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스님(변산 실상사 주지)
1. 참선수행이란 무엇인가
참선수행의 의미
禪이란 무엇인가?
선은 존재의 근원을 통찰하고 나와 우주의 참모습(眞面目)을 자각하여 참된 주체를 확립하는 수행이다.
이러한 참선수행이 현대인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인간은 참된 주체적 삶을 스스로 살지 못하고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고 있다.
자아(自我)의 진실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 삶을 돌이켜 보면 타성적인 생활관습으로 살고 있다.
생존 그 자체를 위하여 산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명예를 위해 산다는 사람도 있고,
가족을 위해 사는 이도 있고,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산다고도 한다.
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 일상의 반복 속에 묻혀 살기도 하고, 하루하루 삶이 고통뿐인 삶도 있다.
이러한 각각의 삶 속에서 지각 있는 가슴은「나는 무엇인가」를 외치게 된다.
나의 진면목이 무엇이며 울고, 웃고, 나고, 죽는 주인공이 무엇이냐고 묻게 된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심리적으로는 더 많은 갈등과 불안요인으로 둘려쌓여 있다.
더 높은 생산력 속에서도 인간은 여유는커녕 가중된 업무와 스트레스와 고독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이기적으로 되고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안겨주며 스스로 지쳐가고 있다.
사회전체가 방향을 잃은 듯 혼란스럽기만 하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건지, 물질적 풍요는 왜 우리의 마음까지 풍요롭게 하지 못하는지.
여기에 선(禪)은 나는 무엇인가를 알려 주고, 이것을 통해서 인간은 참다운 자기로 살게 된다.
삶에 의미를 주고 자신의 참된 면목을 여지없이 발휘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수행은 무엇이 인간의 참된 삶이냐를 문제 삼으며 자기 주체를 찾아 활발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수행법이다.
2.참선수행의 기본요.1)다섯가지를 갖춤(具五緣)①지계청정(持戒淸淨)②의식구족(衣食具足)③한거정처(閑居靜處)④식제연무(息諸緣務)⑤근선지식(近善知識2)다섯 가지를 꾸짖음(呵五欲)마음을 기쁘게 하고 몸을 안락하게 하는 세간의 ①모양, ②소리, ③냄새, ④맛, ⑤촉감 등을 꾸짖는다.3)다섯가지를 버림(棄五蓋)①탐욕, ②성냄. ③해태와 혼침, ④들뜸과 회한, ⑤회의적 의심4) 다섯 가지를 조절함(調五事)①조심(調心)②조신(調身)③조식(調息)④조면(調眠)⑤조식(調食)5)다섯가지를 행함(行五法)①욕(欲;願)②정진③념(念)④정교한 지혜⑤일심
3.참선수행의 방법1) 관법(觀法)첫째 : 수식관(數息觀)둘째 : 부정관(不淨觀)셋째 : 자비관(慈悲觀)넷째 : 인연관(因緣觀)다섯째 : 불타관(佛陀觀)2)화두참구①화두란 무엇인가②話頭참구의 세가지 마음첫째 큰 믿음(大信心)이다.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다.셋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③좋은 화두가 있는가?④화두 참구하는 모양
4.참선수행의 공덕*수행과정에서 나타난 효용(效用)1)생활상의 효용
①마음이 안정되고 두뇌가 맑아진다.두뇌가 맑아지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다.②마음이 맑아지고 안정되며 정신집중이 잘된다.③성격개조 능력개발 인간관계 개선에 크게 도움이 된다.④수면 시간이 단축되고 심신이 경쾌하다.2)건강상의 효용
①관념적인 병의 뿌리를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병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며 마음을 바꿈으로써 병을 고치는 원리다.
②참선하면 신체내의 적․백혈구가 증가되고 혈색소가 증가하였다는 연구결과 보고가 있다.
따라서 생활의 활력이 현저히 증대된다.③참선수행이 다음의 병에 크게 유효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신경쇠약․ 부인과병․심장병․위장병․신장병․폐결핵․천식․히스테리․공포증․축농증․특히 만성적 질환에 유효하다.이것은 생활자체가 갖는 생명력과 자연 치유력을 활발하게 하고 강화시킨 데서 오는 결과라고 본다.정상적인 생명력을 억압하고 있거나 치우쳐 있는 상태를 선 수행으로 인하여 제거되고 바르게 조절되기 때문이다.④산소 탄산가스 산도(酸度) 포도당 등 혈액의 함유물은 호흡에 많이 좌우된다.
따라서 좌선을 하여 호흡이 깊어지면 뇌수활동을 정상화하는데 도움을 준다.⑤좌선은 정신 상태를 전반적으로 급속히 안정시킨다는 사실 이 뇌파(腦波)측정 결과 나타났다.⑥종래 동양에서는 기(氣)를 중요시하여 호연(浩然)의 기를 기르라 하였다.
그것은 천지에 가득찬 지극히 크고 강한 정신적 생명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을 길러야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원만하다고 보았다.
3)성격상의 효용
①자기중심에서 폭넓은 협동적 인간으로 확대된다.
이웃과 사회 그리고 자연과 함께 하는 인간성이 생겨 이기적이고 배 타적인 성격이 개선된다.②들뜨고 조급한 현대인의 심리에 무심(無心)의 공간을 열어 준다.
거기서 가슴이 열리고 참자기와 만나므로 본심에 돌아와 깊은 안정을 얻게 된다.③자칫 화를 내어 생생한 자신을 잃기 쉽다.
선은 탐, 진, 치 삼독심을 깨고 생생하고 진실한 자신에 돌아가게 한다.④혼란이나 충격에 동요됨이 없는 부동심이 함양된다.
4)정신상 효용①종교를 향하는 마음상태를 살펴보면 스스로가 인생을 깊이 반성하여
거기서 불안을 보고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구한다.선은 불안을 해소하고 공허를 메우며 궁극의 의지처를 얻게 하고 근본적 안심을 얻게 한다.②선은 생사에서 살되 생사에서 초월한 자기를 발견케 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한다.③선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준다.④선은 인간에게 최고의 권위를 실현시켜 준다.인간이 갖는 지혜와 지극히 높은 덕성과 능력을 인정한다.인간의 신성 존엄 내지 중생의 절대적 주권을 열어준다.⑤선 수행을 하면 마음이 맑아져 번뇌에서 해탈하여 세계의 실상을 바로 보는 지혜가 열린다.
[본격단계] 修道位 (수도위)어설픈 사람들은 자기 유식(有識)의 잣대로 존재에 의미를 갖다붙인다.그렇지만 그것은 만용이다.존재는 존재 그대로 두어야지 어떤 개념으로 덧씌우면 그의 고유한 존재 가치는 금방 사라져 버린다.그래서 나는 나일 뿐이고 너는 너일 뿐이다.관세음보살도 그렇다관세음보살에 대해서 더이상 의미를 붙이지 말라. 그냥 관 하라.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생각(意)이라는 육근(六根)을 총동원하여 오직 그 분을 친견하기만 하라.여기 본격 단계의 수련은 기초 단계와 완성 단계로 가는 중간 과정이므로 철저히 닦지 않으면 안 된다.
본격단계 [修道位]의 수행위치가. 더욱 가일차게 정진함-수도위라 함나. 십우도-득우.목우.기우귀가.망우존인다. 팔정도-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라. 육바라밀-인욕.정진마. 성문4과-사다함.아나함바. 화엄경52계위-십지
[완성단계] 無學道位 (무학도위)
내가 나란 멋을 부리지만 '나'는 어떻게 생겼는고?그 엄청난 세월동안....'참다운 나'도 모르면서 분수 넘치도록 얼마나 잘난 체하며 살아왔는가를 생각해 보라.당신은 그저 '허허'하고 자탄(自歎)의 한숨 소리를 낼 수 밖에 없을 것이다.땅을 깔고 누울 자격이 있는가!하늘을 이고 돌아다닐 자격이 있는가!여기 완성단계는 앞의 모든 단계의 결론이 되는 수행이므로 아주 중요하다.아무리 참선 공부를 했다하더라도 이쪽으로 회향(廻向)되지 않는 공부는 허사가 될 것이다. 선관쌍수![완성단계] 無學道位 (무학도위)의 수행위치가. 용맹정진하여 진리의 맛을 봄-무학도위라 함.나. 심우도-인우구망.반본환원.입전수수다. 팔정도-정정라. 육바라밀-선정.반야마. 성문4과-아라한바. 화엄경52계위-등각.묘각
[완성단계][관세음보살 관 하는 주재자 돌이켜보기]화두 - 시심마(是甚魔)(1)수행안내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나'우주 만물 가운데서 '나'보다 고귀한 것은 없다.'나'가 있음으로 동서남북이 열리고 과거,현재,미래가 생긴다.'나'라 하지만 나란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을 '나'라고 할 것인가?이 존재의 자각에 대한 수수께끼는 너무 깊고 오묘해서 쉽사리 풀리지 않는다.
여기에 그 해결 방법이 있다.불자들은 참선. 간경. 염불. 주력의 4대 수행 가운데 참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참선의 절대적 가치로서 화두(話頭)를 이야기한다.화두는 공식적인 것만도 1700가지나 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 많은 화두들도 하나로 통하는 곳이 있으니시심마(是甚魔)화두이다.
시심마!
시심마란 '이 무엇인가?'이다.'나'란 도대체 무엇인가? '나'라고 하지만 '나'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이다. 나, 자기자신이라 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몰라 나, 자기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렇게 함으로서 그 해법이 있다.우리가 지극정성 관세음보살을 외우며 관하고 있다고 하였을 때,그 관세음보살을 관하는 주재자(主宰者)가 도대체 무엇인가하고 생각해 보라.
주재자라는 말을 고급적인 말로 주인공(主人公)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관하는 그 주인공이 무엇인가.눈이 보니 눈이 주인공인가. 뇌가 판단한다고 하니 뇌가 주인공인가.관세음보살 소리를 듣고 있는 귀가 주인공인가.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있는 입이 주인공인가.
이 육신인가, 아니면 생각인가, 그 모두인가.
지금까지는 관세음보살을 관하는 수련이 주였지만
여기 결론단계에서는 관세음보살을 관하는 주재자를 찾아야 하니
문제 해결의 방향자체가 완전히 180도 달라진 것이다.
'무엇이 관세음보살을 관 하는고?'이것은 '나는 무엇인가?'하는 말과 꼭 일치한다.이는 부처님께서 고민하셨던 바로 그 숙제였다.
혹자는 부처님을 따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수도 있다.부처님의 경우는 부처님의 경우일 뿐이지 않느냐는 것이다.맞는 말이다.나는 선천적으로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해서 모방하거나 누구를 따라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그런 점이 어린 성장기 시절을 다부지게도 하였지만 외롭게도 하였다.출가하여서도 쉬이 고쳐지지 않았다.
부처님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을 텐데 하는 오만한 마음이 불쑥불쑥 일어났다.
그런데 어느날, '마음. 부처. 중생이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는경전 말씀을 접하고는 부처님을 진짜 존경하게 되었다.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과연 삼계도사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후일 수행을 더욱 밀도있게 하면서 진정 참나를 찾는 공부에 관한한 부처님의 모델이 완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처님의 카테고리를 카테고리 그 자체를 용납하지 않으셨다. 억지로 형용하자면 우주적이고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다.그래서 부처님의 경우를 말하더라도 이는 바로 우리의 문제요 전 인류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첫 말씀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하늘 위와 하늘 아래 나 홀로 높노라!과거의 삶은 끄달림의 흔적을 남겼지만 이제는 객관의 세계를 부리고 사는 '참나'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상황마다 쫓아다니던 '나'가 아니라 상황을 치고 달리는 '나'가 된 것이다.
어떻게 하여 부처님께서는 이 '나'에 대해서 분명한 확신을 가지셨을까.모든 중생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부귀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6년 수행을 통해 얻으신 '나' 외부적인 그 어떤 것에서도 무고안온(無苦安穩)의 열반(涅盤)은 찾을 길이 없었다.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안으로 안으로 자기 성찰을 거듭해 갔다.
드디어 열반의 자리는 그 곳에 있었다.당신 스스로의 실존에 대한 자각. 바로 그것이었다.
깨달음.그 속에 확연히 드러난 '나' '영원한 자기', '주인공', '참자아', '진아'.'나'는 더 이상 중생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중생으로서의 나를 부정한 연후에 나타난 절대적 '나'였던 것이다.그래서 그것이 비록 불상(佛像)등의 형상일지라도 그 분의 모습은 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배우고 있는 선관쌍수에 있어서, 관해지는 대상으로서의 관세음보살도 그런 차원에서 다른 망상과는 다른 것이다.
참자아는 진리와 하나가 되어버린 '나'이다.진리를 깨달았다는 표현을 곧잘 쓰지만 이때의 자리는 대상이 끊어진 곳이기 때문에 주,객의 경계가 무너져내린 자리이다.완전히 공해진 자리이다.
세속의 입장에서 무아(無我)라는 표현을 같이 씀으로써 다소 헷갈리는 수도 없지 않으나
철저히 무아가 되지 않고는 참자아는 얻어지지 않는다.무아는 보편적 존재의 실상 그 자체이므로 참자아를 얻었다 함은 실상에 계합하였다는 뜻이다.
그럼으로 '나'는 '너'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아의 체험은 일체 모든 존재의 무자성을 동시적으로 깨닫는 일이기 때문에 서로간의 관계를 대단히 적극적으로 연결짓게 한다.상대가 자연이라 할지라도 하나가 되고 만다.
물아일체(物我一體)요, 주객일여(主客一如)이다.온 세월과 공간이 본래로 인드라망의 체계를 갖추고 있어서 인연짓고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자비행(慈悲行)이 저절로 나온다.이때 자비행은 직관능력에 바탕을 둠으로써 맹목적이거나 집착에 기인한 헐값의 동정심과는 사뭇 다르다.
그 상대 존재의 장래까지 내다보는 바른 안목으로 때로는 고함도 치고 매도 치는 고차원적 자비행이다.
동체대비!참 자아를 찾은 사람은 순간순간 깨어있는 삶을 산다.자산이 연기적 관계 속에 있음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비굴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거만하지도 않다.
세상을 초연하게 살면서도 절대 세상을 여의지도 않는다.
분명한 직관력을 쓰기 때문에 그의 행동과 그 결과는 완전하다.
현실 감각과 사회 인식 또한 뛰어나서 모두를 살려내는 보살행도 서슴치 않는다.
부처님이 그러하셨다.
우리 주위에는 큰 소리를 치는 사람이 많다.
수행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는 위에서 열거한 여러 잣대로 보면 분명하다.지금껏 살핀 '관세음보살을 관하면서 그 주재자 돌이켜보기'는 최상의 참선 수행법이다.결론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 소개한 선관쌍수의 참선법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수련하는 길이며 깨달음의 길이다.
그리고 정지(正智)로서 모든 사물을 바르게 관조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수행법이다.
따라서 이 선관쌍수의 참선법은 모든 일을 함에 외물에 이끌리기 보다는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는 전인격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한다.
환경에 지배됨이 없고 유혹에 빠지지 않으며, 자주적이며 자율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한다.진실로 마음 공부를 잘하는 이는 타인이나 환경에 대해서 바른 눈을 갖는다.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즉, 직관(直觀)하는 능력을 갖는다.더욱이 나아가 나와 남, 자기와 주변의 환경가의 관계를 서로 대립되는 존재로 보지 않고
자기 속에 환경을 받아들이고 환경 속에 자기를 던져 넣어서 하나가 되어 버린다.
가장 완벽한 참선법인 선과쌍수의 수행을 하다보면 자타가 둘이 아닌 수련이 이루어짐으로써
적극적인 사람의 방식이 생기며, 자기 욕심만 챙기는 소아적 생각에서 벗어나 큰 삶을 살 수 있다. 온 산천초목이 다 나의 분신임을 느낀다.모든 공부가 그렇겠지만 특히 이 선관쌍수의 참선 공부는 한 만큼 큰 소득이 있다.스스로 체험할 일이다.(2) 수련지침가. 예비 단계와 본격 단계의 과정을 꼭 거칠 것.나. 하루 최소 30분 좌선하면서 시심마 화두를 챙길 것.다. 관세음보살을 가능하면 또렷하게 관 할 것.라. 수행에 관하여 주위 사람들의 말을 너무 많이 듣고 흔들리지 말 것.마. 마음 공부 중에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선지식에게 물을 것.(3) 수행기간* 한평생 내내 그리고 세세생생(世世生生) 동안.(4) 수행문답A - 깨달음에 대하여
[A]문)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깨달음의 대상은 있습니까?답) 깨달음은 본래로 존재하는 무자성의 연기적 세계입니다. 따라서 인위적 깨달음이란 있을 수 없으며 그러한 말은 중생의 입장에서 방편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내가 무아가 되면 온 세계와 그냥 합일되고 마는 것이지 깨달음의 대상이 별도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깨달았다.'는 말은 있을 수가 없지요. 만일 '나는 깨달았다.' 라는 사람이 있다면 이미 그는 주객의 분별심에 빠졌음을 자인하는 꼴입니다. 한편, 깨닫기 전에는 '나는 깨달아야 한다.'는 말은 쓸 수가 있습니다.
[B]문) 그러면 깨달음의 세계는 있습니까?답) 이 세상 자체가 실재하는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단, 우리들의 말길, 우리 범부 중생들의 생각이 끊어진 무아라야지 느껴집니다.
[C]문) 무아와 '참나'는 양립할 수 없지 않습니까?
답) 수행하는 이가 철저히 무아가 되면 거기서 전혀 다른 참나 즉 진아(眞我)가 나타납니다.
[D]문) 무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답) '관세음보살을 관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즉 '무엇이 관세음보살을 관 하는고'라는 화두를 참구해야 합니다.
[E]문) 여기서 '무엇이 관세음보살을 관 하는고'에서 '무엇'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는 없나요?답) '무엇'은 '나'라고 볼 수 있겠죠. '나'가 없으면 관세음보살을 관할 수 없으니까요.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어떤 것인가 하는 애기입니다. '나란 어떤 존재인가.'. '자신을 살펴 보라'는 소리입니다.
[F]문) 그러면 마음과 '나'는 어떤 관계입니까?답) 마음이 곧 '나'입니다. 관세음보살을 관하는 중에 망상이 일어나면 '망상이 곧 관세음보살을 보는 마음인가?'
순간 또 배가 고프면 고픈 배를 느낌이 내 마음인가? 내 마음, 이 도대체 무엇인가?
관세음보살을 관 하는 내 마음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인고 하고 '내 마음', '마음'하고 궁구해야 합니다.
[G]문) 그렇게 하면 마음이 찾아지나요?답) 그런 밀도있는 내적 연마가 결국 무아의 상태로 되어 갑니다. 완전 무아가 되면 그 자리에 잘난 자기가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를 우리는 참자아, 자아, 참자기, 참사람, 진아라고 합니다.
[H]문) 참자아를 찾으면 어떤 점이 좋습니까?답) 외물에 끄달리기 보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자아를 주인공이라고도 하지요. 주인공이 부리는 삶은 자율적이고 주체적이라서 하루하루가 보람의 나날이 됩니다.
[I]문) 우리나라 큰스님들은 다 깨달았습니까?답) 그런 쓸데없는 잡념이 당신 공부를 장애하고 있습니다. 남의 공부가 어느 정도인가 살필 일이 아닙니다. 자기 공부나 하십시오. 스스로 밥을 지을 일입니다.수행문답B - 간화선에 대하여
[A]문) 참선을 하다보면 아무 생각없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릴 때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인지요?답) 선정에 든 듯하나 화두에 대한 의식이 없으면 멍청한 상태이지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를 무기공에 빠졌다고 하는데 수행자들이 조심해야 할 마음병입니다. 절대 그런 한적한 것을 탐닉해서는 안됩니다. 시간 보내기 위해서 앉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더욱이 현실도피적 발상은 버려야 합니다.[B]문) 그리고 어떨때는 온갖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내가 도인이 되면 중생을 어떻게 제도할 것인가? 나는 배운 것도 많지 않은데... 등등의 망상들 말입니다. 이런 유의 건설적인 생각들도 나쁜 것인가요?답) 참선한답시고 화두는 잡지 않고 앉아서 일으키는 온갖 생각들은 망상일 뿐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들로 머리속을 도배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버려야 할 똥 보다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나쁜 생각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아야 됩니다. 화두 이외에 이런 저런 궁리를 짓는 것을 도거(悼擧)라고 하는데 이 또한 마음 공부에 있어서는 병일 뿐입니다. 중생까지 걱정말고 지금 당장 자기 걱정이나 하십시오.
[C]문) 화두가 잘 안 잡혀요. 관세음보살만 똑똑히 관하면 안 되나요?답) 화두가 잘 들려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우선 관세음보살 관 하는 수행이라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 관법의 수행은 옛날부터 인도와 남방 지역에서 많이 해오던 수행법입니다. 위빠사나라고 많이 알려져 있지요.
요즘 수행자들이 위빠사나가 정통이니 아니니 하고 논쟁거리로 삼는데 다 쓸데없는 짓들을 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와 간화선은 대립의 두 사안이 아니라 서로 보완의 관계에 있으면서 선,후의 발생시기가 다를 뿐입니다. 간화선(看話禪)을 한다 하더라도 위빠사나가 기본으로 되어있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이 잘 관해지면 시심마 즉, '이 무엇인고?' 화두를 잡으십시오.
[D]문) 간화선은 언제쯤 나왔나요?답) 간화선은 송나라 10세기초 대혜종고 스님 때에 정형화되고 보편화되었으나
이미 6세기~9세기 무렵부터 스승되는 이들이 제자들을 제접하는 방법으로 말 이전의 도리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를 화두라고 하였지요.
공안이라고도 하는데 관공서 문서처럼 믿을 수 있고 확실하다는 뜻으로 쓰여졌습니다. 차차 임제종으로 발전하였지요.
[E]문) 제자를 제접하는 특별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 개개의 화두라면 똑같은 화두가 여러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생각이 되는데요.답) 맞는 말입니다.
처음 화두는 절절한 의문이 일어날 만한 특수상황이 있었는데
1000년 지난 이 세월에도 똑같은 화두를 잡는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본 납승이 제창한 선관쌍수의 특별한 수행법입니다.
[F]문)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특수 상황의 화두 하나만 소개해 주시지요.답) 간시궐이란 화두가 있습니다.
간시궐이란 마른 똥막대기란 뜻입니다. 이 화두가 나온 상황은 이렇습니다. 운문이란 스님께서 똥을 치고 있었습니다.
한 짐 똥통을 지고 가서 보리밭 가운데 두었습니다.
그리고 보리 뿌리에 거름으로 주려고 가라앉은 인분찌꺼기를 휘휘 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리밭 이랑사이에 꽂아둔, 마른 똥이 덕지덕지 붙은 막대기를 막 잡았습니다.
그때 한 수좌가 찾아와서 저만치서 갑자기 물었습니다.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스님께서는 말라붙은 똥막대기를 들어보이면서 즉각 대답을 내리셨습니다. "간시궐이니라." 하고 고함을 질렀던 것입니다.
수좌는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만난 듯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똥막대기가 부처라니, 저 똥막대기가 부처라니...."
그 수좌에게는 그것이 마음의 큰 숙제가 되었습니다. 똥막대기가 화두가 된 것입니다. 화두는 다 이렇게 특수한 상황 아래서 생겨난 것입니다.
[G]문) 그럼 그때 당사자가 아니고는 실감이 잘 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답) 그렇습니다. 그래서 과거 1700공안이 현재에 와서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지요. 화두는 말 그대로 자기 문제가 되었을 때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인데 남의 애기가 어떻게 화두가 되겠습니까.
철저한 자기 살림살이를 위해서 참선수행을 하잖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의 경우를 가지고 자기본분사(本分事)로 삼으라 하니
참으로 기가 찬 일이며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H]문) 주위에 보면 누구로부터 '화두 탔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러한 경우에도 기존의 화두들을 하나씩 얻어오는 것인가요?답) 그렇지요.
실질적 상황 전개는 전혀 없고 그렇게 필요한 물건도 아닌 것을 장식용 물건처럼 수천가지 물건 가운데서 하나 얻어오는 경우가 많지요. 신도들이 지니고 있다는 '마삼근', '무', '정전 백수좌' 따위의 화두가 다 그런 셈입니다.
'스님 화두 타러 왔습니다'하면 '그럼 마삼근 하거라' 하는 정도입니다.
울수도 웃을 수도 없는 일이 많습니다. 어떤 신도들은 제방의 큰 스님들을 찾아다니면서 화두를 잔뜩 끌어모으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화두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대보살이라니 소도 다 웃을 일입니다.
참된 공부를 해야지 그런 절 도깨비가 되어서 무얼 하자는 것인지....
[I]문) 옛날식 화두라도 믿는 스님이 있어서 화두를 타게 될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런지요.답) 좋은 질문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스님에게 그 화두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구체적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서
내가 화두가 나올 그때 당시의 주인공이 되어
오래 전 특수 상황을 자기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진실로 느껴야 합니다.
[J]문) 진실로 느끼지 못하면 화두가 아닌가요.답) 그렇습니다. 그것은 알아 들을 수 없는 괴상한 언어일뿐입니다.
[K]문) 가만히 생각해보니 현재 자기문제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화두가 시심마 화두가 되겠는데요?답) 아주 잘 보았습니다.
시심마란 이미 위에서 살핀대로 '내가 누구인가.' '내마음이 무엇인가.' 를 돌아보는 일이므로
지금 당장 누구에게나 다 적용될 수밖에 없는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 사람 개개인에게 언제고 특수한 상황이 될 만한 것이지요.
[L]문) 선관쌍수는 결국 시심마 화두와 관계가 있나요?답) 예, 선관쌍수의 참선법은 단순한 정신집중 단계에서 다원적 정신집중 단계로 승화된 특별한 방법입니다. 그냥 '시심마'하면 구체성이 떨어져서 금방 싫증이 나고 잘 안 됩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을 지극정성 관 하면서 '이 관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고.' 하고 궁구한다면
최상의 마음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M]문) 한가지 덧붙여 여쭈고 싶습니다. 묵조선과 위빠사나는 같은 것입니까?답) 사실은 묵조선이란 말은 간화선 하는 사람들이 억지로 지어낸 말입니다.
간화선법이 나오기 전에는 위빠사나가 있었지요. 이 위빠사나가 중국 한자어로 묵조선이 된 것이지요. 이 위빠사나에서 좀 더 역동적으로 발달된 선법이 간화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의 방법은 얼마든지 경험에 의해서 발달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위빠사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간화선하는 사람들이 위빠사나하는 사람들을 아주 하찮은 무리들로 매도해서도 안 되리라고 봅니다.
위빠사나하는 사람들 중에도 훌륭한 사람이 많습니다.
[N]문) 간화선을 통하지 않고 유명한 분들이 우리나라에도 계십니까?답) 그럼요. 간화선법은 통일신라 말의 도의 (道義)스님께서 당나라 유학하면서 임제종 계통의 서당자장 스님에게서 비로소 그 법을 전수받았지요. 그러니 그전에 계셨던 수많은 고승들, 예를 들면 원효, 의상, 원광, 지장, 혜통스님 등은
요즘 같은 간화선법에 의지하지 않고 진리의 세계에 드신 분들입니다.
[O]문)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쭈겠습니다.
요즘 많이 행해지는 기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답) 기도도 훌륭한 수행입니다.
말의 어감이 좋지 않아서 간화선만 하는 이들은 거부감을 갖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기도가 곧 위빠사나라고 보면 됩니다.
위빠사나의 가장 핵심은 몸과 생각에 일어나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도의 가장 일반적인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 정근은 아주 훌륭한 관법의 수행입니다. 기도라고 하니까 무조건 부처님께 비는 것으로 오해하는 수가 많은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염불정근입니다.
염불로써 아주 정미롭게 부처님을 친견하는 수행입니다.
의상스님의 백화도량 발원문에 보면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제자는 세세생생에 관세음보살을 일컬어 본사로 삼되
보살이 아미타 여래를 이마에 이고 계신 것 같이
제자 또한 관음대성을 이마 위에 정대하고...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는 훌륭한 수행입니다. 기도의 범주에 들어가는 독송.사경.참법 수행.절하기.진언외우기 등이 다 하나같이 관법의 수행입니다.
본 납승이 권하는 선관쌍수는 바로 이런 기본적인 기도수행을 전제로 하여 간화선을 접목한 가장 다를 수 있고 수행의 방법 또한 얼마든지 발달할 수 있습니다. 간화선법이 처음 나왔을 때는 일반 서민들로부터 대단히 각광을 받았습니다. 특히 글을 모르는 무인(武人)들이 좋아했다고 합니다. 간화선 보급에 공이 큰 대혜종고 스님의 서장에 보면
총 62편의 편짓글 가운데서 60편이 재가 불자들과 나눈 이야기들입니다.
간화선법은 결코 어렵지 않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수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간화선법이 삽시간에 퍼진 것입니다. 간화선법이 그랬던 것처럼 선관쌍수는 이 시대 꼭 필요한 참선수행법입니다. 간화선법을 더욱 업그레이드한 수행법이 선관쌍수입니다. 선관쌍수를 하게 되면 그 속에 기도는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수행문답C - 화두에 관하여
[A]문) 화두(話頭)를 잡을때 잡생각이 많이 일어납니다.
'잡생각을 일으키면 안되지'하고 다짐을 하지만 잘 안 됩니다.
조언 부탁드립니다.답) '잡생각을 말아야지.'하는 자체가 잡생각 즉, 망상입니다. 망상을 원수 보듯 할 것이 아니라 그냥 내버려두고 화두 쪽으로 쫓아오시면 됩니다.
[B]문) '부처가 그리 쉽게 될 것 같으면 다 부처 되지' 하고 말들을 합니다. 정말 그 길이 요원하다고 해야 맞습니까?답) 그 길이 요원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그 생각이 요원할 뿐입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만이 상책입니다.
[C]문) 얼마나 해야 부처가 됩니까?답) 화두 잡는 순간은 부처요. 화두 놓치는 순간은 중생입니다.
[D]문) 그 원리를 좀 설명하여 주십시오.답) 화두는 육진(六塵)의 침범을 막아주는 방패이며 오온(五蘊)의 활동을 무찌르는 창끝입니다.
그러니 화두가 들려있는 순간은 자기 자신이 잘 보호되고 있는 것이지요.
외물에 오염되지 않고 객관의 경계에 끄달리지 아니하면 부처지만 그렇지 않으면 중생인게지요.
[E]문) 좀 다른 얘기지만 망상이 지혜라는 말도 있던데요?답) 망상이 곧 지혜지요.
[F]문) 망상이 어찌하여 지혜가 되는지 그 원리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답) 우리들은 시시각각 번뇌 망상을 부립니다.
한 찰나 지간에도 천사량만계교(千思量萬計較)를 꾸밉니다.
화두는 이러한 중생들의 뒤끓는 망상을 일시에 가라앉힙니다.
화두를 잘 잡으면 망상은 금방 화두의 에너지로 전이되고 말지요.
곧 화두 일념(一念)으로 빨려든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화두를 더욱 열심히 챙기다 보면 무념(無念)이 됩니다. 이 때의 이 무념은 멍청한 상태가 아니라 의식이 너무도 또렷한 무념입니다.
예를 들어, 선풍기 날개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성능을 충분히 발휘하다 보니 날개가 보이지 않는 이치입니다.
선풍기 날개가 보이지 않아야 훌륭하듯이
참선에 있어서도 무념이 되어야 제대로 수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무념에서 실상을 직시할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선풍기 날개라야지 바람을 얻을 수 있듯이.
[G]문) 그럼 망상(妄想) 많은 것에는 집착할 이유가 없네요.답) 그렇지요.
망상 때문에 범부중생의 노름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범부 중생의 입장에서 망상 없다면 식물인간이나 다를 바 없지요.
망상, 번뇌즉보리, 지혜입니다.
[H]문) 끈질기고 오래된 번뇌는 없나요?답) 지금 신경써야 할 곳은 화두를 여하히 잘 잡느냐 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망상이 많으네요.
천 년이나 된 동굴이 있다고 칩시다. 그 깜깜함이 천 년 아니 만 년이 되었다하더라도 불이 켜지면 일시에 어둠은 없어집니다. 우리 마음공부의 이치도 이와 같습니다.
번뇌는 오래되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I]문) 조금 전에 지혜에 대해서 조금 언급하셨는데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입니까?답) 예, 다릅니다. 지식은 외부정보에서 얻어진 것이지만 지혜는 내면에서 솟아오른 샘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지식은 분별망상을 일으키고 얕은 꾀를 부립니다만 지혜는 다릅니다.
지혜는 사물을 여실히 보는 직관능력입니다. 그리고 지혜는 순수한 의식 집중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대단히 담백하고 우주적입니다.
한편, 지식은 때때로 잔인할 수도 있지만 지혜는 언제나 한없이 자비롭습니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존재들을 죽이는 일과 존재들을 살리는 일은 확연히 다른 데
지식은 헤치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 하지만 지혜를 쓰면 실수가 없습니다. 지혜는 분별 망상이 사라진 곳에서 나타납니다.
일렁이던 물결이 가라앉고 명경지수가 되면 그 곳에는 온 삼라만상이 차별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지지요. 바로 그러한 자리가 지혜입니다.
그래서 수행하여 지혜로운 사람은 사물을 보는 안목이 정확하면서도 그 마음씀이 늘 따뜻합니다. 완전한 지혜는 무한자비, 무한사랑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J]문) 그러면, 무조건 좋게 보고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지혜있는 삶인지요?답)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미 무아의 광활한 연기적 세계에 들었기 때문에 내가 이미 그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공간적 인연관계뿐 아니라 시간적 인과 관계까지 뚫어보고 있기 때문에 그 행함이 대단히 철저합니다. 그래서 그의 일처리는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자비행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상대의 자리에서, 온 세월과 온 공간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곧 자비와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좋게 보고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습니다.
화를 낼 때도, 매를 들 때도 있습니다. '무한자비'라 해서 늘 허허 실없이 웃기만 하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비록 부정적으로 보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자체가 자비행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K]문) 그러면 그러한 지혜는 증득되는 것입니까?답) 더러는 얻는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지혜는 사람사람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본래로 갖추고 있습니다. 범부중생들은 쓰지 못할 뿐이고 공부가 된 이들은 자기 것으로 마음껏 씁니다.
일단 마음 공부를 열심히 할 일입니다.
[L]문) 화두를 열심히 잡으라는 말씀이네요.
화두를 잡을 때 특별히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으면 일러주십시오.답) 잘났다는 생각을 버려야 공부가 됩니다.
입차문내막존지해(入此門內莫存知解)란 말이 있듯이
화두는 일체 사량 분별심을 놓아버리고 밀어붙여야 합니다.
[M]문) 좀 더 구체적으로 일러 주십시오.답) 믿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N]문)참선에서도 믿음이 필요하나요.답)그렇습니다.
철저히 믿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대신근(大信根)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자신과 화두에 대하여 강한 확신이 있어야 공부가 됩니다.
[o]문) 참선하다가 싫증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답) 모든 일은 슬럼프가 있기 마련입니다.
참선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늘 초심으로 돌아가서 마음을 새로이 가져야 합니다. 오직, 각오를 세워 정진해야 합니다.
대분지(大憤志)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한 계기를 삼을려면 스승이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듣거나 옛스님들의 행장(行狀)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p]문) 어떤 때는 타성에 젖어 화두에 대한 간절한 문제의식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문제의식이 없어도 화두가 될 수 있습니까?답) 그렇지 않습니다.
화두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면 공부가 잘 안되고 있는 것입니다.
화두 잡는 수행자가 '왜', '무엇'을 놓치면 밥이나 축내는 산송장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의식이 없다면 간화선이 못 됩니다. 간화선의 가장 큰 동력은 대의정(大疑情)입니다.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대신근, 대분지, 대의정을 참선의 3요소라고 합니다.
[q]문) 선관쌍수에서의 요체도 화두에 있습니까?답) 그렇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또렷이 관하면서 '관하는 이 물건이 무엇인고.' 를 궁구해야 합니다.수행문답D - 견성성불에 대하여
[A] 문) 선(禪)은 무엇입니까?답) 선은 곧 참마음 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교(敎)는 참 말씀이요, 율(律)은 참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B]문) 마음은 또 무엇입니까?답) 마음은 본래로 밝고 밝은 그 자리입니다.
마음이라 하지만 이름 붙일수도 없는 그 무엇입니다.
[C]문) 왜 보통사람은 그 마음을 보지 못합니까?답) 미혹 때문입니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빛으로 우리들을 밝히고 있으나 미혹(迷惑)의 구름에 가려서 보지 못할 따름입니다. 만일 그 구름이 벗겨지기만 하면 세상은 안팎으로 환해집니다.
[D]문) 구름을 벗겨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답) 참선 정진하면 됩니다. 간단합니다.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세수하다가 자기 코 만지기보다 쉽습니다.
[E]문) 견성성불(見性成佛)도 그렇습니까.답) 관점의 차이지 결국은 같은 개념입니다.
마음은 그 본래성(本來性)에서 말하는 것이고
견성성불은 중생의 분상(分上)에서 본래의 성품에 접근해 가는 말입니다.
[F]문) 견성성불의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답) 본래의 성품을 보는 것이 자기 부처를 이루는 일입니다. 본래의 성품은 선악이 없으며, 대소가 없으며, 안팎이 없으며, 생멸(生滅)이 없습니다.
어느 때나 청정무구한 절대의 경지이며 영원불변한 자리입니다.
이런 차별이 없는 본성을 보았다함은 우주 그대로 계신 법신의 부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요,
내심의 부처가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G]문) 성불이라고 할 때 부처님은 세속적 표현으로 어떤 분이라 할 수 있는지요?답) 완전한 인격자란 뜻입니다. 붓다라고 하지요.
참마음 자리에 계합하신 분, 붓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아 마땅한 분입니다.
[H]문) 참 마음자리에 계합한 것이 뭐 그리 대수입니까? 다 자신만이 좋은게 아닙니까?답) 그렇지 않습니다.
그 한 분으로 인하여 온 우주가 향기로울 수 있습니다. 참마음은 그 분의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도 함꼐 있습니다. 그래서 견성성불한 이는 자신이 우주임을 알기 때문에 한없는 자비심을 일으킵니다.
세상의 성인들이 다 그런 분들입니다.
[I]문) 그러한 분들은 돈오돈수(頓悟頓修)한 것입니까? 돈오점수(頓悟漸修)한 것입니까?답) 본래는 그러한 일이 없습니다. 말장난일 뿐입니다.
열심히 화두를 챙겨 무아가 되면 참마음과 계합합니다.
거기에 무슨 더디고 빠름이 있겠습니까! 할 일 없이 심심한 사람들이 지어낸 말에 휘둘린다면 어느 천 년에 공부가 되겠습니까!
부처님의 경전 구절 그 어디에도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하는 말은 없습니다.수행문답E - 직지인심에 대하여
[A]문) 세상의 가치는 어디서부터 출발합니까?답)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니 자신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B]문) 나 자신을 찾는 참선과 다른 종교, 다른 학문은 어떻게 다릅니까?답) 다른 종교, 다른 학문들은 모든 가치를 나 이외의 바깥에 둡니다. 즐거움, 행복, 영원 등의 가치 말입니다.
그들은 신기루 같은 무엇을 찾아서 밖으로 밖으로 치달립니다.
반면 참선하는 이들은 그러한 고귀한 것들이 내 안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내 자신 안에 고스란히 놓여있는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안목을 참선은 가르칩니다.
[C]문)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답) 자주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신이 있습니까?, 신이 없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신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따위의 어리석은 질문은 하나마나입니다. 오히려 신의 유무에 대해서 제멋대로 장난치는 그놈의 마음을 들여다 볼 일입니다. 이 마음이 도대체 무엇인고 하고 참구(參究)해야 합니다. 마음이 신도 만들고 악마도 만듭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합니다.
[D]문) 마음 찾는 공부가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답) 그렇지만 우리는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객관에 질질 끌려 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이제 우주의 중심에 우뚝 설 절호의 찬스가 왔음을 잊어서는 안되지요.
[E]문) 주인된 삶에 대해서 좀 더 말씀을 해 주시지요.답) 축구의 경우를 보십시오.
축구를 잘하는 사람은 경기 내내 공을 치고 달리며 공을 가지고 즐깁니다. 공의 주인이지요.
반면 축구를 못하는 사람은 경기 내내 공만 따라다니다가 체력만 소진합니다.
공의 노예 노릇이나 하고 있자니 공차는 일이 죽을 지경이지요. 그와 같습니다.
참선 공부를 제대로 하면 부림을 당하는 비참한 인생이 아니라 삶을 부리며 살아가는 멋진 인생이 됩니다.
[F]문)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명상을 한답시고 참선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 좀 알고 싶습니다.답) 세속의 명상은 참선의 입장에서 보면 망상이나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참선은 자기 본심을 곧바로 가리키는 것 즉 직지인심(直指人心)의 본질적인 공부입니다.
보통 명상이라 하면 과거 회상도 하고, 미래 설계도 하는 것을 말합니다만 참선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그런 잡다한 생각을 일시에 끊어버리려고 화두라는 취모검(吹毛劍)을 차고서 버티는 것이지요. 마음 마음 하지만 우리의 사유대상으로서의 마음은 결코 참마음이 아닙니다.
사유하는 그 자체가 비로소 참마음입니다. 마음은 주체이므로 그것이 대상화되면 벌써 그 본성을 잃게 됩니다.수행문답F - 불립문자에 대하여
[A]문) 참선에서는 문자를 전혀 쓰지 않습니까?답) 그렇지 않습니다.
[B]문) 그럼 왜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을 쓰지요?답) 문자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C]문) 무시해도 된다는 얘기입니까?답) 무턱대고 무시한다면 그 또한 불립문자가 아닙니다. 무시는 집착과 똑같은 병통입니다.
[D]문) 불립문자에서 문자의 분명한 뜻은 무엇입니까?답) 범주 즉 카테고리입니다.
[E]문) 카테고리가 무조건 나쁜 것입니까?답) 그렇지는 않습니다. 수련기간에는 필요합니다.
[F]문) 그럼 불립문자는 무엇입니까?답) 수행이 깊어져서 저절로 형식, 틀에 매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G]문) 그런 경지에서는 행복합니까?답) 그렇습니다.
모든 구속, 질곡으로서의 형식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자유를 성취한 것입니다.
윤회의 원동력인 번뇌에도 매이지 않게 되었으니 대자유를 성취하게 된 것이지요. 자유로운 만큼 행복합니다.
[H]문) 우리 범부중생들은 조그만 자기 고집에 갇히어서 서로가 자기 주장만을 하고 반목들을 하는데
참선을 하면 그런 것들도 고칠 수 있나요?답) 그렇습니다.
자기 고집은 고정관념, 선입견으로 비롯되는데
그 자체가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거기에 매여 아둥바둥 살지요. 이제는 그런 낡은 옷들일랑 훌훌 벗어 던지고 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세상을 재미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본인도 살맛이 나고 이웃들도 그를 활달한 사람이라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씀이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입견, 고정관념을 버려야지.' 하지만 내적 공부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일시적 다짐에 그치고 맙니다.
[I]문) 불교적 수행이나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선입견 없이 자유롭게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답) 물론입니다.
늘 깊숙히 그리고 입체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인생이 여기 와서 한꺼번에 모두 이루어졌겠거니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수억 겁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 한 생은 순간 거쳐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미 그와 같이, 선입견 없이 자유로운 이들은 이미 마음 공부가 전 세월부터 많이 되어 왔습니다.
옆에서 잘 지켜보면 그러한 기운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문) 잘 사는 삶이란 선입견, 고정관념을 버려야 마땅하네요?답) 그렇지요. 과거 만났던 누군가가 현재 대하고 있는 이 사람이랑 모든 조건이 똑같다 하더라도
즉, 용모, 학력, 나이, 취미, 특기가 비슷하다 하더라도 과거 그 사람의 것은 일체 배제하고 지금 면전의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사람이 다르면 모든 게 달라집니다.
비록 똑같은 사람, 즉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릅니다. 어제 만난 사람을 두고 오늘 다시 어제의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됩니다. 지혜롭게 생각할 일입니다.
모든 진실은 현재 그대로 당신 앞에 전개된 그 사실만 전부입니다.
우리는 사람이든 자연이든 나날이 새로운 기분으로 대할 때 그 상대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좋은 관계, 좋은 날은 내 마음가짐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수행문답G - 교외별전에 대하여
[A]문)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면 무엇이 따로 전해 왔다는 것입니까?답) 따로 전하고 말 것이 없습니다.
[B]문) 그런데, 왜 교(敎) 밖에 따로 전했다는 교외별전이란 말이 있습니까?답) 교에 집착하여 공부에 진척이 없기 때문입니다.
[C]문) 교리는 무시해도 좋다는 것입니까?답) 스스로 반조(返照)하여 볼 일입니다.
자신 있으면 무시하고 그렇지 않으면 경외(敬畏)해야 합니다
[D]문) 어떤 이들은 교외별전의 의미로서 마음을 전했다고 하던데요?답)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느낌이 통했다는 것뿐입니다. 마음은 누구에게나 본래로 다 구족되어 있습니다.
[E]문) 더러 교외별전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답) 중생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입니다.
[F]문) 부처님께서는 몇 번의 방편을 쓰셨습니까?답) 부처님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방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중생들이 눈봉사요, 귀머거리라서.....
[G]문) 눈봉사나 귀머거리도 알아들을 수 있는 방편을 소개해 주십시오.답) 부처님께서 한번은 영축산에서 법문을 하시다가 대중들에게 연꽃 한송이를 들어 보이셨을 때,
일체대중들이 그 의미를 몰랐는데 오직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었다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부처님께서 다자탑이라는 돌무더기를 법상(法床) 삼아 법문을 하실 때,
늦게 도착한 가섭존자를 보자 슬그머니 당신 자리의 반을 비켰는데
가섭존자가 알아차리고 말없이 그 옆에 가서 앉았다는 소식입니다.
셋째는 부처님께서 육신의 겉옷을 벗고 완전한 열반에 드시어
부처님을 모신 관이 두 그루 사라수나무 사이에 모셔졌을 때,
어디갔다 늦게 돌아온 가섭존자가 통곡을 하면서 그 관 주위를 돌자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이셨는데 가섭존자가 그 도리를 알고 눈물을 그쳤다는 소식입니다. 이를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합니다.
[H]문) 그러면, 교 이외에 따로이 전한다고 하지만,
위의 사실들이 교에 의지하여 전해 왔다면 결국 교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요?답) 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손가락은 무척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어서는 큰일입니다. 물맛은 설명으로는 철저히 알지 못합니다. 직접 마셔야 합니다. 진리도 그렇습니다. 직접적인 체험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선관쌍수의 참선이 최고입니다.
[I]문) 그렇게 하면, 박복하고 어리석어서 겪는 이 한 많은 중생놀음을 고칠 수 있나요?답) 그렇습니다.
참선은 스스로 자신의 혁신을 꾀하는 수행입니다. 오탁악세의 이 사바세계를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정토세계로 바꾸려면 자기혁신이 선행되야 합니다.
밖으로 치닫던 에너지를 안으로 잡아들이는 수행을 하게 되면,
즉 회광반조(廻光返照)하게 되면 그 속에 자기 보물이 본래 갖추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잔치를 벌입니다.
[J]문) 인생은 그런대로 살 만한 것이네요.답) 예, 인생은 삶 자체가 희망이요, 행복입니다. 모든 존재가 그렇듯이 인간은 본래로 부처요, 완성입니다. 선관쌍수의 참선법을 통하여 자기 혁신을 이루면, 두두물물(頭頭物物), 이 세상 이대로 깨달음의 천지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정진하고 정진합시다. 해 떠서 낮이 되고, 별 총총하여 밤이 됩니다. 땅은 우뚝 솟아 산을 이루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바다를 이룹니다. 참 좋은 인연입니다.
통융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kds11002/13480793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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