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참된 말씀'
한 스님이 물었다.
“진여(眞如)니, 범부와 성인(凡聖)이니 하는 것은 모두 꿈속의 말입니다. 무엇이 참된 말씀(眞言) 입니까?”
“그 두 가지를 다시는 말하지 말라.”
“두 가지는 그만두고, 무엇이 참된 말씀입니까?”
“옴 부림 파트(唵部啉發)"
진여(眞如)란 말은 아마도 경전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진여법성, 진여법신, 청정진여 등 복합어로서도 많이 사용되는데, 참 진(眞), 같을 여(如), 진리와 같은 것, 바로 진리 그대로라고 보면 됩니다. 진리라는 말도 머리에 모습(相)이 그려지면 이미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 있듯이, 잡을 수도, 부를 수도 없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다보니 진여라는 용어가 탄생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하튼 진여(眞如)는 법신(法身), 불성, 자성, 본래면목과 같은 뜻으로 모두 우리 마음의 참 모습, 그 본바탕(當體), 근본 마음(本心)을 일컫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참된 말씀으로 번역한 진언(眞言)은 범어로 만트라(mantra)라 하여, 밀교에서 기도할 때 외우는 주문(呪文) 등을 말합니다. 신주(神呪), 밀주(密呪), 밀언(密言) 이라고도 부릅니다.
스님의 질문에서 진여(眞如)와 범성(凡聖), 즉 일반 범부(凡夫)와 성인(聖人), 이 두 가지 말은 모두 꿈속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꿈속의 말이란 환상(幻想), 허깨비, 실제가 아닌 그림자와 같다는 뜻이죠. 이 모두 그림자와 같이 헛된 말인데, 참된 말씀(眞言, 진언)은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조주선사는 '다시는 그 두 가지를 말하지 말라'고 대답합니다. 진여와 범성(凡聖), 이것을 왜 두 번 다시 언급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금강경의 사구게 중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란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말인데, 모든 하는 것이 있는 법(有爲法, 유위법)이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물,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의식으로 인지(認知)하는 모든 대상과 생각은 꿈, 환상, 거품, 그림자와 같고, 이슬,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진여와 범성이란 이 말의 뜻을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꿈이요, 환상이요, 허깨비 같은 것이니 우리의 참된 모습(實相), 진리의 근원을 드러내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입으로 내뱉으면 그 말은 이미 병들었다고 합니다.
다시 이 스님은 '그 두 가지는 그만두고, 참된 말씀(眞言)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조주선사가 다시는 그 두 가지를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말의 참된 뜻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럼 참된 말씀(眞言)이라는 것도 진여, 범성과 마찬가지로 바로 꿈속의 말이 아닙니까? 하고 따지듯이 묻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설명해준들 이 스님이 알아차릴까요?
물론 조주는 절대 이런 걸 설명해줄 리도 만무합니다. 오직 본분의 일만 드러내어 스스로 깨치게 도울 따름입니다. 그 차이는 예를 들어 ‘옴 부림 파트(唵部啉發)이다'고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참된 말씀(眞言), 주문(呪文)이다. 그렇지만 조주는 기도할 때 외우는 주문을 참된 말씀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깊은 뜻은 다른데 있습니다. 참 자신을 찾으려면 모든 분별을 벗어나라!
99. '우주에 두루한 조주'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주입니까?”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다.”
"무엇이 조주입니까?" 조주(趙州)는 조주종심선사의 법호(法號)이기도 하고, 선사가 머물던 중국의 어느 고장의 지명(地名)이기도 합니다. 법(法)을 거량(擧量)하는 선문답에서는 주로 선사의 깨달은 경지, 가풍에 대하여 묻고 싶을 때 법명을 많이 부르고 있습니다. '조주스님의 경지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물은 것이죠.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사방 팔방, 시방에 모두 두루한다는 뜻입니다. 나 조주의 법신은 온 우주에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다. 나 뿐만 아니라 너를 포함하여 모든 중생(부처)의 지혜의 빛은 온 세계를 비추고 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삼라만상 모든 것은 부처의 경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한순간도 도(道)를 벗어나지 않고 삶을 누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변의 모든 현상, 사물을 부처로 보십시오. 괴롭고 슬프고 힘든 일도, 즐겁고 기쁘고 쉬운 일도, 이 모든 것의 본질은 공(空)이고, 공(空)은 모든 부처가 나온 곳입니다. 사방 팔방이 모두 부처(깨달음)인데 무슨 두려움이 있고, 집착할 바가 있으며, 걸림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모두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100. '정(定)은 살아있는 것'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정(定)입니까?”
“선정이 아닌 것이다(不定).”
“무엇 때문에 선정이 아닌 것이라 합니까?”
“살아있는 것, 살아있는 것(活物活物)이기 때문이다."
원문에 '여하시정(女何是定)?'이라 하여 '정 (定)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는데, 이 정(定)은 불교에서는 보통 삼매(三昧) 라고도 하는 선정(禪定)을 가리킵니다. 물론 '석가는 49년 동안 부정법(不定法)을 설했다' 라는 말이 있듯이, 이럴 경우에는 정해진, 결정된 이런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편의상 '선정(禪定)'이라 생각하고 강설합니다. 정해진 정(定)으로 봐도 그다지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선정이 무엇 이냐고 물었는데, '선정이 아니 다'고 대답했습니다. 선정은 보살의 수행덕목인 육바라밀, 즉 보시, 인욕, 지계, 정진, 선정, 지혜 중의 하나입니다. 선(禪)을 닦는데 있어서는 선정과 지혜를 가장 중시하는데, 참선(參禪)을 통하여 깊은 선정에 들어가야 반야의 지혜가 생긴다고 하여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도 탄생한 것입니다.
조주선사는 '정(定)은 선정이 아닌 것이다.'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선정을 선정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그 아픈 심정을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우스개 소리를 하냐고 할 지 모르지만 붓다가 금강경에서 '부처는 부처가 아니고 이름이 부처일 뿐이다'고 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본다면 여래의 경지에 오르리라'고 했습니다.
'어째서 선정이 아닌 것이라고 합니까?' 라고 물으니 활물(活物)이기 때문 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물을 끌어올렸을 때 물고기가 살아서 펄떡 펄떡 뛰는 그 모습을 그려서 우리의 법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는 것' 우리의 자성은 항상 세상 만물을 비추고, 광풍처럼 휘몰아치다가는, 밤에 호숫가 빈 배에 고히 잠들기도 하는 그런 불가사의한 존재입니다.
선정이라고 해서 그냥 고요한 세계에 빠져서 마음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앉으나 서나, 걷거나 멈추거나 항상 깨어 있어서 세상의 불의에 맞서기도 하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끌어안기도 해야 합니다.
[출처] 조주록 강해 21(98~100)|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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