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무일물(虛空無一物)
/ 청화 큰스님
‘나’ 라는 것은 분명히 비어있습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 있는 것일 뿐
‘나’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진면목은
텅 빈 것입니다.
인(因)과 연(緣)도 비어 있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사바세계에 있는 모든 물질은
생명체가 그때그때 상(相)을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본래가 물질이라면 이렇게 변하고 저렇게 변해도
그대로 물질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물질은 본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제 아무리 상(相)을 이리저리 낸다 하더라도
물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제로를 몇 천 번 곱하고 더해도 제로인 것처럼,
물질이 아닌 것이 구름 같은 모양을 내나 개 같은 모양을 내나
결국은 다 물질이 아닙니다.
다만 진동과 운동의 차이로 해서 이 모양 저 모양,
나요 너요 하는 것이지,
본바탕인 진여불성 자리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앙굴리마라가 99명의 사람을 죽였다 하더라도
본성품의 자리에서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지옥이나, 아귀 혹은 축생이나 사람으로 와서,
우리 업장이 잠재의식에 차곡차곡 축적 되어 있다 하더라도,
본성품에서 볼 때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비판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버릇을 한 번 붙여 놓으면 떼어 내기가 어려워서
그 버릇 때문에 시간을 오랫동안 끌게 됩니다.
시간을 단축하여 빨리 떼기 위해서는
비록 지금 내가 사람 모양을 하고 금생에 나와서
잘못 배우고 잘못 느끼고 해서 업장이 많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성품, 즉 광명과 하나 되어 부처님의 안목으로 볼 때는
내 머리카락 끝에서 발끝까지,
혹은 천지우주가 아무런 차별 없이
심심 미묘한 부처님의 광명으로 보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무슨 욕심을 낼 것이며
무슨 미움과 사랑, 즉 애증을 낼 것입니까?
우리 인간은 그 곳까지 꼭 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생물이 살 때인 주겁(住劫)인데
이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 가지 못해서,
차차 파괴가 되는 시기인 괴겁(壞劫)이 옵니다.
기독교 일각에서는
1992년 10월28일에 지구에 종말이 온다고 했고
휴거라 해서 기독교인만을 하느님이 들어 올려줌으로써
구제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이런 식의 비과학적인 말은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철두철미 합리적입니다.
지구나 다른 천체가 오랫동안 주겁을 거치다보면
차츰차츰 불가역(不可逆)의 에너지인 엔트로피(entropy)가 증장하여
다 불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물리학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국의 호킹 같은 분도
약 100억년 정도 되면
우주가 점진적으로 파괴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천지우주 물질세계는 결국 다 파괴되고
그 후에는 텅 텅 비어 버립니다.
허공무일물(虛空無一物)이 되는 것입니다.
즉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비록 물질은 없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생명자체인 진여불성광명으로 환원되어 버린 것이므로
불성광명 자체는 조금도 흠축(欠縮)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때는 성불하기 싫어도 성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경을 보면,
“겁진소시(劫盡消時) 일체중생(一切衆生)
개당선정(皆當禪定)”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괴겁(壞劫)이 다해서 천지가 파괴 될 때는
모든 중생이 다 깊은 삼매에 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싫든 좋든 간에 종당에는 꼭 성불해야 합니다.
다만 성불을 빨리 못하면 사람으로 태어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또 가르치고 아프고 죽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공부는 제일 쉬운 공부입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도리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성불할 것이라고 하여
지금 낮잠을 자고 게으름 부리고,
또는 망상을 한다 하더라도
성불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더디 간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섭리에 편승해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가만 두어도 몇 억년 뒤에는,
우주가 다 파괴 될 때는 깊은 선정에 들어갑니다.
마음을 열고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합니다.
성자만이 실상을 봅니다.
성자의 청정안목에서 보는 것만이 진실이고 사실이며,
범부가 보는 것은 설사 학문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바로 온전히 실상을 못보고 가상만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안 보이지만 성자의 가르침 따라,
‘너요 나요 이것이요 저것이요’가 없이,
우주가 모두 진여불성이며
본래 부처라고 느끼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화두도 그러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염불도 그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참선공부가 되는 것이지,
아미타 부처님은 저 극락세계에 계신다,
또 화두만 의심하면 깨달아 버린다는 식으로 해서는
지름길이 못됩니다.
석가모니나 각 성자가 말씀한 이치를
우리 마음에 딱 두고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그렇게 이치를 안 여읜다는 것은
다른 말로 바꿔 말씀드리면
본체를 안 여읜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인 부처님, 혹은 생명의 실상을 안 여읜다는 말이며,
우리 마음의 고향을 안 여읜단 말입니다.
고향 떠난 사람들이 고향에 가고 싶을 때
고향의 소재도 모르고 갈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갈 곳은 성불의 길이므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길목을 알아야합니다.
길목이 화두요, 염불이요, 주문입니다.
길목을 안다 하더라도
고향생각을 수시로 끊임없이 해야
가는 길이 바르게 됩니다.
-『가장 행복한 공부』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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