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견성(見性)
다음에는 견성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견성을 단경
(壇經)
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見性
若悟自性 亦不立菩提涅槃 亦不立解脱知見 無一法可得 方能建立万法 若解此意 亦名仏身
亦名菩提涅槃 亦名解脱知見 見性之立亦得 不立亦得 無滞無碍 応用随答 普見化身 不離自性
即得自在 神通遊戯三昧 是名見性 -壇經-
‘만일 자성(自性)을 깨달으면, 보리(菩提) 열반(涅槃)이란 것도 세울 수가 없고’ 모두가 하나의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 세계인데 보리고 열반이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한 해탈지견(解脱知見)이라고도 할 필요도 없고 어느 법이라고 특별히 내세울 필요도 없고 진실로 일체 만법을 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해석할 때에는, 바로 그것이 부처의 몸인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한 법(法)도 세울 수가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자리, 보리고 열반이고 해탈지견이고 또는 무슨 법이고 만법이고 이것이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거니 어느 것도 세울 것이 없는 이것을 우리가 이대로 해석할 때는 이것이 바로 부처의 몸이고, 부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보리고 열반이고 해탈지견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견성한 자리에는 어느 것도 가히 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조금도 막힘이 없고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하는 짓 모두가 다 걸림이 없이 여법히 행동하고 또한 누가 물으면 조금도 걸림없이 척척 진리에 맞게 대답하고 또한 두루 화신을 나투어 상대적인 몸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자성을 떠나지 않고, 즉득자재 신통유희 삼매(即得自在神通遊戯三昧)라’ 모두가 다 조금도 조작(造作)이 없는 이른바 임운등등 등등임운(任運騰騰 騰騰任運)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할 때 조작(造作)이란 말과 임운(任運)이라는 상대적인 말을 기억해 두면 편리합니다. 우리 중생이 애쓰고 하는 것을 조작이라하고, 깨달은 분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걸림이 없는 자리를 임운이라 합니다.
깨달은 분상에서는 그야말로 참, 임운등등 등등임운이라, 당당하지마는 조금도 막힘이 없고 누구한테 꿀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달마한테 꿀릴 필요도 없고 석가한테 꿀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증오(証悟)를 했다 하더라도 불성(佛性)만 깨달았을 뿐인 것이지 때 묻어 있는 다생겁래(多生劫来)의 습기까지는 다 못 녹였다는 그런 점은 또 우리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시명견성(是名見性)이라, 이것이 바로 견성이라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세울 것도 없고 고하, 시비도 없는 임운등등 등등임운으로 신통유희 삼매라, 이것이 참다운 견성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견성에도 견성한 그 자리, 근기 따라서 천차만별입니다. 그러기에 또 문제가 복잡합니다. 생각을 깊이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세존(世尊)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견성하실 때에 모든 것을 다 깨달은 구경각(究竟覚)을 그대로 성취를 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심심미묘(甚深微妙)해서 부처님 깨달음까지도 시비를 거는 분이 있습니다. ‘수하성도(樹下成道)하신 부처님 깨달음도 아직 완전무결한 것이 못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산에 있는 총림방중(叢林房中)에 다시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는 진귀조사(真帰祖師)한테 법을 물어서 비로소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학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골치가 아픈 문제입니다.
또 이런 학설이 지금까지도 우리 한국승가(韓国僧伽)d;서는 상당히 권위있게 흘러오고 있습니다. 지금 전거(典拠)로는 사굴산(闍堀山) 개조(開祖)인 범일(梵日 810-889) 대사가 이런 말씀을 했다고 선문보장록(禅門宝蔵録: 1293 高麗天頙著)에 나와 있습니다. 중국이나 또는 인도에는 없는 그런 학설이 한국 승가에서는 상당히 권위 있게 전수가 되었습니다. 특히 이조 말엽에 백파(白坡 1767-1852) 스님 같은 분은 이 학설을 굉장히 권위 있는 학설로 인용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 학설을 우리는 하나의 상징적인 것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중국에나 인도에서도 전거가 없는 것을 한국에서 비로소 발설했다는 것이 나쁜 쪽으로 비판이 안 되고 상징적으로 좋게 해석이 되겠지요.
아무튼, 깨달음도 여러 차이가 있습니다. 갑이란 사람 깨달음 또는 을이란 사람 깨달음이 물론, 평등무차별의 불성 자리는 똑같으나 얼마만치 습기를 많이 녹이고 깨달았던가의 차이입니다.
깨닫는 문제의 심천(深浅)은 역시, 가장 권위 있는 전거로는 화엄경의 십지(十地)론으로, 보살 초지부터서 2지 3ㆍ4지 10지에 올라가서 구경각 불지(佛地)에서 성불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깨닫는 것이 근기 따라서 보살 초지만 깨닫는 분도 있고 또는 2지를 깨닫는 분도 있고 또한 3ㆍ4지까지 깨닫는 분도 있고,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견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다 말았습니다만 이제는 견도(見道)라, 이것도 역시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견성, 견도는 어떻게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도 조사어록에는 조금 달리 나와 있다 하더라도, 뜻을 깊이깊이 본질적으로 해석을 하여야 합니다. 문자란 것이, 착(着)해버리면 큰 병이 되지만 착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술술 다 풀려가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임운자득(任運自得)이 되지 않겠습니까?
7.견도(見道)
見道
根本佛教에는 四善根의 最上位인 世第一法의 無問에 無漏의 慧를 得하여 聖諦를 現観함을 말함.
ㅡ解深密經, 智度論, 唯識論, 倶舎論等ㅡ
견도(見道)에 대해서는 해심밀경 또는 지도론, 유식론, 구사론 등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지도론은 용수(龍樹 Nagarjuna B.C. 2-3世紀) 보살 소조(所造)인 대지도론으로 대론(大論)이라고 하지요. 유식론, 구사론은 세친(世親 Vasubandhu 世紀頃)보살이 지으셨는데 이런 데서 견도에 대한 말씀이 여러 군데 나와 있습니다.
근본불교에서는 사선근(四善根)의 최상위를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고 합니다. 4선근에 대해서는 점차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만, 4선근은 우리 범부가 견도할 때까지 가는 과정을 구분해서 사가행(四加行) 또는 4선근이라 합니다. 이것도 역시 공부인들은 꼭 참고로 알아두어야 할 문제입니다. 4선근의 최상위는 세속적인 차원에서는 제일 높다는 법이기 때문에 세제일법이라고 합니다.
세제일법의 무간(無間)에, 세제일법과 견도자리 곧, 깨달은 자리하고 사이가 없는 그런 순간 찰나의 자리에 무루(無漏)의 혜(慧)를 득하여, 때 묻지 않은 지혜를 얻어서 성체(聖諦)를 현관(現観)함을 말합니다. 성체는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성체는 바로 여래, 도(道), 또는 열반, 다 같은 듯이 됩니다. 현관이란 그냥 이치로 ‘아 그렇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진여불성 곧 생명의 실상을 현전에서 보고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냥 이치로 느껴서, 물리(物理)를 알아서 ‘아 그렇구나’ 하고 의심 없이 아는 것은 해오(解悟)라고 하는 것이고, 성체를 현전에서 분명히 깨닫는 것은 현관(現観)이라 합니다.
곧 4선근의 가장 윗자리인 세제일법에서 그 찰나에 때 묻지 않은 지혜를 얻어서 성체를 현전에 깨닫는 것이 견도라고 근본불교에서는 말하는 것입니다.
見道...大乗에서는 見道를 菩薩初地로 하고 此地를 得함을 菩薩이 正性離生에 入한다고 한다. 能히 無漏智를 得하여 法界에 達하고 如来家에 生하며 一切万法이 一味平等한 心性임을 得함. 密教에서는 三妄執을 여의고 無漏의 淨菩提心이生하여 出世의 功德을 成就함을 말한다.
ㅡ大乗義章ㅡ
대승(大乗)에서는 견도(見道)를 화엄경의 십지(十地)에서 나온 보살 초지(初地)로 하고, 이 초지를 얻음을 보살이 정성리생(正性離生)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정성(正性)은 곧 우주의 본성으로 정성이나 성성(聖性)이나 같이 쓰입니다. 리생(離生)이란 이생(異生)인 범부를 떠난다는 말입니다. 우리 범부를 가리켜서 이생(異生)이라 합니다. 범부는 바로 못 보기 때문에 달리 본다는 말입니다. 깨달은 분이 볼 때는 여법(如法)히 달리 보지 않기 때문에 여설(如説)이라, 진리 그대로 말하고 모두가 하나의 진리, 평등무차별인데 우리 중생은 그렇게 못 보기 때문에 이생이라 합니다.
따라서, 견성하는 것이 바로 정성(正性) 곧 성인 성품을 얻음과 동시에 우리 범부의 이생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범부성(凡夫性)이 남아 있으면 참다운 견성이 못되겠지요.
이 자리는 능히 무루지(無漏智)를, 번뇌에 때 묻지 않은 지혜를 얻어서 법계(法界)에 달(達)하고, 법계라 하면 한계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천지 우주가 조금도 무차별인 세계입니다. 이런 법계에 달하고 여래가(如来家)에 생하며, 삼세제불의 경계에 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래(如来)라고 할 때에 우리 환경과 이른바 기세간(器世間)과 여래와 구분하여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만 그런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불법(仏法)에서는 환경도 바로 생명자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환경도 바로 부처님 자체입니다. 불법은 모두를 다 부처님 생명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일체가 부처님 생명 아님이 없는 불법(佛法)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래가에 생한다고 할 때는 환경 따로 있고 세계 따로 있고 부처님 따로 있는데, 부처님들 세계에 가서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인 것입니다. 천지 우주가 다 부처뿐이기에 그 부처의 경계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여래가에 생하여 일체 만법이 일미평등한, 오직 한 맛의 평등한 심성(心性)임을 득(得)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견도(見道)입니다.
밀교(密教)에서는 견도를 어떻게 말했는가 하면 ‘삼망집(三妄執)을 여의고 무루의 정보리심(正菩提心)이 생하여 출세(出世)의 공덕을 성취함’이라고 했습니다. 내나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에 따르는 집착을 여의고 때 묻지 않은 청정한 보리심을 생하여 출세의 공덕 즉 욕계ㆍ 색계ㆍ 무색계 삼계(三界)를 떠난 공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훑어본다 하더라도 견성하고 견도하고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경에 있는 견성자리와 해심밀경, 지도론 또는 유식론, 구사론에 나와 있는 견도라는 자리에서 얻는 성공덕이 차이가 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선(禅) 따로 있고 교(教) 따로 있다고 봐서는 안 됩니다. 천지우주가 하나의 불법입니다. 다만, 본체를 보다 더 역설하기 위해서, 행주좌와에 본체를 안 여의기 위해서 선(禅)이 있는 것이고 우리 중생들이 아직은 미혹되어 있기 때문에 상(相)도 해설하고 점차(漸次)도 말하는 데서 일반적인 경(経)의 의의가 있다 하더라도 견도를 말하지 않고 견성을 말하지 않으면은 불법이 안 됩니다.
또는 화엄경을 설하고 또는 법화경을 설하고 또는 지도론을 설하는 부처님과 조사들이 견성을 잘 몰랐겠습니까? 견성과 견도는, 우리가 문자(文字)에 집착하지 않는 한에서는, 조사법이 더 높고 불법은 아래라는 허튼 분별을 않는 경우에서는 똑같습니다.
아, 제 말씀이 너무나 딱딱해서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육서(六瑞)라, 여섯 가지로 상서로운 조짐을 보인 것입니다. 지동서(地動瑞)라, 천지가 육종(六種)으로 진동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부처님 경전 가운데 나온 이런 신비로운 말씀을 많이 하니까 더러는 별로 안 좋게 듣는 분도 계십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 불성(佛性) 가운데는 분명히 무량공덕(無量功徳)이 갖춰 있는 것인데, 제 스스로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나 제가 지금까지 얻은 것은 별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한탄하는 의미와 또는 한사코 꼭 부처님의 무량공덕과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다 얻어야 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불법의 위신력을 말할 뿐입니다.
아무튼 지동서라, 천지 우주가 6종으로 진동한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그냥 상징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사실로 저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화서(雨華瑞)라, 천상의 모든 천인들이 무량대법을 찬탄하는 의미에서 꽃비를 내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삼계(三界)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욕계가 있듯이 색계도 분명히 존재하고 무색계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더러는 불교를 믿는 분 또는 출가사문들 가운데서도 ‘색계나 무색계나 그런 것은 다 방편으로 내놓은 것이요, 모두가 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분명히 마음속에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현상적인 차원에서도 몽환포영(夢幻泡影)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본체(本体)는 공(空)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꿈같이 그림자 같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몸더러 꿈이요 허깨비같이 허망한 것이라고 할 때는 상당히 거부반응을 느낍니다. 그러나 산이나 내나 금이나 다이아몬드나 그런 것이 꿈이요 허깨비라고 말할 때는 자기 존재처럼 거부 반응을 별로 느끼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대상도 자기 주관도 모두가 다 본래에서 볼 때는 다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상적인 가상(仮相)이 없지는 않습니다. 연(縁)에 따르면 상(相)이 나오는 것이고, 가상이 나타나 있다 하더라도 상(相) 그대로 공중무상(空中無相)이라 상이 실상이 아니라 가상인 것입니다.
아무튼, 부처님께서 대법을 설하실 때는 분명히 천중들이 만다라화(曼陀羅華mandarava) 마하만다라화(摩詞曼陀羅華) 만수사화(曼殊沙華 manjusaka) 마하만수사화(摩詞曼殊華)라, 이것이 사종천화(四種天華)라 하여 법화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 찬란한 하늘 꽃을 뿌린다는 말입니다.
또 심희서(心喜瑞)라, 대중이 그런 상서를 보고 모두 환희 용약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지혜는 그냥 부처님만 알거나 또는 천안통(天眼通)을 통한 사람만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까지도 보고 알게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주위 환경을 변하게 하는 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회상(会上)에 모인 중생들이 천지가 6종으로 진동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장엄스런 것을 훤히 볼 대에 환희심이 안 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심희서(心喜瑞)입니다.
다음 방광서(放光瑞)라, 삼천대천 세계 곧 우주 전체가 비추는 광명을 낸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법화경을 설하실 때의 여섯 가지 상서 가운데 몇 가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럴 때에는 일반 대중들이 싫증을 내겠습니까, 또는 지루했겠습니까.
이렇게 딱딱한 원리의 말만 하면 참 따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강사(講師)도 아니고 강원 문전도 안 가본 사람인데 이렇게 부처님 경론을 말할 때는 굉장히 주제넘기도 하지요. 제가 한문, 원문을 풀이하는데 더러 오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후를 볼 때에 그 뜻이 그 뜻이니까 그런대로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8. 오(悟)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깨달음도 그냥 한 깨달음으로 일률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심천(深浅)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2지(二地)에 깨닫는 분, 3지에 깨닫는 분 등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법문을 한다 하더라도, 물론 원리 문제는 차이가 있을 수가 없겠습니다만, 약간의 그 뉘앙스(nuance)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오(悟)문제, 깨닫는 문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解悟...四善根位에서 如実知解를 頓悟함(似悟).......................................凡夫位
悟 見 道...見性.....................................................菩薩初歓喜地 聖
証悟 修 道...二 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地를 次第修証함
無学道...妙学............................................................................ 位
頓悟漸修 解悟後 証悟를 為한 漸修
証悟(見道) 後 成仏을 為한 漸修
저는 근본불교(根本仏教)와 대승불교(大乗仏教)를 다른 것으로 안 봅니다. 가사, 아함경(阿含経)도 그 당시 구사종(倶舎宗)이나 경량종(経量宗)이라 하는 종파로 굳어 버릴 때는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아함경 자체에서는 설사 말씀을 다 안했다 하더라도 분명히 대승적인 근본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더러는 소승법(小乗法)의 범주에 속하는 구사론도 말씀하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오(悟)는 심천으로 보아 해오(解悟)와 증오(証悟)로 말합니다. 해오(解悟)는 4선근위(四善根位)에서 깨닫는 깨달음인데 4선근은 주로 근본불교에 나와 있으나 대승불교에서도 언급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일반 선종(禅宗) 계통에서는 별로 언급을 않습니다.
그러나 제 입장은 선(禅)과 교(教)가 원래 둘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선시불심(禅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教是佛語)라, 선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과 마음이 둘일 수가 없듯이, 선과 교도 둘이 아니라고 보는 견지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근기 따라서 그때그때 수기응량(随器応量)이라, 깊고 옅은 차이는 있지 않겠습니까.
해오(解悟)는 사선근위(四善根位)에서 여실지해(如実知解)를 돈오(頓悟)함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지해(知解)는 반야 지혜(智慧)가 아니고 그냥 범부지견(凡夫知見)이라는 말인 셈입니다. 범부의 지견으로 해서 돈오함이라, 돈오라는 말을 여기에서도 씁니다. 돈오의 말도 깊고 옅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사오(似悟)입니다. 즉 참다운 깨달음은 못되는 상사각(相似覚)이라, 각에 닮은 각인 것이지 본래 본각(本覚)자리를 여실히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범부위(凡夫位)입니다. 성자지위가 못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해오는 차다운 깨달음은 못되겠지만 물리를 알아서 불변수연(不変随縁)이라, 원래 변치 않는 본체의 자리, 인연 따라서 변하는 수연자리 또는 성상(性相)이라, 성품자리 현상자리 또는 체용(体用)이라, 본체자리 활용자리, 이런 것에 대해서 막힘이 없다는 말입니다. 현대말로 하면 상대(相対)나 절대(絶対)나 그런 것에 관해서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리사무애(理事無碍)도 알고 사사무애(事事無碍)도 알고 법의 해석은 별로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오도 역시, 그냥 경(経)만 봐서는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 사람 선근에 달려 있겠습니다만 같은 경을 본다 하더라도 참선을 한 사람이면 해오를 빨리 얻습니다. 경을 많이 봤다 하더라도 마음이 어느 정도 선정(禅定)에 들어 있지 못 한분들은 해오를 못합니다. 해오를 했을 때는 어느 경전을 보든지 문자만 좀 알면 ‘아 그렇구나’하고 짐작이 되어 교상(教相)면에서는 걸림이 없는 자리입니다. 이런 단계가 이른바 해오입니다.
그리고 증오(証悟)는 체험적으로 진여불성 자리를 현관(現観)해서 깨닫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견도할 때, 선종(禅宗)식으로 말하면 갓 견성할 때에, 초견성이라고도 합니다. 초견성이란 말도 선가(禅家)에서도 내려왔습니다. 그 자리가 견도의 자리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견성과 견도가 절대로 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견성은 조사 것이니까 더 높고 견도는 불경 말씀이니까 낮다는 그런 견해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견도했다고 구경지(究竟地)까지 다 이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수도(修道)를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도는 바로 견성이고, 보살 십지(十地)로 말하면 보살 초환희지(初歓喜地)입니다. 보살 초환희지에 대해서도 나중에 보다 자세히 설명을 하겠습니다만, 환희심도 여러 가지가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오욕락(五欲樂)에 대해서 너무나 큰 가치를 부여합니다만, 출가사문은 이 환희심에 대해서 깊게 음미를 해야 합니다. 오욕락은 참다운 환희심은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바세계 중생을 바로 보면 일체개고(一切皆苦)라, 삼계개고(三界皆苦)라는 말입니다. 인생이 바로 고해 아닙니까, 바로 못 보는데서, 중생 경계에서 안락을 느끼는 것이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몸뚱이를 훑어보거나 환경을 보나 또는 사람을 사귀어 보나 그런 자리에서 정말로 환희로움, 불멸(不滅)한, 멸치 않는 기쁨을 못 느낍니다. 아무리 친한 분도 배신도 있고, 그렇게 좋아해서 만난 분도 서로 원수가 되어서 헤어지기도 하고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도 몸 밖에나 안에나 좋은 것이 어디가 있습니까? 삼십육물(三十六物)이라, 침, 오줌, 똥, 눈곱 등 더러운 것이 뭉쳐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것을 보더라도 욕계의 범주 내에서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초환희지도 다른 말로 하면 리생희락지(離生喜樂地)라, 범부 이생(異生)을 떠나서, 결국은 욕계를 떠남으로 해서 참답게 느끼는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초환희지까지 갈 때에도, 초환희지가 미처 못되어도 이른바 법희선열(法喜禅悦)이라, 법을 알아들음으로 해서 기쁨을 느끼고 또는 참선을 함으로 해서 몸도 마음도 가뿐하니 경안(軽安)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닦으면 응당 필연적으로 경안이라, 꼭 틀림없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계행도 바르고 자기 몸도 깨끗하고 여법(如法)한 법을 가지고 공부할 때는 틀림없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열락(禅悦樂)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더 증장되어서 정작, 욕계 번뇌를 떠나고 자기의 본 성품을 깨달아 오직 일미평등한 진여의 자리를 얻을 때는 환희심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환희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도인들이나 환희지를 얻을 때는 환희심이 사무쳐 가누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근엄하기 짝이 없는 두타제일(頭陀第一) 마하가섭(摩詞迦葉 Mahakasyapa)도 환희지를 성취할 때는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이래서, 초지에서 2지에 올라가고 3지, 4지, 5지, 6지, 7지, 8지, 9지 10지를 거쳐서 결국은 불지(佛地)로 구경각(究竟覚)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기 따라서, 우리 세존같이 환희지를 성취하시자마자 그냥 불지로 마구 구경성취를 하긴 분도 계신 것이고 또는 2지 3지를 뛰어넘는 분도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단번에 비약적으로 뛰어넘는 것은 돈초(頓超)라고 하고 또는 2지 3지를 뛰어넘는 것은 간초(間超)라고 합니다. 보통 근기는 2지 3지 그와 같이 순서 있게 올라가겠지요. 그러나 게으름 부리면은 초지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더 못 가고 말아 버립니다.
이런 데서, 자비심이 많은 도인과 지혜가 더 수승한 도인의 차별이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지증(智増)보살이라, 지혜가 더 수승한 보살들은 ‘본래 중생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기공부, 선정을 닦는 데만 주력을 다하고 또 자비심이 많은 분들은 선인후기(先人後己)라, 남을 먼저 앞세우고 자기가 뒤에 갑니다. ‘본래가 둘이 아닌 것인데 중생들이 법을 몰라서 고생하는 것이니까 꼭 중생들을 안락세계(安樂世界)로, 안양세계(安養世界)로 인도해야겠구나’ 하고 초환희지만 성취해도 더 안 가버립니다. 이분들은 비증(悲増)보살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출가사문들은 마땅히 금생에 꼭 환희지를 성취하여야겠지요. 그리고는 자기 자비심을 점검하여서 환희지에 머물러도 도인이고 2ㆍ3지에 올라가도 도인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견성하고 구경성취한 묘각(妙覚) 자리는 다시 더 배울 것이 없으니까 무학도(無学道)라 합니다. 이렇게, 같은 깨달음도 해오와 증오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해오는 참다운 깨달음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지요.
제가 그 암증선(暗証禅), 암중모색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견성오도(見性悟道)라든가 견성에 대해서 확실한 것을 잘 모르는 분들은 잘못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선정에 들어서 초환희지까지, 견성까지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굉장히 기쁜 것을 많이 느낍니다. 자기 몸도 그냥 텅 비어 버려서 자기 몸이 어디에 있는가 느낄 수도 없고, 몸이 공중에 들떠 아무런 부담도 무게도 안 느끼고, 더러는 훤히 밝은 광명이 빛나고, 부처님이 훤히 나타나 보이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계가 다 견성이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해오만 되어도 ‘아 그렇구나, 모든 것은 본래가 둘이 아니구나’ 하여 몸도 마음도 가뿐하고 기분이 참 쾌적해서 비할 수 없는 느낌을 갖는 분들은 ‘내가 지금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깨달았다는 만심(慢心) 때문에 더 이상 공부를 안 해버리는 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경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증상만(増上慢)입니다.
이런 것을 점검할 때는 ‘과연 저 사람한테 욕심이 다 떠났는가, 저 사람한테 진심(瞋心)이 조금도 안 보이는가, 칼을 가지고 저 사람의 목을 애매하니 찌른다 하더라도 조금도 동요가 없을 것인가’ 이렇게 점검해 볼 때는 그냥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오로 다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오를 하고 다 됐다고 할 때는 대망어(大妄語)죄에 해당합니다. 승려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비증(非証)을 증(証)으로 하고 못 깨달음(夫悟)를 깨달았다(悟) 할 때는 4바라이죄(四波羅夷罪)라, 바로 승려 자격을 빼앗기는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자기나 남이나 암중모색하는 것을 깊이깊이 경계해야 합니다.
따라서, 해오한 다음에는 증오를 위한 점수(漸修)가 분명히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보살 초지(初地)에서 견도하고, 견성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경각이 아니기 때문에 성불을 위해서 또 점수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해오한 뒤에는 필연적으로 증오를 위해서 점수를 해야 하고, 또한 증오한 뒤에도, 증오 자체가 세존같이 정각(正覚) 자리를 다 원만하게 성취했다고 생각할 때는 모르거니와, 마땅히 성불(成佛)을 위해서 점수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증오한 다음에 점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특수한 사람에 한하는 문제가 되겠지요.
그러나, 증오한 다음에 닦는 법은 앞서도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점차ㆍ 고하 또는 계급ㆍ 차별을 논하지 않고서 닦는 무념수(無念修),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어야 합니다. 염오부득(染汚不得)이라, 오염하면 참다운 선(禅)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하는 분들은 꼭 무염오수행을 해야 합니다.
今頓見者 已是多生漸熏而発現也 檀経云 法無頓漸 頓漸在機者 誠哉此理
-都序-
다음은 도서(都序)에 있는 말씀인데, ‘이제 문득 깨달은 자는 이미 다생겁래에 점차로 닦아옴이 있어서 금생에 발현(発現)하는 것이라,’ 지금 돈오를 했다 하더라도 금방 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점차 닦아온 공덕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선근이 깊으면 영운(靈雲: 800년대 潙山의 弟子) 대사같이 복숭아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또는 동산(洞山 807-869)스님같이 흘러가는 시냇물을 보고 깨닫기도 하겠지만, 모두가 다 과거에 닦아 나온 과보인 것입니다.
‘단경에서 말하기를 법은 본래 돈과 점이 없으나 돈점은 그 근기에 있다는 이 이치가 진실로 귀중하고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마땅히 이와 같이 돈오점수에 대해서 바로 해석을 하시길 바랍니다.
9.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0
기독교 신학(神学)도 역시 중세기에는 이른바 번쇄철학(煩瑣哲学)이라, 번쇄하게 흘러갔습니다. 사실 깨달음이란 것은 이렇게 복잡할 것도 아닌 것이고, 문자나 또는 우리의 지혜 이른바, 분별시비 하는 알음알이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인데 한 체계를 세우려고 하면 아주 무미건조하고 난해하게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도 역시 수법행(随法行)이라 하여 하나의 고정적인 법에 따라서 하는 방식도 있고 또는 수신행(随信行)이라 하여 믿음 따라서 하는 수행 방법도 있습니다. 믿음 따라서 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참 간단명료합니다. 그러나 따지기 좋아하고 또는 이론적인 체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믿음 따라서 하는 것이 별로 신(信)이 안 갑니다.
우리 인간성 자체가 심리학(心理学)적으로 지(知) 정(情) 의(意) 3요소가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너무 지적(知的)으로 치우치면 정적(情的)인 면이 소외를 받는 것이고 또 정적인 면에 치우치면 지적인 면이 그만치 미흡을 느낍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서 정혜균등(定慧均等)으로 공부를 해나가도록 합시다.
저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른바 달마 때부터서 6조 혜능까지의 순선시대(純禅時代)에 역점을 두고서 자료도 추렸습니다. 순선시대에 의빙(依憑)하여 공부하는 것이, 현대적인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에 있어서, 보다 올바른 판단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주는 삼매의 이름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달마 스님으로부터 6조 혜능 스님까지의 순선시대에 일관되게 말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달마 스님의 이입사행(二入四行)외에 다른 법문은 지금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가사, 관심론(観心論)같은 것도 그 전에는 달마 관심론이라고 배웠습니다만 근래에 돈황(敦煌 Tunhuang)문서가 발굴된 뒤부터는 신수(神秀) 대사의 저작이라는 고증(考証)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증 자체가 다시 또 반복될는지 모르니까 아주 확정적인 것은 아니겠지요. 하여튼 무슨 사건이든 몇 십 년만 지나도 바꿔지기도 하는데 하물며, 벌써 천년 세월이 경과할 때는 여러 가지로 오류도 많이 생기고 와전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달마스님의 법문을 말할 때는 중요한 것으로 누구나가 이입사행을 꼭 들고 있습니다.
또는 4조도신(道信580-651)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 있습니다. 아주 고구정녕(苦口叮嚀)하니, ‘어떻게 참선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도 세밀히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여기에도 일상삼매 일행삼매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 있고 또는 5조 홍인(弘忍 602-675)스님의 수심요론(修心要論)에도 마찬가지로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조 스님도 돈오돈수만 말씀했다고 간단하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6조 스님 단경의 부촉품(付嘱品)에, 부촉품은 어떤 경전이나 후인들한테 부탁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포괄된 대의를 싣는 것인데, 여기에도 일상삼매와 일행삼매가 있습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는 간단하게 말하면 정혜쌍수(定慧双修)와 똑같은 뜻입니다. 일상삼매는 혜(慧)에 해당하고 일행삼매는 정(定)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6조 스님의 단경 법문을 보겠습니다.
一行三昧와 一行三昧
師得曰 汝等 若欲成就種智 須達一相三昧一行三昧 若於一切處而不住相 於彼相中 不生憎愛 亦無取捨 不念利益成壌等事 安閑恬静 虚融澹泊 此名一相三昧 若於一切處 行住坐臥 純一直心 不動道場 眞性淨土 此名一行三昧 若人具二三昧 如地有種 含藏長養 成熟期悉 一相一行 亦復如是 我今說法 猶如時雨 普潤大地 汝等佛性 譬諸種子 遇玆霑洽 悉得發生 承吾旨者 決獲菩提 依吾行者 定證妙果 聽吾偈曰 心地含諸種 普雨悉皆萌 頓悟花情已 菩提果自成
ㅡ壇經第十付囑流通ㅡ
육조단경의 제10 부촉품인 부촉유통분에 6조께서 다시 또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만약 종지(種智)를 성취하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달(達)할지니라' 종지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말합니다. 부처님 지혜는 근본지 (根本智)와 후득지 (後得智)가 있는데, 근본지는 견성할 때에 일체존재의 진여불성 자리를 깨닫는 것이고, 후득지란 근본지를 성취한 뒤에 종종 차별의 이른바 체용성상(體用性相)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다 알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것이 종지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체종지입니다. ‘그대들이 만약 모든 종종의 반야 지혜를 얻을려고 하면 마땅히 모름지기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달(達)할지니라'고 6조 스님께서 가장 마지막에, 결론 장에다가 부촉하신 뜻을 이 한 구절로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일체처에 처하더라도 상에 머물지 않고, 현상적인 여러 가지 상황, 상중(相中)에 있다 하더라도,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 신심명(信心銘)에도 있는 법문 아닙니까마는 원체 법이란 평등하고 조금도 어려운 것이 없는 것인데, 괜히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때문에 번뇌가 생기고 오염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취하고 버리지 말 것이며, 이익이 있다든가 이익이 없다든가 또는 성취가 된다든가 허물어진다든가 하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고, 그저 편안하고 고요하고 안온한 것과, 허융담박(虛融澹泊)이라, 조금도 마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이 아주 깨끗하게 밝아지는 경계가 일상삼매라' 고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것에 대해서 상(相)을 물론 내지 않아야 하겠지마는 현실적인 생활에서 상을 또 안 낼 수가 없겠지요. 설사 우리가 상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좋다 궂다든가 취사(取捨)라든가 또는 성취한다든가 실패한다든가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을 두지 말고서 항시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 제법이 공한 자리, 반야 지혜를 여의지 않고서 담박하고 안온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른바 일상삼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일상삼매는 한 말로 말씀드리면 천지 우주가 오직 조금도 차이 없는 하나의 진리 자리가 이른바 일상삼매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천차만별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일상 삼매가 못됩니다. 모든 존재를 진여불성 하나의 자리로, 만법을 귀일 (歸一)을 시켜버려야 이른바 일상삼매가 됩니다. '또한 만약 일체처에, 다니나 머무르나 또는 앉으나 누우나 간에 순일직심(純一直心)이 부동도량(不動道場)이면 진실로 정토(淨土)를 이루니라,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말한다.'
순일직심은 일상삼매를 확신하는 순수한 하나의 곧은 마음이요, 도량이라 할 때는 근본적인 본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순일한 직심이 근본적인 체를, 도량을 여의지 않으면 진실로 정토를 이루니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일상삼매를 닦아서 .행주좌와에서 본체를 안 여읠 때는 현실 그대로 정토를 성취한다는 말이요 이것이 바로 일행삼매라는 말입니다. '만약 사람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갖추는 것은 마치 땅에다 종자를 뿌리면 대지가 종자를 머금어서 오랫동안 잘 기르고 익혀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일상삼매나 일행삼매도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불종자(佛種子)를 마음 밭에다 심어 놓고 오랫동안 가꾸고 거두어서 상도 안 내고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인 일상삼매의 자리를 안 여읜다면, 종자가 땅에 떨어져서 잘 관리하면 열매를 맺듯이 우리 마음도 역시 우리 마음자리에다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두고서 오랫동안 닦아나갈 때는 일체종지를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설법하는 것은 마치 때에 알맞게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는 것과 같다. 그대들의 불성도 비유하면 종자가 비를 만나 충분히 습기나 윤택을 받고 모두 다 싹이 나오듯이 내가 말한 일상삼매 일행삼매의 뜻을 받드는 자는 결정코 진여보리(眞如菩提)를 성취하고, 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자는 진실로 부처님의 묘한 과보를 성취한다 ' 그리고,
'나의 게송을 들으라, 심지함제종(心地含諸種)하니, 마음밭에 모든 종자를 머금어서, 보우실개맹(普雨悉皆萌)이라. 두루 비에 적셔 빠짐없이 싹을 낸다. 돈오화정이(頓悟花情已)하니, 문득 이런 뜻을 깨달아서 들뜬 범부의 망정이 이미 다하면, 보리과자성(菩提果自成)이라, 보리 열매가 저절로 성취가 된다'하였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간략하나마 문헌적으로 돈오점수와 관계된것에 관해서 인용을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것이 정곡을 찌른 합당한 결어(結語)가 못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들께서 재량하시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0. 결어 (結語)
위에서 引用한 經論에서 밝힌 바, 法에는 本來 頓漸이 없고 根機의 利鈍으로 頓漸이 생기는 것이며 또한 修證에도 深淺이 있는 것이니 頓悟漸修라 하여 誤謬일 수 없고, 無染汚修行을 力說하는 意味에서의 頓修이니 頓悟頓修가 그릇됨이 아니며, 다만 先悟後修의 隨機說法일 뿐이다.
위에서 인용한 경론에서 밝힌 바, 법에는 본래 돈점(頓漸)이 없습니다. 다만 근기가 날카롭고 둔함으로 돈점이 생기는 것이며, 또한 닦고 증하는 수증(修證)에도 깊고 옅은 심천(深淺) 이 있는 것이니 돈오점수라 하여 그릇됨이 될 수가 없고, 점차나 차서나 고하를 논하지 않는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을 역설하는 의미에서의 돈수이니 돈오돈수가 그릇됨이 아니며, 다만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수기설법 (隨機說法)일 뿐입니다.
역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것은 불조(佛祖)의 통설(通說)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무슨 큰일을 할 때는 이론적인 체계가 먼저 앞서야 하겠지요. 그래야 여러 가지 거기에 따르는 합리적인 행동을 취할 수가 있듯이 공부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이해를 해야 올바른 수행(修行)을 할 수가 있습니다.
'경(經)은 필요가 없다,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敎外別傅)이라' 하여 문자와 분별을 여의고 실참실구(實參實究)로 정진을 할 때도 먼저 공부 방법에 대한 이론적인 체계가 확립 되어야 바른 신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닦는 방법은 여러 방법이 있는 것인데, '나한테는 어떤 것이 맞는 것인가' 하는 것도 역시 자기 나름대로 확신이 서야 용기 있는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항시 의심하는 가운데서는 용기가 안 나옵니다.
의심은 다만 제일의제(第一義諦), 본래적인,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의심해서 참구(參究)하는 것이지 그외의 상대적인 의심은 우리 공부에 아무런 도움이 못됩니다.
부처님 경전 가운데는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여 모두를 다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화엄경에도 보십시요. 일진법계(一眞法界) 현상을 그렇게 소상히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부처님 말씀이 다 필요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고 또는 역대조사 스님들이 모두가 다 필요하기 때문에 많은 논장(論藏)을 지어 고구정녕으로 체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휴지같이 버릴 것이 아니라 차용해 가지고 스스로 자기 공부하는 길을 밝혀야 합니다.
그런데서 선오후수(先悟後修)란, 먼저 견성오도를 다 해가지고 닦는다는 의미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간혜지(乾慧智)로 깨닫는 해오(解悟)를 먼저 해놓고서 닦아야 흐트러짐이 없이 바로 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삼세제불의 정설입니다.
석존께서 유성출가(踰城出家)하여 설산에서 닦을 때는 선오후수가 못되었겠지요. 그때는, 6사외도(六師外道)를 방문해서 별별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더러는 발가바(Bhargava) 외도한테 가서 고행(苦行)법도 배운 것이고 또는 아라다 카라마(Arada Kalama)한테 가서 무소유처(無所有處)까지 올라가는선정도 배운 것이고 또는 우다카 라마푸타(Udraka-Ramaputta한테 가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삼계의 꼭대기에 올라가는 선법도 배웠으나 모두가 다 참다운 깨달음에 이르는 법이 아니었기에, 그들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석가모니 전에 정말로 명안종사(明眼宗師)가 있어서 '그대는 어떻게 공부해야 한다' 고 했을 때는 6년 고행이 다 걸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석존께서는 선수후오(先 修後悟)라, 먼저 닦고 나중에 깨닫는 공부 방식인 것이고, 석존 뒤에는 석존께서 모든 방법을 다 분명히 밝혀 놓으신지라 그 말씀 따라서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됩니다.
선오후수는 각 경론의 정설이기 때문에 돈오돈수나 돈오점수 모두가 다 선오후수라는 자리에서, 즉 말하자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법문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6조 스님의 돈오돈수에 대한 말씀도 깨달은 뒤에 닦을 필요가 없다는 돈수가 아니라 깨달아서 자타(自他) 시비(是非)의 차별이나 높고 낮고 깊고 옅음 등의 분별심은 끊어졌으나 아직 번뇌의 습기는 남아 있기 때문에, 분별시비에 집착하지 않는 무념수행(無念修行) 곧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돈오돈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곧, 단경에서 '그대들이 만약 일체종지를 성취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달(達)해야 하느니라'는 말씀이나 남악회양 선사와의 거량에서 '닦음과 증득함이 없지 않으나 염오하지 않는 것 즉, 차별과 시비를 두지 않고 상에 걸리지 않는 것'이란 대답에 6조 스님께서는 '이 염오하지 않는 수행은 모든 부처가 보호하고 긍정하는 바요. 그대도 그렇고 나 또한 그렇다'고 한 말씀에서 그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돈오점수라는 개념도 중국의 징관(澄觀 ?-839) 스님이 비로소 사용했다고 하나 종밀(宗密 780-841) 스님도 말씀하였고, 화엄경을 비롯한 대승경론의 뜻이 대체로 돈오점수의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고, 보조 스님의 돈오점수설도 이미 6조 스님의 돈오돈수설을 수용한 불교 일반의 수증론(修證論)이라 생각됩니다.
나아가 돈오돈수가 성불(成佛)일 것인가? 하는 문제도, 대소경론에서 말씀한 묘각성불(妙覺成佛)이란 삼명육통(三明六通)과 일체종지(-切種智)를 갖춘 불가사의한 무량공덕을 원만히 성취하였다고 하는데, 단박에 물론 깨달았다고 해서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겠습니까? 부처님 이후 얼마만의 선지식들이 이러한 원만성불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인가? 이러한 점도 생각해 볼 일입니다.
또한 깨달음이 해오(解悟)가 되었거나 증오(證悟)가 되었거나 지극히 수승한 근기가 아닌 보통 근기로는 깨달음이 바로 구경각(究竟覺)인 묘각 성불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깨달음에도 심천이 있으며, 깨달은 뒤에도 습기를 착실히 닦아야 한다는 돈오점수설이 그릇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돈오돈수설이나 돈오점수설이나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취지는 동일하고, 중생 교화의 배경이나 시절 인연에 따라서 말씀하신 수기설법(隨機說法)으로 어떠한 것도 그르다고 비판 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닦음도 올바른 닦음이 되고 성불에 이르는 첩경(捷徑)이 되는 것입니다.
[출처] 제1절 돈오돈수와 돈오점수(6~10)|작성자 미타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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