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수행법(간화선)

화두 격외도리

수선님 2019. 12. 1. 12:54

<(내생각; 불교는 진리=자존(自尊)이니,자기 자신을 믿어라. 부처가 그러 했듯이.

도교는 진리=자연(自然)이니,자기 자신을 맏겨라.

유학은 진리=천도(天道)이니,자기 자신을 알아라.

(선대의 올바름을 보고 배우라...공자가 그러 했듯이)>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지혜=반야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관조반야(觀照般若)다.

일체의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정견(正見)하는 지혜를 말한다.
제법(諸法)의 실상, 즉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비춰 보는 지혜다.

둘째, 실상반야(實相般若)다.
제법의 실상 그 자체를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의 모습 그 자체이다.

셋째, 방편반야(方便般若)다. 문자반야(文字般若)라고도 한다.
실상반야와 관조반야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일체의 모든 경전을 말한다.
반야 그 자체는 아니지만,
반야를 이끌어 내는데 없어서는 안 될 방편(수단)이 되는 것이므로 방편반야라 한다.

이때 반야를 이끌어내는 대표적인 방편이 바로 언어(설법/법문)이고
그것을 글자로 옮겨 적은 것이 문자(경전)이다.

※ 무자경(無字經): 언어문자로 표현된 경전(經典) 이외의 경전.
이를테면 아름다운 꽃, 아침이슬, 바람소리, 떠있는 구름, 흐르는 물, 푸른 산,
깊은 계곡 등 삼라만상(森羅萬象)과 제법(諸法)이
다 부처님의 법문이요 설법이니 그것이 곧 글자 없는 경전인 셈이다.
무자경상방광명(無字經常放光明).
불입문자,격외도리......선 수행의 방법은 글로 되는게 아니라, 조사를 따라함에 있다.
즉, 진정한 깨우침은 글로서 전달되는게 아니라,
수행자의 행동으로 되는 것이다.

화두...깨달음을 위해 말 꼬리 시작하는 생각(각성을 위한 문답)의 언어...수행 정진하는 마음의 자세.

오도송...깨달음을 혼자 진행하는 문답 과정.

게송...깨달음의 정도를 타인인 큰 스님을 통해 확인해 보는 문답.

(일반인의 문답은 이성적으로 동의 할 만한 논리적 전개를 통한 물음과 대답으로 이루어져 합리적 동의에 이르지만, 수행자의 문답은 논리 전개를 통한 합리성 도출을 위한게 아니라 각성<깨달음>의 정도를 드러내 확인하는 방법이기에 선문답이라 한다. 선문답을 통하여 자아와 사물과의 관계 전체를 공이라는 인과 관계로 되어 있다는 자각 정도를 확인.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제사하는게 아니다.)

조사스님들의 게송은 논리나 상식으로 맞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오도송이나 임종게 선문답등을 격외도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분별심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오래동안의 각고수련, 선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알 수 있습니다


게송이란
중생들의 분별망상심을 없에고

인생의 근본문제를 풀기위한

수수께끼를 던지는데 게송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기존 사고 방식을 버려야만, 인생의 근본문제를 풀수가 있는 조건을 갖게 된다고 선종을 봄.

각 개인의 몸과 맘의 수행방법은 다를수 밖에 없다. 그러나, 목표는 같다.

이를 동시에 시행하여 푸는 방법을 찾게하는 공부=수행 하는 방법을 제시하는게 게송이고,

스스로 답을 얻는게 선 수행이다.)

게송의 예)
잔머리를 굴려서 맞힐려면 철우가 달을 물고 달릴때까지 기다려도 풀리지 않고,

돌사자가 울부짖어도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참선(參禪) 수행(6)
- 화두참구(話頭參究) 편집실ㅡ

화두란.....개념과 관념이 붙지 않은

진리의 당체(當體)를 찾아가는 관문으로써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으로 표현되는

선(禪)의 진수를 그대로 간직한 언어(言語) 아닌 언어이다.

(내생각 ; 관념과 개념을 구조주의로 바꿔 말하면, 관념=기표=현상, 개념=기의=진실 아닌가?)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수행자 면전(面前)에 바싹 들이대며

바로 볼 것을 촉구하는 과제(課題)를
화두 또는 공안(公案)이라 한다.

공안이란 본래 관청의 공문서란 의미를 갖는 말인데,
범치 못할 확실한 법칙이라는 뜻이 있다.
그 법칙을 바로 아는데서 살아있는 진리가 들어 나는 것이다.

(즉, 공안은 진리를 보는 방법)


화두는 그 본질이 부처님의 깨달음이므로

일반적인 범부의 생각이나 말로써는 통할 리가 없다.
그러나 거기에 분명히 자신의 진면목(眞面目)을 밝혀 낼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를 부처님 관문(佛祖關門)이라고도 한다.


화두(話頭)란 무엇인가
중국 선종을 확실하게 자리잡게 한 육대조사 혜능 대사가 하루는

대중에게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도 없고 앞도 없고 뒤도 없다.
밝기로는 태양보다 밝고 어둡기로는 칠흑보다 더하니 대중은 이것을 알겠는가?”하고

말한 이것이 “이 뭐꼬 - 시심마(是甚磨)”로 불리는 화두다.


조사공안은 무려 1천7백가지나 된다고 하니 일상생활에서 화두 아닌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공안들이 자신의 문제로 와 닿지 않을 때는 결코 화두로써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참구에는 사구(死句)와 활구(活句)가 있는 것이다.
즉, 물러설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자기 문제로 다가왔을 때 화두가 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다가 무언가에 콱 막힌 듯하고 더 뚫고 나가지 못할 때

스승이 제자에게 격외도리(格外道理)1)를 거량하여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주어

미망(迷妄)을 한 순간에 벗어버리게 하는 것이

바로 화두이다.
이러한 과정을 병아리가 부화될 때 어미가 껍질을 한번 쪼아주어

병아리가 쉽게 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 비유하여

<<‘졸탁치기’>>라고 한다.


화두참구의 세 가지 마음
화두참구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는 <<분발심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마음이 있어야 한다.
1)> 큰 믿음[大信心]이다
큰 믿음이란 일체중생이 제불보살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똑같으며

자신이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즉,형상에 차별이 있고 나타난 능력에 차이가 있고,

그가 쓰는 덕행에 차이가 있고 수명에 차이가 있더라도,

본성은 그러한 차이에 상관없이 지혜와 온갖 공덕이 똑같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이 이와 같으며 이것은 영겁으로 변치 않고

어떠한 동요에도 상관이 없는

불멸의 법으로써 어떠한 강한 압력에도 흔들리거나 빼앗기거나

때묻을 수 없는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본성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에서 <<참선자의 기본자세>>가 이루어진다.


자신이 진리의 주체일진대 그에게는 끝없는 지혜와 용기와 덕성이 원래로 충만하다.

어떠한 역경도 극복하고 뜻하는 바를 구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원래로 풍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일상생활이 그 본분에 어긋남이 없는 행이 될 수밖에 없다.

밝음과 긍정과 너그러움과 용기는 선자(善者)의 기본 표정이 되는 것이다.
어떠한 고난에도 좌절을 모르고 어떠한 상황에도

희망을 불태우는 불굴의 용진(勇進)이 거기서부터 나온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이 제불보살과 일체중생과 함께 함을 믿는 것이므로

언제나 중생을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한다.

원래로 자신과 더불어 세계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애를 걸고 다시 세세생생(世世生生)을 던져서라도 이룩하고자 하는

큰 서원과 정진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돌리고 불국토 실현에 두는 것이다.
수행자가 만약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큰 원(願)이 없게 되고 큰 원이 없으면 정진력이 약해진다.


2)> 큰 분심[大憤心]이다
부처님이 제시한 화두는 부처님이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의 면목을 눈앞에 들어내 보인 것이다.
과거의 조사들도 거기에서 자기 본분을 확인하여

대각자(大覺者)가 되었고

제불보살도 이 도리를 깨달아 불국토를 장엄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과거 조사들에 비해 무엇이 부족하기에 그 뜻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면서도 스스로 자만하고 어리석기가 끝이 없어 부끄러움도 모르고

범부생활에 안착하고 있으니 이 어찌 딱하고 슬픈 노릇이 아닌가.
제불보살의 영원한 생명이 내 자신에게 있어 조금도 덜하지 않고 변질되지 않으며,

생생하게 지금 내 생명에 뛰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나는 이것을 모르고 미혹하여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느끼는 것에 탐착(貪着)하고

좋고 나쁜 것에 휘둘려 살고 있다.

본래는 범부중생이 아니건만 스스로 중생을 환작(換作)하여

그것을 달게 여기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전생도 이와 같았고 그 전생도 이와 같았는데

지금의 생도 또 이와 같으니 어느 때에
자신의 본분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생사(生死)가 윤회하고 고뇌(苦惱)가 물결치는 슬픔에 빠져서

영겁(永劫)을 이대로 살아갈 것인가.

내 가슴의 광명은 어찌하여 덮어두고 사방에 구걸하여 쉴 날이 없단 말인가.

이것을 이대로 존속시킬 것인가.

이제 다행히 불법을 만났으니 미혹(迷惑)을 깨뜨려서

대해탈지로 뛰쳐나올

인연을 만들지 않았는가.

이 화두야말로 나의 어두웠던 과거생, 무지와 고뇌의 과거생,

무능과 비소의 과거 무수생을 종말 짓는

결정적 계기가 아닌가.
기나긴 번뇌(煩惱)의 늪에서 벗어나

해탈의 언덕에 이를 수 있는 계기가 아닌가.
기나긴 생사의 윤회를 끊고

제불보살 모든 조사들과 손을 함께 잡고

불국토를 이룰 계기가 아닌가.

참선인은 화두를 앞에 두고 이처럼 치밀어 오는 자책감과 더불어 대분심이 솟아나야 하는 것이다.
이 분심에서 억겁의 무명(無明)을 뚫고

온갖 분별의 함정에서 단번에 벗어나

대자유의 평원으로 뛰쳐나가게 되는 것이다.


<<<큰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이 분심이야 말로 수행자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3)> 큰 의심[大疑心]이다
큰 의심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을 의심하거나 참선법을 의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거듭 말한 바와 같이 화두는 법성(法性)의 제시이므로

망상망념과 무명에 갇혀 살고 있는 범부로서는 알 수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왜 그렇게 말씀하셨나, 왜 그렇게 하셨나,

왜? 왜? 라는 의심이 가슴을 저미고

답답한 것이 우주를 뒤덮으며,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없는 것이니

화두는 여기 이르러서 전심전력을 기울여 맞부딪칠 수밖에 없다.
이런 때의 마음 상태를 의정한다고 하며,

의정하는 것이 크면 클수록 큰 깨침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화두로서 명백하게 법 자체를 우리 눈앞에 보여준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내게 있는 나의 물건을 내 앞에 들이댄 것인데

나는 어찌하여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무엇이냐.
분명히 내게 있는 이 도리를

명백히 화두에서 밝혀 주었거늘 어찌하여 이것을 모른단 말인가.
온몸, 온 생각이 오직 화두덩어리가 되어서 화두로 눕고 화두로 잠들게 된다.

필경 이것이 무슨 도리이냐 하는 일념이 끊이지 않는다.
맑고 고요하고 또렷한 의정이 눈앞에 드러난다.

이렇게 의정을 지어 가는데서 화두는 순숙하게 되며

호시절이 오는 것이다.


요컨대 의정 없는 화두공부란 있을 수 없다.

마치 죽은 물과 같아서 산 고기가 튀어나올 수 없는 것이다.

생생하고 명료한 의정이 필경 본분을 밝혀낸다.


좋은 화두가 있는가?
좋고 나쁜 것은 사람에게 있을 뿐 화두에는 없다.
다만 수 억겁 동안 살아온 업이 사람마다 다르니

수행법 중에서도 자신에게 맞는 것이 있고 잘 안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은 화두를 천편일률적으로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주는

화두를 찾아 주는 것이다.

그러나 혹 스승에게 받은 화두라도 잘 잡히지 않을 때에는

자주 찾아가서 원인을 제거하는 방편을 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의정이 생기면 활구(活句)요, 그렇지 않으면 사구(死句)이다.

사구이니 활구이니 하는 것은 사람에게만 있을 뿐 화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디 자기 마음에서 솟구치는 의정(疑精)에 따라 활구를 참구해야 할 것이다.


화두참구하는 모양
화두란 격외도리(格外道理)로써 부처님의 지혜와 안목을 깨친 사람만이 알아듣는다.

그 밖의 범부들은 마치 절벽에 맞부딪친 것처럼 꽉 막힐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무슨 뜻인가?”하는

의정(疑情)의 벽에 맞서게 된다.
그러기에 옛 조사들은 말하기를

공안을 가져 공부를 지어가는 것이 은산철벽(銀山鐵壁) 같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는 접근하면 얼굴이 타버리는 커다란 불덩어리[大火聚]라고도 하고

또한 금강(金剛)으로 된 밤송이가 목구멍에 걸린 것과 같다했다.

어떤 사람이 귀중한 보배를 몸에 깊이 간수하여 애지중지하다가 홀연히 잃어버렸다.
그 사람은 모르고 있다가 손으로 보배 둔 곳을 만져보니

보배가 간 데 없으므로 애타게 보배를 찾는 것과 같이 의심(疑心)해야 한다.

또 어두운데서 이상한 물건을 주었는데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으므로

그 사람이 의심이 바싹 난 것과 같이

화두 참구하는 모양도 이와 같다.

그러나 공부가 잘되든지 못되든지 좋고 언짢은 마음을 두지 말고 다만 화두만 참구한다.
또 고요히 앉아 맑고 맑은 것을 취하여 공부를 삼지 말며,

또 운동하고 말하며, 움직이고 고요히 하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지 말며,

또 생각을 허공과 같이 하든지, 또 마음을 담벽과 같이 하여 공부를 하지 말지어니

이는 공망(空亡)에 떨어진 외도(外道)며, 혼(魂)이 흩어지지 않아도 죽은 사람이다.


오직, ‘왜’라는 의문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공부를 일심으로 해나가면 보고 듣는 경계가 자연히 고요하고

물건과 나를 함께 잊어 산하대지가 없어지고

허공이 녹아지나니 이러한 지경에 이르면

자연히 칠통(漆桶)2)을 타파할 것이다.

계속>
註 1)
격외도리(格外道理) : 언어(言語)나 문자(文字)로 의논(議論)할 수 있는 이치(理致)를
초월(超越)한 도리(道理)를 말한다.
註2)

칠통(漆桶) : 옷을 담는 통으로 뚜껑을 닫으면 그 안은 칠흑같이 어둡다 하여

선종에서는 사리(事理)에 밝지 못하거나 또는 종지(宗旨)를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을 꾸짖는 말로 사용한다.

 

 

 

 

 

 

 

 

 

 

 

아놀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4855028/8122691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