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원효대사

수선님 2019. 11. 3. 12:56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원효대사

 

 

若依法界始遊行者(약의법계시유행자)

만약(法界)에 의지하여 처음으로 두루 겪으면서 수행하려는 자라면

 

 

於四威儀無一唐遊(어사위의무일당유)

(行住坐臥)사위의에 있어서 어느 것에도 헛되이 유행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니,

 

 

念諸佛不思議德(염제불부사의덕)

모든 부처님들의 불가사의한 덕을 마음에 새기고

 

 

常思實相朽銷業障(사실상후소업장)

언제나 실상(實相)을 생각하여 업장(業障)을 삭이며

 

 

普爲六道無邊衆生(보위육도무변중생)

널리 육도(六道)에 가없는 중생을 두루 위하여

 

 

歸命十方無量諸佛(귀명시방무량제불)

시방 세계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로 귀의하여야 한다.

 

 

諸佛不異而亦非一(제불불이역비일)

모든 부처님은 서로 다르지 않지만 또한 하나도 아니고,

 

 

一卽一切一切卽一(일즉일체일체즉일)

하나이므로 곧 전체이며, 전체는 곧 하나이다.

 

 

雖無所住而無不住(수무소주이무부주)

비록 머무는 바가 없으시나 머물지 않음이 없으시고

 

 

雖無所爲而無不爲(수무소위이무불위)

비록 하시는 바가 없으시나, 하지 않으시는 바도 없으시다.

 

 

一一相好一一毛孔(일일상호일일모공)

낱낱의 상호(相好), 낱낱의 털구멍이

 

 

遍無邊界盡未來際(변무변계진미래제)

가없는 세계에 두루하여 미래제가 다 하도록

 

 

無障無礙無有差別(무장무애무유차별)

막힘도 없으시고 걸림도 없으시며 차별도 없이

 

 

敎化衆生無有休息(교화중생무유휴식)

중생을 교화하심에 쉬지 않으신다.

 

 

所以者何(소이자하) 어찌하여 그러한가.

 

 

十方三世一塵一念(시방삼세일진일념)

시방 세계가 한 티끌이고, 삼세가 한 생각일 뿐이며

 

 

生死涅槃無二無別(생사열반무이무별)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大悲般若不取不捨(대비반야불취불사)

대비와 반야를 취하시지도 않고 버리시지도 않으시니

 

 

以得不共法相應故(이득불공법상응고)

[이는] ‘함께 하지 않는 법’(不共法)을 얻으셨으므로 서로 응하게 되기

때문이다

 

 

今於此處蓮花藏界(금어차처연화장계)

지금 이곳 연화장세계에서는

 

 

盧舍那佛坐蓮花臺(노사나불좌연화대)

노사나부처님이 연화대에 앉아 계시며

 

 

放無邊光集無量衆生(방무량광 집무량중생)

가없는 빛을 발하시어, 한량없는 중생을 모으사

 

 

轉無所轉大乘法輪(전무소전대승법륜)

설할 바 없는 대승의 법륜을 설하시니

 

 

菩薩大衆遍滿虛空(보살대중변만허공)

보살의 큰 무리가 두루 허공에 가득 차고

 

 

受無所受大乘法樂(수무소수대승법락)

누릴 바 없는 대승 진리의 즐거움(法樂)을 받아 누린다.

 

 

而今我等同在於此(이금아등동재어차)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함께 여기에서

 

 

一實三寶無過之處(일실삼보무과지처)

한결같은 진실(一實)과 삼보의 허물이 없는 곳에 있으면서도

 

 

不見不聞如聾如盲(불견불문여농여맹)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 귀머거리 같고 장님과 다름없으니

 

 

無有佛性何爲如是(무유불성하위여시)

불성이 없음인가 어찌하여 이러한가.

 

 

無明顚倒妄作外塵(무명전도망작외진)

무명으로 전도되어 망령되이 바깥의 대상을 만들어내고

 

 

執我我所造種種業(집아아소조종종업)

나와 내것에 집착하여 갖가지 업을 짓고

 

 

自以覆弊不得見聞(자이부폐부득견문)

스스로 (무명에) 덮히고 가리워져서, 보고 들을 수 없으니

 

 

猶如餓鬼臨河見火(유여아귀임하견화)

마치 아귀(餓鬼)가 강에 다다르나 강물이 불로 보이는 것과 같구나.

 

 

故今佛前深生慙愧(금불전심생참괴)

그러므로 이제 부처님 앞에서 깊이 부끄러움을 일으키고

 

 

發菩提心誠心懺悔(발보리심성심참회)

보리심을 내서 정성어린 마음으로 참회합니다

 

 

我及衆生無始以來(아급중생무시이래)

저와 중생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無明所醉作罪無量(무명소취작죄무량)

무명에 취한 바 되어 지은 죄 한량없고

 

 

五逆十惡無所不造(오역십악무소부조)

오역죄(五逆罪)와 열 가지 나쁜 죄 중에 아니 지은 것이 없으며

 

 

自作敎他見作隨喜(자작교타견작수희)

스스로도 짓고 남에게도 가르쳐서 (남이) 짓는 것을 보고 따라 기뻐하

였습니다.

 

 

如是衆罪不可稱數(여시중죄불가칭수)

이와 같은 갖가지 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이며

 

 

諸佛賢聖之所證知(제불현성지소증지)

여러 부처님과 성현(聖賢)들이 다 아시고 계시니

 

 

已作之罪深生慙愧(이작지죄심생참괴)

이미 지은 죄에 대해서는 깊이 부끄러운 마음을 내고

 

 

所未作者更不敢作(소미작자갱불감작)

아직 짓지 않은 죄는 감히 다시 짓지 않겠습니다ꡕ

 

 

□此諸罪實無所有(□차제죄실무소유)

[그러나] 이 모든 죄(罪)라는 것이 실제로는 ‘있는 바’가 없으며

 

 

衆緣和合假名爲業(중연화합가명위업)

뭇 인연이 화합하는 것을 거짓으로 ‘업’(業)이라 이름하였을 뿐이니

 

 

卽緣無業離緣亦無(즉연무업이연역무)

연(緣)자체에 업이 없고, 연(緣)을 떠나서도 또한 업이 없으며

 

 

非內非外不在中間(비내비외부재중간)

연(緣)의 안에도 없고, 바깥에도 없으며, 중간에도 (업은) 있지 아니하

다.

 

 

過去已滅 未來未生 現在無住(과거이멸 미래미생 현재무주)

(시간적으로) 과거는 이미 없어졌고, 미래는 아직 생기지 않았으며,

현재는 머무름이 없다.

 

 

故所作以其 無住故亦無生(고소작이기 무주고역무생)

그러므로 짓는 바 (업)도 그러하여, 머무름이 없는 까닭에 또한 ‘생겨남’도 없다.

 

 

先有非生先無誰生(선유비생선무수생)

먼저부터 있었다면 ‘생겨남’이라 할 수 없고, 먼저는 없었다면 무엇이 생겼는가.

 

 

若言本無及與今有(약언본무급여금유)

만약 ‘본래 없음’(本無)과 더불어 ‘지금 있다(今有)’는 것으로

 

 

二義和合名爲生者(이의화합명위생자)

그 두 뜻이 화합한 것을 일컬어 ‘생겨남’이라 말한다면,

 

 

當本無時卽無今有(당본무시즉무금유)

응당 ‘본래 없는’ 그 때에는 곧 ‘지금 있음’이 없고,

 

 

當今有時非有本無(당금유시 비유본무)

응당 ‘지금 있다’는 때에는 ‘본래 없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先後不及有無不合(선후불급 유무불합)

‘먼저’와 ‘나중’은 서로 미치지 못하고, ‘있음’(有)와 ‘없음’(無)는 서로

화합하지 못하니

 

 

二義無合 何處有生(이의무합 하처유생)

이 두 가지 뜻이 화합됨이 없으니, 어느 자리에 "생겨남"이 있겠는가.

 

 

合義旣壞散亦不成(합의기괴 산역불성)

화합의 뜻은 이미 깨어져 있기에, 그것의 흩어짐 또한 성립되지 않아서

 

 

不合不散非有非無(불합불산 비유비무)

화합도 아니고 흩어짐(散)도 아니니,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다.

 

 

無時無有對何爲無(무시무유대하위유)

'없는' 때에는 '있음'이 없으니, 무엇에 상대하여 ‘없음’이 되며

 

 

有時無無待誰爲有(유시무무대수위유)

'있는' 때에는 '없음'이 없으니 무엇을 기다려서 ‘있음’이 되는가.

 

 

先後有無皆不得成(선후유무 개부득성)

먼저․나중․있음․없음이 모두 이루어지지 않는다.

 

 

當知業性本來無生(당지업성 본래무생)

마땅히 업의 성품을 알아라 본래 ‘생겨남’이 없느니라.

 

 

從本以來 不得有生(종본이래 부득유생)

본래부터 ‘생겨남’을 얻을 수 없는데

 

 

當於何處得有無生(당어하처득유무생)

과연 어느 자리에 '생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이 얻어지겠는가.

 

 

有生無生俱不可得(유생무생구불가득)

생겨나고 말고 하는 것이 모두 얻을 수 없으며

 

 

言不可得亦不可得(언불가득역불가득)

얻을 수 없다는 말까지도 얻을 수 없다.

 

 

業性如是諸佛亦爾(업성여시제불역이)

업의 성품이 이러하듯 모든 부처님 또한 그러하다.

 

 

如經說言(여경설언) 경에 말씀한 바와 같이,

 

 

譬如衆生造作諸業(비여중생조작제업)

비유컨데 중생은 갖가지 업을 짓고 있는데,

 

 

若善若惡非內非外(약선약악 비내비외)

선하건 악하건 간에, 그것이 (중생의)

안에 있는 것도 아니오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如是業性非有非無(여시업성비유비무)

이와 마찬가지로 업의 성품은 ‘있음’(有)도 아니요 ‘없음’(無)도 아니다.

 

 

亦復如是(역부여시) 또한 마찬가지로

 

 

本無今有非無因生(본무금유 비무인생)

본래 없던 것이 이제 있는 것은 원인 없이 생긴 것이 아니다.

 

 

無作無受(무작무수) ‘지음’도 없고 ‘받음’도 없으나

 

 

時節和合故得果報(시절화합 고득과보)

지음도 없고 받음도 없으나 시절이 화합하여 과보(果報)를 이룬다.

 

 

行者若能數數思惟如是實相(행자약능삭삭사유여시실상)

수행하는 이가 능히 이와 같은 실상을 자주자주 생각하여

 

 

而懺悔者(이참회자) 참회하는 사람에게는

 

 

四重五逆無所能爲(사중오역무소능위)

네 가지 중죄(重罪)와 오역죄를 지었다해도 아무 일이 없게 되나니

 

 

猶如虛空不爲火燒(유여허공불위화소)

마치 불이 허공을 태우지 못하는 것과 같다

 

 

如其放逸無慙無愧(기방일무참무괴)

그러나 방일하고 부끄러워 할 줄 모르며

 

 

不能思惟業實相者(불능사유업실상자)

업의 실상이라는 것을 사유(思惟)하지 못하는 사람은

 

 

雖無罪性將入泥梨(수무죄성장입니리)

비록 죄는 본래 자기 성품(自性)이 없는 것이나, 장차 지옥(泥梨)에 떨어지리니

 

 

猶如幻虎還呑幻師(유여환호환탄환사)

마치 요술로 만든 환상의 호랑이가 도리어 요술쟁이(幻師)를 삼켜버림과 같다

 

 

(불성론의 비유)

 

 

是故當於十方佛前(시고당어시방불전)

그러므로 마땅히 시방 세계의 부처님들 앞에서

 

 

深生深시慙愧而作懺悔(심생참괴이작참회)

깊이 부끄러운 마음을 내어, 뉘우쳐 참회를 해야 한다.

 

 

作是悔時莫以爲作(작시회시막이위작)

뉘우칠 때에는 (억지로) 지어서 할 것이 아니라

 

 

卽應思惟懺悔實相(즉응사유참회실상)

응당 바로 참회의 실상을 사유해야 한다.

 

 

所悔之罪旣無所有(소회지죄기무소유)

그 뉘우칠 바 죄라는 것이 이미 (있는 바가) 없는데

 

 

云何得有能懺悔者(운하득유능참회자)

어찌 참회하는 자(者:주체)가 있다고 하겠는가.

 

 

能悔所悔皆不可得(능회소회개불가득)

참회하는 주체와 참회할 대상이 모두 있지 않으니

 

 

當於何處得有悔法(당어하처득유회법)

과연 어느 자리에 뉘우칠 법이 있는가.

 

 

於諸業障作是悔已(어제업장작시회이)

모든 업의 장애에 대해 이와 같이 뉘우치고 나서는

 

 

亦應懺悔六情放逸(역응참회육정방일)

또한 응당 여섯 가지 감각의 방일함에 대하여서도 참회해야 한다.

 

 

我及衆生無始已來(아급중생무시이래) ꡔ

나와 모든 중생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不解諸法本來無生(불해제법본래무생)

모든 법이 본래 ‘생겨남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妄想顚倒計我我所(망상전도계아아소)

망령된 생각에 전도(顚倒)되어 나와 내것을 헤아려서,

 

 

內立六情依而生識(내립육정의이생식)

안으로는 여섯 가지 감각(六情)을 세워 놓고 거기에 의지하여 분별식

(識)을 일으키고

 

 

外作六塵執爲實有(외작육진집위실유)

밖으로는 육진(六塵) 경계의 대상을 지어서 실재 ‘그 자체가 있다’고 여겨 집착하니

 

 

不知皆是自心所作(부지개시자심소작)

그 모두가 자기 마음으로 지어낸 것임을 알지 못한다

 

 

如幻如夢永無所有(여환여몽영무소유)

환상 같고 꿈 같아서 결국에는 있는 바가 없는데,

 

 

於中橫計男女等相(어중횡계남녀등상)

그런 가운데 멋대로 남녀 등의 모양을 헤아려서

 

 

起諸煩惱自以纏縛(기제번뇌자이전박)

온갖 번뇌를 일으켜서는 스스로 옭아매어 놓고

 

 

長沒苦海不求出要(장몰고해불구출요)

오래도록 괴로움의 바다에 빠진 채 벗어날 요체를 구하지도 않으니

 

 

靜慮之時甚可怪哉(정려지시심가괴재)

선정(靜慮)에 들었을 때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라ꡕ

 

 

猶如眠時睡蓋覆心(유여면시수개부심)

비유컨데 잘 때에 잠이 마음을 덮어서,

 

 

妄見己身大水所漂(망견기신대수소표)

망녕되이 제 몸이 큰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화엄경 보살 제8지에서 용맹심을 내어 강을 건넌다. 그래서 꿈을 깨지만)

 

 

不知但是夢心所作(부지단시몽심소작)

그게 단지 꿈꾸는 마음이 빚어내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謂實流溺生大怖懅(실유익생대포거)

실제로 물에 빠진 줄로 알고 큰 두려움이 생긴다

 

 

未覺之時更作異夢(미각지시갱작이몽)

꿈이 미처 깨지 못한 채로 또 다른 꿈을 꾸기도 하거니와, (섭대승론의 비유)

 

 

謂我所見是夢非實(위아소견시몽비실)

‘내게 보이는 것 이게 꿈이지 현실이 아니다’ 하고 이를 수 있으나

 

 

心性聰故夢內之夢(심성총고몽내지몽)

심성이 밝은 이는 꿈 속에서 꿈인 줄 알기 때문에

 

 

卽於其溺不生其懅(즉어기익불생기거)

그렇게 물에 빠졌다 해도 그리 두려워하지는 않으나,

 

 

而未能知身臥床上(이미능지신와상상)

아직 제 몸이 침상에 누워 있음을 알지 못하니

 

 

動頭搖手勤求永覺(동두요수근구영각)

머리를 흔들고 손을 내저으면서 완전히 깨어나려고 애를 쓴다

 

 

永覺之時追緣前夢(영각지시추연전몽)

꿈이 완전히 깨었을 때에 그 꿈을 더듬어 돌이켜 보면

 

 

水與流身皆無所有(수여유신개무소유)

물과 더불어 물에 떠다니던 몸도 다 실재가 아니며

 

 

唯見本來靜臥於床(유견본래정와어상)

단지 본래 침상에 고요히 누워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될 뿐이다.

 

 

長夢亦爾(장몽역이)

 

(인생의) 긴 꿈도 또한 그러하니

 

 

無明覆心妄作六道(무명부심망작육도)

무명으로 덮은 마음이 망령되이 여섯 가지 윤회의 길을 지어내고

 

 

流轉八苦(유전팔고) 윤회의 여덟 가지 고(苦)에 흘러 다닌다.

 

 

內因諸佛不思議薰(내인제불부사의훈)

안으로는 여러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훈습에 말미암고

 

 

外依諸佛大悲願力(외의제불대비원력)

밖으로는 여러 부처님의 큰 자비의 원력에 의지하여

 

 

髣髴信解(방불신해)

겨우 믿음과 이해에 가까워지리라.

 

 

我及衆生(아급중생)

나와 중생은

 

 

唯寢長夢妄計爲實(유침장몽망개위실)

다만 (인생의) 긴 꿈을 꾸면서 허망하게 실재라 헤아리고

 

 

違順六塵男女二相(위순육진남녀이상)

육진 경계와 남녀의 두 가지 모습에 마음에 거슬리거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並是我夢永無實事(병시아몽 영무실사)

모두 다 내 꿈이고, 길이 실다운 일이 아니거늘

 

 

何所憂喜何所貪瞋(하소우희하소탐진)

무엇을 걱정하고 기뻐하며, 무엇을 탐내고 성내리오

 

 

數數思惟如是夢觀(삭삭사유여시몽관)

자꾸자꾸 사유하여, 이와 같이 꿈으로 보면

 

 

漸漸修得如夢三昧(점점수득여몽삼매)

점점 닦아 여몽(如夢)三昧를 얻으리니

 

 

由此三昧得無生忍(유차삼매득무생인)

이 삼매로 인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닫고

 

 

從於長夢豁然而覺(종어장몽환연이각)

그리하여 긴 꿈으로부터 활연이 깨어나면

 

 

卽知本來永無流轉(즉지본래영무유전)

곧, 본래부터 윤회하여 흘러다니는 것이 영원히 없으며

 

 

但是一心臥一如床(단시일심와일여상)

다만 '한 마음'(一心)이 '한결같이

진여'(一如)의 침상에 누워 있을 뿐임을 바로 알게 되리라.

 

 

若離能如是數數思惟(약리능여시삭삭사유)

만약 이와 같이 거듭거듭 사유하여 (꿈을) 능히 여읠 수 있고,

 

 

雖緣六塵不以爲實(수연육진불이위실)

비록 육진(六塵)을 반연할지라도 (그것을) 실다운 것으로 삼지 않을 것이며

 

 

煩惱羞愧不能自逸(번뇌치괴불능자일)

번뇌를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방일하지 않을 것이니

 

 

是名大乘六情懺悔(시명대승육정참회)

이를 이름하여 대승육정참회라 하니라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4000412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