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불법의 계승자들
1. 석존의 10대 제자
바라나시에서 5인의 출가수행자의 전향과 가섭(카샤파) 3형제의 출가 귀의 및 재가신도의 출현에 의해서 시작된 불교 교단이 그 후 점차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는 기초가 구축된 것은 당시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진리를 찾아 수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불법(佛法)을 듣고 부처님께 귀의하고 출가하여 부처님과 더불어 출가자의 올바른 생활을 몸소 실천하고 전도에 힘썼는데, 멀리 서인도 등지까지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출가시킴으로써 교단의 기초가 확고부동하게 된 것이다.
석존의 제자는 통상 1,250인으로 일컬어진다. 수많은 제자가 있겠지만 경전에 이름이 나오는 제자는 비구 886인, 비구니 103인, 우바새 128인, 우바이 43인이다. 그 가운데 뛰어난 제자 10명을 10대 제자로 구분하는데, 부처님의 뜻을 이어받은 그 분들의 특징을 살펴 오늘날 우리의 신행생활에 도움을 받도록 한다.
(1) 사리불(사리푸드라) 존자
사리불(舍利佛)이라고 하는데, 반야심경에서의 사리자(舍利子)이며, 석존의 상수제자다. 1,200명의 대아라한 가운데 특히 뛰어난 열분 제자 중에서도 분별력과 이해력이 가장 뛰어나 불교의 진리를 간접으로 한마디만 듣고도 크게 깨달을 수 있었던 사리자는 지혜가 가장 뛰어난 지혜 제일의 존자다. 그래서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그의 후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남방 불교의 전승에 의하면, 사리자는 마가다국의 라자그라하에서 가까운 나라카 마을의 바라문 집안 태생이라 한다. 육사외도(六師外道) 중 어린 시절부터 둘도 없는 친구였던 목련과 함께 산자야를 섬기었으나 영리하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나 스승의 학설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리자가 어느 날 불제자로부터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일부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친구 목력과 그들의 제자 250명을 거느리고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부처님은 개종하여 제자가 된 이들을 모든 제자의 상좌에 두었다. 이는 하루라도 일찍 교단에 들어온 자를 상좌에 두는 전통에 어긋난 것이어서, 그로 인해 고참 비구들로부터 불평이 많이 있었지만 부처님은 불평하는 이들을 잘 달래었다고 한다.
사리부존자는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부처님 입멸 사흘 (혹은 석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목련과 부처님을 도와 불교의 신흥교단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2) 목련(목갈라나) 존자
제자 가운데서 신통이 가장 뛰어나 신통제일로 불린다. 부처님의 제자가 된 후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한 끝에 한 달 남짓해서 모든 번뇌를 끊고 바른 도리를 깨쳐 아라한의 자리에 올랐다. 만년에 존자가 불법을 전도하던 도중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던 자이나 교도로부터 돌에 맞아 부처님 입멸 사흘 전에 순교하여 첫 순교자가 되었다. 그때 존자를 존경하던 아자타사투 국왕이 범인들을 죽이려고 하자 부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자비를 베풀라고 하여 풀어주었다.
목련 존자는 동명(同名)의 불제자가 많아서 마하* 목갈라나(대목련)라고 불리었다. 그가 신통제일로 불리는 까닭은 분명치는 않으나, 부처님과 같은 천안천이(天眼天耳)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죽은 모친이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을 천안(天眼)으로 보고 지옥에서 모친을 구했다는 소위 목련구모(木蓮求母)의 전설이 있는데, 이것은 중국 등지에서 거행되는 우란분 (지옥에 떨어진 이의 혹심한 괴로움을 구원하기 위한 법회)이나 시아귀회(施餓鬼會 굶주림에 고통받는 망령들을 위안하기 위하여 베풀어주는 법회)에서의 인연설화의 기원이다. 그래서 신족의 상징인 지장보살이 그의 후신이라고 한다.
또한 목련은 부처님과 함께 쉬라바스티 교외의 녹자모 강당에 있을 때 많은 비구들이 단정치 못한 자세로 잡담을 즐기는 광경을 보고 신통력을 써서 발가락으로 강당을 흔들었기 때문에 비구들이 놀라 도망친 일이 있다고 한다. 또 모여든 비구 중에 부정한 자가 있음을 알고 그의 팔을 잡아 축출해냈다고도 한다. 그는 아난, 사리자 등과 함께 교단 내부의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교단의 통제를 위해서도 큰 힘이 된 존자이다.
* 마하는 크다는 대(大)의 뜻이다.
(3) 가섭(카샤파) 존자
대가섭이라고도 하는데, 그는 평소의 수행생활이 매우 엄격해서 두타(頭陀) 제일 또는 행법(行法) 제일이라고 한다. 두타라는 말은 옷, 음식, 집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고행하는 금욕고행을 말한다. 가섭존자는 아주 어려운 고행을 잘했으며, 소욕지족(少欲知足)의 검소한 생활을 실천한불교교단의 초조(初祖=宗祖)이다.
또한 영산회상에서 꽃 한송이를 들어 보이시던 부처님의 뜻을 알아차려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수받은 상수제자로서 삼처전심(三處傳心)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삼처전심이란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세 장소에서 마음을 전했다는 뜻으로 첫째, 영축산에서 설법하실 때 한송이 꽃을 들어보이시니 오직 가섭만이 빙그레 웃어, 바른 법, 열반의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선언하신 것이며, 둘째로 다자탑에서 설법하실 때 늦게 도착한 가섭에게 손수 당신의 자리 반을 내어 앉히신 것이며, 셋째는 부처님 열반후 먼곳에 나간 가섭이 뒤늦게 달려와 부처님 관을 세 번 돌고 세 번 절하자 관에서 부처님이 당신의 두발을 내어보이신 것 등 세가지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세가지 징표로 가섭에게 선(禪)의 등불을 전하셨다는 일화가 있다.
가섭존자는 항상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과 함께 했다. 그는 마가다국 태생으로 바라문계의 여자와 결혼했으나 가정생활을 싫어하여 출가하자 뒤이어 부인도 출가하였다. 라자그라하 성밖의 나무 아래에서 부처님과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언제나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누르고 간소한 생활 규율 (두타행)을 지켰으며, 부처님이 존자가 이미 늙었으니 부드러운 옷을 입고 신자의 초대를 받으면서 나의 곁에 있으라고 권해도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또 언젠가 그는 지난 날 함께 수행하던 동료가 환속하여 도적질을 하다가 체포당해 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을 때 달려가 훈계하며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했다고 한다. 그와 같이 가섭 존자는 형리의 무기를 두려워하지 않아 왕까지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대인들은 자비의 상징인 관음보살이 가섭존자의 후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부처님 임종 후 유해를 넣은 관이 마하 가섭이 도착할 때까지 아무리해도 불이 붙지 않아서 다비를 행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석존의 상수제자인 사리자와 목련이 부처님보다 먼저 돌아가시고 없자, 부처님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에는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를 이어 받고 교단을 통솔해나갔다. 가섭은 고행을 많이 한 사람이기에 아주 깡말랐다. 대신에 매섭고 무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에 승단의 기강을 바로 잡으며 승단을 이끌 수 있었다.
이 점을 보면 승단의 지도자는 두타를 잘하는 사람에게 자격이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 직후, 교단의 동요와 분열을 염려한 그는 아난과 같이 비구들을 라자그라하의 칠엽굴에 모이게 하고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정리하기 위한 이른바 제 1차 결집을 거행하여 부처님 말씀을 책으로 엮어낸 공적이 있다.
(4) 아난 존자
10대 제자중에서 부처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하여 다문(多聞) 제일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전수받은 후세 승려들의 교조(敎祖)가 되시는 분이다.
천성적으로 다정다감하여 출가 후 줄곧 부처님의 시중을 들었다. 10대 제자 중에 부처님을 가장 오랜 기간 곁에서 모시고 있어서 법문을 가장 많이 듣고 또 한번 들은 것은 결코 잊지 않는 총기가 있어 후일 경전을 편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난의 부친과 부처님의 부친이 형제관계에 있었으므로 부처님과 아난은 같은 연배의 종형제 사이였는데 (후에 부처님에게 반역을 한 데바닷타도 같은 관계다), 아난은 부처님의 나이 55세때 부처님께 바치는 것과 동일한 보시를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시종으로 추천되었다고 한다. 25년간 아난은 그림자처럼 석존을 모시면서 신변의 모든 일을 뒷바라지 해드리고, 부처님이 병석에 누우면 계(戒)를 범하면서도 특별한 식사를 준비했다고 한다.
또 가르침을 구하러 오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편의를 제공하고, 고민을 상담코자 하면 상담해주고, 부처님을 대신해서 설법도 했다고 전한다.
아난은 사리자, 목련, 마하 가섭, 아누룻다 등과 친교가 깊었으며 특히 사리자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경전에서 그는 사리자를 칭찬하는 말이 나오는데, 사리자의 죽음을 그의 동생과 함께 부처님께 보고하고, 이때 아난이 낙심하는 모습은 “고양이의 습격을 간신히 피해서 허탈감에 빠진 수탉과 같이” 매우 딱했다고 전한다.
또한 그는 여성 출가에 진력하여 부처님에게 세 번이나 여성출가를 간청하여 마침내 부처님이 허락했다고 한다. 그는 재가나 출가를 불문하고 여성교화에 많은 힘을 쏟은 존자였다.
아난이 아누룻다와 함께 부처님의 최후를 지켜보면서, 이어서 그때까지 개별적으로 전해지던 부처님의 가리침을 정리하고 경전으로 편집하기 위하여 마하 가섭과 함께 제 1회 결집을 열었다. 이 회의에서 아난은 부처님의 측근으로서 가장 많은 설법을 들었기 때문에 경(經)의 편집일을 주관했다.
그는 매우 오래 살았다고 전한다. 아난은 자신의 사후에 그 유해를 둘러싸고 마가다국의 아자타샤트루왕과 바이샬리의 릿차비족이 분쟁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갠지스강의 한가운데서 스스로 불을 당겨 그 몸을 불태우고 유골을 2등분하여 나누어주도록 했다. 행원의 상징인 보현보살이 그의 후신이라고 한다.
(5) 우바리 존자
불교 교단의 규율에 정통했으며, 또 계(戒)를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엄격했던 우바리 존자는 지계(持戒) 제일로 불린다. 부처님 입멸 직후 제 1회 결집에서 계율을 암송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카필라국의 이발사로 천민 출신이었으나 부처님이 고향에 돌아와 설법하심에 곧 출가하였다. 원만한 인격과 높은 덕으로 존경받는 상수장로로 대접을 받았다. 부처님은 우바리가 왕족의 청년들이 출가하려는 것을 보고 자신도 출가할 것을 결심하고 부처님께 나아가니, 부처님은 청년들에 앞서 우바리부터 먼저 출가시켰다고 한다. 이는 하루 한시라도 먼저 출가한 사람이 상석의 위치를 차지하도록 하는 원칙을 세운 불교 교단에서 천민을 왕족보다 상위에 올려놓으려 한 것은 교단 내부의 평등주의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6) 푸루나 존자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대중 연설이 가장 뛰어나 설법 제일이다. 존자는 태어나면서 질투가 심해서 그 마음을 고치기 위해 부모와 처자까지 버리고 홀로 입산하여 20년간 수행했다. 그 동안 당시 유포되고 있던 모든 책을 공부하여 스스로 지혜를 얻었다고 자부했으나 라자그라하에서 부처님을 만나 느낀 바가 있어 제자가 되었다.
존자는 대중 연설이 뛰어나서 항상 대중을 모아 놓고 설법하였고, 포교하는 현장의 풍습과 그곳 사람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부터 해결해가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데 전심전력을 다하였다고 한다.
생년월일이 부처님과 같으며 불법을 믿지 않던 쉬로나국에 들어가 포교하여 오백여명을 교화하고 오백개의 사원을 세웠으나 박해를 받아 순교하였다. 무량겁 후 부처가 될 것이며 법명(法名) 여래라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7) 아누룻다 존자
제자 가운데 천안(天眼)이 제일이라고 한다. 평소 잠이 많아 부처님 법문을 졸면서 듣다가 부처님의 심한 꾸중을 듣고 분발하여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다가 눈이 멀었다. 그러자 그는 천안을 얻어서 보지 않고도 마음으로 모든 일을 알 수 있게 된다.
아누룻다는 출가 후 부처님을 도와 교단 통솔에 전력했다. 비구들이 분쟁을 일으키는 일이 많았던 지역의 동쪽 대나무숲에서 두 동료와 사이좋게 지내는 화합의 모범을 보여 마침 이곳을 지나는 부처님을 기쁘게 한 일도 있었다 한다.
부처님을 따른 일이 많았으며, 특히 부처님 입멸시에 “스승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헤어질 때가 있다고 설법하셨다. 슬퍼하지 말라. 통곡하지 말라”고 하면서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한편, 아난에게 일러 부처님의 죽음을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했다고 한다.
이처럼 아누룻다는 부처님이 입멸시에도 자신의 슬픔을 표현치 않고, 마음의 중심을 흩트리지 아니하면서 동료들을 추스렸으며, 교법이 분산되어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개최된 불전결집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8) 가전연 존자
제자 가운데서 가장 논리적으로 법문을 했다고 하는 가전연은 논의 제일로 토론의 명수이다. 가전연은 석존을 보고 장차 깨달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아시타 선인의 외조카이다. 존자는 당시 사회구조의 불평등한 모순을 국왕 앞에 거침없이 말하고, 푸루나 존자가 대중연설에 능한데 비해서 가전연은 개별적인 설득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본래 불교는 만고불변의 진리인데 거기에 유창한 말솜씨와 열성으로 불교를 널리 펴니 한번만 그의 강연을 들으면 누구나 불법에 귀의했다고 한다. 10명의 제자 중에서 비교적 늦게 출가한 사람으로 서인도 출신답게 그 쪽 지방의 포교에 공이 크다.
(9) 라훌라 존자
부처님 제자 가운데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수행에 전념했다고 하여 밀행(密行) 제일 또는 인욕(忍辱) 제일이라고 한다. 밀행제일이란 은밀히 고행을 많이 하면서 살았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친아들로서, 라훌라가 12세때 부처님이 그의 수제자 사리자를 보내어 이모와 함께 아들을 출가시켰다고 한다. 이때 정반왕은 아들에 이어 손자의 출가를 보면서 살이 베이고 골수까지 들어내는 듯한 슬픔과 괴로움을 호소했다고 한다.
출가 후 부처님의 아들이라는 자만에 빠져 수행을 게을리하자 부처님께서 아들을 위하여 법문을 하였고 이에 뉘우치고 수행에 전념했다고 한다. 사실 부처님 아들이라서 조금만 잘못해도 주위 눈총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계(戒)를 잘 지키고 항상 독송을 부지런히 했으며, 온갖 욕된 일을 잘 참으며 겸허한 자세를 잘 지켰다고 한다. 승단 역사상 최초의 기록된 사미이다.
(10) 수보리(수부티) 존자
수보리는 부처님을 위해서 기원정사를 기증한 수닷타 장자의 조카로서 은둔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제 1인자라고 불렸던 듯한데, 후에 해공(解空) 제일로 인정된다. 제자 가운데 대승이론의 공(空) 사상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통달한 제자다. 완벽한 공삼매에 들어 우주의 모든 법이 공(空)함을 깨친 공해탈의 경지에 들었으며, 유명한 금강경의 주인공이다.
십대제자가 언제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 선택되었는지는 분명치않다. 부처님의 초전법륜 상대였던 교진여 등 5비구가 포함되어있지 않은 대신 대승사상의 이해자인 수보리가 선택되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대승불교시대의 소산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2. 달마대사
우리가 흔히 달마도라고 하는 그림 속의 주인공인 달마대사는 그의 제자 신관과 함께 중국의 선종(禪宗)을 창시한 스님이시다. 달마대사는 자기 이익만을 위해 기도하거나 복을 비는 것은 욕심에 불과한 것이니 부처님 제자는 다른 이들을 먼저 생각해주고,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아 항상 고요하고 평안히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치신 분이다.
달마대사는 인도 남천축국의 향지왕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부귀영화를 보장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을 믿어 출가하였다. 그는 높은 수행으로 큰 깨달음을 얻어 여러 가지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루는 양무제가 스님을 초청하여 법문을 듣는 중에 왕을 심히 모욕했다는 죄로 남몰래 자객을 시켜 대사를 죽였다. 그러나 달마대사는 죽지 않고 부활하여 징표로 자신의 관속에 짚신 한짝만을 남겨둔 채 관 밖으로 나오신 분이시다.
그의 험상한 얼굴에 관한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출가 후 여러 신통력을 지닌 대사는 어느 마을을 지나던 중 이무기가 썩어 냄새가 진동하기에 자신의 육신에서 영혼만 잠시 나와 이무기의 몸으로 들어가 이무기를 큰 바다로 끌고 가서 빠뜨리고 영혼만 다시 이무기의 몸에서 나와 벗어 놓았던 자기 육신을 찾아 아까 장소로 와보니 자신의 육신을 찾을 수 없고 대신 근처에 험상궂게 생긴 시체가 하나 있어 급한대로 대사의 영혼은 시체속으로 들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자기 육신을 훔쳐간 놈을 찾아 혼내주리라고 마음먹고, 일단 걸식을 하러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로 내려가니 대사의 모습이 너무 험상궂게 생겨 사람들이 모두 슬슬 피하자 대사는 한 노인을 붙들고 자신이 누구냐고 알아보니 곤륜산 신선이라고 한다. 그래서 순식간에 곤륜산에 도착한 대사는 그 신선을 찾아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그랬더니 신선이 놀라 용서를 빌며 자신의 못생긴 모습 때문에 사람들에게 접근조차 못해 자신의 가르침을 줄 수가 없어 안타까워 하던 차에, 마침 잘생긴 시체가 버려져 있어 바꾸었지 다른 욕심은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자 달마대사는 자신의 육체를 미련없이 신선에게 주고 자기는 흉악한 모습으로 중국 서촉의 승산 소림사로 가서 그곳에서 제자 신관을 만나 대사의 선법을 전수해주었고, 그로부터 중국에 선종(禪宗)이 싹텄다. 그후 달마대사가 어떻게 생애를 마쳤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달마대사는 면벽(面壁) 9년만에 소림에 머물며 크게 깨치고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달마대사는 중국 당나라에 선법(禪法)과 선불교를 몸소 행하며 동방에 유포한 공적이 크다.
3. 우리나라 대선사
(1) 원효대사 (元曉大師)
우리 민중의 불교 포교에 기여한 바가 그 어느 스님보다 크신 우리나라 최고의 대선사 원효대사는 신라 진평왕 39년 (617년경)에 출생하셨다. 원효의 속성(俗姓)은 설(薛)씨이며, 이름은 서당(誓幢)이며, 신라 압량군 (지금의 경산) 불지촌 사람이다. 신라 진평왕때 34세의 나이로 의상과 당나라 유학을 가다가 대오각성하고 되돌아와 대장경을 탐독하며 많은 전적을 남겼다.
총명하여 화랑으로 학문과 무예를 익혔지만 곧 황룡사로 출가하여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당나라 유학을 거치지 않고 국내에서 자주적으로 수행하여 교화를 폈다. 장성한 원효스님이 훗날 우리에게 의상대사로 알려져 있는 의상스님과 당나라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날 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여행도중 만주벌판즈음에서 한밤중에 노천에 있는 움막같은 곳에서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다.
밤중에 원효스님이 몹시 갈증이 나서 물을 찾아 더듬거리다가 바가지에 담긴 물을 찾아 마시고 시원하게 갈증을 풀었는데,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자신들이 잔 곳은 오래된 무덤이었고, 스님이 마신 물은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
상황을 알게 된 스님은 구역질을 하며 마신 물을 토하다가 문득 스님은 「법화경」의 ‘심생즉종종법생’ (心生卽種種法生) 심멸즉종종법멸 (心滅卽種種法滅)‘이라는 구절을 떠올리면서 크게 깨닫게 되었다. 내용인즉, 마음이 나니 가지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니 가지가지 법이 멸한다는 뜻이다. 어제는 그토록 시원했던 물이 오늘 아침에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물인 것이다. 물은 어제 물과 오늘 물과 다를 바가 없는데 자기 마음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촉누불 (髑髏不二).
그래서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난 것 (三界唯心)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즉시로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입당구법을 그만두고 의상스님과 헤어져 신라로 되돌아와 귀족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불법을 전파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화엄경」을 주석했다.
만년에 불교포교를 위해 표주박으로 무애박을 만들어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백성들을 교화했다. 그래서 남녀노소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할 수 있게 되었다는데, 이 노래는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 즉,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한길로 생사를 벗어나리라‘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무애가의 내용은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찾는 염불 가락이라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그 제목과 유래만 전해질뿐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스님은 낮에는 여러 곳을 누비며 중생들을 만나며 다녔지만 밤에는 어김없이 경전의 주석서를 만들고 기도와 참선수행을 했다고 한다. 원효대사의 사상은 한마디로 화쟁(和諍)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과 싸우면 안되며 대립 마찰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저 화쟁과 평화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空)의 도리를 잘 알고 있어야 했는데, 생전에 많은 저서를 집필한 대사는 한때 분황사에 머물며 공(空)사상을 설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짓기도 했으며 (제 40권 회향품에 이르러 끝맺고 절필), 또한 「금강삼매경소」를 저술했다. 그것을 각승(角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소를 타고 두 뿔 사이에 벼루를 걸어놓고 지었다고 하는데서 유래한다.
대사와 요석공주사이에서 얻은 아들 설총은 그가 입적(入寂)하자 대사의 모습을 소상(塑像)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봉안했는데, 설총이 선친의 곁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홀연 고개를 돌려 아들을 돌아보았기 때문에 지금도 대사의 소상이 고개를 돌아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대사의 유적지가 전국에 퍼져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사찰은 남해 보리암, 양산 미타암, 내원사 등이 있다. 고려 숙종은 원효에게 화정국사(和靜國師)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2) 의상대사 (義湘大師)
1,300여년전 신라 경주 출신인 의상대사의 속성(俗姓)은 김(金)이며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다. 그는 초년시절에 이미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아 29세에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하여 의상이라는 법명을 받고 수행하던 중에 화엄학으로 유명한 중국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지엄스님(삼장법사)를 찾아가 수학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뜻한대로 중국에서 20년을 수학한 뒤 돌아와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거기서 화엄학을 크게 일으키셨으며, 북악산 부석사, 가야산 해인사, 계룡산 갑사, 금정산 범어사등 10여개의 사찰에서 가르침을 전하고 또 법성게, 화엄경 약찬게, 백화도량 발원문 등을 지으셨으며,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고 전한다. 고려 숙종이 원교국사(圓敎國師)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부석사 무량수전 밑에 묻혀 있는 용바위는 의상대사를 흠모하여 곁에서 모시고자 했던 선묘 아가씨가 호법신룡이 되어 의상스님과 불법을 지켜주고 있다고 한다.
(3) 자장율사 (慈裝律師)
스님의 속성은 김이며, 신라 제일의 귀족인 진골출신이며 소판(蘇判 3급벼슬)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항상 계율을 지키며 선덕여왕이 큰 벼슬을 준다해도 사양하고 당나라에 가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왔다.
일찍이 자장율사는 ‘내 차라리 하루라도 계율을 지키다 죽을망정 계율을 어기고 백년살기 원하지 않노라’하신 말씀을 통해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분이다.
자장율사의 부친은 늦도록 아들이 없자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 앞에 나아가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서원기도하여 4월 초파일 스님을 낳았고 이름을 선종(善宗)이라 짓고 부모님의 서원대로 영광사를 짓고 출가했다.
신라 선덕여왕 3년(636년)에 구법(求法)의 길에 올라 당나라 종남사 운제사의 원향선사를 알현하고 원향이 말한대로 탑과 절을 건립하여 나라의 지세를 바로 세우고자 청량산 문수보살의 소상에 정성껏 예배하여 법을 깨치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부처님의 금란가사 1벌과 사리 100과 그리고 부처님의 머리뼈, 손과 발가락뼈, 나뭇잎에 쓴 대장경 등을 문수보살로부터 받아 문수보살이 일러준대로 귀국한 뒤에 영축산 아래 독룡(毒龍)이 사는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에는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띤다. 이곳을 통도사라고 이름하니 곧 삼보 중에 불보(佛寶) 종찰이 탄생한 것이다.
(4) 보조국사 (普照國師)
스님의 법명은 지눌이요 법호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俗姓)은 정(鄭)이다. 고려 의정 12년(1158년),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나신 스님은 8세에 입산득도, 25세에 대오각성하고 11년간 대중을 통솔하며 설법하였다. 현재 보조법어의 내용이 그 설법의 골자다.
스님은 어릴적에 몸이 허약해서 여러번 죽을 고비가 있었는데, 한번은 앓다가 다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당시 교육기관인 국학(國學)의 학정(學正 정9품)이신 부친과 모친은 부처님 전에 아이의 목숨을 살려주면 장차 부처님 일을 하는 사람으로 키우겠노라고 서원기도를 올렸다. 총명했던 대사가 16세 되던 해 부모님은 서원했던 대로 아이를 출가시켰고 종휘스님의 상좌가 되어 지눌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25세 되던 1182년에 나라에서 실시한 승과(僧科)에 합격했다.
1185년에는 경북 예천 하가산(下柯산山) 보문사에 우거(寓居)하며 대장경을 열독했고, 1198년경에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올라가 선(禪)에 몰두하던 어느 날 지눌스님은 「육조단경」의 “참된 마음에서 온갖 생각이 일어나지만 그 마음 자체는 물드는 것이 아니다”라는 글귀를 읽으시고 마음이 크게 열려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곧이어 길상사로 옮겨 11년동안 주석하니 전국의 스님과 속인들이 몰려들어 총림을 이루었다고 한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아 불교가 크게 융성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고려중기 이후 승가의 계율이 세속화되어감에 따라 보조국사는 자신이 주축이 되어 정혜결사라는 일종의 불교정화운동을 일으키셨다. 정혜결사란 바른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일을 스님의 주된 임무로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귀족들에게 아첨하지 말 것, 스님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불법을 전파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을 공부하는 교종이나 부처님의 마음을 깨달아 가는 선종이 서로 다르지 않고 같은 길임을 밝히는 것, 오직 부처님 법만이 따를 것이지 자신의 종단만이 최고라고 여겨 다른 종단을 배척 업신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등이 그 내용이다. 지눌스님이 작성한 「권수정혜결사무」은 정혜결사를 결성하는 취지와 방법을 담은 글로서,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라’는 명구가 들어있다.
지눌스님은 지금의 송광사에 터를 잡고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실 때까지 오직 참선과 저술에만 전념하시어, 「계초심학임문(戒初心學人文)(1205년)등을 지으셨다. 이 책은 지눌스님이 출가수행자들의 수행청규를 담고 있다.
특히 처음 부처님 법을 배우는 마음을 낸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일을 간추려서 제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불도에 뜻을 둔 수행자들은 악한 벗을 멀리하고 착한 벗을 가까이 하며, 5계와 10계에 의지해서 잘 익혀야만 나중에 큰 법을 성취할 수 있다는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한 불교 입문서이다. 「초발심자경문」은 이 책과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 그리고 야운(野雲)스님의 「자경문」을 합본하여 만든 책이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앉은 채로 열반의 드셨는데, 7일이 지나 다비(茶毘)했는데 그때까지 얼굴빛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같았다고 하며, 다비후 사리 큰 것 30과를 비롯하여 작은 것은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이 나왔다. 이때 국왕이 불일 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는 칭호를 내렸다. 송광사 매산에 중국 원나라에서 스님에게 하사했다는 쇠로 만든 그릇인 능견난사(能見難思)가 있고, 흥국사와 만연사에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5) 서산대사 (西山大師)
서산대사는 임진란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셨고,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 승려가 되어 불교를 다시 일으키고 사명대사 등 많은 제자스님들을 길러낸 큰 업적을 남기신 분이시다. 일명 청허당(淸虛當)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불교에 대한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서산대사는 지금의 묘향산인 서산에 들어가 제자들과 수도에만 전념하면서 쇠퇴한 불교의 중흥을 모색하시며, 앞으로 임진란이라는 국가적 위기가 닥쳐올 것도 내다보고 계셨던 분이시다. 임진란때는 선조임금으로부터 조선팔도 16종 선교도총법이라는 직위를 하사받고 왜적이 맞서 싸울 승군을 조직하여 국가에 큰 공을 세우셨다.
부처님께서는 살생하지 말라고 하셨으나 백성이 왜군에 무수히 죽어가는 것을 스님은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임진란이 끝난 후에 임금은 대사에서 큰 벼슬을 내리셨으나 이를 수락하지 않고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수행을 하셨다. 우리나라는 서산대사의 구국에 힘입어 이후부터는 불교가 나라를 구한다고 믿었고, 여기서 호국불교라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한편 서산대사는 선교(禪敎) 일치사상을 강조한 「선가귀감」을 지었다. 이것은 선가에서 중요한 본보기로 삼아야 할 말씀들을 모아서 주해를 붙인 글인데, 이 책에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의 말씀이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전한다.
(6) 진묵대사 (震黙大師)
극심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인해 암흑기의 절정에 놓여 있던 조선 중기 불교계와 서민들에게 무한한 희망의 표징으로 살다간 스님 가운데 진묵대사가 있다. 진묵스님(1562-1633)은 조선 중엽 17세에 전주 봉사서에 출가하여 내전을 탐독한 후 기이한 행적을 많이 남기어 부처님의 화신이라고도 한다.
스님은 조선 개국이래 최대 국난인 임진란을 맞아 수행을 보류하고 싸움터에 나서서 기울어 가는 나라의 운명을 극적으로 구한 사명대사와는 대조적으로 깊은 산속에 우거(寓居)하며 고고한 한 마리 학처럼 머물다간 분이시다.
스님의 법명은 일옥(一玉)이고 법호는 진묵(震黙)으로, 만경(萬頃)의 불거촌(佛居村) 사람이다. 불거촌은 요즘 전북 김제군 만경면 대진리이다. 태어날 때 불거촌 초목이 3년동안 시들어서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 드문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수근거렸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파나 마늘같은 훈채와 비린 음식은 즐기지 않았으며, 천성적으로 슬기롭고 마음이 자혜로워서 주위에서는 불거촌에 부처님이 났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7세 되는 해, 전주 서방산 봉서사로 출가하여 내전(內典=불경)을 읽었는데 조금도 막힘이 없이 줄줄 해석했으며 한번 눈에 스치면 외우곤 하여 아무도 스승이 되어 가르쳐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가르쳐주지도 배우지도 않음에 따라 대중들은 자연히 동자의 국량(局量)을 헤아리지 못한 채 그저 작은사미(小沙彌)로만 알았다.
언젠가 그 절 주지가 이 동자승으로 하여금 신장단(神將壇)의 신중(神衆)들에게 향불을 올리는 소임을 맡긴 적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지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는데, 신중들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우리는 부처를 호위하는 신장인데 도리어 부처로 하여금 우리에게 예경(禮敬)케 하고 봉향하니, 그 분으로 하여금 다시는 향을 사루지 못하게 하여 우리를 아침 저녁으로 편케하라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산내(山內) 대중들은 비로소 동자승의 비범함을 알고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스님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전주시 일출암에 거할 때 모친을 인근 왜막촌(현재의 전북 완주군 용진면 아중리)에 모셔와 머물게 하였는데 어머니가 모기 때문에 고통을 겪자 이를 안쓰럽게 여겨 스님이 그 지역의 모기를 남김없이 다른 곳으로 쫓아버리셨다. 그래서 왜막촌 일대는 지금도 모기가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없다고 한다.
진묵대사에 관한 일화가 많이 전하는데, 그 중 한가지만 인용한다. 하루는 진묵대사가 물을 찾기에 시자가 미지근한 쌀뜨물을 올렸더니 스님이 그것을 동쪽으로 내뿜으셨다. 그것은 스님이 해인사에 불이 난 것을 아시고 불을 끄시느라 그리한 것으로 전한다. 며칠 후 해인사에서 기이한 소식이 전해졌는데, 해인사에 불이 붙어 모조리 탈 지경이었는데 때마침 서쪽으로부터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는 덕에 불이 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빗방울 색깔이 희뿌연하여 허연자국을 곳곳에 남겼다고 한다. 절에 불이 나던 날이 바로 스님이 동쪽으로 물을 뿜으시던 바로 그날이었다.
스님이 하루는 몸을 깨끗이 단장하신 뒤 시내를 따라 거니다가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가리키며 “저게 바로 석존의 그림자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시자가 “그것은 스님 그림자입니다”하니 진묵은 탄식하며 “너는 나의 겉모습만 알뿐 석가의 참모습은 모르는 도다” 하시고 지팡이를 메고 조실(祖室)로 들어가 가부좌로 앉은 다음, 제자들을 불러 자신이 곧 떠나니 궁금한 것이 있으면 기탄없이 물어보라고 하였다.
제자들은 스승의 법맥이 궁금하여 재차 물으니 대사께서는 못마땅해하시며, “비록 세간의 명리(名利)에 대한 집착에서 초탈하지 못한 스님이라 할지라도 휴정(休靜) 노장의 문하(門下)로 하려무나.” 이 말씀을 마치고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으로 유유히 열반에 드시니 세속나이 72세, 법랍 52하(夏)였다.
요컨대, 진묵스님은 조선중기에 달처럼 나타나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한소리 굉음을 남기고 떠나신 거인(巨人)이시다. 이름이 말해주듯 우레의 굉음(震)과 침묵(黙)을 함께 지니고 숱한 신화와 전설의 주인공으로 살면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신 분이기도 하다. 참혹한 전쟁을 전후한 암울한 시대의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살았던 만큼 당시 진묵스님의 행장(行狀)에 나타난 의미를 찾아 수행의 지표로 삼는 이들이 많다.
비록 선사의 말은 전해지는 것은 희귀하지만 그가 남긴 몇몇 게송에서 알 수 있듯이 대도(大道)를 달관한 인품과 지구가 좁아 춤추기가 곤란하다는 그의 외침은 지구촌의 거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스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진묵선사유적고」와 「불조원류(佛祖原流)」, 「영당중수기(影堂重修記)」등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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