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주. 여래장과 불성의 실현
▒ 12강. 불성의 실현 ▒
그렇다면 마음의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즉,
여래의 씨알, 부처의 성품을 실현시키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우리가 확인할 것은
‘우리들 앞앞이 여래의 씨알,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다.
이 말은 우리가 여래이고 부처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는 능력과 소질, 즉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음으로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가능성을 완성하고 실현시킨 분이
다름 아닌 여래요 부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첫째로 발심(發心)을 해야 한다.
나도 깨쳐서 일체의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살겠다는 발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본래의 씨알, 불성을 실현하겠다는 삶의 다짐이며,
그것이 곧 보리심을 내는 것[發菩提心]이다.
『열반경』에서는 보리심을 내는 것을
‘씨를 심는다[下種]’라고 했다.
여래의 씨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발아해서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씨를 심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발심이다.
깨침이라는 열매[果]를 얻는 것은 여래장,
불성이라는 씨앗[因]과 발보리심이라는 연[緣]이 합해질 때 가능하다.
그래서 불성은 정인(正因)이며 보리심은 연인(緣因)이라고 한 것이다.
「사자후보살품」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그러므로 나는 두 가지 원인을 설한다.
정인과 연인이 그것이다.
정인은 불성을 말함이요, 연인이란 발보리심이다.
이 두 가지 인연에 의해 무상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니,
그것은 마치 돌에서 금을 빼내는 것과 같다.”
이것은 불성이라는 정인(正因)과
발보리심이라는 연인(緣因)이 합해져서
깨침이라는 열매(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광석 속에 박혀 있는 금은 우리들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불성이다.
이 불성이라는 금을 빼내어 정련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실제 이 보리심을 내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가 보살인가,
보살이 아닌가의 기준이 된다.
보리심을 낸 후에는 바라밀행을 실천해야 한다.
씨만 파종하고 그냥 놔두면 열매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씨를 발아시키고 꽃과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김도 매주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열반경』 「성행품」에는 다섯 가지 실천[五行]을 제시하고 있다.
성행(聖行), 범행(梵行), 천행(天行), 영아행(?兒行), 병행(病行)이 그것이다.
첫째로 성행은 마치 연꽃처럼 보살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힘은 곧 계·정·혜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자기 마음을 지키는 일이다.
마음의 안정, 사물을 밝게 보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범행은 중생들의 괴로움을 없애고 기쁨을 주는 이타행이다.
여기에는 네 가지 무량한 보살의 마음인 사무량심(四無量心)이 있다.
기쁨을 주는 실천인 자(慈),
중생들의 아픔을 함께 하고 뽑아내는 비(悲),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함께 기뻐하는 희(喜),
항상 평등한 마음을 내는 사(捨)가 그것이다.
이것은 보살행에서 가장 중요한 마음이다.
「장수품」에서는 이것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가섭이 부처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함으로써 장수(長壽)의 몸을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연꽃과 같이 더러운 세상에 있으면서도 더러워지지 않고,
번뇌 가운데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수를 얻기 위해서는 마땅히 일체의 중생을 외아들처럼 생각하여
대비(大悲), 대자(大慈), 대희(大喜), 대사(大捨)를 일으켜야 하느니라.”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천행은 천연,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삶이다.
이것은 ‘나다’ 하는 자기 본위의 생각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
넷째로 영아행은 영아(?兒), 즉 어린애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영아행은 안으로는 어린애와 같은 순결한 마음을 지녀야 하며,
밖으로는 어린애와 같이 힘이 약한 사람들을 잘 받아들여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 불평을 하면,
잘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함께 풀어 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병행은 다른 사람의 고뇌와 병을
나의 고뇌와 병으로 아파하고 병을 없애는 일이다.
이것은 유마거사의 병과 같은 행위를 말한다.
유마거사는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나도 아프다.
만약 중생의 병이 낫는다면 내 병도 나으리라.’고 했다.
중생과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병이 바로 대비(大悲)의 병이다.
「성행품」에서는 이러한 다섯 가지 바라밀행을 여래행(如來行)이라고 했다.
이 다섯 가지 여래행을 통해 본래의 여래의 씨알,
불성은 잘 성숙되어 완전히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여래행이 실현된 세계가 바로 부처의 세계요 여래의 세계이다.
그러면 본래의 여래장, 불성이 완전히 실현된 삶은 어떤 모습일까?
그런 세계의 삶의 모습을 음미해 보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소질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열반경』에서는 그러한 깨침의 세계,
열반의 세계의 모습을 세 가지, 혹은 네 가지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이것을 열반 삼덕(三德), 혹은 열반 사덕(四德)이라고 한다.
먼저 삼덕을 살펴보면,
그것은 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
하나인 지혜인 반야(般若),
대자유인 해탈(解脫)이다.
법신은 우리의 몸이 진리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진리와 하나된 상태이다. 그리고 반야는 존재의 실상,
‘하나’인 실상이 환히 드러난 모습이다.
나와 모든 생명, 나와 우주가 하나인 모습 바로 그 자체이다.
해탈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우주와 하나되어 대자유의 삶을 누리는 모습이다.
삼덕은 진리의 세계, 하나인 세계, 대자유의 세계이다.
그리고 사덕은 깨친 세계, 불성이 실현된 세계,
‘하나’인 세계의 속성을 네 가지로 나타낸 모습이다.
그것은 항상한 모습[常]이며, 지극한 기쁨으로 충만한 모습이며[樂],
본래의 나, 우주적인 나의 모습이며[我],
더러움이 없는 청정한 세계의 모습[淨]이다.
여기에서 잘못 오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가 불교의 가르침인데,
여기에서는 깨침의 세계를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세계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상과 무아는 소아적 세계, 현상적 세계,
괴롭고 지저분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세계의 실상이다.
이러한 소아적인 것들이 극복된 세계가 바로 열반의 세계이다.
그리고 열반의 세계에서 상(常)의 모습은
현상세계가 항상하다는 생각이 소멸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세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들이 사는 세계가 항상하다는 것과
열반의 항상한 모습은 그 의미가 다르다.
현상세계가 무상한 줄 분명히 알면 불생불멸의 열반의 세계가 열린다.
열반의 락(樂)도 ‘나다’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즐거움이 아니라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즐거움이다.
열반의 아(我)도 현상세계에 집착한 아(我)가 아니라,
소아(小我)가 멸한 대아(大我), 우주적인 나를 의미한다.
그리고 정(淨)도 더럽고 깨끗하다는 분별의식이 초월된
불구부정(不垢不淨)의 세계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여래, 부처님은 이러한 멋있고 즐거운 세계에 안주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 분[不住涅槃]이 대승의 부처님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여래(如來)라는 말속에서도 드러난다.
여(如)는 ‘진리’를 의미하므로 여래란
‘진리의 세계로부터 오신 분’이란 뜻이다.
여래란 본래 타타가타(Tathagata)란 말로서
여거여래(如去如來), 즉 진리의 세계로 갔다가
다시 우리들의 세계로 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부처님은 진리 속에 들어가
진리와 하나되어 거기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세계로부터 다시 현실세계로 와서
모든 중생들의 아픔과 병을 치료하고
우리가 사는 더러운 세계를 청정이 하시는 분이다.
그러면 그런 여래, 부처님의 삶의 질적인 모습은 어떠할까?
그러한 모습을 가리켜 무연대비(無緣大悲)를 실천한다고 했다. 즉,
어머니가 아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아파하듯
일체의 모든 중생의 아픔과 괴로움을 뽑아낸다[拔苦]는 것이다.
그런데 무연(無緣)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조건 없이’, ‘청정한 마음으로’, ‘
내가 한다는 생각 없이’ 실천한다는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자비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중생연자비(衆生緣慈悲)로서
부모, 친척, 처자 등을 인연으로 해서 행하는 자비이다. 즉,
나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더 베푸는 차원의 자비이다.
둘째는 법연자비(法緣慈悲)로서 가르침에 따라 실천하는 자비이다.
이것은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자비이다.
그리고 셋째가 무연자비(無緣慈悲)이다.
이것은 이론이나, 친분 관계도 초월한 절대 평등한 자비이다.
공(空), 무념(無念)에서 나오는 청정한 자비이다.
이것은 어떤 상(相)이 없이 베푸는 자비이다. 즉,
나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바라거나
‘나다’ 하는 상이 없이 행하는 청정한 자비이다.
여래는 이런 청정한 사랑과 자비로 괴로움이란
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해 주시는 분이다.
그런 여래의 삶, 부처의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
이제 그것을 우리의 현실 속에서 실현해보자.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모든 생명과 자연을 ‘하나’인 생명으로 존엄시하고
환경과 다른 생명을 보존하고 살리는 일이다.
내가 보는 저 한 그루 나무, 공기, 바람이 모두
여래의 씨알, 부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환경이 파괴되는 현실 앞에서
이러한 불성사상은 더욱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생명운동’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고 모시는 실천이 중요하다.
일체의 중생이 모두 여래의 씨알,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알고 받들어 모셔야 한다는 한다.
그것이 바로 불공(佛供)이다.
불교는 단지 불상 앞에서 드리는 불공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받들어 모시는 불공을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모든 이들을
부처님으로 받들고 모실 때 불성은 실현된다.
그곳이 바로 깨끗한 땅, 정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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