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사상(天台思想)
천태사상(天台思想)
(1) 천태학
(2) 천태산의 천태종
(3) 법화경과 3대부
(4) 천태교학론
(5) 실상의 실행
법화경 총설
● 적문(迹門)
■ 적문의 구성
■ 정종분-제2장
■ 정종분-제6장~제9장
■ 유통분-제10장에서 제14장
● 본문(本門)
■ 본문의 구성
■ 서분(序分)-제15장
■ 정종분-제16장 ~ 제17장
■ 유통분-제18 ~ 제28장
법화경(法華經) 각품해설
1. 서품(序品)
2. 방편품(方便品)
3. 비유품(譬喩品)
4. 신해품(信解品)
5. 약초유품(藥草喩品)
6. 수기품(授記品)
7. 화성유품(化城喩品)
8.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
9.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
10. 법사품(法師品)
11. 견보탑품(見寶塔品)
12.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
13. 권지품(勸持品)
14. 안락행품(安樂行品)
15.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
16.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17.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
18.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
19.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
20.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
21. 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
22. 촉루품(囑累品)
23.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24.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25.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26. 다라니품(陀羅尼品)
27. 묘장엄왕본사품(妙莊嚴王本事品)
28.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
법화경(法華經) 비유
● 법화칠유
● 제1 화택의 비유
● 제2 궁자의 비유
● 제3 운우의 비유
● 제4 화성의 비유
● 제5 궤보주의 비유
● 제6 정주의 비유
● 제7 의사의 비유
천태사상(天台思想)
(1) 천태학(天台學)________하나아닌 모두.
천태학의 교리적 핵심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이다. 제법이란 모든 존재란 말이고 실상은 참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제법실상이란 현실의 온갖 사물이 참 존재라는 말로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제2품 방편설(方便說)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묘한 것이 늘 자기 아닌 하나와 하나이기를 기구해왔고 하나되기를 바라는 기대로 역사해왔다. 시대적인 온갖 일들이나 나라나 사회의 모든 일들이 하나로 모아지면 흥하는 것이요, 흩어져 여럿으로 갈라서면 망하는 흥망성쇠의 역사를 크고 작게 반복하여왔다. 그리고 또 누구나 하나를 중심으로 모으려하고 향해서 달려가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삶이며 정치 경제며 사회문화의 점철이었다. 인류는 하나를 향해 달리고 역사는 여럿으로 흐트려 놓는다. 늘 하느님이나 그 비슷한것들에 매달려 하나가 되고자 하였기에 하늘과 중생이요, 부자와 가난한 자이며 지도자와 시민과 같은 앞뒤의 자리매김은 불변의 규범체계요, 욕구의 지향처였다. 그래서 관념의 골세포에 비장되어 군림하여 왔다. 민주니 사회니 공산이니 자본주의니 하는 것들도 다를바 없이 하나를 지향해 몰아가는 하나놀이였었다.
'나는 중생이다'라는 자기확인조차도 하나놀이에 불과하다. 나는 유보되고 유보된 나를 중생이라는 허상으로써 수습하여 자기로 삼으려는 헛자리매김인 것이다. 그리하여 허다한 진실과 사실들이 오히려 허상으로 전락하고 하나의 가공된 진실에 종속되어 도리어 허상과 하나되기를 진실스레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천태학에서는 제법실상이라하여 만물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실상임을 주장한다. 그대로의 세계를 인가하는 것이다. 법화경에는 일승(一乘), 일불승(一佛乘), 일실상(一實相)들의 말이 나온다. 이말은 유일한 것 최고 유일신 따위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모든 것을 그대로 똑같이 인가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똑 같다는 뜻은 더욱 아니다. 그래서 이말은 열린 진리, 열린 인간과 서로 통하는 표현이다. 쉽게 말해 여기로 와라 최고가 된다가 아니라, 거기에 그대로 있으라 최고의 자리다라는 뜻이다. 새로 만들려고 하지말라. 이미 되어있다. 헛길로 가지말라 그대로가 좋은 것이다라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이것이 천태학에서 자랑으로 삼는 일승개회(一乘開會)의 설법이고 제법실상의 사상이며 이러한 법으로 만중생을 구하고자 하였기에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조차 어디론가 하나쪽으로 가고자하는 5천의 무리가 영산도량을 떠나고 만 것이다.
천태학의 관법으로 4상추검(四相推檢)이란게 있다. 수행자의 심요(心要)로서 일심의 4가지 상태를; 일어나지 아니한 일념(未念), 일어나려는 일념(欲念), 현재의 일념(現念), 지나버린 일념(已念)으로 추적할때에, 현재의 일념은 그래도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머물지 않는(無住) 일념일 뿐이므로 결국 일념의 존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일념의 실체가 없다는 것(空法)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념의 4상(四相)에 일체가 포섭된다 하였으니, 일체에 미혹하지 않도록 미묘한 심법을 관조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일어나지 아니한 마음도, 일어나려는 마음도, 지나버린 마음도 없는 마음일 따름이다. 그런데 자신의 4가지 마음조차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리를 말하고 사실이라 고집한다면 제법의 실상을 허상으로 전락시키는 강제요 무법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천태학의 출발은 평상적인 일념심의 관조로부터 제법실상을 실현해 가는 것이다.
보통은 법화경(法華經)으로 줄여 부르는 묘법연화경을 근본으로하는 종학(宗學)이 천태학이다. 근본경전에 따른다면 법화학이라고 해야 할것이나, 역사적으로 법화학으로서 교학과 종학으로 대성한 이가 중국 남북조시대의 지의(智 , 538- 597)이고, 그의 주거본산이 천태산(天台山)이었기에 천태대사로 불러왔고, 이에따라 후대의 법손인 담연(湛然)이 천태종이라고 한데서 천태학으로 쓰여진 것이다.
법화경은 보통, 불난 집의 비유, 장자와 궁자의 비유, 성채의 비유, 보배구슬의 비유, 초목의 비유 들로서 유명하고 육신을 불살라 여래에게 공양하는 약왕(藥王)보살, 여래를 해치려고 사고쳤던 데바닫다의 이야기하며, 만인의 소망을 들어주는 보문품(普門品)의 관세음보살과 앞장에서 부터 차례로 등장하는 사리불을 비롯한 제자들과 쫓기다시피 도량을 떠나가는 5천 제자의 이야기며, 붓다가 세상에 나타난 큰일의 큰인연(一大事因緣)을 중생에게 길을 열어주고 보여주며 깨닫게 하고 들게하기 위함이라고 밝힌 일들의 갖가지 법문들이 기라성같다.
그중에서도 천태학에서 눈여겨 본, 첫째 대목은 제2품 방편설 중의 개회설(開會說)이다. 개회란 열어서 알게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회의나 행사를 시작하는 의미이듯이 공개회의나 내용의 공개 또는 공식화 대중화의 뜻이다. 법화경의 설법에 이르기까지의 불교가 수행으로는 8정도,연기법, 6바라밀의 3가지 길로 전개되고 교법과 목적과 성취조차도 성문(聲聞)과 연각(緣覺)과 보살의 3가지로 차별하여 왔으나, 이제 법화도량에서는 일승(一乘)일뿐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개회설(開會說) 또는 개회사상이라 한다. 그러나 법화도량의 기준에서는 개회는 곧 묘법의 개회를 뜻하고 바로 제법실상의 개회를 말한다. 온갖 세상일들이 실상(實相)이요 묘법(妙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경전과 비교하여 법화경의 교설이 상대적으로 우수하다고 하는 것이 상대(相對)개회이고, 반면에 법화경이 열리고 나면 제법실상으로서 만물의 절대가치를 개회한 것이므로 상대적인 우열이 아니라 모든 경전의 절대가치를 묘법으로 표명한 평등의 절대(絶對)개회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절대가치의 선언 곧 절대개회에 대한 현실의 모반은 역시 이론이 아닌 현실로서 해결하기를 요청하는 것이 천태학의 두 번째 특징인 교관쌍미(敎觀雙美)이다.
천태학은 교상문(敎相門)과 관심문(觀心門)의 둘로 구성된다. 교상문은 이론부문으로서 세계의 실상과 인간의 본질 등을 다루고, 관심문에서는 4종삼매(四種三昧)와 10승관법(十乘觀法)과 같은 관심수도의 체계를 제시한다. 이론과 수행의 균형이 천태학의 특징중의 특색이다. 이론만의 학문이 있을 수도 없지만 학문은 모름지기 현실이라는 기초를 떠날수도 없다.더구나 종교학의 경우에는 실천적 체험이나 체험을 통한 종교의식(意識)의 성립, 다시 말해 교조의 진리체험과 진리에 대한 절대적 확신없이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 점에서 천태학이 이룩한 독보적인 관행의 체계와 조직으로 말미암아 교관쌍미라는 말을 천태학의 배타적 전용술어로 써내려온 것이다.
천태학의 3번째 특징은 불교라는 이름으로 벌려놓은 다양하고 때로는 모순되고 대립적이기도 한 각종의 경전이나 교리교설을 제외하거나 배척하는 일없이 모아 집대성하고 분석판별하여 질서가 있게 한 점이다. 이점은 역사와 현장의 동행과정에서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의 현실주의며 노장(老莊)의 사변철학마저도 천태사상의 기초영역에서 제외적일 수 없었다. 결국 천태학은 법화경만이 아니라 대소승의 모든 교법과 관심법(觀心法)을 종합정리하고 조화와 통일의 원융(圓融)원리로 집대성한 철학의 기초와 구성원리를 장점으로 한다.
이러한 점이 분열과 괴사의 세포현상을 무한으로 극대화하는 국제화시대의 지구인간이 아쉬워하는 천태학의 순수본질일 것이다.
(2). 천태산의 천태종--천태산 지자(智者)대사 지의(智 )
천태학의 개종자인 천태산의 지의(智 , 538-597)는 보리달마와의 만남으로 유명한 남쪽의 양(梁)나라의 무제때에 형주 화양현(지금의 호남성 병주부 화양현)에서 출생하였다. 20살때에 북쪽으로 가서 제(齊)나라의 대소산에서 법화삼매를 오도(悟道)하였고, 다시 남향하여 진(陳)나라의 수도 금능에서 학풍을 드날리기 시작하여 38세 이후에는 천태산에서 주석하였다. 그런가 하면 진나라가 망하고 난 뒤 수(隋)나라의 천하통일 시대에 생애의 말년을 보냈다. 그래서 보통은 진나라 사람이라고도 하고 수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업적이나 교화활동은 주로 진나라시대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어느 켠이든 진과 수대에 걸쳐서 천태산을 본산으로 하였기에 천태대사라고 부르듯이 그의 생애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말기에 4개 왕조에 걸쳐진 난세인가 하면 수나라가 통일천하를 실현하는 시기에 있었다.
양나라가 망한 다음해인 18세에 출가하여 진제삼장(眞諦三藏)의 문인이었던 혜광(慧曠,534-613)에게서 섭대승론(攝大乘論)과 유식 등을 배웠으나, 20세에 구족계를 받고는 대현산으로 가서 법화경을 독송하고 방등참법(方等懺法)을 닦았다. 스무세살에 진과 제나라의 격전지를 뚫고서 광주의 대소산으로 남악혜사(南岳慧思 515-577)를 찾아 갔다. 마침 혜사는 전쟁으로 막힌 남행길을 주저하여 대소산에서 법화도량을 개설하고 있었다. 혜사에게 입문한 지의는 법화경 제23, 약왕보살 본사품에서, 80억항하사(恒河沙) 세계의 제불이, 온몸으로 방광하는 희견(喜見)보살의 연신(燃身)삼매의 육신공양을 참정진이요, 참된 공양이며 참보시라고 한결로 찬탄한다는 대목에서 법화삼매를 오도하였다.
그로부터 8년의 보림을 거쳐 30살이 되었을 때에 혜사의 교시로 법희(法喜)등 27인과 함께 남쪽의 수도 금능으로 진출한다. 당시의 금능에서는 오만 제일의 만선자(慢禪者) 법제(法濟)가 약관의 지의에게 승복하자, 지의는 일거에 유명인사가 되고 대인(大忍), 혜변(慧辨), 승황(僧晃) 등의 년배의 대덕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그러자 왕후 장상들도 떼지어 청법을 하니 법회일에는 조정의 국정마저 휴무하였으며, 제방의 고승 대덕들이 제자의 예를 갖추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리하여 32세때인 진나라 선제 원년 569년에 와관사(瓦官寺)에서의 법화강회가 천태개교의 발단이 되었다.
다시 8년간의 금능교화 이후 38세의 지의는 천태산으로 들어간다. 입산의 전년에 북제 무제의 불교박해가 있었고, 엄청난 파불에 승려들은 강남으로 피난하거나, 심하게는 4론 학자 정애(靜 )와 같이 참혹상을 한탄하여 분사하는 일마저 있었다.
이에 공리공담에 심취하던 강남의 불교도 법난의 먹구름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지의로서는 이미 법난에 한해 앞서, 일찍이 그의 출가를 도왔던 북제의 장군 왕림(王淋)이 그의 제자이기도 한 진나라 장수 오명철(吳明徹)에 사로잡혀 효수되어 내걸린 처참한 현실을 겪었다. 그러니 절실한 현실에다 결연한 입산일 수밖에 없었다.
사뭇친 수행과 철저한 오도를 이룬 10년후, 영양왕(永陽王)의 권유도 간절했던 두 번째의 금능생활은 본격적인 도량의 개회였다.
왕궁의 정전인 태극전에서 대지도론(大智度論)을 강론하고, 강남 제일의 도량 광택사에서 인왕호국반야경(仁王護國般若經)에 이어, 강남 최고의 고승으로 광택사에서 주석하던 법운(法雲)의 법화소(法華疏)를 흐트리고 새로 묘법연화경문구(文句)를 강론하였다. 50세 때였다.
그러나 52세때(589년)의 정월에 북쪽의 수나라가 금능을 정벌하였고, 뒷날 수 양제가 된 진왕(晉王) 광(廣)은 보살계의 수계제자가 되었다. 한편 그는 지의를 지자(智者)대사라고 호칭하니 그 인연이 입멸후까지 이어져 천태종의 본산 국청사(國淸寺)의 창건에도 큰 힘이 되었다.
지의는 56세에 옥천사(玉泉寺)에서 묘법연화경현의(玄義)를, 57세에는 마하지관(摩訶止觀)을, 58세에는 유일한 친필저술인 유마경의 주석을 짓고 60세에 입적하였으니, 최후의 5년동안 또 한차례 일생의 공부를 정리하는 용맹정진의 족적을 각인하여 이른바 천태삼대부(三大部)를 완성하였다.
이렇게 천태학은 천태산의 지자대사 지의가 법화경을 대들보로 하고, 열반경을 기둥으로 하며, 대지도론을 초석으로, 대품반야경을 대문으로 하여 조직한 사상이다. 그래서 천태학은 공관(空觀)에서 한걸음 나아가 만물의 실상을 말하고, 만물이 본래 갖춘 묘덕(妙德)의 구현을 사명으로 한다. 그러한 실상의 묘덕은 온갖 사물에 나타나고 있으니 일상적인 경험의 일들이 모두 묘덕의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철학적으로는 현상 즉 실재론이라 하겠지만, 결코 현상과 실재를 양립자로 보지 않고, 현상계에서 실재를 인식하고 실재와 더불어 현상계가 함께하여, 하나로 보면 원만론이요 둘로 보면 원융론이라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사상으로서는 반야공관에 기초하고, 종파로서는 삼론종(三論宗)에서 한걸음 나아간 것으로, 인도에서는 용수(龍樹)가 크게 일으켰고, 구마라지바가 중국으로 전법한 공관불교를 실행적으로 전개하여 남북조의 불교사상을 통일한 것이 천태학이다.
지의 이후로는 천태6조인 당나라의 형계담연(荊溪湛然, 711-782)이 천태학의 체계와 이론을 정비완성하고, 송나라의 사명지례(四明知禮, 960-1028)가 중흥한 외에 종파로서는 융성하지 못했으나, 그 사상은 각종의 불교학에 크게 미치고 보편화되어 이른바 중국 제일의 불교 철학이라 칭한다.
특히 우리로서는 고려의 제관(諦觀 -960-?)이 송나라로 천태학의 전적들을 역수출하여 당 말이후로 쇠락한 중국의 불교학과 천태학을 부흥하게 하고, 천태4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하여 전폭적이고 대표적인 불교개론으로서 만국의 성전이된 사실을 주목해야겠다. 또한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천태종을 도입하여 고려사회의 사상적인 통일을 성취하고자 했던 일이며, 이 인연으로 전적을 수집정리하여 의천록(義天錄)이 만들어 진 문화적인 업적도 원융 총화(總和)의 제법사상과 무관하지 않은 일이다.
(3) 법화경과 3대부(大部) --- 영산회상과 천태산
붓다가 영산회상에서 법화도량을 개설한 까닭은 새로운 내용의 교법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법화회상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설법이 똑같이 최고의 법문임을 명백히 하기위한 최후의 심판다운 교법의 개회에 있었다. 말하자면 붓다의 설법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상하 우열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교법으로 성취하더라도 모두 같은 성자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곧 법의 개회와 함께 중생의 개회(開會)이다.
4성제(聖諦) 수행의 성문이거나 12연기의 관법을 닦은 연각이거나 6바라밀 행자인 보살이거나 같은 결과라고 하는 일승법(一乘法)의 대선언이 법화도량의 개설 목적이라는 것이다. 다만 중생의 근성이 익숙하지 못하고 안목이 열리지 아니하여 방편으로 시설하였을 뿐이요. 이제 그 사실을 개회로서 밝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승법은 마음법과 물질법의 차별도 일소하여 색심(色心)실상이라고도 한다. 반야경에서는 물질도 마음도 아닌 것이 실상이라 하고, 연기론 계통의 화엄경, 열반경, 기신론(起信論)들에서는 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여 자못 유심론에 빠질 위험을 지적할 수 있으나, 색심(色心)실상은 대립적 편향성을 지양하고 실상을 상속적 원융원리의 제법으로 파악한 것이다.
또 기준을 달리하여, 붓다의 교설에 의하면 제법실상은 방편인 세상의 권능을 빌어서 진여의 실상을 들어낸 것이며, 중생의 살림에 맞추면 현실의 오만가지 행위가 최고의 선을 실현하는 행실이요 다만의 행위일 수 없다는 것이다.
무릇, 연꽃이 안으로는 씨앗을 품고 바깥으로는 빛갈과 향내며 맛을 갗추듯이, 안팤을 갈라잡을수 없는 원융의 묘덕으로 생명을 삼고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을, 빛갈처럼 거짓스럽다(假有) 향내마냥 공허하다(空諦) 연자맛은 실상이다.(中道, 第一義諦)라는 식으로 갈라 잡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은 안된다기 보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실상의 논리적인 표현이 원융삼제(圓融三諦)요, 수행 지침이 일심삼관(一心三觀)이며, 통칭하여 원융사상이다. 그러나 종교로서 볼때의 원융사상이란 제법의 현실을 그대로 둘수만은 없다는 약왕보살의 소신공양(燒身供養)과 같은 색신의 서원이요, 방광(放光)의 보살사상이다. 끝내 제법과 실상을 다투게 할 수 없는 무상의 생명성을 짐짓 본질로 불러 맡겨서 한 말이다.
천태학에서는 법화경 28품을 앞뒤 14품씩으로 나누어 본다. 앞은 적문(迹門)이라 하는데, 현실적으로 제법실상을 중심으로 붓다의 금생교설을 총괄하였고, 뒤의 본문(本門)은 시간적으로 제법의 영원성을 지시하고 붓다의 과거세의 온갖 행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형계(荊溪)는 특히 제2 품 방편(方便), 제14품 안락행(安樂行), 제16품 여래수량(如來壽量), 제25품 관음 보문(觀音普門)을 4요품이라 하여 중시하였다. 방편품은 적문의 핵심이고, 수량품은 본문의 중심이며, 안락행품은 실행의 정도, 그리고 보문품은 인류구호의 원행(願行)을 주제로 한다고 주석하였다.
그러나 천태학의 주요전적이라 할때 법화경보다는 삼대부로 불리는 법화경의 3가지 주석서를 더 중요시하는 것이 사실이다. 삼대부는 천태의 강술을 장안 관정(章安灌頂, 561-632)이 필수 정리한 것이다.
지의(智 )는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그 가운데서도 만년에 학문과 수행이 원숙한 경지에서 독창적인 불교학의 체계를 세워 강설한 주석서 법화문구(法華文句)와 법화철학의 정수요 원론서인 법화현의(法華玄義)와 수행과 실천의 대도를 밝힌 마하지관을 3대부(大部)로 일러왔다. 먼저 법화현의는 법화경과 천태학의 총론적 연구서이다. 교상문(敎相門)의 대표저서로서 묘법연화경이라는 경의 제목을 중심으로하여 경전의 요지를 해석하고, 붓다일생의 교법을 체계적으로 논술하였다. 이른바 5중현의(五重玄義)로서 법화사상을 강론한 것이다. 곧 경의 제목 주체 근본 작용 교판의 다섯 기준에서 법화경을 중심으로 모든 경전들을 분석판별하여 법화우위를 주장한 것이다. 둘째의 법화문구는 법화경 28품의 모든 문장을 해석한 주석서이다. 여기에서도 네가지 기준을 설정하여 전형적인 경전해석학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그 하나는 설법의 인연에 따른해석이며, 그둘은 듣는이의 근기와 기호에 따른 해석이고, 셋째는 붓다의 입지가 법신(法身)의 본래불인가 아니면 화신불(化身佛)인가등에 따른 차별적 해석이며, 마지막은 관심법등 신행방법의 차이에 따른 해석이다.
3대부의 마지막인 마하지관은 천태종의 실천적 관심법을 체계화한 저서이다. 이책에서 소개하는 선정법은 천태이전부터 전해온 여러 경전들의 내용을 모으고 정리한 것이어서 새창안은 아니지만 지의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특징이 있어서 천태가에서는 흔히 이전에 듣지못한 새교설이라고 자랑한다.
이상의 3대부는 법화현의(玄義)와 법화문구(文句)를 합하여 법화소(疏) 또는 천태소라 하여 교학부문의 대표 저술이며, 마하지관은 문자 그대로 대승불교의 관심의 방법과 교리를 곁들인 수행에 관한 대표저서이다.
이 3대부에 대해서 지의대사가 법화현의석참(釋懺), 법화문구기(記), 지관보행(止觀輔行) 등의 주석서를 남겼기에 이방면 연구의 필수서로 유행하고 있다. 그리고 3대부에 버금하면서, 실용성에 있어서는 오히려 앞서는 천태학 내지 불교학의 입문적 필수교재로 고려 제관(諦觀)의 저술인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가 있다. 천태전적으로서는 가장 폭넓게 보급되고 있는 책이다. 천태사교의가 천태학만이 아닌 불교학의 보편적 입문서로서도 가장 간결 명확한 요령서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의천록에 오르기도 했으며, 조선 세조 대의 석보상절(釋譜詳節)에도 주요부분이 인용되었었다. 한편 국외에서는 더욱 유행하여 50여부의 주석서가 대장경에 수록되어있으며 기타본을 합하면 800여권으로 알려져있고, 현대학자들에 의해서도 20여종이 발간되었다. 전통적으로 3대주석서로 송(宋)나라 종의(從義)의 4교의집해(四敎義集解), 남송 원수(元粹)의 사교의비석(備釋), 원나라 몽윤(夢潤)의 사교의집주(集註)가 현전하고, 의천의 주석서도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4) 천태교학론 -- 법화 열반 8년이라.
중국의 남북조시대는 서쪽으로 부터 봇물 터지듯 밀어 닥친 불교를 수용정리하던 때이다. 수많이 번역된 경전과 다양한 교리가운데서 다양성과 차별성을 이해할수 있는 해석의 원리와 기준이 요청되었다. 교상(敎相)에 대한 판별과 해석이란 뜻으로 줄여서 교판(敎判)이라는 것이다.
교판설은 대개 2가지 근거를 가지는 데, 하나는 사람들의 이해능력과 취향에 따라 붓다의 설법도 다양해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다양한 경전중에서 어느 경전을 선택할 것이며, 다른 경전과의 관계는 어떠한가라는 점이다. 천태만상의 경전을 다 읽을 수는 없고, 읽는다 하더라도 이해의 문제는 따로인 것이다.
천태지의 당시에는 남3북7로 불려진 종애(宗愛)의 4시교(時敎), 승유(僧柔)의 5시교 등과 보리유지(菩提流支)의 2교설, 불타삼장(佛陀三藏)의 4종교(宗敎) 등이 있었고, 천태이후로도 삼론종(三論宗)의 3법륜, 법상종(法相宗)의 3시교, 화엄종의 5교10종 교판등이 있었다.
지의는 당시의 교판설들을 비판한 위에 5시8교(五時八敎)의 교판을 세웠다. 말하자면 5천여 경전중에 최고의 법화경임을 내세우기 위한 신교판인 셈이다. 후학의 입장에서 보면 천태학의 학습방법이고 불교학의 학습과정으로 제안된 것이기도 하다.
먼저 5시(五時)란 부처 일생의 교화과정을 5시기로 구분한 것이다. 제1 화엄시(時), 제2 아함시, 제3 방등시, 제4 반야시, 제5 법화 열반시의 5이다. 이 순서에 따라 최초 3주간의 화엄경설법을 시작으로 아함경을 12년동안, 보통 방등경으로 불리는 초기 대승경전들을 8년간, 그리고 22년동안에 반야경을 설법하고, 마지막으로 법화경과 열반경을 8년에 걸쳐 설법했다는 교판의 틀을 짜고, 각종의 경전들을 5시에 배속하여 교법의 시기별 특성에 따라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8교(八敎)라 함은 붓다일대의 설교를 교화방법에 따라 4가지로 분류하고 또 교화내용인 교법에 따라 넷으로 나눈 것을 합하여 8교라고 한 것이다. 먼저 화의(化儀) 4교란 교화의 의례의식에 따라 나눈 돈교, 점교, 비밀교, 부정교의 4교를 말한다. 문득 점차, 비밀, 비지정의 뜻으로 단도직입적인 방법의 교화를 돈교(頓敎)라 하고, 점진적으로 성숙시켜가는 교육을 점교(漸敎), 방법과 내용을 숨긴 것을 비밀교(秘密敎)라 하여 예컨데 대상도 내용도 비밀에 부친 교육이다. 그리고 돈점의 방법을 정하지 않고 함께쓰는 것을 부정교(不定敎)라 했다. 교육내용만은 비밀로 한 것이다.
5시와 화의4교(化儀四敎)가 크게는 종래의 교판설을 인용한 것인데 비해서 다음의 화법4교(化法四敎)는 지의의 독창적인 교판설로서 명칭과 내용의 모두가 창안된 것이다. 붓다의 교화 내용이라고 제한적인 표현을 하지만 사실은 8만대장경의 모든 경전을 뜻하고 불교라는 총체를 지시하는 것이니, 결국은 교판의 필요성이라는 본래의 문제에 대한 정답으로 제시된 것이 화법의 4교판이다. 말하자면 불교를 4가지 사상으로 분류한 것이다.
제1의 부류는 부파불교의 3장교라는 말을 줄여서 장교(藏敎)라고 했다. 부파의 소승불교에서는 경장과 율장과 논장의 구별이 확실한 점을 지적한 이름이다. 인도에서는 3장(藏)이 완비된 이후에 대승경론이 생겼기에 3장의 불교와 보살의 불교가 대비되었고, 상대적으로 대승시대가 되면 3장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구사론(俱舍論)으로 대표되는 장교는 분석의 방법으로 인간과 세계의 실체를 찾고자하였다. 그결과로 인간은 허상이요 거짓존재이며 잠정적일 뿐이므로 무아(無我)라고 주장한다. 주제성(主帝性)도 없고 동일성도 없는 또는 나 마음대로도 아니되고 늘 그대로의 나도 아닌 아공(我空)이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물질세계를 분석적으로 추구하여 5온을 비롯한 75종의 존재를 법유(法有)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분리해석만 했을 뿐 주체적인 삶의 실체도 객체적인 물질계의 원리나 본체를 찾지도 인정하지도 못한 소극적인 부정으로만 일관한 교리체계이다. 따라서 실체이전의 현실적 자기중심의 교법이며 현실상실의 무위(無爲)열반을 이상으로 하는 교설이다. 4제(諦)든 12연기의 수행이든 고뇌로 부터의 이탈만이 목적이고, 이목적을 성취한 성자를 아라한이라고 하는 것이 장교이다. 5시설(五時說)로는 제2의 아함경(阿含經)의 시기에 해당하고, 화의4교로는 제2 점교의 초보에 해당한다.
제2부류의 통교(通敎)는 공통의 교법이라는 뜻이다. 아라한(阿羅漢)이 되고자 하는 성문 연각이라는 앞의 2교법과도 통하고, 다음번의 대승보살교법과도 통행하는 교법이다. 그러나 보살의 교화를 주로하고 2승(乘)을 곁들이는 초보대승의 교법이다. 따라서 어리석은 이는 장교와 같다고 하고, 근성이 예리한 보살은 이 교법에서 구경의 실상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통교의 교법은 일체가 공이라는 공사상이다. 장교가 아공법유설(我空法有說)을 중심사상으로 하였으나, 통교에서는 아법양공(我法兩空)으로 인간도 세계도 모두가 공법이며 공의 자체 사실마저도 부정한다. 장교에서는 현상을 분석한 결과로 분석공(分析空)을 주장했으나, 통교에서는 존재의 의미를 인식론적으로 비판하여 존재로서의 독자적인 자재성(自在性)과 시간적인 상주성(常住性)이 없으므로 근본적으로 존재라고 할 수 없다는 체공(體空)설을 주장한다. 공법이 곧 진리라는 공관불교를 통교라고 한 것이다.
장교가 존재에 대한 분석과 실체에 대한 부정에만 머문데 비해서 통교에서는 공이라고 하는 존재원리를 철학의 방법으로 주장한 점이 다르다. 그리고 공관불교에서는 공 자체마저 부정함에 따라 공도 유도 아닌 제3자가 존재의 제1원인자로 나타난다. 비유비공의 중도 또는 진여 실상 등의 존재자들이 그것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본체관의 등장이다. 이와 같이 뚜렷한 본체관(本體觀)이 나타나면 이미 통교(通敎)의 다음 단계인 별교(別敎)의 교법이 되고 만다.
실천적으로 통교에서는 개체적인 존재성이 사라지고 공관이라고 하는 통일된 총체성의 구현이 목적이 된다. 중생성취나 세계성취라고 하는 보살의 서원행(誓願行)이 통교의 이상이요 이념인 것이다. 따라서 장교에서는 버려졌던 현실이 보살의 도량으로서 재구성되고 재생되어 육바라밀과 같은 자리이타의 행도(行道)가 시설되는 것이다. 대품반야경과 같은 반야공관계통의 경전들이 통교를 대표하고, 종파로서는 삼론종이 대표적이다.
세 번째의 별교는 삼라만상의 근본인 존재 즉 본체에 대한 언급이 확실한 경전들의 교법이다. 사실 본체로서 확실한 정도만큼이나 역비례로 현실은 빛이 바래고 요원한 가능태의 존재일 수밖에 없고, 그런가 하면 그에 대한 존재론이나 성취론은 어렵고 복잡해 질 수 밖에 없다. 또한 그만큼 다른교법과는 결별적일 수밖에 없는 별교의 교법이다.
실제로 앞의 장교와 통교에서는 가유(假有)가 되었건 공관이 되었건간에 교리의 기준을 현실에 두고 있었으나, 별교에서는 그반대로 본체를 근거로 하여 현실을 설명하는 것 부터가 별나다. 진여.불성. 여래장. 일심. 중도.실상등이 대표적인 본체로서 주장되고, 현실과는 격리되고 융통하지 아니하므로 다만 중도일 뿐인 중도론이 별교의 교법인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으로는 현실을 정화하여 이상세계에 도달한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걸음씩 정진해야할 상향적인 과정이 42계단 또는 52계단 등으로 설정되고, 떨쳐버리고 정화해야할 번뇌도 일상적이고 심리적인 미망이외에 무명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대상이 등장한다.
따라서 자아의 관심적인 해체와 관조에 의해서는 해결될 수 없는 자아이탈적인 결별과 단절이 수행의 방법들로 제시되고 , 교리는 탈이성의 부사의한 방향으로 흘러 신앙적인 연결과 현실적인 단절이 심화되며 신앙성이 조장된다. 어떤 경우에는 이를 두고 비로소 진실한 대승불교의 특성을 갖춘 교법이라고도 한다. 바로 이론의 심화는 엄밀한 현실의 관조이기 보다는 종교 신앙적인 체제의 확립과 강화 그리고 관념세계의 구축에 열심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순박하고 절실한 생명감을 상실하고 진실을 외면하는 타성을 불러온다.
기신론의 진여연기설, 십지경(十地經)의 지론종(地論宗)등으로 별교를 대표하지만 실제로는 지의시대에 번성하던 진여연기론의 교리체계를 지적한 것이다.
화법4교의 마지막인 원교(圓敎)는 원만한 교법이라는 뜻이다. 차별이나 대립 또는 단절이나 고립을 인정하지않고, 공과 유는 물론이고 현상과 실상의 모두가 중도실상의 원만한 존재라는 말인가 하면 그러한 원리를 말하는 교법과 경전의 부류를 뜻한다. 다시 말해 워낙 현실세계에는 차별이나 대립 그리고 배제나 단절과 같은 이법이나 상황도 없을뿐더러 붓다의 교법도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체라면 중도이던 실상이던 만유(萬有)를 조화하고 포용하고 절대화하는 창조와 생명의 실상이지, 차별화하고 파괴하고 떨쳐버리는 반존재 반현상의 허세나 허상 과 같은 역기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에 대한 표현도 다양하다. 원융부사의(不思議)의 원묘(圓妙), 본구(本具)만족의 원만(圓滿), 일즉일체의 원족(圓足), 초후무차(初後無差)의 원돈(圓頓)등이다. 이러한 중도의 교법이 부처의 본의라는 것이고 법화경으로 대표되며 대승경전중에서 3승의 구별을 없애고 1불승을 말하며, 융화적 중도를 내용으로 하는 유마경.화엄경.반야경.영락경(瓔珞經) 등이 포함된다.
천태 6조 형계(荊溪)는 이 원융한 중도에 대해서 당시에 유행하던 진여연기설의 표현을 원용하여, '만물은 진여이니 불변하는 까닭이요, 진여가 곧 만물이니 인연을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그래서 우주는 대진여의 법계요, 사바세계가 곧 적광토(寂光土)라고 결론하였다.
천태지의는 법화현의에서 이같은 뜻을 담아 '색갈 하나 향기 하나 모두가 중도로다'. 또는 '세상살이 정치 산업 골고루 실상일세' 라고 적었다.
철학에서는 이를 현상즉실재론, 천태학에서는 '구(具)의 사상'이라 하여, 공관철학에서 비(非), 부(不), 무(無)와 같은 부정접두사로서 표현하려든 것과는 다른 듯이 긍정화하였다. 인간도 세계도 모두가 개방되고 자유화된 개회법문의 본방에서 부정접두사의 존재는 양비(兩非) 아닌 백비(百非)라 할지라도 실상 아닌 부정만이 강화될 뿐이다
실천적으로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4제법에 대해서도 3장교의 경우에는 생멸의 이원론으로 해석하여 8정도를 닦아(生), 번뇌를 없앤다(滅)는 식의 수행법이므로 생멸의 4제설이라 하고, 통교에서는 일체공으로 탕탕한 가운데 닦고 버리고 얻을 바의 기반과 경계가 붕괴되어 무생무멸(無生無滅)의 번뇌요 열반이므로 무생(無生)4제설이라 한다. 그리고 별교에서는 하나의 실체와 무량한 현상계를 차별화하고 수행의 길도 무량하듯이 무량4제(無量四諦)라 정의했다.
그런가 하면 원교에서는 일체가 원만하고 신묘한 존재이며 구족한 존재이므로 닦고 말고 할 작위의 입지가 박탈되었으므로 무작(無作)의 4제라고 말한다. 원교의 무작원만에서 작위를 일으키는 것, 이것이 곧 보살의 서원행이고 무연(無緣)자비이며,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교의 도량에서는 모든 시시비비가 녹아지고, 다만 숨쉬고 보고 듣고 말하는 자연한 현실만이 활연하여져서 구체적이고 평범하며 안이한 수행의 길에 들게 된다. 수행론에 있어서도 시대의 조류와 유행을 따라 유심사상의 영향으로 일념삼천설과 같은 관념체계의 구성이 있긴 하지만 그나마 제법실상의 개회설의 전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시 제법실상은 천태원교의 생명의 원천이다. 그 원천적인 처방이 무작의 4제설이고 법화일승보살의 묘행이다.
지금까지 본 화법4교(化法四敎)의 내용, 말을 바꾸어 부처의 교육지침은 결국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라는 존재관의 문제였다. 장교에서의 현실기준의 유(有)의 존재관, 통교에서의 부정적 공의 존재관, 별교에서의 중도의 초월적 존재관이라는 이 셋은 진리표현의 개념도구로서 유제(有諦) 공제(空諦) 중도제(中道諦)의 3제라고 한다. 장교와 통교와 별교에서는 3제를 각각으로 편파로 주장하므로 융통하지 않은 것이라 하여 각별3제(各別三諦)라 한다. 그러나 천태원교에서는 원융3제(圓融三諦)라 하여, 3제를 한사물의 존재성에 대한 3범주로 보고 서로 일체로서 존재의 융통무애한 존재성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천태학의 원융사상이자 구조이론이다.
수행으로 보면 나날의 체험과 갖가지 일들이 다만 공이며 유이며 중도인 어느 하나만이 아니라 3제원융의 원만 원묘한 진실임을 증득(證得)하는 일이 가장 직접적인 진리에의 동참이요 동사(同事)이며 교법의 수행이다. 여기에서 주체적이고 구체적이며 용이한 수행방법으로서 한마음에 삼제를 관조하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관심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천태실상론의 바탕에서는 제법이라 한대로 구태여 마음만을 거론할일이 아니다. 오히려 색심실상이래야 객관성이 있지 일심이란 오해스럽다. 이점은 앞서 지적한 바로 시대상황의 탓이자, 한편으로는 무상변전(無常變轉)의 현실에서 가장 구체성과 주체성 그리고 핵심적이며 절실한 한기준을 선택한다면 역시 일심을 가장 확실한 몫으로 판단한 것이 천태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심(一心)은 현상계나 연기의 본원으로서가 아니라 역시 원융실상의 주체일 따름이다.
원융3제(圓融三諦)를 자기화하는 관법이 원융삼관이고, 기준을 일심으로 할 때는 일심삼관이다. 관법이란 선정 삼매들과 유사한 말로 천태에서는 보통 지관(止觀)이라 한다. 지(止, samatha)는 삼매와 유사한말로 평정이나 평정한 상태라는 뜻이며, 관(觀, vipasyana)은 관조 인식 달관 등의 뜻이다. 흔히 점차(漸次止觀)지관 부정(不定)지관 원돈(圓頓)지관을 천태가의 3종지관으로 다루기도 하지만 원교의 지관설은 원돈지관이다. 그리고 원돈지관의 체계는 대발심 -방편행 -정수행(正修行)으로 이루어진다.
(5). 실상(實相)의 실행 -- 원돈(圓頓)지관
불가에서는 옛부터 듣는 지혜(聞慧)와 생각하는 지혜(思慧)와 실행하는 지혜(修慧)를 3혜라 했다. 실행의 지혜란 생각으로 자각한 내용을 실천하는 지혜이다.
불교학은 학문 일반이나 과학과는 다르다. 듣고 이해하고 깨달은 바를 생활로 실행시키지 못한다면 불교 곧 깨달음의 종교도 또는 깨달음도 아닌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거짓이거나 비슷한 것이거나 속임수일 뿐이다. 불교가 불교이기 위해서는 몸으로 구체화하고 실현시켜야 불교인 것이다. 실행과 수도가 빠진다면 종교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을 추구하는 학문인 과학일 따름이다. 종교는 객체적인 관찰이나 인식을 다시 주체화하여 실행하고 체험하고 증득하는 점에서 과학과 다르다. 특히 불교에서는 학문이란 배우고 묻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체험하고 실현하는 인간형성의 행도(行道)라는 점에서 공부(工夫)라는 말을 즐겨 써왔다. 붓다는 깨달은 이가 아니라 깨달음을 이루는 이이고 깨달음대로 실행하는 성자요 인도자이다. 또한 그가 보인 깨달음이나 교화도 인간성취의 깨달음이요 세계의 구호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행도가 불교인 것이다.
따라서 이와같은 실행사상이 강하게 부각된 결과가 교관쌍미이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천태학의 본질이 일실상(一實相)이요 그 전체적인 전개원리가 원융삼제이며 상관성의 전개가 일념삼천설이듯이 교법과 지관을 일체화한 것이 원돈지관(圓頓止觀)이다. 지의는, 당시의 불교계가 교학적으로 정리되고 체계화되면서 이론적인 이해를 위주로 하던 교계의 상황을 실행불교로 전환하여 법화현의에서의 표현처럼 생활실상을 주장한 것도 원돈지관의 사상적 기초위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그래서 천태학의 수행체계인 25방편은 수행방법의 구체화로, 4종삼매는 수행범위의 개방으로 생활화하고, 10승관법은 생활의 내용을 묘법화한 개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생활화의 실행으로 규정한 4종삼매는 천태지의가 임종에 임해 제자들에게 '4종삼매를 등불로 삼으라'고 유시한 점이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한두가지 실예를 더듬어 본다. 25방편의 경우, 처음에 5가지 인연을 갖추라고 한 내용의 첫째는 계율을 갖추어라. 둘째, 의복과 식량을 갖추어라. 셋째는 조용한 곳을 마련하라 등이다. 삼매론에서도 상좌삼매의 경우에, 90일간을 기간으로 하라, 원융실상의 묘법을 관조하라, 권태로울 때에는 칭명(稱名)염불로 도우라고 하였다. 엄격하기 마련인 수행의 분상에서 '권태로울 때'라는 표현 하나만해도 원돈지관의 현행적인 동사(同事)의 감각이 물씬하다.
마찬가지로 일심삼관의 일심법의 기준설정에 대하여도, '한발보다는 한자요, 한자보다는 한치이니, 색 수 상 행의 4온은 접어두고 다만 식온을 관조하라 식온은 마음이라'라는 말로 일심이 기본경계이며, 무엇보다도 확실한 현실의 구체성이라는 현행의 행도에 대하여 선택을 우선하고 있다.
그리고 이 현행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원돈의 의미로 이렇게 대답한다. '원돈이란 처음부터 실상을 인연하며, 경계를 조작하면 곧 중도실상이요, 진실 아닌 것이 없다.'라고 했다. 처음과 끝이 차이가 없는 것이 원돈이라고 한 실상이 노출된 정답이다.
그러기에 큰마음을 내어라(發大心)에서의 큰마음의 내용은 곧 4제의 교법이요, 4홍서원의 서원심(心)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곧 자타를 대자대비화하는 무작의 4홍서원이 원교행실(圓敎行實)의 큰마음인 것이다.
그런데 법화경의 경설대로 수행한다면 법사품이나 공덕품에 나오는, 수지 독경 송경 해설 서사(書寫)의 5종법행이 일반적인 내용이고, 이밖에 특정의 교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예를 들면, 관음보문품의 칭명염불이며 보현품의 독송수행하며 약왕보살품의 소신(燒身)공양등은 법화행자(行者)의 실천규범으로서 중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천태지의는 전통적인 다양한 수행법들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방법과 형식에 따라, 25방편의 예비과정과 4종삼매의 정리과정을 설정하고, 마지막으로 10승관법(十乘觀法)의 원돈지관이라는 주관적 관행의 방법을 창안하였다.
형계담연은 지관대의(止觀大意)에서 '원돈지관은 모두 법화경설에 따른 것이다. 원돈지관은 법화삼매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라고 하였다. 10승관법의 명칭마저도 법화경 제2 방편품의 10여시(十如是)와 제3 비유품의 대백우거(大白牛車)의 일승(一乘)을 따와서 십승이라 고안하고 관법으로 창안하여 십숭관법이라 했다는 것이다.
마감으로 마하지관의 제 1장 대의 중에서, 5략(五 )이라는 내용의 목차를 적어 소개한다. 큰마음을 내어라(發大心), 큰수행을 닦으라(修大行), 큰과보를 챙겨라(感大果), 큰믿음을 가저라(裂大網), 큰곳으로 가거라(歸大處) 의 다섯이다.
법화경(法華經) 총설(總說)
목 차
● 적문(迹門)
■ 적문의 구성
■ 정종분-제2장
■ 정종분-제6장~제9장
■ 유통분-제10장에서 제14장
● 본문(本門)
■ 본문의 구성
■ 서분(序分)-제15장
■ 정종분-제16장 ~ 제17장
■ 유통분-제18 ~ 제28장
법화경(法華經) 각품해설
1. 서품(序品)
2. 방편품(方便品)
3. 비유품(譬喩品)
4. 신해품(信解品)
5. 약초유품(藥草喩品)
6. 수기품(授記品)
7. 화성유품(化城喩品)
8.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
9.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
10. 법사품(法師品)
11. 견보탑품(見寶塔品)
12.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
13. 권지품(勸持品)
14. 안락행품(安樂行品)
15.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
16.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17.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
18.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
19.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
20.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
21. 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
22. 촉루품(囑累品)
23.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24.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25.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26. 다라니품(陀羅尼品)
27. 묘장엄왕본사품(妙莊嚴王本事品)
28.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
법화경(法華經) 비유
● 법화칠유
● 제1 화택의 비유
● 제2 궁자의 비유
● 제3 운우의 비유
● 제4 화성의 비유
● 제5 궤보주의 비유
● 제6 정주의 비유
● 제7 의사의 비유
● 적문(迹門)
■ 적문의 구성
법화경의 전반은 일승의 교리를 갖가지 방면에서 명확하게 증명한 것이며, 후반은 불타의 무량한 수명을 밝힌 것이다. 천태대사 지의(538-597)는 법화경의 28품을 이등분하여 전반 14품을 적문, 후반 14품을 본문이라 불렀다.
적문이란 이 땅에 자취를 드러낸 석가불이 '개삼현일(開三顯一)'에 의해 일승을 밝히고 이승이 성불할 수 있는 길을 밝히고있는 부분이다. 본문은 이 자취를 드러낸 불타를 초월하여 실재하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본불(本佛)을 천명한 부분이다.
이 불타는 열반에 들지않고 항상 영취산에 계시면서 중생을 구제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우선 적문 중에서 일승의 사상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를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적문은 제1 서품, 제2 방편품, 제3 비유품, 제4 신해품, 제5 약초유품, 제6 수기품, 제7 화성유품, 제8 오백제자수기품, 제9 수학무학인기품, 제10 법사품, 제11견보탑품, 제12 제바달다품, 제13 권지품, 제14 안락행품이다.
이상의 14품을 3분한다. 즉 제1서품은 적문의 서분이고, 방편품에서 수학무학인기품까지 8품은 적문의 정종분이다. 이 부분은 성립사적으로 오래된 부분이다. 다음 법사품부터 안락행품까지를 적문의 유통분이라 한다.
■ 정종분-제2장
제1 서품에서는 불타가 무량의처 삼매에 들어 갖가지 기적과 불가사의한 신통을 보이며 법화경을 설하는 프롤로그로 삼고 있다.
제2 방편품은 적문, 정종분 중의 정종분이며 일승을 천명한다. 즉 석가불이 그때까지 설했던 삼승은 중생을 불도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설이다. 실제로는 일체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 일승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불타의 본회(本懷)이다.
바야흐로 그런 시절이 왔기 때문에 이것을 밝히는 것이라 한다. 이 일승의 가르침에 의해 성문승이나 벽지불승의 이승도 성불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제불 밑에서 수많은 중생이 불탑공양 등의 행법으로 불도를 성취한 사람이 되었던 실례를 보인다.
미래의 제불과 현재의 제불 밑에서도 이와 같음을 설한다. 이미 전술했듯이 여기서 불탑신앙에 의해 불도를 성취한 사람이 되었던 실례를 수없이 밝히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설사 성문이나 연각에게 성불한다는 보증을 준다 하더라도 그들이 실행할 수 있는 '성불의 행법'을 보여주지 않으면 일승의 가르침도 무의미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제3의 비유품은 양거(羊車), 녹거(鹿車), 우거(牛車)의 3거를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3거에 대비하고 있다. 삼승을 구분해서 설하는 것은 화택인 3계에서 중생을 구출하기 위한 방편의 가르침이며, 사실은 모든 중생을 성불 시키는 일불승의 가르침임을 표명한다.
이것을 3거의 비유로 나타내기 때문에 비유품이라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삼승을 통합한 일불승을 대백우거(大白牛車)에 비유한다. 그러나 비유품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에 설해진 사리불의 수기이다. 사리불은 그때까지 대승의 가르침을 듣더라도 '그것은 큰 마음이 있고, 위대한 용맹심을 발한 보살에게만 해당하는' 가르침이고 자신과는 무관한 가르침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방편품의 가르침을 듣고 불타의 대자비를 입어 이제까지 자신이 이해했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오늘 비로소 알았습니다. 참다운 불타의 자식임을. 불타의 입에서 태어났으며, 법화로 태어났으며, 불법의 대요를 얻었다"고 불타에게 고백하고 있었다.
사리불이 불타의 자식이란 자각을 얻었기 때문에 불타는 그에게 장래작불의 수기를 주었던 것이다. 불타의 자식이므로 성장하면 불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불자(佛子)라는 자각의 중대한 의미가 있다. 일불승의 교리는 '누구나 불자라는 자각을 할 수 있다'라는 것으로 지탱되지만 이러한 자각은 불타의 자비에 닿아서 생기는 것이라 생각된다. 법화경에서 불타의 자비가 각종 형태로 설해지거나 강조되는 것은 이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불자란 용어는 대승경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으므로 이 말이 어느 경전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는가는 결정하기 어렵다.
제4 신해품은 수보리, 마하가섭, 마하가전연, 마하목건련 등의 4대 성문에게 성불의 수기를 주는 것이 내용이다. 즉 일불승의 가르침을 듣고 이들도 "우리들은 참으로 불자인줄 몰랐으나 이제 진정으로 알았다"고 한다.
이 품의 초두에서는 그들이 불자란 자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장자궁자의 비유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품의 말미 게송에서는 그들이 불자의 자각을 얻었기 때문에 진정한 성문이며, 그 의미는 불도(佛道)의 소리로 일체 중생에게 들려주는 것이라 한다. 불도(佛道)의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성문이라 한다'라는 성문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제5 약초유품은 4대 성문의 신해에 대하여 불타는 '불타의 자비가 일체 중생에게 평등하다는 것'을 3초 2목의 비유로 설명한다. 즉 비는 평등하게 대지에 내리지만 큰 나무는 많은 비를 수용하고 작은 초목은 적은 비를 수용하는데 그것으로 만족하고 각각 비를 흡수해 성장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제자도 삼승 각각으로부터 이로움을 받는다. 때문에 성문은 성문의 입장에서 보살행을 닦는 것이라 하고, 성문에 대해서도 "너희들이 행하는 바는 보살도다"라 말한다. 이 점에서 삼승을 개방하여 일불승을 드러낸다'(삼승 전체가 성불의 의미가 있는 것). 즉 개삼현일(開三顯一)의 의미가 나타난다.
■ 정종분-제6장~제9장
제6 수기품은 불자의 자각을 성취한 4대 성문에게 불타가 장래작불의 수기를 준다. 이중 마하가섭과 수보리에 대해 당래에 수많은 불타를 받들어 모시고 공양 공경하며 범행을 닦아 보살도를 갖추어 성불한다고 하는데 반해 대가전연과 대목건련의 경우는 수 많은 불타를 공양하고 그들의 열반 이후에는 탑묘를 세워 칠보나 각종의 꽃이나 영락으로 탑묘를 공양한 공덕으로 성불한다고 한다. 여기도 불탑공양이 성불행이라 한다.
당시 대승불교에서는 성불행으로 삼아승지겁에 걸쳐 6바라밀을 수행한다는 불전문학에서 발전한 설과 반야경이 설하는 반야바라밀의 실천 혹은 아미타불의 실천 등이 설해지고 있는데 그들과 한께 불탑공양도 성불행으로 유행했던 것이다. 다만 법화경은 처음에는 불탑공양을 설하면서 중간에 경전수지로 전환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법화경의 중점이 방편품에서 여래수량품으로 이동한 것을 보이고 있다.
제7 화성유품은 삼승교가 방편임을 화성의 비유로 보이기 때문에 화성유품이라 한다. 즉 한 사람의 스승이 5백 유순 거리의 진보처(珍寶處)로 무리를 인도하는데 도중에 험난한 길이 많아 처음부터 목적지가 5백 유순 떨어져 있다고 하면 무리들이 공포심에 여행을 단념할까 봐 방편으로 우선 3백 유순 거리에 화성을 만들고 이것이 목적지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도착한 뒤에 본래의 목적지는 5백 유순의 진보처라 밝히고 무리를 목적지로 인도한다고 한다. 이제 삼승교도 이처럼 우선 삼승교로 중생을 인도하고 근기가 성숙하면 일불승을 밝혀 모든 사람을 성불로 인도한다. 다만 화성유품에서는 이러한 비유를 설하기에 앞서 3천 진점 겁의 옛날에 대통지승불이 계셨는데, 이 불타의 재세시대에 16인의 왕자가 있었다.
대통지승불은 이들에게 우선 4제와 12인연의 교리를 설파하고 그들을 출가 시켜 보살 사미로 만들었다. 그 후 법화경을 설하여 그들이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여 성불 시켰다고 한다.
여기서 성문 사미는 처음에 성문승으로 출가하며, 이후 법화경을 듣고 일불승으로 전향한다. 이들 16사미는 시방국토에서 각각 성불하는데 그 중에 동방의 아촉불이나 서방의 아미타불국토가 있다. 때문에 화성유품이 성립한 때에는 아촉불이나 아미타불의 교리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아미타불의 안락세계는 약왕보살본사품에도 나타난다.
제8 오백제자수기품은 전술한 16왕자의 옛날 인연담을 듣고 부루나, 교진여, 5백의 아라한이 심심한 본원을 발하여 불타에게 성불의 수기를 받고 있다고 설한다.
제9 수학무학인기품은 아난, 라후라, 유학, 무학 등 이천 명의 성문이 당래작불의 수기를 받는다고 한다. 이상 8장 중에서 방편품과 비유품의 초두 부분은 일불승을 설하기 때문에 천태대사는 이것을 설법주(說法周)라 한다.
다음에 비유품의 나머지 부분에서 화성유품까지를 인연주(因緣周)라 한다. 천태는 이들을 3주설법(三周說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8장을 적문의 정종분이라 한다.
■ 유통분-제10장에서 제14장
제10 법사품 제11 견보탑품, 제12 제바달다품, 제13 권지품, 제14 안락행품의 5장을 천태대사는 적문의 유통분으로 보고 있다.
단 이 부분은 유통분의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불멸 후 법화경의 부촉 문제를 제기하고 다음의 본문에 연결할 의도가 엿 인다. 법화경의 부촉 문제는 제21 여래신력품, 제22 촉루품에 이르러 해결하는 것이다.
제10 법사품에서는 법화경의 일 구 일 게라도 듣고 일념으로 기뻐하는 자는 모두 성불의 수기를 받는다고 한다. 수기의 조건이 ‘불자의 자각’에서 ‘경전수지’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법화경을 유통하기 위해 수지, 독(讀), 송(誦), 해설, 서사(書寫)하는 5종법사의 수행과 법화경을 공경 공양하는 10종 공양을 설하고 있다. 그리고 여래의 멸 후에 법화경을 홍포하는 사람은‘여래의 사(使)’라 칭찬하며, 멸 후의 홍경자(弘經者)는 "여래의 집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중생을 위해 분별해서 설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법사품은 교법의 전지(傳持)를 설하는 점에서 유통분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여기서부터 불탑신앙이 경전수지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경전을 모시는 곳에는 사리를 안치하지 않는 불교사원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경전수지를 강조하는 것은 외부에서 가해진 법화경에 대한 박해가 강했기 때문이다.
불탑신앙 등의 이행도로 성불했다던가 성문이나 연각도 성불할 수 있다는 등을 설하기 때문에 엄격한 수행을 하고 있던 대승불교도에게 박해를 받았을 것이지만 당시는 성문승의 부파교단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전통불교의 대표적 존재인 사리불이나 목련 등에게 신흥불교인 법화경이 성불의 수기를 주었다는 것은 매우 불손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따라서 전통불교 측에서도 법화경에 대한 비난이 가해졌을 것이다.
이러한 비난과 박해에 대해 법화교도는 법화경의 전통이 없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느끼고 여기서 법화경의 수지나 서사, 공양 등이 주창 되었다고 생각된다.
제11 견보탑품에서는 대지에서 다보여래의 대보탑(大寶塔)이 용출해서 공중에 걸린다. 그리고 탑 속에서 커다란 음성이 나며, 석가불이 설하는 법화경의 설법이 진실이라고 증명한다.
다보불의 불탑이 여기에 용출했던 것은 다보불은 무량한 과거세의 불타이지만 법화경이 설해지는 장소에 언제나 그의 탑을 나타내서 법화경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로 서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거기서 석가불은 시방세계에 있는 자신의 분신인 제불을 소집하며, 시방의 제불이 모여 8방에 산재했다. 그리고 석가불은 다보불 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다보불은 자리를 내주어 탑 속에 두 불타가 나란히 앉는다.
석가불은 대중을 향하여 “오래지 않아 여래가 입멸하리라”알리고 멸 후에 법화경을 부촉해야 할 사람을 모집한다. 이런 점에 유통분의 의미가 있지만 그러나 이런한 호소에 응하여 나타난 사람은 다음의 제바달다품에는 없고 그 다음의 권지품 이하에 나온다.
제13 권지품에서 약왕보살 등 이만 명의 보살을 필두로 80만 억 나유타의 보살, 기타 무수한 보살들이 불타의 말씀이 계시면 악세에 법화경을 홍포하리라는 서원을 고백한다. 거기서 이 품은 끝나며, 다음의 제14 안락행품에서는 바로 이것에 대답하는 불타의 설법이 없다.
도리어 문수보살이 불멸 후의 악세에 법화경을 홍포하리라 서원했던 이들 보살의 말과 연관해서 법화경 홍포의 필요성을 불타에게 묻고 있다. 이 물음에 대답하여 불타가 4안락행을 설하고 있는 것이 안락행품의 주제이다. 이 4안락행은 법화경 수지자의 마음자세를 나타낸 것으로서 예로부터 중요시되고 있다.
이상의 14품에서 적문은 끝나지만 유통분이 의미하는 부촉의 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본문으로 넘겨진다. 한편 제바달다품은 석가불과 제바가 지은 과거세의 인연을 설하고 아울러 용녀성불을 설한다. 용녀 즉 여성의 성불을 설하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법화경의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 본문(本門)
■ 본문의 구성
천태대사가 말하는 본문은 제15 종지용출품, 제16 여래수량품, 제17 분별공덕품, 제18 수희공덕품, 제19 법사공덕품, 제20 상불경보살품, 제21 여래신력품, 제22 촉루품, 제23 약양보살본사품, 제24 묘음보살품, 제25 관세음보살보문품, 제26 다라니품, 제27 묘장엄왕본사품, 제28 보현보살권발품 등 14장이다.
이 중에서 여래신력품까지의 7품은 성립이 오래된 것이며, 촉루품 이하는 후대의 첨가 부분으로 간주된다.
여래신력품까지는 묘법화, 정법화, 첨품법화에서 그 순서가 일치한다.(단 정법화의 첨품법화는 제바달다품을 별도로 만들지 않아 도합27품이다.) 묘법화에서는 여래신력품 다음에 촉루품이 있으며, 여기서 새삼스럽게 부촉이 설해지는데, 이것은 경전이 끝났던 시기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정법화와 첨품법화는 촉루품을 경의 말미로 옮기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나집 역본이 정법화 등 보다 오래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첨품법화에서는 다라니품이 여래신력품 다음에 놓여있다. 이처럼 끝의 7품은 품의 순서도 동일하지 않다.
■ 서분(序分)-제15장
내용을 살펴보면 최초의 제15 종지용출품 전반은 본문의 서분이다. 여기서는 타방국토에서 모인 8만 항하사를 넘는 보살들이 불타에게 불멸 후 사바세계에서 법화경을 홍포하리라 말한다. 때문에 이것은 견보탑품에서 제기된 불멸 후 부촉의 연장선상이다.
불타는 이런 말들을 제지하고, 이 세계에 6만 항하사 등의 보살이 있다고 설명한다. 불타께서 이런 말씀을 하자 상행(上行)등의 4대 보살을 상수(上首)로 하는 6만 항하사의 보살들이 대지에서 솟아나 석가불과 다보불을 예배하고 허공을 가릴 정도로 정렬해 앉는다.
이 무량한 보살들은 석가가 오랜 옛날부터 이 땅에 있으면서 교화했던 보살이기 때문에 본화(本化)라 한다. 이처럼 오랜 옛날부터 석가가 이 땅에 있으면서 보살을 교화하고 있었다고 하므로 이 석가불은 석가족의 왕궁에 태어났던 석가불을 초월하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석가불은 어떠한 불타인가 하는 것이 이 품의 이면에 전제되어 있다. 이것이 여래수량품에서 구원실성의 석가 진신을 개현(開顯)하는 서곡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서분의 의미가 있다.
■ 정종분-제16장 ~ 제17장
제16 여래수량품은 구원실성의 본불(本佛)을 밝히는 품이고, 본문 정종분의 중심이다. 즉 석가족 왕궁에 태어났던 석가불은 80세로 세연(世緣)을 마치고 멸도 한 듯이 보이지만 멸도 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붓다가야에서 처음 성도한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의 옛날에 성불했으며 성불한 이후 무량무변 천만 억 나유타 겁을 지났다. 또한 남아 있는 수명도 이것의 배라 한다. 이렇게 수명이 긴 것은 석가불의 비밀 신통력 때문이다. 이렇게 석가불의 수명이 긴데도 불구하고 전도된 중생은 가까이 있어도 불타를 볼 수 없다. 그래서 불타를 반 열반했다고 생각한다.
사리를 공양하고, 연모하는 마음을 품으며, 갈앙심을 낸다. 그래서 불타는 만나기 어렵다는 마음을 일으키며, 불도를 희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불타는 방편으로 멸도를 보인 것이며, 실제로 불타는 멸도 한 것이 아니다.
항상 영취산에 계시며, 다른 주처에도 계신다. 중생이‘종말이 되어 큰 불에 이 세상이 타버린다’고 생각할 때에도 “나의 불토는 안온하며, 항상 천인(天人)이 충만해 있다.”고 말한다.
법화경 이전에도 불타는 무여의 열반계에 실재한다는 설이나 법신으로 실재한다는 설이 있었는데, 여래수량품처럼 인격적인 불타로 상주한다는 설은 법화경이 처음이라 보아도 좋다. 법화경은 불타의 수명이 장원(長遠)한 이유를 여래의 비밀 신통력에서 구하고있다.
4신족을 잘 수행한 사람은 일 겁 동안 이 세상에 살수 있다는 것은 아함경에도 설하고 있으며, 옛부터 불타의 수명은 신통력을 기초로 주장된 것이다. 한편 여래수량품에서는 방편으로 열반을 보이는 것을 ‘양의(良醫)의 비유(比喩)’로 설명하고 있다.
제17 분별공덕품은 불타의 수명이 장원(長遠)하다는 가르침을 듣고 신해(信解)하는 사람이 얻는 공덕을 보여주는 품이다. 전반에서는 여래수량품의 불수장원(佛壽長遠)의 설법을 듣고 한 무리의 대중이 위대한 법익(法益)을 얻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여래수량품을 중심으로 하는 본문의 정종분이다. 이하의 28품 까지는 본문의 유통분이다.
분별공덕품 후반은 불수장원(佛壽長遠)의 설법을 듣고 일념으로 신해하는 사람이 얻는 공덕이 무한함을 나타내며, 불수장원을 설하는 법화경을 서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독송하고 수지하는 사람은 사리 탑을 세우거나 승방을 건립하고 뭇 승려를 공양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 대신에 이 경전을 위해 불교사원을 세워야만 한다. 일체의 천인(天人)은 그 불교사원을 공양하고 불탑처럼 공경하리라 말한다.
■ 유통분-제18 ~ 제28장
수희공덕품은 불수장원을 설하는 법화경을 듣고 기뻐하는 공덕을 나타내는 품이다. 다음으로 제19 법사공덕품은 법화경을 수지, 독, 송, 해설, 서사하는 법사는 6근이 청정해지는 공덕을 얻는다고 설한다.
제20 상불경보살품은 법화경을 수지하는 자에게는 몽둥이(杖木), 와석(瓦石), 욕설(惡口), 매리(罵 )등의 각종 박해가 있다고 설명하고, 옛날 위음왕 시절 상불경보살이 박해를 참으며 인간 예배를 행했다고 설한다.
제21 여래신력품은 상행 등 땅에서 솟아난 보살이 불멸 후에 홍경(弘經)을 서원한데 대해 여래는 대중들 앞에서 대신력을 나타내어 여래 멸 후에 법화경의 수지, 독, 송, 해설, 서사, 여설수행(如說修行)을 상행 등에게 부촉한다. 그리고 법화경이 안치된 탑을 건립하고 공양해야만 한다고 명령한다. 이것 때문에 전술한 견보탑품에서 불타가 멸도 후 경의 부촉을 당부했던 것이라 대답하는 것이다.
제22 촉루품은 새삼스럽게 가지런히 정렬해 앉아 있는 무량한 보살들에게 법화경을 부촉한다고 설한다. 이것으로 부촉은 이중이 되지만 촉루품은 어느 경전에나 있기 때문에 경전의 체제를 정리하기 위해서 후에 첨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교학적으로는 전술한 상행보살 등에게 한 것은 별부촉, 이 품의 부촉은 총부촉이라 해석한다. 여하튼 이 품은 촉루품이란 품명에 걸맞게 일경의 말미를 설한다. 즉 석가불이 다보불의 법좌에서 일어나 대신력을 나타내고 회좌(會座)의 무량한 보살들에게 법화경을 부촉한다.
그 후 시방(十方)의 석가 분신은 각각 본래의 국토로 돌아가고 ‘다보불의 불탑도 본래와 같았다’고 설한다. 그렇기 때문에 법화경의 회좌는 여기서 해산하게 된다. 그러나 다보불탑은 이후에도 약왕보살본사품, 묘음보살품 등에도 나타나므로, 다보불탑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처럼 생각되지만 다보불탑은 법화경이 설해지는 곳에는 어디에든 나타난다고 하니까 일체처에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법화의 회좌는 촉루품에서 해산된 것이 분명하다. 여하튼 신력품에서 땅에서 솟아난 보살에게 멸 후의 홍경을 부촉하는 것으로 법화경 후반의 중심 부분은 끝나는 것이다.
다보여래의 불탑이 대지에서 솟아나서 공중에 걸려있는 것을 말하는 제11 견보탑품의 설명이 여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 제바달다품이나 안락행품, 기타 보강된 부분이 있지만 어쨌든 견보탑품에서 종지용출품, 여래수량품, 신력품 등을 중심으로 하는 법화경 후반부도 이미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라 본다면 경전의 제목인 정법(正法)에는 방편품의‘일불승의 법’과 함께 여래수량품의‘불수무량(佛壽無量)의 법’도 포함되어 있다고 이해해야만 한다.
종지용출품의 6만 항하사 지용(地涌)의 보살을‘세간법에 물들지 않는 것이 연꽃이 물에 있는 것 같다’고 설하며, 연꽃이 나오고 있는 점에서 생각하면 정법연화라는 경의 제목이 정리된 시기에는 여래수량품을 중심으로 하는 후반의 중심 부분도 이미 존재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법화경에는 촉루품 뒤에 약왕보살본사품 등의 6품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경전의 제목인 정법을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다.
제25 관세음보살보문품은 관세음보살이 33신으로 보문시현(普門示現)해서 고뇌하는 중생들을 구원한다고 설하는 것이며, 불타의 자비를 구현하는 것으로서 법화경에 있는 것이 적당하지만 후대의 삽입이라 간주된다.
보문(普門)이란 일체의 문이란 의미로서 관음이 다양한 모습으로 화현해서 나타나는 문(출구)라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제28 보현보살권발품은 여래의 입멸 후에 법화경을 수지하는 자는 보현보살이 상아가 여섯개인 흰 코끼리를 타고, 대 보살들과 함께 나타나서 법화행자를 수호한다고 한다. 이것은 천태종에서 말하는 법화삼매와 관계가 깊다.
법화경(法華經) 각품해설
1 서품(序品)
이 서품은 법화경 설법을 전개함에 있어서 법화경이 어떤 인연으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느 부처님이, 어느 사람들을 상대하여 설법하였는가를 밝히고 있다.
그때에 대하여는 한때라고만 되어 있는데, 모든 경전이 이와 같이 설한 시기를 분명히 말하지 아니하고 다만 한때라고 표현함이 공통적이다. 장소에 대하여는 왕사성(王舍城)의 영축산이라고 되어있다.
이경을 설한 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설법의 상대는 여러 중생들인데, 첫째로 훌륭한 비구의 무리 1만2천명이다. 이들은 부처님의 뛰어난 제자들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마음이 청정한 무리들이다.
다음은 비구니들이다. 이 비구니 가운데에는 부처님의 양모인 마하파사파제와 부처님의 부인이었던 야소다라도 있다.
다음은 보살들이다. 이 보살들은 위로 부처의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려는 서원을 가지고 수행하는 사람들로, 그 가운데에는 문수보살촵관세음보살촵미륵보살 등 세상에 널리 그 이름이 알려진 보살들도 함께 한 8만 명이다. 이 이외에도 많은 재가의 선남선녀촵천왕촵용왕 등 한량없는 중생들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이 때 부처님은 조금 앞서 무량의경(無量義經)을 설하시고 무량의 삼매에 드시어 아직 법화경의 설법을 시작하시기에 앞서 여섯 가지 부사의한 상서로운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을 법화육서(法華六瑞)라고 한다.
법화육서란 1. 설법서(說法瑞), 2. 입정서(入定瑞), 3. 우화서(雨華瑞), 4. 지동서(地動瑞), 5. 중희서(衆喜瑞), 6. 방광서(放光瑞)이다.
● 첫째 설법서는 부처님께서 무량의경을 설해 마쳤어도 대중이 일어나지 아니 함이요,
● 둘째 입정서는 부처님이 무량의 삼매에 드심이며,
● 셋째 우화서는 하늘에서 흰 연꽃, 붉은 연꽃의 꽃비가 내린 일이요,
● 넷째 지동서는 대지가 여섯 가지로 진동한 일이며,
● 다섯째 중희서는 대중이 여러 가지 상서를 보고 큰 설법이 있을 것을 짐작하고 기뻐함이요,
● 여섯째 방광서는 부처님의 미간 백호(眉間白毫)에서 광명을 놓아 동방 1만 8천 불국토를 비치신 일이다.
이 여섯 가지 상서를 차토육서(此土六瑞)라고 하고, 부처님의 방광에 의하여 비친 동방 1만 8천 불국토에 나타난 여섯 가지 광경을 피토육서(彼土六瑞)라고 한다.
피토육서는 1. 견육취중생서 (見六趣衆生瑞), 2. 견제불서(見諸佛瑞) 3. 문불설법서(聞佛說法瑞), 4. 견사중득도서(見四衆得道瑞), 5. 견보살소행서(見菩薩所行瑞), 6. 견제불열반서(見諸佛涅槃瑞)이다.
● 첫째, 견육취중생서는 지옥촵아귀촵축생촵수라촵인간촵천상의 6도를 윤회하고 있는 인생의 모습을 부처님의 방광에 의하여 밝혀 볼 수 있는 일이요,
● 둘째 견제불서는 피토(彼土)의 여러 부처님을 친히 볼 수 있는 일이며,
● 셋째 문불설법서는 피토(彼土)의 부처님의 설법하심을 들을 수 있는 일이요,
● 넷째 견사중득도서는 비구촵비구니촵우바새촵우바이의 사부대중이 수행하여 점차 그 비위가 향상되는 과정을 볼 수 있음이며,
● 다섯째 견보살소행서는 많은 보살들이 갖가지 인연, 믿음과 알음알이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수행하고 있음을 보는 일이요,
● 여섯째 견제불열반서는 여러 부처님의 입멸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일이다.
이 육서는 부처님의 방광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되는 것이지만, 이 방광을 부처님의 지혜로 바꾸어 이해하여 좋을 것이다.
이 법화육서는 법화경 설법이 시작되려는 순간의 법을 들으려는 대중들의 기대와 감격이 어떠하였던 가를 설명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부사의한 상서를 보고 대중들은 모두 이 일이 무슨 까닭인가 하고 의심을 일으켰다.
이 때, 미륵보살이 대중을 대표하여 문수보살에게 여섯 가지 부사의한 상서의 연유를 질문 하였다. 문수보살은 미륵보살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문수보살이 일찍이 과거의 여러 부처님의 처소에서도 이러한 서상을 보았는데, 지금의 서상과 다름이 없다. 이러한 서상이 있은 다음 부처님은 묘법연화경을 설하셨다. 그로 미루어 생각하면, 석가모니 부처님도 틀림없이 모법연화경의 큰 법을 설할 것이다.
과거의 부처님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2만의 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의 옛 이야기를 한다. 2만의 일월등명불의 마지막 일월등명불에게는 여덟 왕자가 있었는데 모두 출가하였다.
그 아버지 일월등명불이 열반하신 뒤 여덟 왕자는 묘광(妙光)보살을 스승으로 하여 공부를 하여 모두가 성불하였다.
여덟 왕자 중 맨 끝의 아들은 성불하여 연등불(燃燈佛)이 되었다. 연등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살로 수행하실 때 미래에 반드시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하여 주신 부처님이다.
그때, 묘광보살의 제자에 게으르고 미련하며 명예와 이익만을 탐하는 구명(求名) 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그 때의 묘광보살은 지금의 문수보살 자기이고, 구명은 지금의 미륵보살이라고 선언한다.
이 2만의 일월등명불이 계속하여 묘법연화경을 설하였고 묘광보살도 8십소겁 동안 이 경을 설법하였다 함은 법화경이 만고에 불변하는 진리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2 방편품(方便品)
이 방편품은 법화경 전체 본론의 첫째 품인 동시에 적문(迹門)법화 본론의 첫째 품이다. 그리고 적문법화에서의 이 품은 본문(本門)법화에서의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과 더불어 법화경의 두 기둥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품이다.
방편품의 방편이라는 말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인가. 방편이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법화경에서 말하는 방편은 진실한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높은 산에 오를 때는 그 정상에 오르려면 올라가는 길을 따라 순서를 밟아서 올라가야지 한 걸음에 산정에 오를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이, 진실한 진리의 정상에 도달하는 것도 절차와 순서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낮은 것으로부터 높은 것으로 그 가르침의 정도가 높아지게 되는데, 그러한 절차와 순서가 끝난 다음, 즉 방편이 다한 다음에 부처님의 깨달은 바 진실을 말씀하시게 된다. 이 일을 방편품에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법문을 듣는 사람의 마음과 능력을 따라서, 즉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서 설법을 하신다. 이것이 방편인 것이다.
그러나, 법화경을 설하심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40여년 간에 걸쳐 그러한 방편설법은 대체로 설해 마치셨기 때문에 이제는 스스로의 생각에 따라 스스로의 깨달음 그대로를 말씀하시게 된다. 이것이 진실의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므로 방편품의 처음에 지금까지 40여년간 설하신 법문은 방편의 가르침이요, 지금부터 설하시는 것이 진실한 가르침임을 천명하고 계신 것이다.
이 품(品) 내용의 줄거리를 보면, 부처님께서는 무량의처 삼매에서 일어나 사리불(舍利弗)을 향하여 부처의 지혜는 대단히 깊어서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려워 여래(如來)는 부처가 된 다음 중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인과 비유로 가르침을 펼쳐 무수한 방편으로 중생을 이끌어 갖가지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그러나 부처의 지혜는 10여시(十如是)로 설명되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지혜라 하겠는데, 이것은 부처만이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는 것으로, 성문과 연각 등 소승의 무리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들은 사리불을 비롯한 많은 소승 사람들은 큰 의심을 일으켰다. 일찍이 부처님은 성문과 연각의 무리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두가 해탈할 수 있다고 하시어서 자기들도 그 가르침에 따라 마음의 평온을 얻어 열반에 도달 하였는데, 지금 부처님께서는 부처의 지혜인 제법실상은 우리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하심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이때에 사리불이 대중들의 의심하는 마음을 대표하여 부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은근히 여러 부처의 심심미묘한 진리를 칭찬하시며 저희들 성문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하십니까? 그 내용을 말씀하여 주시기를 세 번 사뢰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모두 거절하셨다. 부처님께서 거절하신 것은 이 진리를 설하면 사람들이 놀라고 의심을 품을 뿐 아니라 증상만(憎上慢)의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아 큰 죄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 때 5천의 증상만 비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난 뒤 부처님께서 부처광이 세상에 출현하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설하신다.
일대사인연이란 부처의 지견(知見 : 지혜)을 중생들에게 개방하여 보이고, 지견을 깨닫게 하고 지견에 들어가게 함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는 중생들에게 그들의 기호에 따라 또는 본성의 차별에 따라 여러 가지 인연촵비유촵방편으로 진리를 설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러한 일들은 모두 부처의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부처는 부처를 이루는 교법인 일승법(一乘法)을 세 가지로 분별하여 성문법촵연각법촵보살법(聲聞法촵椽覺法촵菩薩法)의 3승법(三乘法)을 설하는 일도 있지만, 시방세계 가운데는 오직 일승법이 있을 뿐, 2승도 3승도 있지않다. 이것이 시방세계다
부처를 이룰 것이라 하였고, 끝으로 작은 선행이라도 그 공덕으로 반드시 성불할 수 있음을 설하고 있다.
방편품에는 중요한 가르침들이 설해져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다음에 간단히 진추려 본다.
1 ▶ 1 방편과 진실(眞實) 방편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방법을 이르는 말이다. 이 모든 부처님의 설법인 것이다. 일승법에 의하여 모든 중생이 품에서는 진실의 가르침인 일승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품의 품명을 방편품이라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방편의 3승법과 진실의 일승법 두 가지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품에서는 일불승을 분별하여 3승을 설한다고 하였음과 같이 3승은 일승에 포함되는 것으로 일승 외에 3승이 있는 것이 아니다. 천태대사는 이것을 체내(體內)의 방편이며 비묘(秘妙)방편이라고 하여 일반적인 방편과 구별하고 있다.
법화경 이전에 설해진 3승법은 실은 법화경과 다른 것이 아니고 법화경의 일승법에서 나온 방편일 뿐 모두 일승법의 실용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이 품을 방편품이라 이름하여도 진실과 다르지 아니한 방편이므로 모순이 없다.
그리고 이 품에서는 법화경만이 진실교임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이전의 다른 교설이 진실교가 아닌 것처럼 이해되기 쉽기 때문에 다른 교설이 방편교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어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방편품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2 ▶ 2. 제법실상(諸法實相)과 10여시(十如是) 제법실상의 내용으로서 10여시가 설해져 있는데, 10여시는 인과의 관계, 다시 말하면 연기의 법칙을 설한 것이다. 연기의 진리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고 보면 제법실상의 이치와 연기의 이치는 들이 아니다.
10여시에 있어서 상(相)은 모습, 성(性)은 성질, 체(體)는 주체를 말하는 것이요, 역(力)은 힘, 작(作)은 작용이며, 인(因)과 연(緣)은 어떤 존재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말함이요, 과(果)와 보(報)는 작용에 의하여 지어진 결과를 말한 것이며, 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은 이러한 열 가지가 모두 다 같은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이 10여시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우며 인과가 되어 존재하는 연기법인 것이다.
천태대사는 이 10여시에 의하여 일념삼천론(一念三千論)을 제창하고 있고, 이 일념삼천론은 천태종의 독특한 사상이기도 하다. 일념삼천론은 제법실상의 의미이며 연기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3 ▶ 3. 이승작불(二乘作佛) 이승작불이란, 소승의 성문 연각도 성불한다는 말이다. 성문과 연각이 성불한다는 말은 법화경 이외의 다른 경전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오직 법화경에서만 볼 수 있는 말이다.
다른 대승경전에서는 성문촵연각등 소승의 무리를 벙어리와 같고 귀머거리와 같다느니 패종(敗種), 즉 성불하지 못할 종자라고까지 꾸짖고 있음에도 법화경에서는 그들의 성불을 보장하고 있다.
법화경의 이러한 이승작불의 논리적 근거는 제법실상에 있는 것이다. 성문이나 연각이나 보살이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같이 실상이기 때문이다.
중생의 욕심과 정착하는 성질에 따라 성문촵연각촵보살의 3승을 분별하여 설하였지만, 그것은 일불승에 있어서 분별하여 방편으로 설한 것이지 본질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을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고 한다.
4 ▶ 4. 만선성불(萬善成佛) 만선성불이란, 사람이 행하는 착한 일, 크게 착한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작은 착한 일이라도 착한 일을 하면 성불한다는 것이다. 그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5 ①. 6바라밀을 실천하는 일
6 ②. 착하고 부드러운 마음씨
7 ③. 7보(七寶)로 사리탑을 세워 공양하는 일
8 ④. 돌촵나무촵기왓장촵진흙으로 불묘(佛廟)를 만드는 일
9 ⑤. 불상을 조각하는 일
10 ⑥. 칠보 또는 쇠붙이 등으로 볼상을 만드는 일
11 ⑦. 불상을 스스로 그리는 일
12 ⑧. 불상을 남을 시켜 그리게 하는 일
13 ⑨. 아이가 붓이나 나뭇가지, 손톱으로 불상을 그리는 일
14 ⑩. 꽂과 향, 음악과 노래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일
15 ⑪. 불상에 합장하고 예배하며 조금 머리를 숙이는 일
16 ⑫. 산란한 마음으로라도 나무불(佛)이라고 한마디 부르는 일 이러한 것들이 성불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위에 열거한 조그만 일들이 모두 성불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원래 성불의 길은 멀고 먼 길이다. 살을 저미는 각오가 있어야 하는 일인데, 이렇게 쉬운 일들이 성불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조그만 일에도 부처님을 공경하고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의 싹이 트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 마음의 싹이 중요 한 것이다.
부처님을 존경하고 귀의한다는 마음이 있는 곳에 언젠가는 성불의 열매가 맺는 것이요, 향상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여기에 만선성불의 이치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조그만 선을 행하였다고 곧바로 성불한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3 비유품(譬喩品)
이 품에서는 지혜 제일이라고 하는 사리불이 방편품의 설법을 듣고 지난날 오해 하였던 일과 지금에 이르러 진실을 알고 크게 기뻐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옛날에는 부처님께서 보살들에게만 부처가 될 수 있음을 허락하시면서 우리들 성문제자에게는 이에 참여 시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지극히 슬픈 마음을 가지고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우리들이 부처를 이루는 가르침을 바라고 기다렸으면 부처님은 틀림없이 대승의 가르침으로 우리들을 구하셨을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까닭으로 부처님이 방편의 가르침을 베푸신 것을 그것이 방편인 줄도 모르고 그대로 믿고 수행하여 소승의 아라한과를 얻었다.
그러던 중, 오늘 법화경의 법문을 듣고 비로소 진실의 가르침인 일불승의 법을 알게 되었고, 종래의 가르치심이 소승의 가르침이요, 방편의 가르침임을 알게 되었다.」고 즐거워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미래에 화광여래(華光如來)라는 부처님이 되어 3승법으로써 중생을 교화할 것이라고 수기, 즉 사리불이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을 하신다. 성문인 사리불이 최고의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이 수기에 이어 사리불은 일불승법을 충분히 이해하여 수기까지 받았지만, 자기의 도반인 1천 2백 명의 아라한들을 위하여 삼승법은 방편이요, 일불승법은 진실이라는 설법을 다시 하여 주시기를 간청하였고, 부처님은 이에 응하여 비유설화로써 설법을 시작하신다.
이 비유설화가 화택삼거유(化宅三車喩)라는 비유설화이다. 법화경에는 일곱 가지 비유설화가 있는데, 화택삼거(火宅三車)가 그 최초의 비유설화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큰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부자가 살고 있는 집은 크고 넓은 저택이기는 하였으나 오래 되어서 집이 많이 헐었었다. 어느 때, 그 부자가 외출한 사이에 그 집에 불이 났다.
그 부자가 외출에서 돌아와 집에 불이 난 것을 보고 크게 놀랐음은 물론이다. 더구나 그 집 안에는 여러 철 모르는 아들들이 놀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아이들은 불이 난 줄도 모르고 뛰노는데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구해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애써 보았지만, 아이들은 불이 무엇인지 어떤 위험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오직 희희낙락 뛰노는데만 골몰 하였다.
아버지는 한가지 방책을 생각을 하고 아이들이 평소에 희망하던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를 문 밖에 준비하였으니, 문 밖으로 나와서 마음대로 가지고 놀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이들은 그 소리를 듣고 좋아하면서 모두 문 밖으로 나왔다. 우선 아이들은 불 난 집에서 피난을 한 것이다. 그러나 문 밖에는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아닌 한 큰 흰 소가 끄는 수레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 수레는 세상에서 잘 볼 수 없는 칠보로 장엄 된 훌륭한 수레였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약속한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 대신 이 세상에도 드문 큰 흰 소가 끄는 훌륭한 수레를 선사한 것이다.
아이들은 뜻하지도 않았던 큰 수레를 선물로 받고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위 없는 기쁨을 느꼈다. 이것이 화택삼거(火宅三車)의 비유설화이다.
이 이야기 속의 부자인 아버지는 부처님, 아들들은 성문연각의 소승 무리, 불 난 집은 고해인 이 세상, 세가지 수레는 성문, 연각, 보살의 3승법, 한 큰 흰 소의 수레는 일불승법이다.
부처님은 생사의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얼마 동안은 성문, 연각, 보살의 삼승법을 방편으로 베풀었지만, 결국에는 일불승법이란 진실한 가르침으로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을 비유한 이야기이다.
이 비유설화에는 네 가지 수레가 등장한다.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 한 큰 흰 소가 끄는 수레는 같은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견해가 있어 삼거설(三車說)과 사거설(四車說)의 양론이 있다.
그 내용은 전문적이어서 그 설명은 생략한다. 이 비유설화가 끝난 다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고 계신데, 대단히 감명적인 것이라 여기에 옮긴다.
사리불에 말하노니 나도 또한 그와 같이 성인 중에 가장 높고 온 세상의 아버지라.
일체의 중생들이 모두 나의 아들인데 세상 낙에 탐착하여 지혜 마음 전혀 없네.
삼계가 불안하기 불 타는 집과 같고 모든 고통 가득하여 무섭기 한이 없네.
나고 늙고 병 나고 죽는 여러 가지 근심 걱정 이러한 불길들이 맹렬하게 타고 있네.
삼계의 불타는 집 나는 이미 벗어나서 고요하고 편안하게 산림 속에 있노라.
지금 이 세상이 모두 다 내 것이요 그 가운데 있는 중생 모두 나의 아들이라.
지금 이 삼계 안에 모든 환난 충만해도 오직 나 한 사람이 구호할 수 있느니라.
4 신해품(信解品)
이 품을 신해품이라고 이름한 것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자기들이 이해한 바를 부처님께 여쭙고 있으므로 그 이름을 신해품이라고 한 것이다.
이 신과 해에 대하여는 열반경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이 있고 해가 없으면 무명(無明)을 키우고, 해가 있고 신이 없으면 사견(邪見)이 커진다〉고 하였다. 이것은 불교신앙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불교에서는 감정적인 믿음만으로는 참다운 믿음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믿음만 있으면 오히려 번뇌의 근본인 무명이 커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더불어 필요한 것은 해(解)인데, 해만 있고 믿음이 없으면 그릇된 생각만이 왕성해진다는 것이다.
이 품에는 수보리, 가전연, 가섭, 목건련의 4대성문이 법화경 설법을 듣기 전까지는 소승의 깨달음에 만족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어 보려는 용기도 가져 보지 못하였는데, 성문인 사리불에게 수기를 주심을 보고 마음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구하지도 아니한 한량없는 보배를 얻은 느낌이라고 하고, 자기들의 느낌을 장자궁자비유(長者窮子譬喩)라고 하는 비유설화로 이야기한다.
이 장자궁자비유는 법화경 일곱 가지 비유 가운데 두 번째의 설화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어려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 50년간 유리걸식을 하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어려움은 심하여졌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여러 곳을 다니다가 한 고을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집은 재산이 대단히 많았다.
그 때 그 아들은 각처를 유랑하다가 우연히 그 아버지의 집 문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들은 그 집이 자기 아버지의 집 인줄을 몰랐는데, 그 집 주인인 아버지는 문전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자기 아들임을 알고 반갑고 기뻐서 측근의 사람을 보내어 그 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 아들은 갑자기 자기를 잡아가려고 하는 줄 알고 놀랍고 두려움에 질려 땅에 넘어지고 기절하게 된다.
아버지는 강제로 끌어 올 것이 아니라 방편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행색이 초췌한 두 사람을 보내어 유인하여 데려와 거름을 치고 청소를 하는 막일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던 어느 때, 아버지는 일하고 있는 아들을 찾아가 여러 가지로 위로하고 여기에서 오래오래 일하고 있도록 당부하였다. 그 후 그 아들은 점차 그 집의 여러 가지 사정과 재산관리에 능숙하게 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주인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가 여러 해가 지난 뒤 그 집 주인은 몸이 점점 노쇠하여 머지않아 임종에 이를 것을 알고 많은 사람을 불러놓고, 이 아이는 나의 친자식이요, 나는 이 아이의 친 아버지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이 장자궁자의 비유설화이다. 천태대사는 이 설화를 근거로 하여 유명한 5시의 교상판석(五時 敎相判釋)을 하였다.
교상판석이란, 부처님이 평생 동안 설한 신교설을 그 설하신 시기와 교설의 뜻이 깊고 얕음을 가려 분류하고 체계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한 종파(宗派)를 세움에는 반드시 교상판석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종파는 각기 독특한 교상판석을 가지고 있다.
천태종의 교상판석을 5시 8교(五時八敎)의 교상판석이라고 하는데, 5시는 부처님의 교설을 설하신 시기에 따라 분별한 것이고, 8교는 설하신 형식에 따른 분류 4교와 그 설법의 내용의 깊고 얕음에 따라 분류한 4교를 합하여 8교라 하는 것이다.
이 5시와 8교를 합한 것이 5시 8교의 교상판석이다. 교상판석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5시교판의 근거가 이 신해품의 장자궁자비유인 것이다.
이 비유설화의 장자가 그 아들이 문전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사람을 시켜 급히 데려오려니까 그 아들이 놀라서 기절한 것은 화엄경을 설 하심에 비유된 것이라 하고, 행색이 초췌한 두 사람을 시켜 그 집에 와서 거름을 치고 청소하는 막일을 시킨 것이 아함경(阿含經)을 설하신 것에 비유된 것이며, 장자가 몸소 그 아들에 접근하여 여러 가지 당부한 것은 방등경을 설하신 것에 비유된 것이라 하고, 재산관리를 맡긴 것은 반야경을 설하신 것에 비유된 것이라 하며, 재산상속을 선언한 것은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하신 것에 비유된 것이라고 한다.
법화경은 천태종의 소의경전이며, 이 신해품의 장자궁자비유는 천태종의 5시 교상판석의 근거가 되어 있다. 그런 이유에서 법화경이 천태종에서는 어느 경전보다도 존중되고 있으며, 신해품이 또한 중요시되고 있는 것이다.
5 약초유품(藥草喩品)
앞의 신해품에서 가섭 등 4대성문이 자기들의 이해한 바를 장자궁자의 비유로 부처님께 여쭌다.
이것을 부처님이 들으시고 그들의 이해가 훌륭하다고 칭찬하시고 부처의 공덕은 가섭 등이 말한 것보다 더 큰 공덕이 있는 것으로, 이는 말로써 다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시고 그것을 삼초이목(三草二木)의 비유설화로 설하신 것이 약초유품의 내용이다.
삼초이목의 비유설화는 다음과 같다. 이 삼초이목의 비유설화는 법화칠유(法華七喩)의 세 번째 이야기이다.
이 세상의 산과 들, 모든 땅 위에는 여러 가지 이름의 크고 작은 나무와 풀들이 자라고 있다. 하늘에 비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게 되면 땅 위의 모든 풀이나 나무를 큰 나무 작은 나무, 큰 풀 작은 풀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적셔 준다.
비는 평등하게 내려 모든 풀과 나무를 기쁘게 한다. 풀과 나무의 뿌리 줄기 가지 잎들은 그 비를 받아서 무성하게 자라난다. 식물에 있어서는 뿌리 줄기 가지 잎이 살찌워짐에 의하여 그 풀과 나무가 자라난다.
이 네 가지는 신촵계촵정촵 혜(信촵戒 촵定촵慧)에 비유된 것이다. 풀과 나무에 있어서는 뿌리가 튼튼할 때 그 줄기가 힘차게 자라고 거기에서 가지가 생기고 또 잎이 무성해지는 것과 같이, 불교에 있어서는 믿음이 있은 연후에 계가 생기고, 계를 지킴으로써 정의 경지에 들어오고, 정에 들어감으로써 혜가 성취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뿌리 줄기 가지 잎은 신촵계촵정촵혜에 비유된 것이다. 원래, 풀과 나무는 같은 땅에서 자라는 것이며, 비도 같은 비를 맞고 자라는 것이면서 풀과 나무들은 각기 자라남에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도 일상일미(一相一味), 즉 자비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한결같은 것이지만, 듣는 사람의 개성과 능력에 따라 작게도 받아들이고 크게도 받아들여 얕게 신해하는 사람도 있고, 깊게 신해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부처님의 공덕에 의하여 같은 경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곧 구름이 모든 세상을 뒤덮는 것과 같고 비가 일체의 식물을 똑같이 적셔줌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이 삼초이목의 비유인데, 삼초란 풀에는 소 중 대(小촵中 촵大)의 세 가지가 있고, 이목은 작은 나무와 큰 나무의 두 가지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소초(小草)는 인천교(人天敎)에, 중초(中草)는 성문 연각에, 대초(大草)는 소승교의 보살에, 소수(小樹)는 반야경의 보살에, 대수(大樹)는 화엄경의 보살에 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6 수기품(授記品)
이 품에서는 가섭촵수보리촵가전연촵목건련의 4대성문에게 부처님이 수기를 하시고 있기 때문에 품의 이름을 수기품이라고 한 것이다.
가섭은 부처님의 10대제자 가운데 두타(頭陀) 제일, 즉 의촵식촵주의 생활에 탐착하지 않는 행이 제일인 제자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가섭에게 "가섭은 미래 세상 광덕(光德) 세계의 광명여래(光明如來)가 될 것이다" 라 하였고, 다음 해공(解空) 제일, 즉 공사상을 이해함에 있어서의 제일인 수보리에게는 "미래 세상 보생(寶生) 세계의 명상여래(名相如來)가 될 것이다" 하였으며, 논의(論議) 제일, 즉 법문의 이치를 가리는데 제 1 인자인 가전연에게는 "미래 세상에 염부나제 금광여래(金光如來)가 될 것이다" 라 하였고, 신통 제일인 목건련에게는“미래 세상 의락국(意樂國)에게 다마라발전단향여래(檀香如來)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를 하신다.
이렇게 4대성문에게 수기를 하고 계신데, 그 가운데 가섭에게 수기하시는 말씀을 대표로 옮겨 보기로 한다.
〈"가섭은 미래 세상에 있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러 부처님을 공경 공양하고 무량한 큰 법을 중생에 널리 설하여 마침내 부처를 이룰 것이다. 그 이름은 광명여래(光明如來) 응공촵정변지촵명행족촵선서촵세간해촵무상사촵조어장부촵천인사촵불세존이다.
나라 이름은 광덕(光德)이요 겁(劫)의 이름은 대장엄이며 부처님의 나이는 12소겁이다. 나라 안에는 더럽고 지저분한 것은 없고 토지는 평탄하고 바르며 높고 낮음과 구렁도 없다.
땅의 표면은 유리와 같고 보배로운 나무가 열을 지어 서 있고 황금의 새끼줄로 경계를 표시하였으며, 보배 꽃을 흩날려 모두가 청정한다.
그 나라에는 무량한 보살과 성문들이 또한 많아 불교를 방해하는 일이 없고, 마구니와 마구니의 백성이 있다 하여도 그들도 또한 다 불법을 보호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섭의 부처를 이루는 나라의 모습은 참으로 인류가 동경하여 마지않는 이상국의 모습이요 그 구체적인 설명이다. 이렇게 수기하신 다음, 부처님은 다시 이 뜻을 계송으로 펼치시고 있는데, 부처님은 〈불안(佛眼)으로써 가섭을 보건대〉라는 말씀이 있다.
불안이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5안(五眼)을 말한다. 즉, 육안촵천안촵혜안촵법안촵불안(肉眼촵天眼촵慧眼 法眼촵佛眼)이 그것이다. 불안은 5안 가운데 가장 좋은 눈이다.〈이 삼계(三界)는 모두가 나의 것이요, 그 가운데에 살고 있는 중생은 전부 나의 아들이다〉라고 보는 눈이 불안인 것이다.
이렇게 가섭에 대한 수기를 끝내는데, 이 때 수보리촵가전연촵목건련 등이 가섭에게 수기하심을 보고 자기들에게도 수기하여 주실 것을 바라며 부처님의 얼굴만 우러러보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성문들의 바라는 바를 아시고 거의 같은 말씀으로 수보리 촵가전연촵목건련에 수기하시고 이 품이 끝난다.
7 화성유품(化城喩品)
이 품의 이름을 화성유품이라고 함은 이 품 가운데 화성(化城)의 비유설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 화성의 비유설화는 법화7유 가운데 네 번째의 비유설화이다.
삼천진점겁(三千塵點劫)이라는 아주 먼 옛날에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이 계셨다. 삼천진점겁이라 함은 삼천대천세계의 땅을 다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동쪽으로 가면서 천 나라를 지나 가루 하나씩을 떨어뜨려 그 가루가 다 하도록 한 다음, 그 지나오는 동안 가루를 떨어뜨린 나라 또는 가루를 떨어뜨리지 아니한 나라 그 모두의 땅을 다시 갈아서 만들어진 무량한 가루 하나를 1겁으로 헤아리는 세월을 말하는 것이니, 그 시간은 무엇이라 헤아릴 수 없는 형용하기 어려운 시간이라 하겠다.
그러한 아득한 옛날에 부처님이 계셨는데, 그 부처님이 대통지승여래(大通智勝如來)이다. 이 부처님에게는 출가하시기 전에 16왕자가 있었는데, 그들도 아버지가 성도하셨음을 듣고 출가하였다.
이 때 모든 중생들 범천(梵天)과 16왕자를 합친 중생들이 설법을 청하매 대통지승여래께서 4제의 삼전십이행(三轉十二行)의 법문을 하시고 12인연의 법을 설하셨다.
4제의 삼전십이행(三轉十二行)이란 고촵집촵멸촵도의 네 가지 진리를 세 번 말씀하시니, 이것이 3전이요, 네 가지 진리를 세 번 말씀하시니 12행(行)이 되는 것이다.
3전은 시전촵권전촵증전(示轉촵勸轉촵證轉)이라는 것인데, 시전은 고촵집촵멸촵도의 네 가지 진리는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보여 주심이요, 권전은 고촵집촵멸촵도의 네 가지 진리를 잘 알아서 그대로 수행 할 것을 권함이요, 증전은 부처님이 고를 알아서 그 집을 끊고 멸을 증득하려고 도를 닦은 것을 보여 중생들로 하여금 증득케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네 가지 진리의 법문을 하신 다음 12인연법을 설하셨다. 네 가지의 진리는 성문승의 무리를 가르치는 법이요, 12인연법은 연각승의 무리들이 수행하는 법임은 앞서 말한 바 있지만, 이것은 소승의 가르침이다.
16왕자는 자질이 총명하므로 이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부처를 이루는 법문을 간청하기에 이르러 대통지승여래는 법화경을 설하시게 된다. 이 부처님이 8천겁 동안 법화경을 설해 마치시고 8만4천겁 동안 삼매에 드시게 된다.
16왕자는 법화경을 믿고 받들어 부처님이 삼매에 드신 동안 부처님을 대신하여 법화경을 계속하여 설법하였다. 그 후 이 16왕자는 모두 성불하여 여러 세계에서 중생을 제도하게 되는데, 그 16왕자의 16번째의 왕자가 사바세계의 교주로 계신 석가모니불이다.
대통지승여래는 이 16부처님이 지금도 그 맡은 바 국토에서 법화경을 설하고 계실 것이라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소승의 가르침으로는 참다운 열반은 얻을 수 없고, 오직 일불승법에 의해서만 진실한 열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승의 가르침은 대승에 이르는 방편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이에 이어, 화성(化城)의 비유설화가 설해진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보물성을 찾아서 멀고 먼 험난한 길을 가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길을 인도하는 한 도사(導師)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지혜도 있고 보물성으로 가는 험난한 길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보물성으로 가는 도중 많은 사람이 길이 너무 험난하여 몸은 피로하고 마음 또한 약해져서 도저히 목적지인 보물성까지는 갈 수 없음을 생각하고 보물성에 가는 일을 포기하려는 어려운 일이 생겼다.
이때 도사가 한 곳에 한 성을 화작(化作)하여 사람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하였다. 기운이 회복된 것을 보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사람들을 목적지인 보물성에까지 무사히 인도하여 데리고 갔다. 이것이 화성의 비유설화이다.
보물성은 진실한 열반을 비유한 것이고, 도중에 화작한 성은 방편의 열반을 비유한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중생들의 마음이 약하고 못난 것을 아시므로, 알기 쉬운 소승의 가르침을 설하신 다음 부처님의 본뜻인 부처를 이루는 길을 설하신다.
이 화성유품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억만년을 통하여도 변하지 아니하는 것 임을 특별히 친절하게 설하시고 계신다. 이것을 널리 세상에 펼치시려고 하지만, 듣는 사람의 근기에 높은 사람도 있고 낮은 사람도 있어 정도가 낮은 사람을 위하여 방편의 가르침을 설하실 필요가 생긴다.
그러나 이 방편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진실의 가르침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적인 것이므로 이 방편의 가르침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니, 분발하고 노력하여 진실의 가르침인 일불승법을 공부해야 함을 간절하게 설하고 있는 품이다.
8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
이 품에서는 부루나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의 설법이 때와 장소, 그리고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설해지는 것을 알았고, 또 여러 성문 제자들에게 수기하심을 보았으며, 부처님과 중생들의 인연이 금생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득한 전생의 깊은 인연임을 알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부루나가 바르게 이해한 것을 아시고 부루나에게 수기를 주신다. 즉, 부루나는 부처님의 10대제자의 한 사람으로, 설법 제일로 알려진 사람이다.
부루나는 뛰어난 설법으로 부처님의 교화사업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과거 아득한 옛날부터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지켜 왔으며 불법에 통달하였고, 속으로는 보살의 행을 간직 하면서 밖으로는 성문의 모습을 나타내어 한량없는 사람들을 교화하여 부처 이루는 길을 선양하고 언제나 불사를 하여 왔으므로 미래에 부처를 이루어 법명여래(法明如來)라 할 것이라고 수기를 하셨다.
이 때 부처님은 이어서 교진여(橋陣如 : 부처님과 함께 수행하였고 부처님의 최초의 법문을 들은 사람이다)를 비롯한 천이백의 아라한에게도 미래에 부처를 이루어 보명여래(普明如來)가 될 것이라고 수기 하신다.
다음에 우루빌라 가섭을 비롯한 5백 아라한에게도 부처를 이루어 천이백 아라한과 같은 이름의 보명여래가 될 것이라고 수기 하신다. 이 5백 아라한에게 수기하심을 따라서 이 품의 이름을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이라고 하는 것이다.
수기라는 말은 수기(授記)라고 쓰기도 하고 수기(受記)라고 쓰기도 하는데, 수기('授記') 는 부처님이 주시는 경우, 수기(受記)는 제자가 받는 경우에 쓰는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제자가 이해한 바를 부처님께 여쭌 다음에 부처님이 제자에게 수기 하시는 것이 보통인데, 오백제자의 경우에는 일반과는 달리 부처님이 수기하신 뒤에 제자가 이해한 바를 부처님께 여쭙고 있다.
5백제자가 자기들의 이해의 정도를 부처님께 여쭙는 말씀 중 의리계주(衣裏繫珠)의 비유설화가 있다. 이 설화는 법화칠유의 다섯 번째 비유 이야기이다.
옛날에 한 가난한 사람이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가 술 대접을 받고 가난한 친구는 술에 취하여 잠이 들어버렸다.
그 집주인은 급한 일이 있어 잠자는 친구를 두고 밖에 나가게 되었다. 그는 나가며 그 친구의 초췌한 모양이 불쌍하여 친구의 떨어진 옷 속에 값진 보배 구슬을 달아주고 나갔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 옷 속에 보배 구슬을 단 것도 모르고 잠이 깬 뒤 그 집에서 나가 이곳 저곳을 방황하며 고생스러운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때, 우연히 옛날에 찾아갔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가난한 친구의 남루한 모습을 보고 자네가 우리 집을 찾아왔을 때 그대의 간고한 생활을 벗고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대의 옷 속에 값진 보배를 달아 주었는데, 어찌하여 그것을 모르고 지금까지 고생을 하고 있는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고, 어서 빨리 그 보배 구슬을 팔아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하라고 알려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친구는 부처님에게 비유된 것이고, 술 취한 가난한 사람은 모든 사람이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모르고 불쌍하게도 부처를 이룰 큰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소승인에게 비유한 것이다.
9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
이 품에서는 학인(學人)과 무학인(無學人) 2천명에게 부처님께서 수기를 하시고 있으므로, 이 품을 수학무학인기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여기에 학인과 무학인 이라는 말은 일반에서 사용하는 뜻과는 전혀 그 뜻이 다르다. 일반에서는 학인은 학식이 있는 사람, 무학인은 학식이 없는 사람의 뜻으로 사용되지만, 불경에서는 학인은 공부가 부족하여서 더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고, 무학인은 더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이것은 불경을 읽을 때 주의할 일이다.
이 품에서는 10대제자 중 다문(多聞) 제일로 알려진 아난(阿難)에게 미래에 산해혜자재통왕여래(山海慧自在通王如來)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고, 또 10대제자 중 밀행(密行) 제일의 라후라(羅喉羅)에게 미래에 답칠보화여래(踏七寶華如來)가 될 것 이라고 수기하고 있으며, 이어서 학촵무학(學촵無學)의 2천명에게 보상여래(寶相如來)가 되리라고 수기하는 것이 이 품의 주요한 내용이다.
10 법사품(法師品)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그 직접 상대가 되는 사람을 대고중(對告衆)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대고중이 성문들이었는데, 이 법사품부터는 보살로 바뀌어 진다.
일반적으로 성문과 보살은 전연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부처님께서는 앞의 제9품까지에서 성문촵연각촵보살은 근본에 있어서는 구별이 없는 것으로, 같이 부처를 이루기 위한 길을 걷고있는 사람들임을 거듭 역설하시고 그 증거로서 많은 성문들에게 수기를 주셨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사람은 모두가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는 사람은 성문촵연각촵보살의 구별이 없는 다 같은 보살로 바뀌어진 것이다.
이 법사품에 있어서는 부처님께서는 약왕(藥王)보살을 비롯한 8만보살을 향하여 부처님이 세상에 머물러 계실 때나 또는 입멸하신 뒤이거나 법화경 속의 한 구절 또는 한 게송을 듣고 한 번만이라도 기쁜 생각을 일으키는 사람은 그 누구 이든지 반드시 부처를 이룰 것이라고 하신다.
또 법화경의 한 게송만이라도 수지하고 독촵송촵해설촵서사(讀촵誦촵解說촵書寫)하며, 이 경 보기를 부처님과 같이 보고 화촵향촵영락촵말향촵도향촵소향촵증개촵당번촵의복촵기악(華촵香촵瓔珞촵抹香촵塗香촵燒香촵繒蓋촵幢番촵衣服촵伎樂)등의 열 가지로써 공양을 올리고 합장 공경하는 사람은 일찍이 10만억의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고 이미 큰 원을 성취한 큰 보살들이다.
그 보살들이 중생을 불쌍히 생각하는 까닭으로 스스로 원하여 사람으로 태어나 법화경을 설하려는 사람들임을 밝히신다. 그리고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에 법화경의 한 구절만이라도 남몰래 한 사람을 위하여 설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부처님의 사자(使者)이며 부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법화경을 독송하는 사람을 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죄는 부처님을 욕하는 것보다 무겁다.
부처님이 3세에 걸쳐 설하시는 경전 가운데 법화경이야 말로 참으로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에도 질투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많거늘, 하물며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에는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이 경을 널리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부처님의 옷으로 감싸고 부처님의 손으로 그 이마를 어루만지며 부처님이 함께 잠자고 부처님이 함께 사실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위하여 부처님의 화신(化身)을 보내어 그 사람의 활동을 보호하실 것이다. 그리고, 법화경을 설하려는 사람은 부처의 방에 들어가 부처의 옷을 입고 부처의 자리에 앉아 설할 것을 경계하신다.
부처의 방은 대자대비심이요, 부처의 옷은 인욕의 마음이며, 부처의 자리는 제법개공(諸法皆空)의 마음이다. 이 실촵의촵좌(室촵衣촵座)를 법화경을 전법하는 사람의 삼궤(三軌)라고 한다.
이 법사품에는 유명한 고원착수(高原鑿水)의 비유가 있다. 이 비유는 높은 고원에서 샘을 팔 때, 파낸 흙이 건조한 때까지는 아직도 물이 나오기가 멀었음을 알 것이요, 파낸 흙에 물기가 배어 나오고 차차 진흙이 나오면 물이 곧 샘솟을 것을 안다는 이야기이다.
고원은 고해인 현실세계를 가리킨 것이고, 샘을 판다는 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비유한 것이다. 부처를 이루려는 보살과 법화경과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11 견보탑품(見寶塔品)
이 품에서는 처음에 대중들 앞에 별안간 빛이 찬란한 칠보로 만들어진 큰 탑이 땅에서 솟아올라 공중에 그 장엄한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탑 속에는 다보여래(多寶如來)가 계시는데, 그 부처님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을 찬탄 하시고 또 그 부처님의 자리를 반을 비워 석가모니 부처님을 초대하여 앉으시게 한다. 두 부처님이 나란히 앉으신 것이다.
이것이 이불병좌(二佛竝坐)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꿈 같은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러나 이것은 결코 꿈 같은 이야기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법화경에서는 그 모양을 형상으로 나타내기 어려운 진리나 사상을 어떤 형체를 빌어 극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방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이 품은 그러한 방법이 처음부터 끝까지 원용되고 있다고 하여도 좋을 정도이다.
여기 땅에서 솟아오른 칠보로 만들어진 보탑은 사람들 모두가 간직하고 있는 불성을 상징한 것이다. 불성이야말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보배이며 인간의 희망이고 인간의 위대함이다.
그러므로, 광채가 찬란하고 칠보로 만들어졌으며,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늘 높이 빛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보배 탑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서 솟아 올랐다고 하는 점을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한다.
불성은 하늘과 같은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범부중생, 즉 번뇌와 망상을 안고 있는 청정하지 못한 우리들 속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배 탑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땅 속에서 솟아오른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 환희하는 대중 가운데 대요설(大樂說)보살이라는 보살이 있어 석가모니 부처님께 보배 탑이 출현한 인연이 무엇이냐고 묻고 그 인연을 설해 달라고 여쭈었다. 이에 대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이 보배 탑은 보정(寶淨) 세계의 다보여래(多寶如來) 사리탑이다. 다보여래는 그 옛날 보살로서 수행할 때에 서원을 세웠다. 지금 다보여래는 법화경의 설법을 듣고 그 진실을 증명하고 계신 것이다."
다음 보배 탑 속에서 다보여래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불병좌(二佛竝坐)의 광경이 나타난 것은 무엇일까. 다보여래는 진리를 나타낸 부처님이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진리를 설하신 부처님이다.
탑 속에서 한자리에 두 분 부처님이 나란히 앉으신 것은 진리 그 자체와 진리를 설하는 부처님이 똑같이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아무리 진리 자체가 소중한 것이라 하더라도 가르치는 이가 없으면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인식되지 못한다. 가르쳐 주는 이가 있을 때 진리의 가치는 비로소 중생들이 알게 되는 것이다. 진리와 진리를 설하는 것은 둘 다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 이불병좌의 의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러한 광경을 보고 환희하는 대중들에게 내가 입멸한 뒤 누가 이 법화경을 지켜 나갈 것인가를 세 번 묻고 이 경의 유통을 권하고 계신다. 그 권하는 말씀 가운데 모든 경전이 수지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법화경은 가장 어려운 것이라 말씀하시고 법화경 수지의 육난(六難)을 설하시는 것으로 이 품은 끝난다.
12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
이 품은 전후 2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에서는 끊임없이 석가모니 부처님께 박해를 가한 제바달다가 전생의 인연 공덕으로 미래세에 성불할 것과 후반에서 축생인 용녀(龍女)가 역시 성불하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제바달다의 성불은 악인성불로, 용녀의 성불은 여인성불로 유명한 이야기이다.
옛날에 어떤 나라의 임금이 6바라밀을 수행하며 대승불교를 가르쳐줄 스승을 천하에 구하였다. 그 때, 아사선(阿私仙)이라고 하는 선인이 있었는데, 그 선인이 자기가 하라는 대로하면 대승법을 설할 것이라고 하였다. 스승을 찾던 임금은 선인이 요구하는 대로 그에게 봉사하였다. 그는 선인의 법문을 듣고 드디어 성불 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의 임금은 지금의 석가모니 부처님이요, 선인은 제바달다 였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은 과거에 제바달다라고 하는 선지식에 의하여 6바라밀을 닦아 성불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바달다는 그 공덕으로 미래세에 천왕여래 (天王如來)라는 이름으로 성불할 것이라는 것이다.
다음 용녀성불(龍女成佛)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다보여래 (多寶如來)의 나라에서 온 지적(智積)보살과 용궁에서 법화경을 설하고 온 문수(文殊)보살과 법화경에 관한 토론을 하도록 하였다.
지적보살이 법화경을 수행하면 빨리 성불할 수 있는가를 물은데 대하여 문수보살은 여덟 살의 용녀가 찰나 사이에 보리심을 일으켜 성불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에 지적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도 무량겁에 걸쳐 고행을 닦아 성불하였는데, 용녀가 찰나 사이에 성불 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론을 폈다. 그 반론이 끝나기도 전에 용녀가 앞에 나타나 법화경을 듣고 성불한 것을 아는 것은 부처님 뿐 일 것이라고 문수보살이 말한데 대하여 사리불(舍利弗)이 여인이 성불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 겠다고 반박하였다.
이 때 대중들이 용녀가 홀연히 남자가 되어 무구(無垢)세계에 가서 성불한 다음 법화경을 설하고 있음을 보았다는 것이 여인성불이 이야기이다.
이 악인성불과 여인성불의 이야기는 법화경의 특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옛부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터이다.
이 제바달다품은 원래 따로 유행되었던 경전이다. 구마라즙이 번역한 묘법연화경은 27품이었던 것이 후에 묘법연화경에 이 품이 첨가되어 지금 우리가 보는 묘법연화경은 28품이 된 것임을 부언하여 둔다.
13 권지품(勸持品)
이 품은 품명으로 보아서는 법화경을 수지할 것을 권유하는 품이라고 이해되기 쉬우나, 이 품 속에 법화경을 권유하는 말은 하나도 없음은 기이한 일이다.
이 품에는 여러 보살촵비구촵비구니들이 법화경의 거룩한 가르침을 보호하고 실천하여 널리 펼치겠다는 결의와 서원만이 설해지고 있다. 즉 약왕(藥王)보살 등 2만의 보살은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큰 인내심을 가지고 교화하기 어려운 중생들에 전법할 것을 맹세하고 수기를 받은 5백 아라한과 학촵무학의 비구 3천명도 사바세계 이외의 다른 정토에 법화경을 널리 전법할 것을 서원하고 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양모인 마하파사파제 비구니에게 미래세에 일체중생희견불(一切衆生喜見佛)이라는 이름으로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주시고, 그의 권속 6천명 에게도 같은 이름의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 하신다.
또 야소다라 비구니에게도 미래세에 구족천만광상불(具足千萬光相佛)이란 이름으로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주신다. 이들 비구니들도 다른 나라에 가서 법화경을 널리 전법할 것을 서원하고 있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이들의 서원에 대하여는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80만 억 나유타의 보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떠한 박해가 있더라도 목숨을 바쳐 이를 참고 견디어 법화경을 홍포할 것을 서원하고 있다.
14 안락행품(安樂行品)
이 품에서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법화경을 설하려면 어떻게 설할 것인가에 대한 문수보살의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이 법화경을 설하려면 네 가지 안락행(安樂行)에 머물러 이 경을 설하여야 함을 설하시고 있다.
안락행이란 무엇인가? 안락행이란, 글자대로 보면 고생이 없는 안락한 행이라는 말로 받아들이기 쉽다.
세상의 모든 일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뼈를 깎고 살을 저며내는 노력이 있은 연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고 인간사회의 행복을 성취하려는 불교수행에 있어서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안락행이란 수행을 함에 있어서 힘이 들지 않고 고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힘이 들고 고생스러운 수행일지라도 평화로운 마음, 편안한 마음, 즐거운 마음, 보람 있는 마음으로 수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안락이라는 것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안락하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여하에 따라 어떤 곳에서나 안락한 천지가 펼쳐지는 것이다.
불볕 더위에 땀 흘리고 하는 일이나 매서운 추위 속에서 몸을 떨면서 하는 일들은 남이 보기에는 괴롭고 힘들게 보이지만, 당사자는 그런 생각 없이 오히려 즐겁고 기쁨을 느끼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불도수행은 참으로 멀고 험난한 길이다. 이 험하고 먼 길을 가는 사람은 이 길을 갈고 닦아감에 있어서 중도에 탈락함이 없이 목적지에까지 무사히 도착 하기 위해서는 참고 견딘다는 소극적인 생각만이 아니라 그 길을 닦아감에 있어 큰 보람과 기쁨을 느껴야 한다.
험하고 먼 길을 가는 수행이 어떻게 하면 기쁨으로 바꾸어질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는 그 방법을 여기서 가르쳐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안락행이라는 것이다.
이 안락행에는 신안락행촵구안락행촵의안락행촵서원안락행(身安樂行 口安樂行 意安樂行 誓願安樂行)의 네 가지가 있다.
① 신안락행은 행처(行處)와 친근처(親近處)에 편안한 마음으로 머무르는 일이다. 행처란 수행자의 행동에 관한 기본적 규범이요, 친근처는 대인관계의 기본적 규범이다. 수행자의 행동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진리를 깨달아 실천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인내와 부드러운 마음으로 선행할 것을, 그리고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수행에 방해되는 사람은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였다.
② 구안락행은 다른 사람이나 경전의 과실을 말하지 아니할 것이며, 다른 법사를 경멸하지 아니할 것이며, 다른 사람의 장촵단점을 말하지 아니할 것이며, 소승의 사람을 칭찬하거나 허물을 말하지 아니할 것이며, 설법하기를 요청 받으면 대승의 가르침만으로 교화하라는 등, 말할 때에는 항상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하라는 것이다.
③ 의안락행은 질투하는 마음, 아첨하고 거짓말 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남을 경멸하는 마음 등의 마음을 버리고 큰 자비심을 가지고 일체중생에게 평등하게 설법하는 것이다.
④ 서원안락행은 일체중생을 법화경의 가르침에 귀의 시키려는 서원을 갖는 일이다. 이렇게 서원안락행을 지니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과 공양을 받을 것이며, 모든 하늘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이 품의 끝에 계중명주의 비유설화가 있다. 이것은 법화7유 중의 여섯 번째 비유설화이다.
나라의 임금이 전쟁에 이기면 여러 장병에게 여러 가지 상을 준다. 그러나, 임금의 상투에 꽂은 보배구슬만은 쉽게 주는 것이 아니지만, 가장 뛰어난 공이 있는 장병에게는 이 비장의 보배구슬을 주는 것과 같이 부처님은 가장 훌륭한 수행자에게만 법화경을 설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법화경의 수지공덕을 여러 가지로 설하시고 이 품은 끝난다.
15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
이 품의 전반은 본문법화(本門法華)의 서설(序說)이고, 후반은 다음 여래수량품(如來壽量)과 함께 본문법화의 본론을 이루고 있는 법화경의 중요한 부분이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국토에서 모여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들이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사바세계에서 법화경의 전법에 종사하겠다는 신청에 대하여 그대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하시고, 이 사바세계에는 본래부터 6만의 항하의 모래의 수효에 견줄만한 많은 보살이 있어 내가 입멸한 뒤에도 널리 이 경을 설할 것이 라고 하셨다.
그 때 이 세계의 대지가 갈라져 헤아릴 수 없는 천만 억 보살이 땅 속에서 솟아 올랐다. 이들 보살은 모두 몸은 금빛이고 32상과 무량한 광명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들은 사바세계의 땅 밑의 허공에서 살고 있다가 지금 석가모니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고 말세에 법화경의 전법을 하기 위하여 무량한 권속을 거느리고 땅 밑에서 솟아오른 것이다.
이 보살들은 땅 위에 올라와 허공의 보배 탑 속에 계신 다보여래와 석가여래를 예배하고 찬탄하였다, 이러한 사이에 50소겁(小劫)이 지났지만,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대중들에게는 반나절이 지난 것처럼 생각되었다고 한다.
이 때 무량한 보살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상행(上行)보살 무변행(無邊行)보살 정행(淨行)보살 안립행(安立行)보살 등 네 보살이 석가모니 부처님께 문안을 여쭙고 중생제도의 수고로움에 대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무량한 보살 대중들은 일찍이 보지 못한 이러한 광경을 보고 놀랍기도 하고 이 일이 어찌된 일인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는바, 미륵보살이 대중의 마음을 알아채고 대중을 대표하여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들은 누구의 제자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구름같이 모였는가를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은 미륵보살에 대하여 이 무량한 보살들은 내가 성불한 이래 나의 교화를 받고 사바세계의 땅 밑 허공 중에서 법화경을 사유하고 열심히 위 없는 지혜를 구하던 보살들이라 하고, 부처님은 아득한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들 중생을 교화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이것은 부처님이 금생에 성불한 것은 자취를 나타낸 적불(迹佛)의 나타내심이고, 부처님은 본래 아득한 옛날에 성불하신 것임을, 즉 본불(本佛)을 보이시는 단서라 할 것이다. 미륵보살을 비롯한 대중들은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더욱 의심이 깊어진다.
부처님은 성불하신지 불과 40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 많은 보살의 무리들을 교화하셨단 말인가. 비유컨대 젊은 사람이 백살 된 노인을 가리켜 나의 자식이라고 하고 백살 된 노인이 젊은 사람은 가리켜 나의 아버지라고 함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의 말씀을 믿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였다.
부처님이 성불하신 것은 얼마되지 않았고 저 보살들은 백 천만억겁에 걸쳐 수행한 보살들인 까닭에 그러한 의심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하여 미륵보살이 또 대중을 대표하여 얼마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어떻게 헤아릴 수 없고 그지없는 많은 보살들을 발심케하여 물러남이 없는 경계에 이르게 하셨는가를 묻게 된다.
16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법화경을 적문과 본문으로 나누고, 적문법화에 있어서는 제2 방편품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고, 본문법화에서는 이 여래수량품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음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 품에 있어서는 부처님의 성불하심이 금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실은 아득한 옛날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즉 구원실성(久遠實成)임을 밝히는 것이 그 내용의 핵심이다.
이 품에서는 전품(前品)에 있어서의 미륵보살의 질문에 대한 대답 형식으로 부처님의 말씀이 시작된다.
부처님께서는 지금부터 중요한 법문이 있을 것이니 대중들은 이 법문을 지극한 정성으로 들으라고 경고하시기를 세 번이나 하신다.
미륵보살을 비롯한 대중들은 부처님의 법문을 지극한 마음으로 간청하기를 세 번 하는, 소위 삼계삼청(三誡三請)의 형식을 거친 다음 법문이 시작된다. 삼계삼청은 부처님의 특별한 법문이 있을 때의 요식이다.
부처님은 우선 <"대중들이여, 여래의 비밀 신통력을 잘 들으라. 세상의 일체 중생들은 모두 지금의 석가모니 부처님은 석(釋)씨의 궁전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서 위 없는 보리를 증득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성불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량하고 그지 없는 백 천만 억 나유타 겁 이전의 일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유명한 오백진점겁(五百塵點劫)의 비유로서 성불한 이래의 시간이 오래이고 또 오래임을 나타내신다.
오백진점겁이란 오백 천만 억 나유타, 즉 한량없는 수의 3천대천세계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오백 천만 억 나유타의 한량없이 많은 나라를 지날 때마다 하나씩 그 가루를 내려놓아서 그 가루가 다 되었을 때 그 지나온 나라를 모두 부수어 다시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 하나를 한 겁으로 계산한 전체 수의 겁이 오백진점겁이다.
참으로 엄청난 시간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이다. 부처님의 성불하심은 이렇게 오래고 길어서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옛날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성불을 구원실성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이렇게 구원한 옛날에 성불하신 다음 지금까지 사바세계 또는 다른 세계에서 중생들을 교화하여 오신 것이다. 그 사이 부처님은 여러 가지 몸을 나투시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나투시면서 중생들을 교화하셨는데, 이것은 모두 중생의 근기에 따라 펼치신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래는 제법의 참다운 모습을 여실히 보고 알고 계시므로 그 말씀에는 하나도 허망함이 없다. 나는 참으로 시간을 초월하여 상주하는 불멸의 부처인 것이다.
그러나 여래가 입멸을 보이시는 것은 중생들이 언제나 여래를 볼 수 있으면 부처님을 뵙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하기 쉬우므로 중생들의 경각심을 일으키게 하기 위하여 생사를 나투어 보이시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수명이 장구함을 설하신 다음 의자유(醫子喩)의 비유설화를 하신다. 의자유는 법화7유의 일곱 번째 이야기이다.
비유하면 어떤 훌륭한 의사가 자식들을 두고 먼 나라에 여행하는 사이에 아이들이 잘못하여 독약을 먹고 신음하고 있었다. 그 때 아버지인 의사가 돌아와 좋은 약을 주었던바 독이 심하지 않은 자식들은 약을 먹고 건강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독이 심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식들은 약을 먹으려 하지 아니하므로 아버지인 의사는 다시 외국으로 나가서 사람을 시켜 아이들에게 너희들의 아버지는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게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정신을 잃었던 자식들이 마음에 큰 충격을 입고 정신을 되찾아 약을 먹고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 후 그 아버지도 귀가하였다.
이 경우 아버지인 의사에게 잘못이 있을까? 부처님도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입멸을 보이셨을 뿐 아무런 허망한 그릇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의자유은 이렇게 부처님의 수명이 구원하고 상주함을 보이신 비유설화이다. 이 품의 말미에 1백3구로 된 게송이 있다. 이 게송은 자아득불래(自我得佛來)의 구절로 시작되어 있으므로 자아게(自我偈)라고 이름하며, 자아게는 법화경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게송이다.
이 게송에는 불신(佛身)의 상주, 국토의 상주 등을 거듭 설 하고 있고, 중생들을 어떻게 하여 빨리 부처를 이루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부처님의 대자비의 서원을 나타내는 구절로 이 게송을 끝맺고 있다.
17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
여래수량품에 의하여 부처님께서는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하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보살피고 계심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이것을 앎으로써 진정한 신앙이 확립되게 된다.
진정한 신앙은 인생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요 희망이며 대안심(大安心)인 것이다. 그러한 심경(心境)에 도달하면 우리들 인생은 크게 달라진다. 심경이 달라졌는데 인생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필연적으로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신앙에 의하여 심경에 변화가 오고 심경의 변화에 의하여 인생에 변화가 오는 것을 불교에서는 공덕(功德)이라고 한다.
이 품의 전반에서는 부처님의 구원(久遠)한 수명의 설법을 듣고 확신함으로써 얻어지는 미래성불의 공덕을 12항목으로 나누어서 분별하고 있다. 이것을 본문법화의 본화(本化)보살[法身]의 수기라고 한다.
적문법화의 수기는 소승의 성문이 보살과 같이 미래에 성불한다는 것이지만, 본문법화의 수기는 부처님의 수명이 구원함을 돋고 이를 확신하면서 미래성불의 단계로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이 본화보살의 수기가 끝날 때 하늘에서 꽃과 향의 비가 내려 공양하고 보살들은 모든 부처님을 찬탄한다. 이어서 이 품의 후반에서는 법화경을 전법하는 공덕을 설하고 있는데, 현재의 사신(四信)과 입멸 후의 오품(五品)으로 분별하여 설하고 있다.
4신의 첫째는 일념신해(一念信解)이다. 부처님의 무량한 수명을 듣고 한 생각 만이라도 믿음을 가지면 그 공덕이 5바라밀을 수행하는 것보다 더하다고 하였다.
둘째는 약해언취(略解言趣)이다. 부처님의 무량한 수명을 듣고 그 말의 이치를 이해하면 그 공덕은 부처님의 지혜를 낳게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광위타설(廣爲他說)이다. 이 경의 법문을 듣고 수지하고 서사하며 공양하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면 그 공덕은 한량없어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낳게 한다.
넷째는 심신관성(深信觀成)이다. 부처님의 무량한 수명을 듣고 깊이 믿고 이해하면 부처님이 항상 영축산에서 설법하시는 것과 사바세계가 정토임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 5품의 첫째는 초수희품(初隨喜品)인데, 이것은 부처님 입멸하신 뒤 이 법화경을 듣고 헐뜯지 않고 수희(隨喜)의 마음을 일으키면 이미 깊은 믿음과 이해를 얻음이라 하였다.
둘째는 독송품(讀誦品)이다. 이것은 법화경을 독송하고 수지하면 이 사람은 이미 부처님을 이마에 모신 것이니 재보시(財布施)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설법품(說法品)이니 스스로 이 경을 수지하고 독송하고 서사하고 설법하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게 하면 역시 재보시(財布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넷째는 겸행육도(兼行六度)인데, 이 경을 수지하고 아울러 6바라밀을 행하면 일체종지(一切種智)에 이를 것이라 하였다.
다섯째는 정행육도(正行六度)이다. 이것은 이 경을 스스로 수지 독송 서사 해설하고 또 다른 사람을 그렇게 하도록 하며 6바라밀을 완전히 수행하는 사람은 위 없는 정각(正覺)을 거의 이룬 사람이니, 그 사람이 앉고 서고 경행(經行)한 곳에는 탑을 세워 불탑과 같이 공양하라고 하였다.
18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
수희(隨喜)라는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히 생각하고 그 가르침의 얼마만큼이라도 실천하는 것을 스스로의 기쁨으로 생각하는 마음이다.
수희하는 마음의 고귀함과 그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이 품에서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어떤 사람이 법화경의 법문을 듣고 수희하고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힘에 따라 설법을 하여 그 설법하고 이렇게 전전(轉展)하여 설법하여 50번째의 사람이 수희할 때 그 수희하는 공덕은 다음과 같이 무량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한량없고 그지없이 많은 세계의 모든 중생들에게 그들의 바램에 따라 갖가지 보배로운 재물을 80년 동안 보시하고 말년에 그들 에게 불법을 가르쳐서 소승의 사과(四果), 즉 입류촵일래촵불래촵살적(入流 촵 一來촵不來촵殺賊)을 얻게 하였다면, 그 공덕은 막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50번째로 법화경의 법문을 듣고 수희하는 한 생각을 일으킨 공덕에 비하면 그 백 천만 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하물며 최초의 사람이 법화경의 법문을 듣고 수희한 공덕에는 도저히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품에서는 법문을 들으면 고마움에 감격하고 고마움에 감격하였으면 실천하려는 결의를 굳게 하는 것이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설하고 있다.
19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
이 품에서는 5종법사(五種法師), 즉 수지촵독촵송촵해설촵서사(受持촵讀촵誦촵解 說촵書寫)가 얻는 6근청정의 공덕을 설하고 있다.
안촵이촵비촵설촵신촵의(眼촵耳 촵鼻촵舌촵身촵意)의 6근이 청정하여 진다는 것이다. 법화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고 설법하고 서사하는 공덕으로 8백의 안(眼)의 공덕, 천이백의 이(耳)의 공덕, 8백의 비(鼻)의 공덕, 천이백의 설(舌)의 공덕, 8백의 신(身)의 공덕, 천이백의 의(意)의 공덕을 얻는다는 것이다.
여기 8백이니 천이백이니 하는 숫자에 너무 구애될 필요는 없다. 이 숫자들은 동촵서촵남촵북이나 앞촵뒤, 오른쪽촵왼쪽하는 사방을 가리키는 4의 배수인 것이다. 4라는 숫자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는 의미이다.
8백이나 천이백이라고 하는 숫자로 구족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육근청정이란 마음과 몸이 청정하여 진다는 것이다. 법화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고 설명하고 서사하는 법사의 사명을 다하면 그 공덕으로 마음이 청정하여지는 것 뿐 아니라 몸의 모습도 좋아진다는 것이다.
즉 정신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그 모습에도 아름다운 변화가 생긴다는 것, 즉 정신은 육체를 변화 시킨다는 뜻으로 읽으면 된다.
금생에 훌륭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보살행을 닦아가면 언젠가는 32상과 80종호를 갖추고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성불할 날이 있을 것을 굳게 믿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 아닌가. 법사의 공덕으로 6근이 청정하게 될 것은 금생에 이루지 못하면 내생에, 내생에도 이루지 못하면 그 내생에라도 이루려는 것이 불자의 신념이다.
20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
먼 옛날 위음왕여래(威音王如來)의 시대에 상불경(常不輕)이라고 이름하는 보살이 있었다. 이 보살은 만나는 사람만 있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에게 합장하고 예배하며 "나는 그대를 존경한다. 결코 그대를 경멸하지 않는다. 그대는 보살도를 행하여 미래에 반드시 부처를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다.
때로는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오히려 성을 내고 이 보살에게 욕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돌과 막대기로 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이 보살은 그런 사람을 멀리 피하여가서 역시 큰 소리로 같은 말을 외쳤다.
이러한 행을 오랫동안 지속한 이 보살이 운명하려 할 때 공중으로부터 위음왕여래가 설하는 법화경의 법문을 듣고 이를 믿고 받아 지녀 그 공덕으로 6근 청정을 얻어 그 후 오래 살면서 법화경의 전법에 진력하였다.
이 보살을 욕하고 또는 여러 가지로 박해를 하던 사람들도 이 보살의 부사의한 놀라운 설법을 듣고 자기들의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자기들에게 불성을 자각케 하려는 이 보살의 참뜻을 깨닫게 되어 그를 존경하고 따르게 된다.
그 후 이 보살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을 만나 수행하고 법화경을 설하여 마침내 부처를 이룬다. 이 상불경보살은 곧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신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불은 이와 같이 법화경을 수지하고 독송하며 이 경을 해설한 공덕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히신다.
법화경에는 불성이란 말이 구체적으로 사용된 곳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불성에 관한 것이 분명하게 나타난 것은 신해품의 장자궁자(長者窮子)의 비유설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가난하고 비굴하며 인생에 대한 자신을 상실한 한 평범한 인간이 부처님의 대자대비에 의하여 인간의 존엄성, 즉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불성을 자각하여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자각은 어느 한 사람에 한정될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자각을 가져 자신을 정화하고 인류의 전 사회를 정화하는 데에 불교의 이상이 있음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모든 중생이 이러한 자각을 가지게 될 것인가, 이 책임을 질 사람은 불교인 이외에 따로 있을 수 없다. 모든 불자가 이 사명을 걸머지고 때와 장소 또는 그 상대를 가릴 것 없이 정력적인 전법을 하여야 할 것이다.
상불경보살은 그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준 선구자요 실천자이다. 이 보살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본다.
①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데 대한 확신을 가졌다.
② 모든 사람을 그 불성 때문에 존경하고 예배하였다.
③ 그러한 행동에 의하여 모든 사람이 스스로의 불성을 자각하도록 노력하였다.
④ 그 한 가지 행동을 집중적으로 하였다.
⑤ 그 일을 위하여 불석신명(不惜身命) 하였다.
⑥ 그 공덕으로 부처를 이루었다.
21 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
이 품에서는 땅 밑에서 솟아 올라온 보살들이 참다웁고 청정한 큰 법을 깨달아 이를 수지하고 독송하며 해설하고 서사하여 이에 공양하기 위하여 여러 나라에서 이 경을 널리 전법할 것을 서원함에 대하여 부처님이 이 큰 법을 그들에게 부촉하기 위해 문수보살 등 일체 대중들 앞에서 열 가지 신비한 신통력을 나타내신다.
이것이 옛부터 일러져 오는 10대신력이다. 10대 신력은 다음과 같다.
① 출광장설(出廣長舌)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혀를 입 밖에 내어 중생들에게 보이시고 다른 모든 부처님들도 동시에 혀를 내어 보이심이다. 즉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것은 결국 하나이므로, 사람들은 절대로 믿어야 할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설법의 의미이다. 이것을 이문신일(二門信一)이라고 하는데, 2문은 본문과 적문을 말하는 것으로, 본문은 본불의 설법이요 적문은 적불의 설법이기는 하지만 본불과 적불은 결국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하나라고 하는 것이 이문신일이라고 하는 까닭이다.
② 모공방광(毛孔放光) 일체의 모공에서 방광하는 것이다. 빛은 어둠을 비추는 것으로 절대의 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법화경의 본문과 적문을 막론하고 법화경 전체를 통한 진리는 하나라는 것, 즉 이문리일(二門理一)이라고 한다.
③ 일시경해(一時警咳) 이것은 일시에 기침소리를 내는 것이다. 기침소리를 낸다는 것은 가르침을 편다는 것이다. 2문의 가르침의 하나라는 것으로, 이문교일(二門敎一)이라고 한다.
④ 구공탄지(俱共彈指) 탄지는 손가락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 것인데, 인도의 풍속에서는 약속을 승낙하는 행동이다. 법화경의 가르침은 자타가 둘이 아니고 일체임을 가르치는 경전으로, 이 정신은 2문에 공통되는 것이다. 이것을 이문인일(二門人一)이라 한다.
⑤ 6종지동(六種地動) 대지가 6종지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중생이 다 감동하여서 그 행동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행동은 다름아닌 보살행을 말한다. 여기에 본문과 적문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 이문행일(二門行一)이다.
⑥ 보견대회(普見大會) 이것은 10계의 중생들이 모두 이 법회를 본다는 것인데, 사람은 그 근기가 다르지만 시절과 인연이 도래하면 모두 정법에 귀의하게 됨을 뜻하는 것으로, 미래기일(未來機一)이라고 한다.
⑦ 공중창성(空中唱聲) 일체중생을 향하여 사바세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고 계시니 그곳에 가서 법문을 들으라는 소리가 들린 것인데, 이것은 미래에는 가르침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것을 미래교일(未來敎一)이라고 한다.
⑧ 함개귀명(咸皆歸命) 모든 중생은 다 부처님께 귀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사람들이 모두 불교신자가 되고 불교 중에서도 법화경 신자가 된다는 것으로, 이것을 미래인일(未來人一)이라고 하였다.
⑨ 요산제물(遙散諸物) 멀리서 여러 가지 물건을 훑는다는 것인데, 미래에는 모든 사람의 행동이 하나가 된다는 미래행일(未來行一)을 나타낸 것이다.
⑩ 통일불토(通一佛土) 시방세계가 하나의 불토(佛土)가 된다는 것인데, 모든 국토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정신세계가 하나, 즉 진리는 하나가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을 미래이일(未來理一) 이라고 한다.
이 신통력으로 표현되는 열 가지 일은 너무나 이상적이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꿈 같은 일들을 현실에 구현 시키는 것이 불자의 일이 아닐까. 우리들 불자는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힘차게 자기 사명을 다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옛부터 이 품은 상생(上行)보살 등 본화(本化)보살에게 후세에 법화경을 널리 펼치라는 특별한 부촉을 한 것이라 하여 별부촉(別付囑)이라 하고, 다음 제22품 촉루품을 모든 보살들에게 부촉한 총부촉(總付囑)이라 한다.
22 촉루품(囑累品)
촉루란 말은 어려운 일을 부탁한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뒤 법화경을 널리 중생들에게 알려 전법할 것을 대중에게 부탁하심이 이 품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23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부처님의 전새의 이야기를 본생담(本生譚)이라고 하고, 보살 등 부처님의 제자들의 전생의 이야기를 본사(本事)라고 한다.
이 품에서는 약왕(藥王)보살의 본사를 부처님이 설하여 수행자들의 정진을 권장하는 품이다.
옛날에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 밑에 일체중생희견(一切衆生喜見)보살이라고 이름하는 제자가 있었다. 이 보살은 일월정명덕불에게서 법화경의 법문을 듣고 갖가지 여러 어려운 고행을 닦아 현일체색신삼매(現一切色身三昧)의 경지에 도달 하였다.
현일체색신삼매라 함은 어떠한 형상이나 자유자재로 화신을 나타낼 수 있는 삼매의 힘이다. 이러한 힘을 완성한 것은 일월정명덕불로부터 법화경의 법문을 들은 공덕이라고 생각하고 그 부처님과 법화경에 갖가지의 공양을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공양이 몸으로써 올리는 공양만 같지 못하다 하고 양을 먹고 발라서 자기 몸 전체를 향과 같이 만들어 몸을 불살라 부처님께 공양하였다. 이것을 소신공양(燒身供養) 또는 사신(捨身)공양이라고 한다.
이 광명은 천이백년 동안 80만 억 항하사의 세계를 비추었는데, 여러 부처님들이 이것을 보시고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공양이요 진실한 법(法)공양이라고 찬탄하셨다.
이 보살은 사신공양의 공덕으로 일월정명덕불의 나라 정덕(淨德)이라는 왕가에 다시 환생하였는데, 전생에 법화경의 법문을 들었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고 다시 그 부처님을 친근하여 공양하였다. 이 때 일월정명덕불이 열반에 드시면서 불법 불제자촵3천대천세계촵불사리까지를 이 보살에게 부촉하셨다.
이 보살은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사리를 거두어 8 만 4천의 탑을 세워 갖가지의 공양을 올렸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두 팔을 불태워 공양하였다. 이 공덕으로 무량한 사람들이 보리심을 발하고 현일체색신삼매를 얻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들의 스승인 일체중생희견보살이 두 팔을 잃은 것을 보고 지극히 슬퍼하므로 일체중생희견보살이 <"나는 두 팔을 버린 공덕으로 미래에 금색신을 얻을 것이다. 이 일이 허망하지 않다면 나의 두 팔이 옛날과 같이 되살아 날 것이다.">라고 서원하였다. 이 때 홀연히 두 팔이 옛날과 같이 되살아 났다.
이것이 약왕보살의 본사이다. 이 이야기가 끝난 다음, 부처님은 칠보로써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보다 법화경을 수지하는 공덕이 더 큼을 다음과 같이 열 가지 비유를 들어 설하신다.
① 냇물 강물 등 모든 물 가운데 바다가 제일 깊고 큰 것과 같다.
② 모든 산 가운데 수미산이 제일 높음과 같다.
③ 뭇 별들 가운데 달이 제일 큰 것과 같다.
④ 어둠을 벗기는 데는 해가 제일인 것과 같다.
⑤ 여러 임금들 가운데 전륜성왕이 제일인 것과 같다.
⑥ 33천 가운데 제석천이 제일인 것과 같다.
⑦ 일체중생 가운데 대범천(大梵天)이 제일인 것과 같다.
⑧ 일체 범부와 하늘 가운데 아라한과 벽지불이 제일인 것과 같다.
⑨ 일체 성문과 벽지불 가운데 보살이 제일인 것과 같다.
⑩ 부처는 제법의 왕인 것과 같다.
다음에 다시 법화경이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그들의 소원을 성취시키는 이익을 열 두 가지의 비유를 들어서 설하신다.
① 갈증 나는 사람이 청량수(淸凉水)를 얻음과 같다.
② 추위에 불을 얻음과 같다.
③ 헐벗은 사람이 옷을 얻음과 같다.
④ 장사하는 사람이 인도자를 만남과 같다.
⑤ 자식이 잃었던 어머니를 만남과 같다.
⑥ 나루에서 배를 얻음과 같다.
⑦ 환자가 의사를 만남과 같다.
⑧ 어둠에서 등불을 얻음과 같다.
⑨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음과 같다.
⑩ 백성이 임금을 얻음과 같다.
⑪ 무역하는 사람이 바다의 좋은 배를 얻음과 같다.
⑫ 횃불이 어둠을 제거함과 같다.
끝으로 법화경을 해설하는 공덕의 위대함을 설하고 이 품을 끝맺는다.
24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이 품에서는 묘음보살이 현일체색신삼매(現一切色身三昧)를 얻어 시방세계에 이 경을 선포한 일이 설해져 있는 품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육계상과 백호상(白毫相)에서 광명을 놓아 동쪽의 많은 세계를 비추실 때, 그 가운데 정광장엄(淨光莊嚴)세계에 정화숙왕지여래(淨華宿王智如來)가 계셨는데 그 제자에 묘음(妙音)이라는 보살이 있었다.
묘음보살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놓으신 광명을 보고 사바세계에 가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뵙고자 정화숙왕지 부처님의 허락을 앙청하였다. 정화숙왕지 부처님은 사바세계에 가서 그 세계와 그곳의 부처님과 보살을 경만 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를 하시고 묘음보살의 소청을 승낙하셨다.
묘음보살은 자리에 앉은 채로 삼매의 신통력으로 영축산에 8만4천의 연꽃을 피게 하였다. 이것을 본 문수보살이 이 부사의한 서상(瑞相)의 연유를 묻는데 대하여 부처님은 이것을 정화숙왕지불이 계신 곳에서 수행하고 있는 묘음보살이 많은 보살들을 거느리고 사바세계에 와서 나를 예배하고 법화경을 듣기 위하여 나타난 서상이라고 대답하신다.
이 때 묘음보살은 8만4천의 보살을 거느리고 영축산에 도착하여 정화숙왕지불을 대신하여 부처님께 영락(瓔珞)을 바치고 문안을 드린다. 이어서 부처님은 화덕(華德)보살의 물음에 대답하여 묘음보살의 과거의 수행에 관한 설법을 하신다.
이 묘음보살은 운뢰음왕불(雲雷音王佛)에게 1만2천년 동안 10만 가지의 음악과 칠보로 만든 바루를 공양한 공덕으로 정화숙왕지불의 처소에 태어나서 이러한 신통력을 얻었다. 묘음보살은 현재는 이곳에 있지만 이 보살은 범왕(梵王)등 34 신을 나투어 법화경을 설하여 사바세계와 시방세계의 중생들을 교화하고, 때로는 입상까지도 나투어 중생을 제도하는데, 이것은 모두 현일체색신삼매의 신통력에 의한 것이다.
이 묘음보살품을 설할 때, 묘음보살과 함께 온 8만4천의,보살과 사바세계의 무량한 보살들이 모두 현일체색신삼매를 얻었다.
25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관세음보살은 무슨 인연으로 그 이름을 관세음이라고 하는가 하는 무진의(無搢意) 보살의 질문으로 이 품은 시작된다.
이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 하신다.
모든 중생들이 괴로움을 받을 때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지극한 마음으로 부르면 관세음보살은 그 소리를 듣고 그 괴로움을 벗어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떠내려가지 않으며, 바람에도 날리지 않고 칼과 몽둥이에도 잘라지거나 다치지 않으며, 귀신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고 쇠고랑에 묶이지도 않으며 도적의 두려움도 면할 수 있도록 관세음보살께서는 두려움 없음을 베풀어 주신다.
또,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관세음보살은 욕심이 많은 사람은 욕심을 여의게 하시고 성내는 마음이 많은 사람은 어리석은 마음을 여의게 하신다.
또, 어떤 여인이 아들을 낳고자 관세음보살을 예배하고 공양하면 복이 많고 영리한 아들을 낳게 하고, 딸을 낳고자 이 보살을 예배하고 공양하면 모습이 단정하여 여러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딸을 낳게 한다. 다시 말하면, 입으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외면 화난촵수난촵풍난촵도장난촵나찰 난촵가쇄난촵원적난(火難촵水難촵風難촵刀杖難촵羅刹難촵枷鎖難촵怨賊難)의 일곱 가지 어려움에서 벗어난다.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항상 생각하고 공경하면 탐촵진 촵치(貪촵瞋촵痴)의 3독을 여의게 되며, 몸으로 관세음보살을 예배하고 공양하면 아들과 딸을 소원하는 대로 나을 수 있다. 즉 이구양원(二求兩願)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들은 지혜를 상징한 것이요 딸은 자비를 상징한 것으로, 이 구양원은 지혜와 자비를 완성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한때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수지하고 염하며 예배하는 공덕은 62억 항하사 보살의 명호를 수지하고 염하며 신명이 다할 때까지 예배하고 공양하는 공덕과 같다고 하고,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수지하라고 권하시고 있다.
다음에, 무진의보살은 다시 관세음보살은 이 사바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위하여 법을 어떻게 설하며 그 방편의 힘은 어떠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시고 있다.
만일 이 나라에 어떤 중생이 있어 마땅히 부처님의 몸을 나투어 제도해야 할 이가 있으면, 관세음보살은 부처의 몸으로 변신하여 법을 설한다. 이와 같이 성문의 몸. 벽지불의 몸 등 33가지 몸을 나투어 법을 설하여 중생을 제도한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지극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에게 공양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이 관세음보살은 두렵고 위험한 속에 있을 때 두려움을 없게 해 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바세계에서 이 보살을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 이름한다. 이 때 무진의보살은 목에 걸었던 영락의 목걸이를 끌러 관세음보살에게 드리려 하였다.
관세음보살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부처님의 권고에 의하여 이를 받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석가모니 부처님께 바치고, 다른 하나는 다보(多寶) 부처님께 바쳤다. 이 때 지지(持地)보살이 관세음보살의 자유자재한 보문시현(普門示現)의 신통력을 듣는 중생들의 공덕을 찬탄한다.
이 품은 구원의 본불이 큰 자비심으로 우리들 중생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바 세계에 관세음보살로 나타나시어 괴로움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을 설한 법문이다.
이 품은 독립되어 관음경(觀音經)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유행하기도 한다. 이 관음신앙은 한국뿐만 아니라 인도 중국 일본 등 대승불교의 모든 나라에서 종파를 초월하여 크게 성행하고 있다. 이 관음경은 관음신앙의 근본 경전으로 많은 불자들에 의해 독송 되고 있는 경전이다.
26 다라니품(陀羅尼品)
이 품은 두 보살과 두 천왕과 10나찰녀 등이 각각 다라니주(陀羅尼呪)를 외우고 법화경을 널리 펼치는 법사(法師)를 보호하기를 서원하는 품이다.
처음에 약왕(藥王)보살이 부처님께 법화경을 수지하고 독송하며 서사하는 공덕을 묻는다. 이에 대하여 8백억 나유타 항하사의 여러 부처님을 공양하는 복보다 이 경의 한 게송을 수지하고 수행하는 공덕이 훨씬 많다고 부처님이 대답하신다.
약왕보살은 이 말씀을 듣고 6억 항하사의 여러 부처님이 설하신 것으로 전하여 오는 다라니를 법사에게 주어 법화경의 설법자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하며, 만일 이 법사를 해치고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든 부처님을 해치고 헐뜯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또 용시(勇施)보살도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을 옹호하기 위하여 다라니를 설하고, 만일 법사가 이 다라니를 얻으면 야차나 아귀 등도 법사의 결점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이 신주(神呪)를 외우고 지국천왕(持國天王)도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러 부처님이 설하신 주문을 설한다. 또 10나찰녀와 귀자모(鬼子母), 그리고 그 자식들이 함께 부처님 계신 곳에 와서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하며 주문을 설하고, 만일 나의 주문에 따르지 아니하고 설법자를 괴롭히면 머리가 쪼개질 것이며 그의 죄는 부모를 죽이고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는 죄에 상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부처님은 법화경의 이름만을 수지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공덕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거늘 법화경의 한 부분을 수지하고 이에 공양하는 사람은 더욱 이를 보호하여야 한다고 나찰녀 등에 명령하시고 있다.
27 묘장엄왕본사품(妙莊嚴王本事品)
이 품은 묘장엄왕(妙莊嚴王)이 그 부인과 두 아들에 감화되어 종래의 신앙을 버리고 지극한 불교신자가 되어 전법에 크게 진력하였다는 가정의 신앙문제를 다루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한 옛날 광명장엄국(光明莊嚴國)에 운뢰음숙왕화지불(雲雷音宿王華智佛)이라는 부처님이 계셨다. 그 때 바라문교를 믿는 묘장엄왕이라는 임금이 있었는데, 그의 정덕(淨德)부인과 정장 정안(淨藏 淨眼)의 두 아들은 부처님께 귀의하고 있었다.
이 두 아들은 오랫동안 보살도를 닦아 큰 신통력과 지혜를 구족한 사람이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위하여 법화경을 설하고 계셨는데, 두 아들은 어머니가 부왕(父王)과 함께 갈 것을 생각하고 아들에게 신통력으로 기적을 나타낼 것을 권하였다.
두 아들은 신통력으로 허공에 올라가 몸에서 물과 불을 뿜기도 하고 몸을 크게도 하고 작게도 하는 등 갖가지 신통변화를 나타냈다. 이것을 본 부왕은 놀라고 환희하면서 너희들의 스승이 누구냐고 물었다.
두 아들은 지금 보리수 밑에서 법화경을 설하고 계신 운뢰음숙왕화지불(雲雷音宿王華智佛)의 제자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임금은 신심이 일어나 부처님을 친견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임금은 부인과 두 아들, 그리고 많은 권속들을 데리고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크게 감탄하고 목에 걸었던 영락을 풀어 부처님께 공양하였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이 임금은 나의 법 속에서 출가하여 비구가 되어서 보살도를 닦아 바라수왕불(婆羅樹旺佛)이 되리라고 수기 하였다.
임금은 나라를 아우에게 넘겨주고 부인과 아들, 그리고 권속들과 함께 출가하였다. 그 후 8만 4천년 동안 법화경을 수행하여 일체정공덕장엄삼매(一切淨功德莊嚴三昧)를 얻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지금부터는 삿되고 그릇된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이 때 부처님은 대중에게 묘장엄왕(妙莊嚴王)은 지금의 화덕(華德)보살이요, 정덕부인은 장엄상(莊嚴相)보살이며 두 아들은 약왕보살과 약상(藥上)보살이라고 하시고, 이 두 보살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하늘과 인간들이 예배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는 꿈 속의 이야기처럼 들리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 인간의 현실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가정에 있어서의 신앙 문제인 것이다. 신앙이 다른 아버지와 자식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아들과 그릇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 그리고 그 사이에 끼여 있는 어머니, 이것은 그대로 오늘날의 가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현실의 문제이다.
현대에 있어서는 인간은 누구에게나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의 가정생활에 여러 가지 면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가정은 화합이 이루어져야 행복을 이룰 수 있다는 것도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가정의 화합을 위해서는 가정 구성원들의 신앙 문제를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문제이다.
불교는 본래 자기 개인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고 나와 남이 함께 행복한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이다. 다시 말하기도 새삼스러운 것일진대, 가정의 구성원이 신앙을 함께 하도록 하는 것은 불자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임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이 품의 의미는 새로워지기만 한다. 이 품 가운데 신통력의 이야기는 기이함이 그지없는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그러한 신통변화에 끄달릴 필요는 없다.
바른 신앙과 수행에 의하여 인격의 변화가 생기고 인격의 변화에 의하여 말과 행동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변화가 남에게 새로운 인식과 흠모의 정을 일어나게 한다. 이런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을 신통변화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28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
이 품은 보현보살이 설법을 들은 대중들에게 법화경을 수지하고 실행함을 권장하는 품이다.
보현보살은 행(行)을 대표하고, 문수보살은 지(智)를 대표하여 한 쌍을 이루는 보살인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좌우 양쪽에서 모시는 보살이다.
법화경에서도 제일 앞의 서품에 문수보살이 등장하여 법화경을 설하는 인연을 설하고 있고, 맨 끝의 품에 보현보살이 등장하여 본문(本門)법화 내지는 법화경 전체의 매듭을 짓고 있음은 독자에게 여러 가지 시사를 주는 것이라 하겠다.
보현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화경 설법을 동쪽 보위덕상왕불(寶偉德上王佛)의 나라에서 듣고 무량한 보살을 거느리고 석가모니 부처님께 와서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 어떻게 해야 법화경을 얻을 수 있는 지를 여쭈어 보았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첫째는 여러 부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절대적인 신념을 가질 것이오, 둘째는 선행을 많이 쌓을 것이고, 셋째는 올바른 신앙집단에 들어갈 것이며, 넷째는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등 네 가지를 성취하면 반드시 법화경을 얻을 수 있다고 대답하신다.
그 때 보현보살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맹세를 부처님께 한다.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5백세의 세상이 어지러운 속에서 이 경전을 수지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는 이 사람을 보호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것이요,
마구니나 야차들이 그 사람을 괴롭히지 못하게 할 것이며, 또 서서 이 경을 읽고 외는 사람이 있거나 앉아서 깊이 이 경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는 흰 코끼리를 타고 그 앞에 나타나 그 사람을 공양하고 보호할 것이며,
만일 어떤 사람이 법화경의 한 구절 이나 한 게송을 잃은 바가 있으면 가르쳐 주어서 막힘이 없도록 하고 삼매와 다라니를 얻게 하겠고,
또 비구 등 사부대중 가운데 법화경을 수지 독송 서사하고 닦고 익히려는 사람이 있으면 3촵7일간을 일심으로 정진케 하고 3촵7일을 마치고 나면 자기는 흰 코끼리를 타고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몸을 나투어 그 사람의 앞에 나타나 법을 설하고 그 사람에게 다라니를 주어 마구니나 여인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아니하도록 그 수행자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이어서 법화경을 수행하는 사람의 공덕을 말하고 있다. 즉 법화경을 수지하고 그 뜻을 이해하고 설한 그대로 수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은 보현행(普賢行)을 행하는 사람이요, 착한 덕을 심을 사람이어서 부처님이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것이다.
또 이 경을 서사하면 죽은 뒤에 도리천에 태어나 복락을 받을 것이요, 이 경을 수지 독송하여 그 뜻을 이해하면 3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도솔천의 미륵보살이 계신 곳에 태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는 신통력으로 이 경을 수호하여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 이 경을 널리 선포하여 끊이지 아니하도록 할 것이라고 맹세하였다.
이 보현보살의 맹세를 들으신 부처님은 보현보살을 칭찬하시면서 보현보살은 이 법화경을 돕고 보호하여 많은 중생을 안락하게 하고 이익을 얻게 할 것이다.
이것은 부사의한 공덕과 깊고 큰 자비를 성취한 것이요, 아득한 옛날로부터 보리심을 일으켜 신통력을 섭취하여 이 경을 수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보현보살의 이름을 수지하는 사람을 보호할 것이라고 칭찬하셨다.
이어서 부처님은 이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의 공덕을 다음과 같이 칭찬하신다.
"보현보살이여, 이 법화경을 수지하거나 서사하는 사람은 곧 석가모니 부처님을 친견하는 사람이요, 부처님을 공양하는 사람이므로 부처님이 친히 손으로 그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이며, 부처님의 옷으로 덮어 줄 것이다.
또 이러한 사람은 세상에서 탐욕을 내지 않을 것이며 다른 종교의 경전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바르고 착하지 않은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고 3독에 끄달리지 않아 보현행을 잘 행할 것이다.
보현보살이여, 만일 부처가 열반한 뒤에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을 보거든 이 사람은 오래지 않아 도량에 이르러 마구니의 무리들을 항복받고 정각을 이룬 다음 법륜을 굴리어 하늘과 사람들 가운데서 사자의 자리에 앉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라.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을 보고 그의 허물을 말하거나 그것을 비웃는 사람은 갖가지 무거운 병에 걸릴 것이니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을 보면 부처님을 맞이함과 같이 공경하여야 한다.”
법화경(法華經) 비유
● 법화칠유
대승경전은 보수적인 출가불교에 반대하고 석존의 참된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 주로 재가자 측에서 발생한 운동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했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용도 번잡한 교의나 이론을 설하는 것이 아니고 평이한 것으로서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니면 안되었다. 그래서 비유와 인연이야기 등도 많이 수용되었다. 법화경도 그러한 작품의 하나로 법화경에 나오는 비유는 옛부터 `법화칠유'로서 일곱 가지로 정리되어 있다.
제1 화택의 비유(비유품), 제2 궁자의 비유(신해품), 제3 운우의 비유(약초유품), 제4 화성의 비유(화성유품), 제5 궤보주의 비유(오백제자수기품), 제6 정주의 비유(안락행품), 제7 의사의 비유(여래수량품)이다.
이들 일곱 가지 비유 말고도 없는 것은 아니다. 수기품의 `대왕선의 비유`, 용출품의 '부소자로(父少子老)의 비유' 등이 있다.
법화경을 본적이문으로 나누고 적문 14품 중의 정종분으로 '방편품'에서 '인기품'까지의 팔품을 들고 있는데 이 팔 품을 다시 분별하여 법설주(法說周), 비설주(譬說周), 인연주(因緣周)라 한다. 이것은 3주설법으로 일컬어지는 것인데 이중의 비설주에는 7유 중의 제1, 제2, 제3의 3유가 있다. 그리고 이 3주설법을 각각 상근, 중근, 하근의 중생을 위한 것이라 한다.
● 제1 화택의 비유
제1 화택의 비유는 `3거화택의 비유`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사리불이 수기를 얻은 뒤에 사리불의 간청에 따라 이제 진실로 비유를 써서 이 뜻을 밝혀야 한다고 해서 설해진 것이다.
연로한 대 장자가 있고 단지 하나의 문만 있는 대저택에 많은 노비들이 살고 있었다. 그 저택은 대단히 낡아 어느 때인가 화재가 발생했다. 그런데 장자의 아이들은 노는데 열중하여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꾀를 내어 아이들이 갖고 싶어했던 양의 수레, 사슴수레, 소의 수레가 문 밖에 있으니 빨리 나가보자고 하니 아이들은 앞을 다투어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곳에 수레가 없자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수레를 달라고 요구하게 되며, 그러자 똑같이 크고 흰 소의 수레를 주었다고 하는 비유이다.
여기서 유명한 "삼계는 편안함이 없다. 오히려 불 난 집과 같다. 뭇 고통이 충만하여 매우 두려워해야 한다. 지금의 삼계는 모두 나의 소유이다. 그 중의 중생은 모두 나의 아들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여기서 장자란 부처님이고, 대저택이란 미망의 세계를 탈출 시키기 위해 양, 사슴, 소 즉 삼승의 가르침을 설하여 유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고 흰 소의 수레 즉 불승으로 개시(開示) 했던 것이다.
이 '3거 1거의 비유'에 대해서는 뒤에 그 해석을 둘러싸고 '3거가' '4거가'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즉 양, 사슴, 소와 크고 흰 소의 수레를 다른 것으로 보는가 혹은 양, 사슴, 소 가운데 소와 크고 흰 수레를 같은 것으로 보는가에 따라 이러한 차이가 나오는 것이다.
중국 법화경 주석가들은 이러한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즉 삼승 중의 불승과 삼승의 구별을 초월한 불승이 있다고 하는가 혹은 삼승 중의 불승 이외에 불승은 없다고 보는가에 의해 다른 것이다.
즉 진실한 대승과 방편의 대승이 있다고 하는가 혹은 대승에는 그러한 구별이 없다고 하는가 이다. 전자는 '4거가'로 불리고 천태대사나 현수대사가 이 입장에 서며, 후자는 '3거가'로 불리고 가상대사나 지은대사는 이 입장에 있다.
● 제2 궁자의 비유
제2 궁자의 비유는 앞서 비유품에서 사리불이 수기를 받은데 대하여 신해품에서 수보리, 대가전언, 대가섭, 대목건련의 사대성문의 환희에 찬 고백이 있으며, 나아가 그 깨달음을 이 장자궁자의 비유로 기술하고 있다.
제1 화택의 비유는 석존에 의해 기술된 것인데 이 장자궁자의 비유는 제자의 입장 즉 성문의 입장에서 화택의 비유와 같은 내용을 기술한 것이다.
어느 장자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은 어려서 부모를 버리고 가출하여 오랫동안 여러 나라를 방랑하다가 우연히 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아버지인 장자는 아들을 찾다가 한 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때마침 가난한 아들은 아버지인 장자가 사는 집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안의 시종들로 둘러싸여 앉아있는 장자의 위풍에 두려움을 느껴 도망가 버렸다. 장자는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붙잡으려 했는데 그 아들은 놀란 나머지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거기서 장자는 아들을 놓아주고 후일 다른 사람을 보내어 변소 청소부가 되라고 권유했다. 때 맞춰 장자는 남루한 옷을 입고 그 아들에게 다가가 다른 곳으로 가지말고 안심하고 일하도록 위로하고 이후 자신의 아들처럼 대하려 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장자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그 아들을 불러 재산관리인으로 일체를 맡겼다. 마침내 죽음이 임박하자 국왕이나 친척 등 일체를 불러모아 그 아들이 자신의 친 아들임을 고백하고 일체를 그 아들에게 준다고 말한다.
여기서 장자는 부처이고 그 아들은 성문이며, 오랜 기간의 방랑은 미망의 세계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청소부가 되어 차례로 마음이 열리고 마침내 부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으로서 부처님인 장자의 대자비심과 아들이 부처님의 아들임을 알았던 때의 감격이 실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장자궁자의 비유는 천태대사의 불교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천태대사는 이 비유에 의해 불교를 다섯 단계로 나누고 해석했던 것이다. 그것이 천태의 5시교판이라 불리는 것이며, 화엄 아함 방등 반야 법화열반의 순서로 석존 일대의 교화가 시행되었다고 하며, 가난한 아들의 가출에서 나의 아들이라 선언하기까지의 50년을 그 기간에 비유했던 것이다.
● 제3 운우의 비유
제3 운우의 비유는 통상 '3초 2목의 비유'로 불리는 것이다. 신해품에서 대가섭 등이 가난한 아들의 비유에 따른 깨우침을 기술한데 대하여 다음의 '약초유품'에서는 석존이 그들을 위해 이 비유를 설했던 것이다.
삼천대천세계의 대지에는 많은 초목이 있는데 그 종류도 잡다하다. 구름이 뿌리는 비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셔주지만 초목의 크고 작음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종성(種性)에 따라 성장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다.
약간의 땅에서 자라도 한 방울의 비가 적셔준다. 드넓은 대지에서 자라는 것은 많은 비를 흡수한다.
이처럼 다양한 초목에 차별이 있는 듯 하지만 부처는 진실로 커다란 구름 덩어리처럼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리의 비로써 일체중생을 적셔주는데 중생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그것을 수용하고 삼승, 5승의 차별을 낳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일불승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비유는 크고 작은 초목을 소초, 중초, 상초와 소수, 대수의 다섯 가지로 구분 하고 있기 때문에 '3초 2목의 비유'라 부르는 것이다. 소초는 사람과 하늘에, 중초는 성문, 연각에, 상초, 소수, 대수는 보살에 비유되는데 천태대사의 해석에 따르면 소초는 인천승, 중초는 성문, 연각의 이승, 상초는 삼장교의 보살, 소수는 통교의 보살, 대수는 별교의 보살에 비유되고 있다.
● 제4 화성의 비유
제4 화성의 비유는 앞의 수기품에서 대가섭 등에게 수기를 주었기 때문에 다음에 부루나 등의 하근기 성문을 위해 과거의 인연을 설하게 된다. 그리고 부처는 그것을 거듭 설명하기 위해 이 '보소화성(寶所化成)의 비유'를 설하게 되었다.
이 비유는 진술한 '화택의 비유'와 동일한 의의를 지닌 것으로 부처의 대자비를 강조하고 중생구제를 위해 어떻게 마음을 기울이고 일불승으로 인도할 것인가를 설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스승이 대중을 이끌고 오백 유순이라는 멀고 험한 보처(寶處)에 도달하고자 하였지만 대중은 피로해 도중에 돌아가려 했다. 거기서 스승은 삼백 유순 되는 곳에 하나의 성을 만들어 사람들을 그곳에 휴식 시켜 안온한 생각을 일으켜 이미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 다음 사람들의 피로가 풀리자 화성을 없애고 이 성은 나의 방편력으로 짐짓 만든 것이며, 참된 보처는 가까이에 있다고 말하고 사람들을 출발시켰다고 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화성이란 성문, 연각의 이승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이승은 부처가 임시로 거짓으로 만든 것이며,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을 위해 일시적인 안식처로 삼은데 불과하다. 참된 보처는 일불승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임을 가르친 것이다.
● 제5 궤보주의 비유
제5 궤보주의 비유는 '의리계주(衣裡繫珠)의 비유'로도 불리고, 인기품에서 오백 명의 아라한이 수기를 받고 기뻐하며, 자신들이 궁극의 열반을 얻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완전히 무지했기 때문이라 설한다. 이어서 자신들의 깨우침을 이 비유로써 말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고 술에 취하여 잠들어 버렸다. 그 때 친구는 일이 있어서 외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자 보주(寶珠)를 자고 있는 친구의 옷 속에 넣어주고 외출했다.
그는 술이 깨자 친구의 집에 작별을 고하고 여러 나라를 방랑하며 곤궁한 생활을 계속했다. 그런데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친구로부터 그의 보주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것도 모르고 헛되이 고생하고 있었음을 알았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친구는 부처이며, 과거에 부처로부터 법화경을 듣게 되어 부처의 종자를 심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고 가난한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을 이승에 비유하며, 이제 부처로부터 그것을 듣고 자신이 보살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 제6 정주의 비유
제6 정주의 비유는 적문의 마지막인 안락행품 중에 설해져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문수보살이, "보살이 이후 악세에 법화경을 설하는 경우에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는 질문에 신, 구, 의 서원의 4안락행에 머물러 설해야만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어 이 법화경이 여러 경전 중에서 최상의 경전이며, 제불여래의 비밀 창고임을 비유로써 설한다.
이제까지의 다섯 가지 비유가 부처님의 대자비심에 의한 선교방편에 대한 것이라면 이것은 법화경의 공덕을 설한 것이다.
어느 전륜성왕이 여러 나라를 정복했는데 그 싸움에 전공이 있는 병사들에게 배상으로 밭과 집, 마을, 보배, 코끼리, 말, 수레 등을 주었다. 그러나 왕의 머리털 속에 감추어져 있던 명주(明珠)만은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큰 공적이 있는 병사에게 이것을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부처님이 사람들을 교화하고 사람들은 그것에 따라 다양한 번뇌와 싸우며, 그것을 정복할 뿐인데 그 싸움의 공적에 따라 갖가지의 가르침을 설해 주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명주에 비교되는 법화경은 가장 용감하게 싸워 일체의 번뇌를 다스리는 사람에게만 준다는 것이다.
● 제7 의사의 비유
제7 의사의 비유는 여래수량품에서 설하는 것이다. 이 수량품은 본문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서 부처의 영원성과 보편성을 개현하는 것이다.
적문에서 법개회와 인개회가 시행되고, 본문에서 법을 설하고 수기를 주는 주체인 구원실성의 본불(本佛)을 개현하며, 그것에 의해 법화경의 개회사상이 완성되는 것이다.
앞의 종지용출품에서 상행 등의 4보살을 비롯한 6만 항하사의 보살이 사바세계의 지하에서 용출했다, 그런데 미륵 등의 보살은 이제까지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들 보살들에 대하여 어디서 왔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부처님을 찾아간다.
그러자 부처는 이 땅에서 솟아난 보살들은 자신이 성도 이래 교화했던 보살들이고, 지하의 허공에서 일심으로 정진하며 위 없는 지혜를 구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이 말을 들은 마륵 등은 더더욱 의혹을 품고 부처님은 성도 이래 40여 년을 지난데 불과한데 이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보살들을 교화할 수 있었을까. 만 25세의 젊은 사람이 백세의 노인을 가리켜 나의 아들이라 했다고 하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부소자노(父少子老)의비유). 어떻게든 설명해서 우리들의 의혹을 풀어 주십사고 간청했다.
이상이 용출품의 개요인데 이 질문에 대답하여 부처님이 설했던 것이 수량품이다. 일체 세간의 사람들은 석존이 카필라의 궁전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곳의 도량에 앉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진실은 성불 이래 무량무변 백 천만 억 나유타 겁이라 설한다.
그로부터 이 사바세계에서 설법교화하고 또한 많은 나머지 나라에서도 중생을 인도하여 이롭게 했다. 이 사이에 자신은 연등불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열반에 들어갔다고도 했는데 그들은 모두 방편으로 말했던 것이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거기서 거듭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이 '의사의 비유'를 설했던 것이다.
어떤 의사가 우연히 멀리 타국에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이 잘못하여 독약을 마셔버렸다.
그 무렵 아버지인 의사가 집으로 돌아와 괴로워하며 구원을 바라고있는 아이들을 보고 해독약을 조제하여 주었다. 거기서 본심을 잃지않은 아이는 그것을 복용하고 병을 치유할 수 있었지만 독이 깊이 퍼져있던 아이들은 약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버지인 의사는 꾀를 내어 다른 나라로 들어가 심부름꾼을 아이들에게 보내어 '아버지가 죽었다'고 알렸다.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아이들은 비탄에 빠져 본래의 마음을 되찾고 약을 먹고 완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돌아왔다는 줄거리다.
이 경우 이 의사에게 거짓말의 죄가 성립할까. 부처도 중생을 인도하여 불도를 완성 시키기 위해서는 방편으로 입열반을 보여준 것이고 사실은 부처에겐 입열반 등은 없고 거짓말의 잘못도 없다고 기술한다. 이상이 '법화칠유'로 불리는 것의 내용이다.
[출처] 천태사상(天台思想)|작성자 kjcn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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