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철학] 제32집(2011)
불교에서 업의 결정성과 지각작용
__결정론을 둘러싼 논의에서 불교의 관점은 무엇인가?__
(이 논문은 2011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의 학술논문 게재지원을 받았음.)
안성두/서울대학교 철학과 조교수
Ⅰ 들어가는 말.
Ⅱ 결정론을 둘러싼 논의와 불교철학.
Ⅲ 불교에서 심-신의 구분과 양립 가능론.
Ⅳ 생물학적 결정성과 심적 자유의 확대가능성.
Ⅴ 결론.
요약문
본고는 근대 이후 서양철학에서 제기된 결정론 내지 자유의지의 문제가
불교철학 내에서도 논의될 여지가 있는지를 검토하면서,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결정론-자유의지론의 논의가 인도불교 내의 문제제기나 그
해결책과 얼마만큼 연결될 수 있는지를 따져 보고자 했다. 필자의 주장의
요점은 결정론과 관련된 불교의 논의맥락이 서양철학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서양철학의 용어에 따라 불교의
대응하는 이론을 결정론이나 자유의지론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불교의
현상론적 분석에서 그대로 수용되거나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불교에서 심-신의 구분의 의의와 업의 의업으로서의 해석이 갖는 의미를
논의했다. 그리고 업의 재생과정에서의 생물학적 제약성을 집수 개념의
분석을 통해, 또 현재의 지각작용에서 업의 제약성과 동시에 심적 선택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참여자의 반응태도’의 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Ⅰ. 들어가는 말
최근 인도철학이나 불교철학의 논점들을 서양철학의 그것과 관련시켜
논의하고자 하는 시도가 국내외에서 점차 생겨나고 있다. 이런 접근
자체가 대표적인 서양철학자들에 의해서도 종종 언급되고 있음을 보면서,
인도철학의 문제제기와 논의방식이 점차 서양의 철학자들에 의해서도
검토되기 시작함을 보게 된다. 이런 경향은 국내에서 작업하는 서양철학
전공자들의 동양의 철학적 전통에 대한 관심이 증대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아직 유의미한동-서 비교철학의 연구는 드문 편이지만, 철학함이
자신들의 전통과 연결되어 수행되는 한에 있어 체화될 수 있다고 한다면,
비교철학적 논의는 서양철학의 토착화나 동양철학의 재인식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본고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서 근대 이후 서양철학에서 제기된
결정론 내지 자유의지의 문제가 불교철학 내에서도 논의되어 왔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래서 인도불교의 관점에서 결정론-자유의지론의
문제점을 검토하면서, 이에 대한 서양철학에서의 논의가 불교 내의
문제제기나 그 해결책과 얼마만큼 연결될 수 있는지를 따져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비교 작업에서 어느 하나의 전통이 가진 용어법을 다른
전통의 용어법으로 환원하여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전제되고
있고, 실제적으로 편의상 불교용어를 서양철학의 용어법으로 환원시켜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환원법이 불교철학의 논점을
이해하는 데는 편의하고 유용할 수는 있겠지만, 동시에 논의가 피상적이
되거나 아니면 전혀 엉뚱한 방식으로 흐를 위험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1)
1) 비교철학적 연구가 그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학계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연유도 두 전통에 모두 통효한 전문가가 매우 적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두
철학전통이 서로 다른 용어법을 사용해 왔기 때문에 이를 다른 하나의 용어법으로
치환시켜 맥락을 떠난 상태에서 논의할 경우 원래의 의미맥락과 동떨어진 해석이 될
소지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불교철학과 서양철학의 비교철학의 연구에서 환원의 위험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의 하나가 결정론이나 자유의지의 문제와 관련하여2)
불교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이들 분야에 대한 연구는
아직까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연구들은3) 주로 서양철학의
용어법에 의존하여 수행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더구나 불교자료를
포괄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대신에 자신의 연구에 적합한 자료를
선택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시더리츠(M. Siderits,
1987: 155ff.)는 불교가 양립론에 서 있다고 생각하며, 반면 그리피스(P. Griffiths,
1982: 287)는 불교의 업설이 강한 결정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자유선택의
가능성은 항시 열려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굿맨(C. Goodman, 2002: 369f.)은
불교가 결정론을 인정하고 자유의지를 부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정신적 훈련의
필요성과 도덕적 감성의 계발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필자는
그들의 논의가 무의미하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불교철학에서의 이들
주제는 자체적인 인도철학에서의 문제 맥락 속에서 보다 적절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따라서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가
불교철학에서 다른 방식으로 맥락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면 본 연구의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2) 불교철학의 입장이 결정론인가, 아니면 자유의지론인가 아니면 양립 가능론인가에 관한
현대 서구학자들의 여러 논의와 그 전거에 대해서는 Goodman(2002)의 논의에 도움 받았다.
3) 주요 연구들에 대해서는 참고문헌을 볼 것.
Ⅱ. 결정론을 둘러싼 논의와 불교철학
서양철학의 용어법에 따르면 결정론(determinism)은 생겨나는 모든
것이 과거의 원인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주장이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는 양립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인바겐(Peter van Inwagen)은
만일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가 선행하는 조건들에 의해, 즉 자연법칙이나
태어나기 이전의 어떤 사건들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 선행조건들에 대해 어떤 지배력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의 절대적 원천이라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결정론의
정의에 따르자면, 우리의 어떤 행위도 원인에 의해 결정된 한에 있어 자유롭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반면, 만일 우리가 행위의 선행조건들에 대해 어떤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결정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자유의지론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인바겐은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각기
행위의 인과성에 대한 요구와 행위의 도덕적 책임의 문제라는 두 가지 경우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양자는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정론을 인정한다면 행위의 인과성의 문제는 명백해지는 반면 도덕적 책임의
근거는 모호해지며, 반대로 자유의지론을 인정한다면 행위의 도덕적 책임은
물을 수 있지만, 행위의 인과성이 불투명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인과관계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주장은 물리적
인과의 세계에서는 타당할지 몰라도 내적인 심리적 영역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자연스런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욕을 했을 때, 그에게 분노하면서 같이 욕을 하거나 아니면 그를
분노를 참지 못하여 언젠가 지옥에 떨어질 업을 지은 가여운 존재로 여기는
것은 순전히 나의 심리적 영역에 속하는 결정이며,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선택과 결정은 자유롭다고 하는 것이 직관적으로 타당하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양철학에서 스트로슨(P.F. Strawson)이 “참여자의
반응태도(participant reactive attitude)”라고 불렀던 심리적 상황에서 강한
결정론이 직면하는 어려움일 것이다. 나아가 인바겐은 자신의 책을 도둑맞아
“그렇게 하는 것은 천한 일이야”라고 생각하며 분노하고 있는 어떤 결정론자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사실 그 결정론자는 도덕적 책임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도둑질에 대해 분노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도둑에 대해 분노하는 결정론자의 반응은 자유의지를 전제하지 않으면
설명하기 곤란한 일이 될 것이다. 물론 내면의 욕망이나 분노, 의욕작용이나
숙고 등의 심리적 반응 일반을 불가피한 무의식적 힘의 산물로서 해석하는
심층 심리학의 입장을 따른다면, 분노나 화와 같은 “참여자의 반응태도”조차
무의식적으로 프로그램된 것이라는 해석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사실
호스퍼스(Hospers)와 같은 심리철학자는 심리학적 결정론의 관점에서 인간은
무의식의 가여운 노예일 뿐 어떤 자유의지의 영역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4)
4) 안건훈(2006) p.96 참조.
이러한 결정론의 주장은 모든 행위에는 그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는 불교의
연기설과 상동하다고 보이며, 그런 한에서 불교의 입장을 강한 결정론으로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연기설이 원인없이 생겨나는 어떤 사태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분명 이런 주장은 결정론의 정의와 부합될 것이기 때문이다.
굿맨은 인과법칙의 강한 결정성을 인정하면서도 명상수행을 통해 감정이나
도덕적 책임과 같은 문제를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지만,5) 필자는 그의 해석이
과연 인과설의 올바른 이해에 기초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는 사건의 인과성과
심리학적 인과성을 분리시키고 있고, 전자는 결정론에 따르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따라서 수행의 필요성이나 수행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은
인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불교에서 내적 심리적 사태도
역시 인과법칙에 종속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에 결정론을 인정하면서도
감정이나 도덕행위의 (비결정론적) 가능성을 인정하는 그의 해석은 불교의
입장에서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5) Goodman(2002) pp.369f
반면에 불교의 입장을 자유의지론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고 보는 태도도
그다지 설득력 있지는 못하다. 물론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여러 해석상의
층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일반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적어도
결정론과 관련해서 “[행위의] 선행조건들에 대해 어떤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유의지라면, -그리고 이 설명은 런즈(D. D. Runes, 1983)의
철학사전의 ‘자유의지’ 정의 중에서 첫 번째 정의와 상응하는 데6)- 이것이
불교의 현존재의 분석에서 수용될 수 있을지는 부정적이다.
6) 안건훈(2006) p.37 참조.
실제로 우리는 자유의지의 부정에 대한 유사한 설명을 초기불전인
『無我相經』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붓다는 무아에 대한 첫 번째
논증7)으로서 우리가 오온에 대한 완전한 컨트롤, 즉 자재력(svatantriya)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오온을 자아라고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오온에 대한 자재력을 갖지 못한다는 이 논증은 다음과 같다. 붓다에
따르면 “만일 색(=신체)등이 자아라면 그것들은 고통(ābādha)으로 이끌지
말아야 하고, 또 색에 대해 ‘나의 색 등이 이렇게 되기를! 또는 이렇게 되지
말기를!’ 바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Vin I p.13). 여기서 붓다는 ‘오온에
대한 완전한 컨트롤’이라는 개념을 우파니샤드적 자아(ātman)의 속성과
관련하여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우리의 현존재를 구성하는 오온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에 대한 완전한 컨트롤이 가능하지 않다고 하는 설명이다.8)
왜냐하면 오온은 변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있으며, 이는 우리가 오온에 대한
완벽한 자재력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심신에 대한 완전한 컨트롤을 자유의지라고 한다면, 불교에서 이 논증은
무아설과 관련해 자유의지를 부정한 것이라고 보인다. 주목할 것은 이 경에서
우리의 신체 등이 전생의 업에 의해 고통에 종속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것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업에 따라 형성된 한에 있어 오온은
결코 자재하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업과 자재 개념은 반대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인다.9) 따라서 업의 일정한 영향 아래 있는 생명체에게 절대적
의미에서의 자유의지를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7) 이 논증이 제시된 최초의 경전은 ?無我相經?으로, 여기서의 무아의 논증에 대해서
Collins(982) pp.97-103; Gethin(1998) pp.136-8; Siderits(2007) pp.38 참조.
8) 하지만 이 경이 문제삼는 것은 그런 아트만이 존재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현상적
존재의 전체인 오온에게 자재가 결여되어 있기에 아트만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경은 아트만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 비존재에 대해서도 논하지 않는다.
9) 앞에서 나는 오온에 대한 완전한 컨트롤의 결여를 자재력의 결여로서 풀이했다. 이런
나의 해석은 후대 대승불교에서 붓다의 자재성이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업으로부터의
전적인 자유를 의미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서도 지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무아상경』에서의 ‘자재’ 개념이 생물학적인 제약, 즉 업적인 제약
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다는 것을 함축할 것이다. 하지만 현상적 존재자에게 그런 완전한
컨트롤의 상태가 업의 제약 때문에 인정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런 제약된 존재에게
아트만의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전에서 사용된
‘자재’ 개념이 업적 제약성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자유’ 개념과 통한다는 것은
대소승의 두 전통에서 모두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어느 것도 불교의 관점에서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아니라면, 불교적 ‘中道(madhyamā pratipad)’의 교설에 따라
우리는 양자를 두 극단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위의 『無我相經』에서 붓다는 우리가 오온에 대해 자재력이 없기 때문에
오온을 자아라고 간주할 수 없다는 논증을 보았는데, 여기서 오온을 심신
이원론으로 분석해서 관찰하는 방식이 주목된다. 안건훈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결정론과 자유의지론과 관련하여 중도의 교설의 단초를 심-신
이원론에서 찾으려는 우리의 생각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자유의지나 결정론에 관한 논의는 상당히는 형이상학적인 측면과 관련된
일종의 신념체계에 기초한다. … 무엇이 참으로 실재하는지에 관한
실재(reality)의 성질에 관해서도 두 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정신현상과 물질현상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현상들은 서로 다른 현상들이라는 점이다. 정신과 물질 현상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주장은,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에 관한 논전에서,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서로 양립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
반면에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상이한 두 종류의 세계가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분리된다는 주장은 양립 가능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안건훈 2006: 30-31)
양립 가능론(compatibilism)이 심신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안건훈의 지적은
개아를 심-신 이원론에 의거하여 파악하고 있는 불교에서도 기본적으로 타당할
것이라고 보인다.10) 필자는 불교에서 도덕적 책임이 귀속되는 자유의지의
존재와 인과적 결정론이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불교의
입장을 만일 서양철학의 용어법을 사용해 표현한다면 양립 가능론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유의지의 영역과 인과적 결정성의 영역은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 진리인식에서의 위계적인 층위11)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의미를 불교의 심-신 이원론의 설명에서 시작해 보자.
10) 본고는 이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문제는 이 전제를 증명하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비판은 수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필자에게는 이런 전제가 불교
일반에서 하나의 공리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1) Siderits(1987: 155ff.)는 이 문제를 승의제와 세속제의 二諦의 논리로서 처음으로 설명했다.
그는 세속제의 측면에서 개아가 구성요소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존재하지만,
승의제의 측면에서는 심리학적 결정론이 개아의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의 진리는 개아의
자유에 대해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Siderits의 설명에 대한 비판은 Goodman(2002:
365) 참조. 하지만 필자는 세속제의 측면에서 개아는 업의 생물학적 결정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승의제의 측면에서 자유의지가 허용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 IV장 참조.
Ⅲ. 불교에서 심-신의 구분과 양립 가능론
불교의 심-신 이원론이라고 한 것은 불교에서 자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심리적 요소인 名(nāman)과 물질요소인 色(rūpa)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은 受(feeling), 想(apperception), 行(volition),
識(sensation/perception)의 네 심리적 요소로 세분되어 색과 함께 오온을
구성한다. 이들 오온 외에 존재를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는 없으며, 각각의
요소는 자신만의 고유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각기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상이한 두 종류의 세계가 있음’을 오온설은 전제한다.
이런 상이한 두 세계 중에서 초기불교의 관점에 따르면 심리적 세계는
생명의 불가결한 특징으로 간주되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만이 정신적 요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12) 한역에서 有情, 또는 衆生으로 번역되고 있는,
생명을 가진 존재(sattva)는 無情物과 엄격히 구분된다. 모든 유정은 열반을
획득하기 전까지 심리적 요소를 수반하고 있으며 이것은 결코 물질적 요소와
동일시되거나 그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불교는 특히
가장 미세한 심리적 요소로서의 識(vijñāna)을 생명의 본질적 요소로 받아들인다.13)
12) 이러한 초기불교의 관점은 모든 것을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현대철학에서의
물리주의자의 입장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는 초기불교는 물론이고 이후
불교의 모든 학파에 의해 공유되는 관점이다. 나아가 유식학파는 객관적 존재는 실은
알라야식 내의 표상일 뿐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오히려 모든 것을 심적 이미지로 환원
시키고 있다.
13) 불교는 살아있기 위해 識과 체온, 命根(jīvitendriya)의 세 요소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식이 특히 윤회의 주체로서 기능한다는 것은 識의 또 다른 표현인 간다르바(gandharva)가
죽는 순간 몸을 떠나고 새로운 모태 속으로 들어가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는 개소(MN 38經)나
또는 해탈한 비구 고디카(Godhika)의 식을 마라가 헛되이 찾아다닌다는 기술(SN 4.23)에서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緣起(pratītyasamutpāda)설이 따르면 물질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이들 두 세계는 모두 인과적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업에 종속된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과적 법칙이 사건연쇄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한에 있어 우리는 연기설이나
연기법에 의거해서 사건의 인과관계를 설하는 업설을 서양철학의 용어법으로
결정론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업설이 소위 말하는 ‘결정론’에 과연 엄밀히 대응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은 선행하는 사건을 원인으로 가진다’라는 주장이
결정론이라면, 인도철학에서 업설을 인정하는 모든 학파는 예외없이 모두 이런
종류의 결정론에 해당될 것이며, 따라서 붓다의 업설을 숙명론자인 마칼리
고살라나 자이나 학파의 그것과 구별할 필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 맥락에서 붓다로 하여금 심-신의 구별의 도입하게끔 했던 당시의 정신적
상황을 재구성해 보는 것도 심-신의 구별이 가진 의미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심-신의 구분과 결정론과 유물론의 극복
불교사상사는 붓다 당시 인도에는 많은 사문(śramaṇa)들이 행위(업)와
행위의 결과(업과) 사이를 이어주는 업 개념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었고, 붓다는 이들의 해석에 대해 비판적이었음을 보여준다.14) 그들의
다양한 해석이 직간접적으로 심-신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명백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들을
질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며, 바로 여기에 불교가 심-신의 구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의 의미가 보다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14) ‘業(karma)’ 개념이 인도문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개념은 제의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초기 우파니샤드인
Bṛhadāraṇyaka-upaniṣad(4.4.6)에서 윤회의 원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 이래 인도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했다고 보인다. (인도의 여러 철학학파에서의 업의 교설과
그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Bronkhorst(2000)의 논의가 유용하다.) 이 개념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은 당시 자신들을 ‘沙門’이라고 부르던 불교와 소위 ‘육사외도’라고 불리던
비바라문 전통에 서 있는 수행자들에 의해서이다. 육사외도 중의 Ajita는 업의 타당성을
부정하고 있으며, 반면 Makkhali는 업을 강한 결정론을 넘어 숙명론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Sañjaya는 업에 대해 윤리적 회의주의의 입장을 표명하거나 또는
업을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했던 Nirgantha도 있다.그들의 주장은『沙門果經』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붓다는 이러한 그들의 주장과 대면하여 그들을 비판하면서
그의 업설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사문전통에 서 있는 두 명의 다른 사상가들의 업설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
마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는 당시 가장 강력했던 아지비카(Ājīvika)
전통의 대표자로서, 업의 작용이 윤회를 단축시키고 해탈을 촉진시키는데 있어
어떤 능력도 없다고 부정하면서 윤회와 해탈을 엄격히 선결정된 과정으로 주장한
결정론자로 알려져 있다. 『사문과경』(DN I 53)에 따르면 그는 “중생들의
염오에는 원인과 조건이 없다. 원인과 조건이 없이 중생들은 염오된다. 중생들의
청정에는 원인과 조건이 없다. 원인과 조건이 없이 중생들은 정화된다. …
모든 존재들은 힘이나 정진, 노력과 관계없이 운명(niyati)에 따라 [정해진]
존재상태에 따라 6종의 유형 속에서 고락을 감수한다.”거나 또는 “현자이든
우자이든 상관없이 모든 존재들은 정해진 시간이 오기 전에는 윤회과정을 바꿀
수 없다”(DN I 54)고 주장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인물은 아지타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이다. 그는
일종의 물질주의자로서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지수화풍공의 5대요소일
뿐이고 심리적 행위나 사회적 관계, 정신적 성취의 결과 등은 단지 공허한
소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보시도 없으며 제사도 없으며 고통과
즐거운 업의 이숙도 없다. 현세도 내세도 없으며 부도 모도 없고 화생도 없고
정행하는 아라한도 없다.”(DN I 55). 즉 심리적 요소로서의 업은 물질로 환원
될 뿐이다. “신체가 흩어진 후 현자이든 우자이든 소멸하며 단멸한다.” 따라서
실체로서의 5종의 물질요소의 상호작용을 통해 세계의 다양성이 생겨나는
것이고 삶이 끝난 후에 다시 신체는 5대로 환원하며 신체에 깃든 정신과 심리적
요소는 물질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는 한에 있어, 아지타는 현대적 의미에서
물리주의자로서 심리적 존재의 존재를 믿지 않거나 또는 심리적 요소들은
기껏해야 물질요소들의 부수현상(epiphenomena)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보인다.
마칼리는 선행하는 원인에 의해 결과가 미리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고 보는
점에서 매우 강한 결정론에 입각하고 있다.15) 윤회과정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에게 해탈은 어떤 정신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감축되거나 연장될 수
없다는 점이다. 비록 그의 교설에서 심-신은 구분되고 있지만, 물질과 마찬가지로
심리현상에도 어떤 자유의지의 영역은 인정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윤리적 행위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곤란할 것이며, 바로 이 점에 불교의 비판이 향해져 있다.
반면 아지타와 같은 유물론자의 경우, 심-신의 구분 자체가 근원적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모든 종류의 심리적 업 작용이 총체적으로 부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에서 유물론적 허무주의로 간주되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에 직면하여, 불교에서 심-신의 구별의 의의는, 개괄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칸트가 자연계와 예지계를 구분하면서 전자를 결정론적 구조로
이해하지만 후자에게는 자유의지를 귀속시키는 것처럼, 불교는 살아있는
존재(유정)를 물질적 요소로서의 色과 심리적 요소로서의 名의 복합체로
구분하면서, 후자에게만 정신적 자유의 여지, 즉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비록 전자는 결정론적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지만 후자는
이런 생물학적, 심리학적으로 구조화시키는 힘으로부터 벗어날 여지를 인정함으로써
물질적 존재(색)에게 피할 수 없는 결정론적 인과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이제 업이 심-신의 구조와 관련되어 하는 기능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점에서 불교가 양립 가능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를 보자.
2. 불교에서 업의 해석
업과 그 결과의 연결성이 이미 초기불교부터 확정적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것은
“업은 결코 소멸하지 않고 그것을 행한 사람에게 붙어 다닌다.”(Suttanipāta 666)는
설명이나 “의도적 행위는 모였다고 해도 그 결과를 낳기 전에는 결코 소진되지
않는다.”(ANV. 292)는 기술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한 업의 작용은 어떤
절대적 존재가 그렇게 명령해서 구조화된 것이 아니라 행위자체의 본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업이 산출한 결과는 보답이나 처벌이 아니다.16) 이것은 “브라만이나
마라도 업이 적절한 시기에 결과를 낳는 것을 방해할 능력이 없다.”(AN I. 172)는
붓다의 선언에서 잘 드러나 있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업설은 결코 목적론을
전제하지도 않으며, 목적론과 연결된 절대적 존재의 개입도 인정하지 않는다.
15) 불전과 자이나 문헌 속에서의 위의 인용문과 유사한 정형구적 표현은 그의 사상이 강한
결정론을 넘어 운명론적 색조를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관해서는 Basham(1951) 참조.
16) Harvey(2000) p.16.
만일 행위 자체의 본성에 따라 미래의 결과가 결정되어 있다고 본다면,
그렇다면 그러한 업의 인과적 결정성의 범위와 한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업의 규정성은 MN III.202-203에서 개체존재의
장수와 단명, 병과 건강, 뛰어남과 열등함, 어느 가문에 태어날지를 결정하는
것으로서 설명된다. 즉 업은 행위자가 윤회 중의 어느 존재형태(gati)로
태어날지를 결정할 뿐 아니라, 그 존재형태 내에서도 개체 사이의 우열
등의 차이의 원인으로서 간주되고 있다. 그렇다면 업이 지속적으로 재생의
형태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중생에게 일종의 결정론적인 인과적
힘으로 계속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만일 그것을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6사외도 중의 마칼리나
아지타와 같은 논리적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고, 반면 업에 의한 어떤 종류의
조건화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또 다른 함정인 우연론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불교의 업설은 업의 규정성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무제약적으로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는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했다.
업이 어떤 하나의 상태를 낳은 원인이라고 설명되고 있을 때, 이를 결정론적
설명과는 다른 뉘앙스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A가 원인이 되어 B를 낳을 때,
A-B 사이의 관계를 불교에서는 조건적 관계, 즉 연기적 관계라고 보는 것이지
A에 의해 B의 상태가 모든 면에서 결정되었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불교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A-B 사이의 연기적 관계는 우연론이나 결정론을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다.17)
17) 연기설이 인-과 사이의 연결성을 전제하면서도 사건 B는 선행사건 A를 원인으로 한다는
방식의 결정론적 방식으로만 해석하기 곤란한 이유는 필자가 보기에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불교의 인과설은 사건인과(event causation)를 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는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과는 원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익어가는
(異熟)’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결과는 사건이 아니라 苦-樂이라는 성질로 감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결과를 산출하는데 무수한 원인이 공동 작용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Conze(1962) p.149 이하 참조.
초기불교에서 이 문제의 해결을 향한 첫 번째 발걸음은 업을 심리적 힘으로서
해석함에 의해 이루어졌다. 자이나교에서 업을 미세한 물질적 요소로 간주했던
것과는 달리 초기불교는 업을 주로 심리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예를 들어 업을
身口意의 三業(MNI. 206; AN III. 415)으로 구분하거나, 다시 그것들을 심리내적-
외적 성격에 따라 思業(cetanā-karma)과 思已業(cetayitvā-karma)으로 구분하는
설명(AN III. 415)이 그것이다. 사업이 ‘의도적 행위’를 가리킨다면, 사이업은
‘의도한 후에 나오는 행위’로서 주로 신업과 구업을 가리킨다. 이런 구분은
불교가 행위의 의도에 중점을 두는 동기주의 윤리학과 비슷한 입장을 갖고
있다고 지적될 수 있겠지만, 본고의 관심에서 볼 때 보다 중요한 것은 심리적
힘으로서의 업의 설명이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양립을 보다 쉽게 허용할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중생의 심-신의 조건을 형성했던 업은 그것이
심리적 힘인 한에 있어 욕망이나 정진 등의 다른 심리적 요소에 의해 쉽게 영향
받을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업의 규정성은 약화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심리적 영역에 관한 한 불교의 어떤 학파도 결코
자유로운 도덕적 선택의 가능성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을 부정한다면 결국 수행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데로
이끌기 때문이다. 업의 소멸과 자유의지를 관련시키면서 맥더모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비록 과거에 행한 업이 마라에 속해 있지만 업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교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로 보인다. 물론 의지의 자유라는 주제는 팔리경장에서 다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자유의지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책임이라는 관념 속에
함축되어 있으며, 이 관념은 불교에서 업 개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McDermott 1980: 180).
자유의지가 불교의 업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업의 소멸로
이끄는 수행도를 통해 자유의지의 존재를 당연히 여기는 맥더모트의 언급에
대해 큰 틀에서 반박할 것은 없을 것이다. 정신적 수행은 행위의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설명에는
한 가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즉 불교 수행의 일차적 목적은 업의 소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의 소멸에 있다는 점이다. 불교에서 수행은 업 개념과
연결된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시이래의
윤회과정에서 쌓인 업을 단박에 제거할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심리적 힘으로서의 번뇌를 정화시키는 것은 지금 여기서 가능하며,
여기에 비로소 자유의지와 책임이라는 관념이 들어설 수 있다고 보인다.
중생이 어떤 조건 속에 있든지 간에 기본적으로 그에게 심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인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수행론과 그것을 통한 심적 상태의 변화가 무의미해 질 것이라는 점에서
불교는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다. 업의 규정성을 인정하면서도 계·정·혜 등의
수행을 통해 심적 상태를 변화시킴으로써 이전의 업력에 좌우되지
않을 여지가 생겨나고 이것이 자유의지의 영역으로 되는 것이다.18)
여기서 다만 그 선택의 자유는 인간의 정신적, 윤리적 수준에 의존하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수행론이 존립할 근거가 있을 것이다.
18) 이 점에서 Goodman의 입장과 필자의 견해의 차이가 뚜렷해진다. Goodman은 결정론
하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필자에게는 결정론적 제약은 업력에 속한 것일 따름이다.
대승은 가르침의 청문에 의해 심흐름의 질적 변화가 시작되고, 이를 통해 주어진 신체적
제약이나 심리적 제약의 틀을 벗어나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에 단계가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대승의 보살도에서 10지는 정신적 의미
에서 자재를 단계적으로 성취해 나가는 층위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업을 의도적 행위라고 정의함으로써 불교에서 심리적인 요소의
역할이 핵심적인 것으로서 강조될 수 있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심리학적
설명에서 중점적인 관심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심리작용의 구조를
이해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욕망이나 증오의 구조를 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즉, 어떻게 대상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며 그러한 인식이
어떻게 감수작용을 일으키며 그것에 따라 대상에 대한 욕망이나 증오와 같은
부정적인 심리작용19)을 일으키고 이 때문에 다시 윤회하게 되는가를 인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이나 증오는 어떤 점에서 스트로슨이 참여자의
반응태도라고 불렀던 여러 심리적 요소들에 대응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주어진 사태에 대한 모든 참여자들의 심리적 반응이 항시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나의 물건을 훔쳤을 때, 나는 인바겐의
결정론자처럼 그에 대해 분노할 수도 있고, 또는 레미제라블의 미리엘
신부처럼 그를 용서하고 그에게 축복을 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심리는 매 순간 인바겐의 결정론자와 미리엘 신부 사이를 왕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참여자의
반응에서 우리가 우리의 심적 상태를 얼마나 내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이런 설명을 통해 왜 우리는 초기불교에서 업 대신에 번뇌라고
하는 부정적인 심리적 요소20)가 일차적인 관심사로 대두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21) 후대에 불교의 대표적 철학자인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
4세기 말)에 따르면 업은 세계와 개별 존재자들의 구체적인 존재형태를 결정
하는 반면, 업은 번뇌의 힘에 의해 비로소 모이기 때문이다.22) 따라서 업의
소멸 대신에 번뇌의 소멸이 보다 중요한 과제로 될 것이다.23) 이렇게 본다면
붓다가 동시대의 다른 사문들과 달리 업 대신에 번뇌를 제거되어야할 것으로
본 것은 인도사상사에서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불교에서 초점은 업에서 번뇌로 옮겨졌다.
19) 불교의 심의 구조의 설명은 학파에 따라 상이하고 또 복잡하지만, 여러 심리요소들의 설명
중에서 핵심적 요소는 불선한 심작용과 선한 심작용일 것이다.
20) 초기불전에서 업의 역할은 이차적이다. 이것은『초전법륜경』(Vinaya I10)에서 설해진
四聖諦의 교설에서 고통의 원인으로서 다만 갈애(taṅhā)만이 언급되고 있고 업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오, 비구들이여! 이것이 집성제이다. 이 갈애가
재생으로 이끌고, 즐거움을 향한 욕망과 연결되며, 이곳저곳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욕망의 대상에 대한 갈애(kāma-taṅhā, 欲愛),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ṅhā, 有愛),
비존재에 대한 갈애(vibhava-taṅhā, 非有愛)이다.” 여기서 갈애는 12지 연기의 도식이
보여주듯이 번뇌(kleśa)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不善한 심리적 작용이다
21) 그의 최초의 교설인『초전법륜경』에서 업을 고통의 원인으로서 언급하지 않은 붓다의
설명은 바라문 전통이나 사문전통에서 업이 긍정되건 부정되건 윤회의 핵심적 요소로서
등장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매우 특징적이다. 붓다가 업의 작용과 그 기제를 폭넓게 인정
했다고 하는 것은 초기경전의 여러 개소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이 경의 서술은
업에 대해 제한적 중요성만을 인정했던 붓다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다.
22) 이것은「구사론」5장 분별수면품 의 첫 부분에서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AKBh 277,3-4:
karmajaṃ lokavaicitryam ity uktam / tāni karmāṇy anuśayavaśād upacayaṃ gacchanti
antareṇa cānuśayān bhavābhinirvarttane na samarthāni bhavanti / (“세상의 다양함은
업에서 생겨난다고 설해진다. 그 업들은 번뇌의 힘 때문에 모인다. [三]有의 발생에 관련
해서 번뇌가 없이는 어떤 가능성도 없게 된다.”)
23) 이것은 앙굴리말라의 일화가 보여주고 있다. 업이 남아 있다고 해도 번뇌가 끊어졌다면
더 이상의 생사윤회는 없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의 이 일화에 대해서는 Theragāthā 866-
891 및 MN II p.103 이하 참조.
Ⅳ. 생물학적 결정성과 심적 자유의 확대가능성
이제 불교의 입장은 서양철학의 용어법을 사용해서 말한다면 양립 가능론에
가깝다는 필자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순서이다. 앞의 설명에서도 충분
예견했으리라 보이지만, 필자는 업의 작용과 현재의 심작용의 범위를 심-신
이원론을 도입함에 의해 각기 한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명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먼저 업의 심-신에 대한 규정성을 다루고, 이어
심리현상이 그런 결정론적 방식으로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1. 집수 개념과 생물학적 결정성
여기서는 시간과 지면상의 한계 때문에 12지 연기의 맥락에서 行(=업)과
識의 관계 및 識과 심리적-물질적 요소(名色, nāma-rūpa)의 상호관계로
한정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초기불교 이래 이들 12지 요소들의 관계는 주로
생리학적, 생물학적 관점24)에서 논의되어 왔는데, 이 설명은 심-신 문제에
대한 불교의 관점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에 적합한 구체적인 자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특히 이런 관념을 논의하기에 적합한 개념이 ‘執受(upādāna)’이다.
이하에서는 불교 유식학에서 설명하는 업에 의한 심-신의 구조화의
과정에서 ‘집수’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업이 어떻게 심-신을 구조화시키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24) 이것이 ‘業感緣起說’로 불리는 아비달마 시대의 대표적 연기해석으로, 유식학도 이
설명구도를 기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생물학적 배경하에서 진행되는 재생과정에
대한 불교의 이런 해석이 현대적 의미에서 생물학과 어떤 식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생물학계의 일부 흐름과 중요한 점에서 통찰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인다. 본고에서 필자가 염두에 둔 것은 Varela 등에 의해 제시된 구성주의
생물학의 관점이지만, 여기서 이 주제를 상세히 다룰 여지는 없을 것이다.
식이 생명체의 특징으로서 재생과정에서 핵심적인 정신적 요소로 기능한다는 것은
“식이 모태 속으로 들어간 후에”25)라는 표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것은
수태의 순간에 식이 모태 속으로 들어가는 현생의 출발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전통적으로 유부에 의해 ‘행에 의해 조건지어진 식’(行緣識, saṃskārapratyayaṃ
vijňānam)26)으로 표현된 것이다. 여기서 행은 업으로서 해석되고 있기 때문에
재생시의 식은 전생의 업의 힘에 의해 이끌리어 그 업에 적절한 재생의 장소,
즉 모태로 들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인의 경우 식은 업의 힘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기 때문에 재생의 장소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25) DN I, p.63: viññāṇaṃ … mātukucchismim okkamitvā.
이렇게 입태한 식은 자궁 속에서 부모의 정혈과 심리적-물질적 요소를
재료로 해서 자신의 고유한 개체존재, 즉 신체(ātmabhāva)를 형성해
나간다.27) 여기서 주의할 점은 식이 아직도 업의 영향하에 있기 때문에
신체의 형성이 업력에 따라, 즉 임의적이 아닌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즉 이런 구조화와 그 과정은 선행하는 업에 의해 조건지어진 것이다.
식이 심리적-물질적 요소를 취하여 자신의 신체를 형성시켜 가는 과정이나
결과를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執受(upādāna)’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27)「유가론」은 모태 내에서의 신체의 형성과정을 8단계로 나눈다.「유가론」(YBh 28,1ff. =
T31: 284c26ff): kalala-avasthā, arbuda-, peśy-,ghana-, praśākha-, keśaromanakha-,
indriya-, vyañjana-. 각 단계의 의미에 대해서는 안성두(2010) 각주 46 참조.
집수란 식이 자기 외부의 요소들을 내부의 유기체적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나 그 결과를 가리키는 개념이다.28) 이 개념을 통해 우리는
불교가 요소들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음을 본다. 하나는 식과
무관한 외계의 바위와 같은 물질이고, 다른 하나는 식에 의해
컨트롤된 것이다. 후자의 물질을 아비달마는 upādāna의 과거
분사형인 upātta(有執受, "appropriated [matter]")를 사용하여 표현
하는데, 바로 이러한 ‘집수된 물질’이 무생물과는 다른, 살아있는
유기체적인 물질을 특징짓는 것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집수된
[물질]은 심과 심소에 의해 의지처로서 파악된 것으로, 손해와 이익
양자와 상호 수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의식을 가진 것이라고
설해진다.”29) 「유가론」은 이를 부연하며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집수된 [물질](upātta)’이란 근을 구성하는 물질과 그것들과 연결된
물질만을 말한다. 즉 심과 심소가 그들의 의지처로 만드는 물질이다.30)
슈미트하우젠에 따르면 이 정의는 집수된 것은 어떤 내적, 외적
원인들에 의해 영향 받음을 통해 낙수와 고수로 인도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31) 즉 감수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28) 비물질적인 존재영역인 無色界를 인정하는 불교우주론에 따라 집수는 반드시 물질적인
요소의 집수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가장 현저한 설명이『해심밀경』(SNS V.2)
에서 제시된 2종의 집수일 것이다. 욕계와 색계의 경우 식은 의지처를 가진 물질적인 根을
대상으로서 취하며(rten dang bcas pa'i dbang po gzugs can len pa = 有色諸根及所依執受),
무색계에서는 식은 다만 대상적 이미지(相,nimitta)와 명칭(名, nāman) 및 이와 관련된 심적
작용(分別,vikalpa)에서 나오는 언어적 표현(言說)의 다양성(戱論)의 잠재성(習氣)을 [대상으로서]
취한다(mtshan ma dang ming dang rnam par rtog pa latha snyad 'dogs pa'i spros pa'i bag
chags len pa = 相名分別言說戱論習氣執受). 본고에서는 주로 전자와 관련해 집수의 기능을
설명할 것이다.
29) AKBh 23,16f.: upāttam iti ko 'rthaḥ / yac cittacaittair adhiṣṭhānabhāvenopagṛhītam
anugrahopaghātābhyām anyonyānuvidhānāt, yal loke sacetanam ity ucyate. Cp.
「순정리론」352b6ff;「대비바사론」712c7ff.
30)「유가론」T30: 666a11ff. 참조.
31) Schmithausen(1987) n.196 참조.
이렇게 모태 속으로 들어간 식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심리적, 물질적
요소들을 자기 방식대로 구조화시키기 시작하며, 이를 통해 식에 의해
집수된 물질은 식과 운명을 함께 할 정도로(安危共同: ekayogakṣema)
서로 밀접히 결합되게 되어 증대되는 것이다.(「유가론」 593c29f).
Upādāna는 생물학적 의미 이외에도 정신적 집착의 의미에서 이러한
물질을 식이 자기 자신으로서 취착하는 행위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이런 생물학적 자기화의 과정 속에서 볼 때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유식논서에서 모태 속에 들어가는 식은 알라야식(ālaya-vijñāna)으로
간주되고 있으며,32) 따라서 집수하는 작용도 알라야식에 귀속되고 있다.33)
32) Schmithausen에 따르면 알라야식의 일차적 의미는 물질적 감각기관 속에 숨어 그것을
유지시켜 준다는 識의 생물학적 기능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 용법이 ādāna-vijñāna의
설명에서 식이 물질적 대상을 취해 자신의 신체적 기반으로 취한다고 하는 설명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은 초기 유식문헌인『해심밀경』에서 ālaya-vijñāna와 ādāna-vijñāna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서 분명하다. 이들 개념과 upādāna가 가진 유사한 함축성에
대해서는 Schmithausen(1987) 제3장 참조.
33) “알라야식이 선행하는 행으로부터 생겨나서 [수태의 순간에] 정혈 속에 들어감으로써 새로운
존재를 취한다. 바로 이것이 죽을 때까지 신체를 집수한다고 간주된다.”(?緣起經釋?(PSVy
24b2f); Schmithausen 1987: n.344에서 인용). 또는 “알라야식이 모태 속에서 정혈과 용해
되었을 때, 신체는 그 심에 의해 집수되었다.”고 설하는 PSkBh 200a6 참조(Schmithausen
1987: n.348에서 인용).
그런데 주의할 점은 유식학의 연기지 설명에서 식과 명-색의 관계가 반드시
일면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초기경전에서도 다른 모든 연기지가 예를
들어 “무명을 조건으로 하여 행이 있다.”고 하는 식으로 일방적 관계로
설정되고 있는 데 비해, 이들 양자 사이의 관계를 상호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설명도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Naḍākalāpikāsūtra가 10지 연기설의 맥락에서
양자를 두 개의 볏단을 마주 세우는 것으로 비유하는 것이 그것이다.
「유가론」(YBh 199,14)과 「섭대승론」 등은 이 경을 인용하여 양자
사이의 관계를 상호 의존관계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 생물학적 설명방식에 보다 시사적이다. 즉 업에 의해 인도된 식이
물질적-심리적(=명-색) 요소를 자기 방식으로 재구성함에 의해 자기의
기반으로 삼는다는 것 이외에, 모태 속에 있는 명-색이 동시에 식의
기반이 된다고 간주함에 의해 유전적 측면에서 부모의 유전자 구조가
‘복제’될 여지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34)
34) 생물학적 해석에 대해서 안성두(2010) pp.415f. 참조.
위에서 우리는 집수 개념을 통해 식이 어떻게 외부의 물질을 유기체를
구성하는 물질로 재구성하는가를 보았다. 동시에 신체내의 심적, 심리적
요소들은 수동적으로 식에 의해 포섭되어 구조화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식의 물질적 정보원으로서 자신이 가진 업의 정보를 다시 식에게
제공함에 의해 이후에 생겨날 재생 존재의 형성에 참여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음을 보았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식이든 명-색이든 모두 업에 의해
‘영향 받고’(-upagata) 있다는 점에서 업은 재생의 구체적 형태를 결정하고
규정하는 힘으로서 인정되고 있다.
2. 현재의 지각작용과 심리적 선택지의 확대
위에서 우리는 집수 개념을 사용하여 심-신의 구조가 업에 의해
구조화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렇지만 이 말은 업이 단지 조건으로서
생명체의 심-신 구조를 주조하고 있음을 가리킬 뿐이며, 업 자체가
의식의 내용을 결정하거나 그것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심-신의 구조화를 통해 업은 의식작용의 전반적
조건으로 작용하긴 하지만, 선택이나 결정과 같은 의식활동을 본질적으로
결정하는 힘은 없다. 의식작용 자체에 대해 업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변하지 않는 당연한 전제이며, 따라서
이에 대해 논증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다만 몇몇 경우에 양립 가능론의
설명에 부합되는 설명이 보이는데, 이하에서는 그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이론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먼저 업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자. 업의 영향이 무제약적으로
현재와 미래의 모든 행위에 미치는가 아니면 그것은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현재 우리의 행위가 전생의 업의 결과인지 아니면
그것과 관련이 없는 것인지 확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불교
전통에서는 우리의 행위에 여러 무수한 요소가 개입되어 공동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확실히 아는 것을 오직 붓다의 지혜의 영역으로 돌린다.35)
그렇지만 12지 연기의 정향구와 관련시켜 본다면 업의 작용이 미치는
범위는 행-식-명색-6입-촉-수에 이르기까지이다. <善因樂果 惡因苦果>의
정형구가 보여주듯이 업의 과보는 受(vedanā)에서 끝나게 된다. 그것은
자동적인 응보원리에 따라 개체에게 주어진 것이다. 업의 작용은 여기서
끝난다. 다음 단계에서 이렇게 감수된 것을 즐거운 것으로 취하거나 또는
불쾌한 것으로서 거부하는 것은, 연기설에 따르면 욕망과 관련된 심적
작용으로, 이것이 바로 『초전법륜경』에서 윤회의 원인으로 규정된 갈애의
역할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심적 번뇌는 개인의 자유의지36)에 따라
제거되거나 또는 취착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들을 제거시키는 방법이
전통적으로 止(śamatha,마음의 적정)와 觀(vipaśyanā, 분석관찰)으로서의
수행도로서, 이를 통해 해탈할 수 있다고 설하는 점에서 불교는 업의 제약을
벗어날 길이 있음을 근본적으로 인정한다.
35) Goodman(2002: 364)은 불교에서 일체지자로서의 붓다의 정의가 적어도 자유의지론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붓다의 일체지성을 一切種智
(sarvākārajñāna)로서, 즉 모든 것의 행상을 하는 것이지, 이 지구상의 개미의 숫자가
과거와 현재, 미래에서 몇 개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이를 자유의지론의
부정과 관련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36) 물론 자유의지라고 해도 그런 심작용이 조건 없이 생겨났다고 인정되지는 않고, 가르침을
듣거나 좋은 친구와 벗한다는 등의 善緣에 의해 조건지어진다는 의미에서 이것도 역시
‘원칙적인’ 결정론적 이해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반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원칙적인’ 불선한 조건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善緣에 의해 영향 받는다는
바로 그 점이 불교에서 말하는 자유의지일 것이다. 나아가 무시이래의 무수한 조건들이
심의 흐름에서 혼재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원칙적인’ 결정론을 주장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원칙적인’ 결정론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보인다.
앞에서 우리는 불교에서 업이 결정론적 해석을 벗어날 수 있는 근거는
심리적 힘으로 간주된 데 있고, 또 이런 심리적 업이 개체의 심리적
흐름 속에서 다른 심리작용에 의해 간섭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실제 유식학은 업과 의식작용의 상호작용을 윤회과정의 핵심적 기제로
파악하고 있다. 유식학은 업의 이런 잠재적인 측면을 특히 업종자
(karma-bīja)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존재의 형태를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잠재적인 힘으로서, 마치 유전자 중에서 어떤
특정한 표현형은 구현되지만 그와는 다른 대립형질은 잠재된 채 있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37) 이런 업종자는 식의 흐름으로서의 알라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데, 이들 종자 중의 어떤 것은 현실화되지만 다른
대부분의 것은 잠재적인 것으로서 숨어있는 것이다.
37) 안성두(2010) p.433.
어떤 점에서 이런 업종자의 잠재력은 심층심리학에 따른 심리학적
결정론과 연결될 수도 있지만, 유식학은 결코 이들 잠재력을 모든
면에서 무제약적이고 결정론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비록 그것이 잠재적인 힘이기 때문에 더욱 제거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대응하는 수행론적 전략을 통해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론적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업의 잠재성보다는 현실적 ‘감각-지각작용(=識, vijñāna)’38)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의식작업의 내용이다. 왜냐하면 잠재적 업력을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없지만 현실적 심리작용을 조정할
능력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유식학의 용어법에서
업종자와 현실적인 의식작용(=轉識)의 상호작용은 ‘種子生現行’,
‘現行熏種子’의 이중 관계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알라야식
속에 저장된 업의 종자가 현실화된 의식작용으로 산출될 수 있고,
동시에 의식작용은 그에 의해 산출된 업의 종자를 알라야식 속에
저장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쌍방관계를 통해 업종자의 심-신의
규정성이 현실에서의 올바른 심리작용에 의해 약화되고 변화될
여지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상호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호스퍼스와
같이 “우리의 행위는 유전적 요인이나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형성된
성격이나 기질에서 유래하므로, 우리는 우리 의 행위에 대해 책임이
없다.”(안건훈 2006: 147-9)는 심리학적 강 한 결정론은 ‘종자생현행’의
심리적 과정만을 확대한 결과 인간을 잠재적 무의식의 포로라고 보는
것이지, 도덕적 책임과 선택이‘현행훈종자’의 과정을 통해 확보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 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8) 여기서 식의 의미는 수태시의 식의 의미는 아니라 근+경=식의 의미에서의 미세한 감각-
지각작용을 말한다. 識(vijñāna)의 두 가지 상이한 의미에 대해서는 Waldron(2003) pp.
41ff. 참조.
Ⅴ. 결론
본고는 결정론이나 양립가능론 등의 서양철학의 용어법을 통해 불교의
업설이나 연기설을 해석하려는 최근의 비교철학 연구에 촉발되어
작성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비교철학적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불교
자체의 논의의 맥락이며, 따라서 이들 교설에 대한 불교학적 맥락에서의
검토가 서양철학의 용어에 맞추어 불교사상을 해석하려는 것에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필자의 주장의 요점은 서양철학의 용어에 따라 불교의 대응하는 이론을
결정론이나 자유의지론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불교의 현상론적 분석에서
그대로 수용되거나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가 처음부터
결정론이나 물질주의의 이론적 함정에 빠지지 않은 이유를 오온의 범주를
통한 심-신의 두 범주를 도입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에서
시작했다. 다시 말해 매우 도식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심-신의
구분이 결정론과 유물론 사이에서 불교의 중도적 성격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초기불전에 나오는 마칼리와 아지타의
결정론과 유물론적 관점을 극복하기 위한 붓다의 출발점도 역사적 맥락에서
심-신의 구분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업설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심리적, 물리적 상태는 선행하는 행위에
의해 조건지워진다. 여기서 조건지어진다는 의미는 결정된다는 의미도
아니고 우연적이라는 의미도 아니라는 점에서 두 가지 극단적 해석을
벗어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여기서 물질 자체는 인과성에 종속되는데
비해 심리적 영역은 인과성 외에 다른 ‘참여자의 반응태도’에 의해 영향
받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해 불교는 업을 일차적으로 의업과
관련시킴에 의해 업의 결정성을 완화시킬 수 있는 심리적 요소의 선택지를
넓혀 놓았다는 점도 중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참여자의
반응태도로서의 심적 번뇌의 컨트롤이 보다 중요한 수행론적 과제로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심-신의 구분에서 신체의 물질적 요소가 전생의
업에 의해 구조화되는 것을 ‘집수’ 개념을 통해 제시하면서 이를 통해 업의
결정력이 신체로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런 심-신의 구조화를
통해 업은 의식작용의 전반적 조건으로 작용하긴 하지만, 선택이나 결정과
같은 의식활동을 본질적으로 결정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결코 인정되지
않았다. 필자는 의식작용 내에서 업이 미치는 범위를 12지 연기의 맥락에서
논의하면서 결코 욕망이나 증오와 같은 심적 요소가 업으로 간주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이것들은 심적 요소로서 참여자의 자유로운 반응태도에 달려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식학에서 업종자라고 불리는 잠재력이 결코 현대의
심층심리학에서 말하는 강한 심리학적 결정론으로 이해될 수 없다고 하는
점을 지적했다. 왜냐하면 유식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작용은 ‘현행’과 ‘종자’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위에 성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을 통해 필자는 결정론과 관련된 불교의 논의맥락이
현대 서양철학에서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교의 관점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필자는
양립가능론에 가장 가까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필자는 불교가
양립가능론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시더리츠의 관점에 동의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난다는 점도 아울러 밝히고
싶다.
실론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gikoship/15783021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인도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이나교 (0) | 2020.01.12 |
---|---|
인도철학사 강의안 10- 바가바드기따와 힌두교 - (0) | 2020.01.12 |
초기 인도불교에서의 제법무아와 열반/김한상 (0) | 2019.12.29 |
인도불교 (0) | 2019.12.29 |
업의 오해 (0) | 2019.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