśaikṣa-mārga)라고 부른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 수행의 끝이다.


3.2 명상수행에 근거한 번뇌의 분류

표1 - 견혹과 수혹

5부의 번뇌1)

견혹 (고, 집, 멸, 도) 4부

수혹 1부

⑹ 유신견

所取

① 탐

② 진

③ 만

⑺ 변집견

⑻ 사견

⑼ 견취

能取

⑽ 계금취

⑤ 의

독두무명

 

표2 - 견도와 수도, 그리고 98수면 (88견혹+10수혹[총252혹])

3계

三界

5부혹

五部惑

견도와 수도

(能治)

10번뇌 (所治)

욕계

36혹

32

법지인

무간도

1

법지

해탈도

2

법지인

무간도

5

법지

해탈도

6

법지인

무간도

9

법지

해탈도

10

법지인

무간도

13

법지

해탈도

14

수혹 4

1散地×9品

무간도

해탈도

색계

31혹

28

류지인

무간도

3

류지

해탈도

4

류지인

무간도

7

류지

해탈도

8

류지인

무간도

11

류지

해탈도

12

류지인

무간도

15

류지

해탈도

16

수혹 3

4禪×9品

무간도

해탈도

무색계

31혹

28

류지인

무간도

3

류지

해탈도

4

류지인

무간도

7

류지

해탈도

8

류지인

무간도

11

류지

해탈도

12

류지인

무간도

15

류지

해탈도

16

수혹 3

4定×9品

무간도

해탈도

프로이드의 경우 무의식에 잠재된 ‘심리의 핵’에 대해서, 입과 항문과 성기라는 세 가지 ‘성감대’와 관계된 ‘5세 이전의 체험’에 연관시켜 설명했고, 융은 자아,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페르소나와 같은 태고유형에 근거한 콤플렉스를 ‘심리의 핵’으로 보았는데, ≪구사론≫을 포함한 아비달마교학의 번뇌이론에서 이런 ‘심리의 핵’에 해당하는 것은 ‘십수면(十隨眠)’이라고 불리는 10가지 번뇌다. 10가지 번뇌는 크게 견혹(見惑)과 수혹(修惑)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견혹은 견소단혹(見所斷惑: darśana-heya-kleśa)64)의 준말이다. 불교수행단계 가운데 ‘견도(見道: darśana-mārga)에서 끊어지는(斷) 번뇌(惑)’이라는 뜻이다. ‘사성제(四聖諦)를 모르는 1차적인(親緣) 번뇌’로 인지적(認知的) 번뇌다. ‘사성제의 이치(理致)에 미혹한 번뇌’라는 의미에서 미리혹(迷理惑)이라고도 부르고 후천적으로 습득된 잘못된 생각으로(分別) 인해 발생하기에 ‘분별기(分別起)의 번뇌’라고도 부른다.

수혹은 수소단혹(修所斷惑: bhāvanā-heya-kleśa)65)의 준말이다. ‘수도(修道: bhāvanā-mārga)에서 끊어지는 번뇌’라는 뜻이다. ‘견혹에 근거한 2차적인(重緣) 번뇌’로 점차적으로 제거하는 감성적 번뇌다. ‘대상(vastu, 事)에 대한 미혹’이라는 의미에서 미사혹(迷事惑)이라고도 부르고 선천적으로 갖추고(俱生) 태어나는 번뇌이기에 ‘구생기(俱生起)의 번뇌’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동화의 설명을 참조하면서66) 견혹과 수혹의 종류와 성격을 정리하면 ‘표1’과 같으며, 견도와 수도에서 끊어지는 번뇌의 종류와 연관시켜 이를 보다 자세하게 정리하면 ‘표2’와 같다. ‘표1’에서 보듯이 10번뇌 가운데 ‘⑹유신견, ⑺변집견, ⑻사견, ⑼견취, ⑽계금취, ⑤의’는 오직 견혹에만 속한다. 견도에서 사성제에 대한 통찰이 생길 때 모두 사라지는 ‘인지적(認知的) 번뇌’들이다. 이와 달리 ‘①탐, ②진, ③만’은 수도를 통해서 점차적으로 제거되는 ‘감성적 번뇌’들이며, ‘④무명’은 견혹에 수반된 무명도 있고, 수혹에 수반된 무명도 있으며, 견혹과 마찬가지로 사성제를 직접 대상으로 삼는 무명도 있다. 앞의 둘을 상응무명(相應無明)이라고 부르고, 마지막의 것을 독두무명(獨頭無明)이라고 부른다.67) 또 ‘표2’에서 보듯이 10가지 번뇌들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현장인 ‘욕계, 색계, 무색계’ 전체에서 들쑥날쑥하게 작용하며, 이런 번뇌를 모두 끊기 위해서는, 수행론에서 봤듯이 계행(戒行)을 완성해야 하고 적어도 부정관(不淨觀)이나 지식념(持識念) 같은 기초수행을 통달하여 마음을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견도에 올라서 무루지(無漏智)가 발생해야 삼계 전체의 번뇌를 완전히 끊을 수 있는데, 수행자가 무루지를 발생시킬 수 있는 경지는 ‘미지정(未至定) 및 중간정(中間定)’과 ‘초선(初禪), 제2선, 제3선, 제4선,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각각의 근본정(根本定)들인 9지(地)뿐이다.68) 미지정이란 초선의 바로 아래 단계의 선(禪)을 의미하며, 중간정은 초선과 제2선 근분정의 사이에서 체득되는 삼매다. 이런 9지 가운데 최소한 미지정(anāgamya dhyāna)의 경지까지 올라야 ‘해탈도’인 욕계의 ‘법지(法智: dharma-jāña)’와 상계(上界: ūrdhava)의 ‘류지(類智: anvaya-jāña)’를 생하여 삼계 전체의 번뇌를 녹일 수 있다.69)

견혹의 경우는 앞에서 보았듯이 욕계와 상계의 사성제를 통찰함으로써 끊으며 이를 ‘사성제에 대한 현관(現觀: abhisamaya)’이라고 부른다. 수혹은 견도에서 발생한 무루지로 끊을 수도 있고, 유루도의 6행관(六行觀)을 통해 끊을 수도 있다. 전자는 사성제에 대한 통찰로 견혹을 모두 끊은 수다원 이상 성자(聖者)의 수행이고, 후자는 아직 견혹을 끊지 못한 이생범부(異生凡夫)의 수행이다.

수혹의 번뇌는 ‘욕계의 1산지(散地)와 색계의 4선(四禪) 및 무색계의 4정(四定)’까지 ‘아홉 경지(九地)’ 각각의 번뇌를 다시 아홉 단계(九品)로 나누어 총 81품이 있는데 각 품의 번뇌를 끊을 때마다 무간도(無間道: anantarya-mārga)와 해탈도(解脫道: vimukti-mārga)의 2단계를 거치기에 총 162심(心)이 작용한다. 무간도를 통해 아래 단계의 번뇌를 모두 끊고 해탈도를 통해 그 상태를 지킨다. 비유하면 도둑을 쫓고 문을 닫으면 집안이 편안해 지는데,70) ‘도둑을 쫓음’이 무간도에 해당하고, ‘문을 닫음’이 해탈도에 해당하며, ‘편안해 짐’이 수행자가 처한 경지에 해당한다. 수행자가 자신이 처한 경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보다 위의 경지를 향해 정진하다가 최종적으로 비상비비상처정의 ‘제9품 혹’을 끊게 되는데, 이 때 제161심인 무간도까지는 수도(修道)에 해당하고 마지막 제162심의 해탈도는 무학도다. 번뇌를 완전히 끊은 최고의 성자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견도를 성취한 성자는 무루지에 의해 수도에 들어가 번뇌를 끊음으로써 제162심의 무학도까지 오를 수 있지만, 이생범부의 경우 무소유처까지의 번뇌만 끊을 수 있을 뿐 비상비비상처의 번뇌는 끊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생범부는 ‘삼계 9지(九地)’에서 ‘위의 단계를 좋아하고 아래 단계를 싫어하는(欣上厭下)’하는 육행관(六行觀)에 의해서 유루도로 경지를 상승하며 번뇌를 제거하기 때문이다.71) 예를 들어 색계의 초선에서 제2선에 오를 때에는 초선 및 그 이하의 지에 대해 ‘추(麁: audārika), 고(苦: duḥkhila), 장(障: sthūlabhittika)’이라는 세 가지 행상(行相: ākāra)으로 관찰하여 싫은 마음을 내고(厭下), 제2선에 대해서는 ‘정(靜: śānta), 묘(妙: praṇīta), 리(離: niḥsaraṇa)’의 3행상으로 관찰하여72) 좋은 마음을 냄으로써(欣上) 비상비비상처삼매까지 상승한다. 그러나 비상비비상처삼매의 경지에 이른 후에는 좋아할 그 이상의 경지가 없기에 그 경지의 번뇌를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루도의 한계다.73)



4. 심리적 문제의 해소 - 상담인가 명상인가?


≪구사론≫의 수행론을 다시 정리해 보자. 불교적 명상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세속의 욕락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이다. 철저하게 계행(戒行)을 준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후 부정관이나 지식념(=수식관)을 통해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면, 사성제 가운데 먼저 고(苦)성제에 대해 관찰한다. 신, 수, 심, 법, 즉 몸과 느낌과 마음과 생각이라는 네 가지 대상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소위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고 번역되는 염(念: smṛti, satiⓟ) 수행이다. 최근 국내외에서 유행하는 위빠싸나 수행의 경우 대부분 이 단계에 머물고 있는 듯 하다. 네 가지 대상 각각에 대한 관찰이 무르익으면, 네 가지 모두를 그 공통점인 ‘무상, 고, 공, 무아’로 관찰한다. 고성제에 다름 아니다. 그 후 집(集)성제를 ‘인, 집, 생, 연’으로 관찰하고, 멸(滅)성제를 ‘정, 출, 묘, 리’로 관찰하며, 도(道)성제를 ‘도, 여, 행, 출’로 관찰하는 사선근(四善根) 수행에 들어간다. 사성제에 대한 개념적 분석이다. 사선근 수행은 ‘난→ 정→ 인→ 세제일법’의 순서로 진행되는데 ‘인’의 단계부터는 신, 수, 심, 법 가운데 ‘법’에 대해서만 관찰한다. 그 결과 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성제의 진상을 직관하게 되며 이를 견도(見道)라고 부른다. 견도에서는 ‘후천적 번뇌’인 ‘분별기(分別起)의 번뇌’가 완전히 제거된다. ‘인지(認知)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다. 심리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인지장애’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견도에서 체득한 ‘무루지(無漏智)’로 ‘선천적 번뇌’인 ‘구생기(俱生起)의 번뇌’를 차츰차츰 제거한다. 수도에 들어가는 것이다. ‘감성적 번뇌’인 ‘수혹(修惑)’을 제거한다. 이를 통해 ‘정서장애’에서 점차 해방된다.

이상의 요약에서 보듯이 불교의 경우는 내담자의 고통이 무엇이든, 명상을 통해서 사성제의 진리를 철견(徹見)할 때 모든 심리적 고통이 해결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그 방식이 독특하다. 혹 상담자가 개입한다면, 상담자는 내담자로 하여금 사성제를 철견할 수 있도록 지도해 줄 뿐이다. 이와 달리 정신분석에서는 상담자가 내담자의 무의식을 드러냄으로써 심리적 고통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비유한다면 ≪구사론≫의 수행론은 ‘기성복’과 같고, 정신분석의 상담은 ‘맞춤복’을 지향하였다. 옷의 경우는 기성복보다 맞춤복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심리 치료’의 경우에도 그럴까? 더 나아가 심리치료에서 무의식을 도입하는 것이 유의미할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 무의식과 의식이 존재하기라도 한 것일까?


4.1 논의의 혼란


우리는 ‘무의식’에 대해 논의할 때, 은연중에 ‘의식’의 존재를 당연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고 있기나 한가? 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가?

≪금강경≫에서는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고 선언한다.74) “과거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잡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실체가 없다. 실재하지 않는다. 공(空)하다. 공에 대해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경)의 ≪중론≫에 의거하여 그 이유를 말하면 “과거의 시간은 지나갔기에 만난 적이 없고, 미래의 시간은 오지 않았기에 만날 수가 없으며, 현재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의 틈에 끼어 있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75)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그 어떤 시간대에도 우리의 의식이 있을 틈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외계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만든 허상이다. ≪화엄경≫에서는 이런 통찰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노래한다. “모든 것은 마음의 조작이다.”라는 뜻이다. 나에게 떠오른 ‘의식’은 모두 조작된 것이라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잠재되어 있다. 의식은 실재하지 않기에 무의식만 실재한다. 잠재된 것만 실재한다. 나타나지 않은 것만 실재한다. 없는 것만 실재한다. 없는 것만 있다. 모순(Contradiction)이고 역설(Paradox)이다.


4.2 의식이란 무엇인가?

그림5) - Lexus-LS600 외부

 

‘의식’이 있다는 생각은 어째서 일어났는가? 잠을 자는 사람에게는 의식이 없는가? 기절한 사람에게는 의식이 없는가? 식물인간에게는 의식이 없는가? 뇌사자에게는 의식이 없는가?

자동차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동차 밖에서 자동차를 보는 것이고(그림5), 다른 하나는 자동차 내부에서 자동차를 보는 것이다(그림6). 두

그림6) - Lexus-LS600 내부

경우 모두 동일한 자동차를 바라보지만, 관찰자에게 보이는 모습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림7) - 다리뇌(뇌교)와 숨뇌(연수)

‘의식’에 대해서 연구할 때도 이는 마찬가지다. 자동차의 외형을 보듯이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도 있고, 자동차의 내부를 보듯이 주관적으로 관찰할 수도 있다. “잠을 자는 사람에게는 의식이 있는가, 없는가?”라고 물을 때, 남이 볼 때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기에 “의식이 없다.”고 답할 수 있고, 잠을 자는 당사자가 볼 때는 항상 꿈이 나타나기에 “의식이 있다.”고 답할 수 있다. 사실 f-MRI로 촬영해 보면 REM수면 중 뇌의 활동은 각성시의 그것과 차이가 없다고 한다. 뇌교(Pons, 다리뇌)에서 연수(medulla oblongata, 숨뇌)로 보낸 전기신호가 운동신경을 차단하여 근육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 뿐이다(그림7).76) 그렇다면 “잠을 잔다.”는 말 역시 확고부동한 표현이 아니다. 남이 볼 때는 그가 잠을 자고 있지만, 꿈을 꾸는 당사자는 꿈속에서 깨어 있다. 그래서 REM수면을 ‘역설적 잠(Paradoxical sleep)’이라고 부른다. ‘깨어 있는 잠’이다.77) 식물인간에게는 의식이 있는가? 남이 볼 때는 의식이 없지만, 당사자에게는 의식이 있다.78) 항상 꿈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뇌파가 떠는 한 그의 의식에는 항상 무언가가 나타날 것이다. REM상태의 구체적인 꿈이든, Non-REM상태의 ‘희미한 꿈’이든 …….

 

내가 나를 바라볼 때는 깨어있든, 잠을 자든, 혼절을 했든 항상 의식이 있지만, 내가 남을 볼 때에는 그가 혼절했을 때도 그에게 의식이 없고, 잠을 잘 때도 의식이 없다. 더 나아가 깨어서 나와 대화를 나눌 때에도 그의 의식을 추측할 수는 있어도 그의 의식이 나에게 직접 지각되지는 않는다. 남에게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에게 확인되지 않는다. 불교전문용어로 표현하면 남의 의식은 ‘비량(比量)’될 뿐이지, ‘현량(現量)’되지 않는다.


4.3 무의식을 드러낼 때 치유되는가?


부단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의식이 있을 ‘틈새’가 없다. 의식은 시간의 흐름 위에서 가까스로 보금자리를 틀고 있을 뿐이다.79) 의식은 실재할 수 없고 실재하는 모든 것은 무의식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역설이다. 무의식은 모순에 빠지고, 의식은 위태롭다.

사상누각과 같다고 해도 나에게는 항상 의식이 있지만, 남의 의식은 확인되지 않는다. 나에 대해서 남의 의식은 무의식이고 전의식이다. 따라서 상담자가 정신분석을 통해 내담자의 “무의식을 의식에 드러낸다.”고 할 때, 그것이 내담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그의 무의식을 발견한 것인지, 아니면 내담자가 익히 알고 있는 ‘속내’가 발각된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또 상담자가 정신분석을 통해 내담자의 무의식을 드러내어 그에게 알렸을 때 증상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치유되었다고 평하지만, 양상을 달리 하여 더 깊은 무의식의 심연으로 숨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신분석을 통해서 내담자의 속내가 상담자에게 들킨 것인지, 아니면 내담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을 드러낸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멍석을 깔면 하던 짓도 멈춘다.”는 속담이 있다. 정신분석을 통해서 내담자의 속내가 상담자에게 발각되었을 때, 더 이상 같은 증상이 내담자의 ‘의식’에 나타나지 않고 ‘상담자’에게 관찰되지 않는 이유일 수 있다. 멍석을 깔면 하던 짓을 멈추었지만, 그 짓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숨은 것’일 수 있다. ‘정신분석’을 통해 무의식을 드러내는 일이 분석가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학문적 정합성을 가질 수는 있어도, 그런 분석 결과를 내담자에게 알려줄 때 그의 전인격이 치유되는지에 대해서는 면밀히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4.4 예화를 통한 비교


정신분석과 불교의 수행론의 차이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예를 들어 보자. 불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사밧티(Sāvatthī) 성에 ‘말라깽이 고따미’라는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결혼 후 심한 학대를 받으며 생활했는데 아들을 하나 낳자 사람들은 이 여인을 칭찬하며 더 이상 학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뛰어 놀 수 있을 만큼 자란 아들이 갑자기 병이 들어 죽었다. 비탄에 잠긴 여인은 죽은 아들을 등에 업고 약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부처님을 찾아 왔다. 그리곤 아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죽은 사람이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얻어 오면 아들을 살려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여인은 온 종일 돌아다니며 겨자씨를 구하려고 했지만 단 한 톨의 겨자씨도 구할 수 없었다. 그 때 여인은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임을 깨닫게 되고 부처님의 지도를 받아 예류과(預流果)를 얻게 된다(요약).80)

상담심리의 틀에 대입하면, ‘말라깽이 고따미’는 내담자라면 부처님은 상담자다. 여기서 보듯이 부처님은 아들 잃은 괴로움에 애원하는 고따미 여인을 마을로 보내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무상의 진리를 스스로 체득하게 한다. 이런 방식은 ‘무상, 고, 공, 무아’의 고성제를 스스로 자각하게 하는 사념처 수행이나 사선근 수행, 더 나아가 견도의 수행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 여인의 마음을 캐물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세상의 참모습에 대해 있는 그대로 자각하게 함으로써 심리적 문제를 해결한다. 고따미 여인뿐만 아니라, 어떤 고민을 갖고 있는 어떤 누가 와도 마찬가지다. 그의 개인사를 캐묻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통찰하게 한다.

그러면 정신분석에서는 어떻게 대처할까? 고따미 여인의 경우 “내 아들은 아직 죽지 않았다. 약을 먹으면 나을 것이다.”라는 생각만 의식에 떠오르기에 아들의 시체를 업고서 약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닌다. 그 때 고따미 여인을 만난 정신분석가는 그녀의 무의식을 분석한 후 ‘끊어진 의식의 고리’를 이어주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알려줘야 할 것이다. “당신은 마르고 못생겼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항상 조롱을 받고 열등감 속에서 지냈습니다. 결혼 후에도 남편에게 학대를 받다가 아들을 낳자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죽자 다시 옛날처럼 조롱받고 학대받을 것이 두려워 아들이 죽지 않은 것처럼 등에 업고서 약을 구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그런 행동을 중지하기 바랍니다.” 고따미 여인은 더욱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좀 과장한 면이 있지만, 사실 정신분석에는 그런 면이 있다.

정신분석을 통해 망각한 의식의 고리를 무의식에서 찾아내어 내담자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담자에게 자신의 무의식을 알려줌으로써 그의 증상이 완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상하며(苦) 마음 속 번뇌가 그 원인이라는(集) 세상의 실상, 다시 말해 내담자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성제(四聖諦)의 편린이라도 내담자 스스로 자각함으로써 그의 증상이 완화된다. ‘맞춤복과 같은 상담’을 희망할 것이 아니라, ‘기성복과 같은 명상’을 제공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구사론≫의 사성제(四聖諦) 명상에서 얻는 교훈이다.


1) 프로이드, 임홍빈 홍혜경 옮김(1996). 프로이드전집3,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 서울: 열린책들, 103.

 


2) 캘빈 S. 홀, 유상우 옮김(1993), 프로이트 심리학 입문, 서울: 홍신문화사, 75.

 


3) 캘빈 S. 홀, 유상우 옮김(1993), 75.

 


4) ‘캘빈 S. 홀, 유상우 옮김(1993), 74’ 참조.

 


5) Bonnie R. Strickland ed.(2001). The GALE ENCYCLOPEDIA of Psychology, 323.

 


6) Bonnie R. Strickland ed.(2001), 208.

 


7) Bonnie R. Strickland ed.(2001), 637.

 


8) ‘프로이드, 임홍빈 홍혜경 옮김(1996), 114’에 실린 도해로 ‘http://www.marxists.org/reference/subject/philosophy/works/at/freud2.htm-2012/08/01’에서 채취한 원본.

 


9) 그림 상단의 ‘pcpt-cs’는 ‘perception-consciousness’의 약자다.

 


10) ‘http://www.thespiritwiki.com/index.php/Psychoanalytic_Theory_of_Personality-2012/08/01’에서 채취.

 


11) 프로이드, 임홍빈 홍혜경 옮김(1996). 114.

 


12) 캘빈 S. 홀, 유상우 옮김(1993), 138-139.

 


13) 캘빈 S. 홀, 유상우 옮김(1993), 139~140.

 


14) 캘빈 S. 홀, 유상우 옮김(1993), 143~144.

 


15) C. S. 홀(외), 최현 옮김(1993). 융 심리학 입문. 서울: 범우사, 50.

 


16) Charles Darwin(1859). The Origin of Species, London: John Murray, p.488.

 


17) Jung, C.G. ([1960] 1969). The Structure and Dynamics of the Psyche, Collected Works, Volume 8,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Wikipedia(http://www.wikipedia.org - 2012/07/31)의 Complex (psychology) 항목에서 재인용].

 


18) C. S. 홀(외), 최현 옮김(1993), 48.

 


19) C. S. 홀(외), 최현 옮김(1993), 48.

 


20) C. S. 홀(외), 최현 옮김(1993), 49.

 


21) ‘C. S. 홀(외), 최현 옮김(1993), 54’에서 재인용.

 


22) ‘C. S. 홀(외), 최현 옮김(1993), 54’ 참조.

 


23) Wikipedia(http://www.wikipedia.org - 2012/07/31)의 Archetype 항목.

 


24) ‘C. S. 홀(외), 최현 옮김(1993), 56’ 참조.

 


25) 26) Wikipedia(http://www.wikipedia.org - 2012/07/31)의 Synchronicity 항목에서 재인용.

 


27) Wikipedia(http://www.wikipedia.org - 2012/07/31)의 Unus mundus 항목.

 


28) 이만(1981). 第八阿賴耶識과 無意識에 關한 比較: C.G.Jung의 無意識觀을 中心으로. 韓國佛敎學, 6, 103-119. ; 김성관(1990). 아뢰야식과 무의식 - 불교사상과 체․게․융사상의 비교 고찰을 중심으로 -. 동양철학, 167~201 ; 남수영(1995). 알라야식설과 무의식설의 비교 고찰 -유식불교와 분석심리학을 중심으로-. 인도철학, 5, 101-127 ; 妙注(金明實)(1998). 유식학의 阿賴耶識이론과 융의 無意識이론 비교. (동국대)大學院硏究論集, 28, 41-57 ; 최연자(1999). 아뢰야식과 무의식에 관한 연구, 범한철학, 20, 311-334 ; 安相煥(法淨)(1999). 唯識學의 心識說과 深層心理學의 比較 硏究 : S. Freud와 C. G. Jung의 意識과 無意識을 中心으로. 불교대학원논총, 235-372 ; 원혜영, 프로이트의 이론과 유식설 비교 연구 - 알라야식을 통한 무의식의 탐구, 동서비교문학저널, 24, 2011 봄.여름, 117~137.

 


29) “此中何法名為種子 謂本識中親生自果功能差別 此與本識及所生果不一不異”, 成唯識論, 大正藏31, 8a.

 


30) “阿賴耶識因緣力故自體生時 內變為種及有根身 外變為器”, 成唯識論, 大正藏31, 10a.

 


31) Associate Professor of Religion, Rutgers University, New Brunswick, NJ.

 


32) Tao Jiang(2004). Storehouse Consciousness and the Unconscious: A Comparative Study of Xuan Zang and Freud on the Subliminal Mind,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Vol.72, No.1,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136.

 


33) Tao Jiang(2004), 137.

 


34) 이만(1981), 114.

 


35) 이만(1981), 115 ; 김성관(1990), 196 ; 묘주(1998), 47.

 


36) 김성관(1990), 197.

 


37) 김성관(1990), 198 ; 남수영(1995), 106.

 


38) 묘주(1998), 53.

 


39) 묘주(1998), 53.

 


40) 김성관(1990), 199 ; 남수영(1995), 106.

 


41) 김성관(1990), 200.

 


42) 김성관(1990), 201.

 


43) 묘주(1998), 46-47.

 


44) 묘주(1998), 55.

 


45) 그러나 무의식적인 ‘認知의 왜곡’을 解消하는 기술로 中觀學을 援用할 수는 있다.

 


46) 본고에서 사용한 ≪구사론≫의 산스끄리뜨문은 ‘北京大学 外国语学院 东方学硏究院 梵文贝叶经与佛敎文献硏究所의 阿毗达磨俱舍论梵汉对勘(http://www.mldc.cn/sanskritweb/etext.htm)’에서 채취한 것이다.

 


47) 色聲香味觸의 五欲境. 또는 財色名食睡, 즉 재물욕, 음욕(淫欲), 명예욕, 식욕(食欲), 수면욕(睡眠欲).

 


48) 김동화(2001), 구사학, 서울: 뇌허불교학술원, 263.

 


49) “隨逐有情名隨 行相微細名眠 如人睡眠行相難了”, 普光, 俱舍論記, 大正藏41, 291a ; 김동화(2001), 259.

 


50) “prasupto hi kleśo’nuśaya ucyate, prabuddhaḥ paryavasthānam(煩惱睡位說名隨眠 於覺位中即名纏故 何名為睡 謂不現行種子隨逐 何名為覺 謂諸煩惱現起纏心)”, 阿毘達磨俱舍論, 大正藏29, 99a.

 


51)“kā ca tasya prasuptiḥ? asammukhībhūtasya bījabhāvānubandhaḥ(何名為睡 謂不現行種子隨逐)”, 阿毘達磨俱舍論, 99a.

 


52) 眞諦 譯, 阿毘達磨俱舍釋論, 大正藏29, 261a.

 


53) 이런 설명은 세친이 소속한 경량부(經量部)의 이론으로 후대에 유식학의 종자설로 발전하는 단초가 된다. ≪구사론≫의 번뇌론을 논할 때, 이런 논의와 아울러 설일체유부의 학설과 경량부의 학설을 면밀히 비교하고 구분하면서 논지를 전개해야 하겠지만 응용불교, 비교학문이라는 본 논문의 성격상 이런 논의들은 모두 생략한다.

 


54) “應先安住清淨尸羅 然後勤修聞所成等”, 阿毘達磨俱舍論, 大正藏29, 116c.

 


55) 阿毘達磨俱舍論, 116c.

 


56) 阿毘達磨俱舍論, 117b.

 


57) 거친 번뇌를 제거하는 오정심(五停心)에 ‘부정관, 자비관, 계분별관, 연기관, 수식관’이 있지만 ≪구사론≫에서는 수식관에 해당하는 지식념과 부정관만 소개한다.

 


58) 眞諦 譯, 阿毘達磨俱舍釋論, 大正藏29, 271a.

 


59) 阿毘達磨俱舍論, 119b.

 


60) “kleśendhanadahanasyāryamārgāgneḥ pūrvarūpatvāt(是能燒惑薪聖道火前相 如火前相故名為煖)”, 阿毘達磨俱舍論, 119b.

 


61) 阿毘達磨俱舍論, 120b.

 


62) ‘최원섭(2000), ������阿毘達磨俱舍論������의 修行體系 硏究 -‘忍’槪念을 中心으로-, 동국대학교대학원석사학위논문’에 이에 대한 연구성과가 집대성되어 있다.

 


63) “kleśendhanadahanasyāryamārgāgneḥ pūrvarūpatvāt(是能燒惑薪聖道火前相 如火前相故名為煖)”, 阿毘達磨俱舍論, 119b.

 


64) 阿毘達磨俱舍論, 122b.

 


65) 阿毘達磨俱舍論, 89a.

 


66) 김동화(2001), 264-265.

 


67) ≪俱舍論記≫의 용어. 진제의 ≪俱舍釋論≫에서는 獨行無明이라고 번역하며, 현장은 唯有無明(오직 무명만 존재한다)는 문장으로 할 뿐 별도 술어(術語, technical term)를 만들지 않는다.

 


68) 阿毘達磨俱舍論, 32a.

 


69) 阿毘達磨俱舍論, 134c.

 


70) 阿毘達磨俱舍論, 122a ; 김동화(2001), 312.

 


71) 김동화(2001), 315.

 


72) 阿毘達磨俱舍論, 127c ; 김동화(2001), 316.

 


73) 이상은 ‘김동화(2001), 311-317’ 및 ‘阿毘達磨俱舍論, 分別賢聖品’에 근거한 설명이다.

 


74) 金剛般若波羅蜜經, 大正藏8, 751b.

 


75) “已去無有去 未去亦無去 離已去未去 去時亦無去”, 中論, 大正藏30, 3c.

 


76) http://www.cerebromente.org.br/n13/curiosities/desligamento_i.htm-2012/07/28.

 


77) Wikipedia(http://www.wikipedia.org - 2012/08/02)의 Rapid eye movement sleep 항목.

 


78) 식물인간에게도 REM수면이 나타나는데 정상인보다 그 기간이 짧고, 안구운동의 정도나 턱과 다리의 근육수축 역시 정상인보다 약하다고 한다. Arie Oksenberg PhD, Carlos Gordon, MD DSc, Elena Arons PhD and Leon Sazbon(2001). Phasic Activities of Rapid Eye Movement Sleep in Vegetative State Patients, Sleep, 24(6), 703.

 


79) ‘공초 오상순’의 시 ‘방랑의 마음’: “흐름 위에 / 보금자리 친 / 오, 흐름 위에 / 보금자리 친 / 나의 혼(魂). ……”

 


80) Therīgāthā 제213~223송에 대한 Dhammapāla註(Paramatthadīpanī): Hermann Oldenberg and Richard Pischel 校訂(1883), Theragāthā and Therīgāthā, P.T.S., London, 195-198(Rhys Davids 英譯(1909), Palms of the Early Buddhist, P.T.S., London, 106-108): 이 요약문은 필자의 논문 ‘김성철(2000). 중관적 연기론과 그 응용, 불교문화연구, 1’에서 발췌한 것이다.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1150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