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주. 여래장과 불성의 실현
▒ 11강. 여래의 씨알 ▒
모든 생명이 여래의 씨알
대승불교의 사상적 기초는 공사상에 있다.
일체의 모든 것이 공하다는 공사상은
일체의 집착과 사견을 다 부수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 용수의 경우처럼 부정적인 표현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는 공과 같은 부정적 표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가르침도 있다.
그것은 일체의 모든 생명이 다 여여한 부처의 씨알이고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佛性]을 갖추고 있다는
여래장(如來藏), 불성설(佛性說)이다.
여래장은 ‘여래의 씨알’이란 의미이다.
우리는 모두 부처의 씨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씨알을 잘 심어 가꾸고 북돋우면 여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부처가 될 성품을 타고 날 때부터 본래 갖추고 있기 때문에,
부처를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본래 갖추고 있는 우리의 성품을 실현하는 것이 곧 부처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초기 공사상의 뒤를 이어 대승불교 중기에 일어났다.
대승의 공사상은 본래 비었으면서도 가득 찬 진공묘유의 자리를 표현한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공사상에 대한 오해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즉,
공사상은 진공만 강조하고 묘유의 면을 소홀히 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사상은 부정만을 일삼는 것처럼 되었다.
이렇게 되자 공사상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
적극적인 사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 요청에 부응해서 나타난 것이 바로 여래장, 불성사상이다.
따라서 여래장과 불성사상은 공사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공에 대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나타난 사상이 바로
여래장과 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불성사상은 대승 중기인 A.D. 300-650년 사이에 일어났으며,
불성사상을 담고 있는 경전은 매우 많고 또한 복잡하다.
대표적인 경전으로서 『여래장경』, 『승만경』, 『열반경』 등이 있다.
『여래장경』은 여래장에 대해서 설하고 있는 경전이다.
여래장(Tathagata-garbha은 본래 ‘타타가타(Tathagata)’와
‘가르바(Garbha)’가 합쳐서 이루어진 말이다.
타다가타는 ‘여래’란 뜻이고 가르바는 ‘자궁, 태(胎)’란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여래장은 일체의 중생이 모두 ‘여래를 품고 있는 자궁’, 즉
‘여래의 씨알’이란 뜻이다.
『열반경』은 ‘일체의 중생이 다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불성설을 강조하는 경전이다.
이것은 인간의 가능성과 능력에 대한 최고의 선언이며,
불교의 인간관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구절이다.
이 불성은 ‘마음이 부처다’, ‘중생이 부처다’ 는 말의 근거가 된다.
이것은 신행면에 있어서 대혁명을 의미한다.
마음이 부처요 중생이 부처라는 것을 신행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안으로는 마음을 실현시키고 밖으로는 부처님,
즉 중생을 잘 모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법화경』에는 상불경(常不輕) 보살이 나온다.
‘상불경 보살’이란 이름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얼마나 거룩하십니까?
당신은 꼭 부처를 이루실 분이십니다.’하고 예경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놀린 것으로 생각하여
때리기도 하고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예경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몸으로 실천한 예라 할 수 있다.
불성, 여래의 씨알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존엄성을 담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생명을 천시하는 풍조가 만연된 오늘날
모든 생명을 부처의 씨알로 보는 사상은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청정한 마음이 여래의 씨알
여래장과 불성사상은 대승 중기 이후에 발달되었지만,
그 사상들은 갑자기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은 근본불교에 있다.
따라서 불성사상의 원류 역시 근본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불교는 심법(心法)이다.
『법구경』에는 “마음은 모든 법의 근원이 된다.”고 했다. 즉,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마음을 청정이 해서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사람이 부처이며,
마음에 번뇌, 망상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중생이다.
따라서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마음에 있다.
이처럼 불교의 실천은 마음을 떠나서 말할 수 없다.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에서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다”라고 했다.
악을 짓지 않고 선한 일을 하며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은
마음이 청정할 때 가능하다.
마음이 욕심으로 들어차 있으면 선한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행의 기본도 마음을 청정이 하는 데 있다.
선정은 번뇌, 망상으로 들끓는 마음을 내려놓는 수행이다.
마음이 청정해진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이다.
그래서 근본불교에서는 일체의 번뇌망상,
‘나다’ 하는 생각에서 벗어난 마음을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고 하였다.
『증지부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
그러나 이 청정한 마음은 본래적인 것이 아닌 번뇌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이처럼 번뇌는 본래적인 것이 아니다.
본래적인 것은 바로 청정한 마음이다.
이것이 바로 자성청정심이며, 이 마음이 성불의 근거가 된다.
아무리 번뇌가 치성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적인 것이 아니다.
수행도 번뇌망상으로 가득 찬 마음을
본래의 청정심으로 회복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깨침이다.
이러한 근본불교의 청정심은 부파불교에서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비교적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중부에서도 전승되지 않았다.
이 청정심은 대승불교에 와서 비로소 전면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특히 여래장과 불성사상에서 그 꽃을 피우게 된다.
자성청정심의 연원은 부처님의 생애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너 자신을 등불 삼고 너 자신에 의지하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에 의지하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등불은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스스로가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의지하라고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탄생게를 통해서도
우리는 부처님이 인간의 가능성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높다”는 탄생게는
나 혼자 잘났다는 외침이 아니다.
여기에서의 ‘나’는 개체아가 아니라
본래의 나, 참 나, 우주적인 나를 가리킨다.
그것이 곧 여래장으로서의 나, 불성으로서의 나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성, 여래장으로서의 나,
혹은 본래의 마음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자성청정심으로서의 마음은 번뇌망상이 아닌 본래의 바탕이다.
그러면 자성청정심은 어떤 바탕일까?
첫째는 ‘하나’인 바탕, ‘하나’인 생명이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나 홀로 높다’는 나는
김 아무개, 이 아무개 하는 개체적인 내가 아니다.
그것은 ‘나다’ 하는 소아적인 ‘나’가 깨진 하나인 바탕이다.
인간 본래의 보편적인 나, 우주와 ‘하나’인 나이다.
따라서 위의 인간선언은 ‘하나’인 바탕이며,
이것이 바로 자성청정심, 여래장, 불성이다.
둘째로 그 바탕은 한량없는 광명[無量光明]이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무명이 없는 청정한 바탕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모습을 환히 비출 수 있다.
셋째로 그 바탕은 영원한 생명[無量壽]이다.
나고 죽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생사의 문제는 비로소 해결된다.
넷째로 그 바탕은 한량없는 기쁨[樂無量]이다.
생사의 매듭이 풀리고 ‘나’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기쁨으로 충만한 바탕이요 대안심(大安心)의 자리인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그런 바탕을 앞앞이 갖추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살아간다.
그래서 이런 ‘하나’인 마음을 외면한 채
오직 밖에서만 부처를 찾으려고 한다.
우리가 갖추고 있는 본래의 청정심, 불성, 여래장,
‘하나’인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참 귀의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참 불자이다.
무명의 구름 속에서도 달을 항상 밝다
우리들 성품 자체는 부처와 추호도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앞앞이 부처될 수 있는 가능성,
즉 여래의 태(如來藏)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마음과 부처, 중생 이 셋은 똑같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바로 부처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감히 내가 부처라니’ 하는 생각이 먼저 생긴다.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부처가 부처인 줄 모른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 중생들의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또 실제로 우리들이 하루종일 하는 짓을 보면 부처는커녕
욕심내고 성내며, 남을 헐뜯는 보잘것없는 중생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화엄경』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불교에 의하면 본래 우리들의 마음은 저 보름달처럼 둥글고
산하대지를 환히 비출 수 있는 밝음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보름달이라고 해도 날이 흐리거나 구름이 꽉 끼면
산하대지를 비추는 작용을 나타낼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마음의 달도 구름이 꽉 껴서 가리게 되면
본래의 밝음이 제 기능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 마음의 구름이 무엇일까?
번뇌요 망상이다.
‘나다’ 하는 생각이며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이다.
삼독의 먹장구름이 꽉 덮여 있어서 캄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네가 바로 부처’라고 일러줘도 남의 얘기처럼 들리고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구름이 아무리 심하게 끼였어도
달의 밝음 그 자체는 아무런 손상도 없고 항상 여여(如如)하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달에도 삼독의 먹장구름이 아무리 덮였어도
본래의 광명, 밝음에는 추호의 손상도 없다.
따라서 구름이 걷히면 달의 밝음이 나타나듯이 번뇌와 망상,
삼독의 어두운 기운이 제거되면 본래의 지혜광명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법화경』을 보면 이런 비유가 있다.
한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늘 술을 좋아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거지신세가 되었다.
이 사람에게는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부자였고 매우 성실했다.
하루는 이 가난한 사람이 잘사는 친구를 찾아갔다.
착한 부자 친구는 비록 찾아온 친구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옛 친구가 왔다고 해서 술상도 차리고 식사 대접도 잘 했다.
그랬더니 그 가난한 친구는 술기운이 돌아서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그때 마침 부자 친구는 바쁜 일이 생겨 출타하면서
그 친구의 옷깃에 값비싼 보석을 하나 달아주었다.
그리고 고생하지 말고 돈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바꿔 쓰라고 일러주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서로 소식도 끊긴 채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자인 친구는 그 옛 친구가 길거리에서
여전히 구걸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옛날에 우리 집에 왔을 때 편안히 살라고
내가 보석을 옷깃에 달아주었는데 어찌된 거야?”
그 친구는 그때 술김에 ‘알았다’고 대답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옷깃을 들춰보니 보석이 그대로 달려 있었다.
이 비유에서 술주정뱅이로 떠도는 친구는 바로
무명(無明)의 술에 취해 방랑하면서 사는 우리 중생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부자 친구는 바로 부처님이다.
또한 평생 넉넉히 살 수 있는 보석은 다름 아닌 불성,
여래의 씨알인 ‘하나’인 마음이다.
그 보석은 비록 흙 속에 던져져 있어도 변하지 않는 빛을 지니고 있다.
무명 속에 쌓여 있어도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항상 밝음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본래의 광명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번뇌, 망상에 쌓여 있는 삼독의 마음을 제거하고
본래 청정한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삼학(三學)과 팔정도, 육바라밀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닦아 가는 주체는 누구일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대신해 줄 수 없다.
번뇌, 망상을 내려놓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몫인 것이다.
불교는 밖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나’로 돌아오도록 하는 가르침이다.
이 점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특성이다.
불교를 인간회복의 길, 자기형성의 길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우리의 본래 성품 속에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런 마음자리,
본래의 성품을 등지고 산다는 데 있다.
그래서 『법화경』에는 이런 비유가 있다.
한 장자에게 독자인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어릴 때 무단히 집을 나가버렸다.
그래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거지가 되었다.
그는 고향도 새까맣게 잊고 떠도는 방랑자가 되었지만,
아버지인 장자는 평생 그 아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한 거지가 밥을 얻어먹으려고 그 부잣집에 찾아왔는데,
장자가 가만히 보니 그 거지는 다름 아닌 집을 나갔던 자기 아들이었다.
장자는 반가워서 하인을 시켜 자기에게 데리고 오도록 했다.
그러나 그 아들은 그만 자기를 잡아 가두려고 하는 줄 알고 도망을 쳤다.
그래서 장자인 아버지는 꾀를 내었다.
하인에게 거지 차림을 하도록 한 뒤 거지인 아들의 뒤를 따라가서
자연스럽게 그와 어울려 놀도록 했다. 그
리고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는 사이가 되자
장자의 부탁을 받은 하인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우리가 이렇게 매일 얻어먹으면서 떠돌아다니지 말고
저 마을에 가면 부잣집이 있는데,
그 집은 조금만 일을 해도 후한 임금을 준다고 한다.
그 집에 가면 고생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으니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
거지 아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괜찮은 것 같아서 함께 가기로 했다.
그래서 장자의 집에까지 오게 되었다.
장자는 돌아온 아들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고 쓰레기 치우는 일 등
하찮은 일부터 시작하여 차례차례 집안 살림을 맡기며 훈련을 시켰다.
그 다음에는 창고의 열쇠를 맡기고 회계업무도 맡기는 등 재산 관리까지 시켰다.
그가 모든 일에 친숙해 졌을 때, 장자는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하인이 바로 집을 나갔던 자기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전 재산을 물려주었다.
이 비유에서 무단으로 집을 나가 타향살이를 하면서
거지 신세가 된 아들이 바로 마음의 고향을 등지고 사는 우리 중생들이다.
또한 부러울 것 없이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고향은 바로 마음의 보배요,
여래의 씨알이고 불성이다. 이처럼 불교는 타향살이를 정리하고
본래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종교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고향에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상징이다.
기독교의 『누가복음』에도 이와 비슷한 탕자의 이야기가 나와 있다.
한 마을에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형은 착실하고 동생은 문제아였다.
어느 날 동생은 자기 몫의 유산을 받아 챙기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집을 나간 동생은 가진 돈을 모두 탕진하고는
여기저기 떠돌면서 문전걸식하는 신세가 되었다.
한 해는 혹심한 가뭄이 들어서 목숨을 연명하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되자 동생은 집 생각이 절로 났다.
답답하면 고향 생각, 집 생각이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 집에서는 흉년에도 잘 먹고 잘 살았는데...’
그래서 동생은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너무나 반가워서 달려나가 껴안으며 맞아들였다.
또한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다고 소를 잡고 잔치를 벌였다.
『누가복음』의 이야기도 『법화경』에서
집 떠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비유와 비슷하다.
종교는 이처럼 타향살이를 청산하고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을 받아들이는 자세나 방법에 있어서는 두 아버지가 아주 다르다.
『누가복음』에서의 아버지는 감성적이다.
그래서 달려가서 포옹하고 또한 잔치를 벌였다.
형이 화가 나서 항의할 정도였다.
그러나 『법화경』에서의 아버지는 상당히 이지적이다.
반가운 감정이야 다를 바가 없겠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아들에게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교육시키고
나중에 재산을 관리할 능력이 생겼을 때 아들임을 밝히고 재산을 물려주었다.
똑같은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지만 표현하는 방법에는 이렇게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는 동·서양의 차이, 또는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라고도 생각된다.
두 이야기를 통해서 불교와 기독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여래의 씨알,
부처의 성품이 본래 다 갖추어져 있다는 사상이 지향하는 것은 본래의 마음,
본래의 나를 향해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회복의 길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삼귀의(三歸依)도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육조혜능은 마음의 깨달은 바탕[覺]이 불(佛)이며,
마음의 바른 바탕[正]이 법(法)이며 마음의 청정한 바탕[淨]이 승(僧)이라고 했다.
삼귀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일심삼보(一心三寶)라는 것이다. 즉,
우리들 앞앞이 갖추고 있는 마음의 세 가지 면이
바로 불·법·승 삼보(三寶)라는 것이다.
원효도 ‘돌아가는 바 하나인 마음이 바로 삼보인 것이다.’라고 했다.
부처, 법, 승가가 먼 곳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본래의 마음,
즉 여래장, 불성, 하나인 마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삼귀의는 본래의 마음, 참 나를 구현하겠다는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서원의 의미를 살려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본래의 마음, 본래의 여여한 바탕에 돌아가 그대로 살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집을 나간 궁한 아들이 타향살이를 하면서
가진 고생을 다하는 모습과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마음의 고향을 향해 돌아가는 것이 종교적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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