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빠알리어 경전과 대승경전의 사상적 차이 / 박경준

수선님 2019. 9. 22. 12:28

빠알리어 경전과 대승경전의 사상적 차이 / 박경준

―《숫따니빠따》와 《법화경》을 중심으로

[44호] 2010년 09월 06일 (월)

박경준                     sjkj@dongguk.edu

1. 머리말

               

박경준 교수

오늘날의 세계불교는 크게 남방불교[또는 남전불교]와 북방불교[또는 북전불교]로 이분된다. 남전불교는 동북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소승불교라 불려 왔는데, 현재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서 신봉되고 있다. 이들 국가의 불교도들은 스스로를 ‘테라와다(Theravāda: 長老의 道, 上座部)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테라와딘(Theravādin)’이라고 부른다. 북전불교는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네팔, 부탄, 티베트, 러시아(의 일부 지방), 몽골, 중국, 베트남, 일본 등에 퍼져 있으며, 이 지역의 불교도들은 자신들의 불교를 ‘대승불교’라 부른다. 대승불교도들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불교가 ‘대승(大乘, mahā-yāna)’이라는 점에 지대한 자긍심을 지녀 왔으며 남전불교를 소승불교로 폄하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대승’에 대한 신념과 긍지는 점점 약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대략 네 가지 배경과 원인이 있다고 추정된다. 첫째는 일불제자(一佛弟子)인 불교도들이 이제는 소승과 대승의 대립을 극복해야 한다는 대승적인 인식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둘째, 불교 교리와 역사에 대한 지식이 일반화되면서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직접적인 설법이 아니라는 주장과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불교국가 간의 교류와 협력이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넷째, 일부 스님들과 재가불자들 사이에 ‘간화선’의 효능에 대한 회의가 증대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후반, 스리랑카와 태국 및 미얀마 등으로부터 ‘위빠사나’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위빠사나 수행을 중심으로 한 테라와다불교는 스님들과 재가불자들 사이에 큰 호응을 얻으면서 널리 확산되고 있다. 현재 위빠사나 수행은 ‘보리수 선원’ ‘마하보디 선원’ ‘호두마을’ ‘한국마하시선원’ 등을 비롯한 30여 개의 단체와 도량에서 체계적이고도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마침내 2008년 12월 31일에는 ‘문화체육관광부’에 ‘(사)한국테라와다불교(Theravada Buddhasasana in Korea)’ 설립에 관한 등록을 완료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테라와다불교는 이제 한국에서 또 하나의 불교 종단 내지 교단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공식적인 불교 종단이 60여 개 이상 있다. 하지만 테라와다불교 종단은 그 전통과 의례, 수행 또는 생활 방식이 독특하여 우리 불교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시점에서 이제 우리는 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가 과연 사상적으로 또는 교리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그동안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행해진 소승불교에 대한 도식적인 이해와 평가를 잠시 접어두고 테라와다불교의 정전(正典)인 빠알리어 경전과 대승경전의 내용을 직접 비교해 보고자 한다. 하지만 빠알리어 경전과 대승경전은 양적으로 너무 방대하여 본고에서는 우선 《숫따니빠따》와 《법화경》의 내용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숫따니빠따》는 그 성립이 가장 오래된 경전 중의 하나로 불교 경전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고 《법화경》은 대승의 특성이 잘 집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의 대중적 대승불교 신앙을 대표하는 경전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2.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갈등과 대립

고타마 붓다에 의해 창설된 불교 교단은 부처님 재세 시는 물론 불멸(佛滅) 후 약 100년까지는 일미화합(一味和合)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불멸 후 100년경, 교단이 처한 상황이 변하면서 계율에 대한 입장 및 사상적 견해가 엇갈림으로써 교단은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분열된다. 이것을 불교사에서는 ‘근본분열’이라고 칭한다.

이 근본분열 이후에도 수백 년 동안 지말분열이 계속되어 교단은 무려 18부파 내지 20부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부파불교 시대에는 현학적 아비달마와 형식적 계율주의가 주류를 이루면서 종교적 생명력과 대중과의 유대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부파불교 시대의 일부 출가자들은 출가자의 본분을 망각한 채 파계를 일삼고, 일부는 권위주의에 빠져 불교를 사원과 출가자의 전유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대승불교운동은 이러한 기존의 부파불교 교단을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부처님에게로 돌아가자’ 혹은 ‘불교의 참정신을 회복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집단적 불교혁신 운동이었다.

이에 부파불교인들은 크게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고, 특히 교단의 역사적 정통성을 중시하는 보수파와 파계를 일삼던 사이비 승려들은 새로운 불교운동에 격렬하게 반발하여 이를 방해하고 박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의 관념과 사상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일천제는 흔히 ‘단선근(斷善根)’이라고 번역되듯이 참으로 극악무도하여 모든 선근이 끊어진, 그래서 영원히 성불할 수 없는 존재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 일천제 사상에는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발견된다. 첫째, 일천제라는 단어가 일반 사회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불교계 내에서만 사용되었다는 점, 둘째 일천제에 해당되는 용어가 원시경전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 《열반경(涅槃經)》 등의 대승경전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 셋째 일천제가 오무간죄(五無間罪, 五逆罪)나 사중금(四重禁, 4바라이죄)을 범한 자보다 더 악한 존재로 정의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첫째와 둘째 내용에 의거해 추정해 보면, 일천제는 대승불교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우선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승불교와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서 5무간죄나 4중금의 죄악을 지은 사람들보다도 사악한 존재란 과연 어떤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일까. 《열반경》에서는 대승방등(大乘方等) 경전을 천마파순(天魔波旬)의 설이라 비방하고, 부처님을 비난하고, 법은 구하지 않고 이익만 구하며 겉으로는 위의를 갖추고 성인(聖人)의 행세를 하는 삿된 비구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들을 일천제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열반경》은 여법하게 수행 정진하며 대승법을 설하는 법사(法師)를, 파계한 비구들이 칼과 막대기로 위협하는 사태마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더욱이 《불성론(佛性論)》에서는 일천제를 설명하여 “대승을 증오하고 거부하는(憎背大乘) 것이 천제장(闡提障)이다.”고 하고 있고, 《보성론(寶性論)》에서도 “대승을 비방함을 일천제장(一闡提障)이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일천제란 구체적으로 ‘부파불교 교단 소속의 비구로서 파계를 일삼고 교단 내에 많은 물의를 일으키며 특히 대승불교 운동을 극렬하게 박해했던 사이비 승려들’임을 알 수 있다. 대승불교인들이 이들을 4중금이나 5무간죄를 저지른 사람들보다도 더 극악한 무리라고 한 것은 결국 대승불교 흥기 당시에 있어서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갈등과 대립이 얼마나 심했었는가를 반증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3. 《숫따니빠따》와 《법화경》의 비교

1)《숫따니빠따》와 《법화경》 개요

《숫따니빠따》는 가장 오래된 경전의 하나로 초기경전이 ‘구전(口傳)’에 의해 전승되었음을 짐작게 하는 단순하고 소박한 형식의 경전이다. 《숫따니빠따(Sutta-nipāta》는 그 경명(經名)처럼 경(Sutta)의 집성(nipāta)이라는 의미에서 흔히 《경집(經集)》이라고도 불린다. 《경집》은 아마도 이 경의 각장이 각각 독립된 경전으로 전해지다가 어느 땐가 하나의 경으로 합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이 경은 다섯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을 단위(개별) 경전으로 구분하면 70경이 되며, 이것을 다시 게송으로 세분하면 1,149송이나 된다. 이 가운데 제4장 ‘여덟 편의 시’는 일찍부터 16경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지겸(支謙)이 한역(漢譯)한 《의족경(義足經)》(2권)은 바로 이 장에 해당되는 경전이다. 《숫따니빠따》에는 《의석(義釋, Niddesa)》이라고 하는 오래된 주석서가 있는데, 이것은 제1장 제3경과 제4장 및 제5장의 내용에 대한 어구(語句)의 주해다.

《법화경(法華經)》은 산스끄리뜨본 《Saddharmapuņḍarikasūtra》의 한역으로〔sad-正 또는 妙, dharma−法, puņḍarika−蓮花, sūtra−經〕, 축법호(竺法護)는 이것을 《정법화경》으로, 구마라집은 《묘법연화경》으로 번역하였는데, 구마라집의 번역본이 일반화되어 《묘법연화경》이 대표적인 경의 이름이 되었다. 《법화경》은 이 《묘법연화경》의 약칭이다.

이 경의 한문 번역은 여섯 종류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3종이다. 서진(西晋)의 축법호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10권 27품), 요진(姚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7권 28품), 수(隋)의 사나굴다(闍那堀多)와 달마급다(達磨笈多)가 공역한 《첨품(添品)묘법연화경》(7권 27품)이 그 셋이다.

이 경은 그동안 티베트어, 위구르어, 서하어, 몽고어, 만주어 등 중앙아시아 권역의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넓은 지역에 보급되었다. 근래에는 일본어, 프랑스어, 영어 등으로도 번역되어 유포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조 세조 때의 언해본을 비롯하여 여러 현대 한글 번역본이 유통되고 있다.

《법화경》에 대한 연구는 서역 지방과 티베트를 거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수많은 주석서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천태(天台) 대사 지의(智顗)가 지은 법화삼대부(法華三大部)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매우 뛰어나 가장 권위 있는 주석서로서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천태 대사는 법화삼대부, 즉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마하지관(摩訶止觀)》을 통해 《법화경》을 주석하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사상을 새롭게 구축하고 있기도 하다.

《법화경》은 일시에 이루어진 경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최초의 《법화경》은 오늘날과 같은 규모가 아니라 8품 내지 10품 정도로 구성된 소규모의 경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지금의 제1 서품의 일부, 제2 방편품과 제3 비유품이 먼저 성립되고, 다음으로 제11 견보탑품의 전반부와 제13 권지품의 일부가 추가된 후, 다시 제15 종지용출품, 제16 여래수량품과 제21 여래신력품이 성립되어 8품이 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제17 분별공덕품 및 제20 상불경보살품이 첨가된 총 10품으로 이루어진 경전이 되었을 것이다.

2) 두 경의 구성 또는 형식

불교 경전은 대부분 육성취(六成就)를 갖추고 삼분(三分)으로 구분된다. 육성취란 경전 성립의 기본 요건으로서 신성취(信成就)[如是], 문성취(聞成就)[我聞], 시성취(時成就)[一時], 주성취(主成就)[佛], 처성취(處成就)[在某處], 중성취(衆成就)[與大比丘衆 某某俱]의 여섯 조건이다. 삼분이란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을 말한다. 서분은 그 경전을 설하게 되는 연유와 배경을 설하는 부분이고, 정종분은 그 경전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중심 내용을 설하는 부분이며, 유통분은 경전의 이익과 공덕, 홍포와 선양에 관해 설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숫따니빠따》를 구성하고 있는 70편의 경전들 가운데는 이와 같은 육성취와 삼분의 형식을 갖춘 경전들보다 갖추지 못한 경전들이 더 많다. 예를 들어, 제1장 사품(蛇品)의 제1경 《뱀》의 경우를 보도록 하자. 이 경은 짧은 내용의 17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제1 게송과 제17 게송은 각각 다음과 같다.

뱀의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을 약으로 다스리듯, 치미는 화를 삭이는 수행자는 이 세상(此岸)도 저 세상(彼岸)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1)

다섯 가지 덮개(五蓋)를 버리고, 번뇌가 없고 의혹을 뛰어넘어 괴로움이 없는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17)

이들 내용 속에서는 육성취의 내용도 삼분의 형식도 발견되지 않는다. 거두절미하고 붓다가 제자들에게 직접 전하는 가르침만 게송의 형식으로 열거되어 있다.

물론 육성취와 삼분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경도 있다. 예를 들면 제1장 제4경 《밭을 가는 바라드바자》는 육성취의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고 서분, 정종분, 유통분의 형식도 잘 갖추고 있다. 또한 제2장 소품(小品) 제14경 《담미까》와 같이 서분, 정종분은 있는데 유통분은 없는 경우도 있다. 《숫따니빠따》에 나오는 서분과 유통분의 내용은 잡아함의 경우처럼 대체적으로 간략하고 소박하다. 먼저 제2장 제14경 《담미까》의 서분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날 거룩한 스승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 고독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장자의 동산에 계시었다. 그때 담미카라는 재가 신도가 오백 명의 신도들과 같이 스승께 와서 예배한 뒤 시로써 여쭈었다.(제376 게송 바로 앞)

다음은 제3장 대품(大品) 제12경 《두 가지 관찰》의 유통분의 내용이다.

스승〔Bhagavat, 世尊〕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은 기뻐하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이 설법이 있을 때 육십 명의 수행승들은 집착이 없어져 마음이 더러움에서 해탈되었다.(제765송 바로 뒤)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숫따니빠따》의 경전 내용들은 대부분 사실에 바탕한 것으로 간략하고 소박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에 반해 《법화경》은 육성취의 내용은 물론 삼분의 형식도 확실하게 갖추고 있고 그 분량도 광대하다. 《숫따니빠따》의 내용이 대부분 현실에 바탕한 것인 데 비해, 《법화경》의 내용은 비사실적 또는 초현실적인 부분이 많고 문학적 내지 희곡적인 성격도 강하다. 예를 들어 ‘서분’에 해당되는 ‘서품(序品)’의 내용만 보더라도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서품에서는 육성취 중에서 특히 중(衆) 성취를 이루고 있는 대중이 실로 다양하고 장엄하다. 먼저 비구중(衆)은 일만 이천 명인데, 이는 일반적인 1,250인의 거의 10배에 달하는 숫자다. 그중에서 구체적으로 가섭, 사리불, 목건련, 아난, 라훌라 등 21명의 제자들 이름을 밝히고 있다. 마하파자파티와 야소다라를 비롯한 비구니중도 6천 인이다. 보살마하살 대중은 8만 명으로 그중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미륵보살 등 18명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 도리천의 석제환인도 2만 명의 권속들과 함께하고 수많은 천자(天子)들도 동석하였다. 용왕, 긴나라 왕, 건달바 왕, 아수라 왕, 가루라 왕 등의 무리와 더불어 아사세 왕도 여러 백천 권속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세존은 이 모든 대중들을 위해 《무량의경(無量義經)》을 설하고 무량의처 삼매에 든다. 이때 여섯 가지 기이한 상서가 나타난다.

이때 하늘에서는 만다라꽃, 마하만다라꽃, 만수사꽃, 마하만수사꽃들이 비오듯 내려 부처님과 모든 대중 위에 뿌려졌으며 부처님의 넓은 세계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다 ……(중략)…… 이때, 부처님께서는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으로 광명을 놓으시어 동방으로 일만 팔천 세계를 두루 비추시니, 아래로는 아비지옥에 이르고 위로는 아가니타천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법화경》의 서분 내용은 《숫따니빠따》의 그것과 큰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태 대사에 따르면, 《묘법연화경》은 ‘2문(門) 6단(段)’으로 구성되어 있다. ‘2문’이란 적문(迹門)과 본문(本門)을 말하는데, 적문이란 이 땅에 자취를 남긴 석가모니불이 세 가지 방편을 통해 일승(一乘)의 한 가지 진실을 밝혀, 이승(二乘), 즉 성문과 연각도 성불할 수 있음을 알리고 그 길을 제시한 부분이다. 제2 방편품을 중심으로 설해지는 적문의 핵심 주제는 한마디로 ‘일승묘법(一乘妙法)’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이란 이 땅에 출현한 석가모니불을 초월하여 실재하면서 중생을 구제하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본불(本佛)을 밝힌 부분이다. 제16 여래수랑품을 중심으로 설해지는 본문의 핵심 주제는 ‘구원본불(久遠本佛)’이라고 할 수 있다. 천태 대사는 이 적문과 본문을 각각 서분, 정종분, 유통분의 삼분으로 나누어 전체를 6단, 즉 6분으로 구분한 것이다.

3) 불타관 비교

(1)《숫따니빠따》의 불타관

가. 인간으로서의 붓다

《숫따니빠따》에 나타나는 석가세존의 모습은 한마디로 인간으로서의 붓다, 즉 ‘인간 붓다’라고 할 수 있다. 세존은 코살라 국의 속국인 히말라야 기슭의 ‘석가족’ 출신이다. 감자왕(甘蔗王)의 후예로서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카필라성에서 보낸다. 강보에 싸인 아기 붓다는 “머리 위에 흰 양산을 가리고 빨간 모포에 싸여 있는 황금 보물 같은 아기”로 묘사된다. 그는 “집에서 사는 생활은 비좁고 번거로우며, 먼지가 쌓인다. 그러나 출가는 널찍한 들판이며 번거로움이 없다”고 생각하여 출가한다. 출가 후 6년 간의 용맹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고 생사윤회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성취한다. 이러한 경지에 대한 다음의 설명은 《숫따니빠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태어나는 일은 이제 끝났다. 청정한 행은 이미 완성되었다. 할 일을 다 마쳤다. 이제 다시는 이러한 생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고 열반을 성취한 석가세존은 종종 ‘눈을 뜬 분’ ‘진리의 주인’ ‘눈이 있는 이’ ‘인류의 최상인’ ‘위대한 영웅’ ‘신성한 분’ ‘애착을 떠난 분’ ‘번뇌의 화살을 꺾어 버린 분’ ‘악마의 군대를 쳐부순 이’ 등으로 불린다. 이렇게 깨달은 붓다도 때가 되면 속옷과 겹옷을 입고 발우를 들고 탁발을 하며 우유죽을 드시기도 한다. 외아들 라훌라에게 경책할 때는 사랑과 엄격함이 함께 묻어나는 아버지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처럼 《숫따니빠따》의 붓다는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 ‘인간 붓다’로 그려지고 있다.

나. 스승으로서 붓다

《숫따니빠따》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고타마시여.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고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이, ‘혹은 눈이 있는 사람들은 빛을 볼 것이다’ 하고 어둔 밤에 등불을 비춰 주듯이, 당시 고타마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밝히셨습니다. 저는 당신 고타마께 귀의합니다. 그리고 교법과 수행승의 모임[僧伽]에 귀의합니다.

위의 비유들, 즉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이” “어둔 밤에 등불을 비춰주듯이”가 의미하는 바는 모두 스승으로서의 붓다이다. 붓다는 사람들을 직접 구제해 주는 신도 아니고 신적 존재도 아니다. 붓다는 길을 가리키는 안내자요, 병을 처방하는 의사며 중생을 가르치는 스승일 뿐이다. 그는 스스로 깨닫고 증명하여 천신과 악마를 포함한 이 세계와 사문, 바라문,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가르침을 베푼다. 붓다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고, 말과 뜻이 잘 갖추어진 가르침을 설한다. 그리하여 그는 참사람, 깨달은 사람, 지혜와 행을 갖춘 사람, 행복한 사람, 세상을 알아버린 사람, 위없는 사람, 사람들을 길들이는 이[御者], 신과 인간의 스승, 눈뜬 사람, 거룩한 스승이라고 불린다. 《숫따니빠따》의 가르침은 결국 출가수행자 또는 제자들을 향한 스승의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은 모든 탐욕과 번뇌를 여의어 생사윤회의 사슬을 끊고 해탈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한다.

다. 신화적 존재 또는 초인으로서의 붓다

이와 같이 《숫따니빠따》에 나타나는 붓다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인간적이지만, 초인적인 붓다의 모습도 간혹 발견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아시타 선인이 어린 싯다르타 태자의 관상을 보고 난 후, “이 아이는 평범한 상이 아닙니다. 주의해서 길러주십시오. 이 왕자는 깨달음의 궁극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한 말 속에 암시되어 있다. 아시타가 본 싯다르타 태자의 특별한 상은 다름 아닌 32상이었음을 《숫따니빠따》의 다른 게송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든 베다 가운데 서른두 가지 완전한 위인의 상이 전해져 있고, 차례로 설명되어 있다.(1000)

몸에 이런 서른두 가지 위인의 상이 있는 사람, 그에게는 두 가지 앞길이 있을 뿐, 셋째 길은 없다.(1001)

만약 그가 집에 머문다면 이 대지를 정복하리라. 형벌에 의하거나 무기에 의존함이 없이 법으로써 통치한다.(1002)

또 그가 집을 나와 집 없는 사람이 된다면 덮여 있는 것을 벗기고, 더 없이 놓은 눈뜬 사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된다.(1003)

위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인도에서는 고대부터 일종의 메시아 사상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메시아는 32상이라는 특별한 외모를 타고나는데, 그가 세상에 머문다면 온 세상을 법(dharma)에 의해 통치하는 위대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고, 출가한다면 깨달음을 성취하여 여래(如來)가 된다는 것이다. 붓다의 32상에 관한 언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제3장 제7경 《세라》에 의하면, 부처님은 ‘세라’라는 바라문이 부처님의 특별한 서른 가지 상은 확인했지만 음마장상(陰馬藏相)과 광장설상(廣長舌相)은 보지 못해 의심하는 것을 보고, 신통력으로 감추어진 음부(陰部)를 볼 수 있게 하고 동시에 혀를 내밀어 두 귀와 이마까지 닿도록 하여 의심을 풀게 하였다.

이 32상을 사실대로 이해한다면 부처님은 분명 보통 인간과는 다른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32상을 지혜와 자비, 그리고 덕과 인격의 상징으로 이해한다면 또 다른 해석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상징이라 하더라도 32상에 관한 이야기는 부처님을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초인적 존재로 바라보는 입장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또한 《숫따니빠따》에는 과거7불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과거불 중의 한 분인 가섭불과의 대화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과거불 사상은 석가모니불에 그 기원을 둔다고 볼 수 있지만, 과거불을 메시아 사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석가모니불은 초인적 구세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때 세존이 바라드바자 바라문으로 하여금 우유죽을 물 속에 버리게 했는데, 곧바로 부글부글 소리를 내면서 많은 거품이 끓어오르자 바라문이 두려워하면서 세존께 귀의했다는 일화도 눈에 띈다. 이러한 일화도 붓다의 초인적 모습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2) 《법화경》의 불타관

가.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붓다

《숫따니빠따》의 붓다는 부분적으로 초인적인 측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의 인간 붓다이다. 기원전 6세기경 석가국의 카필라성에 아버지 정반왕과 어머니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자로 태어난 그는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는다.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여 노력한 끝에 깨달음을 성취한 후, 수십 년간 전법교화의 삶을 살다 80세가 되어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든 역사적 인간이다.

하지만 《법화경》에서는 이러한 인간 붓다의 정체성에 대한 놀라운 비밀이 폭로된다. 석가세존은 보드가야에서 처음 붓다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겁 전에 깨달음을 성취한[구원실성] 본래부처[본불], 다시 말해 구원본불(久遠本佛)이라는 것이다. 석가모니불은 중생들에게 불지견(佛知見)을 개(開)·시(示)·오(悟)·입(入)하기 위한 근본원(根本願)을 가지고 태자의 몸으로 화현하였고, 열반에 들지도 않았지만 일부러 열반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며, 여래의 수명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법화경》 제16 여래수량품에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설해져 있다.

너희들은 여래의 비밀과 신통력에 대하여 자세히 들으라. 일체 세간의 하늘과 인간 그리고 아수라들은 모두 석가모니불은 석씨 왕성을 나와 가야성 가까운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선남자들아, 내가 성불한 지는 한량없고 가없는 백천 만억 나유타 겁이니라 ……(중략)…… 그로부터 나는 항상 이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설법하여 교화했고, 또 다른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 국토에서 중생을 인도하여 이익되게 하느니라……(중략)…… 이와 같이 내가 성불한 지는 참으로 오랜 옛날부터였으며 수명이 한량없는 아승지겁이므로 이 세상에 항상 머물러 멸하는 법이 없느니라……(중략)…… 나는 그대들에게 내가 곧 멸도(滅度)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참 멸도가 아니며, 여래는 이런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느니라.

여래수량품의 비유에 의하면, 여래의 수명은 오백진점겁(五百塵點劫)보다 훨씬 더 많다. 오백진점겁이란, 어떤 사람이 오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의 삼천대천 세계를 부수어 가는 티끌로 만들고, 그 티끌을 동방으로 오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의 국토를 지날 때마다 하나씩 떨어뜨리는데, 이렇게 해서 그 티끌이 다 없어질 때까지 지나온 국토는 물론 티끌을 떨어뜨리지 않은 국토까지 모두 합하여 다시 가늘게 부수어 티끌을 만든다고 가정할 때, 그 모든 티끌 수만큼의 겁에 해당된다.

아무래도 이 오백진점겁의 비유는 붓다의 실제 수명을 추정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붓다의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대승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불신(佛身)을 크게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으로 나누는데 이 삼신설(三身說)은 《법화경》 이후에 정착된 사상이다. 그런데 이 《법화경》의 구원실성의 본불은 법신의 측면과 보신의 측면을 겸비하고 있어 흥미롭다. 구원본불을 영원한 생명의 본래부처[本佛]로 본다면 그것은 법신의 개념에 가깝고, 비록 구원겁 이전이라 하더라도 성불의 시점을 인정한다면 보신의 개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구원본불은 이러한 법신과 보신의 성격을 함께 아우르고 있기에 종교적 생명력이 더 강한지도 모른다.

나. 구제자로서의 붓다

석가모니불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구원본불의 응화신(應化身)이다.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구원실성의 본불은 이 사바세계에 상주하여 끊임없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한다. 하지만 불지견이 없는 범부 중생의 안목으로는 구원본불의 그러한 실천행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믿기도 어려울 뿐이다. 《법화경》은 이러한 이유로 민중이 더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을 제시한다. 《법화경》 제25 관세음보살보문품에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설해져 있다.

선남자야, 만일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여러 고뇌를 받을 때에,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께서 즉시 그 음성을 듣고 그들로 하여금 다 해탈을 얻게 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받들면 그 사람이 혹시 큰 불 속에 들어가더라도 불이 그를 태우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관세음보살의 신통한 위력 때문이니라.

불교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흔히 ‘사바세계(sahaloka)’라고 한다. 이 세상에는 잡다한 것들이 모여 있고[雜會土], 따라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아 참고 견디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勘忍土]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특히 힘없는 민중의 삶은 더욱 고달프고 열악하기 일쑤다.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기 쉬운 곤경을 칠난(七難)이라고 한다. 화난(火難), 수난(水難), 풍난(風難), 검난(劍難), 귀난(鬼難), 옥난(獄難), 도난(盜難)이 그것이다. 또한 단란한 가정을 이루려면 자식도 필요하고 직업도 필요하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소원을 갖기도 한다. 관세음보살은 이러한 여러 재난으로부터 중생을 구하고, 중생의 갖가지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온갖 방편을 동원한다.

선남자여, 만일 어떤 국토의 중생을 부처님의 몸으로 제도해야 할 이에게는 관세음보살이 곧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어 설하고, 벽지불의 몸으로 제도해야 할 이에게는 곧 벽지불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고……(중략)…… 집금강신의 몸으로 제도해야 할 이에게는 곧 집금강신의 몸을 나타내어 그를 위해 법을 설해 주느니라.

이처럼 관세음보살은 33응신(應身)을 나투어 중생을 구제한다. 위기와 곤경에 처한 중생의 입장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칭명하기만 하면 된다. 참으로 쉽고 편리한 방법이다. 특히 민중들 사이에서는 관세음보살에 대한 믿음이 널리 퍼져 갔다. 이러한 믿음은 마침내 이른바 ‘관음 신앙’을 성립시켰으며, 관세음보살의 칭명으로 부사의한 효험을 보았다는 수많은 영험담도 쏟아져 나왔다.

요컨대, 중생구제의 화신이라 할 이 관세음보살은 부처님의 또 다른 이름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법화경》에서의 붓다는 바로 이러한 구제자로서의 붓다라고 할 수 있다.

4) 두 경의 사상적 차이

(1) 《숫따니빠따》의 불교 사상적 특징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숫따니빠따》는 실로 소박하고 원시적인 형태의 경전으로서 석가세존의 육성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다. 따라서 《숫따니빠따》는 테라와다불교의 사상적 원형이 담겨 있는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테라와다불교의 방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숫따니빠따》의 몇 가지 사상적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 법수화 또는 조직화되지 않은 교리

《숫따니빠따》의 가장 큰 특징은 소박한 형태에 있다. 다시 말해 이 경전 속에는 붓다의 가르침이 아직 조직화되거나 체계화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불교교리의 기본 용어들, 이를테면 3법인, 4성제, 5계, 5온, 6근, 6경, 12처, 8정도, 12연기 등의 용어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3법인의 내용도 한곳에 함께 설해져 있지 않고 여기 저기 산재해 있다. 4성제의 내용도 그 기본 틀만 있지 그에 대한 설명은 없다. 예컨대,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하는 것이 하나의 관찰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그침이다. 이것은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길이다’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5계에 관련해서는, 그 내용은 제394송에서 제398송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설해져 있는데 막상 ‘5계’라는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8재계’도 그 내용은 설명되어 있는데 아직 용어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 ‘여덟 부분으로 된(consisting of eight parts)’ 재계라고 느슨하게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5온은 그 내용마저도 발견되지 않고, 6근을 말할 때는 그냥 6(six)이라고만 하고 있다. 6경과 관련된 내용은 제171송에 여섯 가지 욕망의 대상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제974송에는 색, 성, 향, 미, 촉의 다섯 가지 명칭만 나온다. 8정도에 관련된 전체적인 내용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연기법이라든가 12연기와 같은 용어도 발견되지 않는데, 다만 제3장 대품 제12경 《두 가지 관찰》의 내용 가운데 무명(無明), 행(行), 식(識), 촉(觸), 수(受), 애(愛), 취(取)의 용어가 나온다. 이들의 관계에 대한 언급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명색(名色), 육입(六入),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항목도 빠져 있지만, 이러한 가르침이 기초가 되어 후일 ‘12연기’가 정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가세존이 이러한 전문용어나 법수(法數)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이러한 용어들 중에는 아비달마 불교인들에 의해 만들어져 적극적으로 사용된 것도 적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세존은 번쇄한 교리의 체계화 또는 조직화보다는 그 ‘대기설법(對機說法)’의 방법으로 보아, 그때그때 상대에 따라, 주제나 문제에 따라 실질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효과적인 대화와 가르침을 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르침의 내용이 중요하지 가르침의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종종 실체적 진실을 왜곡하고 현학과 사변에 빠지게 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후일 아비달마불교의 병폐에서도 입증되고 있으며, 대승의 초기경전인 《반야경》에서는 이름과 개념에 대한 집착을 강력하게 경계하고 있다.

나. 금욕적 출가수행의 독려

《숫따니빠따》를 관통하고 있는 대주제 중의 하나는 ‘출가수행’이다. 출가수행의 목적은 고통과 번뇌를 여의고 생사의 윤회가 없는 열반을 얻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식과 아내에 대한 애착도 버려야 하며 무엇보다도 욕망[탐애]을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롭지만 끝내는 우리를 고통과 번뇌 속으로 빠뜨리고 만다. 그래서 경전은 특히 ‘성교’를 경계한다.

독신을 지키고 있을 때에는 지혜로운 분이라고 인정받던 사람도, 성교에 빠지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처럼 괴로워한다.(820)

성자는 이 세상에서 앞뒤로 이러한 재난이 있음을 알아 굳게 독신을 지키고 성교에 빠지지 마라.(821)

성자는 온갖 욕망을 거들떠보지 않으며 이를 떠나 살기 때문에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욕망을 여읜 출가수행이 실로 당당하고 자유롭고 청정한 길임을 경전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71)

《숫따니빠따》는 욕망을 경계하면서 우리 몸의 아홉 구멍에서는 끊임없이 더러운 오물이 흐르고 있음을 주시해야 하고, 죽어서 시체가 되면 부패하여 악취가 진동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육체를 비롯한 모든 세속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일관되게 가르친다. 그리고 “마치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아무리 애를 써도 백조를 따를 수 없는 것처럼, 집에 있는 이는 세속을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성인이나 수행자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다. 자비사상

우리는 흔희 소승불교는 자기중심적이고 자리주의(自利主義)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정관념과 잘못된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려 주는 한 경이 있다. 제1장 사품 제8경 《자비》라는 이름의 경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또는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147)

또한 온 세계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를 행하라. 위 아래로, 또는 옆으로 장애와 원한과 적의가 없는 자비를 행하라.(150)

경은 계속해서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듯이”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가지라고 설한다. 또한 재가자의 행위 규범을 설하는 가운데, 산 것을 몸소 죽여서는 안 되고 남을 시켜 죽여서도 안 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이는 것을 보고 묵인해도 안 된다’고 가르친다. 마찬가지로 남이 도둑질하는 것을 묵인해도 안 되며, 거짓말하는 것을 묵인해도 안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과 사회 및 자연에 대한 관심과 자비를 강조하며, 이것은 결국 이타주의(利他主義)와 접목된다고 보인다. 이러한 이타적 사상은 이미 대승(大乘)의 이념과 정신을 배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숫따니빠따》에는 이 밖에도 다양한 가르침이 설해져 있는데, 그 기저를 이루는 것은 업사상과 윤회사상이다. 경은 바라문이라 하더라도 나쁜 행위를 하면 현세에서 비난을 받고 내세에는 나쁜 곳에 태어난다고 한다. 특히 지옥에 대해서는, 화염지옥, 칼날지옥, 홍련지옥 등 여러 지옥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러한 업과 윤회의 관념은 세존 당시 인도 사람들에게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세존은 이것을 수용하여 불교적으로 해석하면서 더욱 강조했던 것이다.

(2)《법화경》의 사상

《법화경》에는 초기 및 부파불교 사상은 물론 대승의 공 사상 등 다양한 사상이 포괄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면의 제한상 《숫따니빠따》와의 비교 작업에 의의가 큰 핵심 사상들에 대해서만 논의하기로 한다.

가. 제법실상(諸法實相)

《법화경》 방편품에 의하면,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매우 깊고 한량이 없어, 그 지혜의 문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그리하여 일체 성문이나 벽지불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처럼 부처님이 성취한 가장 희유하고 난해한 진리가 바로 ‘제법실상’이다. 이것은 오직 부처님들만이 깨달아 알 수 있는 진리이다. 제법실상은 ‘제법의 실상’ 또는 ‘제법은 실상이다’의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여기서 실상의 구체적 내용이 바로 ‘10여시(如是)’이다.

10여시는 이러한 모양[如是相], 이러한 성질[如是性], 이러한 잠재력[如是力], 이러한 기능과 작용[如是作], 이러한 직접적 원인[如是因], 이러한 간접적 원인[如是緣], 이러한 결과[如是果], 이러한 과보[如是報], 이러한 상부터 보까지가 모두 궁극적으로 평등함[如是本末究竟等]이다.

제법실상론은 모든 사물과 존재를 단순히 피상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물과 존재[諸法]를 중도(中道), 진공(眞空), 묘유(妙有)의 관점에서 유기적이고 역동적으로 파악한다. 천태종에서 공(空)·가(假)·중(中) 삼제가 원융하다는 ‘삼제원융’ 사상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훗날 천태지의(天台智顗)는 이 십여시를 기초로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세계관을 확립하게 된다.

어쨌든 제법실상의 진리는 제법을 삼제원융의 관점에서 그대로 인정하고 수긍함으로써 현실 긍정에 바탕한 적극적인 대승적 실천의 동력이 된다.

나.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

우리는 이미 제2장에서 부파불교도와 대승인들의 심각한 대립상을 ‘일천제’라는 개념을 통해 살펴보았다. 대승인들은 기존의 부파불교인을 소승이라고 폄하한다. 소승에는 성문승과 연각승이 포함되며 이 둘을 통칭하여 ‘이승(二乘)’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대승은 보살승이라 이름하며 후일 현수(賢首)와 천태(天台) 등의 일승가(一乘家)에서는 대승을 권대승(權大乘)과 실대승(實大乘)으로 나누고 보살승을 권대승, 일불승(一佛乘)을 실대승으로 구분한다. 그리하여 일승가에서는 《법화경》 〈비유품〉에 나오는 삼거화택(三車火宅)의 비유에서 양거(羊車)는 성문승, 녹거(鹿車)는 연각승, 우거(牛車)는 권대승, 대백우거(大白牛車)는 일불승에 각각 배대한다. 요컨대 ‘회삼귀일’이란, 붓다가 우치한 중생들을 위해 방편으로 삼승을 열어 보이지만 결국은 그것들을 회합시켜 일승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일승은 불승 또는 일불승이라고도 하는바, 일승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붓다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일체 중생을 부처가 되게 하는 오직 하나의 진실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삼승은 방편, 일승은 진실이다. 소승과 대승의 갈등이 심각한 시대 상황에서 《법화경》은 성립하였다. 《법화경》은 방편 사상을 매개로 하여 일승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그 갈등을 해결하려 한 것이다. 따라서 ‘회삼귀일’ 사상의 본질은 융화와 화해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다. 수기(授記) 사상

수기란 붓다가 보살, 연각, 성문을 비롯한 여러 중생에게 미래 어느 땐가 반드시 성불할 것임을 예언[記別]하는 것이다. 수기 사상은 특히 《법화경》에서 매우 비중 있게 설해지고 있다. 제6 수기품(授記品) 제7 화성유품(化城喩品) 제8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 제9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 등에 수기에 관한 가르침이 집중적으로 설해지고 있다. 수기 사상은 ‘일불승’에 대한 믿음을 깊고 굳건히 하며 ‘성불’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고취시키는 교설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법화경》에서는 여성에게도 수기가 베풀어진다. 석존은 이모인 마하파자파티 비구니에게는 장차 ‘일체중생희견여래’가 될 것이라 수기하고, 라훌라의 어머니인 야소다라 비구니에게는 ‘구족천만광상여래’가 될 것이라 수기한다. 나아가 세존을 살해하려고까지 했던 제바달다에게도 “한량없는 겁을 지나 반드시 성불하리니 그 이름은 천왕여래·응공…… 천인사·불세존이리라.”고 수기한다. 이것은 대승의 평등 및 자비의 이념을 웅변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4. 빠알리어 경전과 대승경전의 사상적 차이

위에서 《숫따니빠따》와 《법화경》을 중심으로 살핀 것처럼 빠알리어경전과 대승경전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분명한 차이점도 보인다.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불타관의 차이, 그리고 출가와 재가를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일 것이다.

빠알리어 경전은 대체적으로 부처님을 생신불(生身佛), 즉 부모로부터 태어난 역사적 인간으로 바라보는 입장에 서 있고, 대승경전은 일반적으로 법신·보신·화신의 삼신불(三身佛)을 설하면서도 법신(法身)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자재신(自在神)을 인정하지 않고 ‘진리 그 자체[Dharma]’를 중시하는 불교사상의 특성에서 연유한 것임을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그 차이는 빠알리어 경전은 석가세존의 구체적인 생애와 직접적인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는 데 반해, 대승경전은 붓다 입멸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성립하여 석존과의 시간적 간격이 컸던 사실에 기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출가와 재가 문제에 대해서는, 빠알리어 경전은 출가 지향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대승경전은 출가와 재가를 크게 문제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테라와다불교 국가에서 스님은 반드시 독신이지만, 대승불교 국가에서는 결혼을 허용하기도 한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미즈노 코겐(水野弘元)은 일찍이 상좌부적(上座部的) 아비달마불교와 초기 대승불교의 특징적 차이를 다음 여섯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첫째, 전자는 아라한을 목적으로 하는 성문사상[聲聞乘]↔후자는 성불을 목적으로 하는 보살사상[菩薩乘].

둘째, 전자는 업보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타율주의[業報思想]↔후자는 성불의 원행(願行)을 위해 스스로 악취(惡趣)에 나아가는 자율주의[願行思想].

셋째, 전자는 자기 한 사람의 완성을 위해 수양하고 노력하는 자리주의[小乘]↔후자는 일체중생을 구제하고 사회 전체를 정화 향상시키는 이타주의[大乘].

넷째, 전자는 성전(聖典)의 언구에 얽매이고 사물에 구애 집착하는 유(有)의 태도[有思想]↔후자는 모든 행동은 반야바라밀의 공무소득(空無所得)의 태도[空思想].

다섯째, 전자는 이론적·학문적 경향이 짙고 그 이론에는 실천과 관계없는 희론이 적지 않음[이론적]↔이론과 학문보다도 실천 신앙을 중시[실천적].

여섯째, 전자는 출가적, 전문적이면서도 소승적·세속적인 낮은 입장[전문화, 출가불교]↔재가적(在家的), 대중적이지만 그 경지는 제일의적(第一義的)인 높은 입장[일반화, 재가불교].

위의 분석 비교는 대체적으로 무리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점이 있다. 그것은 아비달마불교와 초기 근본불교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접하고 있는 초기경전에는 아비달마불교적 입장이 상당 부분 반영 또는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초기경전 속에서 아비달마불교와 초기 근본불교를 정확히 가려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의 주의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일례로, 아라한이 개인적인 자리(自利)만을 추구한다는 주장은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주장이 아비달마불교 시대의 아라한에 한정된 것이라면 몰라도 부처님 당시의 아라한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부처님 당시 석존의 제자인 아라한들은 그들 자신만의 깨달음을 추구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비구들이여, 이제 길을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두 사람이 함께 가지 마라.”라는 붓다의 유명한 ‘전법선언’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전법선언’을 실천하였고, 그리하여 불교는 새로운 종교로서 당시 인도 사회에 확산될 수 있었다. 요컨대 석존 당시의 아라한들은 자리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이타행까지도 추구했던 것이다.

불교 승가는 결코 사회와 결별한 은둔자들의 집단이 아니었다. 월폴라 라훌라의 주장에 따르면 상가는 자신의 정신적·지적 발전뿐만 아니라 또한 타인에 대한 봉사에 일생을 기꺼이 바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탁발에 의한 생활 방식 때문에라도 그들은 은둔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마쓰다니 후미오는 그의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에서 근본불교와 대승불교를 다음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전자는 상구보리(上求菩提)라는 의미에서 개인의 도(道)이고 후자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의미에서 대중의 도이다.

둘째, 전자는 법(法)을 논함에 있어 분석적 방법을 중시하고 후자는 직관적 방법을 중시한다.

셋째, 전자는 의식의 측면을 강조하고 후자는 무의식의 측면을 강조한다.

넷째, 전자는 아라한지향적이고 후자는 보살지향적이다.

다섯째, 전자는 이성(理性)을 중시하고 후자는 감성(感性)을 중시한다.

이에 대해 상세히 논의할 여유는 없다. 다만 여기에 ‘열반’의 문제에 대해 간략히 부연하고자 한다.

열반은 불교의 최고선이자 궁극적 목표이다. 따라서 열반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불교의 방향과 성격도 달라지게 된다. 근본불교는 대체적으로 ‘회신멸지(灰身滅智)’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을 궁극적 이상으로 삼는 경향이 있고, 대승불교는 법상종(法相宗)에서 말하는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최고선으로 삼는다. 무주처열반은 무여열반이 자칫 ‘허원적멸(虛遠寂滅)’에 빠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창안된 개념이다. 무주처열반은 현법열반(현재열반, diṭṭha-dhamma-nibbāna)과 유여열반(有餘涅槃)의 개념을 바탕으로, 더욱 역동적이고 대승적인 개념의 열반으로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5.맺음말

테라와다불교는 방대한 빠알리어 경전에 그 사상적 기초를 두고 있고, 대승불교는 방대한 대승경전에 그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다. 《숫따니빠따》는 그 빠알리어 경전 중의 한 작은 경전에 불과하고, 《법화경》은 수많은 대승경전 중의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숫따니빠따》는 테라와다불교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고 《법화경》은 그 어떤 대승경전보다도 대승의 이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 두 경전을 선택하여 그 내용을 살피고 몇 가지 특징적인 차이점을 비교해 보았다. 하지만 이 두 경전은 모두 ‘불교경전’이기에 근본적인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그 공통분모는 깨달음, 업과 윤회, 해탈과 열반, 지혜와 자비 등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통분모가 있기에 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의 융화 또는 접목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는 갈등과 대립을 겪기도 하였지만, 불교의 근본정신 및 시대정신에 비추어 볼 때 이 두 가지 불교 전통은 어떤 방식으로든 공존하게 될 것이고 또한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의 세계는 ‘글로벌’ 시대이고 ‘다양성’의 시대이다. 교통과 통신의 첨단화로 세계 각국의 교류는 더욱 활발해지고, 직·간접적인 다양한 문화의 이해와 체험으로 사람들은 서로 친숙해지고 있다. 한마디로 ‘지구촌’의 시대요 ‘인간 가족’의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는 자연스럽게 만나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테라와다불교와 한국의 대승불교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테라와다불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주지주의적이고 자력적 구제를 추구하는 열반 지향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붓다와 불교 상가에 대해 보시하고 공양함으로써 현세와 내세의 공덕을 쌓으려는 공덕 지향적 측면이다. 한국불교에도 간화선 수행과 같은 자력적 불교의 흐름과 각종의 불공과 기도를 통한 제불보살의 가피를 추구하는 기복적인 흐름이 병존한다.

이러한 기복적 특색은 테라와다불교와 한국불교를 쉽게 어울리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출가수행자의 생활 방식 등에는 적지 않은 간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스님들은 이제 탁발에 의해 생활하지 않으며, 탁발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탁발은 아직 살아 있는 전통이다. 현재 한국의 테라와다불교 교단에서는 스님들이 직접 거리로 탁발하러 나서는 방식이 아닌, 신도들이 사찰로 공양물을 가지고 가서 스님들께 공양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가 더욱 확산되고 일반화된다면 스님들이 직접 탁발하러 거리로 나설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한국의 생활 환경 특성상 언젠가는 스님들이 직접 공양을 마련해야 할지도 모른다. 문화는 하루아침에 인위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문화는 상당한 시간을 두고 생성되고 변화하기 때문에 탁발 문제는 열린 마음으로 좀 더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흔히 뗏목에 비유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된다. 이것은 가르침 자체가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불교적 가르침의 유연성으로 인하여, 전통적 테라와다불교와 한국 대승불교의 만남은 변증법적 진전을 이루어 새로운 차원의 불교, 이를테면 신승(新乘, Navayāna) 또는 신대승의 불교를 만들어 나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테라와다불교가 개인적 수행만을 강조하거나 한국불교가 대승이라는 미명하에 개인적 기복만을 추구한다면, 불교는 결국 사회와 역사로부터 소외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오늘날 아시아 및 구미 여러 나라에서 새로운 흐름을 형성해 가고 있는 인간불교, 참여불교의 흐름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

박경준 /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박사학위 취득. 논문으로 〈불교적 관점에서 본 자연〉 〈노동소외 극복을 위한 불교적 접근〉 〈불교사상으로 본 사회적 실천〉 〈생산과 소비에 대한 불교의 기본 입장〉 등이 있다. 역·저서로 《민중불교의 탐구》(공저) 《원시불교 사상론》 《불교사회경제학》 등이 있다. 본지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