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삼귀일會三歸一
회삼입일(會三入一)이라고도 하며, 삼승(三乘)의 방편을 열어서 일승(一乘)의 진실로 돌아간다(혹은 들어간다)는 뜻이다. 천태종에서 『법화경』의 교설에 따라 세운 용어이다. 부처님께서 법화 이전에 설하신 여러 경전에서 성문·연각·보살의 삼승을 말한 것은 근기가 미숙한 이들에게 맞추어 방편을 베푸신 것이다. 이처럼 진실을 열어서 나타내 보이기[開顯] 이전의 가르침을 방편[權法]이라고 한다. 후에 근기가 원만하게 성숙되기를 기다려 그들을 위해 일승을 열어 보였을 때, 만일 차별과 집착의 마음이 사라진다면 방편이 곧 진실[權卽實]이 된다. 이때는 삼승이 곧 일승이 되므로, 오직 일불승(一佛乘) 뿐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삼승을 열어서 일승으로 들어가는 것을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고 한다. 이것을 방편[權]과 진실[實]이라는 측면에서 말하면 개권현실(開權顯實)이라고도 하고, 또 더 이상 방편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진실만을 드러냄을 강조하여 폐권입실(廢權立實)이라고도 한다. 그에 비해, 회삼귀일이라고 할 때에는 삼승과 일승이라는 수행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그런데 삼승과 일승이 가리키는 바에 대해서는 예부터 논란이 있어왔다. 천태종과 화엄종에서는 『법화경』 「비유품」의 화택유(火宅喩)에 나오는 양·사슴·소의 세 수레가 삼승을 비유하고, 그와는 별도로 큰소가 끄는 수레[大白牛車]가 일승을 나타낸다고 하며 ‘회삼귀일’의 취지를 말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삼승을 나타내는 세 수레와 일승을 가리키는 수레가 있으므로, 이를 사거가(四車家)라고 한다. 하지만 삼론종의 길장이나 법상종의 규기의 경우는, 삼승 가운데 보살승(菩薩乘)이 곧 불승(佛乘)이라고 보았다. 즉 『법화경』에서는 성문·연각의 이승(二乘)을 모아서 보살승으로 돌아간다는 이른바, 회이귀일(會二歸一)을 설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보살승이 곧 불승이므로, 삼승을 나타내는 세 수레만 있으면 충분하다. 이를 삼거가(三車家)라고 부른다.
십여시十如是
『법화경』에서 제법실상의 구체적 내용으로 설해진 열 가지의 여시(如是)를 말한다. 또는 십여(十如)라고도 한다. 제1 「방편품」에, “오직 부처님과 시방의 부처님만이 제법실상을 마침내 다 알 수 있으니, 말하자면 제법의 여시상·여시성·여시체·여시력·여시작·여시인·여시연·여시과·여시보·여시본말구경등이다[唯佛與佛 乃能究盡諸法實相 所謂諸法 如是相 如是性 如是體 如是力 如是作 如是因 如是緣 如是果 如是報 如是本末究竟等].”라고 하여, 일체 제법의 본래 참모습[實相]에 갖춰진 십여시가 설해져 있다. 그러나 『법화경』의 산스끄리트본에는 십여시 모두에 해당하는 원문이 없고, ‘여시(如是) 상과 성’에 대한 언급만 있다. 따라서 십여시는 구마라집이 경을 번역하면서 『대지도론』 권32에 ‘체·법·역·인·연·과·성·한애(限?)·개통방편(開通方便)’의 아홉 범주가 설해진 것을 전용하여 구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이 경문은 개권현실·폐권입실·회삼귀일 등 『법화경』의 요의인 개회(開會)사상을 함축하고 있다고 하여, 약개삼현일(略開三顯一) 또는 약법화(略法華) 등이라고도 부른다. 십여시 가운데 첫째의 상(相)은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이고, 다음의 성(性)은 변하지 않고 내재하는 본성이며, 체(體)는 상과 성을 이루는 본바탕[主體]이며, 역(力)은 바탕에 갖춰진 잠재된 능력이고, 작(作)은 나타나 보이는 움직임이고, 인(因)은 직접적인 원인, 연(緣)은 간접적인 조건, 과(果)는 인과 연이 화합하여 생겨난 결과이고, 보(報)는 후세까지 미치는 과보이다. ‘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이란 처음[本]의 상(相)과 마지막[末]의 보(報)가 궁극에 평등하다[等]는 뜻이다. 즉, 여시상에서부터 여시보까지 모두 동일한 실상(實相)에 돌아가므로 궁극에 평등하다는 것이다. 천태지의는 이것을 십법계(十法界)와 삼종세간(三種世間) 등을 접목하여 ‘일념삼천(一念三千)’의 교의를 설하였다. 천태 이전의 여러 논사들도 이 문장에 대하여 해석을 하였지만, 다만 지혜의 작용이라거나 혹은 부처님이 갖춘 십력(十力)의 작용이라거나 삼승법의 내용을 서술한 것으로 보았을 뿐이다. 그와 달리 천태지의는 십여시에 미혹과 깨달음[迷悟], 의보와 정보[依正二報], 현상과 이치[事理] 등이 일체여서 차별이 없으며, 방편과 진실[權實]이 한결같이 원융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해석하였다.
삼제三諦
제법실상(諸法實相)인 진리를 공(空)·가(假)·중(中)의 세 가지 측면에서 서술한 것으로, 공제(空諦)·가제(假諦)·중제(中諦)를 말한다. 이것은 『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 「성현학관품(賢聖學觀品)」·『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 「이제품(二諦品)」·『중론(中論)』 「관사제품(觀四諦品)」에 근거하여 시설되었다. 천태의 『법화현의』 권1상과 2하, 『마하지관』 권1하와 3상 · 5상 등에서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① 공제(空諦) : 진제(眞諦) 또는 무제(無諦)라고도 한다. 제법이 본래 공한데 중생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실재한다고 집착하여 망견(妄見)을 낸다. 만일 공관(空觀)으로 대치하면, 집착이 사라지고 모든 모습을 떠나서 진공(眞空)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② 가제(假諦): 속제(俗諦) 또는 유제(有諦)라고도 한다. 제법이 본래 공하더라도 인연이 화합하면 완연히 드러나서 공 가운데 일체법을 세우게 됨을 말한다. ③ 중제(中諦):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라고도 한다. 중도정관(中道正觀)으로 살피면, 제법이 본래 두 가지 치우침을 떠나서 진도 아니고 속도 아니며[非眞非俗] 혹은 곧 진이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여 청정하게 서로 꿰뚫어 원융하여 걸림이 없음을 말한다. 이러한 삼제의 교설은 화법사교(化法四敎) 가운데 별교(別敎)와 원교(圓敎)에서만 설해진다. 그 중 별교에서는 삼제를 각각 독립적인 진리로 이해한다. 특히 공제와 가제는 현상적 측면의 진리이며 중제는 본체를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서, 앞의 두 진리는 비교적 하열하고 마지막의 중제가 가장 수승하다고 안다. 그래서 별교의 삼제를 격력삼제(隔歷三諦)·역별삼제(歷別三諦)·차제삼제(次第三諦)·불융삼제(不融三諦)·별상삼제(別相三諦) 등으로 부른다. 이에 비하여 원교에서는 삼제가 서로 떨어져있지 않아 셋이 원융하다고 안다. 따라서 공·가·중의 삼제가 모두 공이기도 하고[卽空] 또는 곧 가이기도 하고[卽假] 곧 중도이기도 하다[卽中]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원교의 삼제를 원융삼제(圓融三諦 또는 三諦圓融)·일경삼제(一境三諦)·불차제삼제(不次第三諦)·비종비횡삼제(非縱非橫三諦)·부사의삼제(不思議三諦) 등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삼제의 진리를 보는 것을 삼관(三觀)이라 한다. 특히 원교 가운데서 삼제가 원융함을 보는 것을 삼제원융관(三諦圓融觀)이라 하며, 중생이 한 생각 가운데 원융삼제를 갖추는 것을 일념삼관(一心三觀)이라 말한다.
삼시게三是偈
삼제게(三諦偈)라고도 한다. 용수보살의 『중론(中論)』 「관사제품(觀四諦品)」에 나오는 다음의 게송을 가리킨다. “여러 인연으로 생겨난 법을/ 나는 곧 공이라고 말하네./ 또한 이것을 가명이라고도 하고/ 또 중도의 뜻이라 말하네[衆因緣生法 我說卽是空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게송 가운데 ‘시(是)’라는 글자가 세 번 나오므로 ‘삼시게’라고 한다. 중관학파(中觀學派)에서는 이 게송을 중관(中觀)에 관한 경전의 총괄적인 뜻을 함축한 것으로 본다. 세간의 모든 법이 다 갖가지 인연으로 화합하여 생겨났으므로, 모두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고, 우리가 실재한다고 인식하는 대상은 모두 언어나 개념으로 시설된 것일 뿐이다. 이처럼 자성이 공하여 있는 바가 없으나 인연으로 생겨난 일시적 현상을 치우침 없이 보는 것이 곧 중도이다. 중국에서 수당(隋唐)시대에 삼론종(三論宗)과 천태종(天台宗) 등에서는 이 게송으로써 각 종파의 체계를 드러내 보였다. 천태지의는 게송의 첫 구절을 인연법, 둘째 구절을 공제(空諦), 셋째 구절을 가제(假諦) 그리고 넷째 구절을 중제(中諦)를 나타낸다고 설하였다. 그래서 천태종에서는 이 게송을 공·가·중의 삼제를 나타내는 게송[三諦偈]이라고 한다. 혹은 인연법 즉 연기(緣起)의 진리를 포함하여 ‘사제게(四諦偈)’라고도 한다.
삼전독문三轉讀文
십여시(十如是)를 세 가지로 바꾸어 읽는 방법으로, 십여삼전(十如三轉)이라고도 한다. 『법화경』 「방편품」에 “제법의 여시상·여시성·여시체…본말구경등[諸法如是相 如是性 如是體…本末究竟等]”이라고 십여시가 설해져있다. 혜사(慧思)는 이 문장을 마땅히 “여(如)”에서 끊어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시상여(是相如)·시성여(是性如)·시체여(是體如)…’로 읽고 이를 십여(十如) 또는 십여실상(十如實相)·십여경(十如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지의(智?)는 스승의 뜻을 포괄하며 십여시의 문장을 세 가지 방법으로 읽었다. 『법화현의』 권2상(上)에, 공(空)·가(假)·중(中)의 삼제법(三諦法)을 나타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세 차례로 달리 읽는 법이 소개되어 있다. ① 만일 ‘시상여(是相如)’ 즉 ‘이 모습이 여여하다’고 읽는다면 곧 제법이 모두 공함을 나타내어, 공의 진리[空諦]를 보인다. ② 만일 ‘여시상(如是相)’ 즉, ‘이와 같은 모습’이라고 읽으면 차별적인 현상을 나타내어, 가의 진리[假諦]를 보인다. ③ 만일 ‘상여시(相如是)’ 즉, ‘모습이 이와 같다’고 한다면, 제법이 곧 중도(中道)의 실상(實相)임을 나타내므로, 중의 진리[中諦]를 보인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독법을 각각 공전(空轉)·가전(假轉)·중전(中轉)이라고 한다.
천태불교문화연구원 ggbn@ggbn.co.kr
[출처] 회삼귀일, 십여시, 삼제, 삼시게, 삼전독문|작성자 임기영 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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