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잡아함경의 식에 대한 연구

수선님 2019. 9. 22. 12:39

雜阿含經에 나타난 識에 관한 硏究


姜 明 嬉(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寶性論의 如來藏思想硏究」,「阿含經에 나타난 識思想 硏究」



차례



Ⅰ. 序 論

Ⅱ. 五蘊의 識 1. 일반적 五蘊說 2. 五蘊의 相續

Ⅲ. 了別作用의 識

Ⅳ. 緣起와 識 1. 識의 相續 2. 緣起와 業

Ⅴ. 結 論






Ⅰ. 序 論



識의 의미는 初期經典에서부터 大乘經典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핵심적 사상을 담으며 발전해 왔다. 사전상 識이라 하면 梵語로 vijñāna, 巴利語로 viññāṇa, 西藏語로 rnam-par-śes-pa를 번역한 것으로 了別을 뜻한다.1) 그러나 사전상 識의 의미와는 달리 初期經典으로부터 阿毘達磨佛敎, 대승의 瑜伽行派의 唯識思想에 이르기까지 識이란 불교용어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실제로 初期經典에서 나타나는 識의 의미는 경전성립의 新․古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붓다의 교설내용도 그때그때 교화대상의 근기에 따라 달리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本考에서 다루려는 ꡔ雜阿含ꡕ을 보더라도 원시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가 하면 간혹 발전된 교리도 담고 있다. 한 예를 들면 붓다 당시의 교설뿐만 아니라 滅後의 제자들의 교설도 담고 있으며, 심지어는 아쇼카왕의 전기까지 다루고 있어 후대에 전개된 내용이 많이 첨가되어 있다. 그래서 本考에서는 문헌학적 고찰은 피하기로 하고 識에 관련된 부분을 전체적 체계로써 조망하면서 사상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初期經典으로 대표되는 ꡔ阿含經ꡕ이나 팔리경전을 조망해 볼 때, 識이란 용어가 매우 다양하게 쓰임을 알 수 있다. 初期經典에서는 識(vijñāna)이란 일반적으로 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이 그 각각의 대상인 色․聲․香․味․觸․法과 만날 때 발생하는 일종의 정신현상으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멸을 계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識의 논리를 때로는 한 生에서 다른 生으로 轉移할 수 있는 生命原理로 보기도 하고 生死의 문제와 결부시켜 再生과 受胎의 결정적 요소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또한 初期經典에서는 객관을 인식하는 六識을 설하면서 동시에 識 자체를 실재적 존재를 일으키는 근본요인으로 상정하기도 하였다. 특히 十二緣起를 다룬 대부분의 경전에서는 識을 名色과의 相依相關에 의해서 일어나는 緣起生으로 說하면서도, 간혹 그 體性을 인정하여 실재적 생명체를 낳은 擔持者의 기능으로 說하고 있다.

初期經典에서 다룬 전반적 識의 의미도 대체로 그러하지만 ꡔ雜阿含ꡕ으로 국한하여도 識의 의미를 크게 개관하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色․受․想․行․識의 五蘊 가운데 識이다. 이때의 識은 受․想․行과 함께 물질로 대표되는 色과 상대하여 정신작용의 전체를 담당한다. 그러므로 識은 정신작용(心所)과 그 작용의 주체(心)로 볼 수 있다. 또한 ꡔ雜阿含ꡕ에는 六識의 識과 緣起의 識支는 거의 같은 내용으로 다루고 있으나, 일부 經文에서는 緣起支의 識은 識蘊과 六識까지 포함하고 있다. 둘째, 여섯 개의 감각기관(六根)이 여섯 개의 대상(六境)에 대해 인식하는 六識이다. 즉 眼 등의 根을 所依로 하여 色 등의 境을 了別하는 眼 등의 諸識이다. 이 六識의 작용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十二緣起의 識支와 五蘊의 識과 매우 밀접한 교학체계를 이루고 있다. 셋째, 十二因緣의 識이다. 緣起支의 ‘行에 緣하여 識이 있다’고 할 때의 識支는 인식판단의 의식작용으로서의 識과 인식 판단의 주체로서의 식이 있다. 前者는 六識의 前五識, 즉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에 해당하고 後者는 意識에 해당한다. ꡔ雜阿含ꡕ에서는 識支의 내용을 거의 六識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識支는 잠재의식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六識의 요별작용보다는 폭넓은 내용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識支가 모든 과거의 業力을 담는 輪廻의 주체로서 상정되고 교학의 근간으로서는 六識과 識蘊이 포함되는 것이다. 그 밖에도 六界의 識과 四食의 識에도 나타나지만 모두 十二緣起의 識支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서 本考에서는 ꡔ雜阿含ꡕ에서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는 識의 사상적 의미를 획일적 구조로써 조망하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즉 五蘊과 六識과 十二緣起의 식의 상호간의 관계를 밝혀 ꡔ雜阿含ꡕ에서 다루는 識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둘째, 붓다 당시 外敎에서 설하는 실재론적 아트만과 불교의 無我說과의 관계에서 識理論이 어떤 교량적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셋째, 阿毘達磨佛敎를 걸쳐 대승불교의 瑜伽行派에서는 十二緣起의 識支를 輪廻의 주체로 보고 있는데, 그 맹아를 근본교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상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텍스트로는 4부 ꡔ阿含經ꡕ을 근간으로 하고

상위하는 점이나 비교해야 할 부분에서는 팔리경전을 참고로 하기도 한다.







II. 五蘊의 識



1. 일반적 五蘊說



일반적인 五蘊(pañca skandhāh)의 개념을 간단히 언급하면 色(rūpa)은 물질로서의 육체이고, 受(vedanā)는 苦․樂 등의 감수작용, 想(sañña)은 개념표상의 取象作用 또는 心象(mental image)이며, 行(sāṅkhāra)은 의지작용 및 그밖의 형성작용이다. 다음으로 識(viññāna)은 의식판단의 의식작용을 의미한다. 初期經典에서는 우리의 心身이 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러한 五蘊의 의미가 점차 확대되어 가면서 우리의 심신뿐만 아니라 환경 전체를 포괄하여 內外의 물질계와 정신계 일체를 포함하게 된다. 종합하면 色蘊은 所有의 色法의 모임을 지칭하고, 受蘊은 苦․樂․捨 및 眼觸에서 생겨나는 여러가지 受를, 想蘊은 眼觸 등에서 생겨나는 여러가지 想을, 行蘊은 色․受․想 및 識을 제외한 나머지 일체의 有爲法을, 識蘊은 眼識 등의 諸識의 각각의 모임을 지칭한다.

이러한 五蘊에 대해 ꡔ雜阿含ꡕ에서는 五蘊의 부정을 통하여 현세의 고통을 벗어나서 解脫할 수 있다고 보았다. ꡔ雜阿含ꡕ 1권, 23경에서 붓다는 아들 羅睺羅에게 五蘊의 괴로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羅睺羅여, 비구가 만약 이 識身과 밖의 경계의 一切相에 대하여 我․我所見․我慢․煩惱의 매임이 없으면 이러한 비구는 愛欲을 끊었다고 한다.2)

붓다는 識身과 밖의 경계의 모든 것에 대하여 내가 있다는 개념, 나의 잘못된 인식, 我慢心, 번뇌를 끊으면 무시이래 공존하는 愛欲을 끊을 수 있다고 보았다. 經文은 더 나아가서 五蘊을 앎으로써 涅槃에 이를 수 있다고까지 하였다. 여기서 識身은 識蘊을 의미하므로 五蘊說은 六識과 연결된다. ꡔ雜阿含ꡕ 2권, 29경에서는 종자를 뿌리종자․줄기종자․마디종자․자연히 떨어진 종자․열매종자로 나열하고 五蘊의 모습에 비유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지 종자는 비유하면 取陰과 識이며, 地界는 비유하면 識이 머무르는 네 곳이며, 水界는 비유하면 貪喜이다. 四取陰이 서로 攀緣하여 識이 머무르나니 어떤 것이 넷인가? 色 안에 識이 머물러 識을 攀緣하고, 貪喜로써 윤택하게 하고 生長하고 增廣한다. 受․想․行 중에 識이 머물러 受․想․行을 攀緣하고 貪喜로써 윤택하게 하고, 生長하며 增廣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識은 그것들 안에서 오거나 가고, 머무르고 지나가며, 生長하고 增廣한다. 비구들이여, 만일 受․想․行․識을 떠나서 識이 오고 가고 머물고 생긴다면, 그것은 다만 말만 있을 뿐이요, 물어보아도 알 수 없고 더욱 의심만 생기게 할 뿐이다. 왜냐하면 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3)

色 안에도 識이 머물고 다시 色을 攀緣하여 갖가지 형상을 창출하고 있다고 보았다. ꡔ雜阿含ꡕ 전반에 걸쳐 五蘊을 설한 經文은 대개 五蘊의 苦․無常․無我를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인데, 위 經文은 識蘊을 보다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受․想․行․識 모두에 識이 머물고 있다’고 하는 내용은 識의 取象作用의 개념보다는 더 포괄적인 心의 개념을 담고 있다. 대승불교 중에서 특히 瑜伽行派에서는 이러한 識을 阿賴耶識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第六識이 五取蘊을 대상으로 하는 구체적 작용이 ꡔ雜阿含ꡕ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ꡔ雜阿含ꡕ 39경의 내용은 40경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되고 있다.

비구들이여, 四取陰을 攀緣하여 識이 머문다. 어떤 것이 四인가. 色에 집착하여 識이 머물고 受․想․行에 집착하여 識이 머문다.4)

위 經文은 色․受․想․行의 四取陰에 識이 머문다고 하였다. 이때 五取陰은 五受陰이라고도 하고 번뇌에서 생기고 혹은 번뇌를 生하게 하는 有漏의 五蘊을 말한다. 蘊은 有漏․無漏에 통하고 取蘊은 오직 有漏에만 있는 것이므로 이때에 四取陰을 攀緣하여 머무르는 識은, 결국 번뇌를 동반한 마음의 작용이다. 그러나 ꡔ雜阿含ꡕ에서는 五取蘊 중에 실제로 ‘나’가 없다는 無我說이 중요하게 설해지고 있다. ꡔ雜阿含ꡕ 3권에 五蘊無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色은 無我요, 이 色은 무너지는 것이요, 受․想․行․識도 無我요, 이 色은 있는 것이 아니며, 受․想․行․識도 있는 것이 아니다. 이 色은 무너지는 것이요, 受․想․行․識도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我가 아니며 我所도 아니다. 我․我所는 있는 것이 아니며 이와같이 해탈하는 자는 곧 五下分結을 끊는다.5)

이것을 통해 볼 때, 五蘊은 모두 무너지는 것이므로 我와 我所가 아닌 것이다. 육체라고 하는 것은 몇 개의 물직적인 요소들의 모임이고,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기관들과 그것에 해당하는 대상들간의 접촉에서 발생되는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6) 이러한 물질과 정신의 관계에 대하여 ꡔ雜阿含ꡕ 2권, 41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어떻게 識을 여실하게 아는가? 이른바 六識身이니 眼․耳․鼻․舌․身․識身이다. 이를 識이라 하니 이와같이 識을 여실히 안다. 어떻게 識의 모임을 여실히 아는가? 名色의 모임이니 이와같이 識의 모임을 여실하게 안다.7)

經文은 識의 모임을 물질과 정신의 결합을 의미하는 名色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識의 내용은 無明→行→識→名色으로 이어지는 緣起支를 상정하고 있다. 결국 識蘊이 六識이며 六識의 모임을 名色이라 본 것이다. ꡔ雜阿含ꡕ은 구조적으로 교학의 획일적 체계를 갖고 있지 않지만, 사상면에서는 五蘊의 교학체계가 緣起의 교학체계로 연결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하에서 大乘瑜伽行派에서는 識支를 모든 行을 담는 담지자의 기능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識蘊이 緣起에 연결되듯이 ꡔ雜阿含ꡕ 11권, 276경에서는 六識이 緣起支에 연결됨을 보이고 있다. 또한 六根이 六境을 접해서 일어나는 識의 無常함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고 있다.

비유하면 기름으로 인해 심지로 인해 등불이 밝혀진다. 그러나 저 기름은 無常하며, 심지 또한 無常하며, 불 또한 無常하며, 그릇(등잔) 또한 無常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기름도 없고, 심지도 없으며, 불도 없고, 그릇(등잔)도 없지만, 의지하게 되어 일어나는 등불은 항상 머물고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은 옳은 말을 하는 것인가?8)

여기서 ‘등불은 항상 머물고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은 붓다 당시 인도정통파 사상의 근간을 이룬 有我理論者를 지칭한 것이다. 初期佛敎에서 붓다는 ‘존재하는 것은 오직 五蘊이다. 오직 色 내지 識만이 존재하고 그 속에 自我(ātman)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無我觀을 제1원칙으로 삼았다. 붓다는 一切法에서 회통하고 있는 唯識의 논리를 내면적으로 채택하면서도, 표면적으로 五蘊의 無我性과 無常性을 근본으로 하는 인도 정통파의 고정불변하는 영혼이나 힌두이즘의 自我(ātman), 쟈이나의 生命原理로서의 지바(jīva) 등을 철저히 부정하였다.




2. 五蘊의 相續




앞 절에서는 ꡔ雜阿含ꡕ에 나타나는 五蘊의 識思想에 대해 살펴보았다. 초기의 붓다 교설은 五蘊의 苦․無常․無我로 일관한다. 그러나 점차 緣起說과 六識說과 접목시키기 위해 六根說과 결합하면서, 인간의 心과 身을 결합시키는 經文이 나타나고 있다.

眼이 色을 緣하여 眼識이 생기며, 세 가지가 화합하면 觸이 생겨나며, 觸은 모두 受․想․思를 낸다. 이 四無色陰과 안색 등의 이와 같은 법을 사람이라 하는 것이다.9)

위 경문은 六根과 六識이 결합한 法을 인간이라 밝히고 있다. 이때의 識은 識別作用을 나타낸다. 五蘊을 설한 오래된 경전에서는 주로 五蘊이 無我임을 강조하지만, 점차로 五蘊 중의 識의 내용이 강조되면서 다른 敎學과도 연결되고 있다. 識別作用(vijñāna)이 인간존재의 근본적인 主宰的 원리로 상정된 사상적 기원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고대 우파니샤드에서는 절대자를 純粹認識(識, vijñāna)이라 규정하고 그것을 브라만과 동일시하였다. 인도철학 전반을 통해 識이라는 단어를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대부분은 純粹認識으로서 구극의 원리인 브라만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았다. 붓다는 항상 전 교리를 통해 사상의 핵심으로서 無我와 緣起를 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初期經典에서는 구극의 원리로의 識(viññāna=vijñāna)의 의미가 나타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邊際없이 모든 곳에서 빛나는 識이 있고, 그것은 地의 地性으로서도 知覺되지 않는 것이다. 水의 水性으로서도 지각되지 않는 것이다.10)

‘모든 곳에서 빛나는 識’이라는 一句를 통해 識의 내용이 우주에 편만한 佛性과 같은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初期經典의 대부분의 經文에서는 識을 구체적인 경험적 현상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 보고, 感官에 의한 경험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더구나 識을 본질로 하는 아트만을 상정하는 그 자체를 형이상학적 문제로 취급하였다. 그래서 일부학자들은 불교의 無我說과 윤회사상은 서로 모순된다고 반박하기도 하였다. 붓다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無記說로 대치하였지만 無記說 자체가 識의 논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초기의 五蘊說에서는 識을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色․受․想․行과 대등한 위치로 고찰하였지만 점차 身․心의 統一存在意識이라는 문제에 접해서는 역시 識의 기능을 간과할 수 없었다. 意識의 통일을 성립시키는 원리로서 識을 우선으로 놓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識 자체가 다른 제구성요소와 달리 내부에 존재하고 있어 지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五蘊이 無我임을 계속 설하면서도 五蘊의 다른 相續도 설하는 것이다.業報는 있지만 지은 사람도 없으니 이 五陰이 멸하고 나면 다른 五陰이 相續한다.11)

受者로서의 自我는 없지만 五蘊의 인과적 相續은 인정하고 있다. 이때 인과적 相續은 고정불변하는 아트만적 요소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非有非無) 계속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五蘊의 전환논리는 후대 阿毘達磨佛敎에서 발전되었다. 阿毘達磨의 상속이론을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예를 들자면 化地部에서는 蘊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一刹那로 生滅하는 一念蘊과 죽을 때까지 항상 隋轉하는 一期生蘊과 金剛喩定에 이를 때까지 항상 隋轉하는 窮生四蘊을 설명하여 蘊의 상속을 인정하고 있다. 化地部에서는 初期佛敎에 나타나는 六識의 내용을 生死相續의 본질로 삼기에는 그 교리상 미흡함이 있었으므로, 항상 전환하며 끊이지 않는 識을 窮生四蘊이라 한 것이다. 또한 같은 내용으로 大衆部에서는 根本識을, 說假部에서는 有分識을 상정하였다.

初期經典의 대표적인 교설 중 六根說은 六師外道가 주장한 존재본질의 불변성에 대한 인과적 과정설을 규정한 데 반해 五蘊說은 간혹 相續이란 단어를 쓰면서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에서 더욱 나아가 相續性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六根說을 인식설로 발전시킨 六識說은 五蘊의 相續性의 주체에 대해 교량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六識說은 五蘊의 相續性을 말하기 위해 心身을 결합하는 관점에서 조직하였다고 볼 수 있다. 色․受․想․行․識이 六識說을 예상하지 않게 되면 六師外道의 地․水․火․風․命․我․苦․樂과 똑같이 원소적 실재가 되기 때문이다. 色․受․想․行․識은 根境→識→觸→受․想․思의 인과관계 중에 있는 것이며 六師外道의 원소적 실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12)

그렇다면 오온의 상속성과 관련하여 ꡔ雜阿含ꡕ 1권, 22경에서 五蘊을 過去․未來․現在, 內․外로 해석하는 부분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과거나, 미래나, 현재나, 안의 것이나, 밖의 것이나, 거친 것이나, 미세한 것이나, 좋은 것이나, 추한 것이나, 먼 것이거나, 가까운 것이거나 모든 존재하는 色은 저것 모두 다 無常임을 觀하여 알아라. 無常을 관하고 나면 色에 대한 사랑은 곧 제거되며 色에 대한 사랑이 제거되고 나면 마음이 잘 解脫하게 된다. 受․想․行․識도 …… 이와같이 관하라.13)

五蘊이 다르면서도 하나임을 알지 못하면 바로 물질과 정신의 집착이 생기므로 過去․現在․未來로 五蘊은 相續되는 것이다. 그러나 五蘊의 시간과 공간의 다양성을 알아 觀하게 되면 마음은 오온의 상속에서 解脫하게 된다. 五蘊에 대한 사랑을 제거한다는 것은 다른 五蘊을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輪廻하는 것은 三世內外의 五蘊이며 解脫하는 것도 三世內外의 五蘊이다. 輪廻의 주체와 解脫의 주체는 결국 같은 것이다. 五蘊說은 輪廻에서의 解脫을 목적으로 하는 교리이기 때문에 상속논리와 함께 無我業을 설하는 것이다. 그래서 ꡔ雜阿含ꡕ 13권, 335경에서는 “비구들이여, 眼이 생길 때에는 오는 곳이 없고 멸할 때에도 가는 곳이 없다. 이와같이 眼은 진실이 아니면서 생기고, 생겼다가는 멸해버리니 業報는 있지만 作者는 없다”14)라고 설하는 것이다. 三世內外의 五蘊의 동일성은 常住이며, 解脫者는 이 동일성을 증득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初期經典에서는 열반을 不壞法이라 설한다.15) 또한 이 동일성은 일체 존재의 동일성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가이 헤아릴 수 없는 寂滅涅槃이라 한 것이다.16) 五蘊의 동일성에 대해 ꡔ阿含經ꡕ 5권, 109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說하고 있다.

어리석어 (진리를) 듣지 못한 凡夫는 色이 我이며 我와 다르다고 보며, 我에 色이 있고, 色에 我가 있다고 본다. 受․想․行․識은 我이며 我와 다르다고 보며, 我에 識이 있고, 識에 我가 존재한다고 본다.

무엇을 色이 我라고 보는 것인가? …… 地는 我이며 我는 地이며 我와 地는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니다. … 무엇을 色이 我가 아니라고 보는 것인가. …… 저기에서 受가 我라고 보면 受가 我라고 보고 나서 …… 色을 我所라고 본다. 受․想․行․識을 我라고 본다.17)

범부는 色이 我이며 我와 다르다고 보고 我에 色이 있고 色에 我가 있다고 집착한다. 진리는 ‘色은 我도 아니며 我와 다르지도 않은 것’이라고 보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ꡔ雜阿含ꡕ에서는 五蘊의 三世內外의 동일성을 나타내는 데까지 기술하지만 후대의 經典에서는 五蘊의 識을 거의 心王에 상당하는 지위로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즉 “네 가지 元素에서 이루어지고, 부모에서 생기고, 쌀과 미음의 집적이며 無常하며 벌레로 무너지고 磨損되며 破損되고 損滅로 정해지는 이 몸”을 도성에 비유한다. 또한 ‘여섯 가지 내적인 근거’를 그 도성의 여섯 가지 문에 비유하고 識을 도성의 주인으로 비유하고 있다.18) 그러나 初期經典에서 붓다는 生死輪廻를 말하고 있으면서도 識이 心王으로 설정되는 경향들을 배척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色을 여의고 受를 여의고 想을 여의고 (주체로서의) 識의 來를 상정한다’라고 說하면 이러한 도리는 있을 수 없다.19)

당시 사상계에서는 점차 識이 왕래하고 生死를 거치고 증장한다고 보기 때문에輪廻의 주체로 보는 경향이 강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서구의 불교학자들은 初期經典에서 意라고도 心이라고도 불리는 識을 아트만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까지 했던 것이다.ꡔ雜阿含ꡕ 3권, 73경에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고 있다.

나는 이제 무거운 짐과 짐을 가짐과, 짐을 버림과, 짐꾼에 대해 말하리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 어떤 것이 무거운 짐인가. 이른바 五蘊이다. …… 어떤 것이 짐꾼인가. 이른바 士夫가 그것이니, 이와같이 이름하며, 이와같이 태어나고, 이와 같은 家門이며, 이와같이 먹고, 이와같이 苦樂을 받고, 이와같이 長壽하고, 이와같이 오래 머물고, 이와같이 壽命에 제한이 있다.20)

이 비유를 통해서 五蘊과 구별되는 어떤 존재가 인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五蘊이 짐이라면 士夫는 짐꾼으로서 五蘊을 짊어지고 있는 존재이다. 士夫는 짐 때문에 이름을 받고, 삶과 가문의 종성을 받고, 나름대로의 음식을 취하며,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고, 수명과 수명의 제한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짐꾼은 아트만 또는 지바(jīva)와 같은 명백한 실체처럼 생각되는 自我의 개념이며 이것이 한 生에서 다른 生으로 삶을 받는 것이다. 이때 自我의 개념은 푸드갈라(pudgala) 즉 補特伽羅의 의미이다. 푸드갈라는 영혼(ātman)을 가진 我, 푸루샤(purṣa), 지바(jīva), 사트바(sattva)의 의미였으나, 중국에서는 음사하여 補特伽羅라 하기도 하고 人 또는 士夫라 意譯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위 經文에서 보이는 士夫는 푸드갈라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하여 부파 중 pudgalavādin 또는 persamalistes(人格的 個體主義者)는 푸드갈라를 輪廻의 주체로 보았고 犢者部(vātsīputriya)와 正量部(sammatīya)는 이러한 사상을 계승하였다. 특히 pudgalavādin은 부파불교시대를 통해서 푸드갈라를 인정하지 않는 부파들만큼 번창했었다.21)




III. 了別作用의 識



初期經典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識의 용례는 五蘊의 識과 함께 眼 등의 根을 소의로 하여 色 등의 境을 了別하는 眼識 등 六識이다. 여섯 개의 감각기관은 여섯 개의 대상 즉, 境을 상대한다. 眼根은 色境(rūpa)에, 耳根은 聲境(sadda)에, 鼻根은 香境(gandha)에, 舌根은 味境(rasa)에, 身根은 觸境(phoṭṭabba)에, 意根은 法境(dharma)에 대해 각각의 인식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는데, 이 때의 인식작용을 六識이라고 한다. ꡔ雜阿含ꡕ에서는 根이 境을 연하여 생기는 識을 설명할 때, 주로 觸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ꡔ雜阿含ꡕ 8권, 213경에서는 根․境․識의 결합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眼이 色을 緣하여 眼識이 생기고 三事가 和合하여 觸이 생기며 觸은 苦․樂․不苦不樂의 受를 緣한다. 이러한 受에 대한 集․滅․味․患의 여읨을 이와같이 알고 나면 貪欲身觸을 심지 않고 瞋恚身觸을 심지 않고 戒取身觸을 심지 않고 我見身觸을 심지 않고 모든 惡의 不善法을 심지 않는다.22)

根․境이 만나 識이 생기고 根․境․識 三事가 和合하여 觸이 생기는데, 이때 觸은 三受를 緣한다. 經文에서는 三受의 集․滅․味․患을 여의면 貪․瞋․癡 등의 모든 不善法을 심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識→觸→受의 관계를 앎으로써 괴로움의 세계를 멸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眼根 등이 色境 등을 緣으로 하여 識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根을 상대로 하여 識이 새로이 발생한다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지만, 실은 원래 구비된 心의 작용이 활발하게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23) 그리하여 이렇게 각성된 視覺을 지배하는 心, 즉 眼識이 다시 능동적 활동을 시작하여 根으로 하여금 오로지 境에 집중하는 데 이르도록 할 때, 비로소 구체적 감각이 생기는 것이다. 구체적 감각에 대해 苦․樂․不苦․不樂의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受이고, 이렇게 받아들여진 감정을 知覺表象의 형태로 구성한 것이 想이며, 이것을 취하고 싶다거나 버리고 싶다는 의지로 작용하는 것이 思이다. 구체적으로 六識은 根과 境이 화합한 결과로서 생겨난 인식이지만 이 인식은 구체적 인식까지 미치지는 못한다. 구체적 인식은 識이 다시 境에 집중하여 心과 같은 실질적 활동을 할 때 가능하다. 이러한 識→觸→受의 관계는 ꡔ雜阿含ꡕ 8권의 여러 경에서 나타나고 있다. 222경에서는 一切知法과 一切分別法을 三事和合識→觸→受로 설명하고 223경, 224경, 225경에서도 이러한 내용은 계속 이어진다. 226경에서는 識→觸→受를 계탁하지 않으면 涅槃을 깨닫고 다시는 後有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229경에서는 識→觸→受의 세속적인 도리를 有漏法이라 하고 이러한 세속적 도리를 벗어난 것을 無漏法이라 설명하고 있다. 또한 ꡔ雜阿含ꡕ 9권, 232경에서는 識→觸→受는 모두 空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眼은 空이요, 항상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 法도 空이요, 我所도 空이다. 왜냐하면 그 성질이 원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色, 眼識, 眼觸의 因緣으로 생기는 苦․樂․不苦․不樂의 受 또한 空이다.24)

세속적 도리로 분별되는 一切의 모든 것이 空이므로 六入處 또한 空이고 色 등등과 受로 이어지는 것도 또한 空인 것이다. ꡔ雜阿含ꡕ 9권, 337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眼識이 色에 대해 사랑스럽게 생각하고 染著하면, 사랑스럽게 생각하고 染著하는 것으로 인하여 항상 識을 의지하여 저것에 결박되기 때문에, 또한 그것을 취하기 때문에, 法을 보아 般涅槃하지 못하게 된다. 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의 法에 있어서도 또한 이와 같다.25)

이 經文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識은 空이지만 空의 도리를 모르고 眼識이 色에 대해 애착하기 때문에 般涅槃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항상 識을 의지하여 저것에 결박되기 때문에’라는 一句에서 識의 기능을 了別作用으로만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후대의 瑜伽行派에서는 초기불교의 識을 세 가지 心․意․識으로 나누어 폭넓게 識의 작용을 설명하였던 것이다. 瑜伽行派에서는 心을 阿賴耶識이라 명명하고 육체를 유지하는 기능, 種子를 유지하는 기능, 생명을 형성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볼 때, 위의 經文에 나타나는 識은 물질이나 육체의 생리적 기능을 담당하는 六識보다는 근원적인 識의 작용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ꡔ雜阿含ꡕ 9권, 238경에서는 “眼識이 생기면 일체는 眼과 色이 因緣이 되기 때문이다”26)라고 한 것이다. 즉 三事和合이 생겨야만 일체는 존재기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중에서 第六 意根과 法境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法境은 一切法을 총괄하는 것이다. 특히 六根이 六境의 관계에는 일체의 인식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十二處는 이미 六識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도 十二處를 떠나서는 달리 일체는 없다고 선언한 바 있다.

구담이시여, 소위 일체란 무엇을 일체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고하시길 ‘일체는 十二入處를 말하는 것으로 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 이를 일체라 하는 것이다.’ …… 내가 지금 버리고 따로 다른 일체를 세우면 그것은 단지 언설일 뿐 물어봐야 모르고 의혹만 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27)

十二處說은 일반적으로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며 일체만유를 포섭하는 분류법이라 규정되고 있으나 이러한 十二處說이 체계화되려면 바로 六識이 예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六根․六境의 十二處에 六識을 더한 소위 十八界가 궁극적으로 一切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十八界가 후대 阿毘達磨에서 가장 핵심적인 분류체계가 된 것이다.

자세히 설명하면 각각의 감각기관으로서의 根은 외부대상의 境을 접할 때 識이란 인식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각각의 根은 각각의 境을 了別하게 되는데, 이때 六識이 了別하는 내용은 다소 다르다. 앞의 五根이 外界에 대한 관문으로서 각각 일정한 자극을 내부로 전달할 때, 意根이 이에 교묘히 응함으로써 내부에 특유의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前五識이고, 다시 意根이 인식 주관으로서의 일반적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곧 第六 意識이라는 뜻이다.28) 識의 기능은 보아서 분별하다(眼識), 들어서 분별하다(耳識), 냄새 맡아 분별하다(鼻識), 맛보아 분별하다(舌識) 등의 작용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는 등의 본질은 동일하지 않다. 예를 들어 眼根은 色境만을 대상으로 하고 聲境은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또 鼻根은 香境만을 대상으로 삼고 色境에는 통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意根은 五根 전체에 들어오는 인식을 관리하는 기관이다.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 할 수 있는 阿含의 經文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五根은 行을 달리하고, 경계를 달리하고, 각각 스스로의 경계를 받는다. 무엇이 저 모든 경계를 받는 것인가. 무엇이 저것의 의지가 되는가. …… 意가 저것의 모든 경계를 받는다.29)

意는 內心作用 중 외계의 인식․지각에 관계 있는 것을 독립적으로 맡고 있으므로 五根처럼 물질의 성질을 지니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意가 法을 인식할 때 구체적으로 三事가 반드시 합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아서 분별할 수 있다(眼識)’고 하는 것은 이미 三事의 합일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분별할 수 있는 관계, 즉 眼色․眼識 사이의 합일적 관계가 觸이다.30)

다음으로 인식작용으로서의 識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經文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현자여, 內眼處가 무너지면 外色은 곧 광명을 비추지 못하게 되니, 곧 생각이 없이 眼識은 생겨날 수 없다.

현자여, 內眼處가 무너지지 않으면 外色은 곧 광명을 비추게 되니, 곧 생각을 일으키는 眼識이 생겨난다. ……

현자여, 內眼處와 色과 眼識이 外色을 알면 이는 色陰에 속하는 것이다.31)

이에 상응하는 팔리경전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내부에 眼이 파괴되지 않더라도, 외부의 색이 그 범위 內(āpātha, 視野)에 오지 않아 그것에 응하는 화합(tajjosamannāhāro)이 없다면 그것에 응하는 識分이 나타나는 일은 없다. 내부에 眼이 파괴되는 일이 없고 외부의 色이 그 범위 내에 오더라도 그것에 응하는 화합이 없다면, 그것에 응하는 識分이 드러나는 일은 없다. 그렇지만 내부의 眼이 파괴되는 일이 없고, 외부의 色이 그 범위 내에 오며 그것에 응하는 화합이 있을 때, 여기서 비로소 그것에 응하는 識分이 생긴다.32)

한역 ꡔ阿含經ꡕ과 남전 팔리경의 내용은 다소 차이가 나지만 그 중요 내용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 취의를 정리하면 첫째로는 根이 완전할 것, 둘째로는 根에 대한 境이 있을 것, 셋째로는 根과 境 사이에 화합이 있을 것이라는 세 조건에 의해 비로소 그것에 상당하는 인식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識分이라는 것은 먼저 화합하고 나서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결국 三事和合에 의한 觸을 의미한다. 그리고 識分의 작용은 피동적인 작용이 아니라 능동적인 작용이라 주체적 입장에서 다시 대상을 파악하고 이해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識分의 작용은 心과 心所의 활동으로 볼 수 있다. 이때 心은 五蘊 중 識의 기능을 하고 心所는 五蘊 중 受․想․行의 기능을 한다.

이 외에도 初期經典에서는 四識說과 함께 六界說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六界說은 그다지 빈번하게 논의되지 않았으나, 識界는 신체적 요소와 상대되는 정신적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ꡔ中阿含ꡕ 47권, 「多界經」 제10에 “아난아, 이 十八界를 보면 진리를 안다” 또한 “아난아, 六界을 보면 여실한 진리를 보니 地界․水界․火界․風界․空界․識界이니라.”33)라고 하여 如實知의 대상으로서 六界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다. 또한 ꡔ中阿含ꡕ 3권, 「度經」 제3에서는 구체적으로 六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무엇을 六界法이라 하는가. 내가 스스로 알고 느끼는 것을 너를 위해 설하리라. 이른바 地․水․火․風․空․識界를 六界法이라 한다. 六界가 합하기 때문에 다시 모태에 태어나고 六界를 인유하므로 다시 六處가 있으며 六處에 인유하므로 다시 更樂이 있고 更樂을 인유하기에 다시 覺이 있다.

비구여, 만약 覺이 있으면 다시 苦의 진리를 알고 苦의 習(集)을 알며 苦의 滅을 알고 苦․滅․道의 진리를 안다.34)

六界 중에 地界․水界․火界․風界는 四大로서 물질을 이루는 요소이고, 識界는 정신을 이루는 요소이다. 그러므로 六界가 합하면 모태 중에 다시 날 수가 있다고 하는 내용은 識의 相續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六界의 화합으로 생기는 六界→六處→更樂→覺의 관계는 緣起의 또 하나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四識說이 있으나 四識說은 대부분 緣起支를 설명하는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겠다.




IV. 緣起와 識




1. 識의 相續



初期經典에서는 四聖諦 이외에도 苦의 원인을 설명하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기 위하여, 苦의 최종적인 원인을 無知, 즉 無明에서 찾는 또 하나의 원리를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緣起說인데, 붓다의 일생 45년 간의 설법은 모두 緣起說의 응용이라 할 만큼 緣起와 관련된 설법이 敎學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緣起法을 설명하기 위해서 初期經典들은 종종 다음과 같은 간결한 一句로 그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35)

이 간결한 문장을 ‘緣起의 公式’이라 하는데, 모든 緣起의 형식은 이를 응용한 것에 불과하다. 初期經典에서 緣起를 설한 것 중 十二緣起가 가장 정형적인 형태이므로 阿毘達磨佛敎에 의해서 가장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阿毘達磨佛敎에서는 十二緣起의 각 支分 중에 識支를 교학의 핵심고리로 보았다.

緣起說은 가장 간단한 형태인 六支緣起로부터 九支緣起, 十支緣起, 十二支緣起가 있다. 緣起說은 설법을 듣는 자의 지혜나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설해졌기 때문에 가장 정형적인 十二支라도 일정한 형식은 없다. 예를 들면, 불제자 가운데 지혜가 가장 뛰어났다고 하는 舍利弗은 불도에 입문하기 전에 다른 불제자로부터 “因緣하여 생겨나는 諸法, 그러한 諸法의 因緣을 如來는 말씀하신다. 또 그러한 滅이 있다고 大沙門은 말씀하신다”고 하는 간단한 말을 듣고서 緣起의 이치를 깨달아 불교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36) 이처럼 緣起는 수승한 근기의 제자로부터 일반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시설된 교리이다.

十二支緣起의 각 내용을 설명하는 ꡔ阿含經ꡕ의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무엇을 無明이라 하는가? 소위 苦․習․盡․道를 모르는 것이니 이를 無明이라 한다.

무엇을 行이라 하는가? …… 소위 身行․口行․意行이다. ……

무엇을 識이라 하는가? 소위 六識이니 …… 소위 眼․耳․鼻․舌․身․意의 識이다.

무엇을 名이라 하는가? 痛․想․念․更樂․四惟이다.……

무엇을 色이라 하는가? 四大 및 四大의 몸으로 된 色(四大所造色)이다.……

무엇을 內六入(六入處)이라 하는가? …… 眼․耳․鼻․舌․身․意(感官)이다.……

무엇을 更樂(觸)이라 하는가? …… 眼․耳․鼻․舌․身․意의 更樂(觸)이다. ……

무엇을 通(受)이라 하는가? …… 樂痛․苦痛․不苦不樂痛이다.

무엇을 愛라 하는가? …… 欲愛․有愛․無有愛이다.

무엇을 受라 하는가? …… 欲受․見受․戒受․我受이다.

무엇을 有라 하는가? …… 欲有․色有․無色有이다.

무엇을 生이라 하는가? …… 동등하게 갖추어 출가하고, 갖가지 존재를 받아 五蘊을 얻고, 여러 入(感官)을 받는 것이다.

무엇을 老死라 하는가? …… 중생들의 몸에서 이가 빠지고, 머리털이 세며, 기력이 쇠하고, 감관이 무르녹으며, 수명이 날로 줄어 본래의 정신이 없는 것이다.37)

여기서 識이라 설명하는 내용은 六識을 말하고 있어 十二緣起가 六識說을 포괄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또한 有支의 내용이 三界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 II장에서 五蘊을 三世內外로 설명한 것과 같이 존재의 차별상이 나타나고 있다.

ꡔ雜阿含ꡕ 12권, 289경에서는 연기의 각지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無明-과거․현재․미래에 대한 무지, 內外와 業報에 대한 무지, 佛․法․僧에 대 한 무지, 苦․集․滅․道에 대한 무지.

行-身行․口行․意行.

識-眼識身․耳識身․鼻識身․舌識身․身識身․意識身.

名色-名→四無色陰(受陰․想陰․行陰․識陰). 色→四大, 四大所造色.

六入處-眼入處․耳入處․鼻入處․舌入處․身入處․意入處.

觸-眼觸身․耳觸身․鼻觸身․舌觸身․身觸身․意觸身.

受-苦․樂․不苦不樂.

愛-欲愛․色愛․無色愛.

取-欲取․見取․戒取․我取.

有-欲有․色有․無色有.

生-이런저런 중생이 여러 가지 몸을 받아 태어나고 초월, 화합, 출생하여 蘊을 얻 고 界를 얻고 入處를 얻고 命根을 얻는다.

老死-老→머리털이 희어져 정수리가 드러나고 피부에 주름이 생기고.…… 死→ 이런저런 중생이 여러 가지로 변화하고 몸이 무너져 목숨을 다한다.38)

ꡔ雜阿含ꡕ에 나타나는 緣起說 중에서 緣起의 各支의 내용이 가장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行으로 인해 발생되는 識을 六識身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六識身은 六識을 의미하는데 五蘊의 識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名色支에서 名을 설명하는 가운데 識陰(識蘊)을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名色支가 五蘊의 識을 포함하고 六識은 五蘊의 識과 인연관계가 된다. 또한 ꡔ雜阿含ꡕ은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識이 감각기능 이상의 내용까지 담고 있다고 이미 앞 장에서 밝힌 바 있다. 瑜伽行派에서는 識을 心의 阿賴耶識, 意의 末那識, 識의 六識으로 세분하고 있는데, ꡔ雜阿含ꡕ 11권, 289경에서는 이러한 心意識의 용어가 나타나고 있다.

어리석어 (진리를) 듣지 못한 범부들은 四大로 된 몸에 대하여 싫어하고 근심하여 욕심을 떠나 등져버리지만 識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사대로 된 몸에서는 增減과 取捨가 있음을 보지만 心意識에 대해서는 어리석고 듣지 못한 범부들은 능히 싫어하여 욕심을 떠나 解脫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어리석고 듣지 못한 범부들은 차라리 四大로 된 몸에 대해서는 我와 我所에 얽매일지언정 識에 대해서는 我와 我所에 대해서 얽매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 心意識은 밤낮으로 때를 다투어 須臾 지간에도 轉變하고 다른 것으로 생겨나서 다른 것으로 멸하기 때문이다.39)

몸에 대해서는 빨리 벗어날 수 있지만 識의 집착에 대해서 생기는 我와 我所에 대해서는 벗어나기 힘들다고 경고하고 있다. 위 經文에서는 心意識의 용어가 나올 뿐만 아니라 刹那生滅하는 心의 작용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다시 말해 心은 육체 속에 존재하여도 육체는 이 心에 의해 유지된다. 이때의 心은 有身根을 집수하는 阿賴耶識으로 볼 수 있는데 阿賴耶識은 모든 業力을 보관하여 다음 몸을 받는 주체의 역할을 한다. ꡔ雜阿含ꡕ 294경에서는 緣起를 설명하면서 識을 통해 다시 몸을 받는다는 윤회사상을 설하고 있다.

어리석어 (진리를) 듣지 못한 범부들은 無明에 덮이고 愛緣에 매여 이 識을 얻는다. 몸 안에는 이 識이 있고, 몸 밖에는 名色이 있다. 이 두 가지 인연으로 觸이 생기고.… 저 어리석고 듣지 못한 범부들은 無明에 덮히고 愛緣에 매여 이 識身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無明을 끊지 못하고 愛緣을 다하지 못하여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 다시 몸을 받는다. 다시 몸을 받기 때문에 生․老․病․死․憂․悲․惱․苦에서 解脫하지 못한다.40)

‘몸 안에는 이 識이 있고, 몸 밖에는 名色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안에 있는 識과 밖에 있는 名色이 다르다고 본 것이다. 후대 阿毘達磨佛敎에서는 모태 등에서 바로 발생할 때의 一刹那位의 五蘊을 識이라 하고, 結生한 후 六處가 생기기 전의 중간의 모든 位를 총괄하여 名色으로 보았다.41) 즉 結生의 처음 刹那位의 五蘊을 識支에 포함시키고, 그 다음 刹那 이후 色心이 비로소 생긴다고 본 것이다. 이때 眼 등의 四色根이 일어나지 않는 태내의 羯羅藍 등의 五位를 名色支에 포함시킨 것이다. 결국 名色은 五蘊을 말한 것에 지나지 않고 몸 안의 識은 結生識을 의미하는 것이다. 瑜伽行派에서는 結生識을 阿賴耶識의 기능으로 보고 있는데 阿賴耶識이 解脫하지 못해서 윤회도상에 있다가 태내에 자리잡은 그 刹那識을 結生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緣起支分 중 識支의 기능은 輪廻의 주체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팔리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비구여, 옛날 내가 正覺을 이루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나에게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세간은 실로 憂苦로 가득하다. 태어나고 늙고 滅하며 또한 다시 再生한다. 더욱이 아직 이 老死의 苦를 여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이 老死의 苦를 여의는 방법을 알 수 있을까?’ 그때 나에게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다. ‘대저 무엇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老死가 있고, 무엇을 緣으로 하여 老死가 있을까?’ 그때 바른 思念에 의하여, 지혜에 의하여 正解가 나에게 일어났다. 生이 있다고, 有가 있고, 取가 있고, 愛가 있고, 受가 있고, 觸이 있고, 六入이 있고, 名色이 있다고, 내지는 무엇을 緣으로 하여 名色이 있을까. 그때 바른 思念에 의하여 나에게 지혜의 正解가 일어났다. 실로 識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名色이 있고, 識을 緣으로 하여 名色이 있다. 그때 나에게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識이 있고, 무엇을 緣으로 하여 識이 있을까? 그때 바른 思念에 의하여 나에게 지혜에 의한 正解가 일어났다. 실로 名色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識이 있고, 名色을 緣으로 하여 識이 있다고, 그때 나에게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識은 이것으로써 還歸해야 하는 것이며, 名色을 넘어 더 나아가지 않는다. 단지 이것만으로 말미암아 중생은 늙고, 태어나고, 죽고, 再生하게 된다. 42)

팔리의 상응부경전에 나타난 緣起說을 ꡔ雜阿含ꡕ의 經文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法이 緣하기 때문에 名色이 있는가. 곧 바른 思惟가 여실하게 끝없이 생겨났으니 識이 있기 때문에 名色이 있다. 識을 緣하기 때문에 名色이 있고 我가 있다. 이렇게 思惟하자 識에 이르러 귀환하고 저것(名色)을 넘어갈 수 없다.43)

팔리경전과 한역 ꡔ雜阿含ꡕ 모두 十二緣起 중에서 識과 名色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 識支를 중심고리로 다시 귀환한다는 것은 識으로부터 중생의 我의 성품이 건립된다는 것이다. 팔리문의 ‘이 識은 이것으로써 歸還해야 하는 것이며 名色을 넘어 더 나아가지 않는다(paccudāvattati kho idam viññānam nāmarūpamhā nāparam gacahati)’라고 하는 것은 識과 名色의 상호관계를 최종으로 삼아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현상계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識과 名色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은 이것을 기초로 하여 심리활동의 여러 가지 모습과 존재의 모습이 다양하게 표출되기 때문이다. 또한 識과 名色의 관계는 주관과 객관의 관계로서, 주관이 있으므로 객관이 있고, 객관이 있음으로 주관이 있는 것이어서 양자의 결합에 의해서 世間이 있다고 하면, 認識論上으로는 일단 완벽하기 때문이다.44) 결국 존재의 모습이 三界․四生․六道로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계를 볼 때 현상계의 원리를 설하는 十二緣起說 중 識支가 부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十二緣起를 三世兩重 因果說로 보는 태생학적 緣起說과도 매우 관련이 깊다. 그것에 의하면, 十二緣起 가운데 無明과 行 두 가지는 과거세에 속하는 것이며, 이 과거세의 無明과 行이 원인이 되어 현재세에 識․名色․六處․觸․受라고 하는 다섯 항목이 그 결과로서 나타난다고 본다. 이 설에서는 識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의 의식 주체가 모태에 최초로 깃든 結生識(수태된 태아의 최초 찰나의 의식)으로 본다. 識體라는 것은 業을 지고서 과거세로부터 현세, 미래세로 부단히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세로부터 현세로 옮겨 온 최초의 識體를 結生識(prtisandhi-viññāna)이라고 한 것이다. ꡔ長阿含ꡕ 13권, 「大緣方便經」에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名色은 識을 말미암아 識을 緣하고 名色이 있다. 識이 모태에 들어가지 않으면 名色도 없고, 識이 없으면 名色도 없다.45)

이와 같은 설명은 아함경전 중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팔리경전 가운데에서는 識으로 인해 나의 존재가 肉化된다고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地․水․火․風의 四大로 이루어졌으며, 부모에 의하여 태어났고, 쌀죽과 미음을 먹고 컸으며, 붕괴될 수 있으며, 파괴되도록 되어 있으며, 낡고, 분해되어, (드디어) 썩는 것, 그것이 나의 육신이로다. 그 육신과 함께 하나가 되고 연결되어 있는 것, 그것이 나의 識이다.46)

이를 통해 볼 때 識은 了別을 뛰어넘어 실재적 존재를 구성하는 정신적 기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緣起說의 識支는 名色과의 상의상관의 관계이면서도 구체적으로는 모든 우리의 業을 담는 그릇일 수밖에 없다.




2. 緣起와 業




初期經典에서는 끊임없이 五蘊과 六識의 無我․無常을 강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五蘊의 재생적 의미와 함께 相續을 설하고 특히 業의 힘에 의해 無始無終의 相續을 설하고 있다. 이러한 相續은 業力에 의해 유지되는데 無始以來 相續을 보통 輪廻(saṃsāra)라고 한다. 그러나 業에 의한 輪廻說은 불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離繫派에서는 業을 불멸의 영혼에 기초한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대해 붓다는 業을 인간의 의지적 작용, 報를 객체의 필연적 반응이란 因果의 개념으로 대치하였다. 조금 더 자세히 언급하면 인도의 여러 학파에서는 적어도 業說․輪廻說을 채용하는 한 반드시 常住하는 我體를 인정하는데 반해, 붓다는 생명이 因緣所生으로 가립된 無我임을 주장하면서 我의 집착과 그 집착에서 오는 無知의 소산으로 業論과 輪廻論을 인정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서구의 많은 학자들은 無我를 주장하는 불교교설과 業에 의한 輪廻說은 서로 모순된다고 보았다. 불교학계의 대가인 리스 데이비스(Rhys Davids)는 이에 관해 “단지 유행하는 의견이 불교의 근본 교리 중에 부가됐을 뿐이다. 더욱이 이 근본 교리와는 전연, 조금도 논리적으로 융합하는 바가 없이”47)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은 無我라는 개념을 너무 기계론적으로 이해하여 생긴 것이다. 불교의 無我는 생명활동을 하는 我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끊임없이 활동하는 生死輪廻를 벗어나기 위해 我의 당체를 부정해야 가능하므로 전면적으로 無我說을 내세운 것이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활동한다. 이것은 命(jīva) 또는 壽(āyus)라고 할 수 있다. 육체적 측면으로 보면 煖氣(usmā), 出入息이라 할 수 있고 심리적 측면으로 보면 識인 것이다. 따라서 경전에서는 “壽煖識이 있다면 곧 壽命이 있다”48)라고 한다. 또한 “壽는 暖에 의지하고 暖에 의지하여 머문다”49)라고 하여 壽와 暖의 절대적 의존관계를 기술하고 있다. 또한 “壽로 인해 暖이 있으며 暖으로 인해 壽가 있다. 만약 壽가 없으면 暖이 없고, 暖이 없으면 壽가 없으니 마치 기름과 심지로 인해 등불이 밝혀지는 것과 같다. ……”50) 라고 하여 壽와 暖의 관계를 기름과 심지에 인연한 등불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ꡔ長阿含ꡕ, 「弊宿經」에서는 “壽가 있고 識이 있고 息出入이 있으면 능히 굽히고 피며, 보고 말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51)

「弊宿經」에 의하면 수명이 있고 識이 있어야 숨을 마시고 내쉬고, 움직이고 보고 말하는 활동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이 없어지는 것을 죽음이라 하는데 初期經典에서는 이를 壽盡(āyusaṇkhaya)이라 하고 壽盡은 業이 사라져야 비로소 소멸한다고 한다. 業과 壽의 관계는 ꡔ本事經ꡕ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두 법이 항상 서로 따른다. 말하자면 業과 壽이다. 業이 있으면 壽 역시 있다. 業이 없으면 壽 또한 없다. 壽業이 아직 사라지지 않으면 有情은 마침내 죽지 않는다. 壽業이 만약 모두 滅하면 含識(有情)이 죽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52)

여기서 業이라고 하는 것은 一期를 보존할 만큼의 業力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힘에 의해 壽命이 있고 이 힘이 소멸할 때 壽命도 또한 滅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존재에 業力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業力은 살고자 하는 욕구와 의지를 동반함으로써 생명의 존재로 형성화된다. 그런데 욕구와 의지로 비롯된 모든 행위가 생명의 존재로 형성화되기까지 어디에 저장되고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가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業의 擔持者로서의 識이 輪廻의 주체로 부각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業의 결과인 생명은 어떤 모습으로 실현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불교에서는 四生으로 설명하고 있다. 四生이란 有情이 태어나는 모습으로 胎生․卵生․濕生․化生의 네 가지가 있다. 그중 인간으로 대표되는 태생은 남녀 화합으로 비롯된다. 經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데에 父․母 및 乾闥婆(香陰)의 셋이 화합하여 잉태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乾闥婆란 용어는 원래 리그베다 시대부터 神格으로 지칭되었던 것으로, 붓다는 태어나려 하는 생명체의 이름으로 빌려 온 것이다. ꡔ中阿含ꡕ 54권, 「嗏帝經」에 三事和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또한 三事가 모여 모태에 들어가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곳에 모여 있고, 어머니의 精이 차서 감내하여 香陰에 도달해야 비로소 이 三事가 모여 모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53)

ꡔ嗏帝經ꡕ에서 말하는 香陰이 바로 識이라 하는 생명의 근본으로, 부모의 화합을 緣으로 하여 어머니의 胎에 들어가는 것이다. 태내에 들어가서는 五位54)를 거쳐 다시 태어나게 된다. 죽어서 태어나기까지의 전 과정을 후대의 阿毘達磨論師들은 生有․本有․死有․中有의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즉 生有는 인간이 태어나는 찰나를 말하고, 本有는 세상에 태어나 살아 있는 동안을 말하고, 死有는 죽는 순간을 뜻하며, 中有는 죽어서 내생에 다시 태어나는 순간까지의 기간을 뜻한다. 香陰은 四有 중의 中有에 해당한다. 후대의 阿毘達磨論師들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기까지 그 중간단계에 있는 識의 상태를 中有라 하고, 후생의 몸을 받을 때까지 과거에 지은 業力을 유지하며 활동한다고 보았다. 中有에 있는 識의 힘은 매우 대단하여 자신이 미래에 태어날 곳에 대해 그 業에 따라 스스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부모와 인연이 화합하면 識은 빛의 속도와 같이 빨리 와서 태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ꡔ正法念處經ꡕ 제18권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그 業力에 따라 짐승으로 태어나거나 地獄 또는 天 등에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 즉 業力의 차이에 따라 四生과 欲․色․無色界의 三界, 六道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결국 四生․三界․六道로 갈라지게 된 원인은 香陰으로 표현된 中有의 業力에 의해 좌우된다. 初期經典에서는 이러한 中有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五陰의 相續은 인정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四生․三界․六道의 문제는 生死輪廻하며 거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이에 대해 ꡔ淸淨道論ꡕ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業報는 있고 作者는 없다. 次陰(五蘊)이 멸하는 끝에 가서는 異陰(異蘊)이 相續한다.55)

業의 결과는 분명히 인정되고 있으나 業을 짓는 주체는 없다고 한다. 그 이유로서 五蘊이 멸하는 끝에 가서 다른 五蘊이 이를 相續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業報는 있고 作者는 없다는 것은 먼저 지은 業과 業의 相續者는 一期를 다하면 다른 蘊으로 相續함을 말하는 것이다. 次蘊이란 실질적으로 재생의 五蘊을 의미하지만 고정불변의 體가 아닌 변화적 계승을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一期의 五蘊이 인연을 다하면 다른 蘊, 즉 次蘊으로 相續하게 되는데 次蘊으로 相續하기 전에 생명이 멸하고 나서 다시 태어나기까지 中有의 상태를 初期經典에서는 乾闥婆, 또는 香陰이라 표현한 것이다. 붓다 당시의 有我論에 의하면 모든 것은 변화하더라도, 그 我體는 동일하고 상주한다고 보아 전생과 후생 사이에 자기의 동일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붓다는 그 중심 자체를 변화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당시 사상계와 대립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業의 행방과 결부되어 나타나곤 하였다. 붓다 당시 業의 문제는 有我論者에게는 큰 해결과제였다.

구담이시여, 스스로 짓고 스스로 느끼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고하시길, 나는 이것을 無記라고 설한다. 스스로 짓고 스스로 느끼는 것, 이것은 바로 無記이다.

구담이시여,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고하시길,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느끼는 이것도 無記이다.56)

붓다는 業을 짓고 그 報를 받는 주체에 대해서는 無記로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생명이 지속되는 모습,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業을 짓는 作者도 변화하고 業의 體性도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어서 緣起로 대변한 것이다. 결국 業을 짓는 주체와 받는 주체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서, 緣起의 계열로써 답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생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이어받지 않은 것도 아니다. 業의 體性은 그 과보를 낳지만 相續한 다음의 생명체는 전생의 것과는 이미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명에 휩싸여 번뇌를 계속 일으키는 업의 相續은 무시무종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붓다교설의 핵심은 ‘영혼이 있다, 없다’라고 논란하는 것보다는 일체 有爲의 모습에서 緣起를 관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의 바른 길, 즉 八正道를 행할 것을 강조한다.


Ⅴ. 結 論


ꡔ雜阿含ꡕ에 나타난 識思想을 크게 五蘊의 識, 了別作用의 識, 緣起의 識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ꡔ雜阿含ꡕ 중 古層에 해당하는 經典에서 붓다는 五蘊의 識을 無我理論에 접목시켜, 五蘊이 나(我)라고 하는 집착을 경계하려 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교학이 발달하면서, 識思想은 十二入處, 十二界와 연결되고, 특히 有我論者의 사상을 부정하면서도 五蘊의 相續을 언급하게 된다.


즉 五蘊의 識이 정신적 작용을 전반적으로 담고 있는 한, 내부에 존재하여 知覺되지 않는 요소를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識의 위치를 다른 蘊과는 달리 ‘色․受․想․行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고 특별한 의미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相續의 문제에도 접근하여 五蘊이 滅하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次蘊으로 相續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론은 붓다의 교설 중 대표적인 無我理論과 상반하고 있어 불교의 독자적 사상인지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붓다는 분명히 輪廻를 인정하고 있으므로 五蘊의 相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相續을 인정하더라도 五蘊의 體性을 고정불변한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緣起性으로 보았기 때문에, 無我를 모르고 緣起를 몰랐을 때 五蘊의 相續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阿毘達磨佛敎의 化地部에서는 窮生死蘊, 大乘部에서는 根本識으로 표현하고, 대승불교의 瑜伽行派에서는 阿賴耶識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識들은 我性의 無를 보았을 때 輪廻로부터 解脫하는 것이다.


ꡔ雜阿含ꡕ의 전반적 교학체계는 五蘊․十二處․十八界로 볼 수 있는데, 五蘊의 내용은 了別作用의 六識說과 緣起說로 연결된다. 識蘊을 설하면서 六識으로 설명하는 經文이 자주 등장하고, 간혹 緣起의 識支와도 연결시키고 있다. 결국 五蘊說이 발달하면서 六識說과 결합되는 것이다.


初期經典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識의 용례는 了別의 의미를 담고 있는 認識作用으로서의 六識이다. 그러나 이 六識의 의미는 처음에는 根이란 감각기관이 대(境)을 了別하는 정도로만 설명되지만 점차 識分을 형성하면서 心王과 心所의 기능까지 접근하고 있다. 붓다가 ‘일체는 十二入處이며 그 밖의 경계는 없다’고 선언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根․境의 결합으로 모든 法은 만들어지게 된다. 이 때 入處는 인식작용의 識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므로 ꡔ雜阿含ꡕ의 六識說은 識→觸→受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識은 了別作用의 역할만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지만, 根․境․識의 화합으로 생기게 되는 觸 다음의 受․想․行의 정신작용은 心의 기능이라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ꡔ雜阿含ꡕ에서 대승의 瑜伽行派에서 체계화시킨 心意識思想을 찾아볼 수 있었다. ꡔ雜阿含ꡕ 11권, 289경에서 心意識의 용어를 찾아볼 수 있었고 대승의 八識思想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了別作用의 六識은 바로 緣起의 識支와 연결됨을 발견할 수 있었다. 緣起說의 五蘊說과 六識說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초기교설의 핵심적 내용을 모두 포섭한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十二支緣起를 순환논법에 의한, 상대를 예상한 相依性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존재를 인정한 태생학적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서로 논란을 거듭하며 공전해 왔다. 그러나 붓다는 緣起의 각 支分의 相依相關도 설하고 過去․現在․未來에 걸친 業에 의한 결과도 시설하고 있기 때문에, 兩者를 모두 說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阿毘達磨佛敎의 三世兩重 因果說은 너무 태생학적 緣起說만 중시하고 緣起의 상의상관에 의한 空性은 간과하였다. 특히 태생학적 緣起說을 중시할 때, ꡔ雜阿含ꡕ에서 識支를 중심으로 귀환하는 논리를 발견하게 된다. 瑜伽行派에서는 業의 擔持者와 輪廻의 주체 문제를 識支에서 찾았다. 과연 붓다는 識支에서 그러한 의미를 시설했는지 ꡔ雜阿含ꡕ을 살펴본 결과 몇몇 경전에서 五蘊說에서와 같이 상속의 논리가 발견되었다. 붓다는 業의 作者를 부정하면서도 業報와 業力은 인정하였기 때문에 業을 담을 그릇은 부정하지 않았다. ꡔ雜阿含ꡕ의 몇몇 경전에서는 실질적으로 존재의 모습으로서 緣起法을 설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識支를 경계로 귀환한다’는 一句도 발견할 수 있었다. 결국 行의 支分에서 身․口․意의 三業은 識支에 저장되기 때문에 식지는 그 결과로서 귀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ꡔ雜阿含ꡕ의 緣起說은 다만 인간이 태어나는 과정을 밝힌 것에서 나아가, 識이 과거의 業力을 담아 內化해 내는 모습을 밝힌 것이라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ꡔ雜阿含ꡕ의 識의 의미를 종합해 볼 때, 五蘊의 識이나 了別의 識이나 緣起의 識은 모두 하나로 廻通되고 있다. 또한 後代佛敎의 心이라 표현되는 阿賴耶識의 기능을 五蘊說에서는 상속으로, 六識說에서는 識→觸의 관계 속에서, 연기설에서는 식지의 귀환논리로 원초적이기는 하지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識思想은 緣起와 결합되면서 더욱 체계화된다.


參 考 文 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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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譯 大正藏


ꡔ長阿含ꡕ 3권「大緣方便經」, 7권「弊宿經」, 16권「堅固經」


ꡔ中阿含ꡕ 47권「多界經」, 3권「度經」, 58권「大稀羅經」, 50권「嗏帝經」7권「象跡喩經」


ꡔ雜阿含ꡕ 3권 64경, 45권 1202경, 11권 276경, 13권 318경, 2권 34경, 13권 306경,


13권 335경, 1권 22경, 2권 51경, 32권 905경, 5권 109경, 3권 73경,


12권 287경, 14권 300경, 13권 319경.


ꡔ增一阿含ꡕ 27권 9경, 17권 25경, 4권 5경, 46권 5경.


ꡔ大毘波沙論ꡕ 24권.


ꡔ本事經ꡕ 5권.


팔리경전


ꡔDighanikayaꡕ, ꡔMajjhimanikayaꡕ, ꡔSamyuttanikayaꡕ, ꡔAnguttaranikayaꡕ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2348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