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불교문화」27집, 2016. 9, 127~173
『숫타니파아타』(Suttanipāta)의 佛陀觀
( 이 논문은 부산대학교 자유과제 학술연구비(2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김 용 환/부산대 철학과 교수
1. 序文
2. 說法者(dhamma-vādin)
3. 지혜가 광대한 者(bhūri-pañña, 廣慧者)
4. 煩惱를 멸한 者(khina-āsava, 漏盡者)
5. 存在의 超越者(apunabbhava)
6. 結語
<국문초록>
흔히 불타관을 논할 때 역사적 불타관과 초역사적 불타관으로 구분한다.
釋尊의 경우 역사적인 존재이지만 成道를 계기로 초역사적인 法을 체득하기
때문에 동시에 초역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거기에 반해 大乘佛敎의 불타관
은 역사적 존재가 아닌 초역사적 불타관 중심이다. 따라서 釋尊의 佛陀觀에
는 人格의 歷史性과 法의 超歷史性이 결합되어 있으며 거기에 神格化·超人
化라는 外的 요소가 영향을 미치고 있어 자료상으로 이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본 논문에서는 초기 불교의 最古層의 문헌으로 평가되
고 있는『숫타니파아타』에 한정하여 여기에 나타나 있는 불타관을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숫타니파아타』에 나타난 불타관은 自內證(sakkhi)한 說法
者로서 지혜가 광대한 자(bhūri-pañña, 廣慧者)이며, 煩惱를 멸한 자
(khina-āsava, 漏盡者)로서 영원한 진리(dharma)를 체득한 覺者(Buddha)로 구
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覺者는 일체 존재의 구속과 生死輪廻
(Jātimaraṇa-saṃsāra)를 완전히 해탈하여 寂靜한 상태(santi)인 涅槃 즉 涅槃寂
靜을 證得한 초월자이다.
1. 序文
“釋尊 고타마는 영원한 진리(dharma)를 깨달았기 때문에 覺者(Buddha)라
고 불린다.”1)라는 말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고타마가 覺者 즉
佛陀라고 불려져 온 근본적인 이유이다. 불타 생존시 부터 거의 25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그에게 여전히 관심을 보이는 것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고타마가 아니라 그가 깨달은 진리의 超歷史性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그가 깨달은 진리가 특정한 時空을 뛰어 넘어 普遍性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며, 그것은 오늘날 뿐 만 아니라 불교가 전래된 지역에서
는 과거에도 그러하여 왔다.
1) 中村元, 「人間ゴ―タマの神格化」,「宗敎硏究」제127호, p.274.
이러한 초역사적 불타관의 근거에는 불타가 바카리(Vakkali)長老에게 설
한
“바카리여! 法(dhamma)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
다.”2)
2) “yo kho vakkali dhammam passati so mam passati. yo maṃ passati so dhammam passati.”,
『숫타니파아타』(Suttanipāta)[앞으로 본문에서는『숫타니파아타』로, 그리고 출처와 각주에서는
Sn.으로 약칭]. Ⅲ, p.120.
고 하는 가르침이 전하고 있다. 이 내용은 불타로서의 자신의 본질이 法, 즉
진리에 있으며, 법과 不二의 관계임을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法은 그 법을 깨쳐 佛陀(覺者)가 된 인격으로서의 불타의 출현과는 無關하게
普遍性을 가지고 常住한다고 경전은 설한다.
“만약에 불타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이 法은 常住하며, 法
住 法界로 그 如來는 스스로 覺知하여 等正覺을 이루어, 사람들을 위해 연
설하고 드러내어 보인다.”3)
3)『雜阿含經』卷12, 正藏2, p.846.
이 두 자료를 종합하면 불타가 깨친 法의 영원성과 함께 법과 不二의 관계
인 인격으로서의 불타의 영원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
도 어느 일정한 시기에 형성된 불타관을 반영하고 있을지는 모르나, 일찍이
僧伽와 더불어 佛法僧 三寶로서, 불교의 중심적 원리와 가치가 되어 三歸依
의 대상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흔히 불타관을 논할 때 역사적 불타관과 초역사적 불타관으로 구분한다.
釋尊의 경우 역사적인 존재이지만 成道를 계기로 초역사적인 法을 체득하기
때문에 동시에 초역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거기에 반해 大乘佛敎의 불타관
은 역사적 존재가 아닌 초역사적 불타관 중심이다. 따라서 釋尊의 佛陀觀에
는 人格의 歷史性과 法의 超歷史性이 결합되어 있으며 거기에 神格化·超人
化라는 外的 요소가 영향을 미치고 있어 자료상으로 이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최초기의 불교는 그 성립과정에서 우파니샤드를 비롯한 소위 婆羅門系의
사상과 자이나교를 비롯한 沙門系의 사상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서로 공
유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따라서 불타관의 연구에 있어서도 그들과의 상호
대비를 통해 불타의 독자적인 근본사상을 분리하여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小論에서는 초기 불교의 最古層의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는『숫타
니파아타』에 한정하여 거기에 나타나 있는 불타관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미『숫타니파아타』의 제4義品(Aṭṭhaka vagga)과 제5彼岸道品(pārāyana vagga)
이 역사적 불타의 直說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자료라는 평가에 근거하여,
이들 자료를 토대로 한 先學의 논문4)이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제4品, 5品
의 자료를 토대로 불타의 사상의 독자성이 “언제까지나 일상적 존재를 계속
하려고 하는 최심층의 욕망[渴愛]에 의해 (인간을) 定義한 것”5)이며, 이것이
이전에 없던 新發見이라는 荒牧典俊 氏의 발표가 학계에 주목을 받기도 하
였다.
4) 西義雄, 「最古の佛典に說く不滅の佛陀觀」,「東洋學論叢(東洋大學文學部紀要)」第38集.
5) 荒牧典俊, 「原始佛敎聖典の成立について」,「東洋學術硏究」第23卷 1號, p.59.
그러나 현존하는 초기불교문헌 성립의 新古를 어느 정도 확인하고, 그것
으로부터 불타의 근본사상을 추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불타의 直說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많은 부분이 대화의 형식으로 된 ?숫타니파아
타?의 내용이 불타 당시에 현장에서 녹음이 되거나 速記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형태로 구성되는 데는 어떤 형태이든 제3자가 개입되었
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 불타의 直說은 교단이나 편찬자의 의
도에 따라 재구성되거나 다소 潤色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자료상의 난점을 고려하면서『숫타니파아타』가 전체로써 보여
주려고 하는 불타의 근본 사상과 불타관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따라서 거기
에는 순수한 역사적 불타의 사상만이 아닌 경전의 전승과 편찬 과정의 교단
내외의 사람들이 불타라는 심볼(symbol)을 통해 구하려고 한 人生觀과 世界
觀 및 價値觀이 망라되어 있다고 하여도 될 것이다.
“소멸해 버린 그는 존재하지 않습니까? 혹은 해를 입지 않고 常住할까요.
聖者여! 나에게 설명해주십시오. 당신은 그 이치(dhammo)를 잘 알고 계시
기 때문입니다.”(Sn. 1075)
세존은 대답하였다. “우파시바여! 소멸해 버린 자는 헤아리지 못한다. 그
것에 의해 그를 논하지만 그 (방법이) 그에게는 없다. 모든 것(sabbesu
dhammesu)이 끊어졌을 때 모든 논의의 길(vādapathā)도 역시 끊어진다.”
(Sn. 1076)
이것은 佛陀와 우파시바와의 대화 내용이다. 이 대화에 나오는 ‘소멸해 버
린 자(atthaṃ gatassa)’는 앞의 게송(Sn. 1071)에서 볼 때 ‘일체 욕망에 대한 탐
욕에서 떠나, 無所有에 의존하여 다른 (상태를) 버리고, 有想解脫
(saññāvimokka)에서 해탈한 사람’으로 ‘명칭과 신체(nāmakāya)’로부터 해탈한
聖者(munī)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6) 그런데 그러한 성자가 ‘존재하
지 않는지, 常住하는지에 대한 우파시바의 질문에 대해 불타는 소멸해 버린
자는 헤아리지 못하며, 모든 논의의 길이 끊어진다고 대답하고 있다.
6) Sn. 1074.
그리고『法句經』7)에 “그의 번뇌(āsava)가 소멸하고, 음식을 밝히지 않으며
그의 해탈의 경지가 空하여(suññato) 자취가 없으며(animitto), 그의 足跡은 마
치 허공의 새와 같이 알기 어렵다(durannayam).”는 偈頌이 있다.
7) Dhp. 93, cf. Dhp. 179, 254., Mahābhārata, śāntiparva 181, 12.
이 내용들에는 일반론으로써 제3자의 ‘해탈한 聖者’ ‘如來’ ‘번뇌가 소멸한
자’의 死後 존재 有無와 해탈의 경지에 대한 불타의 견해가 표명되어 있다.
만약에 이들이 불타 자신의 존재와 깨달음의 경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면, ‘불타가 누구이며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논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며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숫타니파아타』에는 전술한 문제와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
타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밝히고 있는 내용들이 많이 있으며 또는 제자들이
나 그 밖의 인물들이 불타의 존재에 대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佛陀觀이
나타나 있다. 비록 그러한 자료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
니라 하더라도 자료상으로 兩者를 엄격하게 판별하는 것이 어려운 점을 감
안하면, 우리는 이를 통해 적어도 최초기의 불교 교단의 내외에 있어서 불타
는 어떠한 존재로 생각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할 수는 있을 것이다.
2. 說法者(dhannavādin)
佛陀라는 한 사람의 인간이 인류의 역사와 精神史에 자신의 존재를 刻印
할 수 있었던 최초의 계기는 鹿野園에 있어서의 初轉法輪일 것이다. 만약에
그가 깨친 自內證의 法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면, 그의 인격도 그가 깨
친 법도 역사에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불타가 불타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법의 자내증에 있지만 역사적 존재로서 불교를 있게 한 것
은 그가 법을 설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불타의 초전법륜은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예정된 필연의 사건으로 우연
이 아니라는 사람들의 확신이 아지타仙人의 예언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는
데, 그 가장 원초인 형태로 보이는 자료가『숫타니파아타』의 「나라카經
(Nālaka-sutta)」에 실려 있다.
“그는 모든 衆生들 가운데 최상의 존재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모든 살아
있는 것 가운데 최상의 牛王과 같은 사람이다. 百獸의 왕인 힘센 사자가 포
효하듯이 그는 仙人(이 모이는 곳)이라는 숲 속에서 (法)輪을 굴릴 것이다.”
(Sn. 684.)
이 예언에는 불타의 說法과 傳法이 우연이 아닌 필연이며 그의 출생과 더
불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려고 하는 생각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러
한 생각은 훗날 더욱 발전하여 불타의 깨달음과 설법이 出家 後 단지 6년간
의 苦行 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 前生에 있어서의 무수한 菩薩行의
결과로 보는 「本生經(Jātaka)」의 성립 前兆가 아닐까 한다.
그러면 初轉法輪을 계기로 他人에게 설하기 시작한 법은 불타와 어떤 관
계를 가지고 있을까?
불타가 설한 法은 자신에 의한 思惟의 산물이 아니며, 또는 다른 사람으로
부터 전해들은 見解도 아니다. 불타는 당시 지식의 생산·유통 구조의 핵심
이라고 할 수 있는 사유와 권위를 부정하고 있다.
“사람이 어떤 것에 의존하여 다른 것을 열등한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속
박이라고 達人(kusala)은 말한다. 그러므로 比丘는 보이는 것(diṭṭhaṃ), 들리
는 것(sutaṃ), 생각하는 것(mutaṃ) 戒와 禁制(sīlabbataṃ)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Sn. 798)
“바라문(婆羅門)은 그 밖에는 보이는 것(diṭṭhe), 들리는 것(sute), 戒와 禁
制(sīlavate), 생각하는 것(mute)에 淸淨하다(suddhim)고 말하지 않는다.
……”8) (Sn. 790, cf. Sn.839.)
8) Sn. 839 참조.
불타는 達人, 婆羅門이 말한 것이라는 간접화법을 통해 ‘보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戒와 禁制’에9) 대해 그것이 청정하게 하는 수단이 되지 못함
을 설하고 있다. 지식과 정보의 전달을 위한 다른 매개체가 없는 당시에 있어
듣는 것은 단순한 聽聞에 그치지 않고 인식의 수단으로써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권위 있는 ‘傳承의 學問’10)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불타는 思惟(생각하는 것)와 권위를 眞理에 이르는 수단으로 받아들
이고 있지 않다.
9) 이 구절은 古우파니샤드에 나오는 diṭṭha-suta-muta-viññātesu를 차용하여 사용한 것인데(Sn.
1086, 1122), 마지막의 viññātesu를 sīlavate로 바꾼 것이다. 中村元, ?ブッダのことば-スッタ
ニパ―タ」 p.1086.
10) 中村元은 suta를 ‘전승의 학문’으로 번역하고 있다. 위의 책, p.148., Sn. 790, Sn. 887.
“생각을 떠난 사람에게는(saññāvirattassa) 속박이 없다. 智慧에 의해 해탈
한 사람에게는(paññāvimuttassa) 迷妄(mohā)이 없다. 생각(saññañ)과 見解
(diṭṭhiñ)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충돌하면서 세상을 헤맨다.”
(Sn. 847)
불타는 思惟(sañña)에 의한 철학적 견해(diṭṭhi)이든, 권위를 가진 傳承의 독
단적 견해이든 그것으로 인해 迷妄(moh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보고, 智慧
에 의한 解脫(paññā vimutta)을 설하고 있다. 불타에게 지혜는 다른 사람으로
부터 ‘전하여 들은 것이 아닌(anītihaṃ)’11) ‘스스로가 체험한 自內證의 법
(sakkhi-dhamma)’12)을 통해 얻은 것이다. 이를 經에서는
11) Sn. 934, 1053, 1066.
12) Sn. 921, 934.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하여 들은 것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법을 보았다.
(sakkhi dhammaṃ anītiham adassī)”(Sn. 934)
라고 설한다. 그러므로 불타의 법은 전승의 권위적 가르침에 의존한 것도 아
니며, 자신에 의한 사유의 산물이 아닌 直觀的인 체험의 소산임이 강조되고
있다. 在家信徒인 담미카(Dhammika)는 불타에게 가르침을 청하면서 “더러움
이 없는 사람이 깨닫고 잘 설한 법(……dhammam vimalenānubuddhaṃ
subhāsitaṃ)”13)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때 법을 ‘깨닫는다
(anubuddhaṃ)는 것’은, 불타가 설한 법이 단순히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
을 나타내고 있다.
13) Sn. 384.
불타가 이와 같은 自內證의 법을 세상 사람에게 설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
까? 前述한 아지타 仙人의 예언에 따르면 그것은 불타가 태어나면서 이미 예
정된 일이라고 한다. 반면에 相應部 경전(Sn.6·1·1, Ayācanam)14) 등에는 불
타가 成道 후 설법을 주저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이유는 자신이 깨달은 법이
‘매우 깊으며,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려우며, 寂靜絶妙하여, 사고의 영역을
넘어 미묘한데’ 비해 세상 사람들은 ‘욕망(ālaya)을 즐기고 욕망에 빠져’15)있
기 때문에 법을 설하여도 이해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설법 주
저의 이유로 법의 난해함과 듣는 사람의 資質을 들고 있다. 그때 梵天이 불타
의 마음 속에 일어난 설법 주저를 관찰하다가, 세상에는 법의 了解者가 반드
시 있을 것이므로 법을 설해 줄 것을 불타에게 勸請한다. 이를 계기로 비로소
불타가 초전법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14) 拙稿, 「梵天勸請について」,「大正大學大學院硏究論集」제6호, 1982.
15) Sn. Ⅵ·1·1·10, vol.Ⅰ, p. 135.
위의 예언과 梵天勸請의 神話는 모두 불타와 그가 설한 법의 위대함을 강
조하기 위한 超人化·神格化와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불타가 설법
(초전법륜)을 하게 된 내면적 동기에 대해서는 前者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哀愍(bahujana-hita-anukampā)’16) 때문이라고 하고 後者에는 이에 대한 언급
이 없으나 梵天의 권청에 의해 世間에 대하 불타가 다시 관심을 표명하는 동
기가 ‘衆生에 대한 慈悲(sattesu ca kāruññataṃ)’17)에 의한 것임을 기술하고 있
다.
16) Sn.Ⅵ·1·1·10, vol.2, p.138.
17) Sn. 693.
전술한 담마카는 불타에 대해 “당신은 모든 것을 깨닫고 衆生을 哀愍하면
서(satte anukampamāno) 智慧(ñāṇam)와 법을 설하십니다.”18)고 말한다.
18) Sn. 378.
律典19)에는 불타가 轉法輪을 선언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사
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 사람들에 대한 애민 때문에”라고 설하고 있다.
이들 諸 문헌은 慈悲 사상의 원초적인 형태가 불타의 說法동기와 깊이 결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설법의 대상에 대해 아
지타의 예언과 律典에서는 ‘많은 사람들(bahujana)’이라고 하는 반면 「梵天勸
請」과 담마카의 경우에는 衆生(satta)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satta에는 ‘살아
있는 것(living being)’, ‘사람’이라는 뜻이 있는 데,20) 만약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면 前者와 큰 차이가 없으나, ‘살아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
다면, 佛陀觀의 전개와 관련하여 중대한 변화가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설법의 대상이 사람에서 ‘살아 있는 것’ 일반으로 확대되었다는 것
은 불타와 그가 설하는 법이 인간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은 위대함과 보편성
을 가진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숫타니파아타』Ⅲ. 7의 「세라(Sela)經」의
散文 부분에는 佛十號를 서술한 뒤에
19) VinayaⅠ, p.21.
20) Rhys Davids,「Pali-English Dic.」, p.673., Sn. 145,
“그는 스스로 깨닫고 證得하여 神(deva)들과 악마(māra)·梵天(brahma)
을 포함하는 세계, 沙門·婆羅門(samaṇabrāhmaṇa), 神·인간(devamanusa)
을 포함하는 生類(pajā)에게 (가르침을) 설한다. 그는 처음도 좋고 가운데도
좋고 끝도 좋고 뜻과 문자를 잘 갖추고 있는 법을 설한다.……”
고 한다. 여기에서는 법을 설하는 대상으로 사람을 포함한 生類을 구체적으
로 나열하고 있다. 이를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람; 사문, 바라문, 인간(manusa)
2) 神(deva, 天), 梵天
3) 악마(māra)
4) 生類(pajā)
이 자료에 한정하여 보면 ‘살아 있는 것(生類)’이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一
切生類] 일반을 모두 망라하지 않고 사람, 신, 악마에 국한되고 있으며, 신 가
운데서 특히 범천을 분리하여 서술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그리고 이
내용과 불십호의 하나인 신과 사람의 스승이라는 뜻의 ‘天人師(satthā
devamanussānaṃ)’라는 칭호는 그 성립에 있어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
는 것이 아닐까 한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내용이『中部經典』92에 나오고 있
고 또 유사한 내용이『增一阿含經』제 46~47권에 나오는 것을21) 감안하면,
초기 불타관의 형성과 전개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보아야 할 것이다.
21) 中村元, 위의 책, p.235.
불타가 法을 설한 대상이 누구이든 간에 불타 설법의 핵심이 되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범부로서 맛보기 어려운 離欲의 기쁨을 나는 얻었다. 그것은 계율과 誓
願(sīla-bbata)만에 의해서도, 또 摶學(bāhusacca)에 의해서도 또 三昧
(samadhi)에 들어도 또 홀로 떨어져 누워 있더라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煩惱가 다 끊어지기(āsavakkhaya)’ 전에는 방일하지 말라.”
(Dhp. 271, 272.)
『法句經』의 이 게송이 말해주듯이 불타가 설한 법과 수행의 궁극의 지향
점은 ‘煩惱의 소멸(漏盡, āsavakkhaya)’에 있다. 수행이 계율이든 摶學이든 三
昧이든지 간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들은 마음의 번뇌를 끊기 위한 수
단일 뿐이다. 초기 불교 수행의 결과 도달하는 최고의 聖者인 阿羅漢을 ‘번뇌
를 멸한 者(khiṇa-āsava, 漏盡者)’라고 부르고 그 경지를 흔히 ‘번뇌의 소멸
(āsavakkhya)’이라 하는 것22)을 보아도 불타의 설법이 지향하는 바를 알 수 있
다. 불타는 자신을 正等覺者(sambuddha), (번뇌의) 화살을 꺾어 버린 無上의
사람(sallakatto anuttaro)23)이라 자칭하기도 한다.
22) Nyanatiloka, Buddhist Dic., p.27.
23) Sn. 560.
또『숫타니파아타』제 5 彼岸道品에는 16명의 바라문들이 불타를 찾아가
각자 질문하고 대답을 들은 다음, 불타의 가르침에 대해 삥기야(piṇgiya)가
“현실적이며 즉시에 渴愛의 소멸·고뇌가 없는(taṇhakkhayam anītikaṃ) 법을
나에게 설하셨습니다.”24)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불타 설법의 가장 중심이
된 내용이 번뇌에 관한 것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제자들도 불타
에 대해 “당신은 잠재적 번뇌(anusaya, 隨眠)를 끊어, (스스로) 건너고, 다른
사람들을 건너게 해줍니다.”25)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불타와 다른 사람들
(초기 불교교단)을 매개해 주는 공동의 목표가 ‘번뇌의 소멸’이며, 그것을 최
고의 가치로 하여 모인 공동체가 초기불교 僧伽였던 것이다.26) 이러한 소식
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다음의 게송이다.
24) Sn. 1139.
25) “tvaṃ anusaye chetvā tiṇṇo tāres' imaṃ pajaṃ”, Sn.571.
26) 拙稿, 「초기불교의 사상적 구조와 실천수행-「테라가타」를 중심으로」,「동아시아불교문화」
22집, p.385~388.
“禪定에 든 釋迦牟尼가 證得한 (번뇌)의 소멸(khayaṃ), 離貪(virāgaṃ), 不
死(amataṃ), 뛰어난 것(paṇītaṃ) - 그 법과 같은 것은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Sn. 225.)
여기서는 禪定의 수행이 번뇌소멸과 離貪을 위한 방법으로 나타나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智慧(paññā)를 설하고 있다. 불타는 악마 나무치(Namuci)와
의 대화에서 不快, 飢渴, 渴愛(taṇha), 惛沈·睡眠(thīna-middha), 공포, 위선과
오만 등의 번뇌를 상징하는 악마의 군대를 열거한 다음 “신들도 세간의 사람
들도 너의 군대를 쳐부술 수 없지만, 나는 너의 군대를 지혜를 가지고
(paññāya) 쳐부순다.”27)고 단언한다. 이것은 불타가 지혜를 번뇌 소멸의 궁극
적인 수단으로 보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28) 그렇지만 불타는 모든 사람들
에게 번뇌의 소멸을 위해 단일한 방법만을 설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법
을 설하는 대상에 따라서 “높고 혹은 낮은 길(uccāvacā hi paṭipadā)”29)을 설하
였다.
27) Sn. 443., cf. Sn. 1035.
28) 拙稿, 「초기 불교에 있어서 지혜(paññā)와 번뇌」,「철학논총」제 57집, 2009, p.421-430.
29) Sn. 714
불타는 담미카(Dhammika)를 비롯한 500명의 在家信者(upāsakā) 및 출가
수행자에 대해 ‘번뇌를 제거하는 법(dhammaṃ dhutaṃ)’30)을 설하는 데,31) 그
내용은 출가자가 지켜야 할 非時食戒를 비롯한 몇 가지 戒律과 在家者가 지
켜야 할 八齋戒(aṣṭāṇgasīla) 및 布薩(uposatha) 등이다. 결국 이들 내용을 종합
해 보면 번뇌 소멸을 위한 방법론이 다름 아닌 불도 수행의 기본 덕목인 戒·
定·慧 三學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수행의 토대가 계율에 있음을 불
타는 四部大衆에게 천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항상 戒를 具足하고
(sīlasampanna) 智慧 있고 잘 禪定에 들어 內省하며, 알아차림 하는 사람은
(satimā) 건너기 어려운 (번뇌의) 폭류를 건넌다.”32) 거기에 반해 婆羅門인 바
바린(Bāvarin)과 그의 16명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불타의 답변 가운데는 번
뇌의 소멸에 관한 다음의 내용이 들어 있다.
30) Sn. 385. 「숫타니파아타」의 주석서인 「Paramattha-jotika」Ⅱ. 373에는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
頭陀(dhuta)라고 주석하고 있다.
31) Sn. 385~404.
32) Sn. 174. Sn. 798 참조.
A. ①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戒와 禁制33)를 모두 버
리고 또 여러 가지 (방법)을 모두 버리고 갈애를 완전히 알아(taṇhaṃ
pariññāya) 번뇌가 없는 사람들(anāsavāse), 나는 그들을 (번뇌의) 暴流
를 건넌 사람들(oghatiṇṇā)이라 부른다. (Sn. 1082)
33) Sn. 798 참조.
② 해마카(Hemaka)여! 이 세상에서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아는 사랑
스러운 사물에 대해(piyarūpesu) 탐욕(chandarāga)을 제거하는 것이 불
멸의 열반의 경지이다. (Sn. 1086)
③ 바라문이여! 名色(nāmarūpa)에 대해 탐욕을 완전히 떠난 사람에게
(vitagedhassa) 번뇌(āsavas)는 존재하지 않는다.…… (Sn. 1100)
④ 세존이 말씀하셨다. ‘핑기야(Piṇgiya)여! 사람들이 渴愛(taṇha)에 빠져
고통 받고 늙음에 정복당함을 본다. 그러므로 핑기야여! 너는 방일하
지 말고 갈애를 끊어 다시 태어나지 않도록 하라(apunabbhavāya).’
(Sn. 1123)
B. ①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akiñcana), 욕망과 생존(kama-bhava)에 집착
하지 않는 婆羅門·聖者의 통달자(vedagū)라고 알려진 그는 분명히
(번뇌의) 暴流를 건너고 피안에 이르러 고루하지 않고 의혹이 없다.
(Sn. 1059)
② 세존이 말씀하였다. 우파시바(Upasīvā)여! 無所有(akiñcaññaṃ)를 관찰
하면서 알아차림 하면서(satīmā) ‘아무 것도 없다(n' atthī)’는 것에 의지
하여 폭류를 건너라. 모든 욕망(kāma)을 버리고, 모든 議論을 떠나 渴
愛의 소멸(taṇhakkhaya)을 밤낮으로 觀하여라. (Sn. 1070)
③ 모가라자(Mogharāja)여! 항상 알아차림 하면서(sadā sato), 세계가 空하
다(suññto)고 觀하여라. 자기에 집착하는 견해(attānudiṭṭhi)를 쳐부수
면 죽음을 건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계를 관하는 사람은 死王은
보지 못한다. (Sn. 1119)
A에서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하고 지각하는 존재를 보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아는 것 혹은 名色으로 표현하고, 이들에 대한 갈애의 遍知
(pariññā) 및 끊음, 탐욕의 제거를 통해 번뇌가 없는 경지, 불멸의 열반,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됨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탐욕과
갈애를 제거하고 명확하게 알게 되는 지 그 방법에 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戒와 禁制(sīla-bbata)를 설하고는 있지만 여기서는 앞의 경우와 반대로
모두 버리라고 한다. 一見 서로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관련된
자료를 조사해 보면, 불타가 설하고자 한 것은, 分別에 근거한 외면적 행위에
대한 집착의 초월이라고 할 수 있다.34)
34) 拙稿, 「법구경(Dhammapada)의 사상」,「동아시아불교문화」제 6집, 2010, p.339~340.
“모든 계율과 금제를 버리고 죄가 있거나 죄가 없는 행위도 버리고 淸淨
(suddhī)과 不淨( asuddhī)이라 하여 구하지도 않고, 寂靜(santi)을 기리며 집
착하지 말고 행하여라.”35)
35) Sn. 900. cf. Sn. 231, 798, 803, 839, 900.
B에서 소유는 욕망과 생존, 자기에의 집착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며, 갈
애의 대상이지만, 무소유(akiñcanā)는 번뇌의 폭류를 건너고 갈애를 소멸하여
生死를 초월하는 길임을 설하고 있다. 무소유의 觀(pekkhamāno)과 갈애의
소멸(taṇhakkhaya)의 觀(abhipassa), 그리고 세계가 空(suññato)하다고 觀
(avekkhassu)하라는 일종의 觀法이 수행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데 이것이
후대 vipassanā관법의 원초적인 형태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
고 여기서 설해진 空은 후대 般若中觀의 空思想의 원류이긴 하지만, 내용의
전후 문맥에서 볼 때 有身見(sakkāyadiṭṭhi)을 부정하는 人無我적인 含意가 농
후하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불타의 설법 내용이 듣는 대상에 따라 근본적인 차이
가 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 방법론에 있어 교단 내의 四部大衆에
대해서는 계·정·혜 삼학의 수행 基調를 강조하나, 바라문과 같은 대상에
대해서는 그러한 기조에 한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說法者로서 불타는 설법을 통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번뇌를 끊을 수 있
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는 있으나, 번뇌를 소멸하여 해탈하게 해 줄 수는 없
다. 최초기의 불교에 있어 불타는 번뇌의 소멸로 이끄는 법을 깨닫고, 그 법
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하는 설법자일 뿐이다. 대승불교의 부처님처럼 誓
願을 세워 중생을 제도하는 救援者로서의 성격과 역할은 아직 보이지 않는
다.
“도타카(Dhotaka)여! 나는 세상에서 어떠한 의혹자도 해탈하게
(pamocanāya)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상의 법(dhammañ ca seṭṭhaṃ)을 알면,
너는 이렇게 (번뇌의) 폭류를 건너게 될 것이다.” (Sn. 571)
여기에 법의 인식을 통한 번뇌로 부터의 해탈이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해
탈은 불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법은 불타가 설한 법, 즉 교법(敎法)에 의지하여 실천하고 각자가 깨달아
야 하는 것으로 법을 깨달을 때 번뇌(āsava)를 끊을 수 있는 것이다.36)
36) Sn. 361, 374, 856,1053.
3. 지혜가 광대한 자(bhūripañña, 廣慧者)
불타는 출가제자나 재가 신도 및 그 밖의 사람들에 의해서도 지혜가 광대
한 자(bhūripañña37), bhurimedhasā38))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깊은 지
혜가 있는 자(gambhīrapaññaṃ)’39) 大仙人(mahesi), 높은 지혜가 있는 자
(anomapañña)40) 스승(satthāraṃ), 최상의 지혜가 있는 자(varapañña)41), 바르
고 곧은 지혜가 있는 자(samujjupañña)42), 풍부한 지혜가 있는(pahūtapañña)43)
聖者(muni), 勝者(jina)44), 無邊의 지혜가 있는(anantapañña) 如來라고 불리기
도 한다. 이와 같은 호칭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불타가 불타일 수 있고 사
람들로부터 대선인, 스승, 성자, 승자, 여래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가장 핵심
적인 요소가 지혜(paññā)라고 할 수 있다.
37) Sn. 346, 376, 538, 1097, 1136, 1138, 1140, 1143.
38) Sn. 996, 1131, 1136, 1138, 1140.
39) Sn. 176, 177.
40) Sn. 343, 352.
41) Sn. 391, 564, 565, 1128.
42) Sn. 352.
43) Sn. 83, 359.
44) Sn. 996.
불타가 지혜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번뇌를 제거하는 가장 중요한 수행의
덕목이자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45) 불타는 악마 나무치(Namucī)와의 대화
에서 “신들도 세상 사람들도 너의 군대를 쳐부술 수 없지만, 나는 지혜에 의
해(paññāya) 쳐부순다.”46)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악마의 군대를 여덟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욕망(kāma) ②혐오(arati) ③배고픔과 목마름(khuppipāsa)
④渴愛(taṇha) ⑤게으름과 졸음(thīnamiddha) ⑥공포(ābhīru) ⑦의혹
(vicikicchā) ⑧위선과 완고함(makkha, thambha).47)
45) Dhp. 40, 340.
46) Sn. 443.
47) Sn. 436, 437.
이 내용에 의하면 악마의 군대란 다름 아닌 수행자가 극복해야 할 생리적
고통과 번뇌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a) “지혜에 의해 해탈한 사람에게 迷妄이 없다.(paññāvimuttassa na santi
mohā)” (Sn. 847)
b) “세존이 대답하였다. ‘아지타여! 세상에 있어 (모든 번뇌의) 흐름
(sotānam)을 억제하는 것(nivāraṇa)이 알아차림(sati)이다. 나는 흐름을
防護하는 것(saṃvaraṃ)을 말한다. 그 흐름은 지혜에 의해 막아진다
(pathiyyare).” (Sn. 1035)
불타는 a)지적 번뇌인 迷妄(mohā)으로부터 해탈하고, b)모든 번뇌의 흐름
을 억제하고 막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함을 설하고 있다. 따라서 불타는 “탐
욕(chandarāga)을 떠나 지혜를 가진(paññāṇavā) 비구는 이승에서 不死
(amataṃ), 寂靜(santiṃ), 불멸의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48)고 한다.
48) Sn. 204.
不死와 열반의 증득을 목표로 하는 불타의 수행과 실천에 있어 지혜의 위
치와 의의를 보여주는 자료가 ‘밭을 가는 바라드바쟈經(kasibhāradvāja-sutta)’
이다. 바라드바쟈라는 바라문은 밭을 경작하며 살아가는 바라문인데, 하루
는 불타가 그의 집으로 托鉢을 가게 되었다. 그러자 바라드바쟈는 음식을 시
주는 하지 않고, 자신은 밭을 갈고 씨를 뿌려 그 수확으로 먹고 사는데, 당신
도 그렇게 하라는 말만 한다. 그 때 불타는 자신도 역시 경작을 한다고 대답
하고,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信心(saddhā)은 종자다. 고행(tapas)은 비[雨]다. 지혜(pañña)는 나의 멍에
와 호미이다. 참회(hirī)는 호미자루, 마음(manas)은 잡아매는 줄, 알아차림
(sati)은 호미날과 자루이다. 몸을 주의하고(kāyagutto), 말을 주의하며
(vacigutto) 음식을 절제하여 과식하지 않는다. 나는 진실(saccaṃ)을 풀을 베
는 것으로 삼는다. 柔和安息(soraccam)을 나의 해방으로 한다. 精進(viriyam)
은 내 짐수레를 끄는 황소로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安穩의 경지
(yogakkhema)로 실어다 준다. 물러남이 없이(anivattantaṃ, 不退轉), 거기에
이르게 되면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이 경작은 이와 같이 이루어지고 불사
의 과보(amataphalaṃ)를 가져온다. 이 경작을 한다면 모든 고통
(sabbadukkhā)에서 벗어난다.” (Sn.77~80)
불타는 여기서 자신을 마음의 밭[心田]을 경작하는 농부에 비유하며, 그 수
행의 요소와 땅을 가는 경작의 요소를 대비하고 있다.
신심(saddhā) ······························종자
고행(tapas) ································비[雨]
지혜(pañña) ·······························멍에, 호미
참회(hirī) ···································호미자루
마음(manas) ·······························잡아 매는 줄
알아차림(sati) ····························호미 날, 자루
몸과 말의 주의, 음식의 절재 ······
진실(sacca) ································풀 베는 것
유화안식(soracca) ······················
정진(viriya) ································황소
이러한 수행을 통해 불타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와 인생의 이상이 실현
되는 데 그것이 다름 아닌 (번뇌의) 속박으로 부터의 안온의 경지
(yogakkhema), 不死(amata), 일체 苦로 부터의 해탈이다. 그러나 종자를 땅에
심고 경작하여 곡식을 수확하고 그것으로 먹고 사는 행위에 의해서는 生老
病死를 반복하는 생사윤회와 一切苦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불타의 수행체계에 있어 지혜(pañña)와 알아차림(sati)을 멍에·호
미날·자루에 비교하고 있는 점은 兩者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번
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장 중요한 수단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 외에 불타가 자신의 수행에 대해 말한 것으로는 전술한 악마 나무치와
의 대화가 있다. 네란자라(Nerañjara)강 근처에서 禪定에 들어 있는 불타에 대
해 나무치가 “당신은 야위고, 안색도 좋지 않아 죽음이 가까웠습니다.”49)고
말을 하는데 이에 응답하는 가운데 불타는 자신의 수행에 대해
49) Sn. 426.
“나에게는 信心(saddhā)이 있고, 정진(viriya)이 있고, 지혜(paññā)가 있
다.” (Sn. 432)
“(몸의) 피가 마르면 膽汁도 가래침도 마를 것이다. 살이 빠지면 마음
(cittaṃ)은 더욱 맑아질 것이다. 나의 알아차림(sati)과 지혜(paññā)와 三昧
(samādhi)는 더욱 더 安立하게 될 것이다.” (Sn. 434)
라고 한다. 여기에 나타나는 신심, 정진, 알아차림, 지혜, 삼매 가운데 삼매를
제외하면 앞의 바라드비쟈 바라문에게 설한 수행 덕목과 거의 공통된 내용
이다. 이러한 수행 덕목은 그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깨달음을 얻기 전의 불
타의 수행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당시에는 아직 승가 공동체가
형성되기 전이므로, 승가의 규범인 계율(sīla)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
나 불타의 초전법륜 이후 교단이 점차 성장하면서 계·정·혜 삼학과 八正道
와 같은 초기 불교의 수행 체계가 확립되었을 것이다.
“항상 계를 지니고(sīlasampanno), 지혜가 있고(paññava), 마음을 잘 통일
하고(susamāhito), 내적으로 思念하여(ajjhattacinti) 알아 차림하는 자(satimā)
는 건너기 어려운 (번뇌의) 激流를 건넌다.” (Sn. 173)
이상의 용례에 대한 검토를 통해 지혜가 번뇌의 소멸을 위한 유일의 수단
은 아니며, 계와 선정 및 알아차림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확
인할 수 있다.
그러면 전술한 불타의 광대하고, 깊고 높고, 바르고 곧은 최상의 지혜란 어
떠한 것일까?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경전 가운데 설해진 불타의 교설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초기 불교 문헌에 나타나는 지혜에 대해서는 拙論50)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주로『숫타니파아타』에 나타나는 자료에 한정하여 검토
하고자 한다.
50) 拙論, 「초기불교에 있어서 지혜(paññā)와 번뇌」,「철학논총」제 57집, p.414~415.
불타에게 있어 번뇌도 이를 제거하는 무기인 지혜(paññāvudhena)51)도 모
두 마음 가운데서 일어나는 心作用이다. 이들 양자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
지고 있어 마음 가운데 번뇌가 증대하면 지혜가 줄어들고, 반대로 지혜가 증
대하면 번뇌가 줄어든다. 둘 다 마음에서 생겨나고 소멸하지만, 그 생멸의 원
인도 마음 가운데 있다. 마음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 때(yathābhūtañāṇa
dassana, 如實知見)’ 그것이 곧 지혜52)이며,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
는 것이 다름 아닌 無明(avijjā)이며 모든 번뇌적 심작용의 원인이 되는 것이
다. ‘있는 그대로’라는 뜻의 yathā-bhūta는 實在이며, ‘알다’라는 뜻의 ñāṇa53)
-dassana는 일반적인 의미의 지식이나 인식이 아닌 지혜이며 통찰(insight)이
다. 불타는 실재를 법(dhamma)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법을 사유에 의한 추론
의 영역을 넘어서 있기(atakkāvacara)54)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형이상학적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아 無記說의 태도를 취한 것으로 생
각 된다. 불타는 분별적 사유(vikappa)의 산물인 철학적 견해(diṭṭhi)를 주장하
는 사람의 정신적 내면에는 욕망에 이끌리는(chandānunīto)55) 측면이 있어,
그 견해로부터 초연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래서 자신의 견해는 진리(sacca)라
고 주장하고 상대방은 허위(tuccha)라고 비판한다는 것이다.56) 불타는 견해
즉 분별적 사유에 근거한 실재에 대한 이론적 인식과 권위를 가진 전승의 학
문 등은 번뇌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suddha)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의 궁극적 관심사는 心淸淨57)에 있으며, 심청정을 체득하는 방법은 지혜
를 비롯한 바른 길에 있지 그 밖의 다른 방법에 의존하지 않는다. 초기 불교
의 수행 실천론을 팔정도(ariya-aṭṭangika-magga)라 하여 여덟가지의 수행 덕
목 앞에 각각 ‘바른’을 의미하는 sammā를 붙인 것은 아마도 불타의 이와 같은
태도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50) 拙論, 「초기불교에 있어서 지혜(paññā)와 번뇌」,「철학논총」제 57집, p.414~415.
51) Dhp. 40.
52) “sutvāna Buddhavacanaṃ bhikkhu paññāṇavā idha, so kho naṃ parijānati, yathābhūtam hi
passati.” Sn. 202; “ariyanaṃ ‘etaṃ dukkhan’ ti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suddiṭṭhaṃ-ayam
ekānupassāna.”, Sn. 758.
53) Sn. 1115.
54) Sn. 6.1.1., Āyācana(text.1. pp.136~138).
55) Sn. 781.
56) Sn. 883.
57) Sn. 830.
“바라문은 (바른 길)58) 외에는 견해(diṭṭhe) 전승의 학문(sute), 계율과 禁
制(sīlavate), 생각한 것(mute)에 대해 청정하다(suddhim)고 말하지 않는다.”
…… (Sn. 790)
58) 中村元의 번역을 참고하였다. 中村元 譯, 위의 책, p.790.
「청정에 관한 여덟가지 경전(suddhatthakasutta)」59)에 나오는 이 게송은 수
행을 완성한 사람(婆羅門)에게 있어서는 견해 등이 청정과 무관함을 말해 주
고 있다. 견해(diṭṭhi), 전승의 학문 등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는 이 구절이 구
체적으로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불타가 접촉했던 당시의
사상·수행 일반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반면에 팔정도 가운데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이 포함되어 있고, “선정에 들어 (번뇌의) 激流를 건
너고, ‘최고의 견해(paramāya diṭṭhiyā)’에 의해 법(dhamma)을 알고 번뇌를 멸
하여(khīṇāsavā) 최후의 신체를 가진 如來”60)라고 할 때의 견해(diṭṭhi)는 표현
은 동일하나 사성제와 같은 불타의 敎法이나, 사유 분별을 떠나 직관적인 형
태로 실재[法]를 통찰61)하는 지혜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59) Sn. 778~795.
60) Sn. 471.
61) Sn.의 英譯에서는 이를 supreme vision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The group of discourses」
(SUTTA-NIPĀTA), P.T.S., No.44., P.78.
어쨌든 불타는 견해나 전승의 학문 등에 수행자(bhikkhu)가 의존해서는
(nissayeyya) 안된다62)고 설하며, 그러한 것에 집착하는 사람을 ‘(번뇌의)63)
동요에 따르는 사람들(ejānugā)’64), ‘번뇌에 집착하는 사람(sopadhīka)’, ‘견해
를 가진 사람(diṭṭhi)’65)이라고 부른다. 거기에 반해 ‘(번뇌를) 제거한 청정한
사람(dhona)’66)은 그들에 의해 청정하게 된다(viuddhim)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 하는 데67)이는 전술한 바라문의 경우와 동일하다.
62) Sn.. 798.
63) 村上直完,「パ―リ佛敎辭典」, p.416. 참조.
64) Sn. 791.
65) Sn. 789.
66) 위의 사전, p.965.
67) Sn. 813.
불타는 학생 토데야(Todeyya)와의 대화에서 성자(muni)에 대해 “그는 지혜
가 있는 사람(paññanavā)이지만 지혜로 분별하는(paññākappī) 사람68)이 아니
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 속에 지혜(pañña)와 분별(kappa)이 다른 별개의
차원임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양자의 차이를 잘 비교하고 있는 자료가 제 3 大
品(Mahavagga)의 「二種觀察經( Dvayatānupassanāsutta)」에 나온다. 그 내용은
사성제와 연기 사상의 교리적 체계화가 진행 중임을 보여주고 있는데 지혜
와 관련하여 두 가지 관찰(anupassanā)을 설하고 있다.
68) Sn. 1091.
제 1관찰:
“비구들이여, 신들과 악마를 포함하는 세계, 沙門·婆羅門, 신·인간을
포함하는 生類가 ‘이것이 진리(saccam)이다’고 생각한 것(upanijjhāyitaṃ)을
聖人들은(ariyānaṃ) ‘이것은 虛僞(musā)이다’고 있는 그대로(yathā-bhūtaṃ,
如實하게) 바른 지혜에 의해(samma-ppaññāya) 잘 관찰한다(suddiṭṭham).”
제 2관찰:
“ …上同… ‘이것이 허위이다’고 생각한 것을 성인들은 ‘이것은 진리이다’
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에 의해 잘 관찰한다.…… ” (Sn. 755 뒤)
그리고 이어서 불타는 그 구체적 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보아라, 신들과 더불어 세상 사람은 自我가 아닌 것을(anattani) 자아라
고 (생각하여) 몸과 마음(nāmarūpasmiṃ)에 집착하고(niviṭṭhaṃ) 있다. ‘이것
이 진리라고 생각한다(maññati).” (Sn. 756)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maññanti) 간에 그것은 그것과는 다른 것
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그 (생각은) 허위이기 때문이다. 無常한 것은
(ittaraṃ) 허망한 성질(mosa dhammam)을 가진다.” (Sn. 757)
“열반(nibbānam)은 허망하지 않은 성질의 것이다. 성인들은 그것을 진리
라고 안다(vidū). 그들은 실로 진리를 깨닫기(saccābhisamayā) 때문에 無欲
의 열반에 든다(parinibbutā).” (Sn. 758)
이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生類(pajā)를 지혜의 有無에 따라 聖人(ariya)과 악마와 신·인간 등으로
나눈다.
② 동일한 대상에 대해 성인은 바른 지혜에 의해 實在(yathā-bhūta)를 관찰
하여 진리와 허위를 구분한다. 거기에 반해 신·인간 등은 생각에 의해
진리와 허위를 구분한다.
③ 그 구체적인 실례로 신들과 세상 사람은 몸과 마음을 自我라고 집착하
여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한다(maññati). 그러나 思惟는 허위이기 때문
에 진리와 다르다. 그리고 몸과 마음은 무상한 것으로 허망한 성질의
존재이다.
④ 거기에 반해 성인은 열반이 허망하지 않은 성질로 알고, 그러한 진리를
깨닫기(abhisamaya) 때문에 무욕의 열반에 든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성인은 實在에 다가가기 위해 思惟가 아닌
잘 관찰하는 것(suddiṭṭham), 진리를 깨닫는 것(saccābhisamayā)에 의해 열반
에 든다고 하는데, 그러한 직관적인 心의 작용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다
름 아닌 지혜인 것이다.69) abhiasamaya는 現觀으로 漢譯되는데, 진리를 直觀
的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現前에 명료히 진리를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70)
따라서 지혜는 사유를 초월하여 實在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통해서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心作用이다. 반면 신들과 세상 사람들은 사유
(upanijjhāyitaṃ, maññanti)를 매개로 진리와 허위를 잘 못 분별하여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實在의 인식과 관련하여 그 眞僞를 논하는
데, 지혜와 사유는 정반대의 판단에 도달하게 됨을 보여준다.
69) 그러한 실례를 잘 보여주는 것이 「테리가타」61의 다음의 게송이다. “마음이 깊은 禪定에 들
어 지혜가 지금 생겨날 때 法을 바르게 觀하는데 여자라는 것이 어찌하여 장애가 되겠는가.”
70)「岩波佛敎辭典」, p.233.
「二種觀察經」의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앞에 인용한 제1관찰과 똑같은 문
장의 형식으로 兩者가 서로 상반되게 ‘이것은 행복이다(idaṃ sukham, 樂)’, ‘이
것은 괴로움이다(idam dukhaṃ, 苦)’라고 관찰한다. 그리고 그러한 실례로 불
타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물질(色), 소리(聲), 맛(味), 냄새(香), 촉감 되는 것(觸), 생각(法)은 그들
이 있다고 말해지는 한 기분 좋고 재미있고 즐거운 것이다.” (Sn. 759)
“그것들은 신들과 세상 사람들에게는 행복(sukha)으로 생각된다
(sammatā). 또 그것들이 멸할 때 그들은 그것을 괴로움(dukha)이라고 생각
한다(sammataṃ).” (Sn. 760)
“有身(sakkāya, 心身의 요소인 五取蘊)71)의 파괴는 ‘행복이다’라고 성인
들은 본다(diṭṭham). (바르게) 보는 사람(passataṃ)의 이 (견해는) 세상 사람
들과 반대이다.…” (Sn. 761)
71) 이 주석은 「パ―リ佛敎辭典」, p.1850을 참조하였다.
“성인들 외에 누가 이 경지를 깨달을 수(sambuddham) 있겠는가? 이 경지
를 바르게 알면(samma-d-aññāya), 번뇌가 없는 자(anāsavā)가 되어 열반에
들 것이다(parinibbanti).” (Sn. 765)
여기에서는 當爲의 문제와 관련하여 心身(五取蘊)과 그 대상인 六境(色·
聲·香·味·觸·法)에 대해 兩者(聖人들과 神·세상 사람들)가 서로 상반된
가치판단을 하고 있다. 신들과 세상 사람들은 六境의 有無에 따라 이를 행복
과 괴로움으로 나누어 생각하고(sammataṃ) 苦樂으로 판단한다. 반면에 聖人
들은 心身의 파괴를 행복으로 心身의 존재를 괴로움으로 판단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근거는 思惟(sammataṃ)에 있지 않고 직관적 통찰(diṭṭhaṃ,
passatam)로서의 지혜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이 곧 깨달음(sambuddhum)으
로, 이것에 의해 번뇌(āsava)가 제거되어 열반에 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神들과 세상 사람들은 인식과 當爲의 문제에 대
해 思惟에 근거하여 眞僞와 苦樂을 판단하고 거기에 집착한다. 그러나 성인
은 사유가 아닌 지혜의 직관적 통찰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實在를 보게 되는
것으로 주관의 先驗的 思惟에 의해 대상을 규정하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
다.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에 의해 잘 관찰한다. (yathābhūtaṃ sammāppaññāya
suddiṭṭham)” (Sn. 755 뒤, 758 뒤)
이것과 거의 같은 형식의 構文이『法句經(Dhammapada)』에 나온다.
“佛·法·僧에 귀의하는 사람은 바른 지혜에 의해 四聖諦를 觀한다.
(cattāri ariyasaccāni sammappaññāya passati)” (Dhp. 190)
“모든 형성되어진 것은 無常하다고 지혜에 의해 觀할 때(sabbe saṇkhārā
aniccā ti yadā paññāya passati), 그는 괴로움(dukkhe)에 대해 厭離한다. 그것
이 淸淨(visuddhi)에의 길이다.” (Dhp. 277)
그리고 이어서 같은 형식의 구문이 “모든 형성된 것은 괴로움이다(sabbe
saṇkhārā aniccā)”,(Dhp. 278) “모든 존재의 요소는 我가 아니다(sabbe dhammā
anattā).” (Dhp. 279)에 대해서도 각각 반복되고 있다.
이들 構文에서는 전술한 문장의 ‘있는 그대로(yathābhūtaṃ)’의 자리에, 四
聖諦와 涅槃寂靜을 제외한 四法印의 가르침이 나타나 있는데, 이는 있는 그
대로의 實在(yathābhūta)를 四聖諦와 四法印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四
法印이 有爲의 현상적 존재 일반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성질(samāniya
lakkhaṇa)을 無常·苦·無我(anatta)로 규정하고 이러한 것을 벗어난 영역으
로 涅槃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반해 四聖諦(cattāri ariya-saccāni)는 그 구성요
소로 苦諦·集諦·滅諦·道諦를 갖는 진리(諦, sacca)이다. 苦諦는 生·老·
病·死하는 實存的 인간 존재와 관계하며, 集諦는 苦諦와 윤회의 원인으로
마음 속의 욕망(taṇha, 渴愛)이다. 滅諦는 모든 욕망이 소멸하여 윤회와 고통
이 멸한 涅槃이며 道諦는 滅諦의 원인으로 八正道라는 當爲的 수행·실천이
다.
無常·苦·無我가 實在(yathābhūta)의 존재의 측면만을 밝히고 있다면 四
聖諦는 인간 존재 그 자체의 인식[諦]과 당위적 수행·실천을 전부 망라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실재를 思辨的 思惟에 의해 개념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如實
하게 있는 그대로 直觀하는 것이 다름 아닌 지혜이다.
“이 세상에서 지혜를 가진(paññāṇavā) 比丘는 불타의 말씀
(Buddhavacanam)을 듣고 그것을 완전히 안다(parijānati). 왜냐하면 그는 실
재를 보기 때문이다(yathābhūtaṃ hi passati).” (Sn. 202)
이 게송은 있는 그대로 如實한 실재를 보기[直觀] 때문에 지혜를 가지게 되
고(paññāṇvā), 지혜를 가진 사람만이 불타의 설법[敎法]의 의미를 온전하게 알
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지혜만이 번뇌를 부술 수 있는
무기72)가 되고 마음을 淸淨하게 할 수 있는 길이(esa maggo visuddhiya) 73) 되
는 것이다.
72) Dhp. 40.
73) Dhp. 277.
4. 煩惱를 멸한 者(khinaāsava, 漏盡者)
“적은 물 속의 물고기처럼 동요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또 서로 간에 대
립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나에게 두려움이 생겼다.” (Sn. 936)
“세상은 어디나 堅實하지 않다(asaro). 모든 方位가 동요하고 있다. 내 자
신이 의지할 곳을 구하였지만, 나는 (죽음과 苦 등이) 머물지 않는 곳을 보
지 못하였다.” (Sn. 937)
“(衆生들이) 결국에는 서로 반목하는 것을 보고 나는 불쾌하였다. 그때
나는 (중생들의) 심장 속에 보기 어려운 (번뇌의) 화살(sallaṃ)이 숨어 있는
것을 보았다.” (Sn. 938)
불타의 눈에 보였던 세계와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무상한 세계 속에 동요하는 삶과 인생의 불안, 그러한 현실의 도피처로 불타
가 구한 것은 여느 사상가들과 같이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
가 지혜에 의해 如實하게 본 인간의 모습은 “인간[衆生]은 번뇌를 가진 존재
이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타의 인간관의 根本命題이다. 그리고 그 번뇌로부
터 벗어나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해야 할 최고의 가치이며 當爲라고 보
았다. 七佛通誡偈의 ‘자신의 마음을 淨化하는 것(sacittapariyodapanam, 自淨
其意)’74)이나, “賢者(paṇditā)는 욕망(kāma)을 버리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마음의 번뇌(kilesa)를 버려 자신을 청정하게 하라(pariyodapeyya)”75)는『法句
經』의 偈頌은 불타의 이러한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74) Dhp. 183.
75) Dhp. 88.
불타는 세라(Sela)婆羅門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
다.
“나는 證知해야 할 것(abhiññeyyaṃ)을 이미 증지하고, 修習해야 하는 것
(bhāvetabbañ)을 이미 수습하고, 끊어야 하는 것(pahātabbaṃ)을 이미 끊었
다. 그러므로 나는 佛陀(Buddha)이다. 바라문이여.” (Sn. 558)
“그들이 드물게 세상에 출현하는 것은 그대들에게 얻기 어려운 것인데,
내가 正覺者(sambuddha), (번뇌의) 화살을 꺾은 無上의 사람이다(sallakatto
anuttaro).” (Sn. 560)
여기서는 불타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 즉 證知(abhiññā), 修習(bhāvanā),
捨斷(pahāna)이 제시되고, 그러한 존재의 출현이 매우 드문 사건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불타가 자기 자신을 ‘正覺者, (번뇌의) 화살을 꺾은 無上의 사람
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正覺者를 (번뇌의) 화살을 꺾은 사람과 同一視하고
있다는 것은, 번뇌의 소멸이 正覺者가 되기 위한 가장 결정적인 요소임을 나
타내고 있는 것이다.
修習이 戒·定·慧, 八正道 등의 수행과 실천이라면, 證知는 있는 그대로
의(yathābhūta) 實在를 지혜에 의해 통찰하는 것이며, 그 지혜에 의해 내면에
감추어진 번뇌를 끊는 것이 捨斷(pahāna)이라고 해석하여도 무리는 없을 것
이다. 불타는 자신의 이러한 직접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도 한 때 그러했
듯이 원인도 정확히 모르면서 불안과 두려움에 동요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위해, 번뇌라는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 제일 긴요
한 일이라는 것을 침묵할 수 없었다.
“자신의 행복(sukha)을 구하는 사람은 슬픔(paridevaṃ), 希求(pajappā), 근
심(domanassa), 자신의 (번뇌의) 화살을 뽑아 버려야 한다.” (Sn. 592, cf. 593)
“일어나라! 앉아라! 자는 것이 너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번뇌의) 화
살을 맞아(sallaviddhāna) 고통스러워하는(ruppataṃ) 사람에게 무슨 잠이 있
겠는가.” (Sn. 331, cf. 334, 939)
불타의 눈에 보인 인간의 모습은 번뇌의 화살을 맞아 고통스러워 하며, 슬
픔과 근심 속에서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를 희구하지만 그 원인을 모
르며, 따라서 그 원인인 번뇌를 제거하는 데는 무관심하다. 불타 당시나 오늘
날이나 대다수 사람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그 대상을
쫓고 즐기고 소유하는 것이 인생의 가치이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도 無常한 존재 원리에 근거한 生·老·病·死라는 實存的 한계
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유한하며 불안하며 괴로운 것이다. 불타는
인간적인 모든 괴로움[苦]이 번뇌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
을 제거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 가장 긴요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사람들의 마음에 번뇌의 화살이 꽂히게 된 것일까? 수칠로마
(Sūciloma) 夜叉가 불타에게 탐욕(rāga), 분노(dosa), 좋아함(rati), 싫어함(arati)
몸의 털이 일어서는 (환희와 공포, lomahaṃsa) 마음을 뒤흔드는 생각(vitakka)
이 어디에서 생기는지를 질문하자76) 불타는 이들이 愛執(sneha)과 自己(atta)
로부터 생긴다(itonodāna)77)고 대답한다.78) 애집은 주석서79)에는 渴愛(taṇha)
로 해석하는데, 번뇌의 원인으로써의 애집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번뇌의 원인을 자기라고 하는 것은 번뇌가 일어나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자기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
닐까 한다. 불타도 사람들이 見聞覺知(diṭṭha sutamuta viññātesu)한 즐거운 대
상에 의해 欲貪(chanda-rāga)이 일어남을 부인하지는 않는다.80) 그러므로 마
음 밖에 번뇌를 일으키는 외부적인 요인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결국 번뇌를
일으키고 일으키지 않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달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지혜가 있는 사람은 동일한 외적 조건이 주어져도 번뇌를 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번뇌는 자기 마음에 지혜가 없는 것, 즉 無明
(avijjā)과 見聞覺知하는 지각의 대상을 因緣으로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러한 불타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無明→行→識→名色→六處→
觸→受→愛의 流轉緣起의 체계이다. 여기서는 無名과 行에 의하여 성립한
識이 지혜 없는 마음이며, 名色이 지각의 대상으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六
處를 매개로 하여 그 대상이 지각될[觸·受] 때, 그 때 愛(taṇha) 즉 번뇌가 일
어나게 되는 것을 緣起 관계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76) Sn. 270.
77) ito는 ‘여기로부터’라는 뜻인데, 주석(Pj.303)에 따라 自己(atta)로 번역하였다.
78) Sn. 271, 272.
79) Pj. 304.
80) Sn. 1086.
불타가 쟈뚜칸니(Jatukaṇṇī)바라문에게 “바라문이여 名色(nāmarūpa, 명칭
과 형태)에 대한 탐욕(gedha)을 완전히 떠난 사람에게 번뇌(āsava)는 존재하
지 않는다.”81)고 설한다. 이를 위의 연기 사상에 비추어 보면, 名色→六處→
觸→受 하는 대상에 대해 탐욕을 일으키지 않으면 번뇌가 성립하지 않음을
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불타가 如來(Tathāgata)에 대해 “그는 끝이 없
는 지혜(anantapañña)가 있고, 이 세상에 있어서나 저 세상에 있어서나 더럽
혀지지 않는다(an-ūpalitta).”82)고 말한다. 이는 끝없는 지혜 작용에 의해 無明
이 일어나지 않고 무명이 없으므로 번뇌가 생기지 않는 還滅緣起를 전제로
한 가르침으로 볼 수 있다.
81) Sn. 1100.
82) Sn. 468.
이상으로 전술한 夜叉 스칠로마의 질문(번뇌의 발생 원인)에 대해 불타가
그것은 자기로부터 생긴다고 대답한 그 의도에 대해 나름으로 해명을 시도
하였다. 그러면 불타는 탐욕, 분노 등의 원인을 愛執(sneha)에 있다고 한 이유
는 무엇일까? 달리 말하면 그것은 번뇌의 원인을 또 다른 번뇌에서 구하고 있
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번뇌(pubbāsava)를 버리고, 새로운 (번뇌를) 만들지 말고, 욕망
(chanda)을 쫓지도 않고, 고집하여 論하지도 않는다. ……” (Sn. 913)
“과거에 있었던 것[번뇌]을 고갈시켜버려라. 미래에는 너에게 아무 것도
없게 하여라. 중간에 있어서도 네가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마
음이 寂靜하게 될 것이다(upasanto carissasi).” (Sn. 949, 1099)
“(신체가) 파멸하기 전에 渴愛를 떠나(vitataṇha), 과거에 의존하지 않고,
현재에 있어서도 헤아리지 않는다면(anūpasaṃkheyyo) 그에게는 (미래에 관
하여) 고려할 것이 없다.” (Sn. 849)
이들 자료에서는 불타가 번뇌를 과거·현재·미래의 三世를 통해 流轉하
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 잘 나타나 있다. 과거의 번뇌를 버리거나 고갈
시키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과거에 일으킨 번뇌를 보존하고 있음을 전제
로 한 것이다. 이 때의 과거는 번뇌를 끊어 윤회로부터 벗어날 것을 설하는
불타에게 있어서는 現生만이 아닌 前生의 과거를 다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
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태어난 자는 누구나 번뇌의 마음을 가지
고 태어나고, 그 마음이 現生(현재)에 새로운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번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번뇌를 먼저 버리고, 현재에
새로운 번뇌를 짖지 않는다면, 마음은 번뇌로부터 벗어나 寂靜하게 되고
(upasanto), 신체가 죽은 뒤 미래를 우려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불타가 탐
욕, 분노 등의 번뇌의 원인을 愛執(sneha)이라고 한 이 이유에는 이러한 사상
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불타는 이러한 원인을 바르게 깨닫는 것이 번뇌를 제거하는데 先決要件임
을 夜叉에게 다음과 같이 설한다.
“…그것(번뇌)이 어떤 원인(nidānam)(으로부터 생겼는가를) 깨달은
(pajānanti) 사람들은 그것을 제거한다. 그들은 일찍이 건넌 적이 없는 건너
기 어려운 이 (번뇌의) 激流를 건너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apunabbhavāyā).”
(Sn. 273)
번뇌의 종류에 관한 術語들은『숫타니파아타』의 도처에 언급되고 있지만,
이들을 정리하여 나름으로 열거하고 있는 것으로는 전술한 Sn.436, 437과 제
1品의 「뱀의 經(Uragasutta)」인데 後者에 나오는 번뇌는 다음과 같다. ①忿怒
(krodha) ②貪慾(rāga) ③渴愛(taṇha) ④憍慢(māna) ⑤堅實한 것(sāra) ⑥怒氣
(kopa) ⑦思索(vitakka) ⑧妄想(papañca) ⑨貧(lobha) ⑩憎惡(dosa) ⑪迷妄
(moha) ⑫隨眠(anusaya), 不善의 뿌리(mūla akusala) ⑬ 苦惱(daratha) ⑭愛欲
의 숲(vanatha) ⑮五蓋(nīvaraṇā pañca), 苦惱(nigha), 疑惑(kathaṃkathā).83) 그
리고 이들 가운데 ②貪慾(rāga), ⑩憎惡(dosa), ⑪迷妄(moha)를 뽑아 여러 가
지 번뇌를 대표하는 형태의 게송이 나타나고 있다.
83) Sn. 1~17.
“탐욕과 증오와 미망을 버리고 번뇌가 멸하여(khīṇāsava) 梵行
(brahmacariyā)을 닦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供物을 바쳐라.” (Sn.
493, cf. Sn.74)
소위 貪(rāga), 瞋(dosa), 癡(moha)를 버리는 것을 곧 번뇌(āsava)의 소멸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들을 근본적인 번뇌로 규정하
는 교리가 처음으로 확립되어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이들은 比丘들이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끊고, 멸하고 떠나야
하는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③渴愛(taṇha)도 여러 번뇌들 중의
하나로 특별히 취급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숫타니파아타』제 5장에서는 渴
愛(taṇha)가 모든 번뇌를 대표 또는 포괄하는 취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주
목할 만 하다. 바바린(Bāvarin)이라는 婆羅門의 16명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삥
기야(Piṇgiya)가 불타의 가르침에 대하여 “현실적이며(sandiṭṭhika), 시간을 필
요로 하지 않는(akālikaṃ) 法, 즉 고뇌가 없는 갈애의 소멸(taṇhakkhayam
anītikaṃ)을 설하셨다.”84)고 하여 불타 가르침의 핵심을 ‘갈애의 소멸’로 표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표현은 불타가 난다(Nanda)에게 설한 다음의 가르
침을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84) Sn. 1137.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 들린 것, 생각하는 것, 戒와 禁制를 모두 버
리고, 또 여러 가지 形相(anekarūpam)을 모두 버리고, 渴愛(taṇha)를 완전히
알아(pariññāya) 번뇌가 없는 사람들(anāsavāse, 無漏), ‘그들은 실로 (번뇌의)
激流를 건넌(oghatiṇṇā) 사람들이다.’고 나는 말한다.” (Sn. 1083)
앞에서 불타는 번뇌의 원인을 깨달은(pajānanti) 사람들은 그것을 제거한다
고 하고 그 원인으로 自己와 愛執(sneha)을 들었다. 애집을 주석서85)에는 渴
愛(taṇha)와 같은 것으로 보았는데, 여기서는 渴愛(taṇha)를 완전히 아는 것
(pariññāya)이 번뇌를 없애는(anāsava) 방법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들 두 자료
는 공통적으로 모든 번뇌의 원인에 渴愛가 있고 이를 깨닫고(pajānanti), 완전
히 아는 것(pariññāya)을 통해 번뇌를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깨닫고, 완전히 안다는 것은 지혜에 의해 渴愛를 있는 그대로 如實하게 直觀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85) Pj. 304.
번뇌를 대표하는 渴愛의 이와 같은 중요성은 四聖諦의 集諦와 十二支緣起
의 愛(taṇha)에 나타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渴愛를 깨닫고, 안다는 것은 갈애에 물든 마음뿐만 아니라, 그 마음
이 見聞覺知하는 일체의 대상에 대해 일으키는 모든 心의 작용과 그 心作用
의 제거가 다 포함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를 통해
번뇌의 격류를 건넌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세존이 대답하였다. 우다냐(Udayā)여, 愛欲(kāmacchanda)과 근심
(domanassa), 兩者를 버리고, 침울함(domanossa)을 제거하고 후회
(kukkucca)를 멈추는 것, 平靜(upekhā, 捨)과 念의 淸淨(sati-saṃsuddha)은
‘法의 思索에 의해 일어나는 것인데(dhamma-takka-purejavam)’, 이것이 無明
(avijjā)을 파괴하는 了知에 의한 解脫(aññāvimokha)이라고 나는 부른다.”
(Sn. 1107)
이 게송에는 번뇌의 心作用으로 애욕, 근심, 침울함, 후회를 들고 이들이
제거되고 나서 平靜과 念의 청정한 상태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변화가 ‘法의
思索에 의해 일어난다(dhamma-takka-purejavam)’고 말하고 있다. purejava는
先行者, 先導 등의 뜻이 있는데, 이는 번뇌의 마음 상태로부터 그것을 제거한
마음 상태로의 극적인 변화에 선행하는 계기에 ‘法의 思索’이라는 과정이 있
음을 말하는 것이다. 노만(K.R.Norman)은 이 法을 mental states(마음의 상태
들)이라고 번역86)하고 있는데 전후 문맥에서 볼 때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어서 불타가 이러한 일련의 內的 과정을 ‘無明을 파괴하는 了知에 의한 解
脫(aññāvimokha)’이라고 부른 것으로부터 思索(takka)이 단순히 사변적 思惟
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마음의 상태를 主觀의 作爲的인 개입 없이 了知하여
깨닫는 것, 또 그것을 통해 無明이 파괴되는 것이 가능해지는 어떤 心的 작용
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이러한 이해가 타당하다면 ‘法의 思索’은 전
술한 ‘渴愛를 완전히 아는 것(taṇham pariññāya)’과 같은 경지를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86) K.R.Norman譯,「The group of discourses(SUTTA-NIPĀTA)」, Vol.Ⅰ, p.179.
번뇌소멸(āsavakkhaya)의 계기로써의 ‘法의 思索’의 구체적인 사례로 생각
되는 자료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 …… ‘이 모든 것이 虛妄하다(sabbaṃ vitatham idam)’(고 알고) 탐욕
(lobha)을 떠난 比丘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함께 버린다.”87)
87) Sn. 10. 이어지는 Sn. 11, 12, 13의 게송에도 똑같은 문장 형식으로 貪(rāga), 瞋(dosa), 癡
(moha)를 떠나게 됨을 설하고 있다.
② “世尊이 대답하였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mantā asmī)’ 妄想(papañca,
戱論)이라고 불리는 것의 뿌리를 모두 파괴하고, 내면의 어떠한 渴愛
(taṇha)도 調伏하기(vinayā) 위해 항상 念하고(sato), 수행하여라(sikkha).”
(Sn. 916)
③ “ …… 우빠시바(Upasīva)여, 무소유(akiñcanaṃ)를 관찰하며
(pekkhamāno), 具念하여(satīma)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n'atthi)’는
것에 의지하여 (번뇌의) 激流를 건너라. 愛欲(kāma)을 버리고, (잘못된)
논쟁을 떠나 渴愛의 소멸(taṇhakkhayaṃ)을 밤낮으로 관찰하여라
(abhipassa).” (Sn. 1070)
이들 불타의 가르침의 공통점은 번뇌[탐욕, 渴愛, 愛欲]을 떠나거나 조복하
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前提로서
① 이 모든 것이 허망하다.
②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이라고 불리는 것의 뿌리를 파괴한다.
③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 하는 思惟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이들을 ‘法의 思索’이라고 보아도 논리
적인 모순은 없을 것이다. 번뇌에 물든 마음이 일으키는 대표적 心作用으로
써의 貪·瞋·癡는 감정적[貪·瞋]인 것과 知的 인식과 판단[痴]을 다 포함한
다. ①‘이 모든 것이 허망하다(vitatha)’는 것은, 이 세계를 眞實(tatha, 眞如)한
것으로 판단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심작용을 전환하려는 지혜의 심작용이다.
②‘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有身見(sakkāya-diṭṭhi)으로 그 뿌리는 無明
(avijjā)이며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지혜로, 여기서는 “諸法無我를 지혜에 의
해 觀하는(sabbe dhammā anattā ti yadā paññāya passati)”(Dhp. 278) 것이 될 것
이다. ③ 無所有處定88)의 禪定에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의 체험을
통해 主客을 포함한 일체가 존재한다는 일상적인 판단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禪定을 비롯하여 항상 念하고(sato), 수행하며, 관찰하
고(pekkhamāno), 具念(satīma)하여, 밤낮으로 관찰하는(abhipassa) 과정이 필
요하며 요청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과정을 종합한 것이 다음 게송이다.
88) 中村元,「ブッダのことば-スッタニパ―タ」p.259, 註1070 참조.
“항상 戒를 잘 지니고(sīlasampanno), 지혜있고(paññava), 잘 禪定에 들고
(susamāhito), 內的으로 思念하고(ajjhattacinti), 具念하는 사람(satimā)이 건너
기 어려운 (번뇌의) 격류를 건넌다.” (Sn. 174)
“지혜의 힘(paññābalam)이 있고, 戒와 禁制를 몸에 지니고
(sīlavatūpapannaṃ), 三昧에 들어(samāhitaṃ), 禪定을 즐기고(jhānarataṃ), 念
이 있고(satīmaṃ), 집착(saṇgā)에서 벗어나 완고하지 않고(akhila) 번뇌가 없
는 사람(anāsavaṃ), 賢者들은 그를 聖者(muni)라고 안다.” (Sn. 212, cf. 1026)
이들 게송에 불교의 대표적 수행체계인 戒·定·慧가 함께 나란히 나타나
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人生의 근본 문제를 外的인 절대적인 존재나 원리에
근거하여 규정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또 그러한 시도들의 무가치함을 비판하
면서, 오롯이 마음의 문제로 보고 그 변화의 가능성과 방법을 제시하는 이러
한 불타의 사상은 사상사적으로도 획기적인 일이며,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공감을 받았다. 윤회의 원인으로서의 번뇌는 現存在로서의 자신을
지탱하고 성립시킨 원리인데, 그 근원을 제거하려는 自己否定의 과정으로써
의 智慧작용은 實在를 대상화하여 分別的 思惟에 의해 개념화하려는 방식을
떠나 내면적 主體的 변화를 통해 實在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므로 해서 생겨
나는 心의 작용이다.
따라서 번뇌의 心에 근거하여 일어난 思惟작용을 實在에 근거한 ‘法의 思
索’에 의해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요청된다. 불타는 당시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渴愛를 끊어(taṇhacchida)89), 갈애가 없는(taṇhā yassa na
vijjati)90) 그래서 번뇌를 멸한 사람(khīnāsavam, 漏盡者)91) 번뇌가 없는 사람
(anāsava)92)이었다.
89) Sn. 1021.
90) Sn. 1089.
91) Sn. 539.
92) Sn. 1105, 1106, 1107, 1133, cf. 572.
5. 存在의 超越者(apunabbhava)
살아있는 존재들은 누구나 그 존재의 존재성을 의식하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 존재의 지속을 갈구한다. 그러나 세계 內의 삶은 시간적 有限性
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세상에서의 사람들의 壽命(jīvitam)은 징표가 없고, 알지 못한다. 그것
은 힘들고 짧으며 고통에 묶여 있다.” (Sn. 574)
“태어난 자들이 죽지 않을 방법은 없다. 노쇠하게 되면 죽음을 (맞는다).
생명 가진 자(pāṇino)에게는 이와 같은 法(evaṃdhammā)이 있기 때문이다.”
(Sn. 575)
“어린이나 어른도, 어리석은 자도 聖者도 모두 죽음에 굴복하고 만다. 모
두가 죽음으로 끝난다.” (Sn. 578)
“보아라, 친족들이 지켜보며 슬퍼하지만 사람은 한 사람씩, 도살장에 소
가 끌려가듯, 끌려간다.” (Sn. 580)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시간의 지배를 받고 반드시 죽는다. 그 시
간은 짧고, 고통스러우며, 노쇠하게 되면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따라서 生死
는 피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이다. 佛陀는 生死를 實存의 주어진 사실로서 순순
히 받아들이거나 회피하지 않고, 그의 出家동기인 四門遊觀에 나타나 있듯이
生死와 대결하였다. 그것은 죽음이 生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生死 즉 輪廻
(saṃsāra) 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生과 死를 끊임
없이 반복하는 것을 ‘生死輪廻(Jātimaraṇa-saṃsāra)’93) 라고 한다. 불타가 생사
윤회의 형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게송이『法句經』에 나온다.
93) Sn. 729. 경우에 따라서는 生死(jātimaraṇa)라는 표현을 가지고 윤회를 나타내기도 한다. Sn.
351, 467, 500, 520.
“어떤 사람은 母胎에 再生하고(upapajjanti) 惡을 행한 자들은 지옥(niraya)
에 떨어지고, 善行者는 天上(sagga)에 (올라)가고, 번뇌가 없는 사람들은
(anāsavā) 涅槃에 든다(parinibbanti).” (법구경. 126)
이 내용을 분석해 보면, 결국 번뇌의 有無에 따라 번뇌가 있는 사람들은 윤
회를 하게 되고, 번뇌가 없는 사람들은 열반에 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번뇌를 가진 사람들은 그 행위의 因果業報에 따라 어떤 사람은 母胎(gabbha)
에, 惡을 행한 자(pāpakammino)는 지옥에, 善行者(sugatin)는 天上에 각각 태
어난다. 달리 말하면 死後에 윤회하는 형태는 행위자의 행위(業, kamma)에
의해 결정되지만, 윤회하는 근본 원인은 번뇌에 있음을 이 게송은 설하고 있
다. 따라서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번뇌를 끊어야 한다.
불타가 자신의 전 존재를 건 生死와의 대결을 통해 발견한 것은 바로 이 번
뇌라고 할 수 있다. 生老病死하는 유한하고, 불완전하면, 예측 불가능한 고통
스러운 生存(bhava)의 심연에서, 그 이유도 모른 체 끝없이 헤매이다 찾아낸
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화살처럼 박혀있는 번뇌였다. 그리고 그것이 生老病
死·輪廻하는 원인임을 알았다.
“(번뇌의) 화살을 뽑아버리고, 의존함이 없이, 마음의 寂靜(santiṃ)을 얻
으면 모든 근심을 초월하여 근심이 없는 자(asoka), 열반의 든 자(nibbuto)가
된다.” (Sn. 593)
"생존에 대한 渴愛(bhava-taṇha)를 끊어 마음이 寂靜한(santacittassa) 비구
는 生의 윤회(jātisaṃsāra)를 건넌다. 그는 다시 生存(punabbhava)을 받지 않
는다.” (Sn. 946)
“渴愛를 동반하고 있는 사람은(taṇhādutiyo), 이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오랜 시간 윤회하여,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Sn. 740)
그리고 마음에서 이러한 번뇌를 뽑아버리면, 그것이 곧 마음의 寂靜한 상
태(santi)인 涅槃 즉 涅槃寂靜으로 번뇌의 激流가 멈추어 새로운 생존을 다시
받지(punabbhava) 않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윤회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번뇌를 ‘생존에 대한 渴愛(bhava-taṇha)라고 표현하고 있다. 불타는 전술한 견
실하지 않고 동요하고 있는, 죽음과 고통으로 가득찬 苦海 속에서 의지할 곳
을 구하지 못하다가 번뇌가 쉬어 寂靜해진 자신의 마음 속에서 그 안식할 곳
을 발견하였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akiñcana), 집착하여 취하지 않는 것
(anādānaṃ), 이것을 無比의 섬(dīpa), 涅槃(nibbānaṃ)이라고 부른다. 老衰와
죽음의 소멸이다.” (Sn. 1094.)
그런데 번뇌가 끊어진 그 열반이라는 섬은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언제인가
불분명한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 누구에게나 열려있다.94)
94) Sn. 1066. 세존이 말하였다. ‘도타카(Dhotaka)여. 현세에 있어 傳承에 의하지 않은 寂靜을 너
에게 설명하려고 한다. 이것을 알고, 念하여(sato) 세상의 집착을 뛰어 넘어라.’
“…… ‘渴愛를 버림에 의해 열반이다’라고 불린다.” (Sn. 1109)
“…… 이 세상에서 欲貪을 떠난(chandarāgaviratto) 지혜 있는(paññāṇvā)
比丘는 不死(amataṃ) 寂靜(santiṃ), 불멸의 열반의 경지(nibbāna-padam)를
證得하였다.” (Sn. 204)
마음이 열반을 증득하면 더 이상 새로운 生存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이 生은
최후의 것(antimā)95)이 되고 이 몸은 최후의 몸(sarirañ ca antimaṃ96),
antimadeha97))이 된다.
95) Sn. 502.
96) Sn. 478. Sn. 624에는 antimasārīra.
97) Sn. 471
불타는 윤회로부터 해탈한 자신의 境涯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황소처럼 고삐를 끊고, 코끼리처럼 냄새나는 덩굴을 짓밟아, 나는 다시
母胎에 들지 않을 것이다.” (Sn. 29)
비유에 나타나는 고삐와 냄새 나는 덩굴은 번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
다. 불타는 지혜 없는 어리석은 사람(bāla)이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所懷를 탁월한 비유로 묘사하고 있다.
“깨어있는 자에게 밤은 길고, 지쳐있는 사람에게 십리길(yojana, 由旬)도
멀다. 正法(saddhamma)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윤회의 (길은)
멀다.” (Sn. 471)
이 윤회의 길은 嶮路(palipatha), 難路(dugga)98) 또는 母胎로부터 모태로,
암흑(tama)으로부터 암흑으로99), 이 세상과 저 세상(imam parañ ca lokam) 100)
이 상태와 저 상태(itthabhāvāññathābhāvam)101)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거기
에 반해 윤회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전술한 寂靜(santi)102), 不死(amata, 甘
露)103)와 더불어 彼岸(pāra)104), 生死의 彼岸(jarāmaraṇassa pāraṃ)105), 一切法
의 彼岸(pāraguṃ sabbadhammānaṃ)106), 苦의 彼岸(pāragu dukkhassa)107), 生
死의 끝(jātimaraṇassa antaṃ)108), 苦의 끝(antagū dukkhassa)109)이라고도 표현
한다.
98) Sn. 638.
99) Sn. 278.
100) Sn. 2~17, 520.
101) Sn. 740, 729.
102) Sn. 919, 1066.
103) Sn. 80, 204, 225, 228, 960.
104) Sn. 714, 771, 803, 1059, 1129, 1130.
105) Sn. 467.
106) Sn. 1105.
107) Sn. 539.
108) Sn. 467.
109) Sn. 539.
윤회의 원인으로써의 번뇌 가운데 근본번뇌로, 번뇌를 대표하는 세 번뇌
가 탐욕(rāga), 증오(dasa), 미망(moha)임은 전술한 바가 있다 .그런데 그 중에
서도 특히 迷妄을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보는 게송이 있다. moha는 愚, 愚癡
등으로 漢譯되었는데, 그 뜻은 “無知, 진리에 대한 無知, 마음이 어두워 일체
의 도리에 통하는 智慧가 결여된 상태이다.”110) 따라서 이것은 知的인 번뇌
이다.
110) 中村元,「佛敎語大辭典」上, p.277.
“이 상태로부터 저 상태로 반복하여 생사윤회를 하는 사람들은, 그 행방
이 실로 無明(avijjā)에 있다.” (Sn. 729)
“이 무명은 큰 迷妄(mohāmoha)이다. 이것에 의해 긴 윤회가 (있다). 그
러나 明智(vijjā)에 도달한 衆生(sattā)은 다시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 (Sn.
730)
이 게송에서는 無明(avijjā)과 明智(vijjā)를 대비시키고 이 無明은 곧 큰 미
망으로 생사윤회의 원인으로, 明智는 윤회로부터 해탈하게 되는 원인으로 규
정하고 있다. 그런데 불타가 “지혜에 의해 해탈한 사람에게 迷妄이 없
다.(paññāvimuttassa na santi mohā)”111)고 설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明智가 다
름 아닌 지혜이며, 無明이 지혜가 없는 것을 말한다. 불타는 자신의 눈에 비
친 이 세상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111) Sn. 847.
“世尊이 대답하였다. 아지타(Ajitā)여. 세상(loka)은 無明에 의해 덮여있
다. (세상은) 인색함(veviccha)과 放逸(pamādā)에 의해 빛나지 않는다. 욕심
이 (세상을) 더럽히고 苦(dukkha)가 (세상의) 큰 두려움(mahabbhayam)이라
고 나는 말한다.” (Sn. 1033)
따라서 이 세계는 無明에 덮여, 바른 지혜가 없이 모순, 대립 투쟁하며, 生
老病死하는 實存의 유한함 속에 불안과 고통 두려움으로 가득한 윤회하는
衆生들의 세계 일 뿐이다. 끝없이 반복될 이러한 세계로부터 자유를 얻는 방
법은 內的 마음의 전환 즉 자신을 포함한 일체의 존재를 왜곡되게 바라보게
하는 마음의 無明을,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如實하게 바라보는 明智, 즉 지
혜를 통해 제거할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불타는 思惟에 의해 존재를 개념화
하는 것을 kappa, kappiya(妄想分別)라고 표현하고 “妄想分別하는 神과 사람
(deva-manussesu) 사이에 있으면서도 망상분별 하지 않는 사람”112)을 沐浴者
(nhātaka)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존재의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적 차이를 불
타가 분명히 자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망상분별하지 않는 사람을 知者
(vidvā), 聖者(ariya)라 부르고 번뇌를 끊어(chetvā āsavāni), 母胎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게송113)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혜에 의해 윤회를 벗어난 사람
을 가리킨다고 해야할 것이다.
112) Sn. 521.
113) Sn. 535.
불타 당시 사상가의 사유적 경향과 지혜를 중시하는 불타의 차이를 遍歷
行者(paribbājaka)인 사비야(Sabhiya)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沙門들의 논쟁에 의존하고, 관념과 문자(saññakkhasa, 慣用的 명칭), 관
념에 의존하는 63종의 異說을 調伏하고 지혜가 광대한 사람(bhūripañña) 은
(번뇌의) 격류를 건넜습니다.” (Sn. 538)
“당신은 苦(dukkha)의 끝에 이르고(antagū) 彼岸에 이르렀습니다(pāragū).
당신은 阿羅漢이며 正等覺者(sammāsambuddha)입니다. 당신은 번뇌를 멸
한 분(khīṇāsava)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당신은 빛나고(jutimā), 예지있고
(mutimā), 광대한 지혜 있는 사람(pahūtapañño)입니다. 苦의 끝에 이르신 분
이시여. (당신은) 나의 (疑念을) 뛰어넘게 해주셨습니다.” (Sn. 539)
불타는 모가라자(Mogharāja)에게 자신의 지혜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설하
면서 윤회로부터 해탈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모가라자여, 항상 具念하여(sato) 我見(attānudiṭṭhiṃ)을 버리고, 세계를
空하다고(suññato) 보아라(avekkhassu). 그러면 죽음을 건너게 될 것이다. 이
와 같이 세계를 보는 사람을 死王은 보지 못한다.” (Sn. 1119)
그 지혜의 내용은 다름 아닌 ‘無我’와 ‘一切皆空’으로 후자는 대승불교의 般
若·中觀 사상의 원류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6. 結語
인도 사상사에서 輪廻 사상이 인생관의 근본 문제로 확립된 이래로 唯物
論者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도사상가들에 있어 궁극적 관심사는 윤회로부터
解脫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人生觀이 必然性과 當爲性을 갖기 위해서는 윤
회하는 삶의 存在論的 구조를 合理的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流動
하고 끝없이 변화하는 불안정한 현상계의 배후에 영원불변의 절대적 원리나
존재를 想定하기도 하고[常住論] 또는 그 반대로 이러한 모든 것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虛無論[斷滅論]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形而上學的 원리에
환원시켜 演繹的으로 현상계를 규정하고, 그러한 독단 위에서 세계관을 달리
하는 다른 사상가들을 비판하였다. 뿐만 아니라 윤회와 해탈도 이러한 원리
와 결부시켜 설명하였다.
佛陀는 分別識에 근거한 思惟나 이론적 인식(vikappa)을 煩惱心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그러한 방법에 의해서는 존재의 眞實(yathābhūta, dhamma)에 다
가가기 어렵고, 존재의 진실에 대한 통찰[智慧, paññā, vijjā]이 없이는[無明,
avijja] 윤회의 원인인 煩惱를 끊을 수 없다고 보았다. 當時의 사상가들이 生死
輪廻하는 苦海 속에 허우적대는 實存의 안식처로 독단적인 形而上學的 원리
를 상정하고 거기에 安住하려는 태도에 불타는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人間苦의 원인이 그러한 형이상학적 존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衆生界의
마음의 심연에 숨어있는 煩惱에서 비롯되었음을 통찰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야말로 불타에 의해 思想史에서 처음으로 자각되고 선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문제를 이론적으로 인식하려는 如何
한 시도도 시간낭비이며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제자 마룬캬풋타의 형이상학
적 의문에 대해 無記(avyākata)의 태도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看過되어서는 안 되는 점은 불타가 당대의 思惟的 전통을 비판하
고, 형이상학적 문제에 無記의 태도를 취한 것이 단순히 “哲學的 思索을 배척
하였다”114)는 유럽 불교학자의 주장이나 “形而上學的 문제는 우리의 인식과
경험의 너머에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것을 절대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
다”115)는 기존의 주장은 적절하지 않다.
114) 和辻哲郞,「原始佛敎の實踐哲學」, 岩波書店, 1927, pp.90~91.
115) 水野弘元,「原始佛敎」, 平樂寺書店, 1956, pp.99~100.
形而上學이 추구하는 存在의 진실로서의 實在는 불타에게 있어서도 마찬
가지로 중요하였다. 마음 속의 번뇌를 근본적으로 끊기 위해서는 實在에 대
한 바른 통찰로써의 智慧(paññā)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불타가 형이상학적
문제에 침묵한 것은 형이상학이 추구하는 實在에 대해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방법이 부적절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
변적 사유나 개념적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淸淨行(brahmacārya, 梵行)을 통
해 마음 속에 實在를 있는 그대로 如實히 보는 지혜에 의해 번뇌가 소멸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116) 그러므로 無記에 대해 ‘思辨的 形而上學
(speculative metaphysics)117)의 거절’이라는 무르티(T.R.V.Murti)의 주장이나,
‘실천적 이유 때문이 아닌, 참된 認識에 관한 이유 때문에 배척하였다’118)는
和辻哲郞의 지적은 유용하다.
116) 金龍煥, 「佛陀と形而上學-無記說に對する諸解釋を中心に」,「パ―リ學佛敎文化學」第9號,
1995.; 金龍煥, 「無記說(Avyākata)について」,「釜山大學敎人文論叢」第37輯, 1990.
117) T.R.V.Murti,「The central philosophy of Buddhism」, p.47.
118) 和辻哲郞, 위의 책, p.95.
“도타카(Dhotaka)여, 나는 세상에 있어 어떠한 의혹자도 해탈시킬 수가
없다. 단지 네가 최상의 진리(dhammañ ca seṭṭham)을 안다면, 그것에 의해
이 (번뇌의) 激流를 건너게 될 것이다.”(Sn. 1064)
실론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gikoship/15783321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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