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禪詩)를 이해하려면
불교가 유심론이면서 유물론을 동시에 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이해가 안된다.
마음과 물질을 분리하는게 아니라, 둘의 관계의 범위가 있게 상통하고 있다.
즉, 마음과 관련된 물질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맑스주의나 과학처럼 내 마음과 무관한 물질은 생각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유학처럼 삶과 관련된 물질만 생각하는 집착도 없다.
그런데, 마음과 관련된 물질 모두를 공으로 해석할 줄 알아야 가능한게 선시이다.
선시는 작가인 스님의 사유와 선적(禪的)인 이치로 해석해야한다.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공(空)임을 밝히는 시다.
육체과 마음(=몸,신체) 그리고 언어(이성)을 하나로 묶는 것은 화두이다. 즉 선과 이성을 하나로 묶어 깨달음을 얻는 것은 화두이다. 그러나, 화두라는 언어로 깨달음에 이른게 아니라, 좌선 수행이라는 방법을 통해서다. 결국, 깨달음엔 좌선과 언어가 둘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교외 별전과 불입문자로 볼 수도 있고, 또
교내별전과 불리문자(不離文字)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작은 교내와 불리로 시작함이 올바른 수행임을 잊어서는 않된다. 결국 공부와 수행 그리고 께달음 후에 깨침의 실천이라는 것이 있다. 순서가 없는게 아니라 있다. 단, 순서에만 집착하면 깨달음이 무조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선종이라고 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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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짧은 알음알이에 의한 선(禪)의 본질은 공(空)이요. 공이란 우주만물이 연기(緣起)의 법칙인 인연(因緣)에 따라 생멸(生滅)을 거듭하므로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나의 존재는 물론, 볼펜 한 자루, 밥 한 그릇, 신발 한 켤레도 우리가 사용하기까지 많은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어 상호의존에 의한 존재 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얽힌 인연들을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우주 전체가 인연으로 짜인 하나의 거대한 망(網)이란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가 그렇게 갈망하는 돈, 명예, 권력은 물론 목숨까지도 연기(緣起)의 개념에서 본다면 순간순간 생멸하는 것으로 영속하는 실체가 없는 공이다. 그러므로 공의 가르침은 실체가 없는 순간의 상에 집착한다는 것은 부질없어 영원한 마음의 안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空)을 무(無)로 해석하여 허무나 무위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에 얽매이지 않는 차 한 잔 마시는 일이나 농사를 짓는 일을 통해 나의 본질을 찾고 부처가 되는 가르침이다.
정찬주씨가 쓰고 미들하우스에서 발행한 중국 10대 선사 선기행(禪紀行)에 관한 책인 <뜰 앞의 잣나무> 읽었다. 10대 조사들의 얘기는 단편적으로 여러 차례 들어본 얘기들이지만 신화적인 요소 때문에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같이 듣고 볼 때마다 새롭고 감회로 와 여운이 오래 남는다.
선불교(禪佛敎)의 근원지인 중국을 방문하여 달마로부터 혜능까지 6대 조사와 마조, 조주, 운문, 임제 4분의 선승을 포함하여 열 분 선사들의 유적을 찾아 순례하는 내용을 담은 산문 형태의 기행문이다.
남천국 국왕의 셋째 왕자였던 달마대사는 중국에 선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서기 520-525년 사이 해로를 통하여 중국의 광동성으로 입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는 이미 달마 이전 400~600여 년 전에 육로를 통해 중국에 전파 되었으며 달마의 입국 당시에는 기복신앙 형태의 불교가 번성하여 유가, 도가와 함께 중국인들의 삶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책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는 29대 조사이신 달마대사가 새롭게 중국에 전파한 공(空)사상을 종지로 하는 선불교의 전파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 중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적 종파인 조계종(曹溪宗)이 혜능대사의 제자인 도의국사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래된다.
아인슈타인의 얘기를 빈다면 “내가 아는 한 허공을 본 사람은 석가모니 부처님밖에 없다”라고 했다. 공의 실체를 본다는 의미를 극히 제한하여 표현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으나 중국 선종의 6 조사와 4 선사들의 공을 보기 위한 수행의 과정을 읽고 있노라면 이 분들이 왜, 어떻게 자기 내면의 벽과 맞서 싸웠는지 그 원인과 방법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중국 10대 조사들의 행적을 통해 간화선(看話禪)의 원류를 확인하고 그 맥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여(如如)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수시로 정독하기에는 그 량이 많다고 생각되어 10분 정도 시간을 할애하여 그 분들의 가르침을 상기하고 청정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메모 형태로 정리해 봤다.
안심법문(安心法問) 초조 달마
명나라 시대 대신들은 조회에 들어갈 때 학의 머리에 들어있는 극독중의 극독인 학정홍이라는 독이 묻힌 길고 좁은 나무형태의 흘판을 들고 참석하였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극형이 내려지면 흘판에 묻힌 학정홍을 핥아 그 자리에서 거꾸러져 죽어야 했다.
달마가 만난 황제가 절실한 불교신자인 양무제일지라도 황제의 권위는 두려움 그 자체이다. 양 나라 황제 무제와 달마 간에 묻고, 답하는 내용을 읽다 보면 달마의 생사를 초월한 의연한 모습이 생생히 부각된다.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 많은 절을 짓고, 경을 소개하고, 스님들에게 도첩을 내린 것이 셀 수 없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소”
“그러한 공덕들은 윤회 속에 흩어지고 말 그림자같이 형태가 없는 공덕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이요”
“청정한 지혜는 미묘하고 온전해서 그 자체는 공적 합니다. 이 같은 공덕은 세간에서 구해도 구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근본이 되는 진리라는 것이요?”
“텅 비어 있으니 성스럽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
“모릅니다.”
황제를 자극한 달마는 천주산에 은거해야 했으며 뤄양을 거쳐 소림사로 숨어들어 9년간 면벽수행을 한다. 이러한 대사도 수행하다 졸리면 눈썹을 뽑아 던졌고 눈썹이 던져진 자리에는 차나무가 자라났단다. 추후 중국 선종의 상징이 되는 차(茶)와 선(禪)이 인연을 맺는 사연이다.
후에 공(空)과 무아(無我)를 일러준 달마대사의 법을 깨달은 무제는 달마대사를 다시 만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추모하는 심정을 달랜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만나도 만나지 못하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후회스럽고 한스럽구나.
견지불견 見之不見
봉지불봉 逢之不逢
고지금지 古之今之
회지근지 悔之根之
참회법문(懺悔法問) 이조 혜가(487-593)
소림사 경내에는 입설정(立雪亭)으로 명명된 건물이 있다. 초조 달마와 이조 혜가가 처음 만난 인연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석승가라고 불리는 혜가는 출가 전에 유학에 정통하고 특히 시경과 역경에 정통한 대학자였다. 이러한 지식들은 삶의 지혜와 처세를 위한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인 생사윤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을 알고 구도의 길을 찾아 30세에 향산사로 출가한다.
달마에 의한 선불교가 전파되기 이전 이미 중국에는 유교, 도교와 더불어 불교도 기복 신앙의 형태로 중국인들 삶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호국과 기복신앙 형태의 불교에 출가한 혜가는 궁극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수행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고뇌와 번민을 계속하던 중 꿈에 현몽을 받아 숭산 소림사의 달마를 찾아 나선다.
스승인 보정선사의 허가를 얻어 향산사에서 단숨에 숭산의 달마동굴 앞에 섰지만 달마는 이러한 혜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동굴 앞을 지킨 지 3일이 지났다. 그사이 눈이 내려 눈이 발목을 덮고 다음날 새벽이 되자 눈은 어느덧 무릎을 덮고 있었다.
“눈 속에 서서 그대는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 가?”
“여러 중생을 널리 제도할 수 있는 도를 향해 나아갈 참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부처님의 위 없는 도는 여러 겁을 부지런히 닦았더라도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해야 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참아야 하거늘, 어찌 작은 공덕과 얇은 지혜를 소지한자가 경솔한 행동과 교만한 마음으로 참 법을 바라는가? 헛수고만 할 뿐이니 돌아가라”
이미 되돌아 갈 수 없는 아라한 경지에 이른 혜가는
“부처님도 도를 구할 때 뼈를 깨뜨려서 골수를 빼내고 피를 뽑아서 주린 이를 구하고 벼랑에서 떨어진 호랑이에게 자신을 먹이로 던져주었다. 부처님이 이러하거늘 나는 어떠한가!”
하면서 혜가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팔 한쪽을 잘랐다.
이에 달마는 “부처님도 처음 도를 구하실 때는 몸을 던지셨다. 그대가 팔 하나를 끊으면서 법을 구하니 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구나”
“부처님의 심인(心印)은 남에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법의 진수인 이입사행(二入四行)수행방법을 전수한다. 이입(二入)이란 도와 실천을 통해 법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며 사행(四行)이란 원망을 지었으니 억울함을 참고, 무슨 일이든 인연으로 받아드리며, 사물을 탐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진리대로 살라는 것이다. 언뜻 보면 당연해 보이지만 골수와 같은 진리의 말씀에 머리가 숙여진다.
혜가는 달마를 스승으로 모시고 달마동굴 가까이 토굴을 짓고 수행하면서 많은 선문답을 통해 달마의 도를 얻으려고 했지만 3년이 지나도록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자기의 심정을 고백한다.
“스승이시어 마음이 불안합니다. 부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가지고 오라. 편안하게 해주리라.”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미 나는 그대의 마음을 편안케 하였다.”
안심법문(安心法問)으로 인해 혜가는 무심(無心)을 얻었으며 달마로부터 의발과 전법계를 전수받고 선종의 이조가 된다.
훗날 혜가는 문둥병이 걸려 찾아온 40대 거사의 법그릇을 알아본다. 머리를 깎아주고 보물 찬(璨)자를 써 승찬(僧璨)으로 이름 지어주고 제자를 삼아 6동안 수행케 한다.
때가 이르자 승찬에게 전법계와 의발을 전수하여 곧 닥칠 국난을 피하도록 더 깊은 산골로 피난시키고 자신은 저잣거리로 나와 무애(無礙)의 법을 편다. 기복 불교를 믿는 무리들의 시기와 모함으로 극형을 받아 107세로 생을 마감한다. 이를 혜가는 자신이 전생에 지은 묵은 허물을 벗기 위한 인과로 받아드린다.
신심법문(信心法問) 삼조 승찬(527-626)
이조 혜가에게서 달마의 안심법문과 비슷한 형태의 참회법문으로 깨달음을 얻고 의발과 법을 전수받은 승찬은 환공산과 사공산을 오가며 산곡사에서 매일 걸식하며 법을 펼 때를 기다린다. 외진 곳에 위치하는 산곡사에 약탈 온 불한당을 무술로 제압하고 그 인연으로 산곡사에 머물며 법을 편다.
삼조 승찬 역시 달마, 혜가와 같이 동굴에 기거하면서 의식주의 탐욕을 끊어버린 상태에서 심신을 닦는 철저한 두타행을 실천하면서 제자들에게 신심명(信心銘)을 법문하였다.
신심명(信心銘)은 삼조 승찬대사가 저술한 146사언절구 584자로 되어있는 글이다. 도를 향해 나아가는 길을 40대대(四十對對)로 갖추어 설명한다. 대대(對對)란 곧 미워함과 사랑함(憎愛). 거스름과 따름(逆順), 옳고 그름[是非] 등등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상대 개념이다.
간단한 법문이지만 대대(對對)의 양변을 여윈 중도법으로 선(禪)이나 교(敎)를 통합한 불교의 근본 사상이다. 팔만대장경의 심오한 불법도리와 1천7백 공안의 격외도리(格外道理)를 포함하는 유일무이한 글이라는 평을 받는다.
삼조 승찬은 수 나라 문제 양견의 숭불정책에 힘입어 삼조사에서 활발한 교화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 즈음 훗날 사조가 될 도신이 14세의 사미승으로 승찬을 찾아와 나눈 대화가 ‘해탈법문’이다.
“무엇이 부처 입니까?”
“그대는 지금 무슨 마음인가?”
“무심(無心)입니다.”
“그대가 무심이라면 부처님께서는 무슨 마음이었겠느냐?
“자비로우신 스님이시어, 저에게 해탈법문을 들려주십시오.”
“누가 그대를 속박 했다는 말인가?”
“아무도 속박한 이가 없습니다.”
“아무도 속박한 이가 없다면 그대는 이미 해탈한 사람이다. 어찌 다시 해탈을 구하려 하는가.”
이에 도신은 깨달음을 얻고 승찬의 제자가 되어 9년 동안 모시며 법기를 키운다. 때가 이르자 승찬은 도신에게 의발을 전수하고 전법계를 내려 도신을 사조로 삼고 자신은 서서 입적하는 도력을 보인다. 삼조 승찬대사가 서서 입적한 자리에는 입화보탑이 자리하고 있다.
간심법문(看心法問) 사조 도신(580-651)
도신선사가 쌍봉산에 사조사를 세운 유래는 자못 흥미롭다. 새로운 절터를 찾는 도신에게 쌍봉산의 상서로운 기운은 감탄을 금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며칠씩 금식하며 불경을 외우고 목어를 두드리니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한 노인이 다가와 그 사연을 물었다.
“스님, 왜 여기서 불경을 외우고 목어를 두드리십니까?”
“가사 한 벌 놓을 만한 땅에 절을 짓고 싶습니다.”
“가사 한 벌의 땅 정도쯤이야, 좋습니다. 내가 시주하겠습니다.”
도신이 던진 가사 한 벌이 덮은 땅은 놀랍게도 사방 십 리에 미치었다.
마침내 사조 도신은 쌍봉산 자락에 사조사를 짓고 농토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불법을 전파하여 크게 선종의 문을 열었는데 한 때 사조사의 수행 대중이 5백 명에 이르렀다.
대사는 선과 노동은 하나라는 선농일여(禪農一如)사상을 주장하고 몸소 농사와 참선을 병행하는 농선쌍수(農禪雙修)를 실천하기 위하여 탁발에 의존하던 종래의 공양방식을 지향하고 사조사 주변의 농토를 개량하여 자급자족 하는 선풍을 확립하였다.
스님들의 건전한 정신과 신체를 단련시켰고 관의 도움이나 백성들의 시주 없이 대중살림이 가능해져 세금을 줄일 수 있었다. 대사는 한 승려가 먹을 거리를 얻어 평생 굶주림을 면하려면 좌선을 근본으로 수행하되 15년은 노동을 병행하여야만 된다고 하였으며 이는 훗날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고 하신 백장선사의 가르침보다 백년이나 앞선 선지식의 지혜이다.
대사는 훗날 간화선 수행법으로 발전한, 부처가 곧 마음이라는 즉 마음 밖에 달리 부처가 없다는 간심법문(看心法問)을 폈다. 간심법문에서는 마음의 본체를 알고, 마음의 작용을 안 다음, 마음이 항상 깨어 있도록 하며, 신체가 공적(空寂)함을 관찰하면서, 하나를 지켜 흔들림이 없게 한다면 마음의 실체를 볼 수 있다는 법문이다.
한편으로 사조사 도신은 의술에 능했다. 당 태종 이세민의 옴을 치료한 대사는 상을 내리기 위한 황제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네 번째, “이번에도 도신이 응하지 않으면 목을 가져오라”는 명을 받은 흠차대신의 칼 앞에 목을 내밀며 입궐을 거절하여 흠차대신을 빈손으로 보냈다. 이러한 사실은 초조 달마대사의 ‘무공덕!’ 일갈과 같은 맥락의 수행자 위의(威儀)일 것이다.
수심법문(守心 法問) 오조 홍인(601-674)
홍인(601-674)은 전생부터 ‘불법을 펴 보이겠다.’라는 원력이 있었다. 그에 대한 사연은 설화 같은 느낌이 드나 홍인의 친모 주씨 전각이 오조사 경내에 설치되어 봉안되고 있는 것으로 미뤄 설화로만 치부해 버리기에는 석연찮다.
사조 도신선사가 파두산에서 정진하고 있을 때 근처에 이름 없는 한 노승이 살고 있었다. 노승은 시간이 나는 데로 소나무를 즐겨 심어 재송도자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어느 날 이 노승이 도신을 찾아와 “불법을 깨쳐 널리 펴 보이겠다.”며 도신에게 설법을 청하였다. 도신은 “그대는 너무 늙었으니 다시 어린애로 태어나 다시 찾아오시오”하면서 노승을 돌려보냈다.
도신선사에게 설법을 거절당한 노승은 다시 어린애로 태어나기 위해 시냇가에서 빨래하는 처녀를 선택하고, 처녀에게 다가가 하룻밤 묵어갈 것을 청했다. 처녀의 아버지의 승낙을 받아 노승은 하룻밤 처녀의 집에 묵어간 것뿐 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처녀는 임신을 했고, 이로 인해 집에서 쫓겨났고, 갖은 고생 끝에 사내아기를 출산을 하게 된다.
아기가 자라 말을 하게 되니 처녀는 아기에게 노승과의 인연을 얘기해주며 동내사람들이 놀리는 무성(無性)이 아니라 불성(佛性)이라고 알려준다. 7살이 되던 해 인연에 따라 도신을 만나 스승과 제자로 전생에 못 이룬 연을 맺는다.
도신은 길을 가다 7살 동자에게서 전생에 자기가 돌려보낸 노승을 발견하고 말을 건넨다.
“ 네 성이 무엇이냐?”
“성의 있으나 예사 성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성이더냐?”
“불성(佛性)입니다.”
“네게는 성이 없던가?”
“성이 공하기 때문입니다.
대화로 어린 동자의 전생을 확인하고 자신의 멸도 후 20년이 지나면 어린 동자에 의해 크게 불사가 이뤄 질 것을 예언한다. 어린 동자는 20년 동안 스승의 종지인 농선쌍수를 충실히 수행하고 절의 일을 감독하고 챙겨 스승으로부터 의발과 법을 전해 받아 선종의 오조가 된다.
홍인의 가르침 핵심은 수심법문(守心法問)이다. 스승 도신의 수일불이(守一不二)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본래 마음을 지켜 행주좌와(行住坐臥)중에도 항상 본래의 진심을 지키어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마음을 지켜 일체만법이 스스로 마음을 떠나지 않도록 간직하는 하는 것이다.
홍인대사는 스승의 예언대로 크게 불사를 일으켜 10대 제자를 양성하여 오조사가 선의 황금시대로 들어서게 하는 발원지 같은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선의 양대 산맥인 신수의 북종선과 혜능의 남종선의 산파와 같은 역할이다.
돈오선법(頓悟禪法) 육조 혜능(637-713)
날품을 빌어 살아 가는 혜능은 어느 날 길을 가다 안도성이라는 사람이 독송하는 금강경의‘마땅히 머문바 없이 마음을 내라(응무소주 應無所住 이생기심 而生基心)’구절을 듣고 밝아지는 마음을 느껴 안도성에게 출처를 묻고 은화 1백 량을 보시 받아 노모께 드리고 빙모산으로 홍인을 찾아가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는다.
홍인의 10대 제자 중 가장 탁월한 신수을 제치고 방앗간 사미승이 의발과 참법을 전수 받은 과정은 10대 선사의 얘기 중 절정과 같은 얘기이다. 항상 들어도 혜능의 선의 정의에 경외심과 신심을 일어난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갈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
신시보리수 身是菩提樹
심여명경대 心如明鏡臺
시시권불식 時時勸拂拭
물사약진준 勿使惹塵埈
라는 신수의 게송에, 무지렁이 혜능은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아니고
맑은 거울의 받침대도 아니다.
깨달음은 상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이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
보리본무수 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 明鏡亦非臺
본래무일물 本來無一物
하처야진준 何處惹塵埈
라는 게송으로, 홍인으로부터 돈오(頓悟)를 인가 받는다. 의발과 전법게를 전수 받으나 워낙 신분이 미천하여 시기하는 무리들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스승의 배려로 오조사를 탈출하여 15년을 산속에서 사냥꾼들의 속에 숨어 살고 또 3년을 떠돌며 때를 기다린다.
40세에 이르러 법성사로 나와 법을 편다. 이 때가 오조 홍인으로부터 17년이 지난 후이며, 생보살(生菩薩)로 추앙 받는 남종선의 마지막 조사이다. 혜능 이후 선종이 크게 번창하여 특정 제자에게 달마의 의발을 전수할 수 없었다. 한편 신수는 북위에 이르러 북종선의 조사가 된다.
혜능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으로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으며, 무주(無主)로 본(本)을 삼았다. 무념이란 생각에서 생각이 없음이요. 무상이란 상에서 상을 여윔이요.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밉거나 곱거나, 친하거나 모질거나, 거친 말을 하거나, 속이고 다툼을 당할 때 그 모두가 공(空)임을 인식하여 대들거나 해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근본 교리는 혜능 때 완성되어 천하에 두루 퍼져 생보살의 도를 다하는 공덕으로 참법을 완성한다.
심지법문(心地 法問) 마조 도일(709-788)
마조는 혜능의 제자인 남악의 제자로 계보상 정리되어있지만 신라왕자 출신인 홍인의 제자 무상스님의 두타수행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종밀스님(780-841)은 기록하고 있다.
남악 회양(칠조)이 마조 도일(팔조)에게 심인을 전해주는 마경대(魔境臺)의 얘기는 중생들에게 좌선의 의미를 올곧게 설명하고 있다.
형악의 전법원에서 마조가 좌선하고 있을 때 마조의 법그릇을 알아 본 남악이 마도에게 묻는다.
“그대는 왜 좌선을 하고 있는가?”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남악이 부근에서 벽돌 하나를 주워 숫돌에 갈기 시작하였다.
“벽돌을 갈아서 무엇을 하실 겁니까?”
“거울을 만들까 하네”
“벽돌이 거울이 될 리가 있습니까?”
이에 남악은 일갈(一喝)한다
“벽돌이 거울이 될 수 없듯이 좌선으로 부처가 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조의 질문에 남악은 심지법문(心地法問)으로 마조의 마음을 연다.
마음은 모든 종자를 갖고 있어
촉촉한 비를 만나면 어김없이 싹이 튼다.
삼매의 꽃은 모습이 없는데
무엇이 파괴 되고 또 무엇이 이뤄지랴.
심지함제종 心地含諸種
우택실개맹 雨澤悉皆萌
삼매화무상 三昧花無相
하괴복하성 何塊復何成
마조의 입실제자는 서당, 백장 남전 등을 포함화여 139명에 이르고 이들 모두 각자 나름대로 일종의 종주를 이뤘으니 마조의 가르침이야말로 천하의 선문을 환하게 밝힌 빛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 농선병행(農禪竝行) 운문 문언(? ~ 949)
운문은 광동성 소주의 운문산 광봉원을 창시한 문헌 화상을 말한다. 설봉 의봉의 제자이며 5가7종의 하나인 운문종의 개조이다.
성철스님은 중국 선종 5가의 종풍(宗風)을 위앙의 근엄함, 조동의 세밀함, 임제의 통쾌함, 운문의 고고함, 법안의 간명함으로 평했다. 이를 통해 다선일미, 농선병행의 운문의 선풍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 학인이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간시궐! (乾屎橛)”
간시궐은 대나무를 얇게 만들어 대변 후 밑을 닦는데 사용했던 물건이다. 부처가 무엇이냐고 묻는 학승의 정신 나간 소리에 ‘마른 똥막대’란 말로 꾸짖어 학승이 본 마음을 찾도록 불호령을 내렸다.
또, 석가모니 부처가 태어난 직후 한 손으로 하늘을,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한 것에 대해 선사는 “만일 당시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몽둥이로 때려죽여서 개의 먹이로 주었을 것이다.”라는 극단적인 평으로 선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선사는 말과 글을 부처를 죽이는 독약처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도를 얻는 길은 오직 사소한 일과 중요한 일의 분별없는 참선을 통해 가능하며 우주 만물의 이치는 다반사(茶飯事)같이 작고 사소한 일 일지라도 깨어있고 집중하는 마음만이 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운문은 찾아온 중에게
“요즈음 어디 있다 왔나?”
“서선 화상에게서 왔습니다.”
“서선 화상이 요즈음 무슨 말을 했나?”
운문의 물음에 중은 두 손을 쭉 내밀었다.
이에 운문은 중을 한대 때렸다.
“제게도 할말이 있습니다.”
역전을 노리는 중이 운문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운문이 두 손을 쭉 내밀었다. 중은 아무런 대꾸를 못했고 운문은 다시 중을 한대 더 때렸다.
상대의 마음을 훤히 들어다 보고 있는 선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평상심(平常心) 조주 종심(778~897)
조주 스님은 남전(南泉)선사의 문인이다. 스님은 관음원에 살던 종심선사(從諗禪師)이며 산동성 조주 사람이다.
조주는 선문답과 화두를 많이 남긴 스님이다. 중생들이 진로문제로 스승과 대화를 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스승님 제가 법을 구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중생을 위해 가르침을 펴야 하겠지”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에게 이미 깨달음의 인연이 닿아 곧 깨달음의 경지에 들겠네”
그러나 스승인 남전선사와 조주화상은
“불법이 있음을 아는 이는 어디로 갑니까?”
“산 밑 시주 집에 한 마리 물소가 되는 거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밤 삼경에 달이 창에 비쳤다.”
선문답으로 마음을 통하고 전했다.
나는 선문답이란 난해한 암호문자 정도로 여겼지만 진정한 의미를 알 것 같으면서 한 점 보태거나 뺄 수 없는 명쾌함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조주 나이 20세 즈음, 깨달음을 얻을 때 스승 남전선사와 나눈 선문답이다.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의 마음이 도다.”
“그래도 닦아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든 하려 하면 그대로 어긋나 버린다.”
“하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도를 알겠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헛된 망각이며 모른다는 것은 아무런 지각도 없는 것이다. 만약 의심할 것 없는 도를 진정으로 통달한다면 툭 트여서 넓은 것이니, 어찌 애써 시비를 따지겠느냐?”
많은 도에 관한 정의와 도를 묘사한 글과 말을 읽고 들었건만 아직도 무지몽매한 어둠을 헤매고 있으니 도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확실한 모양이다. 평상심을 잘 간직해야겠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라고 조주선사는 답하였다.
“도는 닦을 것이 없으니 다만 물들지 말라”는 스님의 가르침으로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의미를 찾아야겠다.
무위진인(無位眞人) 임제 의현(? ~ 867)
임제선사의 휘는 의현 속성은 형씨로 조주 남화 사람이다. 처음 출가 후 교조의 전통에 따라 경과 율을 배웠다. 교종의 한계를 느낀 임제는 선지식을 찾아 백장선사의 법맥을 이어온 황벽선사를 만나 수행하고 인가를 받았다. 다음 대우선사를 친견하여 법을 전수받았다.
6조사 혜능 때까지 주로 양자강 이남에 머물던 선종은 차나 ‘한잔 며셔라(끽다거[喫茶去])’로 교화한 조주와 ‘참사람(무위진인[無位眞人])’을 외치는 임제의 선풍에 의해 선불교는 하북은 물론 산동의 중생들에게까지 이른다.
임제종은 중국의 5가 7종 중 우리나라에 전해져 법맥을 이어온 종파이며 우리나라 대표종단인 조계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종파이다. 조계종의 종조인 도의국사에게 법맥을 전한 서당과 지장선사가 마조-백장-황벽으로 이어지는 홍주종의 선사들이며 임제와 같은 법통이다. 또, 그 후 1300년대에 조계종의 중흥조인 고려 말 태고 보우국사가 임제선사의 18대 법손인 석옥, 청공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았기 때문이다.
임제가 황벽을 만나 깨달음을 얻는 과정 또한 과연 선사들이나 하는 행위들이다라는 생각을 갖는다.
황벽은 문하의 수행자들에게 설법할 때, 대우스님을 소개한다. 이를 들은 임제는 대우를 만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찾아간다. 대우의 초암에서 임제는 자기의 유식함을 자랑하기 위해 저녁 내 유가론과 유식에 관한 애기를 한다.
“ 노승이 홀로 살고 있는 초막까지 먼 길을 찾아온 것을 생각하여 하룻밤 묵어가게 허락했거늘, 그대는 내 앞에서 부끄러움도 없이 고약한 냄새나는 방귀만 뀌어대는가!”
하면서 방망이로 임제를 후려치면서 쫓아버렸다. 임제의 자초지종을 들은 황벽은
“대우선사께서 그대를 만나신 것을 이글거리는 불덩이 같이 좋아했거늘 그대는 헛되이 왔다 갔다만 하는가?”
황벽에게도 혼이 난 임제는 다시 대우를 찾아간다.
“엊그제는 부끄러움도 모르더니 어찌하여 다시 찾아왔는가?”
후려치는 대우의 방망이를 피해 다시 황벽에게 되돌아오는 길에 임제는 대우의 방망이 뜻을 헤아리게 된다.
“이번에는 헛되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가?” 황벽의 물음에
“한 방망이로 부처의 경계에 들었습니다(일봉하입불경계 一棒下入佛境界).”
임제는 황벽과 대우선사들의 밖에서 알을 쪼아주는 가르침에 힘입어 깨달음의 알을 깨고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임제는 대우가 입적할 때까지 10년 동안 시봉하고 황벽에게 다시 돌아온다. 임제는 하루를 만 량 같이 쓰는 무위진인의 삶(시진출가 是眞出家 일소만량황금 日消萬兩黃金)을 살았다.
지금까지 10분 선사들의 깨달음을 얻는 과정과 삶과 가르침에 대해 달리는 말을 타고 산을 보는 격으로 살펴보았다. 깨달음의 과정, 삶 그리고 가르침의 방식이 열 분 다 다르지만 결국 모두 한가지를 가르치며 그곳을 지향하고 있다.
내가 만일 열분 선사들 중에 한분에게
“ 그 한 가지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라고 물어봐야
‘똥집 막대기’
‘뜰 앞의 잣나무’
아니
‘몽둥이 한방’ 일지도 몰라.
아놀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4855028/15967254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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