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어려운 때일수록 크고 바른 서원 세워야.....[들돌의 청법순례 열여덟 번째 인연] 전 고려대학교 철학과 연구교수 조준호 박사

수선님 2019. 12. 1. 13:24
어려운 때일수록 크고 바른 서원 세워야......
열여덟 번째 인연: 전 고려대학교 철학과 연구교수 조준호 박사
2012년 03월 23일 (금) 13:11:28

들돌   philipol@hanmail.net

오래잖은 불연 중에 참 신기하다 싶은 일이 생겼다.
불자가 되자 맘먹고 처음 찾아간 곳이 한 사찰의 불교대학이었는데
그곳에서 네 학기 강의를 듣는 동안에 만난 여러 강사들 중에
학교 밖에서 우연하게라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딱 한 사람뿐이었다.


재가불자들을 위한 한 강연회에서 나랑 같은 청중의 한 사람으로 만났던 것인데
그때도 천 만 불자 중에 오십 명이 모인 자리에서
얼굴을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여간 반갑고 신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다시 한 해가 지난 뒤,
뜻하지 않게 시작된 자신의 필명을 단 청법의 순례기를 쓰면서
앞에 만난 인물이 새로운 사람으로 이어주는 인연의 끈이
내 인연의 테두리 안에 들어있는 사람에게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언감생심 해보지도 않았고 해볼 수도 없었다.


늘 하던 말대로 내 불연이란 것이 그다지 깊지도 넓지도 않아서였다.

마곡사 각성 스님이 내 앞으로 내민 휴대전화 화면에
번호와 함께 뜬 ‘조준호’라는 이름을 보고 스님에게 물었었다.


“인도에서 공부하고 오신 분인가요?”
스님은 그런 내 물음에 오히려 놀라면서 내게 다시 물었다.
“아시는 분인가요?”
“예!”
반가움에 나도 몰래 큰 소리로 대답하고 보니 내가 마치 어린 학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사 회의탁자에 앉아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를 만났고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는 동안 강의를 듣던 때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작은 교실을 울리던 건강한 목소리가 여전해 보여 근황이 어떤가 물었다.


연구교수로서의 계약기간이 끝나는 해였던 지난 겨울,
방학을 송두리째 투자하여 미얀마를 다녀왔다고 했다.

▶ 인도에서 9년 넘게 공부하는 동안 아주 가깝게 지낸 미얀마 스님들이 있었다. 그분들은 초기불전의 암송과 이해는 물론이고, 함께 지내는 동안 수행자로서의 위의가 다른 곳에서 온 스님들과 많이 달랐다. 고향을 멀리 떠나와 다른 나라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지내면서도 그들의 말과 행동은 한 치 한 점 수행자로서 어그러짐이 없었다. 외국인학생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그분들에게 빠알리어 경전을 읽고 의미를 새기는 데 대해 같은 학생이면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도움이 아니라 가르침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때는 수행보다는 경전을 배우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 고등학생 시절의 선정 체험이 불교 공부를 시작하게 한 발단이 되었고, 대학에 들어간 뒤로도 태안사 시민선방에서의 참선수련을 통해 내 불안의 근원을 찾아내고 치유하게 되었으면서도, 기대가 지나치게 컸던 탓인지 재가자로서의 한계 같은 것을 느낀 뒤로는 공부의 방향을 인도 문화와 불교의 기원으로 선회하게 되었고, 그것이 인도로 유학을 떠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이번 미얀마 방문이 그때 인연을 맺은 분들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는지 물었다.


웃음과 함께 돌아온 대답은 잠시 다른 이야기부터 해보자는 것이었다.

▶ 인도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1999년 가을, 국내 한 학술지에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란 제목으로 논문을 실었다. 선정의 바탕 위에 위빠사나 수행이 이뤄지는 것이라는, 당시로는 새롭다 싶은 주장 때문이었는지 이에 대해 국내학계에서 상당히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사마타samatha를 바탕으로 하는 위빠사나vipassana 수행이라는 내 주장에 대해 위빠사는 사마타의 바탕 없이도 이뤄지는 것이라는 반대 주장이 일어난 때문이었다. 그런 반대 주장을 내는 쪽에서는 위빠사나가 사마타와 별개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배타적 관계일 수 있다고 보는 이들까지 있었다.

▲ 조준호 박사. 교수와 학생으로 맺어진 인연이 강연회에 참여한 재가불자의 인연으로 이어지더니 세 번째 만남은 다시 약이 될 한 말씀 듣는 자리로 이어졌다. 순례를 시작하고 나서 아는 얼굴을 만난 첫 번째 대담이었다.

 

 

수행이라는 공부를 아직 시작해보지도 못한 처지이기는 하지만
명상수행의 주류가 위빠사나로 옮겨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때가 있었고
‘명상’과 ‘수행’이 불교계 바깥에서 더 활성화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문외한으로서의 느낌도 이러한데 실제는 어떠한지를 물었다.

▶ 충분한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지금의 사정은 내가 공부를 마치고 인도에서 돌아왔을 때와도 많이 달라졌다. 그것은 위빠사나 명상 수행이 가진 장점, 즉 친절하고 자상하며 공부의 진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 면에서 기초수행의 단계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듯한 화두선의 수행전통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 지도 꽤 오래 되었다. 그 말은 곧 출가한 수행자들뿐만 아니라 재가자들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참여할 수 있는 새롭고 다양한 수행방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초기불전에 보면 실제로 다양한 수행방법이 제시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런 다양한 방법들로 수행자들의 근기와 시대적 요구에 대응해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통이 오히려 변화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위빠사나 명상수행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무엇보다 단계적인 진전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들고 있었고


변화와 진전을 인식할 수 있도록 지도와 안내가 병행된다는 것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듣다 보면 위빠사나는 마치 몸 빠르고 영민한 아웃복서 같다는 느낌이 드는 반면,
화두선은 마치 ‘한방’을 노리며 큰 주먹을 휘두르는 맷집 좋은 인파이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간화선이 최상승 수행법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모든 사람을 터질 때까지 옥죄는 방법 한 길로만 인도하는 전통 일변도의 수행 방법에는 문제 또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른 명상수행법이라면 적어도 잘못 가는 사람을 만들어내지는 않아야 할 것이고, 변화와 진보는 없다 하더라도 괴각乖角으로 일컬어지는 수행자를 만들어내는 일 또한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위빠사나명상수행의 열풍은 어쩌면 그런 답답한 수행전통의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한 강연회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참선을 처음 경험한 듯한 젊은 스님이 청중 속에 들어있었는데
강연을 마친 스님에게 젊은 스님이 물었다.
‘참선을 하는 동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앉아있나’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찌 해야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강사 스님의 대답이 상당히 어려웠다.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이나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그냥 앉아있어라.”
그 말을 듣는 젊은 스님의 얼굴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부처님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답을 들려주셨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 끝에 기뻐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 스님에게 물으러 갔다가 오히려 머리만 복잡해져 돌아왔다는 우스갯말 같은 푸념이 불자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 자비慈悲를 말하는 불교에서 답답한 마음으로 찾아온 이들에게 들려주는 답이 그렇게 어려워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분명 무슨 속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이나 하면서 오히려 시원히 알아듣지 못한 자신의 우둔함을 탓하게 하는 일이 어떻게 자비행과 보살행이 될 수 있겠는가.

다시 미얀마를 다녀온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오랜만에 가진 옛 친구와의 상봉도 상봉이려니와
부처님 시대에 행해진 수행이라는, 정통성에 대한 자부가 대단한 그곳에서
두 달 넘게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들을 들어보자 했다.

▶ 인도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십 년 넘는 세월을 지나는 동안, 불교인이라는 자부와 달리 불교인 답지 못하게 바깥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바삐 살았다. 어느 날 나를 보았더니 ‘사는 게 바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짐을 꾸려 떠났다. 부처님 시대의 수행 전통이 오롯하게 살아있다는 그곳에서 한동한 잊고 지낸 수행의 참맛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내가 가진 문제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밖에 있기 때문에 더욱 분명하게 우리 불교계가 처한 현상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본 우리의 불교는 삶에 깊게 뿌리 내린 생활밀착형 불교가 아니었다.

미얀마는 한 집 걸러서라는 말로도 모자라다 싶게 대부분의 가정에서 출가자를 배출하고 있었는데, 출가하지 못한 사람은 생애 중 짧은 기간만이라도 출가를 경험해보는 것을 큰 바람의 하나로 여긴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것이 많았는데,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 불법이 삶 속에 여실히 살아있었고, 출가자의 위의는 지계에 바탕한 청정한 삶에서 이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살아있는 불교의 척도로 출가자를 대하는 재가자의 태도를 보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수행자들의 삶을 아는 사람일수록 수행자에 대한 공경심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스님이 스님을 높이 보지 않고, 출가했다가 환속한 재가자가 출가자를 존경하지 않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미얀마에서는 출가자에 대한 재가자들의 존경과 신뢰가 한결같이 깍듯하고 여법했다. 왜 그런가는 그들의 삶을 보면 자연히 알 수 있었다. 출가자들이 지계의 삶을 훌륭하게 살아내고 있어서였다.

혹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달라진 데서
출가자에 대한 공경심이 바닥에 떨어진 이유를 찾기도 한다.


돈의 단위와 규모가 달라지고
돈을 쫓는 태도와 이유도 많이 변화되었으며
옛날처럼 출가한 수행자들의 앎과 삶을 부러워하지 않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출가자는 더 많은 유혹 앞에 서게 되었고
재가자는 실천 없는 앎을 늘려 오만해질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맞는 것이라면 잘살게 된 것이 그야말로 독이 되어버린 셈 아니겠는가.

▶ 돈을 쫓는 삶을 살다 보면 주위에 돈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다 보면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꼬이게 되고, 시를 좋아하다 보면 시를 읽는 사람들이 주위에 늘어나고, 봉사하는 현장을 누비다 보면 봉사가 삶인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나 우리는 욕먹는 지도자를 욕하는 사람들이 뽑아놓았다는 사실을 곧잘 잊는다. 우리가 배우고 아는 것과 달리 어느새 욕망을 추종하는 이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정작 우리 자신이 잘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신문기사에 달리는 댓글을 봐도 그렇다.


좋은 일 한 사람의 기사 밑에 달아두는 칭찬하는 글보다
욕 먹을 짓을 벌인 사람의 기사에 달리는 욕설이 훨씬 더 많은 것도
현대인이라 불리기 좋아하는 우리가 보여주는 마음의 실상이다.

▶ 미얀마는 출가자가 60만 명에 이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출가자들이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출가자들이 재가자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일을 저질러 문제가 되는 일은 거의 생기지 않는다. 확률적으로 보아도 쉽지 않은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출가자들의 철저한 지계의 삶이다. 그리고 출가자들의 청정한 삶을 통해 출가자와 재가자의 자연스러운 자리매김이 이뤄지는 것이다.

참선과 명상이 다르다면 모를까, 폐쇄일변도의 우리 선방의 모습과 달리 그곳에서는 출가자와 재가자가 함께 모여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출가자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세세히 알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지키지 어려운 것을 지켜내는 지계의 삶, 즉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재가자들이 자연스럽게 출가자들의 도덕적인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이 그러한가는 둘째치고 우리 나라에서는 타종교인들이 자신의 종교에 대해 갖는 자부심과 불자들이 불교도로서 갖는 자긍심이 다르게 느껴질 때가 많다. 대개의 경우, 불교도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도덕적 우위에 있다는 자각이 타종교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하지 못하다. 하다못해 말싸움이 벌어지더라도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에 집착하는 것이 불교도답지 못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우리 스스로 가르침과 배움과 실행에 대해 갖는 신뢰가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행공동체든 신앙공동체든 이름이나 형식과는 상관없이 마하시선원과 빠옥선원 두 곳에서 두 달 넘게 생활하면서 본 것은, 불교를 공부하면서 이상향처럼 생각해온 공동체가 이상 아닌 현실로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때아닌 환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곳에서는 돈으로 불법을 거래하지 말라는 분명한 내부 강령이 있어서 불전함을 두지 않는데도 재가자들의 보시가 그치지 않았고, 당연히 출가자들이 먹고 입고 자는 데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 미얀마 마하시선원에서 단기출가한 한국인 교사들의 탁발체험행렬(사진제공: 조준호)

 

 

종교에서 말하는 ‘가난’이란 단어가
헐벗고 굶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닐진대
승가가 가난을 두려워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넘쳐나는 돈으로 썩기 쉬운 힘을 가지려 하기보다
가난과 청정한 삶으로부터 생겨나는 도덕적 우위가 승가의 생명이라는 것을
승가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불자는 배운 불법에 따라 살면 그만이다.
불자라고 하면서 비불교적인 방법으로 사회와 이웃에 대해 대응하고 반응하는 것은
분명 불교를 멍들게 하는 짓일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 불교의 문제와 과제를 우리보다 못산다는 그곳에서 더 확연하게 볼 수 있었다. 불교가 세간과 출세간을 나누는 본래 의미는 세속과의 관계를 끊어버린다는 데 있지 않았다. 불자는 세간의 정치권력과 손잡지 않는다는 것이며, 세간의 경쟁과 경제논리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승가는 당연히 세속의 경제논리에 따라 수익을 내고 더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 경쟁력을 높이려는 의도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 학생은 ‘청화’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을 만나 불교를 공부하는 학자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법정’이라는 이름에 반하여 남들보다 많이 늦게 불자가 되었다.


덕 높은 수행자는 그렇게 다른 사람의 삶의 방향을 바꿔놓는다.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수행자 한 사람을 잃은 자리가 커 보인다면 그것이 문제다.


앞을 보면 ‘청화’ 같은 불자들이 줄을 이어 걸어가고
돌아보면 ‘법정’ 같은 불도들이 길을 메울 듯 걸어오고 있어야 할 것이다.


‘청화’나 ‘법정’ 같은 이름에 주눅이 들 필요도 없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 값을 해내며 살고
부처님 제자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이라면
불자라는 이름 하나로도 떳떳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미얀마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온 것들을
이 땅에 어떻게 회향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남았다.


고칠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하고
이룰 것이 있으면 이뤄야 할 것인데
그것은 출가자나 재가자 한쪽만의 힘으로는 되지 않을 일이다.

승가는 청정한 수행자의 위의를 살려내고
재가자는 외호의 형식과 내용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인데
그런 것들이 출가자와 재가자의 협의와 협력 속에
구조와 장치의 개선과 도입을 통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세상은 갈수록 영악해지고
유혹의 손길은 더욱더 거세져서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수행 환경은 갈수록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말은 바른 수행의 필요성이 더욱 커질 때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난해졌을 때 부에 대한 욕구와 필요가 커지는 것처럼
어려워 보이는 지금이야말로 모든 불자들이 한마음으로 더 크고 강렬한 서원을 세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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