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림 바르빠(修行次第 中篇)』원문 번역본(原文飜譯本) 1.
범어(梵語, Samskrta)로는 ‘브하와나끄라마(Bhavanakrama)',
서장어(西藏語, Bod-yig)로는 ‘곰뻬림빠(sGom Pa'i Rim Pa)',
[한어(韓語)로는 ‘수행차제(修行次第)’라고 합니다.]
문수동자(文殊童子) [보살님]께 배례(拜禮) 올립니다.
[여기에] 대승 경전의 체계를 따라 입문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수행차제(修行次第)를 간추려서 설명하겠습니다. 이에
일체지(一切智)를 속히 성취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이것을 이루기 위한 원인(因)과 조건(緣)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일체지(一切智)는 원인(因) 없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며, [만일 원인 없이 일체지가 생길 수 있다면] 모든 것은 항상 일체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생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으로도 속박(束縛)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 어떤 것도 일체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 부분적으로 생기는 모든 사물(事物)은 원인에 의존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체지도 역시 때에 따라 부분적으로 [생기는] 것이며, 언제든지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곳에서나 그런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렇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원인(因)과 조건(緣)에 의존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원인(因)과 조건(緣)들 중에서도 바르고 완전한 것들에 의존해야 합니다. 잘못된 원인에 열중하면 아주 긴 시간이 흘러도 바라던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뿔(角)에서 우유를 짜는 것과 같습니다. 원인(因)을 모두 다 갖추지 않으면 결과는 생기지 않습니다. 씨앗(種字) 등에 무언가 하나라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싹 등의 결과는 생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과를 바란다면 바르고 완전한 원인과 조건들에 의존해야 합니다.
‘일체지(一切智)의 결과를 얻기 위한 원인(因)과 조건(緣)들은 무엇입니까?’라고 한다면, 대답하건대, 저 같은 [사람은] 맹인(盲人)과 같아서 그것들을 가르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세존(世尊)께서 실제 부처를 이루신(現證菩提) 후에 제자들에게 설하신 바와 같이 제가 세존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겠습니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비밀주(秘密主)의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라는 것은 자비(慈悲)를 근본으로 하여 생긴 것이고, 보리심(菩提心)이라는 원인(因)에서 생긴 것이며, 방편(方便)으로 구경원만(究竟圓滿)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지를 성취하기를 원한다면 자비와 보리심 그리고 방편, 이 세 가지 모두를 공부해야 합니다.
자비심(慈悲心)이 발동(發動)한 보살들은 모든 유정(有情)을 해탈(解脫)케 하려는 분명한 서원(誓願)을 세웁니다.
그런 다음, 자신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버림으로서, 너무나 행하기 어렵지만, 흐름을 끊지 않고 긴 세월을 쌓아야 하는 공덕(功德)과 지혜(智慧)의 자량(資糧)에 집중해 들어갑니다.
그렇게 해야 확실한 공덕(功德)과 지혜(智慧)의 자량(資糧)을 원만하게 구족(具足)할 수 있습니다. 자량(資糧)을 원만하게 구족(具足)하면 일체지(一切智)는 손 안에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일체지의 근본은 오직 자비(慈悲)뿐이며 가장 먼저 [이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불설법집경(佛說法集經)』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세존이시여, 보살은 너무 많은 법(法)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한 가지 법이라도 제대로 지니고 바르게 깨우친다면 부처의 모든 법은 그의 손 안에 있게 됩니다. 한 가지 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즉 대비심(大悲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비심(大悲心)을 모두 섭수(攝受)하신 불세존(佛世尊)들은 자리(自利)를 원만하게 모두 이루셨어도 끝내 유정(有情) 세계 안에 머무시며, 성문(聲聞)처럼 열반(涅槃)의 최고 적정처(寂靜處)에도 들지 않습니다. 유정을 살펴보시고 열반의 적정처를 불타는 철옥(鐵獄)으로 여겨 멀리 하시는 세존들께서 [그렇게] 무주열반(無住涅槃)하시는 원인(因)은 바로 대비심입니다.
이제 자비(慈悲)를 수행하는 단계에 처음 들어가 [어떻게] 시작하는 가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먼저 평등심(平等心)을 길러서, 모든 유정(有情)을 향한 집착(貪)과 분노(瞋恚)를 버릴 수 있는 마음(捨)의 심성(心性)을 계발(啓發)해야 합니다.
‘모든 유정(有情)은 안락(安樂)을 바라며 고통을 원치 않는다는 것과
무시이래(無始以來) 윤회해 온 유정이 수백 번을 나의 친인척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모두 헤아려 보면,
여기에 차별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어떤 것에는 아주 집착하고 어떤 것에는 아주 분노하였었던가,
그러므로 나는 모든 유정에게 마음을 평등하게 대하리라.’라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행동할 수 있도록 중립적인 상태에서 시작하며,
친구와 적에게도 역시 평등심(平等心)을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모든 유정(有情)에 대한 평등심(平等心)을 갖추고 나서 자애(慈愛)를 기릅니다.
자애의 물로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적시어 비옥한 대지(大地)처럼 [만들고 거기에] 자비(慈悲)의 씨앗을 심으면 아주 빠르게 흠 없이 잘 자랄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자애롭게 하고 자비를 길러야 합니다.
자비(慈悲)라는 것은 고통 받는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헤어나기를 바라는 성품(性品)입니다. 삼계(三界)의 모든 유정(有情)은 삼고(三苦: 苦苦, 變苦, 行苦)로 인해 갖가지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니, 모든 유정을 위해 수행해야 합니다. 즉 “이와 같이 잠시 동안 유정(有情)은 지옥 중생들이 되어 [그 고통들을 경험하며], 그들의 흐름(相續)을 끊지 못하고 긴 세월 동안 염열지옥(炎熱地獄) 등 갖가지 고통의 강물로 빠져들기만 하느니라.”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와 같이 아귀(餓鬼)들도 너무나 참기 힘든 배고픔과 갈증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며, 그] 고통의 불로 타버린 몸은 혹독한 고통의 경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으며, 축생(畜生)들 역시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위협하며 흉포(凶暴)하게 해치는 등 수 많은 고통의 성품만 드러냅니다. 사람들도 역시 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하여 서로 성내고 해치며 좋은 것과 헤어지고, 싫은 것과 만나며 가난해지는 등의 고통을 끊임없이 경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몇몇은 탐착(貪着) 등의 번뇌로 모든 것에 얽매여 마음을 속박하고, [또] 몇몇은 갖가지 전도된 견해로 분란을 일으키는데, 이 모든 것 역시 고통의 원인입니다.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이 [항상 함께]합니다.
천상계(天上界)의 [신]들 역시 모든 것이 변하는 고통(變苦)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또] 욕계천(欲界天)은 어떠합니까? 그들도 [역시] 언제나 죽음이라는 변화와 하락(下落:墮落) 등의 두려운 슬픔이 마음을 짓누르는데,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행하는 고통(行苦)의 특징은 업(業)과 번뇌의 성상(性相: 본성과 형상)으로 인한 의타기성(依他起性: 다른 것에 의지하여 생김)이며, 매 순간 흩어지는 성상(性相)으로 모든 중생에게 편재(遍在)합니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이 고통의 불꽃 안에 갇힌 것을 보고 내가 고통을 원치 않는 것처럼 다른 모든 이들 역시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즉 “아, 가엾다. 내 사랑하는 유정들의 이 모든 고통, 이들을 고통에서 어찌 벗어나게 할 수 있으랴.”라고 [모든 유정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겨 [모든 중생들이]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자비삼매(慈悲三昧)에 들거나, 어떠한 행위를 할 때도 언제나 모든 유정들을 위해 수행해야 합니다. [따라서] 먼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친인척들이 갖가지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보면서 수행해야 합니다.
그와 같이
유정의 평등성에 차별이 없음을 보고서,
모든 유정이 나의 친척이었다고 전부 헤아려 [편견 없이] 중립적인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친인척과 같은 자비심이 평등하게 머물면,
그것이 시방(十方)의 모든 중생을 위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애지중지하던 막내아들의 고통에 괴로워하던 어머니처럼,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이 저절로 일어나, 그와 같은 자비심이 모든 유정에게 평등하게 머무를 때, 그것을 원만(圓滿)이라고 하며 대비심(大悲心)이라는 이름 역시 얻게 됩니다.
자애(慈愛)를 기르는 것은 친인척부터 먼저 해야 하며, [그들이] 평안(平安)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와 같은 마음이] 점차 일반인과 적들에게 향하도록 수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비심을 익히고 나면, 점차 일체 유정을 구경(究竟)으로 이끌고자 하는 스스로의 힘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렇게 근본적인 자비심을 익히고 나면, [이제] 보리심(菩提心)을 길러야 합니다.
보리심(菩提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세속(世俗:相對) 보리심과 승의(勝義:絶對) 보리심 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세속 보리심은 자비심으로 일체 유정을 구경에 이르게 하려는 서원(誓願)으로, 중생을 유익하게 하고자 했던 부처님의 본원(本願)을 기억하며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열망하는 마음을 처음 일으키는 것입니다. 더불어 『계율품(戒律品)』에서 설하신 의궤(儀軌:儀禮)에서와 같이 보살계(菩薩戒)에 안주(安住)하시는 스승님(傳戒師)께 [계(戒)를 받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속적인 보리심을 일으키고 나서, 승의(勝義) 보리심을 일으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승의 보리심이란 출세간(出世間)의 희론(戱論)을 모두 떠나 극히 명확한 절대적 경계(境界)로서, 티 없고(無垢) 흔들림이 없으며(不動), 바람 없는 등불의 흐름과 같이 움직임이 없습니다.
이를 이루려면 언제나 소중하게 긴 세월을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의 요가(瑜伽)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즉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미륵(彌勒)이여, 모든 성문(聲聞) 보살(菩薩) 여래(如來)들의 선법(善法)은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모두가 지(止)와 관(觀)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 두 가지(止觀)는 모든 삼매(三昧)에 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요가 수행자는 언제나 확실하게 지(止)와 관(觀)에 의지해야 합니다. 즉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세존께서 설하신 것처럼, “내가 성문(聲聞) 보살(菩薩) 여래(如來)에게 가르친 다양한 유형의 삼매(三昧)는 무엇이든 그들 모두가 지(止)와 관(觀)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지(止) 하나에만 익숙해져서는 요가 수행자들의 장애를 끊기가 어려우며, 잠시 번뇌 망상(煩惱妄想)을 억누를 수 있을 뿐입니다. 즉 지혜의 빛을 비추지 못하면 수면번뇌(睡眠煩惱)를 모두 제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수면번뇌(睡眠煩惱)를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선정(禪定)은 번뇌 망상을 가라앉히고, 지혜(智慧)는 수면번뇌(睡眠煩惱)를 완전히 소멸케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삼매왕경(聖三昧王經)』에서도,
“삼매(三昧)를 수행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생각(想)은 멈추지 않고
번뇌로 너무나 산란(散亂)하여
우닥(Udrak)이 정(定)에 든 것 같아라.”
“법무아(法無我)를 세세히 살피고
각각을 분별(分別)하여 수행하면,
그것이 열반의 결과를 위한 원인,
다른 인(因)이 무엇이든 그것으로는 멸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장(菩薩藏)』에서도, “어떤 이는 가르침(法)을 구체적으로 듣지 못했고, [또] 어떤 이는 성스러운 율경(律經)의 [내용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삼매(三昧)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자만심(自慢心)때문에 증상만(增上慢: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자만)에 떨어지며, 생(生)·노(老)·병(病)·사(死)·비통(悲痛)·탄식(歎息)·고통(苦痛)·불안(不安)·산란(散亂)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육도윤회(六道輪廻)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며 고통이 쌓이는 것(苦蘊)에서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나니, 그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른 것에 완전히 부합(符合:契合)하는 것(菩薩道)에 대한 [가르침]을 듣는 것이 노(老)·사(死)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장애를 제거하고 완전한 청정지혜(淸淨智慧)를 이루려고 한다면 지(止)에 안주(安住)하여 지혜를 수행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도 말씀하기를, “계율(戒律)에 안주(安住)하여 삼매(三昧)를 이루고, 삼매를 이루고 나서도 지혜를 수행해야 한다. 지혜로 청정지혜(淸淨智慧)를 이루고 나면 청정지혜가 계율을 원만하게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대승신심수행경(聖大乘信心修行經)』에서도, “선남자(善男子)여, 지혜를 가까이 하지 않으면 대승 보살들에 대한 신심(信心)이나, 대승에 대한 어떠한 것도 생기리라고 나는 말할 수 없다.”
“선남자(善男子)여,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대승 보살들에 대한 신심(信心)이나 대승에 대해서 생기는 것은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이 산란(散亂)하지 않는 마음으로 실제(利)와 법(法)을 바르게 사유(思惟)하여 생긴 것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止)와 멀어진 관(觀)만으로는, 요가 수행자의 마음은 경계(境界:對象)들로 산란해지게 되며, 바람 앞에 등불처럼 불안해 집니다. 따라서 지혜의 빛을 극명(克明)하게 드러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止)와 관(觀)] 두 가지를 똑같이(雙修) 의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불임열반기법주경(佛臨涅槃記法住經)』에서도, “성문(聲聞)들이 여래의 종성(種姓)을 볼 수 없는 것은 삼매(三昧) 부분이 강하고, 지혜 부분이 약하기 때문이다.”
“보살들이 [여래의 종성(種姓)]을 볼 수는 있지만 불분명한 것은, 지혜 부분은 강한 반면, 삼매(三昧)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래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지(止)와 관(觀)을 똑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하셨습니다.
지(止)의 힘으로,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분별(分別)의 바람에 의해 마음이 요동치지 않게 됩니다. 관(觀)으로 그릇된 견해의 모든 티끌을 제거함으로써 다른 것들에 의해 전도(顚倒)되지 않게 됩니다. 『월등경(月燈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지(止)의 힘으로 마음은 흔들리지 않게 되며, 관(觀)에 의해 산(山)처럼 되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止)와 관(觀)] 두 가지 모두를 기르는데, 머물러야 합니다.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552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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