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분별에 떨어지지 않는 말씀'
한 스님이 물었다.
“문답이 있으면 모두 분별(意根)에 떨어지는데 큰 스님은 분별에 떨어지지 않고 어떻게 응대하겠습니까?”
“물어보라(問)!”
“그럼 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여기에서 시비하지 마라.”
선(禪)을 공부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도(道)에 대한 바른 견해, 안목(眼目)을 바로 갖추는 것이라고 합니다. 선사의 말씀은 때로는 너무 평범하고, 때로는 너무 이상하게 들려서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행인이 질문하고 선사가 대답하는 그 과정에서 공부하는 사람은 선사의 말이 떨어지는 곳(落處)이 어디인가?, 즉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가, 말하자면 그 말의 귀결점(歸結點), 요점이 무엇인지 알아채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핵심을 한순간에 알아채야지 이리 저리 생각해서 꿰어 맞춰보려 하면 이미 어긋나버린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심(無心)의 상태에서 말씀의 귀결점을 바로 알아채야 하는데, 6식(識)인 의식(意識), 즉 마음의 인식(認識), 분별 작용을 통해 그 뜻을 밝히려 한다면 곧 바로 그릇된 망상이 되는 것입니다. 위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한 “문답이 있으면 모두 분별(意根)에 떨어지는데 큰 스님은 분별에 떨어지지 않고 어떻게 응대하겠습니까?” 란 질문은 선(禪)을 묻고 대답하는 과정에는 항상 생각이 개입되어 말을 골라 써야 하는데, 이는 결국 분별심에 빠지는 것이다, 조주선사는 어떻게 한 생각도 하지 않고 수행자들을 가르친다는 것인지 따져 묻는 것입니다. 조금 공부한 티는 납니다.
이 질문에 조주선사는 '물어보라(問)!'고 대답했습니다. 수행인의 질문을 듣고 분별심에 빠질 틈새도 없이 전광석화처럼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자는 다짜고짜 앞에서 좋은 질문을 했으니 '빨리 답이나 먼저 주십시오.' 라고 재촉을 합니다. 공부를 어느 정도 했다 해도 선사의 무심(無心)의 경지는 전혀 알 길 없는 수행자가 투정을 부리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 대답을 해주기 위해서는 분별에 떨어지지 않는 질문을 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이 미칠 리가 없죠. “여기에서 시비하지 마라.” 조주선사도 이런 스님에게는 분별심을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를 그냥 한마디 말로써 알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 완전히 깨치면 분별심, 즉 의식은 묘관찰지(妙觀察智)로 바뀌어 버립니다. 현상을 잘 관찰하여 분별하고 자유자재로 가르쳐도 범부의 분별심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입니다.
88. '용녀가 바친 보배구슬'
한 스님이 물었다.
“용녀가 부처님께 몸소 바쳤다고 하는데, 무엇을 바쳤습니까?”
조주선사는 두 손으로 바치는 시늉을 했다.
용녀가 부처에게 구슬을 바쳤다는 이 이야기는 법화경(法華經) 제바달다품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8살 난 용왕의 어린 딸에게 그 값이 삼천대천세계에 상당하는 보배구슬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을 부처께 바치니 곧 받으셨다. 용녀가 지적보살과 사리불존자에게 말했다.
"제가 올린 보배구슬을 세존께서 받으시니 이 일이 빠릅니까? 빠르지 않습니까?
"매우 빠르다."고 대답하니 용녀가 다시 말했다.
"당신들의 신통력으로 제가 성불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보다 훨씬 빠를 것입니다."‘
이 말 끝에 용녀는 한순간에 남자로 변하고,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들을 위하여 미묘한 법을 설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위 질문은 '용녀가 부처님께 보배구슬을 바쳤다고 하는데, 이 보배구슬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입니다. 이에 대하여 조주선사는 두 손으로 뭔가를 바치는 시늉을 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물론 보배구슬을 바치는 시늉이겠지만 조주는 이것을 누구에게 바치려고 한 것입니까? 그 스님에게 청정법신을 보고 알아채라고 몸짓을 했는데 여러분은 이제 알아챘습니까? 이렇게까지 알려줘도 깨닫지 못한다면 더 이상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보배구슬은 바로 여러분의 청정법신, 마음, 여래(如來)'
89. '보기는 쉬워도 알기는 어렵다'
조주선사가 시중(示衆)하여 말했다.
“이곳의 불법은 어렵다고 말하면 쉽고, 쉽다고 말하면 어렵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는 어려워도 알기는 쉽지만, 이 노승이 있는 곳은 보기는 쉬워도 알기는 어렵다. 이것을 능히 알아낼 수만 있다면 천하를 돌아다녀도 된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을 때 조주에서 왔다고 한다면 조주를 비방하는 것이 되고, 조주에서 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또한 자기를 매몰시키는 것이니 그대들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한 스님이 물었다.
“눈에 닿기만 해도 큰스님을 비방하는 것이 되는데 어떻게 해야 비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비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벌써 비방해 버린 것이다.”
위 64번의 문답에서 조주선사가 말했습니다. “제방에서는 보기는 어렵고 알기는 쉬우나, 이곳에서는 보기는 쉬우나 알기는 어렵다.“ 라고. 그래서 조주 자신의 도(道)는 어려운 듯한데 쉽고, 쉬운 듯한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조주선사가 수행자들에게 자주 말하는 '차나 한잔해라.'란 말씀은 얼마나 편하게 들립니까? 참으로 금방 알아들으니 보기는 쉬운 듯 하죠. 그런데 그 말에 담긴 뜻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쇠가시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언구(言句)를 벗어난, 말 이면의 뜻을 단박에 꿰뚫어야 조주의 '보기는 쉬워도 알기는 어렵다'는 뜻도 알고,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기봉을 드날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을 때 조주에서 왔다고 한다면 조주를 비방하는 것이고, 조주에서 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자기를 매몰시키는 것이니 그대들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라고 했는데, 어느 누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을 때 조주에서 왔다고 해도 허물이고, 조주에서 온 것이 아니라고 해도 허물이라는 뜻이니 그럼 어떻게 말하라는 소리입니까?
제일 좋은 해답은 '조주'란 말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조주에서 왔다고도 하지 말고, 조주에서 오지 않았다고도 말하지 말라. 네 고향 소식만 전해라'. 조주란 말이 나오지 않는 게 좋다는 이 뜻을 바로 알아채시기 바랍니다.
그때 한 스님이 “눈에 닿기만 해도 큰스님을 비방하는 것이 되는데 어떻게 해야 비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곧바로 “비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벌써 비방해 버린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조주와는 눈에 닿았다고만 해도 비방이 되고, 비방하지 않는다고 언급해도 이미 비방한 것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직 분별하지 마십시오. 불법을 아무리 말하더라도 이 분별을 떠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큰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분별하지만 말라!
90. '바른 수행의 길'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수행(修行)의 길입니까?”
“수행의 뜻을 바로 알면 되겠지만 수행을 잘못 이해한다면 자칫 인과(因果)에 떨어질 것이다.”
'바른 수행의 길'은 어떤 것인가?
교(敎)의 말씀에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살이 육바라밀을 닦는 것은 위로는 보리(깨달음)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가르쳐 구원하기 위함이란 뜻입니다. 바로 우리가 마음공부하는 목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주선사가 대답한 위 말은 '수행의 뜻을 바로 알아라'는 의미인데,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이렇게 도(道)를 닦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 즉 발심(發心)과 믿음(信)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확실히 믿어 의심치 않고 열심히 수행하면 육도에 윤회하는 인과(因果)의 세계에 빠지지 않고 열반적멸(涅槃寂滅)의, 해탈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열심히 수행한다' 하는 생각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무엇이라도 '있다(有)'는 생각을 지니고 있으면 도(道)를 이룰 수 없습니다. 수행을 하되 수행한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고, 열반해탈을 구하되 구한다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일체의 분별을 떠나야 합니다. 오직 분별하지만 말라!
91. '추우면 춥고, 더우면 덥다'
조주선사가 시중(示衆)하여 말했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는 법을 일러 주겠다. 만약 누군가 어디서 왔는가 묻거든 다만 ‘조주에서 왔다’ 라고만 해라. 갑자기 '조주스님은 무슨 법문을 하시던가?' 라고 묻거든 그저 '추우면 춥다 하고, 더우면 덥다고 하더라'고 말해라.
그래도 다시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 다만 '무얼 묻는 것이냐?' 라고 해라. 그래도 다시 '조주스님은 무슨 법문을 하시던가?' 라고 묻는다면 그에게 '큰스님께서 오셨을 때 그대에게 전하신 말씀이 없었다. 그대가 만약 조주선사의 일을 알고자 한다면 직접 가서 묻도록 하라'고 말해 주어라.“
조주선사는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고선, 누가 어디서 왔는가 물으면 단지 '조주에서 왔다'고만 해라고 했습니다. 위 문답에선 '조주에서 왔다'고 하면 조주를 비방하는 것이 된다고 말해 놓고선 이제는 또 '조주에서 왔다고 해라'고 달리 이야기하니 자신의 말에 일관성이 결여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위에서 뭐라고 했죠? 조주를 언급하지 말고 '네 고향 소식만 전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뜻을 안다면 당연히 조주를 벗어나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 보일 테지만, 아직도 모른다면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조주에서 왔다'고 대답할 도리 밖에 없다는 소리입니다. 제 말의 흐름을 잘 추적해 보아야 합니다. 지쳐서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면 그때는 다른 방도를 써야 하겠지만.
그리고선, 조주가 무슨 법을 설하는지 물으면, '추우면 춥다 하고, 더우면 덥다고 한다' 참 쉬운 말이죠. 겨울에 추우면 춥다, 여름에 더우면 덥다. 봄이 되니 산은 푸르고, 가을이 되니 바람은 서늘하다. 아주 쉬운 말인데 매우 어려운 뜻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평상심이 도(道)' 임을 말로 나타낸 것인데, 그 뜻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물론 다른 데 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분별하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추우면 춥다 하고, 더우면 덥다고 한다'는 그 말을 잘못 알아듣고, 다른 설법 이야기 좀 해 달라고 하면, 전혀 다른 것은 없다고 해라. 그래도 뭔가 고상하고 뛰어난 설법이 있지 않느냐고 물으면 선사께서 그대에게는 전해 줄 말이 없고, 정녕 조주의 본분사(本分事)를 알고 싶으면 직접 와서 찾아뵈라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자기 본래면목 하나 알려고 하는 노릇인데 참으로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저로서도 여기서는 달리 더 할 말이 없네요.
'원앙새 금침을 수놓아 남에게 보여줄 지언정 애써 찾은 금바늘만은 드러내지 말라!' 헐!
[출처] 조주록 강해 18(87~91)|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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