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의 오해
1) 과거 예속적 -> 미래 지향적
업이라고 하는 주제를 시제에 있어서 지나치게 과거예속적으로 이해를 한다라는 문제가 있다. 업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과거라는 시간대와 주로 연결짓는 그런 좋지않은 경향이 있다. 안좋은 상황에 빠지고 곤란한 상황에 빠지면 내가 전생에 무슨 업을 지었길래? 이런말 합니까? 안합니까? 업이라고 하는 말을 꼭 전생이란 말과 연결지어서 쓰지 달리 쓰질안해.
물보다 진한 건 피지만 피보다 진한 건 말이다. 아무리 한국 사람의 피를 받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말을 사용하면 그아이는 일본아이입니다. 왜? 말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으로 드러난 의식이요, 생각이고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속으로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말이나 생각이나 같고 사람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는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업이라고 하는 말을 과거에다가 귀속시킵니다. 이거 잘못된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업을 공부하면 안된다. 이건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업을 공부하는데 아주 좋지 못한 장애물이 됩니다. 왜? 부처님이 설하신 업은 어떤 업이냐면 시제에 있어서 미래지향성을 지닌 미래지향적인 업이다. 너 스스로의 의지로 너의 미래를 활기차게 열어 나가라는 뜻에서 미래를 밝게 열어재치는 원동력으로 업을 설했는데 왜 업이라는 말을 과거에다가 나를 묶어대는 그런 의미로 사용을 했으니 이건 거꾸로다. 업은 과거예속적인 의미에서 설해진 가르침이 아니고 미래지향적인 취지에서 설해졌다.
2) 죄업 -> 복업
두번째 우리가 업이라는 가르침을 대할 때 방해요소가 되는 오해가 있습니다. 업이라는 것을 죄업의 입장에서 이해를 합니다. 예컨데 내가 전생에 무슨 업을 지었길래 이 말에서 무슨 업을 할때 업을 죄로 바꿔도 말이 된다는 거에요. 그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우리가 좋은 일에는 업이라는 말을 안붙입니다. 꼭 안좋고 힘든 일에 업이라는 말을 붙이고 그래서 죄업이라고 하는 말은 죄의 업이 아니고 업이 죄고 죄가 업이 됩니다. 업이라는 말이 너무 너무 무겁게 느껴지고 죄스럽게 느껴지고 업이라는 말이 터부시되는 분위기가 왜 생겼냐하면 우리 한국사람들의 사고방식 속에 업이라는 말을 죄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사용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들으면 기가막힐 일이다. 부처님의 업의 가르침을 설할 때 근본적인 목적은 복업을 이야기하시는게 그분의 본래 의도더라 이겁니다. 부처님은 복된 업을 지으라고 이야기한건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 무겁고 어두운 죄업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업이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
3) 숙명론적인 결정론 -> 자유의지론적인 선택론
우리는 이 업이라고 하는 말을 숙명론적인 결정론으로 이해하는 경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업을 한번 지으면 어떻다?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또 업을 짓는 그 자체도 짓도록 이미 결정되어서 짓는 것처럼. 이게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이야기하신 업설은 자유의지론적인 선택론이야. 업은 나의 자유로운 의지에 입각하여 지을수도 있고 안지을수도 있는 선택사항이지 그 순간에는 그런 업을 지을수밖에 없이 이미 결정되있는 결정론이 아니다. 우리가 다른 표현을 하자면은 업이라는 개념을 너무 딱딱하게 여겨. 딱 결정이 되갔고 요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을 때도 이미 지을 수밖에 없도록 결정되어서 지은것으로 생각들을 하고 있고 한번 지어놓으면은 그 과보를 똑 그 식으로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빠져나가지 못하는 족쇄처럼 업을 생각하는데 그게 업이 아닙니다. 지을 때도 내 의지로 지을수도 있고 안지을수도 있었던 거고 지은 뒤에도 뭡니까? 내하기 나름으로 얼마든지 수정보완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업은 한마디로 어떤 업이다? 말랑말랑한 업이야. 딱딱하게 굳어갔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게 업이 아니고 말랑말랑 해갔고 늘이면 쭉 늘어지고, 뭉치면 둥글어지고 없어지지는 안해도 변화 자유자재하는게 업이다. 이게 불교의 업입니다. 업은 아주 경쾌하고 밝고 가벼운 이야기야. 더러는 신나고 가슴 열리고 편안한 이야기가 업에 관련된 이야기다.
자갈처럼 무겁고 딱딱한 그런 업을 짓지말고 버터처럼 가볍고 경쾌한 복된 업을 지으면은 너의 미래를 얼마든지 활기차게 열어나갈 수 있다 이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버터처럼 가볍고 경쾌하고 복된 업을 지어가지고 자신의 미래를 자기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활기차게 열어나가는 그런 방법론으로 그래서 내가 잘살고 못사는 것은 신의 뜻이나 운명이나 우연이 아니라 뭐다? 내가 짓은 업이다라는 말씀을 부처님께서는 일관성있게 하실수 있었던 겁니다. 업의 기본적인 색깔 아시겠죠? 무거운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고 딱딱한 것도 아닙니다. 그건 가볍고 경쾌한 것이며 그건 환하고 밝은 것이며 그건 말랑말랑해서 얼마든지 내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는 그런 경쾌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앞으로 무엇에 임해야 된다? 업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를 고찰해가는데 임해야 된다.
업
1) 말뜻 2) 주체 3) 전제 4) 목적 5)방법 6) 방향
업이라는 말 자체는 중국말입니다. 그러니깐 곤란한거에요. 우리나라 말로 하면 [업] 발음부터가 기분이 별로 안좋아. 아, 오는 가벼운 모음. 어, 우는 무거운 모음. 노랗다와 누렇다의 차이. 실제 우리말은 그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업하는 순간 분위가 좀 가라앉고 무겁다. 이 모음이 끼친 영향이 있습니다. 그 모음 밑에 받침 ㅂ. 우리나라의 무성음 받침은 유명합니다. ㅂ받침을 발음할때 밖으로 터집니까 안으로 삼켜집니까? 삼켜지는거야. 예를들어서 고양이를 캣 하면 ㅅ받침이 안으로 삼켜진다. 근데 서양사람들이 발엄할땐 캣트 하면서 받침이 안으로 삼켜지는게 아니라 밖으로 튀는거야. 숨통이 탁 트는거야. 업 ! 발음 자체가 답답하다. 그러니깐 숙명론적인 결정론이 들어오는거야. 발음 자체가 업의 뜻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karma 카르마라고 하는 말을 중국사람들이 업이라는 말로 옮겼다. 그럼 카르마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은 카르(kar)라는 말과 마(ma)라는 말이 결합되어 있는데 카르는 동산데 이동사를 명사로 만드는 접미사가 마입니다. 카르가 동사라 그랬죠. 동사는 어떤 움직임을 뜻합니다. 그랬을때 어떤 움직임을 나타내는게 카르냐? 그야말로 '움직이다'라는 뜻이 들어있어요. 그리고 '행동하다'라는 뜻이 들어있고 어떨때는 '만들다'라는 뜻도 들어있고 '짓다'라는 요런 뜻도 있다. 따라서 카르마는 움직임, 행동이라는 뜻을 지닌다. 아주 편한 말들 입니다. 무슨 거부할 수 없는 숙명론적인 원리가 느껴지는 말도 아니고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 개념어도 아니고 움직임, 행동 우리가 늘 보는 것이다. 업이 뭐냐 물으면 움직임, 행동 하고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 단어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업의 말 뜻은 뭐다? 우리말로 하면 움직임, 행동. 이 세상에 보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움직임이 있습니다. 우리 눈으로 보이는 뚜렷한 움직임도 있지만은 우리 눈엔 안 움직이는 것 같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움직이기도 하고 아주 작은 소립자로부터 이 거대한 우주 천체에 이르기까지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또 살아있는 것들을 가만히 보면 다 꿈틀꿈틀 행동을 합니다. 머물러 있는 식물 같아도 오래 관찰해보면은 그것이 소위 행동했음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많은 움직임, 그많은 행동을 다 업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뭐가 움직인 것만을 업이라고 할까요?
뭐가 움직인 것만을 업이라고 하느냐? 이게 참 중요합니다. 육근이 움직인 것만을 업이라고 해. 무엇의 움직임 내지 무엇의 행동만을 업이라고 한다? 육근의 움직임만을 카르마라 한다. 육근에 대해서 잘 안다고 속단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육근할적에 근이 무슨 글자입니까? 뿌리근자하면 다 틀린거야. 뿌리란말 아닙니다. 이게 만약에 뿌리라면은 예를 들어서 안근 해석을 어떡해 해야합니까? 눈뿌리? 말이 안돼. 근자부터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뿌리라는 말은 인도말로 mula(물라)라는 말을 씁니다. 육근할때 근은 Indriya(인드리야)라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겁니다. 대승경전은 한자로 번역되어진 대승불교 경전을 읽어도 무방합니다. 왜냐? 대승불교의 깨달음은 그 전달의 방식을 스토리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문맥이 통하면은 전달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초기불교의 깨달음의 전달방식은 용어중심, 술어중심, 단어중심이기 때문에 그 단어를 정확하게 해석해서 전달하지 못하거나 번역해서 전달하지 못하면은 어떻다? 이게 안통한다. 인드리야는 Indra 라는 말에 iya 라는 말이 결합되어 있다. iya 는 ~에 속한 것, ~(무엇무엇이)이 지니는 것, ~(무엇무엇이)이 갖춘것 따라서 인드라에 속한것, 인드라가 지니는 것, 인드라가 갖춘것 그럼 인드라가 뭐냐? 인도의 천신 중에 인드라가 있는 것 같은데 요게 스토리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시조는 누굽니까? 단군. 단군 아버지는 누굽니까? 환웅. 환웅 아버지가 누굽니까? 환인. 환인이 누군가 역사학자들이 추정하기에는 옥황상제 아니냐. 근데 왜 환인이라는 말을 쓰느냐? 1980년대쯤 불교학자에 의해 환인이라는 용법에 대해 밝혀집니다. 환인이란 말은 갖추어진게 아니고 두글자가 앞에 줄어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석제환인. 환인 두개 빼고나면 석제가 남죠. 석제를 뒤집어 봐요. 제석천이 나오잖아. 제석천이야 환인은. 이게 어떻게 이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냐면 불교경전을 보게 되면은 인도의 전통적인 천신이 제석천이에요. 부처님께 법을 청하고 법을 질문하는 호법신장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제석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불교에서 제석천을 그 원서를 통해 확인해보면 그 정확한 이름이 어떻게 나오는지 압니까? Sakra(샤크라)devanam (데와남)Indra(인드라). 요 샤크라데와남인드라 라는 용어가 끝없이 출현합니다. 초기경전 대승경전 할 것없이. Sak(석)de(제)anan(환)In(인). 구마라집이 번역할 때 석제환인이라 번역을 합니다. 환인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바로 석제환인이였다. 샤크라는 고유명사입니다. 이름입니다. 인도인들에게 신은 많아서 이름을 지어줄 필요가 있다. 샤크라하는 이름을 지어준거야. 데와 라는 말은 천신(신, God)을 뜻한다. anam아남 이라고 하는 것은 이게 복수 소유격입니다. ~(무엇무엇)들의, 따라서 데와남을 우리말로 하면 천신들의. 석제환인에서 제환은 데와남에서 오게 되는데 그 데와남의 뜻은 뭐다? 천신들의. 그리고 인드라야. 이 인드라란 말을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lord. 중국말로 번역하면 주. 바이블에 오 주여. 그게 오 load 이다. 주 라는 글자에 꼭대기를 때버리면 왕이된다. 그래서 lord라는 말이 제왕으로 번역된다. 인드라는 우리말로 '임'이라는 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임은 주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고유한 우리말 임은 뭡니까? 당신은 나의 임이 십니다라고 말할 때에는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이거야. 중국말의 주와 왕의 관계와 임과 임금의 관계는 아주 유사해요. 주라고 했든 왕이라 했든 임이라했든 임금이라했든 그런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 인드라다. '샤크라 그는 누구냐 천신들의 왕' 다시말해 천주가 되는거야. 천주교할때 천주라는 개념과 인드라는 똑같은 겁니다. 천신들의 왕이신 샤크라, 이걸 번역해서 뭐라 그랬다? 석제환인이라 번역했다. 단군신화는 삼국유사에 나온다. 삼국유사는 누가 적었습니까? 일연스님이 쓰셨죠. 몽고침범으로 민족성이 말살되다시피한 그런 위기상황 속에서 고려인들의 자긍심과 뿌리를 회복하기 위해서 전래되어 내려오던 신화를 확충하는 과정에서 단군신화가 정착되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할아버지는 누구다? 단군입니다. 그 단군은 환웅의 자손이요, 환웅은 환인의 자손인데 환인은 누구다? 천주의 신 샤크라가 환인입니다. 그러니까 일연스님이 그런 의도로 단군신화를 썼다면은 우리는 누구의 자손입니까? 인드라신의 자손입니다. 천주의 자손입니다. 우리야말로 선민의식을 가져도 됩니다. 왜? 신들의 왕의 피를 이은 자식들이 되기 때문에. 이런 사실들을 통하여 인드라라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받아들여라. 인드라는 무슨 뜻입니까? 천주, 임금, 왕 - 단순히 인간들의 왕이 아닌 천신들의 왕. 이런 뜻을 지닌 말이 바로 인드라다. 이 말을 축약해서 말한다면 인드라는 한마디로 뭐다? '왕'이다. 그럼 인드리아는 왕에 속한것, 왕이 지니는 것, 왕이 갖춘것 이런 뜻입니다. 그럼 왕이 지니고, 갖추고 있는게 뭘까요? 권능입니다. 인드리아는 왕의 권능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왕의 권능은 그 영역안에서는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그러한 존재로서 이해되어도 좋아요. 따라서 인드리아의 첫번째 뜻은 뭐다? '절대적 능력체' 그러면 절대적 능력체라는 말을 눈이라고 하는 단어와 지금 결합시켰으니까 그 결부 상황속에서 이야기해보자. 그럼 눈이 인드리아라는 말은 눈이 뭐라는 말입니까? 절대적 능력체라는 말입니다. 우리 눈이 절대적 능력체다? 어떻게 좀 느낌이 옵니까? 눈은 절대적 능력체다. 본다라고 하는 인식을 전제로 하는 한은 눈을 능가할 수 있는 그러한 존재나 기관은 있다? 없다? 없다. 절대적이다. 보는데 있어서는 눈이 절대적이야. 눈이 절대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어. 눈이라는 절대적인 능력체. 이렇게 해야되지. 눈뿌리 좀 이상했죠. 눈이라고 하는것을 보는것과 관련된 절대적인 능력체라고 만약에 한다면은 이 눈은 단순한 물질 덩어리여야 할까요? 아니면은 물질 덩어리에 정신적인 능력이 화합해 있는 존재이여야 할까요? 눈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적인 능력체요, 본다라고 하는 인식작용에 있어서만큼은 절대적인 능력체라고 한 이상에는 눈을 단순히 물질 덩어리라 해서는 안됩니다. 이게 바로 부파불교와 초기불교가 나누어지는 분기점입니다. 여러분들이 서투르게 불교공부를 한 경우에는 어떤 오해 하나를 대개들 가지고 있는가 하면은 눈은 단순히 물질로 구성되어진 생물학적 기관에 불과하고 그 눈을 창처럼 사용하여 안식이라고 하는 것이 눈을 통하여 바깥의 색을 본다 이런식의 생각들 내지는 이야기들을 들은 적이 아마 있을 거에요. 다시말해 보는 것은 누구다? 눈은 통로에 불과하고 안식이라는게 있어서 본다라는 이야기를 부파불교적 사고방식에 자주들 사람들이 합니다. 만약 눈이라고 하는 것이 안식이 보기위한 통로에 불과하다면은 그 눈을 보고 절대적 능력체라는 말을 쓸 수 없다. 오히려 절대적 능력체는 안식이여야지. 이건 여러분들 굉장히 중요한 주제를 하나 못박고 갈겁니다. 눈이라고 부를 때 그 눈은 단순히 눈알맹이를 뜻하는 눈은 아니더라는 겁니다. 살아서 움직이면서 본다라는 인식 작용을 자기 주관하에서 절대적으로 구사하는 능력체를 보고 뭐라 그런다? 지금 눈이라고 부른다. 이해를 돕는 예를 하나 들어드릴께요. 우리가 눈이라고 할때 우리말로 그냥 눈하지만은 예컨데 중국말 안에도 눈목자가 있고, 눈안자가 있잖아요. 차이점이 있다. 인도에는 4~5개가 넘는다. netri(네트리) aksi(악시), caksur(착슈르) 요거다 사전 찾아보면 eye, eye, eye라 되어있습니다. 근데 뜻이 다 달라. 어떻게 다르냐면은 네트리는 인도하는 자, 악시는 눈알맹이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착슈르하는 하는 말은 보는자를 뜻하는 말이야. 실제 안이비설신의 할 때 안은 그 원어가 악시일까요? 착슈르일까요? caksur입니다. 착슈르는 그런 눈알맹이 악시를 가지고 지금 실제로 보는 작용을 하고있는 보는 작용자를 뜻하는 것이다. 안근할 때 그 안근을 근을 마치 뿌리로 여기고 눈은 마치 눈알맹이로 여겨서 안식이 색을 보기위해서 사용하는 수단이나 통로쯤 생각하는 것은 초기불교에서는 안된다. 근은 이미 절대적 능력체인듯 하고, 눈 또한 보는 작용자로서 꿈틀대고 있는 살아있는 무언가가 있는게 눈이야. 그런 눈으로서의 착슈르와 그러한 절대적 능력체로서의 인드리아가 결합한 개념이 착슈르 인드리아 그걸 번역해서 안근하고 번역을 한 것이다. 그래서 안근 하면은 뭐다? 보는 작용자는 본다라는 인식에 있어서만큼은 절대적인 능력체다.
자 정리를 한번 합니다. 업의 말 뜻은 뭐다? 움직임, 행동이라는 뜻을 갖고 있고 아무거나 움직인다고 모두 그것을 업이라고 하지 않는다. 반드시 뭐가 움직인 것만을 업이라고 그런다? 육근이 움직인 것만을 업이라 그런다. 그랬을 때 그 육근이라는 말은 예컨데 그 대표로서 안근을 우리가 선택을 해보게 되면은 인도말로 하자면 안근은 착슈르 인드리아라고 하는 그런 원어를 가지고 있더라. 그랬을때 인드리아라고 하는 말은 우리말로하면 절대적 능력체란 뜻이고 착슈르는 보는 작용자란 뜻이더라. 그러니 말이 되더라. 보는 작용자로서의 눈은 본다라고 하는 사건에 있어서만큼은 절대적 능력체지 그 권위를 누군가가 훼손할 수 있다? 없다? 없지않더냐. 그래서 이 경우에만 예를들어서 인드리아를 뭐라 부르면은 인식주관, 인식감관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 경우만. 다른데도 인드리아라는 말이 쓰여요. 그때는 인식주관 이렇게 함부러 해석하면 안됩니다. 보는 작용자 할적에 본다라고 하는 것은 크게 말해서 인식에 속한다. 그 인식에 있어서 절대적인 능력체라고 하는것을 조금 완곡하게 표현해서 인식주관이라는 말로 바꿨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안근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면 가장 좋다? 눈이라는 인식주관 ! 이러면 제일 부드러워.
눈/보는 작용자/절대적 능력체(인식주관)
귀/듣는 작용자/절대적 능력체(인식주관)
코/냄새맡는 작용자/절대적 능력체(인식주관)
혀/맛보는 작용자/절대적 능력체(인식주관)
몸/촉감하는 작용자/절대적 능력체(인식주관)
의는 뭐하는 작용자 일까? 아마도 그거는 의만이 할 수있는 작용이겠지. 여러분 눈이 못느끼는줄 압니까? 봤는데 왜 못 느껴! 봤으면 본 것에 대해 느낄 수 있지. 물론 그까지는 여러분들하고 지금 논의를 안할 생각입니다. 오직 의근만이 할 수 있는 작용이 있어. 그래서 그 작용에 관한한 의는 절대적 능력체기 때문에 근이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 작용이 있다. 눈도 그 작용은 못해. 귀, 코, 혀, 몸도 그 작용을 못하는데 오직 의만이 할 수 있는 인식작용이 하나가 있어. 그게 뭘까? 생각은 아닙니다. 오늘 답은 아니야. 생각보다 더 답이되고 원천적인 작용이 있다? 없다? 있습니다. 사과가 있고 갓난아이가 있어. 갓난아이는 이 사과를 볼 수 있습니까? 갓난아이가 사과를 인식하겠죠. 그런데 사과라는 말을 몰라. 우리는 사과를 보면 사과네 그래. 그런데 갓난아이는 사과라는 말을 모르니까 인식을 어떻게 할건지 볼까요? 눈으로 보면서 뭐라 할까요? 붉은 것 그죠? 또는 붉다. 귀로 톡톡쳐보고 소리를 듣고 톡톡소리나는 것 그러겠죠? 물론 톡톡소리도 붉다라는 개념도 몰라. 붉다라는 단어를 몰라 갓난아이는. 그렇지만은 눈으로 붉은 색은 봤을거 아닙니까? 그걸 생각하자 이거야. 그 다음에 코로 냄새를 맡다보니 향긋한 것. 또 혀로 맛을 보니깐 어때요? 달콤한 것. 그리고 손으로 감촉을 보니깐 매끈해. 매끈한 것. 자 아기의 눈은 붉다라고 인식하고 그 붉다라는 인식은 눈이 절대적입니다. 아기의 귀는 톡톡소리난다라고 인식하고 톡톡소리난다라는 인식은 귀가 절대적인 능력체, 아기의 코는 향긋하다고 인식하고 향긋하다라는 인식은 코가 절대적이며 내지 아기의 혀는 달콤하다라고 인식하고 아기의 몸은 매끈하다라고 인식해. 그런데 아기가 요렇게만 인식하고 맙니까? 눈 인식한거 귀 인식한거 코 인식한거 혀 인식한거 몸 인식한거를 따로따로 냄깁니까? 아기는 이 다음에 뭐라고 인식하는지 압니까? 붉고 톡톡소리나고 향긋하고 달콤하고 매끈한것하고 인식을 마무리 지읍니다. 우리는 지금 내 앞에 사과가 있다라고 끝내버리죠. 개념을 사용할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갓난아이는 개념을 사용할줄 모르기 때문에 순수한 인식을 해야해. 그 순수한 인식은 어떻게 하는거다? 사과를 모르기 때문에 내 앞에 붉고 톡톡소리나고 향긋하고 달콤하고 매끈한 놈이 있네. 아마 요렇게 영상이 지나갔을거야. 그런데 옆에서 엄마가 사과 그러면은 아 붉고 톡톡소리나고 향긋하고 달콤하고 매끈한 것을 사과라고 하는구나 딱 입력을 해놓는거야. 그러면서 그다음부터는 사과하고 인식을 하는거야. 그러면 여러분들 자 보세요. 붉다라는 인식은 누가했어? 눈이 했지. 톡톡소리난다는 인식은? ... 매끈하다는 인식은? 그러면 고 고 고 고 하는 인식은 누가했어? 종합하는 작용이 있죠. 개별적 인식을 연결하는 작용이 있죠. 이 연결하는 작용을 눈이 했다할까요? 눈은 보기만 했어. 연결하는 작용을 귀가 했다라고 할까요? 귀는 듣기만 했어... 몸은 촉감하기만 했어. 그런데도 우리의 인식은 다섯으로 쪼개지지가 않고 하나로 통합되었죠. 그러면 무언가가 통합하는 작용을 했다라는거 아니야. 그러니깐 여섯번째 인식작용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종합작용이야. 그 종합작용자를 의근이라고 부르는 거야. 이 종합하는 작용은 누구만이 할 수 있다? 의만이 할 수 있는거야. 의근을 여러분들은 생각하는 것 이정도로 생각했죠. 나중에 그게 포함이 됩니다. 그러나 인식론과 관련하여서 의근이 하는 작용은 단순히 생각이라하면은 그건 통속적이고 서툰 관점입니다. 치밀해야되고 빈틈이 없어야되고 엄밀해야 됩니다. 불교에만 나오는 근이 여섯번째 근입니다. 모든 문명권에서는 오감만 이야기해요. 개별적 인식을 종합하는 것을 왜 이야기 안하느냐. 그 개별적 인식을 종합하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부른다? 여섯번째 인드리아, 제육근 그러는거야. 종합작용자. 그래서 사과라는 하나의 인식이 성립하는겁니다, 비로소. 사과는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짜리가 되는거야. 생각해봐요 여러분들. 붉다라고하는 사고방식하고 붉다라고하는 눈의 인식과 톡톡소리난다는 귀의 인식에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붉으면 다 톡톡소리가 나면 자동으로 연결해도 돼. 그런데 붉다고 다 톡톡소리가 납니까?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경우는 붉은 것과 톡톡소리난다가 하나로 연결이 돼. 그 하나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누가 했다? 의가 한겁니다. 그래서 여섯번째 인드리아가 나오고 그 종합작용이라고 하는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누가 절대적인 권능체요, 능력체다? 의가 절대적인 능력체기 때문에 인드리아라는 말 하나 써줄 수 있다. 그러니깐 인드리아가 모두 몇개가 됩니까? 여섯개의 인드리아로 이루어져 있는거야. 나중에 우리를 뭐라고 부른다? 육근하고 부를 겁니다. 그건 뭡니까? 우리를 여섯개의 절대적인 능력체의 결합체로 보는거야. 우리는 여섯개의 인드리아입니다. 인식에 있어서 우리는 절대적인 능력체니깐. 여섯개의 인드리아다. 이 여섯가지 작용에 있어서는 이들(인드리아)이 절대적인 능력체다라고 하고 그것은 결국 인식과 관계되기 때문에 다른말로 인드리아는 인식주관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럼 여러분들 인식은 왜 할까요? 우리 왜 볼까? 그냥 눈 뜨졌으니깐 보는걸까요? 우리 왜 들을까? 우리는 왜 냄새맡고, 맛보고, 촉감하고 긍극적으로 종합할까? 인식의 목적입니다 여러분. 인식의 목적은 뭐가 있는지 알려고 인식하는 거다. 빨갛다라고 하는 걸 느끼려고 인식하는게 아니고 내앞에 뭐가 있는가 알려고 인식하는 겁니다. "존재판단"을 위해서 인식하는 겁니다. 존재에 대한 판단이 인식의 목적이다. 붉다는 걸 안거야 그게 눈입니다. 톡톡소리난다는 걸 안거야 그게 귀입니다. 그리고 매끈한게 있다는 걸 안겁니다. 그게 몸입니다. 그런 종합된 것이 앞에 있다는 걸 안거야. 그게 의지. 이처럼 모든 인식이라는 개념은 존재한다 있다 유판단 존재판단과 땔래야 땔 수가 없어. 이게 존재라는 것과 연결이 된다면은 존재판단을 목적으로 한다면은 인식을 통하여 존재를 판단할 적에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라는 걸 바로 눈치채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 앞에 이 마이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왜 이걸 있다라고 이야기 합니까? 옳지 보이니까. 봤다 안봤다는 있다 없다와 바로 직결이 됩니다. 이처럼 여러분들 보이니까 있다라고 판단되는 걸 방금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알아요? 몰라요?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가 존재한다는걸 잘 알고 있습니까? 잘 알고 있죠. 그러면 자기자신이 존재한다라고 하는것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모르고 있었는데 거울보니깐 뭐가 있더라고 아 내가 있구나 이래 안건 아니잖아요. 거울이 없는 빛이 없는 깜깜한 어둠속에서도 존재함을 자각합니다. 내가 내 스스로를 존재한다라고 할때는 어떤 경로를 통하여 존재한다라는 판단을 내렸는가?
업의 말 뜻은 행동, 업의 주체는 육근
근은 절대적 권능체
눈은 보는 작용자, 귀는 듣는 작용자, 코는 냄새맡는 작용자, 혀는 맛보는 작용자, 몸은 촉감하는 작용자 그래서 그런 개별적인 인식에 있어서는 이들이 절대적인 권능을 행사를 합니다. 그래서 인드리아라는 개념이 절대적인 권능체라는 것과 어울린다라는 것을 여러분도 공감하셨을 거에요. 의가 하는 고유한 작용이 도대체 뭐겠는가? 종합작용이다. 요게 바로 초기불교를 공부하는데 맥입니다. 요 의의 작용에 종합작용이라고 하는 인식론적인 사건을 정확하게 파악을 하지 못하면은 이 부파불교의 오류를 여러분들도 범하게 됩니다. 부파불교가 뭡니까? 불교교단이 분열하였을 시절의 불교가 부파불교입니다. 불교교단이 왜 분열했겠어요? 교리해석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니깐 분열한 거에요. (부파불교 이전의 불교를 초기불교라 한다)그런 의미에서 초기불교는 우리에게 가치를 가진다. 그런 부파불교의 실수가 어디서 비롯되느냐 하면은 눈을 눈알맹이로 본것도 그렇지만, 의의 인식론적인 작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데서도 결정적인 실수를 한다. 여러분들은 이 의의 작용을 어떻게 봐라? 종합작용으로 보자.
절대적인 권능체라고 하는 근이라는 것을 인식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은 인식주관이 된다. 그래서 인식주관에 의하여 인식을 하면 저쪽에 인식대상이 있겠죠. 인식대상을 경이라 그러고, 인식주관에 여섯가지가 있으니깐 인식대상에도 여섯가지가 있어서 그 여섯가지 인식대상을 육경 그러는 거에요. 이 인식을 하는대도 목적이 있다. 유판단, 존재판단을 위해서 인식을 한다. 우리가 있다라는 판단을 내리는데 사실 두가지 인식방식이 있어요. 하나는 보면서 있다라는 판단을 내리는 경우와 보이니깐 있다라는 판단을 내리는 경우. 예를들어 여기 보드마커 같은 경우 여기에 있습니까? 있다 이거야. 여러분들이 이것을 있다라고 판단을 내리는 근거는 뭡니까? 여러분 눈에 보이니깐. 그런데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있다라고 판단내릴 때는 보니깐 있다지 보이니깐 있다는 아닌것 같애. 예를 들어 거울이 전혀 없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도 눈이라는 것이 있다라는 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눈이 있다는 걸 알겠죠? 한번도 거울에 자기 눈알맹이를 비춰본 적이 없어도 눈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무언가를 보니까. 본다라는 인식작용을 통하여 자각적으로 자기 눈이 있구나는 것을 알아채는거야. 그러니 있다라고 하는 판단에는 하나는 보니까 있다가 있고, 하나는 보이니까 있다가 있는거야. 다시말해 인식의 방법이 능동적인 인식을 통하여 있다라고 판단을 내리는 경우와 보이니까는 뭡니까 수동적인, 피동적인 인식을 통하여 있다라고 판단 내리는 경우가 있다. 능동적인 인식을 통하여 있다라고 판단내릴때 요걸 뭐라 그런다? 근이라 부르고 이걸 눈이라 부른다. 보이니까 있다라고 판단내려진것은 색이라고 부른다. 들으면서 있다고 판단내린것을 귀, 들리니까 있다라고 판단내려진 것은 성, 냄새맡으면서 있다라고 판단된 것은 코, 냄새맡아지니깐 있다라고 판단된것은 그야말로 냄새, 맛보면서 있다라고 판단한것은 혀, 맛보여지니까 있다라고 판단된 것은 맛, 촉감하면서 있다라고 판단하면은 몸, 촉감되면서 있다라고 판단되면 촉감. 여러분들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이걸(마이크)보고 있다라고 판단할 때 내눈에 보이니까 있다라고 그랬죠. 내눈에 보이면서 있다라고 하는 것은 색 그럽니다. 그러나 지 눈은 지 눈이 지 눈에 보여서 있다라고 한건 아니야. 이 눈으로 무언가를 보니까 있다라고 한거야. 그래서 보면서 있다라고 하면은 눈, 보이면서 있다라고 하면은 색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눈은 몇개가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있어서는 보면서 있다라고 판단되는 것은 지 눈뿐이야. 다른 사람의 눈은 전부 자기에게 보이니까 있다라고 판단된다. 다른 사람의 눈은 색이야. 자기 눈만이 보면서 있다니깐 눈이 되는 거야. 그래서 온 우주를 통틀어 갖고 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는 하나밖에 없다. 놀랍게도 불교경전을 보게 되면 반드시 6근은 단수로 쓰고, 6경은 복수로 씁니다(한역 경전에서는 이 맛이 안나). 그래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을 보면은 6근과 6경들 그래요.
6근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자신이잖아. 이 세상에 하나뿐인 건 자기 자신 뿐입니다. 자기 자신은 뭡니까? 나 자신이잖아. 나 자신은 다른 말로 뭐라 할 수 있다? 나라고 하면 간단히 끝나.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업이라고 하는 것은 행동이고 그 행동의 주체는 6근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6근은 결국 추적해오면 뭡니까? 모든 생명체를 다 뜻하는 말이 아니고 일단 나자신 자기자신 나를 뜻한다. 그러면은 뭐하러 주체를 복잡하게 6근이라고 적느냐는 거야. 나 그래뻐리지. 그렇습니까? 안그렇습니까? 업의 가르침에서 우선적으로 초점을 두는건 뭐다? 니 행동부터 신경쓰라 이말입니다. 일단은 자기행동, 자기작용, 자기움직임에다가 모든 포커스를 맞춰라. 그래서 업의 주체를 부처님은 6근으로 잡고 6근은 궁극적으로 뭐다? 납니다. 나. 내 행동부터 신경쓰라는 것이 업의 뜻이에요. 그럼 좋다 이거야. 내 행동을 신경쓰는게 업설이라 그러면은 말그대로 6근하지 말고 나라는 말을 쓰면 될거다. 근데 왜 6근이란 말을 썼느냐? 여긴 참으로 오묘한 뜻이 들어있어요. 6근이 결국 자기자신이요, 나자신을 뜻하는데도 이걸 나라는 말을 안쓰고 6근이라는 말을 쓰신데는 여기에는 여러분들이 신경을 곤두써서 들을만한 뜻이 있다. 이게요. 세계철학계를 살펴보게 되면 크게 서양철학, 동양철학(중국중심), 그리고 인도철학이 있습니다. 서양철학하고 인도철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서양 사람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존재입니다. 뭐가 진짜로 존재하느냐? 참존재. 이게 서양사고의 시작입니다. 참으로 존재하는게 뭐냐? 그런데 인도인들이 관심을 가진 가장 중요한 주제는 존재가 아닙니다. 존재라는건 엄밀히 말해서 우주론을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이 광할한 우주 전체를 통틀어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뭐냐 이렇게 들어가는거거든요. 고대 서양철학 그건 희랍철학인데 그리스철학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들은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은 그당시에는 이 필라소퍼, 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하고 소피스트, 이 지식을 파는 사람들이 혼재를 했었어요. 소피스트와 필라소퍼라는 말에는 소피, 소퍼하면서 소피아가 같이 들어간다. 소피아는 지혜라는 뜻하는 말입니다. 필라소퍼하면 지혜를 필로 하는 말은 사랑을 뜻해. 애지자(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라는 뜻이다. 그에비해 소피스트들은 지혜를 사랑한게 아니라 지혜를 팔아먹었어. 필라소퍼와 소피스트 이 두가지 개념의 차이는 하나는 순수하게 지혜를 사랑했고, 하나는 지혜를 팔아먹었고의 차이가 아닙니다. 관심이 달랐어. 이 소피스트들의 관심은 나 였습니다. 나의 의미, 내가 왜 죽어야되는가, 나는 죽지 않을 수 없는가 나를 주제로 하여서 관심을 키웠던 자들이 소피스트고 필라소퍼들은 나라는 것은 암만 쳐다봐도 변화가 심하고 머물지 못하기 때문에 이 나라고 하는 존재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변하지않는 법칙을 찾기가 어렵거든. 그러니까 법칙을 찾으러 그 범위를 우주로 넓혀버린거야. 우주론적인 존재로 범위를 넓혔다. 소피스트 들 중에 유명한 한사람이 뭐라 했습니까?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사람이 주가 되었었어요. 그런데 필라소퍼들은 이 우주는 물로 되어있다. 탈레스같은 경우에는. 또 이 우주는 지수화풍으로 되어있다. 데모크리토스같은 경우. 이 우주를 구성하는 존재 그리고 참으로 존재하는 그런 존재, 여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서양사람들 철학이나 사유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받는것은 이 우주를 가득채우고 있는 참존재가 뭐냐 여기에 우선적인 초점이 가있어. 요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 불교는 제대로 이해가 안됩니다. 불교나 인도철학이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참존재가 아니고 참나 입니다. 진짜나 이게 그들은 더 궁금했어. 누가? 인도인들은. 나는 왜 죽어야돼? 내가 죽은뒤엔 어떻게 될까? 그런 죽음으로부터 원천적으로 자유로울수는 없을까? 내가 이 세상에 사는 의미는 뭘까? 정말 힘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의미나 가치는 있는 것일까? 이 큰 우주보다도 인도인들의 뇌리를 가득채웠던 문제해결의 핵심은 어디에 있었다? 나에 있었어. 서양사람들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을 궁금해했고 찾고자했다면은 인도인들은 참나가 뭔가가 더 궁금했다. 이처럼 우선순위를 받는 관심에 차이가 있었다.
나에다가 참자를 붙인 이상에는 조금 묘한게 있어. 우리가 지금 나라고 부르는 것은 뭐다? 참나는 아닐줄 모른다라고 하는 반성이 그안에 개입되어 있을 수 있어.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지금 나라고 하는 이 나. 그 나라고 하는 것이 만약에 진짜 나가 아니라면 이걸 나라고 불러되 될까요? 안될까요? 안되겠죠. 그러면 우리는 육근이라는 것이 결국 나를 뜻하는데도 불구하고 부처님이 나라는 말을 안쓴 이유가 뭡니까? 이 덩어리는 나는 나인줄 모르지만 진짜 나는 아니라고 하는 결정을 부처님께서는 봐버린신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진짜 나라고 할 수 없다면 나라고 부르는 것도 안됩니다. 지금 이 육근이라는 건 분명히 나자신을 말하고 있는데 이걸 부처님께서 나라고 이야기 안한 이유가 뭐냐는 걸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참나와 관련된 문제 대해서 부처님은 조건법을 쓰십니다. 만약에 무언가가 참된 나(참나)라면 두가지 요청 내지는 조건을 성취할 수 있어야된다. 무언가를 보고 진짜 나라고 할려면 두가지 조건을 충족할 수 있어야된다. 그 두가지 조건 중에 첫번째가 상일성이다. 내가 나라고 할때는 한가지 모습으로 영원할 것을 전제하여 나라고 한다는 거야. 어제 모습다르고 오늘 모습다르면 인격분열해버립니다. 나라는 개념이 성립이 안되. 여러분이 오늘 아침에 거울을 보면서 분단장을 할때 여러분들이 별 정신적 곤혹함을 느끼지않고 오늘 이자리에 올 수 있었던건 어제 거울에서 봤던 모습하고 오늘 아침에 거울에서 봤던 모습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습이 같을 때만, 한가지 모습이 항상성을 유지할 때만 성립하는 개념이 나입니다. 그 모습이 달라져버리면 어떻다?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기 어려워. 그래서 내가 이 문제와 관련되어서 늘 해드리는 이야기가 있어요. 스위치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데이비드라는 난봉꾼이 주인공입니다. 이 여자, 저여자 찝적대고 내팽기치고 아주 행실이 바르지 못해. 하루는 잠을 탁 잤는데 저승에 끌려갑니다. 염라대왕 앞에서 심판을 받는데 염라대왕이 명부를 보더니 이름은 같은데 이사람이 아니네. 마 내려가. 그런데 옆에 악마가 서있다가 이봐 염라 이까지 올라왔는데 그냥 보내는 수가 있어? 벌이라도 하나 줘야지. 행실이 좀 안좋은거 같은데. 그래서 행실을 살펴보니 하는짓이 이게 보통이 아니야. 그래서 염라대왕이 특별히 명령을 내려서 데이비드를 천국도 보여주게하고 지옥도 보여주게 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 너 여자들하고 관계가 상당히 복잡한데 니 지금 지상에 내려가거든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여자를 한명이라도 구하지 못한다면 너 아까봤지? 지옥간다 요러고 딱 보냅니다. 주인공이 아침에 깨서 소변을 보러가는데 그게 없는거에요. 그러고 깜짝 놀래가지고 거울앞에 딱 같더니 금발이 촥 늘어진 팔등신 미녀가 탁 나오는거야. 깜짝 놀래가지고 뒤로 나자빠집니다. 왜 놀래서 나자빠졌을까요? 내가 아니니까. 거울에 내가 나와야되잖아. 근데 내가 아니니까 얼마나 놀랐겠어요. 왜 내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립니까? 모습이 바뀌었거든 그죠. 우리는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내가 나라고 할때는 한가지 모습으로 영원할 때, 상일성이라는게 충족될 때만 나라고 부르지, 모습이 급격하게 딴모습으로 바뀌면 인격분열 바로 일으킵니다. 우리가 나를 나라고 할려면 첫번째는 뭐다? 상일성. 한가지 모습이 지속될 때 나라고 하는거에요. 여러분들 내 생긴거 보고 말들이 많은데 이래생겨도 내일도 요래 생겨있어야지 내가 돌지를 않지, 이게 확 바껴버리면 어떻습니까? 돌아뿌. 나라고 하는것 그게 참된 나일려고 하려면 그 첫번째 조건이 뭐다? 상일성이에요. 요걸 잊어버리시면 안되요.
그런데 무언가를 진짜 나라고 할려면은 이 상일성보다 더 중요한 조건이 하나가 더 있다. 오히려 모습이라는게 바껴도 기억이란 것이 연결된다면은 정신을 좀 차릴 수가 있는데 이게 안되면은 나라고 못해요. 그 두번째 조건이 뭐냐? 그걸 주재성이라고 그래요. 주재성이라고 하는건 무슨말이냐고 하면 남은 내 마음대로 못해도 나만큼은 내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지 나라고 한다는 거에요. 말은 좀 복잡했지만 참 당연한 말입니다. 남은 내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나만큼은 내마음대로 할 수 있을때 비로소 나다라고 하는 개념을 확보할 수 있어요. 감옥 같은데 가서 자기 마음대로 자기 몸을 운용할 수 없을때는 뭡니까? 그건 자기 인생이 아닌거야. 종은 주인꺼지 종 자신의 것이 아니죠. 자기 뜻대로 자기 한 몸을 움직일 수 있다? 없다? 없거든. 없으면 종이라 그러지. 그걸 개인적 인격체로 치지 않습니다. 종이 되면 그건 재산목록에 들어가지 인간적인 인격체로서의 존엄을 인정하지 않는거에요. 실제 종이 되보셨어요 여러분들? 종 함 되봐요. 나라는 개념을 유지하기가 심히 어렵다라는걸 자각하게 됩니다. 감옥 안에 기를 쓰고 자리 다툼을 하는 것은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섭니다. 재소자들끼리도 계급이 떨어지면 시킴을 당해야 되잖아요. 자살했뿐다. 나라고 하는 개별적 인격체를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사라져버린다. 모습은 바뀔수도 있지만 나 한몸은 내맘대로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건 포기할 수 없다라는 거야.
그러면은 우리가 지금까지 나라고 불렀던 육근을 한번 생각해보자. 그러면 이 육근이라 하는 것에 상일성이라는 것과 주재성이 확보가 되있으면 이걸 나라고 해도 된다? 안된다? 해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근을 지금부터 반성을 해보자. 이 육근에 상일성이라는게 있습니까? 육근에 상일성이 있으려면 눈이든, 귀든, 코든, 혀든, 몸이든 이 한 몸안에서는 한가지 모습이 영원히 진행되어야 한다. 근데 늘 이 모습입니까? 이미 많이 바꼈죠. 그래도 지금까지 바뀐건 그래도 괜찮아. 근데 지금부터 어떻게 됩니까? 늙잖아. 또 병들잖아요. 그리고 결국에는 죽잖아요. 그럼 이 한몸이 전혀 한가지 모습으로서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육근을 고찰해보면 항상성이 없다. 이것을 무상 그러는거야. 우리 육근은 무상하기 때문에 나라고 할 수 있는 개연성이 줄어들죠. 두번째 주재성이 있는지 확인해야한다. 남은 내마음대로 못해도 나만큼은 내마음대로 할 수 있는걸 주재성이라 그랬죠. 예를 들어서 늙을때 늙고 싶어서 늙습니까? 내 뜻대로 안되죠. 내 뜻대로 하자면 영원히 건강하게 사는것 아닙니까? 근데 병들어. 내 뜻대로 안되거든. 죽기 싫잖아요? 그런데 사망에 이른다. 도대체 내뜻대로 되는게 없다. 태어날때 내 뜻대로 태어났어? 병이 내뜻이였고 죽음이 내 뜻이여서 늙고 병들어 죽는거야? 아니다. 주재성이 없는 것을 보고 뭐라 그런다? 고 라고 그래. 괴롭다. 여러분들 언제 괴로움을 느낍니까? 지 뜻대로 안될 때 괴로움을 느껴. 지 뜻대로 안될 때 아 힘들다 아 괴롭다. 우리가 늙음을 괴로움이라 그러고, 병듬을 괴로움이라 그러고 죽음을 괴로움이라 그러죠. 그걸 왜 괴로움이라 하는줄 압니까? 늙는것 자체가 괴로움은 아닐수 있어. 근데 지 뜻과 반대로 벌어진 일이라서 그래. 지는 안 늙고 싶은데 지 뜻대로 안되고 늙으니 괴로움이요, 지는 병안들고 싶은데 지 뜻과달리 병드니 괴로움이요, 지는 안죽고 싶은데 그러니까 괴로운거에요. 지 뜻과 반대되는 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고통이 늘어납니다. 네이버 검색을 하다보니 이런게 있더라고, 독감 확실히 걸리게 하는법 가르쳐 주시면 내공 다 드립니다. 요래난거야. 여고생 한명이. 독감이 유행해서 독감 걸린 친구들 학교 안가도 결석으로 안치고 집에서 놀았는데 지는 이상하게 독감이 안걸리는거야. 옷을 얇게도 입어보고 이불을 차고 자기도해봐도 독감이 안걸려갔고 지 혼자 학교를 계속나가니까 이게 안좋은거야. 그럼 그 여학생이 독감에 걸렸을때 그 독감은 여학생에게는 기쁨이지. 독감이라는 병이 고통이 아니고, 독감 걸리기 싫은데 걸리는게 고통이야. 우리의 고통은 그런 이중성이 있습니다. 죽음도 그래서 해결할 수 있는 기미가 있는줄 몰라. 죽음 그자체도 나름의 육체적 고통을 갖고 있겠지만 실제 죽음이 고통인것은 너무너무 죽기 싫어한다라고 하는 이 탐착에 있는줄 몰라. 그것만 적절히 통제할 수 있으면 뭡니까? 가벼울 수 있을것 같거든. 늙지않고 병들지 않아도요 괴로움이 상존합니다. 부처님께서 애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 우리삶에 있다그랬어요. 그리고 원증회고, 미운자와 만나는 고통이 있다. 좀 오래같이 있었으면 하는 사람은 어찌 그래 빨리 떠나는지. 그리고 저놈 안봤으면 내가 밥맛이 나겠다싶은 고건 어찌 그리 가까이 와갔고 알짱알짱 된다. 그건 뭡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오래 있고 싶은게 지 뜻이야. 그럼 시간이 언제갔는지 모르게 금방 가갔고 헤어져야되. 때로는 사별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참 내뜻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괴로워. 근데 미운사람은 한시라도 안봤으면 좋겠고 떨어졌으면 하는게 지 뜻인데 그건 붙어있고 너무 건강해. 진짜 오래삽니다. 지뜻대로 안되. 우리가 살면서 구하고자하는게 뜻대로 구해집니까? 뜻대로 안구해지죠. 그런것도 고통이다. 고통이라고 하는 개념, 괴로움이라고 하는 개념의 핵심에는 주재성의 상실이 들어있다. 남은 내마음대로 못해도 지 한몸 덩어리만큼은 지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주재성이 있는건데 그 주재성을 우리에게서 보장할 수 없는거야. 주재성이 없는거 그걸보고 고라 한다.
그러면 육근이라고 하는 것은 상일성이 없어서 무상이고, 주재성이 없어서 괴롭다라고 한다면 이걸보고 나라고 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관습적으로 나라고 불러왔을 뿐이지 참된 의미에서는 나라고 할 수 없다. 나라고 할 수 없다를 뭐라 그럽니까? 무아라고 그러는거야. 그래서 만들어진말이 무상, 고, 무아 이걸 우리가 뭐라고 부릅니까? 삼법인 ! 요 인자가 무슨 인잡니까? 도장인 자야. 무드라. 불교는 무상, 고, 무아 삼법인을 인감으로 삼습니다. 불교라는 종교의 인감도장이고, 옥새야. 그래서 무상, 고, 무아가 찍히면 불교고, 저게 안 찍히면 불교가 아니다. 이걸 잘 이해하려면 근본적으로 참나가 상일성과 주재성을 갖추어야 된다라고 하는 전제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근데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육근은 그 두가지 조건 못갖추고 있다. 무상하다. 괴롭다. 그러니까 진짜 나라고 할 수 없다. 없으니까 나라고 부르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결국에는 나하고 나자신일것 같애도 진정한 의미에서는 나라고 할 수 없거든. 그래서 업의 주체를 뭐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육근. 그러니까 앞으로 여러분들도 내가 말이야 이렇게 말하지 마라. 이 육근이 말이야 이래 이야기를 해야되. 이걸 나라고 하는 순간 이미 불교가 아닙니다. 이건 우리가 어릴 때 바뀐 줄 모르고 지 새낀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가 아닌데 지라고 지금 착각하고 있는거. 굳이 나라고 한다면 가짜나일 확률이 커. 그래서 배신합니다 이 육근은. 여러분을 배신해요. 이게 진짜 나라면은 내가 이렇게 애지중지하고 키우는데 옷입혀주고 씻겨주고 감아주고 매겨주고 돈주고 밥주고 근데 탁 죽을때 되면은요. 돌아보도안하고 숨끊으뿝니다. 그 배신감을 어떻게 할래? 이게 내라면은 그런 배신 안합니다. 참나는 상일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지도 죽지도 늙지도 머물지도 않습니다. 불생불멸이에요. 그래야지 진짜 나에요. 근데 이거 나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까, 안합니까? 할거죠 그죠? 늙기도하고 병들기도 하죠. 왜 그런줄 압니까? 이게 진짜 내가 아니라서 그래요. 근데 우리는 이걸 뭐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걸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한 진짜 나는 잊어버립니다 여러분. 못 찾습니다. 찾을 시간도 얼마남도 안했는데. 우선은 이게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부터 바로 눈치를 채야되. 그러니까 언어생활부터 순화하자. 이걸 아직 나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앞으로는 나라고 부르지 말라. 육근도 자기를 표현하는데 충분합니다. 세상에 하나뿐이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업의 말뜻은 행동이고, 그 행동은 나의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말을 굳이 안쓰시고 육근의 행동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업의 주체가 육근으로 확정이나고 나면은 그 다음에 우리는 자연히 업의 전제에 대해서 물어야한다. 업의 전제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뭐냐면 아무리 육근이 일으킨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걸 전부 업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서 여러분들 밤에 주무실때 행동합니까, 안합니까? 다른말로 움직입니까, 안움직입니까? 잘적에 딱 누운 그대로 있다가 일어납니까? 사람은 그래몬해. 자면서 뒤척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면서 뒤척인것도 육근이 행동한 거라고 업이라고 부를 수 있냐 이거야. 아이다이기야 그거는. 그런건 업이라 안합니다. 우리가 업이라고 부를 때는 반드시 이 전제가 지켜져야되니, 그 전제가 뭐냐? 의지적 행동일 때만 업이라고 합니다. 육근이 일으키는 행동이라 하더라고 그 행동이 의지적 행동일 때만 업이라고 한다.
그럼 이 의지적이란 말이 무슨 뜻인가 분석을 해야되. 의지적이라는 말은 두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하나는 의식적이다. 또 하나는 의도적이다. 의식적이면서 동시에 의도적인 것을 보고 뭐라 그런다? 의지적이라고 그래요. 요경우에는. 우리가 밤에 자면서 움직일 때 의식하면서 움직입니까. 전혀 의식없이 본능적인 움직임을 보일 뿐이에요. 의식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업이라고 안부르는 겁니다. 업은 자기가 행동하는걸 스스로가 무슨 행동을 하는가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고 의식하고 있고 인식하고 있을 경우에만 업이라 합니다. 그래서 자면서 벌어지는 일들은 일단 업에서 뺍니다. 일단 업에서 뺀다는 것은 자각하지 않고 행한 행동도 언젠가 취급을 하긴 하지만 업은 일단 니 의식 속에서 벌어진 행동부터 문제 삼겠다는거야. 마치 다른 사람의 행동은 빼고 육근 그 행동만 포커스를 맞추겠다는 의도하고 같죠 그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벌어지는 행동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많습니다. 또는 의도하지 않은 행동도 뺍니다. 예를 들어서 저놈 내가 미운 놈이니까 요돌로 머리에 상처를 입혀야되겠다. 의도를 가지고 딱 겨냥을 해가지고 탁 던져가지고 머리를 맞쳐서 박이 깨졌다. 그러면 폭력의 업이 발생을 한 겁니다. 근데 그럴 생각이 없었어. 그냥 돌던지는게 재미있어서 던졌는데 하필이면 누가 와갔고 박이 깨졌다. 그럼 그걸 업이라고 안칩니다. 업은 실수같은건 일단 빼. 앞으로 따질 땐 따집니다. 따지지만은 지금 우리가 의식하고 의도하면서 벌이는 나쁜 일도 한도 끝이없어. 그러니까 그것부터 문제삼자 이겁니다. 그래서 이 전제를 보면 한가지 궁금한 문제가 풀립니다. 길거리에 개미가 있어. 개미를 밟아죽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개미가 있는줄 모르고 어떻게 지나가다가 밟아 죽일수 있는 경우도 있겠죠. 이런 경우에는 업으로 안친다. 그런데 개미가 있는 줄 알았어. 장난이라도 쳐보겠다는 심사로 분명히 죽이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밟아서 죽였어. 그러면 살생업이라고 해서 지옥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일단 니가 의식했고 의도한것에 대해서부터 우리가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고 하는 그 절차가 강력하게 개입을 한겁니다. 그런 경우도 나중에 가면 따집니다. 수행에 가면 따집니다. 무의식적으로 벌어진 실수에 대해서도. 그러나 일단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것에 대해서만 문제로 삼는것이 업입니다. 그러니까 이 업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육근의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그 육근이 의식했느냐 의도를 분명히 가지고 했느냐 이 두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그걸 의지적이라고 부르면서 이런 육근의 의지적인 행동이나 작용에 대해서만 우리가 업이라는 말을 붙여준다.
업과 관련된 4번째 주제가 목적이다.
우리가 업이라고 하는것을 지을때는 그 업의 목적이 없을 수가 없다. 그 업의 목적을 뭐라고 해야 될거냐. 여러분들 오늘 이렇게 오신것도 뭡니까 여기오기로 의도해서 여기왔고 여기오는동안 여러분들은 의식적이였다. 여러분들 여기 오셨다는 것도 업이거든. 그럼 여러분들 여기 왜 왔느냐. 목적이 있었을 거야. 강의 들을려고 왔다. 강의 왜 들으러 왔어요? 행복해볼려고, 좀 잘살아볼려고. 근데 그것보다도 더 근원적인 답이 있어요. 행복해볼려고, 잘살아볼려고 이건 업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조금 핀트가 떨어집니다. 가장 적합한 업을 짓는 목적을 규정하고 있는 단어는 뭐다? 편하려고. 행복하게 되면은요 이거는 범주론에 있어서는 그 폭이 상당히 넓어집니다. 업이라고 하는 것만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수행도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거든. 그런 것과 구분도 문제가 될뿐아니라 행복이라는 말 그자체가 아직은 좀 애매모한 면이 있습니다만은 업이라고 하는 행동을 전제로 해갖고 생각을 해보면은 행복과 같은 그런 이념적이고 좀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우리 피부에 와닿는 개념이 있으니 그게 뭐다? 요단어다.(편하려고) 편하려고 움직인다. 행동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움직이는 건데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해보십시요. 편하면 안 움직입니다. 사람이 편하면 꼼짝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다가 조금 움직입니다. 왜 움직이는 줄 압니까? 어 가만히 있는게 불편하거든. 편할 수 있는데만큼 움직입니다. 모든 행동은 불편함을 멀리하고 편할만큼만 움직이게 되있어. 아기가 우는 것도 불편하니까 우는 겁니다. 편할려고 우는 겁니다. 편한대도 불구하고 행동하고 움직이는데는 더 편할려고 움직입니다. 여러분들 오늘 여기 오시는 것도 결국에는 뭔지 압니까? 편할려고 이자리에 오신겁니다. 여러분들은 지혜로왔고, 결국에는 앞으로 불편해진다는 것을 눈치를 챘어. 그니깐 불편해지기 전에, 불편함이 닥쳐오기 전에 그 불편함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미리 알려고 지금 행동하고 있는셈이야. 우리가 지금 당장 불편하지 않을지 모릅니다만은 여러분들 잘 알다시피 우리는 앞으로 예상치 못한 불편함들이 이제 바야흐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늙는다라는거 그거 불편 그자쳅니다. 계단을 내려가도 다리가 불편하고 밥을 먹더라고 소화가 불편하고 잠을 자더라도 허리가 불편해. 그렇게 불편해진다는 것을 우리가 미리 아는 겁니다. 그래서 더 늙기 전에 뭡니까 조금이라도 덜 불편할 수 있는 무언가 조치를 취할려고 하는 노력들을 사람들이 많이 합니다. 그게 노후준비라는 거에요. 사실은. 그런것도 다 업에 들어갑니다. 업의 목적을 편하려고 규정하는 것은 정말 적합한 표현이 아닐수가 없어요. 여러분들 주위에 있는 사람이 바야흐로 행동을 개시할 때에는 무언가 불편함이 있어서 편하려고 행동을 개시하는거고, 편한대도 불구하고 행동을 일으킬때는 더 편할려고 행동을 일으킨다라고 눈치를 채면 정확합니다. 할짓이 없어서 쓸데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없다? 없습니다. 병이 들면 또 불편합니다 여러분. 자고 싶다고 못자고 먹고 싶다고 못먹습니다. 결국에는 뭐가 제일 불편합니까? 죽습니다. 저희 모친같은 경우에 요즘 늘 하시는 말씀이 이제 소원이 있다면은 자는 길에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그 이야기의 속뜻은 뭐냐? 죽음이 안겨다 줄 그 불편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정신 똑바로 챙기고 그 죽음을 맞이 할만큼 그 강단이 안생기는 거에요. 살아도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지만, 죽을 때도 좀 편안하게 죽었으면 좋겠다 생각을 해. 내가 볼때 오늘 여러분들 이자리에 온 이유도 죽을 때 좀 편하게 죽어볼라고. 죽을 때 좀 편하게 죽어볼라고 여기온거야. 죽을 때 편하게 죽을 수 있는 법이 혹시 있지 않을까 싶어갖고. 사람은 불편할 때 편하려고 움직이게 되있습니다. 그게 업입니다. 편하다하더라도 미래를 예측하여 불편함을 미리 다가올 것을 알아채서 미리 그 불편함을 대비하는 행동을 일으킵니다. 그 행동을 보고 또한 업이라고 한다. 업의 목적은 뭐다? 편하려고.
산다는 것 자체가 원래 고단한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좀 편해볼려고 하는 본능적 욕구를 가지지 않을 수가 없어. 그 편해볼려고 하는 본능적 욕구에 의하여 우리가 의도적이면서도 의식적으로 행동을 일으키게 되니 그 행동을 업이라 불렀다. 편하려고 일으키는 육근의 의지적 작용을 업이다라고 한다.
다섯번째, 업의 방법이라는 주제를 공부하자.
편하려고 일으키는 육근의 의지적인 행동에 업만 있는게 아니고, 수행이라는 것도 분명히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수행자들의 수행도 수행자 스스로의 육근으로 그 수행자의 무의식적인 부분도 이야기가 됩니다만은 주로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육근의 의지가 전제가 되어야 되고 그리고 수행자가 수행을 할 적에도 목적은 행복하려고, 편하려고 수행하지 수행자가 수행할때 불편할려고 수행하는건 아니거든요. 편하려고 일으키는 육근의 의지적 행동 그랬을때 꼭 업이라고만 할 수 없고, 수행도 사실은 아주 핵심적으로 그와같은 정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 업도 편하려고 하는 육근의 의지적인 행동이고, 수행도 편하려고 일으키는 육근의 의지적인 행동이라면은 업하고 수행하고 다를게 뭐있느냐? 바로 그 차이점이 방법론 상의 차이점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방법을 연구를 해야되는 겁니다. 수행자가 편하려고 할 때 편하기 위해서 취하는 방법하고, 우리처럼 범부가 업을 통하여 편하려고 할 때 편하기 위해서 취하는 방법하고 달라. 어떻게 다를것 같아요? 이건 상당히 수준높은 질문이고,답일 것입니다. 그래서 요건 제가 바로 답을 제시해드리겠습니다. 아집 ! 수행하고 업의 차이는 방법의 차이에 있는데 어떤 방법론상의 차이가 있느냐? 아집을 대하는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만약에 아집의 유지, 존속을 통하여 편하려고 일으킨 육근의 의지적 행동이면 업이라고 부르고, 이 아집의 소멸, 멸진을 통하여 편하려고 일으킨 육근의 의지적 행동이라면 수행이라고 부른다. 아집이 문제가 되는거야. 우리가 업을 공부하면서 주체를 이야기 하는데 시간을 좀 많이 보냈습니다. 업의 주체가 뭐가 그랬어요? 육근이라 그랬죠. 그랬을때 나라고 안하고 육근이라고 한 이유가 뭐라 그랬습니까? 상일성과 주재성이 없기 때문에 나라고 그럴 수가 없고, 육근이라 불러라 그랬어요.
여러분들 아집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죠. 아집이라고 하는 것을 긴밀히 분석해보려고 하니깐 주의를 잔뜩 기울여서 들으시길 바랍니다. 아집의 인도말은 atma graha 이 아트마 하는 것을 아자로 옮겼고 이 그라하라는 말을 집자로 옮겼어. 그라하라는 인도말은 쥔다라는 뜻입니다. 움켜쥔다. 그래서 이 집자가 무슨 집잡니까? 잡을 집 자지요. 그런데 이 집자가 사실은 좀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집착이거든. 이 집착이라고 하는게 무언가 했더만은 이 집착이라고 하는 것이 단일 개념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마치 우리가 나라고 할려면 몇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상일성이라는 조건과 주재성이라는 조건이 갖추어져야 되는것처럼 우리가 집착이라고 할때도 두가지 개념이 합쳐진 복합개념이다. 첫째가 사견 입니다. 집착에는 그 속에 뭐가 들어가 있다? 잘못본게 들어가 있습니다. 집착에는 무엇에서부터 시작한다? 사견에서부터 시작한다. 사견, 뭘 잘못본겁니다 일단. 이 집착이 사견이라 그런다면은 그 사견의 대상이 뭐가 되가 있습니까? 나가 되가있죠. 아트만이 되가있죠. 아트만이라는 것에 사견이 결합하면 두가지 경우가 나오게 됩니다. 아트만을 잘못보는 경우가 있고, 무언가를 아트만이라고 잘못보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어. 아트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틀리게 보는 경우가 있고, 무언가를 아트만이라고 잘못보는 경우가 있을수가 있어. 어떻게 차이가 납니까 그 두가지 경우는? 아트만을 잘못본것은 잘못보다의 목적어가 아트만이 되고, 무언가를 아트만이라고 잘못본것은 잘못본것의 목적어가 무언가가되. 다시말해서 잘못보는 목적어가 아트만일때가 있고, 잘못보는 목적어가 무언가 일때가 있어. 아트만이 아닌 무언가를 아트만이라고 잘못 보는것 그런 경우가 하나가 있고, 무언가를 아트만이라고 잘못본게 아니라 아트만을 두고 아트만이 아니게 보는것도 아트만을 잘못보는게 되. 어느쪽 아집인거 같아요? 두가지 아집이 다있어. 다있는데 업을 이야기할때는 뭐다? 무언가를 나로 잘못본 아집만을 이야기를 합니다. 아트만 그자체가 나타났는데 그걸 잘못본 아집은 업의 차원에서는 이야기가 안되고 이건 시퍼진 수행자가 생사가 교차할때 경험하는 고런 부분이기 때문에 요거는 특수상황이 됩니다. 일단은 여러분들은 무언가Q를 나라고 잘못 보는 아집을 지금 한번 생각해라. 그러면 무엇을 나라고 잘못보는 아집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지 육근이지. 이 Q가 뭐가 됩니까? 육근. 이게 지금 우리상탭니다. 육근은 무상하고 육근은 괴로워서 육근은 무아라 그랬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여러분들 이 육근을 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근데 육근은 내가 아니죠. 내가 아닌 육근을 두고 나라고 불렀죠. 잘 부른겁니까, 못부른겁니까? 잘못 불렀죠. 이런걸보고 뭐라 그런다? 아집이다그런다 이거에요. 지금 우리는 그런 아집 상태다. 여러분은 누군지 압니까? 여러분은 뭔지 압니까? 부처님의 분석에 따르면은 점잖게 말해주면 여러분은 육근이고, 수행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아집덩어리입니다. 그냥 육근으로 있는게 아냐. 이 육근이 내가 아닌데도 철저히 나라고 잘못 본 상태로 있어. 여러분이 나라고 부르는 나는 정확하게 말하면 육근이야. 이 육근을 보고 나라고 부르고 있으니까 잘못 본거죠. 잘못본거는 뭐다? 집착이야. 여러분이 여러분을 나라고 생각하고 있고 나라고 여기고 있는한 그건 뭐다? 아집덩어린거야.
근데 하나가 이상한게 있어요. 집착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잘못보는걸 바탕으로 한다 그랬죠. 근데 잘못보는 것만으로는 사견이다 그러면 되지 더이상 딴말할 필요가 있다, 없다? 없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견이라 안하고 뭐라 부릅니까? 집착이라는 말로 부르죠. 이건 사견에 더해서 한가지 좋지못한 그런 정신적 행위가 더해졌다라는 거죠. 사견에 요놈이 더해진걸 보고 집착이라 불러요. 자. 우리가 육근을 분석해가지고 상일성이 있고 주재성이 있어야 나라고 할 수 있는데 무상하고 괴로우니까 나라고 할 수 없다라고 분명히 알았죠. 알아 들었는데도 왜 집에 가서는 또 이걸 육근이라고 안부르고 내가 말이야하고 나라고 불렀냐 이말이야. 이 집착 속에 잘못봤다라는 사건보다도 훨씬 심각한 사건이 하나더 개입되 있다라는 증거가 아닐수 없어요. 부처님께서 일러 주셨는데도 돌아서면 또 이걸 뭐라 부른다? 내가 말이야하고 나라고 부른다 이거야. 왜 그럴까요? 뭐 때문이라 그랬죠? 악습이라 그래 악습 ! 잘못 보는게 나쁘게 버릇이 들어버린거야. 이게 문제에요. 나 아닌 육근을 나라고 보는 것은 잘못 본것이고 잘못 본것을 버릇 들인것은 잘한 버릇입니까, 잘못한 버릇입니까? 나쁜 버릇이지. 이처럼 사견과 악습이 결합한 것을 보고 뭐라고 부른다? 집착 그러는거야. 여러분과 나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다? 나 아닌 육근을 나라고 보는 사견이 나쁘게 버릇든 상태로 지금 하루 하루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부처님은 또한 우리를 평가하고 계셔요. 그러니깐 암만 바른 견해를 제시해주셔도, 정견을 제시해주셔도 악습에 걸려갖고 다시 사견으로 돌아가버리는 거야. 그러니까 수행이라는게 뭔지 알겠죠? 사견을 정견으로 바꾸고 악습을 좋은 버릇으로 바꾸지 않으면은 어떻습니까? 아집이 제거되지 않겠죠. 그러니까 수행자는 어떻게 해서 편안함을 추구한다? 아집의 소멸과 멸진을 통하여 편안함을 추구한다 그랬죠. 그런데 업을 일으키는 우리 범부들은 어떤 방향을 취하고 있다? 단순히 나라고 잘못보고 있는것이 아니고 나라고 집착을 해요. 아집을 일으키는 당사자는 자기가 아집을 일으킨 건줄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지.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를 나라고 부르는데 하등의 이상함을 느낀다, 안느낀다? 안느낀다. 진짜 나가 아니더라도 집착한 당사자에게는 그게 진짜가 되버린다. 그러면 여러분 문제가 하나 벌어집니다.
육근은 상일성과 주재성이 없는데도 이걸 나라고 봤다. 그걸 아집이라 불렀죠. 이걸 나라고 보는것이 악습에 의하여 무장까지 되어있을때는 육근이 육근 스스로에 대해서 무언가 두가지를 요청을 하게 됩니다. 너 영원해야 된다고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너 니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된다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왜? 너는 나니까. 육근이라는게 진짜 내가 아니다라는걸 안 사람은 뭡니까? 아 이건 언젠가 변할거야 하고 기다립니다. 육근이 진짜 내가 아닌줄 안 사람은 어떻합니까? 이건 결국 내뜻대로 안된다라는 걸 미리 압니다. 그런데 이걸 나라고 안사람은 이게 나기 때문에 나는 영원해야 되잖아. 나는 어찌 해야됩니까 여러분? 내뜻대로 되야 되잖아. 그런데 실제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영원합니까, 안합니까? 안해. 실제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뜻대로 됩니까, 안됩니까? 안돼. 실제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영원하지 못한다하더라도 나라고 집착하고 있는 이상은 영원해야된다 라고 요청을 하게 됩니다. 무상하면은 무상할수록 무상해지면 무상해질수록 더 영원해야된다라는 욕구가 끓어오르게 되. 어디에서? 아집덩어리 속에서. 그게 우리 현실탭니다. 내 뜻대로 안되면 안될수록 너는 나니까 내뜻대로 되야된다라고 요청을 합니다. 편안할 때는 괜찮애. 변화가 없을때. 지 뜻대로 다 될때. 그때를 우리가 뭐라 그런다? 편안하다 그래. 그럴때는 가만히 있다가 지 뜻대로 안되고 아프거나 다치거나 늙어가거나 하면은 어떻게 합니까? 난리가 납니다. 난리가 난다는 말은 변해서는 안된다는 거야. 내 뜻대로 안되어서는 안된다 이거야. 괴로와서는 안된다 이거야. 하면서 활동을 일으키죠. 그래가꼬 어쩌다보면 변하려고 하는걸 활동을 통하여 막을 수가 있죠. 그럼 지 뜻이 이루어진거죠. 순간적으로 이루어질 때가 있죠. 이루어지면 그걸 무엇으로 삼는다? 편함으로 삼는거야. 그러면 그 이루어짐이라는건 뭡니까? 나 아닌것을 나라고 집착한 아집이 잠시 유지되고 그 아집 덩어리가 잠시 존속된 것에 불과하죠. 그래서 내가 뭐랬습니까? 아집의 유지와 존속을 통하여 편함을 추구하면은 업이다 이랜거야. 우리가 지금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부처님은요 몇말씀 하지 않으면서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수행자가 아닌바에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다? 나 아닌 것을 나라고 집착한 다음에 이 놈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자꾸 아프고 자꾸 변하고 자꾸 고통스러워 지는걸 어쨌든 안 아프게 만들고 어쨌든 안고통스럽게 만들고 어쨌든 안변하게 만들려고 그 모진 활동을 일으켜. 이 활동을 업이라고 그래. 업을 일으키다보면은 어느 순간까지는 지 뜻대로 되. 지 뜻대로 되면 뭘 느낍니까? 좀 안식하는거야. 좀 편안해지는거야. 고렇게 한번 두번 순간순간을 모면하면서 편함을 추구하면서 뭡니까? 어쨌든 나아가보는 것이 범부들의 삶의 현실태라는 거야. 우리 오늘 밥 먹었습니까, 안먹었습니까? 왜 밥먹었습니까? 배고파서 먹었죠. 배고프다라는게 뭡니까? 고통이죠. 배고프다는게 왜 고통입니까? 우리가 배가 고프다는건 이 몸을 유지하는데 지금 문제가 발생했다는 소립니다. 이 몸을 유지하는 기초대사량을 충족시킬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에너지가 여기 들어와야 되는데 그래야지 이 몸이 유지가 되. 좀더 다른 표현을 하자면 내 아집이 유지가 됩니다. 근데 안드러오니까 유지가 안되거든. 유지가 안되면 수백쪽의 세포가 일제히 유지시키라고 명령을 내놓습니다. 주문을 내놔. 그래서 먹습니다. 먹어주면 에너지가 분산되면서 잠시 그 변화의 위험앞에서 유지하는 쪽으로 시간을 조금 지연시키는거야. 그럼 고 순간 우리가 느끼는게 뭡니까? 아 배부르다. 공통분모를 뽑아서 이야기하면 뭡니까? 아이고 편하다. 근데 그 편함이 얼마나 갑니까? 낼 아침에는 또 한바탕해야 되. 그리고 해결짓고 나면 점심때 또 한바탕해야 되고, 그게 자기 뜻대로 먹을게 계속 있으면은 또 괜찮아. 영원히 하루세끼 먹을 수 있다라는 보장이 없을 줄도 모르고 나중에는 소화도 못시킬 그런 어떤 신체적 결함이 발생하면은 에너지가 공급이 안되면 괴로워집니다. 그 괴로움을 다른 말로 표현을 하자면 참 불편해져.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병원에 갑니다. 링게 놔줍니다. 그렇게라도 맞고 있으면 아이고 힘이난다 그래. 이 범부의 삶이라는 것은 업을 통하여 순간순간을 연명하는 겁니다 여러분. 왜 그걸 순간순간을 연명한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줄 압니까? 아집의 유지 존속이거든. 진짜 나의 유지 존속이 아니고. 진아의 유지 존속이 아니고 뭐다? 아집의 유지 존속 입니다. 진짜 나가 아니어서 상일성도 없고 주재성도 없고 무상하고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를 그러니깐요 상대를 잘못 골랐어. 그래서 집착이라 그러는 거에요. 영원한 것을 영원하다고 붙들어야 되고, 주재성이 있는 놈을 주재성이 있다고 붙들어야 되는데 대단히 불행하게도 여러분과 내가 나라고 붙든 것은 육근인데, 이 육근은 상일성이 없고 시시각각 변하며 주재성이 없어서 결국 내 뜻대로 안되는 놈이야. 이 놈을 나라고 붙들고 있으니 뭡니까? 영원해야 된다, 니 뜻대로 해야된다 하고 바람은 생기는데 지 바람대로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거든. 남의 새끼가 시험 못친걸 보고 가슴이 아픕디까? 남의 자식 다친거 보고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쓰립디까? 안그렇죠. 집착 안하니까. 집착 안하니까 아무렇지도 않해요. 근데 여러분 지 새끼가 다쳐봐. 너무너무 내 속이 아파. 집착하니까 그런거에요. 자식은 나의 연장선상으로 집착이 되니까. 이게 내가 아닌줄 알면은요, 이거 죽을 때 힘들어 할까요, 안할까요? 이거 죽을때 눈물 흘릴까요?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않거나 내가 나를 나라고 할때는 상일성에 대한 본능적 요청이 있는거야. 영원하니까 나라고 했던거야. 그리고 나라고 한이상 영원해야되. 꼴랑 백년도 못채우고, 백년이면 백년동안 지하고 싶은대로 다하고 마지막가서 꼴까닥 가면은 그래도 억울하면 억울할것 같은데 이노무 한평생 살면서 내 뜻대로 한건 뭐가 있고, 내가 또 영광을 보고 영화를 누린적이 어딧어요? 하루하루 고단한 삶 보낸다고 참 애쓴다고 애쓰는데 고나마 그것도 오래가지 못하고 백년도 못채워가꼬 인제 꼬꾸라진다 생각하면은 눈이 감길것 같애요? 그래서 사람이 죽을때 다 눈뜨고 죽는 겁니다 여러분들. 기가 막혀서 눈을 못감아. 억울해갖고. 나는 억울해갖고 못 죽을것 같애. 여러분들 안그래요? 생각해보면 기가 막힙니다. 그게 다 어떤 개념에 의해서 설명이 되고 풀리느냐? 아집이라는 개념. 누가 그걸 니라고 집착하라했냐 이거야. 내 아닌걸 나라고 집착한 것도 누구다? 나야. 아~ 이 나라는 개념에 얽혀드는 미스테리 이거는요 깊이를 알수없을 정도로 심각한 겁니다. 우리가 업을 공부하면서도 육근이라고 하는 것은 육근일 뿐이지 나가 아니고 그걸 나라고 부른것은 아집에 불과하다라고 하는 이런 평가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있는 나나 내가 여러분들 이렇게 뵙고 있습니다만은 자기 당사자는 육근일 뿐이지 그건 내가 아니다라는 것을 거품을 물며 이야기하는 바입니다. 안타까운 개념이에요 여러분들. 더 안타깝고 속상한건 이래 이야기를 해도 돌아서면 또 나래. 돌아서면 하늘같고 땅같은 나야 이게. 금쪽같이 소중한 나야 이게. 손가락 하나도 누구한테 상처입기 싫어. 이 따글따글 영근 아집덩어리가 세세생생 굳을때로 굳어가지고 바늘이 안들어가. 그게 누구다? 여러분 스스로고 제 스스롭니다. 그래서 업이라고 하는 것의 방법론은 뭐다? 아집의 유지 존속을 통하여 편하려고 일으킨 육근의 의지적인 행동을 업이라고 부른다.
그럼 수행은 뭐라 그랬습니까? 반대 방향이야. 편함을 추구하고 즐거움을 추구하고 행복을 추구하는데 아집을 유지하는 쪽에서 행복감이나 편안함을 끄집어 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아집을 배껴내고 소멸시키고 멸진하는 쪽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특별한 방법론을 채택한 걸 수행이라 합니다. 요참 여러분들 납득시키기가 어려운 부분인데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어. 근데 음식을 어느수준 이상으로 먹으면 굉장히 안좋데요. 항상 병원에서 짜준 식단만 먹어야되고 심심하고 참 음식인지 그냥 고문지 맛 없는게 병원 식단이야. 친구들하고 모임에 나가. 친구들이 먹는 음식을 보면은요 곱창전골 보글보글 끓여가꼬 소주 탁하고 먹는데 지는 옆에 앉아가꼬 허연밥하고 야채같은거 요래 찍어먹고 앉아 있어요. 처음에는 미치겠더라는거야. 죽을 때 죽더라도 저거 한입만 딱 했으면 좋겠다. 근데 그거 먹으면은 몸에 즉방으로 피해가 와. 근데 이사람이 자꾸 몇번 지나고 나니깐 어느날 먹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먹지않는 즐거움이 느껴지더라는거야. 그 음식이 먹고 싶은 음식이면 음식일수록 나쁘니까 안먹는다 하고 안먹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얻는 즐거움보다도 종류가 다른 새로운 즐거움이 느껴지더라. 이해가 가실런지 모르겠어요. 이 수행의 즐거움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만은 본능적으로 아집의 부림을 당하는게 우리거든요. 그런데도 그걸 과감히 뿌리치고 뭡니까? 아집의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과감히 자기행동의 물구비를 틀었을 때 그때 쾌감이 있다는 겁니다. 마치 악의 유혹을 뿌리치는 쾌감이라 그럴까? 이런 쾌감이 있다라는 거야. 이 쾌감은요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격렬하다 그럽니다. 여러분들 요새 매운것들을 많이 먹어. 요새 불닭 그래가꼬 유행이 좀 지났죠. 사람들이 매운맛에 왜 매료되냐면은 고 매운성분이 캡사이신 이라는 성분인데 그 캡사이신이라고 하는 독한 성분이 뇌를 자극하게 되면은 뇌에서 그걸 보상하기 위해서 엔돌핀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엔돌핀은 뇌에서 유발되는 몰핀을 엔돌핀이라 그럽니다. 매울때는 고통스러워 고 고통만 딱 지나면 엔돌핀이 나오거든 그러면은 아 상쾌해지고 쾌감이 온몸을 감쌉니다. 우리가 이 아집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를 붙드는 임계치가 있어. 그 임계치를 넘어설땐 그렇게 힘듭니다. 근데 그거만 딱 넘어서면 후련해지는거야. 그러니까 여러분 청양고추의 매운맛을 견뎌내지 못하면은 캡사이신이 유발하는 엔돌핀의 후련함을 맛보지를 몬해. 아집이라는 것이 우리 발목을 잡을 때까지가 힘들어. 근데 그걸 탁 넘어서기 시작하면, 그래서 아집이 한꺼풀, 두꺼풀 벗겨지기 시작하면 아집의 노예가 되어가꼬 아집의 유지 존속을 편안함으로 삼을 때와는 뭡니까? 비교가 안될 정도의 기쁨과 쾌감이 육근을 감싸돌게 된다는 거야. 아집의 유지 존속만 추구하면 또 욕구가 생기고 들어주고 나면 또 갈증이 생기고 또 충족시키고 나면 또 욕구가 생기고 죽을때까지 그러다가 결국 아집앞에 굴복해야되. 비참한거야. 근데 수행은 뭡니까? 그거 극복합니다. 수행도 역시 편안함을 추구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편안함을 추구하는 방식이 아집의 유지 존속이 아니고 오히려 그 아집을 제거하고 소멸하고 멸진하는 방향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그리고 편안함을 찾으면은 그걸 수행이라고 한다. 왜 수행은 어려울까요? 수행이 어려운 것은 악습 때문이다. 우리의 아집을 제거하기 어려운 것은 아집 속에 악습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본거는 잘봐버리면 끝납니다. 사견은 어둠입니다. 정견은 밝음이야. 밝음이 가면 어둠은 사라진다. 그런데 악습은 회색빛이야. 암만 빛을 들이대도 회색을 제거하기는 어려워. 빛 뒤에 그림자가 남으면서. 왜 수행이 어려우냐? 아집을 제거해야되는데 아집을 제거하는게 그럼 왜 어려우냐? 아집에는 뭐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악습 ! 우리가 알아 그게 나쁜짓인지. 안다고 나쁜짓 안합니까? 알아도 나쁜짓 해. 왜? 나쁜짓 하는게 버릇이 되있으니까. 이 나쁜 버릇을 뭐라 그런다? 교리적으로 번뇌라고 부를 뿐이야. 이 악습을 번뇌라 한다. 그럼 번뇌가 한종류가 있다 그럽니까, 백팔번뇌니 하면서 여러종류가 있답니까? 많은 종류가 있죠. 그 번뇌의 종류도 다양하지만은 그 깊고 낮음의 차이도 참 다양합니다. 욕계 같은 경우에는 이성에 대한 성적인 욕구가 번뇌가 되고 색계같은 경우는 물질에 대한 집착이라는 번뇌가 주도해. 무색계는 물질에 대한 집착은 넘어섰지만 이념이나 가치나 의미에 대한 집착이 정말 강렬하게 우리를 붙들어. 욕계가 됬든 색계가 됬든 무색계가 됬든 거기는 그 세계를 지배하고 주도하는 번뇌가 있고 그 번뇌는 저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들어있는 아집의 한요소인 악습에 있다.
업의 주체를 육근이라 잡는 그 이유를 이야기하면서 이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촉감하고, 종합하는 능동적 인식주관으로 존재하는 것은 나뿐이다. 그래서 나라고 하면되고 나자신이라고 하면 되는데 우리가 왜 꼭 육근이라 하느냐? 그 이유가 뭐라 그랬습니까. 무상하고 괴로워서 진짜 나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진짜 나라고 할려면은 상일성과 주재성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없지 않느냐. 그래서 그건 내가 아니다. 그래서 육근이라 부르자.
눈, 귀, 코, 혀, 몸, 의지 및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 어느것이나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라는 속성을 지닌 것이다. 눈, 귀, 코, 혀, 몸 등에 있는 물질적인 부분은 물질의 성격상 주변의 영향을 받으면 어쩔 수 없이 변하고 만다. 우리 눈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한 물질 덩어리는 아닙니다 그죠? 그 물질 덩어리를 수단으로 본다라고 하는 정신적 그런 인식론적 작용을 포함해서 우리가 눈이라고 한다 그랬어요. 그렇기 때문에 눈이라고 하는 부분 안에는 물질적인 부분이 또 없는 것은 아닙니다. 눈 알맹이라 할지 이런 신경계같은게 없으면 또 본다라는 작용이 가능합니까, 안가능합니까? 안하잖아요. 그러면 눈 등에 있는 정신적인 부분은 싫지만 언젠가 따라서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 오근의 종합인 제 육의 근도 전오근과 불가분리이므로 역시 언젠가 따라서 변해야 한다. 이처럼 육근은 무상하다. 그러면 육근을 따라서 생한 육경도 무상한 것이 된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변하는 것이 모두 괴로움일 수 없습니다만은 그래서 병들었다 건강해지는 것도 변화이고 그런 변화조차 괴로움이라는 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모름지기 모든 변화가 결국에는 타락적 변화로 귀결되기에 변화하고 무상한것은 괴로움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무상하고 괴로운 존재는 나라고 할 수 없다. 순수한 의미에서 나는 상일하고 주재해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이처설 속에서 항상 이 두 속성이 함께 함에 주의를 기울이며, 무상하고 괴로워서 나라고 할 수없는 삼법인 속성도 이야기를 했지만은 육근에는 어떤 속성이 있다? 의지적 작용의 속성이 있다라고 하는 것도 업의 전제는 의지적이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은 내가 이야기를 한거에요. 우리가 행동이라고 다 행동이 아니고 반드시 육근의 행동을 업이라 하는데 육근의 행동이라고 다 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육근의 행동 중에서도 어떤 행동에 국한하자? 의지적인 행동에 국한하자 그랬죠. 기본적으로 육근에 어떤 기능 내지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의지적 작용의 속성이 육근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었던 거에요. 그래서 십이처설 속에서 항상 두 속성이 함께 함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다음 논술을 살펴봅시다. 저희 스승이셨던 고익진 박사님은 십이처설의 두 속성으로부터 업설이 전개되어져 나오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덧없고 괴로움이고 나라고 할 수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 명백한 사실을 인식하려하지 않는다. 한사코 모든 것을 덧있고 즐거운 것이며 그리고 자기 육근의 경우 그걸 나라고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사실과 정반대 되는 뒤바뀐 생각입니다. 이걸 우리가 전도망상 그럽니다. 그런 뒤바뀐 생각에서 다시 말해서 아집에서 인간은 나를 존속시키려는 끊임없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업이라는 술어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의지적 활동을 가르킨다. 이렇게 우리가 업의 방법론까지 끝냈고 이제 남아 있는게 방향 입니다.
업이라는 것에는 방향이라는 측면이 고찰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면은 가만히 우리가 하는 행동을 살펴보면은 외행동이라는 행동의 방향이 바깥을 향하는 것도 있지만은 내행동이라고 하여 업의 방향이 안을 향하는 것도 있더라 이말이에요. 예를 들어 우리가 배가고파 불편하죠. 그럼 우리가 편하려고 업을 일으킵니다. 행동합니다. 뭘 먹어야되. 그러면 다양한 활동을 일으켜서 먹을걸 확보할 겁니다. 바깥에 있는 음식물을 취하는 것은 행동 그자체가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전제로 해가꼬 행동이 이루어지고 있잖아요 그죠? 이에 비해서 이게 일단 내 목을 넘어서 버리고 나면은 이루어지는 행동이 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내 속에서 이루어진 행동이 시작된 순간부터는 바깥에 영향을 끼친다, 못끼친다? 못끼치지. 안에서 소화하고 있을 때처럼 바깥에는 아무런 영향을 못끼치는 행동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걸 보고 내행동이라 한다. 예를들어서 우리 옆에 폭팔물이 터져서 아주 강력한 열기를 뿜어내는 화재가 발생했다 이러면은 우리 몸이 불편해집니다. 우선 긴장을 해요 근육을. 움츠립니다. 움츠린 다음에 상황을 봐갔고 물을 가져와 불을 끈다든지 그렇게 할거다. 그럼 그때도 가만보면은 내가 움츠린다 긴장한다 요 행동은 어떻습니까? 바깥을 전제로 해가꼬 방향을 잡아서 행동이 일어난게 아니고 자기 스스로를 전제로 해서 행동이 일어난 셈이죠. 그죠? 이런 행동 역시 뭐라 부른다? 내행동. 행동을 해가꼬 바깥에 영향이 없는데도 행동이 있으면은, 편하고자하는 행동이 있으면 그걸 뭐라 부른다? 내행동 그래요. 그에 비해서 외행동은 뭡니까? 바깥의 무언가에 가시적인 그런 영향을 가하게 되는 행동일 경우에 그걸 뭐라 부른다? 외행동. 외행동만을 업이라 합니다. 업은 외행동만. 이거 참 중요한 이야기에요. 아집의 유지 존속을 통하여 편하려고 일으키는 육근의 의지적 행동 중에서도 외행동만을 일단 업이라 한다. 왜 그러느냐?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해하기 쉬운 것부터 설해지는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행동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렵습니다. 지 속에서 벌어지는데도 지가 잘 몰라. 여러분들 소화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압니까? 그냥 먹으니까 소화되더라지. 그러나 우리가 바깥에서 고기를 어떻게 잡느냐는 것은 정확하게 알아. 그게 뭔가 정체를 규명할 적에 내 속에서 벌어지는 것의 정체를 규명하는게 쉬워요? 아니면 내가 바깥으로 행동했을때 그 행동과 관련된 어떤 사건의 정체를 규명하는게 쉬워요? 보이니까, 들리니까, 냄새맡아지니까. 그러면 쉬운것부터 설해야 한다면 부처님께서 업의 차원에서 내행동에 대해서 언급을 하겠느냐? 안한다. 일단 뭐부터 이야기하고 들어가자? 외행동부터. 그런 입장에서 업은 뭐다? 외행동입니다 여러분들. 이 이야기를 나는 분명히 해드리고 싶어요. 업을 외행동이라 한다면 사람들이 묻습니다. 내행동은 뭡니까? 다시 말해서 외행동을 업이라고 불렀다면은 내행동은 뭐라고 부릅니까? 외행동을 업이라고 할때 업이라는 말의 원어가 뭐였어요? 카르마. Samskara(삼스카라) 둘다 카르(kar)라고 하는 의미 요소가 들어있다. 삼스카라도 일종의 행동은 행동이겠구나 하는걸 글자 자체가 우리에게 잘 암시해주고 있는 겁니다. 카르마는 그냥 행동이야. 그건 그만큼 별이야기 안해도 알아채릴 수 있을 정도로 그 행동의 단순성 내지는 간결성이 있다라는 거에요. 요 삼스카라가 한자로도 번역이 되거든요. 요 삼스카라가 한자에서는 행자로 번역이 된다. 색수상행식, 오온에서 행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그때 행은 내행동을 뜻한다. 그때 행은 외행동의 행이 아니고 내행동의 행이야. 또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 우리가 십이연기설에 가게되면은 고런 대목이 나타납니다. 그때 행 그게 바로 삼스카라 입니다. 그랬을때 여러분들 색수상행식 할때 오온이나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라고 할때의 십이연기는 부처님의 가르침 수준에 입각해 본다면은 대단히 깊은 수준의 가르침들 입니다. 초기불교만 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십이처 십업설법문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십이처십업설 법문을 토대로 해가꼬 육육법설법문이라는게 그 심오한 새로운 경지 속에 설해집니다. 그 육육법설법문에 가서도 행은 안설해져. 그 육육법설법문을 넘어서가꼬 오온사제설 법문에 가야지 색수상행식하면서 행이 나오고 그때 설해지는 행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다시 십이연기설 법문에 가가꼬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다고까지 설해야지 뭐다? 우리 내행동이 실제 어떻게 벌어지는건가에 대한 완벽한 정체 규명이 비로소 완료되는 것이 초기불교입니다. 그만큼 자기 속에서 뭐가 벌어지는지 알기가 어렵다. 이 삼스카라, 내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 쉽지가 않습니다. 이 삼스카라의 이론은요 나중에 유위법, 다시말해서 여러분이나 내가 생존하고 있을 때 생존의 현실이 있죠 그죠? 이 생존의 현실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힘, 능력을 뜻하는 개념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오래 살고 싶으면은 삼스카라가 강해야 된다는 이론이 나중에 나오게 되요. 왜? 저게 내행동이라 그랬죠? 행동은 뭐하러 하는거다? 편할려고 한다 그랬죠. 그 편할려고 하는 말 속에는 어떻습니까? 오래산다, 건강하다 이런거 다 들어있죠. 오래살고 건강할려면은 업보다도 뭐다? 삼스카라가 제대로 발생해야지 내행동 안에서 뭐해야 합니까? 이게 강건해야지 오래사는거거든. 그래서 삼스카라를 강화하는 방법이야 말로 무병장수하는 그 구체적인 방법론이 되고 부처님은 그런 교리도 설하셨어요. 수행자가 수행을 하되 건강장수하면서 수행을 할 수 있도록 그런 방법을 설했어요. 그리고 건강장수의 비결은 구조적으로 뭐다? 삼스카라를 얼마나 강화하느냐. 다시 말해 내행동을 얼마나 잘 일으키느냐에 달려있다. 그 내행동이 조화를 잃어버리거나 그 내행동이 어떻습니까? 절차를 이탈하여서 꼬여버리면 뭐다? 가뿝니다 여러분. 내행동을 할때는 어떻다? 절차나 순서나 방법론에 입각해서 아주 조화롭게 작동시키고 가동시키면 어떻다? 삼스카라의 힘이 강화되어 가꼬 그 한 개체의 생명이 천수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마 궁금할 거에요. 어떻게 하면 삼스카라가 강화되는데? 업에 대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어떻게 하면 오래 사는가 이야기가 급합니까, 안급합니까? 삼스카라를 강화하는 방법은 딱 한가지 뿐입니다. 그야말로 십이처십업설을 넘어가꼬 육육법설 단계까지 넘어서서 오온 사제설 이야기할 때가 있어요 여러분들. 오늘 이야기 해라고요? 절대로 수준을 어겨가면서 과도한 이야기는 안한다.
그래서 행이라는 건 뭐다? 내행동이에요. 삼스카라다. 이건 지금 업의 차원하고는 격차가 있다. 업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방향에 있어서 어떤 것만을 타겟으로 삼는다? 외행동만을 목표로 삼는다. 이로서 업이라는 것의 정의를 완전하게 성취하게 되는 겁니다. 업이란 아집의 유지 존속을 통하여 편하려고 일으키는 육근의 의지적 행동 중에서 외행동을 업이라고 한다. 요렇게 정의해야지 업에 대한 정의가 되는 겁니다.
업의 주체가 뭐라 그랬죠? 육근. 육근이 일으키는 행동 중에 어떤 행동? 외행동. 외행동이라하면 바깥을 향하여 행동한거죠. 그럼 바깥에는 뭐가 있어요? 바깥에 있는 걸보고 뭐라 그런다? 엄밀히 말하면 육경들(육근은 단수고). 바깥에 있는게 육경들이다 또는 육경이다라고 하는 이 이야기는 대단한 선언 중에 하납니다. 왜냐? 육근은 말하자면 나 자신(자기자신)을 뜻하죠. 자기자신의 바깥에는 육경들이 있다라는 말은 육경들 외에는 있다, 없다? 육경들만 있다라는 말 아닙니까? 육경들도 있고, 또 다른 것도 있는거야, 없는거야? 육근 바깥에는 육경들만 있다, 육경들도 있다? 바깥에는 뭐만 있다? 바깥에 있는 것은 다 뭘로만 부른다? 육경이라고만 부른다. 이건 여러분들 상당히 무서운 이야깁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야기한 육근이 업을 가할때 업은 외행동이어서 바깥을 향한다. 그 바깥에는 육경들만 있다라고 하는 이 이론을 뭐라 그런다? 십이처설이라 그래. 본격적인 부처님 교리가 하나또 소개가 되는 거에요. 십이처할때 처는 뭐예요? 이 처자가 무슨 뜻을 가진 말이냐는 거에요. 불교라는 종교가 우리에게 참 난해하게 느껴지는 건요. 이 용어의 취급에 있어서 상당히 곤혹스럽기 때문이다. 한자어를 바탕으로 하는 경우 치명적인 오류를 남깁니다. ayatana(아야타나), 열두개의 아야타나가 있다.
모든 존재가 육근과 육경들로 이루어진 12가지 속에 다 포섭되어 버린다. 이 뜻을 지닌 말이 처야 처. 여기서 처는 다른 처하고는 달리 포섭됬다. 분류 포섭됬다. 분류처 또는 포섭처로서의 처이다. 십이처같은 경우 십이와 처사이에 입자를 넣어가지고 십이입처라고도 이야기해요. 들어간다 이거야. 뭐가? 모든것이. 어디에? 열두가지에. 열두가지에 들어가는 처다. 그리고 앞에다 외자나 내자를 붙여서 내입처 또 어떨때는 외입처. 내입처는 안에 들어가서 분류포섭되는 것, 외입처는 밖으로 들어가서 분류포섭되는 것. 안에 들어가서 분류포섭되는게 여섯가지가 있어서 육내입처, 바깥으로 들어가서 분류포섭되는게 여섯가지가 있으니까 육외입처. 합쳐서 십이입처. 또는 십이처. 그렇게 된거에요 이게. 여기에 처는 들어가는거다. 분류되는 거다. 뭐가 들어가고 분류되느냐? 일체. 일체가 들어가고 분류되는 거다. 업을 우리가 외행동이라 부르는 것은 육근이 육근 스스로에게 행동의 방향이 설정이 되면 내지만은 육근이 육근이 아닌 바깥에 행동의 방향을 설정하게되면 뭐가 된다? 외가 된다. 그래서 외행동이라 했다. 육근이라는 건 나자신이라 그랬죠. 그럼 나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어디에 들어가고 만다? 육경들안에 다 들어가버리고 만다. 이와같은 십이처의 정신은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식과 아주 잘 연결시키고 있는 그런 양상을 보여줍니다. 육근은 뭐였습니까? 소위 육내입처라고 하는 육근은 뭐였습니까? 인식주관이었죠. 그리고 육외입처는 육경들인데 육경들은 뭐였습니까? 인식대상이었죠. 내존재인 육근이나 바깥에 있는 육경들은 그건 일단 인식이라고 하는 개념을 중심으로 파악을 했다 이 뜻입니다. 그렇게 인식주관인 육근과 인식대상인 육경들에 일체의 존재가 다 분류 포섭되어 들어가버린다 이말입니다. 그렇다면은 일체 존재할 때 존재라는 개념과 인식주관 내지는 인식대상이라고 할때 인식이라는 개념이 이 그림 속에서 하나로 연결이 되는 것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가 있어. 이게 십이처설입니다 여러분. 십이처설은 존재를 인식으로 설명하라 이말입니다. 모든 존재를 인식론적으로 파악하라 이말입니다. 여러분들 앞에 이 보드마커가 있어요, 없어요? 있다. 왜 있다라고 합니까? 인식되니까. 자기자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 왜 있습니까? 인식하니까. 무언가가 존재한다라고 할려면 그건 인식되어야 합니다. 자기자신의 존재는 자명한거니까 빼고 자기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그 어떤거라도 그게 존재한다라고 말할려면은 반드시 인식되어야한다.
존재하는 것은 인식되어야하고, 인식되는 것은 존재해야만 하며 존재하지 않는다면은 인식되지도 않아야하고 인식되지 않는거라면 존재하지도 말아야된다. 우리가 존재한다라는 진술을 p라고 하고 인식이 된다라는 진술을 q라고 한다면은 p이면 q여야 되고, q이면 p여야 되며, ~(마이너스)p일 때는 ~q여야하고, ~q일때는 ~p여야 된다. 논리적으로 그 역과 대우 모두가 성립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십이처설의 명젭니다 여러분. 인식되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말아야된다라고 하는 원칙에 입각해서 우리가 내린 결론 중에 하나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신론적인 신있죠. 그 신을 우리 불교에서는 없다고 한다고 합니다. 왜 없다고 하는지 압니까? 인식되지 않으니까 (신이라는 주제는)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런 논리근거가 어디서 나왔다? 일체는 십이처하는 십이처설에서 나왔다. 만약에 신이 인식이 된다면 있다고해야지. 그런데 인식이 되지 않는다면은 존재한다라고 볼 수가 없다라는 거에요. 우리가 이렇게 신의 존재에 대해서 인식의 가능성에 바탕을 하여서 결론을 내리게 되면은 기독교인들이 할말이 영 없는게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이 논리적으로 어떻게 설전을 펼지느냐 하면은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거는 아닐수 있다. 왜? 못봤을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논리를 제기를 합니다. 그럴때 우리 십이처설은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인가? 하는걸 생각을 해봐야되고, 두번째 니 열반봤냐? 고 물어봅니다. 여러분들은 열반을 봤습니까? 경험해봤습니까? 그럼 있는겁니까, 없는겁니까? 그럼 좀 이상해지죠. 자. 못봤을 수 있는거지 없는건 아닐수 있다 하는 이런 관점하고 여러분들은 열반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함부러 열반은 있다라고 하면서 왜 신은 보이지 않는다, 인식되지 않는다고 해가꼬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느냐? 이걸 우리 십이처설 입장에서 어떻게 설명을 하거나 대응을 해야 될까요? 자 이걸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여러분들 자외선이라는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광선을 가시광선이라 합니다. 그 가시광선보다 주파수가 짧고 에너지가 많은 그러한 우리 눈에 안보이는 광선을 자외선이라 한다. 빛은 보여야지 있단데 좌외선은 정의상 보이지 않는 빛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데 좌외선이 있다한다. 우리는 자외선이 있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피부는 딴것 때문에 탓다라고 할 수 있잖아. 예를들어서 여러분들 피부의 노화는 광선보다 열기입니다. 열이 피부를 빨리 죽게 만들지 빛은 그거보다는 공격력이 떨어져. 우리는 안봤으면서 있다라고 하는 경우가 적지않게 많습니다. 좌외선이 있는 줄 어떻게 아는지 압니까? 자외선을 봤기 때문입니다. 기계장치를 만들어가지고 주파수를 일정이하 수준으로 떨어트리는(자외선은 보라색으로 나온다). 자외선은 정의상 보이지 않습니다만은 그 자외선이 존재한다하고 말할려면은 어떤장치를 통해서든 봐야되. 그걸 직접 본 건 아니더라도. 또 하나더 박테리아라는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현미경이라는 기계장치로 보니깐 보입니다. 우리는 십이처설의 존재와 인식사이에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하는 이런 조건을 하나 덧붙이면 끝납니다. 이 맨눈으로 보냐 안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게.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존재한다면 그건 인식이 되야 한다.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다 동원했는데도 인식되지 않는다면 그때 뭐라 그래라?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결론내려라 이말입니다. 그냥 이 눈으로 봤다 못봤다가 아니고 수단과 방법을 다 썼음에도 불구하고 인식되지 않는다면은 없다라고 말해도 무방하다는 이론이겠죠. 그러니까 열반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말해야 됩니까? 열반은 수행이라는 장치를 통과해야지 보입니다. 우리는 수행이라는 특별한 장치를 통과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못보는 겁니다. 열반이라는 걸 니가 봤냐? 못봤으면서 왜 있다고 하냐? 이렇게 질문하면 여러분 어떻게 답해합니까. 나는 지금 열반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단지 수행을 완료한다면은 열반을 볼 수 있다라는 부처님 말씀을 우리는 받들고 열심히 수행을 해볼 뿐입니다. 이래 말해야지 정답이야. 문제는 이 신과 같은 개념은 어떤 개념이냐 하면은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신은 보이지 않는다라고 정의에 나와. 그러니까 이건 불교의 십이처설에 입각하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해야되. 왜?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인식할 수 없으니까. 그거야 그거. 좌외선은 주파수를 떨어뜨리는 장치를 쓰면 보입니다. 박테리아는 현미경을 갔다대면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있다라는 정당한 표현을 받아도 좋지만 현미경을 갔다대도 안보이고 수행을 해도 신은 못봐. 그러니까 그런건 있다하자, 없다하다? 니가 없다라는 말이 꼭 싫어서 쓰지 않으면 안은데로 해라만은, 우리는 그런걸 굳이 있다라고 할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한다. 이게 부처님 입장입니다. 이래봐도 안보이고 저래봐도 안보이고 벼라별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안보인다라면 그걸 어떻게 무하러 그런걸 있다라고 말하느냐 이거야. 그야말로 허상에 집착한것 밖에 더 되느냐. 그래서 수단과 방법이라고 하는 보충 술어를 우리가 동반할수만 있다면은 어떻다? 존재하는 것은 인식되어야하며 인식되는 것은 존재한다라고 할 수 있으며 인식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것은 결코 인식되지도 말아야한다. 소위 이 십이처 이론이 말하자면 불교라는 종교의 출발점입니다. 이것은 불교라는 종교가 우리에게 아주 호전적인 제안을 한 셈입니다. 앞으로 부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할 것들은 전부 인식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겠다라고 하는 약속이시며 그리고 우리도 무언가를 이야기할려면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든지 스스로가 뭐했을 경우에만 말해라? 인식했을 경우, 경험했을 경우에, 체험했을 경우에, 봤을 경우에만 말하라는 소립니다. 이런이런 장치를 통해서 봤습니다라고. 그죠? 이런이런 수행을 해보니까 이게 보입디다라고. 이게 불교적 어법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들었다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만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 인식했느냐, 봤느냐야 봤느냐.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도 인식되지않고 보이지 않는다면 단호히 없다라고 말할 그런 자세가 되있어야 합니다. 본것만을 말한다고 한다면은 할 이야기가 몇개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볼 수 있는게 얼마나 될 것 같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한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본것만을 말하라. 왜? 본것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짜 존재한다면 그건 보여야 된다. 보이지 않으면 존재한다라고도 말하지 말고 말할 필요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면은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는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아.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은 궁극적으로 뭐라 표현이 됩니까? 반드시 부처님의 깨달음을 표현할 때는 불지(갈지 자)지견 또는 불지견. 부처님께서 알고 보신바. 내가 너희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알았으며 단순히 안것으로 그치지 않고 본거다. 본거. 내가 본거를 말한다. 깨달음은 본겁니다. 본것이 깨달음의 범주란 소립니다. 부처님은 본것만 말씀하신다. 본 것만 말한다는 자세, 이 자세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가 본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교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다. 반드시 스스로의 인식에 바탕을 둔 존재에 대한 선언이 내려져야지 된다. 육근하고 육경만이 인식주관이고 인식대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는 이세상이라는 것을 복잡하게 이야기할 필요없이 육근 하나 그리고 육경들 그려버리면은 이세상이 됩니다. 그럼 업은 뭡니까? 육근 ---> 육경, 요렇게 향하는 것. 외행동, 육경들을 향하는 거겠죠. 그래서 육근이 육경에게 가한 의지적 행동 그걸 업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업이라는 사건이 있게 되면은 육경들은 그 사건에 임하여서 모종의 반응을 보이게 되있어. 공을 걷어차면 공은 날라간다는 반응을 보이고, 우리가 사람에게 뺨을 한대 때리면 왜 때리냐고 대드는 반응을 보인다. 반드시 업이라는 행동에는 육경측에서의 반응이라는게 뒷따르게 되있습니다. 육근이 육경에게 가한 행동이 업이라고 본다면은 육근이 육경에게(육경 ---> 육근)보인 반응을 부르는 고유한 불교 술어가 있거든요. 그게 뭐냐? 그게 바로 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말이 뭐다? 업보하는 말이 만들어져. 업은 육근이 주체가 되어서 일으킨 행동이고 보는 육경들이 보이는 반응이 보지. 그리고 반드시 업보라고 하지 보업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업이 있은 다음에야 생기는 반응이 보이기 때문에 업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보가 나오는건 당연하다. 일체는 십이처다 라고 하는것은 존재는 반드시 인식을 전제해야 한다라는 강력한 부처님의 요청이다라는 것도 공부를 하심과 동시에 결국 일체안에 육근과 육경들 뿐이라고 한다면은 육근의 업에 대해서 육경들이 모종의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그랬을 때 그 반응을 보라고 한다. 업보라는 말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성립되는가 잘 아셨죠. 육근의 업 육경의 보, 업의 주체는 육근이고 보의 주체는 육경이다.
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은 크게 세가지 범주로 나뉩니다. 하나는 존재론적인 범주와 사건의 범주, 또하나는 ○○의 범준데 먼저 부처님은 뭐가 존재하느냐에 관련된 말씀을 많이 베풉니다. 이 그림에서 보면 존재하는 것은 뭡니까? 육근하고 육경이죠. 그 다음에 사건은 뭡니까? 존재가 일으키는 사건이죠. 그러면은 이 구도 속에서 사건에 해당하는 건 뭡니까? 업하고 보가 사건이죠. 육근이라는 존재가 일으킨 사건이 업이고 육경이라는 존재가 일으킨 사건이 보다. 요래 말을 해도 되.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 새가 날아간다 이러면 새는 존재죠. 날아간다는 그 새가 일으킨 사건이겠지. 그래서 우리가 가만히 세상을 관찰해보면 존재론적으로 관찰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고 사건의 차원에서 관찰되는 부분이 또한 있습니다. 새만 관찰되는게 아니라 새가 날아가는게 관찰되잖아요. 그랬을 때 날아가는 새는 존재지만, 새가 날아간다는 것은 사건이니까.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강의를 듣는다 할때 나는 존재지만 강의를 듣는다라는 것은 내가 일으킨 사건이 됩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와 사건에 대해서 다 알려주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적어도 의미있는 존재나 사건은 다 얘기를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무슨 문제가 있느냐? 존재와 사건을 다 표현할만큼 언어가 따라가 주질 몬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우리 인류가 사용하는 단어라 해봤자 그 수가 몇개나 될까요? 백만 단어를 가지고 이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다 포함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 존재하는게 백만게 뿐이겠습니까. 훨씬 더 되겠죠. 문제는 존재만 우리에게 알려주어서 되는게 아니고 무엇에 관한 정보도 알려주어야 된다? 사건. 그러면 존재의 수에 비해 사건의 수는 월등히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새는 날아가기만 합니까? 지저귀기도 하잖아요. 새라는 존재 하나에 사건이 두개, 새가 운다할적에 운다라는 사건도 있죠. 새가 모이를 쫒는다. 존재 하나 마다 사건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그게 복잡한 인간으로 오면은 더 말할 것도 없어. 존재의 수만해도 헤아릴 수 없는데 그 존재들이 일으키는 사건의 수는 더 말할게 없겠죠. 그걸 우리에게 다 말해줄려고 해도 말이 모잘라서 말을 못해죠. 이건 부처님의 방편시설 상의 큰 장애였습니다. 부처님은 어떤 분이다. 내가 알고 본 것은 중생들에게도 전부 알고 보게 하리라. 이게 부처님께서 출현한 일대사 인연이다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바로 법화경사상 아닙니까. 근데 뭘로 전해 줍니까? 말만큼 전해주는데 효율적인게 없어. 근데 말이 턱없이 모잘라. 뭐에 비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존재나 그것이 일으키는 사건에 비하면. 부처님은 이 문제를 타계하신 분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존재가 많고 그 존재가 일으키는 사건이 많다 하더라도 일일히 단어를 다 지어서 말해줄 필요가 없는 그런 특단의 방법을 찾아 냅니다. 그게 ○○야. 요거. 어떤 존재나 사건이든 그것이 둘이상 존재하게 되면은 둘이상의 존재나 둘이상의 사건 사이에는 반드시 뭐가 성립한다? 옳지 관계가 성립한다( ○○속에 들어가는 말은 관계). 부처님의 가르침은 존재에 대한 가르침과 사건에 대한 가르침과 더불어 무엇에 대한 가르침이 내재되어 있다? 관계. 이게 진짭니다 여러분. 불교를 잘한다는 말은 존재와 존재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를 통찰하는 능력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사건과 사건을 묶어내는 관계를 간파하는 능력에서 좌우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한 열명이 줄줄줄줄 걸어온다. 그 열명에 대해서 우리가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을 해봅시다. 이름을 지어주는 수가 있습니다. 첫번째 이름 철수, 두번째 이름 길수, 세번째 이름은 말수... 그럼 그 열명을 소개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열명의 이름을 다 지어 줍니다. 근데 그렇게 안하고 소개하는 방법이 있어. 김씨 가족 이런 것들 어떻습니까? 그 열명이 김씨 가족관계를 맺고 있으면 우리는 그 열명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보다 김씨가족이 들어오겠습니다 해버리면은 한마디로 끝난다. 묘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나 사건은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무언가와 모종의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한다라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통찰하신거야. 그래서 관계라고 하는 그물을 던져가꼬 끌어올리게 되면은 보통 한 관계가 어떻습니까? 수없는 존재나 사건이 그 안에 다 묶여 나오는거야. 그러면 전달하고 싶은대로 전달할 말을 만들 수가 있어요. 관계에다가 용어를 개입시키기 시작하면은. 아 대단합니다. 그런식으로 살펴보게 되면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존재들이 별의별것들이 있을 것 같애도 그들이 맺는 관계는 몇 안됩니다. 그 관계에 정통하면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무에융통해져. 자유자재해져. 여러분 이세상에서 출세하는 사람하고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 그사람을 볼때 그사람만 보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근데 성공하는 사람들 가만히 살펴보면요. 사람을 딱보면 저사람은 누구 아들이고 그 자식이 몇되고 어디 고등학교 몇회 출신이며 그 친한 친구중에 잘나가는 사람은 누구며 그래요 안그래요 여러분들. 그사람과 관련된 인맥에 대해서 쫙 꾑니다. 그정보를 가지고 있어. 그사람이 어떤 커넥션 속에 있고 어떤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인가 정확하게 알면 어떻습니까? 그 관계를 타고 들어가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돈독케하고 관계가 돈독하지 않고 일에서 성공한다는건 현대사회에선 불가능합니다. 관계를 잘 알아야 되. 그럼 여러분들 육근이니 육경도 그냥 육근이니 육경이라 하면 안되. 육근과 육경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바로 질문을 던져야 됩니다. 그리고 더 직접적인 것은 업과 보 사이입니다. 업과 보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느냐라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면 안되. 왜? 업과 보가 이미 떨어져 있지 않잖아요. 업과 보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맺어지고 있을까? 이 사이를 채워주는 명칭이 인과 입니다. 업과 보는 무슨 관계를 맺는다? 인과관계를 맺는다. 인과라고 하는 말은 존재의 개념도 아니고 사건의 개념도 아니고 뭔 개념이다? 관계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요런것들을 여러분들이 완전히 자기걸로 만들고 안만들고를 떠나서 들어놔야되. 아 인과라는 말이 언제 나오더라? 먼저 존재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됩니다. 날아간다는 말은 의미가 없어요. 뭐가 날아가는데가 중요하지. 그러니까 새라는 존재가 나온 다음에는 뭡니까? 새가 지금 머하고 있는데? 날아간다 사건이 나와야되. 사건이 나온다음에 뭡니까? 존재면 존재, 사건이면 사건이 둘이상이 될때는 그 둘이상의 존재나 사건 사이에 무슨 관계가 성립하나. 그게 버릇이 되야 됩니다. 두사람이 걸어만 가도 어떻게 해라? 둘 관계가 뭐냐고 바로 물어야 되. 그런건 여러분들 잘 묻죠. (웃음) 그런데 속단하지 말아요. 보이지는 않으나 보이는것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게 관계입니다. 그래서 업과 보라고 하는 두사건을 관계의 차원에서 말하면 인과관계. 그래서 만들어진 말이 뭐다? 업인과보. 업인과보는 아주 복잡한 이야깁니다. 업은 사건을 뜻하고 보도 사건을 뜻한다면은 인과는 무얼 뜻하는 개념이다? 관계를 뜻하는 개념이고 그 사건을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은 육근이니 육경이니 하는 존재가 전제되어 있었다. 반드시 업과 보라는 사건 사이에 집어넣기 때문에 업인과보 그래요. 요겁니다. 요거. 요게 불교라는 종교가 출발하는 기본 마당입니다 여러분들. 육근과 육경, 업과 보라는 말, 그리고 인과라는 말 다 나왔죠. 요거면 끝나. 여기서 불교가 시작하는 거에요. 세상에 별의별것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열두가지에 다 포섭된다 그랬죠. 육근이 일으키는 사건은 뭐 별별사건이 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업을 들 수가 있고, 그것들에 대해서 육경들이 보이는 사건은 기본적으로 보라고 할 수가 있고 그 업과 보 사이에 뭐가 성립한다?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그러면은 간단한 단어 여섯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만은 존재, 사건, 관계와 관련된 부처님의 제안이 요 그림안에 다 들어가 있는거야.
여섯번째 근인 의근 그것은 종합작용자다. 육경 중 법경도 종합된 내용이 법경이야. 눈으로 인식한 색과 내지 몸으로 인식한 촉감이 제6 의근에 의해서 종합이 되면은 종합된 내용이 여기 뜨거든요 그게 법경인거야. 업이라는 말도 우리가 말뜻부터 주체, 전제, 목적, 방법, 방향까지 여섯가지를 이야기 하면서 아 복잡했어요 그죠? 처만 하더라도 그냥 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포섭처, 분류 포섭하다라는 개념으로 이걸 받아들여야된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것은 서술어로 쓰이고 주어는 일체존재다라고 하는 거. 이런 것들은 굉장히 교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이런 모든 이야기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그게 뭐다? 인과라는 말입니다. 이말 함부러 쓰면 안되요. 아무대다 붙히는 말이 아닙니다. 인과라는 말을 쓰려면 특별한 조건이 충족되어야만이 인과라는 말을 씁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저하고 인과의 세계에 한번 들어가봐야되고 인과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야 됩니다. 아무나 인과, 인과관계, 인과법 이런말 하는거 아닙니다. 무서운 말이에요.
업인과보라는 개념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불교라는 종교를 공부해 나가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성취의 여부를 가름하게 됩니다. 업과 보 사이에 성립한 관계로서의 인과. 이게 도대처 뭐냐 이거야. 자 지금부터 그 인과라는 것의 정의에 대해 들어가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제 강의를 경청해 주길 바랍니다.
제가 뭐 평소에는 제 강의를 경청해라 말안해요. 조금 부주의하게 들어도 그리 이해 못할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데 이 인과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조금만 방심해도 어떻습니까? 아 뭔말하는지 못알아 들어요. 왜? 관계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존재와 사건뿐이야. 그 보이는 존재와 사건 사이에 보이지 않는 관계가 설정이 되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는 것에 대한 설명하고 그 이해해 나가는 그 정도에 있어서 비교가 안됩니다. 자 어떨때 우리는 인과라는 말을 쓰냐면은 A라는 사건이 B라는 사건을 선행할 때 시간적으로. 그 두 사건 사이에 두가지 조건이 성립되는가, 안되는가를 보고 인과를 결정을 짓습니다. 첫째는 필연적 상응성, A라는 사건이 B라는 사건을 앞지르고 B라는 사건은 A라는 사건을 뒤따를때 그 둘사이에 필연적 상응성이 성립하고 그다음에(둘째) 의미있는 예측가능성이 성립할때, 앞에 있는 사건인 A를 인 이라고 부르고 뒤따르는 사건인 B를 과 라고 부른다. 이 인과라고 하는 것의 정의 이겁니다 여러분들. 한번더 합니다. A라는 사건이 B라는 사건을 앞설때 그리고 B라는 사건이 A라는 사건을 뒤따를때 이 앞서고 뒤따를때는 시간적인 격차가 조금있어도 큰 관계는 없어요. 그러나 하나는 앞서고 하나는 뒤따라야 됩니다. 그럴때 먼저 어떤 성격이 지켜져야 된다? 필연적 상응성이라는 성격이 지켜져야 되고, 두번째 의미있는 예측 가능성이라고 하는 조건이 충족이 될 경우에 앞에 있는 것을 인이라고 하고 뒤에 있는 것을 과라고 한다.
불교라는 종교의 접근방식이 합리적인 것이 예를 들어서 우리가 나하면 뭘보고 나라고 한다라고 그 정의가 한번 나왔었죠.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나라고 부를려면은 어떤 요청과 어떤 요청이 충족되어야 된다? 상일성과 주재성이 충족되는가를 보고 나라는 판단을 한다. 나중에 진리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뭐가 진리인지를 지금 여러분께 제시할 수 없습니다만은 부처님 입장이 그거에요. 무언가가 진리이려면 어떻다? 보편성과 타당성을 지녀야 된다. 뭐 이런식의 접근이야. 이런식의 접근은 상당히 유익한 접근입니다 여러분들. 니가 마 진리를 봤냐 어쩌냐 하면은 참 말하기 곤란해져요. 그걸 아주 부드럽게 무언가 진리이려면 보편성과 타당성을 지녀야 되는데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의 이야기에 보편성이 있는가, 타당성이 있는가 함 살펴보자 이거야. 우리가 이 육근을 가따가 나라고 부르는데 이게 진짜 나일려면 뭐다? 상일성과 주재성을 지녀야 된다. 그런데 상일성과 주재성이 있는지 반성 함 해보자. 없지 않느냐 그러면 나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 논의가 아주 일관성을 지니고 있고 논리적인 정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과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이야기할 때도 그런 딱딱 끊어들어가는 논리적 조건에 충실해야 됩니다.
우리가 업과 보사이에 인과관계라는 말을 사용했다라는 것은 업이라는 사건과 보라는 사건 사이에도 필연적 상응성과 의미있는 예측가능성이 적용되기 때문에 그렇게 사용했으리라는 것을 미리 얻을 수 있는 정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것이 진짜로 그런 두가지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가를 우리가 실제 또 반성을 해볼 겁니다. 겨울이란 계절이 반드시 봄이라는 계절을 앞지릅니다. 그죠? 겨울이 있고나면 봄이 오고 봄은 반드시 겨울을 뒤따라서 옵니다. 그럼 여러분들. 겨울이 봄을 앞지른다 해가꼬 겨울은 봄의 원인이고 봄은 겨울의 결과라고 말하면 될까요? 왜 안되요? 논리적으로 이게 성립되는 진술인가? 어떤 사건 사이에 누군가가 인과라는 말을 쓸때는 그 두 사건 사이에 이게 성립되는가 바로 관찰이 들어가야 해. 그러면은 겨울이라는 사건과 봄이라는 사건 사이에 첫번째 필연적 상응성이 성립이 안됩니다. 왜 안되느냐? 필연적 상응성이라는 말에서 요 상응성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닮아야 된다 무슨 말인줄 알겠습니까. 근데 겨울하고 봄은 닮은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가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속담이 사실은 인과론적인 분위기의 속담이에요. 그게 인과론적 속담이 되는 이유는 심은것과 거두는 것이 닮았다는 거야. 관계가 성립할려면 닮은 구석이 있어야 되. 두 사람이 똑같은 문을 통과해 들어가는데 앞에 지나가는 어른하고 뒤에 따라들어가는 어린아이하고 아주 그냥 붕어빵처럼 똑같이 생겼으면 아 저놈 부자지간인갑니다. 예를 들어서 그렇게 관계를 파악을 합니다. 그런데 앞에 들어가는 어른하고 뒤에 따라들어가는 아이하고 전혀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어. 그럼 뭡니까? 지 새끼가 아니던지. 뭔가 일이 있는거야. 겨울과 봄은 서로 닮은데가 없어. 겨울하고 봄하고 사실은 태양과 지구의 거리라고 하는게 원인이 되어서 나타난 다 결과들입니다.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멀어졌음을 원인으로 하여 겨울이란 계절이 결과로 온거고, 그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가까워졌음을 원인으로 해가꼬 봄이라는 계절의 결과가 온거니까 사실은 겨울과 봄은 태양과 지구의 거리를 원인으로 하여 전체가 결과의 위상을 가지는 거지 그래요, 안그래요? 우리 눈으로 봤을 때 겨울이 봄을 앞섰다 해가꼬 겨울이 봄의 원인이고 봄이 겨울의 결과다 이렇게 하면 안된다. 이건 이렇게 설명하면 되는데, 이렇게 설명하기 어렵고 복잡한 상황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일수록 여러분들이 이 조건들을 잘 생각을 해야되요. 둘사이에 필연적으로 닮았다라고 말할수 있느냐, 없느냐? 두번째 인과라는 말을 쓰려면 앞서는 사건과 뒷따르는 사건 사이에 어떤 조건이 성립해야 되느냐? 예측가능성. 예측 가능성이라는 말은 뭐냐면은 두 사건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을 하면은 두 사건중에 한 사건만 알아도 뭐다? 나머지 사건은 아직 발생하지 않해도 예측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리야. 이게(예측가능성) 놀라운 인과의, 우리가 인과를 요구할적에 사실 필연적 가능성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과가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예측가능성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1리터의 기름을 넣은 자동차가 10킬로미터 간다라고 한다면은 이 자동차에 우리가 2리터의 기름을 넣으면은 어때요? 굴려보지 안해도 이 자동차가 20킬로미터 굴러갈거다라고 예측이 됩니다. 그러면 실제 굴려보면은 뭡니까? 20킬로미터 굴러가. 근데 그 자동차가 어느 장소를 기점으로 해가꼬 주행거리를 재보니까 30킬로미터가 나왔다 이거야. 그럼 이 자동차에는 원래 기름이 최소한 몇리터 들어가지고 출발을 했다? 이 자동차 안에는 3리터의 기름이 있었다라고 하는 것 우리가 넣는걸 확인을 안했음에도 예측을 할 수 있다. 이 대단한 일입니다 여러분들. 그런게 다 인과를 공부하게 되는 이윱니다. 종교 종교하지만 여러분들 종교라고 하는 것은 크게 두가지 기능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게 종교라고 불려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수많은 활동들이 있습니다만은 그 수많은 활동들이 종교가 아닌바에는 그 기능을 행사를 못합니다. 그 두가지 기능이 뭐냐? 첫번째 사제장적인 기능. 이 사제장적인 기능이라는게 무엇을 뜻하느냐?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그런 한계 상황에 이르렀을때 그런 우리를 위로해줄 수 있는 기능을 보고 사제장적인 기능이다. 사제하면 성직자를 뜻하죠 그죠? 사제장하면 그 종교의 성직자의 대푭니다. 그 종교의 성직자들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뭘것 같애요? 죽어가는 사람 위로하는 겁니다. 살아생전 어떻게 하면 돈많이 번다 이거 가르치는 사람들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살았던 간에 죽거든 그 애달고 괴롭고 무섭습니다. 그런 죽음을 앞둔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는 권능을 가진 것은 종교의 성직자 뿐입니다. 그래서 종교라고 하는 문화현상이 인간이 일으킨 다른 문화현상과 근본적으로 차이나는 어떤 기능을 행사한다고 할때 그 기능 중에 첫번째가 뭐다? 사제장적인 기능입니다. 두번째 예언자적 기능.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까 미리 말해주는 기능을 가진게 종굡니다. 우리가 점보러 다니죠 그죠? 인류의 문화속에서 점이라고 하는 이런 현상이 사라지질 안해요. 다시 말해 미래에 대한 전망을 미리 해주려고 하는 이런 분야가 세상속에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습니다. 종교학에서 품위있게 표현한게 예언자적 기능이다. 그래서 종교는 예언자를 보냅니다. 예수는 위대한 예전자들 중에 하납니다. 불교도 종교인 이상 예언자? 불교에도 예언자가 있습니까? 불교라는 종교하고 예언자라는 말은 연결이 잘 안되죠. 불교는 모든 개인이 자신의 예언자가 되게 하죠. 자기가 자기 미래를 알아 맞히라는 거야. 자신이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알아 맞히고 인간이 인간세상의 미래를 어떻게 알아 맞히느냐? 예측가능성이라고하는 말이 그 흠새(?)가 됩니다. 인과법에 정통함으로써 예언자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뭐라고 그런다? 천안통이 열렸다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십이처 공부를 했죠. 존재와 인식을 아주 타이트하게 연결시킨 교리가 뭐였다? 십이처였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인식되어야 되고 인식되는 것만이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으면 인식되지 않을 것이고, 인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쳤어. 다시말해서 보이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자는 거죠. 아주 놀라운 불교의 호전적 표현이다라고 그랬어요. 그런 보이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라고 하는 십이처설에 바탕을 두면서 곧바로 부처님의 진도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안봐도 압니다라고 하는 교리를 설하는데로 지금 나아가고 있는거야. 십이처설은 어떤 교리였다? 보이는 것만 있다라고 하는 교리였어. 그 십이처의 육근과 육경이 일으킨 사건 업과 보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라는 말을 함과 동시에 부처님의 지금까지의 논정은 어떻습니까? 다른 템포로 진행을 해버립니다. 보이는 것만 있는 세상이지만은 안봐도 알수가 있다는 거야 지금. 안봐도 안다는거에요 여러분들. 우리가 드디어 안봐도 아는 틈새를 발견한 겁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건 한정되 있어. 빛이라고 해봤자 가시광선 안에, 소리라고 해봤자 적정 데시벨 안의 소리밖에 못듣고 우리가 살아봤자 백년을 넘지 못하는 짧은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참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것들은 너무 작고 제한되 있어.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뭔지 압니까? 안봐도 아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야. 그 안봐도 아는 방법이 뭐다? 인과야 인과. 그니까 만약에 이 세상 만물에 인과법이 철두철미하게 적용이 된다면은 이 세상 만물에 대한 예측이 가능해져 버리는 거야. 그러니까 인과라고 하는 것이 정말 성립되는 법칙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요 단순히 부처님의 말씀이다 해가꼬 우리가 그냥 받아들일께 아니고 실제 그게 의미를 가지고 적용이 되는지 안되는지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게 고려를 해봐야 됩니다. 왜? 안봐도 뭐라고 말하게 하기 때문에. 인과만 쫙하면 어떻다? 전혀 안봤는데도 티끌만한 원인적 사건을 갖고 엄청난 결과론적 사건을 다 예측할 수가 있고 조그만한 결과론적인 사건을 갖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습니까? 다 예측해 낼 수가 있는거야. 저 남산 저쪽 너머에서 시커먼 연기가 물컹물컹 올라오고 있으면 우리 어떻게 판단합니까? 산에 불났다. 불은 보이도 안하는데. 이게 다 안봐도 아는 그런 부분이 우리 세상속에 존재한다는 것이고 한결같이 안봐도 안다라고 말할 때는 반드시 뭐가 개입되 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그 무언가에 인과관계가 개입되있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인과관계는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직접 보지 못한 세상에 대해서 조차 우리가 직접 보지 못한 대상에 대해서 조차 정확하게 알수있게 하는 통로이기 때문에 인과관계와 관련된 의미는 아무리 열심히 하고 긴밀하게 하고 그리고 면밀하게 우리가 수행한다 하더라도 지나치지가 않습니다. 자 그럼 정말 인과관계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에 성립하는지, 업과 보사이에는 성립하는지 우리뭐 당연히 성립하지 해가꼬 업인과보 이렇게 외웁니다만은 아 만만치 않습니다 여러분. 부처님도 잘못 봤을 수 있는 대목이 있을 줄도 모릅니다. 이천 육칠백년 전이니깐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으로 하셨지 오늘날 부처님이 탄생하셨다면 이거 이야기 안하셨을 줄도 모르는 일들이 막 나타나면서 복잡해졌어요 요새. 그런 상황속에 오신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여전히 인과관계를 주장하셨을까 이게 화둡니다. 부처님이 오늘날 출생하셨어도 뭐다? 똑같은 불교를 세우셨을까 오늘날 태어나셨으면 부처님은 그냥 물리학자가 되진 않으셨을까 우리가 생각을 다시 해볼일이 생기는 거에요.
업은 육근이 일으킨 외행동이야. 바깥을 향한다. 그 바깥에 육경들. 우리가 이런말을 쓸 수 있는 것은 일체는 뭐다? 열두가지에 포섭되어 다 들어간다라는 십이처설에 바탕을 둔거에요. 들어가는 뜻의 처였어. 요게 우리가 그리고 있는 세상이야. 육근이 육경들에게 업을 가하면 육경들이 육근에게 반응을 보인다. 그걸 우리가 보라고 불렀다. 그 업과 보사에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그래서 업인과보. 육경들이라고 하는걸 분석해보면 크게 두가지 부류가 성립합니다. 하나는 돌이나 나무처럼 의지가 없는 것들, 그러나 육경들 속에는 여러분들과 같이 의지가 있는 육경들도 있어. 안이비설신의는 자기의 안이비설신의만을 안이비설신의라 한다그랬죠. 자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눈이라 안하고 색이라 그래. 지 눈에 보이면 다 색이고, 그래서 육근은 세상에 몇개 뿐이다? 단수, 하나뿐이죠. 나머지는 다 육경이다. 그니까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 뭐다? 육경이다. 우리가 언어에 보면 1인칭이 있고 2인칭, 3인칭이 있습니다. 그러면 1인칭, 2인칭을 제외하면 다 뭡니까? 3인칭인 것처럼 십이처의 세계에는 육근인칭과 육경인칭 두가지 인칭이 있어. 말하자면 육근인칭이 1인칭이고 2, 3인칭은 육경인칭에 들어가 버리는거야. 나를 제외한 여러분들은 육근이 아니고 육경이야. 이거 잘 이해해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넘버링을 할때 육근은 단수로 하고 육경은 반드시 복수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같은 경우는 의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잖아요. 저에게 여러분들은 육경들에 속하는데 조금만 살펴보면 의지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육경들 안에는 두가지가 부류가 있으니 하나는 돌이나 나무토막같이 의지가 없는 육경도 있고 고양이나 소나 일반 남들처럼 의지가 있는 육경도 있다. 그렇게 육경들을 분류하게 되면 육근이 육경들에 가하는 업도 이제 나누어서 생각을 해야되요. 이 업이 의지가 없는 놈을 향할 경우와 이 업이 의지를 지닌 육경들을 향할 경우에 의지가 없는 육경이 보일 반응과 의지를 지닌 육경이 보일 반응에 무언가 차이가 있을것 같애요, 없을 것 같애요? 있을 것 같죠. 그럼 어떤 차이가 있을건지에 대해 연구를 하자. 예컨데 육근이 업을 가할적에 의지가 없는 육경들에게 업을 가하는 경우 이럴 경우 어떻습니까? 예측이 가능합니다. 예측 가능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래서 육근의 업이 의지가 없는 육경들을 향할때는 예측이 됩니다. 문제의 첫번째 소지는 어디있느냐? 육근의 업이 의지가 있는 육경들을 향할 때 그때도 예측이 가능할까? 소위 사람과 사람의 관계, 나와 남의 관계 우리는 말하죠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럭비공은 어디로 튈줄 알아도 개구리는 어디로 튈줄 몰라. 왜 그럴까요? 지도(개구리) 의지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의지라는 것의 의미가 자유거든. 자유 선택의지란 말야. 바깥에서 예측할 수 없다. 바깥에서 예측이 불가능하면 인과라는 말 쓸수 있어요, 없어요? 예측이 불가능하면 인과라는 말 쓸 수 없잖아요. 그러면 의지가 없는 육경들에게는 예측이 되니깐 인과라는 말을 써줘도 의지가 있는 육경들에게는 예측이 불가능하면은 인과라는 말을 못써주면은 전체적으로 업과 보사이에 인과라는 말을 쓰는것은 제한되어야 합니다. 봐 벌써 업과 보사이에 인과라는 말을 쓰는데 문제가 발생하죠. 심각한 문젭니다. 부처님께서 인과라는 말을 쓰시긴 쓰셨는데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면은 아 이거 좀 따질게 있다라는걸 아마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한계점은 불교 교리안에서만 문제가 되는게 아니고 인간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온겁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이 문제를 못풀고 있는 문제 중에 하납니다. 사실 우리가 주변을 보게 되면 가끔 천재들을 만나게 되요. 나는 천재를 실제로 봤어요. 제가 모셨던 스승님은 천재 중에 천재셨는데 3년을 그분댁에 사사를 받으면서 하루 24시간을 붙어있었어요.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봤는데 보통 사람하고 다릅니다. 철학, 사상계에서 천재라면 아리스토텔레스, 칸트가 있다. 이런 천재들도 못푼 문제가 이 문젭니다. 문제가 그것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은 물리학이 발달을 하면서요. 의지가 없는 육경들에 대해서도 예측이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이론이 나오기 시작한거야. 이게 바로 양자역학이라는 겁니다. 하이델베르그라고 하는 유명한 물리학자가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을 설해. 겉으로 볼때에는 예측이 가능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물질의 근원적인 세계를 파고들어 가보니깐 예측되는게 하나도 없더라는 거야. 예측은 커녕 지금 이순간 그 존재의 상태조차도 정확하게 측정하는게 불가능하다. 지금 이 순간의 그 존재의 물리적 정보마저도 정확하게 얻을 수 없는데 예측은 무슨 놈의 예측이냐는 거야. 지금까지 우리는 예측이 다 되는 줄 알았어 물질세계는. 그거는 크게 보니까 대충 맞아 떨어진거지 속에 파고 들어가보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래서 오늘날의 철학은 뉴턴의 소위 고전적 역학 이게 이미 막을 내린지 오랩니다. 뉴턴의 고전적 역학은 철저한 인과율의 세계속에서 이루어진 역학이였어요. 그게 오늘날의 양자역학의 세계에 들어오면 그런 인과율은 용도폐기 해버린 역학입니다. 의지가 없는 육경들마저도 예측이 안될 확률이 커져 버린거야. 그리고 의지가 있는 육경은 말할 것 없는 자유도 때문에 또 예측이 안된다. 이것도 예측이 안되고 저것도 예측이 안되면 업과 보사에 인과라는 말 쓸수있다, 없다? 없어. 일이 지금 복잡한거야. 부처님이 오늘날 태어나셨다면 이 사이에 이말 쓰셨을까 회의가 갈정도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이말 쓰셨다. 그건 부처님이 이런 문제점을 아신다 하더라도 쓰셨을 확률이 큽니다. 이런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과라는 말을 쓸 수 있는 틈새를 발견하는데 성공한 분이 누구다? 부처님이에요. 그래서 부처님의 인과율은 다른 종교나 사상의 인과율하고 그 레벌이 다릅니다. 똑같은 인과율이라 생각하면 큰코 다쳐요. 이건 상당히 궁금한 주제가 아닐수 없고 사실 이런 주제에 대해서 부처님의 견해를 부처님이 보신바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한다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지식이 아닐수 없습니다. 난 오늘 이 강의를 통해서 인과라는 말을 함부러 쓰기에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라는 것을 잘 좀 숙지해주시길 바래요. 이런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결국 인과를 쓸 수 있게 만든 그 부처님의 위대함을 그래야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이 쓰신 인과율은 다른데서 쓰는 인과율과 색깔이 달라요. 왜? 이런 난제들을 극복하는 인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인과에 여러분들이 정통하게 되면은 천안통 틉니다. 그야말로 인과를 제대로 알게 되니까.
우리는 부처님의 인과론을 다르게 표현해서 의미있는 예측 가능성의 이론 이런 제목으로 한번 음미해 할 필요를 느낍니다. 인과율이라고 하는것 또는 인과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선행하는 사건과 후속하는 사건 사이에 두가지 성질이 지켜지는가, 지켜지지 않는가 확인하라. 첫번째가 필연적 상응성이 지켜지는 것 두번째가 예측 가능성이 지켜지는 것 입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예측 가능성인데 그 예측 가능성이 조금 명료하게 규정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냥 단순히 예측 가능성 말해가지고는 아마 인과율을 성립시키는데 실패할지 몰라요. 그래서 그냥 예측 가능성이 아니고 의미있는 예측 가능성이다 요런 참 모양새있는 표현을 여러분들께 한번 소개를 해드리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저번 시간에 공부한것은 의미있는 예측 가능성에서 첫번째 단락, 1) 문제제기. 요것들을 살폈고 오늘은 중간쯤 나오는 두번째 단락부터 공부를 하면은 이제 되는셈 입니다. 전번 시간에 공부했던걸 요약을 한다는 취지에서 같이 한번 읽어보는것도 괜찮겠죠. 문제가 뭐였느냐 하면은 의지없는 육경에 대한 업은 예측 가능한 보를 가지게 되지만, 의지있는 육경에 대한 업은 예측 불가능한 보를 지니게 되니 인과율을 보편적으로 주장하기 어려워진다. 이게 문제의 발단입니다. 예측 가능해야지 인과라는 말을 쓸 수 있는데 예측 불가능하니까 이런 부분은 인과라는 말을 적용하기가 어려워져요. 인과라는 말을 전반적으로 다 쓸수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편적으로 쓰기는 좀 어려워진다는 거에요. 이 문제는 칸트라고 하는 유명한 철학자에 의해서도 자연과 자율의 통합이라는 주제로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구미제로 남는 문제가 되고 맙니다. 근데 여기에 업친데 덮친 격으로 오늘날은 자연부분, 물리적 세계 또는 의지가 없는 육경에 대한 부분에 조차 예측 가능성을 부정하는 물리적 사실이 발표되어 있는 그런 실정입니다. 우리는 이 인과율이라는 사실을 사용할 근거를 전체적으로 잃게 됩니다. 이런 역학 곧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에서만 인과율 부정의 분위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 철학계에서도 해체주의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철학이 방향 지워지고 있는데 이런 사상적 경향도 바로 인과율과 같은 결정론적인 이론에 대한 부정을 그 속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한마디로 인과율 파기의 시대.
자. 그럼 미리 한번 결론을 내려볼까요. 부처님께서 오늘날 탄생하셨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인과라는 말을 쓰셨을까요? 단순히 인과라는 말을 쓴게 아니라 보편적 법칙으로서 이말을 쓰셨습니다. 그럼 보편적 법칙을 우리가 한마디로 뭐라 그럽니까? 진리 그럽니다. 부처님은 인과율을 진리로 주장을 하셨을거다. 오늘날의 입장에서도 한번 주장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 근거가 뭐냐?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업설 또 인과, 업인과보 이런 부처님의 제안을 살피는 가장 지름길이 될 겁니다.
자 본격적으로 2번 단락 공부해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불교의 인과법은 그래서 의미를 지닌다. 왜냐면 부처님은 처음부터 기계론적 결정론의 인과율을 주장하신것이 아니였던 것입니다. 참 중요한 틈새를 우리가 파악한 겁니다. 인과율 인과율한다고 다같은 인과율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부처님이 오시기 이전에 인도인들이 사용한 인과율이라는 개념이나 또는 오늘날 서양사람들이 줄곧 사용해온 인과율이라는 개념은 어떤 인과율이였냐 하면은 기계론적 결정론의 인과율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처님이 주장하시는 인과율은 그런 기계론적 결정론의 인과율은 아닙니다. 이런것이 여러분들 학문적인 그런 분위기를 전제한 이런 도량에서 배워야할 내용이에요. 일상적으로 우리가 보통 생각해왔던 인과율은 기계론적 결정론의 인과율입니다. 엄격한 결정론적 기계론이에요. 부처님은 처음부터 인과율을 주장할 적에 그렇게 빡빡한 인과율이 아니었습니다. 업이라고 하는것을 한번짓고 나면 다시는 변경불가능한 도대체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숙명론적인, 그런 결정론적인 원리로 생각하지말아 하는 제안을 제가 첫시간에 했는데 기억이 나실런지 모르겠어요. 너무 과거예속적으로 생각하지마라. 차돌멩이처럼 딱딱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찹살떡처럼 몰랑몰랑한 걸로 생각을 해라. 옛날 우리 부처님 살아생전에 스님네들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어떻다? 왜 언제 또 들을 줄 모르거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는 즉시 머리속에 바로 메모리하는 능력이 굉장히 뛰어났습니다. 그 능력을 함양시키는 전문적인 수행법이 사념처 수행입니다. 요새는 그 사념처 수행이 남방 상좌부의 외곡을 거쳐가지고 무슨 마음챙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정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거 사념처 아니에요. 사념처할때 념이라는 말은 인도말로 스머리띠 라고 하는데 스머리띠란 말은 사전을 찾아보면 메모리 이렇게 되있습니다. 사념처, 4가지란 뭐냐면 딴게 아닙니다. 신수신법이라 표현되 있지만 그때 신수신법은 사념처 체계속에서 신수신법입니다. 그 신수신법은 뭐냐? 괴로움의 발생과정, 결론으로서의 괴로움,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과정, 결론으로서의 해탈. 말하자면 부처님의 교리를 4가지 범주로 나눈 겁니다. 어떻게 괴로움이 발생하냐, 그리고 발생한 괴로움의 모습은 어떠냐 부처님이 설한건 그거에요. 어떻게 해탈할 것이냐, 해탈한 경지는 어떠냐. 이 4가지와 관련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지않고 기억해내는 수행이 뭐다? 4가지에 대해 기억해내라는 요청 해가꼬 사념처다. 부처님의 말씀을 일단 기억을 해야지 어떻습니까? 불교라는 종교는 간단해요. 어떻게 해야 도틉니까 그러는데 도트는데는 다른방법 없어 이 방법 뿐이야. 부처님께서 도를 틀려면 어떡해 해라? 여설수행 하라 그러셨어. 내가 가르친대로 수행해라. 그럼 도튼다. 수행의 전제가 부처님이 설하신바를 전제했느냐 안했느냐를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지혼차 앉아가꼬 벽처다봐. 언제 부처님이 벽쳐다보고 공부하라 그랬어? 계속 뭘 외우기만하면 도튼다고 하는데가 있어. 그럼 카세트 테이프가 먼저 도텄어. 부처님이 설한대로 수행하라. 그럼 부처님께서 뭘 설하셨느냐? 부처님께서 설한대로 공부할려면 어떡해야 되느냐? 부처님이 뭘 설하셨는지 알아야 그것대로 공부할것 아닙니까. 요새는 경전을 보는것 부터. 옛날에는 경전이 없었다. 부처님 당시에는 구비문학이라 입에서 입으로 전달이 되기 때문에 책같은거 없어. 어렵사리 부처님 한번 모시고 설법한번 듣는거야. 들으면 딱 기억한다. 기억할때 방을 4개 나눠서 기억한다. 요거는 괴로움의 발생에 관련된 부처님의 말씀, 요거는 괴로움 그자체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 요거는 해탈의 과정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 요거는 해탈 결과에 관련된 부처님의 말씀이다. 4가지 방으로 나눠서 그 안에 집어 넣어가지고 기억하라고 하는거야. 그걸보고 사념처라 그래. 도튼다고 하는게 사실은 기억입니다. 이 뭔말인줄 압니까? 우리가 한번도 경험하지 않을걸 생뚱이로 일으켜낼 수 없어. 여러분이 도텄을 적에 여러분이 트신 도속에서 경험되어지는 어떤 경지는 무시의 겁내에서 윤회하는 동안 언젠가는 어떤 순간에 한번은 봤던 것을 교묘하게 기억해 내는거야. 그 기억을 일으킬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집중해야지. 아주 오래전에 걸 기억해낼려면 집중합니까, 안합니까? 고게 뭐였더라 그때 만난 사람이 뭔말을 했더라 하고 집중을 촥하면 아 이말했지 하고 떠오릅니까, 안떠오릅니까? 고런게 도트는거야. 도 트는게 별거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게 어려워서 그렇지. 그러니까 이 기억이라고 하는건 너무너무 중요해. 부처님이 설하시는 인과율도 차돌멩이처럼 엄격한 인과율이 아니야. 24시간 정확하게 시침 분침이 그 자리에 있을거다라고 아주 기계론적으로 첨부터 결정이 되어버린 그런 인과율이 아니라 상당한 범위의 융통성이 허용이 되는 말랑말랑한 인과율이 부처님이 설하신 인과율입니다. 처음부터 부처님은 그런 인과율을 쓰거든. 오늘날 사람들이 부정하는 인과율은 어떤 인과율이다? 기계론적인 결정론의 인과율이거든. 그러니까 그건 암만 부정해봤자 부처님의 인과율은 처음부터 그 인과율이 아니였기 때문에 뭐다? 부정하면 할수록 부처님한테는 도움됩니다 지금. 요런 부분을 우리가 살펴야 됩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처음부터 기계론적 결정론의 인과율을 주장하신건 아니었다. 그럼 우리가 이 기계론적 결정론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한번 바꿔보면 뭐라고 바꿀수가 있느냐? 백퍼센트 정확도의 예측가능성이다 이렇게 말을 한번 바꿔 보겠습니다. 인과율은 기본적으로 예측가능성이 생명입니다. 그에 비해서 우리 부처님의 그 말랑말랑한 인과법은 어떤 법이다? 의미있는 예측가능성을 뜻한다. 그러면 이 의미있는 예측가능성이란 말을 좀더 구현해보자. 첫번째, 백프로 정확도는 아니더라도 그 예측의 정확도가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자 여러분들 한번 봅시다. 오늘날 자연과학계에서 불확정성의 원리니 이런 이야기를 다하게 되는것도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하면은 이 존재라는것이 가지고 있는 두가지 상반된 어떤 속성이라할까, 성질 때문인데 그 두가지 상반된 속성이 뭐냐면은 입자로서의 성질과 파동으로서의 성질을 모든 존재들이 미시세계로 가보면 가볼수록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뭐 이해를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어떤 물질 입자를 그 물질과 같은 속도로 따라가보면 입잔데 정지된 상태에서 보면 파동으로 보인다던지 고론 요상한 얘기들 해요. 입자는 기본적으로 예측 가능한 성질이 있습니다. 한시간대에 그입자가 위치할 수 있는 장소는 한장소뿐일 테니까. 왜? 입자 자체가 하나의 질정을 차지할테니까. 근데 파동이란건 그렇지 않아요. 입자라고 하는 것은 그 자신이 고 시간대에 한장소에만 있는것이 입자지만 파동이라고 하는 것은 진동을 하는게 파동입니다. 주어진 시간대에 보게되면은 정해진게 잘 안나오죠. 여기있든 여기있든 여기있든 이밑, 이위에 있어. 파동속의 어느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일정한 부분에 존재하진 않지만은 여기와 여기사이(진폭)에 존재하고 있어. 우리가 알고자 하는 놈이 정확하게 어디있는가는 안나와도 10과 0사이에는 존재한다 이렇게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만큼만해도 의미가 전혀 없는겁니까, 조금은 있는겁니까? 조금 의미가 생긴다 이거야. 아 세상이 이런거라면 이렇게 봐줘야되. 세상이란것은 무언가가 그장소 내지는 그시간에 고기에서 딱 정해지는게 아니고 어느 범위안에서 정해지는지 몰라. 그 어느 범위가 정해지면 뭡니까? 그 범위 안에서는 아무대나 가있어도 되는줄 몰라. 단지 재밌는것은 그 어느범위를 넘어서지도 않고 그 어느범위 밑으로 하회하지도 안해. 단지 그 범위와 그 범위안에서만 왔다갔다 한다. 그럼 이걸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요. 주어진 시간에 고넘이 어디에 있는지 백프로는 알 수가 없어도 어디서 어디사이에 있는 줄은 알았으니까 또 전혀 모르는건 아냐. 묘한 상황이 발생하죠. 요런 상황의 예측을 뭐라 그런다? 의미있는 예측가능성이라 한다. 의미있는 범위안에선 알아 맞힐 수가 있다. 백프로 정확도가 아니라는 것은 업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보가 어떤것인지 미리 완전히 결정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 실제 부처님이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던가? 그렇다. 보라는 말의 원어는 뭐라 그랬습니까? 위파카인데 여기서 파카라는 말은 익음 곧 열매, 결과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말 앞에 위가 붙어있거니와 이말은 어떤 뜻이다? 다르게 를 의미한다. 곧 업에 대한 보는 다르게 익음이다. 이말은 어떤형태로 그 결과가 결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변수에 의해 어느정도의 범위 속에서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우리 육근이 여기있는 육경에게 업을 가하게 되면은 그 육경들이 이 업에 대해서 뭘 보인다? 반응을 보이니 그걸 우리가 보라고 불렀는데 이 보라는 말의 원어를 찾아보니 Vi - paka(위파카) 다르게 익음, 어떤 업에 대한 과보는 여러가지 변수에 의하여 일률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받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고 또 받는 시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고 또 받는 여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고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거에요. 실제 부처님께서 쓰신 말씀 속에 보를 뜻하는 말은 단순히 일률적인 보가 아니라 이미 경우에 따라서 어떻다? 얼마든지 달라질수 있는 융통성을 가지고 있는 보라고 하는 뜻이 위 라는 글자속에 처음부터 들어 있었다는 거야. 그렇다면 여러분들 헷갈릴 거에요. 저렇게 다르게 나타나면은 인과라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어? 이 경우에는 이렇게 나타나고 저 경우엔 저렇게 나타나면 그게 뭐 예측이 안되는거 아니냐? 하지만은 다르다고 해가꼬 전혀 엉뚱하다는 말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요기서 요까지 범위 안에서 다르게 나타난다는 말이에요. 이런게 사실은 중도입니다. 백프로 정확하게 예측된다는 것도 극단이야. 전혀 예측이 안된다는 것도 극단이야. 부처님은 뭡니까? 백프로도 아니고 영프로도 아니고 충분히 의미있는 프로테이지의 정확도를 지닌다라고 말씀하시는 그런 균형잡힌 시각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이런 건 참 놀라운 겁니다 여러분. 2번 단락의 괄호 4번은 혹시 여러분들이 빗나갈까봐 주의를 하나 당부를 해놓고 있습니다. 여기에 주의해야하는 것이 하나가 있다. 다르게 익음이라고 해서 전혀 예측 불가능하게 다르게 익음은 아니다. 누누이 이야기 하지만 어떤 의미있는 범위 속(안)에서 다르게 익는다(융통성을 가지고 나타난다)는 뜻이다. 요런 기본적인 입장을 확보했다면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 의미있는 예측 가능성에 정확도를 좀더 높이는 방법이 있으니까 고걸 이제 여러분들께 소개를 해줄까해요. 고게 세번째 단락입니다. 여기서 단위에 대한 논변을 음미해야된다. 단위에 대한 논변은 크게 두가지 명제로 구성이 됩니다. 단위를 사용하는 정확도가 느껴진다. 그런데 단위는 적절히 사용하는 것만이 의미를 가진다. 이 두축을 가꼬 단위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들께 좀 할려고 그래요. 자 예를들어서 우리가 이런 표현을 함 해봅시다. 기름을 조금 넣으면 조금 가는데 기름을 많이 넣으면 멀리간다 이말 맞아요, 틀려요? 맞는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애매모호해 이말은. 요걸 요렇게 한번 바꿔볼까요? 1리터를 넣으면 10킬로미터 인데 2리터를 넣으면 20킬로미터 입니다. 이러면 어떻습니까? 정확하게 말한것 같애. 조금 적게, 많이, 멀리 라고 하는 일상용어를 리터나 킬로미터라고 하는 체적의 단위나 길이의 단위를 사용해가꼬 표현을 하면 어떻습니까 정확도가 확 살아나. 이게 단위의 힘입니다. 서양문명이 동양문명을 앞도해버린 것은 바로 단위의 힘이라고 하는 인류학자들의 분석이 있어요. 예를 들어 자동차의 주행거리를 표현할 때에는 10킬로미터라고 하면서 킬로미터라는 단위를 사용한다. 그러나 원자의 크기를 표현할 때에는 옹스트롬이라는 단위를 씁니다. 자동차의 주행거리도 길이의 개념이고 원자의 간격이나 크기도 길이의 개념이죠. 그러나 원자의 크기를 이야기할때는 단위가 달라져. 이게 뭡니까? 적절히 사용한거야. 옹스트롬은 십의 마이너스 80센티미터. 1센티를 1억 토막을 낸 길이가 1옹스트롬입니다. 상당히 미세하죠. 이런 미세한 길이는 원자한테나 어울리지 자동차의 주행거리를 표현하는데 사용한다면 다들 웃지 안웃겠어요? 그러나 길이를 정확하게 표현할때는 킬로미터가 정확합니까, 옹스트롬이 정확합니까? 옹스트롬이 훨씬 정확하지. 촘촘히 짤랐으니까. 하지만 옹스트롬이 정확한 길이라고 이걸 아무때나 쓰면은 오히려 부정확해져버려. 그러니 단위라는 것은 사용할때 어떻게 사용해야 된다? 그 주어에 적절한 단위를 사용해야 된다라는 거야. 사람의 키를 이야기 할때는 미터나 센티미터면 족해. 같은 길이를 재는데 있어서 단위가 여러개 있다는 것은 그 단위를 적절히 사용할 대상이 차이가 있다는 소리에요. 우리는 그 상황의 의미있는 정도까지의 정확도를 요구하지 궁극적인 백프로 정확도를 처음부터 요구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킬로미터 단위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1킬로미터일 경우 또는 1킬로미터라고 말할 경우는 1킬로미터 1센티나 1킬로미터 2센티 정도는 구분하지 않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의미있는 정확도면 끝났던거야. 그런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고 세상이 그러면 그렇게 표현해주는 것이 정확한거지. 그래야 우리가 살아가요. 숨을 셔. 1킬로미터 1센티나 1킬로미터 2센티나 이정도는 구분할 필요가 없어. 그래도 의미있는 정확도는 처음부터 유지됬던 거다. 이 단위와 관련된 논변, 이건 수준 높은 논변이니깐 여러분들 잘 받들어야 됩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서 달과 지구상의 거리가 얼마냐? 38만 4400km. 그러면 38만 4400킬로미터라고 말하면 되지 38만 4400킬로미터 1센치 또는 2센치하고 거기다 센티미터를 붙이는건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 38만 4400킬로미터도 어떤 의미에서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왜? 달이 지구를 공전하면서 가까울 때도 있고 멀때도 있어. 평균거리야. 그러나 우리는 그 평균거리로서 38만 4400킬로미터라는 정보만 가지고도 달과 지구에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처음부터 백프로 정확도는 허상이였습니다. 이 세상에 처음부터 백프로 정확도는 없습니다. 뭐가 더 정확한거고 뭐가 덜 정확한 겁니까? 처음부터 백프로 정확도라 말할 수 있는 그런 모델이나 그런 아이디얼한 세계는 처음부터 없었어. 우리는 어떤 범위 안에서 정확하면 됬던거야. 의미있는 정확도의 개념이라는게 상당히 실속있는 이야기라는게 느껴지시죠. 즉 우리는 백프로 정확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경우에 맞는 융통성이 있는 정확도를 말할 수 있고, 그것은 충분히 의미있는 정확도이다. 따라서 우리는 육근의 의지있는 육경사이의 업과 보를 기술할수 있는 적절한 단위를 발견하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의미있는 정확도를 지닌 곧 의미있는 예측가능성의 인과율을 말해볼 수 있게 될거다. 그죠. 상대가 의지를 가지고 있을 때도 내가 상대방에게 업을 가하면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대해서 그것에 적절한 단위만 발견해서 붙일수가 있으면은 의미의 정확도가 확 살아납니다. 그 단위가 뭔지 찾는일만 이제 남아가 있는 겁니다.
미립자, 소립자의 세계에서 이 불확정성의 원리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계, 육근 육경의 십이처 세계라고 하는데 이런 십이처 세계에는 이런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 적용을 해봤자 의미가 없습니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미시세계의 기묘함을 언급한 것이니 그 규모에서의 언급은 육근 육경이라는 규모에서 벌어지는 업에 대한 언급과 같은 선상에 두고 볼 수가 없다. 나중에 말하지만 우주론적 생성의 문제, 이런 문제도 지금 우리가 업을 따지고 있는 차원에서는 동일선상에 두고 볼 수가 없다. 그건 또 너무 커. 업의 가르침은 분명히 내가 이야기 했지만 육근 육경의 세계에 의미가 있다고 했어요. 육근 육경의 세계는 뭡니까? 육근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계를 말해. 내눈에 보이는 세계, 내귀에 들리는 세계, 내코로 냄새 맡아지는 세계, 내혀로 맛보여지고 내몸으로 촉감되고 그래서 그런 오감각의 정확한 정보를 종합할 수 있는 세계, 이게 육근 육경으로 된 십이처의 세계잖아. 근데 우주의 생성같은 경우는 지금 내눈으로 우주론적인 규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까? 없잖아. 업설을 이야기 하면서 그런것까지 다 해결할거다라고 생각하고 덤벼들어서는 안되고 업의 가르침이 고유한 영역으로 삼는건 육근 육경 요런 크기의 세계를 언급하고 있고 요런 크기의 육근 육경들이 모여있는 세계를 우리가 흔히 사회 그럽니다. 업은 사회 속에 적용되어지는 일종의 법칙성을 도출하는데 초점이 있는거야.
육근이 육경에게 업을 가하는 이 규모의 세계에는 기계가 절실하고 그 기계들은 한결같이 충분히 정확한 인과율을 보인다. 그래서 기계를 부릴수 있는 것이다. 육근의 업과 육경의 보사이에 적용되어지는 의미있는 단위가 무언지 찾기만 하면된다. 단위를 사용하면 정확도가 생긴다 그랬죠? 그러나 적절한 단위를 써야한다 그랬죠. 업과 보사이에 사용하게 될 적절한 단위가 뭐다? 그게 바로 윤리학적인 단위, 선과 악이라는 단위입니다. 그래서 업인과보라고 하는 이 문장의 정확도를 살리기 위해서 업과 보사이에 단위를 주되, 그 단위는 윤리학적인 단위인 뭡니까? 선 또는 악이라는 단위를 주었고 업이 선하면 보도 선할거다라고 예측하게 되며 업이 악하면은 보도 악할거라고 예측하는 것은 정확하게 성립되는 공식이 되는 겁니다. 그걸 우리가 이름하여 선인선과, 악인악과. 이 진술에 이르기까지 불교라는 종교가 제시하고 있는 코스는 철학사적인 난문난제들을 그안에 다 포함하고 있을 정도로 상당히 무게있는 흐름들이였어요. 선악이라고 하는말은 윤리학적인 단위다. 이 단위가 고유하게 적용되어지는 대상은 뭐다? 업과 보이다. 그래서 업과 보사이에 성립하는 인과율에 대해서는 선이라는 단위나 악이라는 단위를 둬갔고 선인선과 악인악과 라고 하는 그러한 명제가 만들어졌다. 이건 이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암시하게 합니다.
인과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두가지 요청을 성취해야 된다고 그랬어요. 하나는 필연적 상응성 이라 그랬고 또하나는 의미있는 예측 가능성. 이제 선악이라는 단위를 사용해주면은 의미있는 이란 말은 이제 굳이 쓸 필요가 없어. 의미있는 정확도라는 말도 쓸 필요가 없어요. 단위가 들어오면 단위로서 그 의미가 함축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인과가 업보 사이에 성립할때 선악이라는 단위를 줬다라는 것은 업과 보사이에 두가지 성질이 성립한다라는 소리하고 똑같아 집니다. 선한 업을 지으면 뭐다? 필연적으로 선한 보가 뭐다? 오지 않으면 안되는거고 악한 업을 지으면 어떻다? 필연적으로 악한 보가 오지 않으면 안되는 거고 나아가서 누가 선한 업을 지었다 그러면은 아직까지 결과가 안나타나도 선한 보가 올거라는 것을 우리가 뭐 할수있다? 예측할 수가 있고, 악한업을 누군가가 짓는다면 보지 안해도 앞으로 악한보가 올거라는 것을 예측하게 되고 누군가 상황이 안좋은 상황에 들어있으면은 이전에 어떤 안좋은 일을 했는가를 뭐다? 미리 짐작해볼 수도 있으며 누가 행복에 겨워가꼬 경사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면 그앞에 그럴수밖에 없었던 선한 업이 원인으로 있었을거다 라고 역시 뭐 할수있게 된다?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게 무서운거에요. 행복해질려면 어떻해야 됩니까? 선업을 짓는 수밖에 없고 내가 악업을 지은 이상에는 절대적으로 불행에 질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그런 윤리적인 정언명법이 여기서 성립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뭐 꼭 착하게 안살아도 얼마든지 행복해질수 있지 않을까 하고 혹여나 그렇게 꿈꾸고 있었던 분들은 이런 가르침 앞에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좌절해야 된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보고 그게 악한 행위다 선한 행위다 단정하기가 어렵다. 이거 판단한다라고 하는건요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예컨데 개구리 한마리가 여기 있는데 뱀이 겨울잠을 깨고 나왔어. 그 앞에 있는 개구리를 안먹으면 죽는거야. 그럼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개입을 했다치자. 뱀이 살자면은 개구리가 죽어. 개구리를 여러분이 살릴려면 이젠 뱀이 죽어. 우리가 이상적인 생각은 뱀도 살고 개구리도 살면 제일 좋을것 같애. 그러면 참 선하다는 말 쉽게 붙일수 있을것 같애. 그런데 뱀도 살고 개구리도 사는 방법은 없을것 같애. 그럼 뱀을 살려야 잘한 짓이에요, 개구리를 살려야 잘한 짓이에요? 이런 문제야 이런 문제. 우리가 선이 뭔지 악이 뭔지 그걸 결정짓는 것이 어려운 것은 개구리를 살려야 잘했다 할까 뱀을 살려야 잘했다 할까하는 문제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이런 선악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 선이 뭐고 악이 뭔지 결정짓는 것이 어렵다라는 문제가 이제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또 호흡을 한번 더 길게 해서 선이 뭔지 악이 뭔지 결정짓고 넘어가는 긴 여정을 또 걸어가야 됩니다. 함부로 여러분들 선하다, 악하다 구분을 하는데 그게 그렇게 만만한 주제가 아닙니다. 정말 어렵다는걸 여러분들이 공감할 때 부처님의 말씀이 아주 단순한 말인데도 정말 대단하시구나 하는 그런 찬탄의 마음이 생겨. 문제를 먼저 문제라고 심각하게 인식하는 자세 이게 불교 공부의 추진력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요. 밥이 의미를 가지려면은 배가 고파야 됩니다. 선악의 정의에 배가 고파야 됩니다 여러분들.
선이 뭐냐 악이 뭐냐를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먼저 주목하지 않을수 없는 윤리학이 기독교 윤리학입니다. 불교라는 종교는 고통에 대한 의식이 강하고 기독교라는 종교는 죄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 기독교 윤리학을 보면 신의 섭리에 순응하는 행동은 선이요, 그 신의 섭리에 역행하는 행위를 악이라고 한다. 간단하죠 그죠. 근데 저게 전혀 간단하지를 못해. 신의 섭리라는게 도대체 뭐냐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신의 섭리가 뭡니까? 교인들한테 물어봐도 답은 신만이 안다. 그말은 어떤 행위가 선인지 악인지를 궁극적으로 판단할수 있는 권능은 누구에게 있다? 신에게만 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더이상 논의를 진행할 수가 없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학에서는 신의 섭리가 무언가를 객관적인 영역으로 좀 끌어내리는데 성공을 합니다. 우리도 신의섭리가 무언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그게 뭐다? 바이블이에요. 바이블에 씌어진대로 하면 선이고 하지않으면 악이다. 그러면 이제 조금 쉬워졌죠. 그러면 마지막 문제를 던져 볼까요? 바이블에 뭐라고 쓰여져 있는데? 질문을 그렇게 던져야 되겠죠. 한마디로 바이블에 쓰여진 바를 이야기할 수 있어. "기독교를 믿어라." 1800페이지에 가까운 바이블에 쓰여져 있는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기독교를 믿어라. 예수의 말을 믿어라. 예수의 말이 기독교죠. 기독교를 믿으면 선, 기독교를 안믿으면 악. 결론이 이렇게 내려져요. 이와같은 선악의 관점은 도그마티즘이다. 교조주의. 저거한테나 받아들여질만한 거지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교리를 받아들일리가 없다. 그걸 우리가 독단, 독선(지혼자 선하다)이라 부른다. 기독교 윤리학을 살피다가 아 이게 문제가 있다라고 느낀 윤리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인게 고대 희랍철학의 윤리학 입니다. 그리스 철학있죠 그죠? 그리스 사람들은 이성적인 사람들입니다. 기독교 또는 이슬람교 이쪽은 종족상으로 보면 셈족이라는 종족의 문화입니다. 이 헤브라이즘이라는게. 유대교 사상으로부터 시작된 그걸 우리가 철학적으로 헤브라이즘이라고 그러는데 셈족은 아주 감성적이고 다혈질적이며 감정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종교를 해. 그런데 그리스쪽 사람들은 요거는 아리안족입니다. 종족이 달라. 아리안족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냉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쪽은 철학이 발달해. 아리안족의 철학적 사유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그리스철학, 고대희랍철학을 살펴보게 되면은 선과 악에 대해서 그래도 좀더 나은 견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기대를 품게됩니다. 그래서 살펴보니까 고대 희랍철학에서는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자연의 섭리 입니다. 자연의 섭리를 따르면 선, 자연의 섭리에 역행하면 악. 동양에서도 그런 견해(도교)가 있다. 자연의 섭리가 뭐냐? 윤리학자들은 요렇게 표현을 했어요. 약육강식. 자연 자연하면 멋있는것 같지만 그 자연의 속을 들여다보면 끔찍하다. 쎈놈이 약한놈을 먹으면서 자연이라고 하는것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잖아요. 다시 말해서 먹이사슬 입니다. 약육강식이라고 하는 자연을 관통하는 모습은 이게 생물학적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강한자가 약한자를 먹도록 도와주는 것이 오히려 잘하는 짓이다 그럽니다. 이 생태사슬을 교란하는 것이야말로 악한짓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윤리학의 입장에 서게 되면은 이게 이상해. 강자가 약자를 먹는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잘하는 짓이다라고 말하는데는 뭔가 석연치 않음이 느껴집니다. 그걸 윤리라고 합리화시켜줘서는 안되지 않느냐고 여러분들 생각을 합니까, 안합니까? 그러나 신의 섭리가 어느영역에서는 지배를 하듯이 이 희랍철학적인 약육강식의 섭리가 대부분의 사람을 사실은 지배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철저히 저 논리에 입각해서 살아가고 있어요. 여러분이나 제가. 출세할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줄을 잘서야 되잖아. 줄을 잘선다는 것은 쎈놈 뒤에 붙아야지. 세상이라는게 기본적으로 강자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구좁니다. 특히 그 대표적인 구조가 언론이야. 일등만을 이야기하지 패자를 이야기하지 안해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약육강식이라는 섭리가 이 사회를 지배하는 섭리로 자리잡았다. 그러면 이 약육강식의 입장에서 선악을 나누는건 뭡니까? 힘입니다 힘. 힘이 강하면 선이고 약하면 악이야. 이런 윤리가 어딨어 세상에. 그러니까 희랍철학도 문제가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윤리학은 선과 악에 대해서 어떤 시도를 하는가? 현대 윤리학에선 우리가 어떤 행동을 보고 선이나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때그때 달라요. 어떤 행동을 어떤 시각에서 보면 선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다른 시각에서 보면 얼마든지 악이라고 할 수 있는거 아니냐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상황에 따라서 선이 악이 될수도 있고 악이 선이 될수도 있는거 그래 봐줘야 되지 않느냐는 거에요. 상황윤리. 이게 오늘날 윤리학의 입장입니다. 저 세가지(기독교, 희랍, 현대) 윤리학 중에 제일 치명적인 윤리는 그게 상황윤리야. 제일 안좋은 윤리야. 왜 그러느냐? 기독교의 윤리학이나 희랍철학의 윤리학은 선의 정의 자체가 충분하지 못해서 그렇지 선에 대한 정의는 내리기는 내린거야. 그러나 상황윤리는 선과 악에 대한 정의 자체를 포기해버린 윤리야. 윤리란건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지침입니다. 말하자면 악하게 살지말고 선하게 살아라 이말 아닙니까. 상황윤리의 경우 어떤 행동을 해가꼬 그게 선이라는 보장도 없고 그게 악이라는 보장도 없고 그말은 뭡니까? 아무거나 해라. 하고싶은대로 해라. 상황윤리는 행동에 있어서 기준을 빼버림으로써 어떤 행동이라도 하도록 방임해버린거야.
인과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정확도가 의미있는 범위내에서는 정해져야 되죠. 완벽하게는 결정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느정도 정확도 내에서는 예측이 되어야 된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이쪽에 선이 오면 이쪽에도 선이 온다라고 우리가 단위를 사용할 적에 그 단위가 정해져 있지 않다라고 한다면 예측이라는 말이 의미가 없다.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도 그 집단 안에서 그 용어가 선은 선이고 악은 악으로 뭐해야 된다? 정해져야지 의미를 가지지.
언제 어디에서나 선이라고 평가될수 있는 선을 절대선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윤리학과 희랍철학의 윤리학이 추구했던 선은 바로 어떤 선이였다? 언제 어디서나 잘한다라고 평가되어지는 절대선을 추구합니다. 오늘날 상황윤리에서 그때그때 다르다라고 말한 것은 다시말해서 절대선이란 없다하고 말하는 거야. 언제나 선이라고 평가받는 그런 선은, 어디서나 선이라고 평가받는 그런 행동 이런것은 없다. 시간이 흐르고 지역이 달라지면 여기서는 선이였던게 저기서는 악이 될수도 있고 지금은 악이였던게 다음에는 선이 될수도 있고 마 이런 입장 아닙니까 그죠? 그러니까 상황윤리라는 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왜냐하면 상황윤리는 절대선은 없다라고 주장하니까, 희랍철학의 윤리가 사실 또하나의 극단인것이 뭡니까? 절대선을 처음부터 있다라고 주장하니까. 그럼 우리 불교에서는 절대선을 있다라고 주장할까요, 없다고 주장할까요? 불교라는 종교가 위대한 것은요. 순서를 안다라는 거야. 무슨 순서? 접근하는 순서. 그것이 윤리적인 주제든, 철학적인 주제든 관계없어. 어떤 주제를 앞에 던져 주더라도 그 주제를 어떻게 공격해 들어갈것인가 할때 그 공격해 들어가는 순서, 그 절차, 차례를 압니다. 선이 뭐냐, 악이 뭐냐는 주제가 던져졌을 때 다른 종교나 다른 사상들은요 당황하거나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해. 그냥 덥석 이게 선이다, 이게 악이다라고 말할려고 너무 서둘러. 근데 불교라는 종교는 전혀 서두르질 않습니다. 느긋해. 그건 뭔 말이냐? 서둘렀다는건 무슨 말이냐? 기독교 윤리학이나 희랍철학은 처음부터 절대선을 말할려고 덤벼든다. 신의 섭리가 절대선의 기준이다랄지, 자연의 섭리가 절대선의 기준이다랄지 이렇게. 그런데 부처님 입장에서는 뭐라고 하셨느냐. 뭐하러 처음부터 절대선을 이야기 하느냐. 처음부터 절대적인 선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준다 한들 누가 알아듣느냐는 거야. 무슨 말인줄 알겠습니까 여러분들. 미리 말씀드리지만 불교 절대선 주장합니다. 그래서 종굡니다. 종교가 다른 학문과 차이나는 것은 절대적인 것과의 만남을 주장하기 때문이야. 종교가 상대적인 범주에서만 머물고 모든걸 상대론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그게 무슨 종교야? 그냥 세간의 학문이지. 절대라는 것은 무엇 입니까? 시간과 공간 그 전체를 포섭하는 개념입니다. 어디서나 언제나라고 하는 이런 개념을 포섭한게 뭐에요? 절댑니다. 그 어디서나 언제나 선하다라고 하는걸 우리가 들었을 적에 그게 그렇구나라고 납득할것 같애요? 그게 안됩니다 여러분들. 중생들이 보고 있는 범위라고 하는건 공간적으로 말하면 한점에 불과하고 시간적으로 말하면 한찰나에 불과하다. 못보고 경험하지 못한 공간과 시간이 훨씬 많다. 그런데 그 모든 공간과 시간에 적용되는 선을 이야기한들 그게 어떤 의미를 당장에 가진다, 안가진다? 안가집니다. 이건 의미를 안가지는게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가 못본거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은요 요 중생이란게 참 희한합니다. 쓸데없는 말한다고 덤벼들어. 그게 비난한다라는 거야. 그래서 부처님이 중생들에 대해 통찰하신게 세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무식하다. 무지, 두번째는 나약하다. 아주 겁쟁이야. 그러면서도 세번째는 뭐다? 오만하다. 중생들은 한없이 무지하면서도 한없이 나약하면서도 한없이 오만하다. 그중에서도 문제가 되는게 오만입니다. 그러니까 이 절대선에 대해서 처음부터 말해주면 안됩니다. 그래서 잘 들어봐요. 불교라는 종교는 절대선을 인정하면서도 처음부터 절대선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절대선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 윤리나 희랍철학과의 차이고 결국에는 절대선을 주장한다라는 점이 현대 상황윤리와의 차이점 입니다. 알겠습니까 여러분들. 불교는 처음부터 절대선을 이야기하는 경솔함에 빠지지 않더라는 거야. 말해준들 알아듣냐 이거야. 그래서 기독교 윤리학이 나중에 후회하는 겁니다. 신만이 아는게 신의 섭리 아닙니까? 그걸 이야기를 괜히 했다 이거야. 놔두면 역시 하느님이 맞구나 할거를. 너무 경솔했지. 절대 불교는 경솔하지 않습니다.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누누히 이야기하지만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 합니다. 느긋하게. 불교 공부를 하는 요령은 딱 하납니다. 느긋하게 가요. 게으르지만 않는다면. 게으른적이 없이 열심히 하면서 느긋하게 해라. 은근하게. 끈기있게. 하는듯 안하는듯. 게으르지만 않으면 되.
이게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 건가. 자 불교는 이 선을 이야기 하는데 상대적인 차원에서의 선, 상대선에서 부터 출발을 합니다. 처음에는 상대적인 입장에서 일단 선악을 이야기 하는데 이거는 참 상황윤리하고 닮았어요. 상대적인 입장에서는 그 상대적인 범위를 넘어서면 어떻다? 충분히 그 평가는 바뀔 수 있다를 이미 그 정의 자체가 필연적으로 함유하고 있어. 그렇게 선과 악이라는 것을 처음에 상대적으로 이야기 하다가 이걸 서서히 절대선의 경지로 끌고 갑니다. 어떻게 끌고 가느냐? 선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한단계 더 깊은 윤리학적인 정의를 도출합니다. 그 윤리학적인 정의를 뭐라 그런다? '정'의 윤리. 처음에는 어떤 윤리를 설하신다? 선의 윤리를 설했다가 용어 자체를 바꾸셔. 처음에는 착함의 윤리를 설하시다가 그 다음에 바름의 윤리를 설하신다. 불교안에는 착하다는 말하고 바르다는 말은 엄격히 구분되어지는 다른 차원의 용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착하게 살자 그러죠? 바르게 살자 그러죠? 두 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수준에 있어서 착하게 산다보다도 훨씬 깊이 있고 폭이 넓은 착함 내지는 윤리적인 삶을 뭐라 그런다? 바른생활 이라고 하는 거에요. 착한생활이 마스터 된 자에게 바른생활을 소개해야 됩니다. 불교에서 바른생활이라고 하는건 팔정도에 정명이란게 나오죠? 그때 명은 생활 명이야. 팔정도에서 그 정자 대신에 선자 씁니까? 절대 안써. 팔선도라는 말은 없어. 수행하는 사람의 수행을 보고는 바를 정자를 써주지 착할 선자 안씁니다. 그런데 십선업 그러죠? 업이라는 말에는 또 정자를 안쓰고 선이라는 글자를 쓴다. 업은 누가 짓습니까? 우리 재가자들이 짓는거라 그랬죠. 그에 비해서 수행은 뭡니까? 출가자들같은 전문가적인 집단에 의한 그런 삶의 방식이라 그랬죠. 수행과 업의 차이를 내가 이야기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업의 방법과 수행의 방법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수행이라는 것과 업이라는 것은 출가자와 재가자로 분명히 나뉜다라고 그랬어요. 우리 재가자들이 지을 때는 선하다는 윤리밖에 해볼 도리가 없어. 바르다라는 윤리는 출가자들, 재가자들 보다도 훨씬 선한 생활을 할수 있는 조건을 가진 자들이 비로소 바름의 윤리를 추구할 수 있을 정도야. 그러면 이 바름의 윤리를 이야기했다 해가꼬 불교의 윤리적인 제안이 끝났느냐? 아닙니다. 다시 여기서 참 진자, 진의 윤리. 소위 참됨의 윤리가 설해지게 됩니다. 착함의 윤리라고 하는 것이 아주 상대적이고 그 범위가 얼마되지 않을 줄 모르지만 이게 바름의 윤리로 넘어가면 훨씬더 폭과 깊이가 강화되어지고 이게 참됨의 윤리로 넘어가면 그 선함의 폭이나 깊이가 이뤄말도 못하게 넓어지고 깊이가 깊어지는 겁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절대선의 경지가 선언됩니다. 그걸 우리는 밝음의 윤리라 그래. 그리고 그걸 뜻하는 한자어가 뭔거 같애요? 선의 윤리에서 정의 윤리, 정의 윤리에서 진의 윤리, 진의 윤리에서 각의 윤리야. 깨니까 밝아질거아냐. 그래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불교의 수단적 목표를 뜻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윤리학적인 지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깨달음의 윤리, 밝게 살자. 절대선에 결국 도달한다 말하면서도 처음부터 절대선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상황윤리는 절대선을 결국 이야기하기 때문에 결국 불교하고 해당사항이 없고 처음부터 서두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절대선에 관련된 주장하고도 거리를 둘 수가 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배경을 들어뒀다면 본격적으로 업의 차원에서 맞는 단위인 선과 악에 대한 정의를 들을 시간이 된거야.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선악의 정의는 어떤 차원에서의 정의다? 가장 초보적인 입문단계에서의 선악의 정의지 그게 우리 불교가 내리는 절대선의 정의는 아니다. 그러나 그게 전혀 관계가 없는건 아닙니다. 이게 이렇게 진화해 나가는 거니까. 이게 이렇게 진행해 나가는 거니까. 그러면 불교는 뭘보고 선이고 악이라 말하느냐? 자신(육근)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꾀하는 행위에 대해서 내리는 불교 윤리적인 평가가 선이다. 그리고 육근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공동체 전체에 피해가 가는 것을 야기하거나 방조하는 행위에 대해서 내리는 불교 윤리적인 평가가 악이다. 한마디로 뭡니까? 선은 뭘보고 선이다? 공리. 공동체 전체의 이익. 기본적으로 업을 짓는 이유는 뭐라 그랬어요? 편할려고. 누가 편할려고? 육근 스스로가. 기본적으로 육근 스스로의 이익을 위하여 그게 업을 짓는 목적입니다. 육근 스스로가 이익을 축구할때 육근 자신을 포함해서 공동체 전체의 이익까지 고려하여서 행동하면은 뭐다? 그 공동체 안에서 뭐라고 불러준다? 선하다. 육근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공동체 전체에 피해가 가든지 말던지 야기하거나 방조하면 뭐다? 이기. 다시말해 공리면 선이고 이기면 악이다. 항상 공동체를 전제한다라고 하는것. 왜? 세상은 육근으로만 존재하지않고 반드시 육근과 육경들이 어울려 있잖아요. 그걸 일체라고도 부르지만 공동체라고 불러도 된다. 반드시 모든 육근들은 그 육근에게 의미있는 공동체 속에서만 살아갑니다. 의미있는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전부를 자기의 공동체로 일단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가족. 가족 공동체 그럽니까. 또는 마을. 부락 공동체 그러죠. 자기 생활에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영향을 끼치는 공동체들이 모든 개인들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게 가족입니다 여러분들. 그리고 그 가족만큼 중요한게 뭐냐면은 전통적인 한국사회에선 부락이였어. 마을공동체. 그래서 그 마을 안에서 선하면은 그 마을밖에서 어떤가는 신경도 안써줍니다. 그 안에서 잘하면 되 일단. 그게 관심입니다. 그 마을 안에서 평판이 안좋거나 욕을 먹게 되면 그 마을 떠나야 되잖아. 그만큼 공동체라고 하는 것의 구속력이 강합니다. 요즘 사회는 직장이야. 직장공동체. 그래서 공동체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이해하는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각 개인에게 의미있는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성립되기 때문에. 그 각 개인에게 의미있는 공동체가 성립되었을 적에 그 공동체 속에 일단 내(육근)가 있어. 그리고 또 뭐들이 있습니까? 옳지. 우리가 남들이라 부르는것은 육경들이죠. 그랬을때 선은 도식하면 뭡니까? 나도 그리하면 좋지만 남도 그리하면 좋은거. 요걸 뭐라고 부른다? 이 공동체 안에서는 뭐라고 부른다? 선하다. 그말은 이 공동체 밖에서 그걸 선이라고 할지, 안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라는 소립니다. 이건 엄밀히 말하면 상황윤리와 닮은데가 있다. 그러나 상황윤리와 다른것은 상황윤리는 이런이유로 선과악에 대한 정의를 포기한 윤리라고 하면은 불교는 이걸 바탕으로 절대선까지 나아가는 긍정적인 방향을 전제하고 있는 윤리라는 겁니다. 상황윤리는 여기서 스톱해버린 겁니다. 근데 불교는 이걸 가지고 어떻다? 정의 윤리로 심화시키고 진의 윤리로 심화시키고 궁극적으로 각의 윤리까지 밀어부치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는거야. 그게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악은 뭘까요? 나는 그리가면 좋은데 육경들은 그리가면 안좋아. 그래서 이리가야 겠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좋지만 남은 안좋은거. 업의 차원에서 짓는 선은 그 공동체 안에서만 대개 선이다 이래 보면 되. 그런데 그 공동체 안에서조차 악이다라고 평가 받아서야 쓰겠냐는 거야. 이 공동체 전체를 위한 선임에도 불구하고 밖에서 보면 그게 선일지 악일지 모르는 판국에 이 안에서조차 나쁜놈이다라고 손가락질 받아서야 쓰겠냐는 거야. 악업의 문제는 그래서 심각한 겁니다. 세상 어디가서 고개 디밀때가 없어지는게 악업이야. 지가 사는 부락이나 직장 안에서는 뭡니까?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으며 살아야 될거 아닙니까? 그래요, 안그래요? 그래서 저는 불교라는 종교의 윤리는요 현실성이 있다고 봐요. 무슨 온 우주에 잘했다고 두루두루 평가받는 일을 해야된다 그건 지금 우리 수준에 필요없는 말입니다. 그냥 우리집 안에서 잘한다. 우리 아버지 훌륭하다. 우리 어머니 훌륭하다. 참 내부인 훌륭하다라고 평가해줄 수 있고 자기가 나가는 직장 안에서라도 뭡니까? 참 저사람 잘한다. 이게 급선무야. 업의 주체가 뮙니까? 육근이다. 남 행동 신경쓰지 말고 지 행동 부터 신경쓰고, 전제가 의지적이라 그랬죠? 의식적이고 의도적인것부터 신경쓰고 무의식적이거나 의도없이 벌어진거는 신경쓰지 마라 그랬듯이 선의 정의도 뭐다? 니 공동체 안에서나 잘해라 이거야 지금. 그말은 뭡니까? 그 안에서도 못한다 이겁니다. 여러분들은 최소한 공리는 추구합니까? 공동체 안에서 만큼은 내가 살고있는 토댑니다 그 공동체는. 그 공동체에서 벗어나면 지가 죽어. 근데 지가 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그 공동체를 뭡니까? 이용하는, 그래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어떻다? 공동체 전체에는 피해가 생기는 것을 야기하거나 혹은 방조하는 행위를 한다, 안한다? 길거리 가면서 어떻습니까? 입에 침이 고이거든. 그거 지 침이잖아. 지가 더럽다고 입에 넣어두기 싫어서 뱉으면 남은 오죽 더럽겠어? 그게. 그런데 왜 뱉어 그걸. 그러니까 지 좀 편하자고 어떻해요? 남은 피해가 가거나 말거나 이걸보고 악업이다. 윤리적으로 악하다 그래요.
선이 공리고 악이 이기라고 하는 것은 원인의 입장에서 정의를 내린거야. 선업에는 뭐가 온다? 선과가 오고 악업에는 악과가 온다 그랬죠. 우리는 두가지를 살펴야 됩니다. 선업에는 진짜 선과가 오고, 악과에는 진짜 악과가 오는지 살펴야됩니다. 이 단위가 정확하게 들어맞는 단위인가? 그 문제가 하나 남아있고 두번째 결국 선과하면서 결과를 말했습니까, 안했습니까? 결과의 차원에서 선하다고 하는 것은 원인의 차원에서 선하다라고 말한것 하고 또 다릅니다 여러분들. 내가 뭐라 그랬습니까? 결과는 일종의 보죠. 업인과보하면서 보라 그랬죠. 보는 원어가 뭐다? 위파카, 다르게 익는단 말 했죠. 다시말해 공리가 공리로 나오는건 아냐. 나올땐 다르게 나와. 따라서 결과의 위치에서 선이라고 할 때는 표현이 달라요. 결과의 위치에서 악이라고 할 때는 표현이 달라져. 그래서 선이 뭐냐는 불교에서 아주 치밀합니다. 원인의 입장에선 공리를 선이라고 하고 결과의 입장에선 요넘이 선이라고 합니다. 악은 원인의 입장에선 이기라고 하고 결과의 입장에선 요놈을 악이라고 딱 정해버린다. 그런 이야기까지 다 들어야 가장 초보적인 선악의 정의라도 어떻다? 제대로 파악을 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보라는 말의 원어 위파카(vipaka), 익기는 익되 다르게 익는다. 업의 결과에 어느정도 차이가 있다는 뜻도 들어갈 뿐 아니라 업하고 똑같은 결과는 없다라는 소립니다. 다시 말해 업이 공리였다고 결과도 공리다 이건 처음부터 아닙니다. 결과의 입장에서는 공리를 선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결과의 입장에서는 이기를 악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럼 결과의 입장에서는 무얼 선이라고 하고, 무얼 악이라고 하는냐?
선이라고 하는것은 육근 자기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데 그 어떤 행동A가 다른 육경들에게도 뭐다? 똑같이 이익이 된다라는 판단을 불러 일으킬수 있는 행동이다 이거야. 그러면 이 A라는 행동을 육근이 하고자 할적에 다른 육경들이 그 행동을 도와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도와주게 되면은 육경들도 다 A는 하자고 한다 이거야. 그럼 이 행동이 이루어져. 최소한 이 공동체 안에서는 육근하고 육경들 뿐이니까 이루어질수 밖에 없어. 그러면 A라는 행동이 이루어진다라는 것은 궁긍적으로는 육근이 뜻한바가 이루어지는 것이되. 그러면 육근에게 있어서는 전부다 좋은 소위 공리를 동반하는 행동을 하니까 남들의 도움을 받아서 원래 자기가 뜻한바가 이루어졌어. 이걸 우리는 다른 말로 뜻대로 되었다. 이렇게 뜻대로 된걸 보고 한마디로 뭐라 할까요?
육근이 어떤 행동 B를 할려고 하는데 B를 하면 육근한테는 이익이 되. 근데 B라는 행동이 육경들에게는 이익이 되지 않고 피해가 된다라고 한다면은 이 육경들은 B라는 행동을 하지말자 그런다. 남들이 방해해도 내가 하겠다고 기어코 애를 쓰다보면 이루어질 수 있는거 아니겠어요? 이게 착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느그가 안된다 하더라도 나는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는데 그게 착각입니다. 두가지 착각을 했어. 하나는 어떤 남도 나보다 힘이 약한 남은 없습니다 여러분들. 같다고 보는게 제일 좋아. 두번째는 남들은 나보다 항상 수가 많다는걸 기억해야 합니다. 이게 문제에요. 지는 하난데 남들은 수가 많아. 수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 왜? 힘은 다 같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는 좋은데 남은 싫은 일은 처음부터 안하는게 좋아. 왜? 남들이 방해하면 괜히 수고로움만 있을 뿐이지 일이 안이루어지게 되어 있어. 이건 예측이 가능해. 결국 그 일은 육근의 뜻대로 된 겁니까, 안된 겁니까? 안되죠. 뜻대로 되지 않음이 결과로 나타난거야. 뜻대로 되지 않은걸 보고는 우리가 뭐라 그럽니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은 한마디로 고 라고 바꿀줄 알아야지. 원인의 입장에서는 이기가 악이지만은 결과의 입장에서는 괴로움이 악입니다. 그러면 뜻대로 된거는 뭐라고 할래요? 락. 원인의 입장에서는 공리가 선이요, 이기가 악이였지만 과보의 입장에서는 즐거움이 선이요, 괴로움이 악이다.
불교는 절대 괴로움이라고 하는걸 인정하지 않는 종굡니다. 반드시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즐거움을 얻아야 된다는 종굡니다. 괴로움 속에서 찡그리는 종교가 불교가 아니고 즐거움 속에서 환하게 웃도록 하는 가르침을 베푸는 종교가 뭐다? 불굡니다. 불교는 요, 즐거워야 되는 종교야. 즐겁고 행복해야 그게 선이지 괴롭고 찡그리면 그건 죄악입니다. 그래서 선인선과 그럴적에 인에 붙은 선은 공리를 뜻하는 말이고 과에 붙은 선은 뭐다? 즐거움을 뜻합니다. 그래서 선인낙과 라고도 하지. 그리고 악인악과 할적에 인에 붙은 악은 뭐다? 이기적임을 악이라고 부르고 결과에 붙은 악은 뭐다? 괴로움을 악이라고 그럽니다. 지금 조금이라도 나에게 괴로움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번뇌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닌 한에는 반드시 그 괴로움은 무엇 때문에 온거다? 이기적인 나의 행동이 원인이 된거다라고 예측이 가능한 것입니다. 절대로 누구를 탓하거나 누구를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고통스럽고 힘들다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원인이 뭐였다? 나혼자만 살겠다라는 이기적인 의도나 행동이 전제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괴로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괴로움을 받는 메카니즘도 분명해 졌어요. 지 혼자 살라니까 남들이 막은 거야. 남들이 막으니까 지 뜻대로 되는 일이 없지. 그러니까 괴로워지는 겁니다. 업인과보의 법칙이라고 하는거 이제 선인선과 악인악과까지 이야기 함으로서 어떻습니까? 물질에 대해서 우리가 업을 지었을때 물질은 자연법칙적인 반응을 보였죠. 그런 자연법칙적인 인과율에 더해가지고 이제 상대방의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습니까? 선악상응의 인과율을 주장할 수가 있잖아요? 그죠? 그러면 전체적으로 봤을 때 업인과보라고 하는 것이 법칙으로 성립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상대방이 의지가 없는 육경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상대방이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 선과 악이라고 하는 단위를 우리가 분명히 사용할 줄 알기 때문에 그 선과 악이라는 단어사이에 인과라고 하는 법칙적 용어를 써주는 것은 이제 문제가 있다, 없다? 문제가 없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업인과보라는 법칙을 만들어 내게 되는데 이 업인과보라는 법칙을 뒤집어서 한 문장으로 만들면 뭔줄 압니까? 부처님이 딱 한마디만 하실 수 있다면 뭐라 말할 것 같아요? 45년가 부처님이 8만4천 법문을 설하셨는데 그 8만4천가지 법문 중에서 딱 한가지 가르침을 베풀고 싶다. 한가지 밖에 말씀을 못하시니까 굳이 한가지 말씀을 하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공생 아니면 공멸이다. 같이 살려고 하면 다 살것이고, 혼자 살려고 해가꼬는 다 죽는다. 업인과보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공생 아니면 공멸이란 말입니다. 공자가 계속 나온다라는 걸 여러분들께서는 유의깊게 보셔야 합니다. 그니까 공생하려는 의도가 선입니다. 그리고 혼자 살려고 하는 의도는 결국에는 공멸의 괴로움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걸 이야기 합니다. 어떤 민족이고 어떤 문명이건 간에 그 민족과 그 문명이 발달할때는 그 민족과 그 문명의 단합과 화합 그것이 반드시 필요조건으로 전제되었다. 어울리고 화합된다는 건 무얼 의미합니까? 같이 살겠다라는 취지지. 그러니까 지적으로 좀 떨어지고 기존 자원이 좀 없고 그리고 너무 악조건의 산악지형에 살고 하는건 아무 문제가 안된다라는 겁니다. 거기에 있는 개체들이 같이 살려고 하는 의도가 있느냐 혼자 살려고 하는 의도가 있느냐 여기서 결정이 된다. 이 업설을 공부하면서 내 혼자 잘 살수는 없다라고 하는 것을 뼈에 느껴야 되요. 행복해질려면 어떻게 해야된다? 나에게 의미있는 그 공동체가 전체가 잘되도록 해야합니다. 그래서 그 전체가 잘되는 방식으로 내가 어떤 행동을 할려고 하려면요 그사람은 그집단 안에서 반드시 성공합니다. 수가 많아야 되요. 그것에 동참하는 수가. 지 혼자 잘나서 지 혼자 하겠다 해가꼬 되는거 하나도 없습니다. 수를 모으지 못하면은 업설은 그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반드시 함께되는 이익을 추구해가꼬 수를 모아라. 니 하는 일을 전부다 동의하도록 맨들어 줘라. 그럴때만 니가 살게 된다. 그리고 다 산다. 세상 사는 이치란게 복잡한게 아니다. 공생 아니면 공멸이다. 여러분이 어떤 단체를 한다던지 가정을 꾸릴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직장을 나가서 생활할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선은 다 좋은일을 하면 지가 손해보는거 같죠? 아닙니다 여러분들. 결국 그 사람이 그 집단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가꼬 윗자리에 오릅니다. 나혼자 살면되지 느그까지 내가 왜 다 신경써야 되냐가 아닙니다. 이것들(육경들)을 신경써줘야지 나도 산다라는 거야. 왜? 내 혼차 되는일 없으니까. 어차피 도움받지 않으면 안되니까. 남한테 도움을 받으려면 뭡니까? 내가 먼저 도와준적이 있을때만 그게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힘이 있을때 많이 많이 도와줘. 없을때 누가 보시해라 그럽니까? 보시받아도 시원찮을 사람보고. 좀 있고 하면 그때 좀 해나라. 희한하게 있을때 해놓으면 어떻다? 없을때 도움받는 거거든. 지는 하나도 한거 없으면서 지는 달라 그러면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꼴 아닙니까? 업인과보의 법칙은 근본적으로 뭐다? 공생 아니면 공멸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이 원칙을 잘 이해하시 가지고 여러분의 삶에 항상 적용을 하신다면은 반드시 여러분들의 남은 인생은 성공하실 수밖에 없고 세세생생 성공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혹여 그렇게 살았는데도 여러분들에게 실패나 좌절이 생긴다면 그건 어느땐가 여러분들이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행을 했던 그게 남아가꼬 그런 좌절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지 딴 이유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같이 살려고 한다라는 말이 뭐냐? 쉽게 말하면 남을 배려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이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좋아할까 이걸 머릿 속에 탁 생각을 해야한다. 누가 좋아하건 말건 내 하고 싶은데로 하지 아 이건 위험한 생각이에요. 일차적으로는 그행동 때문에 남들이 타격을 받지만은 그 타격은 자기의 타격으로 집중되면은 기사회생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때는. 이정도까지 하면은 업인과보와 관련지어서 가장 기본적인 정보는 제공이 끝난 겁니다.
업의 정의, 아집의 유지 존속을 통하여 편하려고 일으키는 육근의 의지적 행동 중에서 외행동을 업이라고 한다. 그 업에 대한 보의 정의, 업의 외행동에 대해서 육경들이 보이는 반응이 보다.
그 업과 보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한다?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인과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선행하는 사건과 뒷따르는 사건 사이에 필연적 상응성과 예측 가능성이 성립해야 되며 그랬을때 그 예측 가능성과 관련하여서 의미있는 예측 가능성의 이론이라는 것까지 살피면서 업인과보의 법칙이 성립된다라고 하는것과 관련하여서 상당히 핵심적인 논점들을 다 넘어가지고 이제 드디어 업인과보의 법칙을 정립하게 된겁니다. 그리고 그 업인과보의 법칙을 달리 말하자면 뭐다? 공생 아니면 공멸이라고 하는 표현으로 우리가 마무리를 지을 수 있다.
자 이렇게 이야기하면 업인과보의 법칙은 완벽해졌는가? 넘어야할 산이 4개가 남아 있습니다. 성립시킨 업인과보의 법칙을 가지고 설명해 들어가야할 그런 과제가 4가지가 남아가 있어. 그 4가지가 뭐냐? 첫번째 다양한 출생의 문제, 두번째 결론이 없는듯한 죽음의 문제, 세번째 우주의 생성과 관련된 문제, 네번째 미시세계의 기묘함과 관련된 문제.
그러나 인간이 대하는 대상 육경에는 자연물만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인간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연법칙적인 인과율은 아니더라도 일종의 법칙성이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일으키는 업의 방향과 목적은 다를수가 없다. 덧없고 괴롭고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에서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개아의 존속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사람이 자기 혼자만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에 거역할 것임에 틀림없고 나와 남의 이익을 함께 위한다면 그들은 순응할 것임에 틀림없다. 혼자만을 위하는 행동은 악이라 할 수 있고 나와 남을 함께 위하는 행동은 선이라 할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악한 업에는 괴로움 보가 선한 업에는 즐거움 보가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악업은 남의 거역을 받아 뜻이 이루어지기 어려워 괴로움이 되고 선업은 남의 순응을 받아 뜻이 이루어지기 쉬워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과 인간사이에도 일종의 법칙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와같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자연법칙적인 인과율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선악상응의 인과율을 통합적으로 이해하여 십이처의 세계에는 업인과보의 법칙성이 성립한다고 정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십이처의 세계, 곧 이 우주에 속속들이 적용될것 같은 업인과보의 법칙으로 좀처럼 쉽게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인식됬다. 즉 어떤이는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일생을 즐거이 산다. 어떤이는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한평생 고생만 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요게 저앞에 적어둔 다양한 출생의 문제다. 출생에 있어서 다양한 차별이 실제 인지되고 있다. 이런 출생에 있어서 다양한 차별은 그게 일생을 좌우하는 것일수가 있습니다. 부자집에 태어났다라는 것은 일종의 결과죠. 결과 중에서도 낙과라고 할 수 있죠. 낙과가 있기 위해선 먼저 선행이 있어야 되죠. 그런가 하면 어떤이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궁핍함을 면치 못하는 경우를 보는 것이다. 이거는 여기 제기한 문제 중에 어떤 경웁니까? 결론이 없는듯한 죽음의 문제. 다시말해서 남한테 피해 안주고 한평생 열심히 일했으니까 잘한거죠? 그러면 선업에는 뭐가 와야 됩니까? 선과가 와야되죠. 죽도록 고생만 하고 볕한번 못보고 죽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도 업인과보의 법칙은 너무 야속하죠. 선업을 지으면 선과가 온다고 철떡같이 믿은 사람들 한테는 너무나 실망이 클거야. 그다음에 또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우주인 역사의 전개도 사실 인간의 업력이 그 원인이 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은 것이다. 광활한 우주의 질서있는 움직임, 무한한 미래에로의 팽창, 의지적인 육근의 업에 의한 것이라고는 볼수 없는 부분이 있지 않는가. 우주는 상상을 할수 없을 정도로 커. 근데 육근, 그 외연을 넓혀가꼬 모든 육근들을 다 끌어 모았다고 칩시다. 원래 육근은 지혼자 뿐인데 의미를 넓히게 되면 육근의 범위가 생명체로 넓어질 수가 있어요. 그 생명체 전체를 끌어모은다 하더라도 이 우주속에서 생명체가 차지하는 어떤 물리적 공간은 참 티끌만큼도 안될지 모릅니다. 그 티끌만도 안되는 생명체가 이 거대한 우주를 굴리고 있다라고 하는건 사실 말이 좀 안되지 않느냐라는 거에요. 그게 우주의 생성과 관련된 문제가 되는 겁니다. 분명히 아주 작은 입자들의 세계로 들어가면 예측이 불가능해지는 부분이 한둘이 아닙니다. 예측이 불가능하다라는 것은 업인과보의 법칙을 적용한다라는 것이 어렵다라는 소리가 되고 맙니다. 왜? 예측이 가능해야지 인과를 쓸 수가 있으니까. 그러니 이런 미시세계가 들어내고 있는 기묘함과 관련된 문제도 업인과보의 법칙이 궁극적으로는 풀어야할 하나의 문제다. 이런 문제들을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풀어나가야 될것인가. 요런 문제들은 묘하게도 다른 종교사상에서는 문제가 안된다 그럽니다. 왜 그사람은 그런식으로 태어나야만 하냐? 그게 신의 뜻이다 어 이러면 말이 딱 되버린다. 왜 그사람은 아무리 해도 안되나? 운이 없어서. 이 우주라는것이 어떻게 이런식으로 생성이 되었는가? 그게 신의 위대한 힘이다. 미시세계는 왜 그렇게 기묘해야 되느냐? 그게 다 신의 섭리지 뭐. 신을 가따 부쳐가지고 안풀리는 문제가 있다, 없다? 없습니다. 운명도 마찬가지. 그게 우주의 운명이야. 그게 물질세계가 가야될 정해진 길이야. 그게 인생의 운이라는 거야. 하면 운명론도 통한다, 안통한다? 통합니다. 그리고 우연론도 잘 통한다. 태어나다 보니 그렇게 되었지 뭐 이유가 있겠냐. 잘되고 못되는데 무슨 이유가 있냐. 어쩌다보니 잘된거고 어쩌다보니 안된거다. 참 우연으로 설명하면 이게 다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연론이나 운명론이나 유신론으로 가야 될까요? 우연론은 요새 과학자들이 지지 합니다. 유신론은 기독교인들이 지지하지. 운명론은 사주관상가들이 지지한다. 그 지지하는 파들도 많아. 업인과보는 이걸 설명을 못하는데 이놈들은 이걸 설명을 하니까. 일로 가야할까요?
요걸(4가지) B라고 불러볼께요. B라는 말을 내가 왜 썼을까요? A가 있으니까 썼지. A는 뭐냐? 업보적 현상의 세계. 여러분들 열심히 했지만 결론이 없는듯한 죽음도 있지만 열심히 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우리 눈으로 봅니다. 아주 교묘하게 지혼자만 살려고 하다가 패가망신하는 것도 눈으로 봅니다. 특히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죄는 악에 속하고 벌도 악에 속하죠. 니가 악을 지었으니까 악을 받는거는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걸로 이해가 쉽습니까, 어럽습니까? 어려울거 하나도 없습니다. 근데 희한한건 여러분들. 요 B의 현상을 잘 설명했던 소위 우리가 그것을 삼종외도라고 그러는데요. 이 삼종외도는 A그룹을 설명하러 들어가면 하나도 못해냅니다. 예를 들어서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것을 두고 삼종외도를 적용하면 어떻습니까?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전부 신의 뜻으로 지었는데 왜 사람한테 벌을 줘? 운명적으로 죄를 지을수 밖에 없으면은 운명에게다가 책임을 묻든지 말든지 해야지 모순이 됩니다. 우연히 죄를 지은 경우도 마찬가지야. 우연히 벌어진 일을 가지고 그 사람을 특별히 지적해가꼬 벌을 묻고 자시고 할게 뭐가 있느냐? 여러분들 교재 한번 보실까요.
실제 이런 현상들 때문에 삼종외도설이 나온것으로 보인다. 신의 뜻에 맡긴다던지 숙명적으로 이해한다던지 물질의 우연한 흐름으로 이해한다면 이런 문제들은 오히려 쉽사리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견해는 앞서도 보았듯이 나름대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의지에 바탕한 업보적 현상, 곧 죄악과 의지에 대해서는 타당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A업인과보, B삼종외도, 3번째 절충론. A그룹을 설명할 때는 업인과보로 설명해가꼬 50점 따고, B그룹을 설명할 때는 삼종외도로 설명해서 50점을 따면 모두 100점이다. 어때요. 진리 찾았죠? 이게 진립니까? 왜 아닙니까? 그렇지. 진리의 정의는 한가지 원리로 백점을 맞아야지 서로 상반되고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가지 원리로 백점을 맞으면 어떻다? 진리라고 못한다. 진리 자체의 정의에 어긋납니다. 그랬을 때 업인과보의 원리와 삼종외도의 원리가 양립이 가능한건지, 불가능한건지 살펴봐야하는데 양립이 불가능합니다. 왜? 업인과보는 모든 것의 원인이 내안에 있다라고 하고 주장하는데 비해서 삼종외도는 모든 것의 원인이 내 밖에 있다라고 주장을 했기 때문에 양립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절충론은 비유를 하자면은 시소의 양끝이 같이 올라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종교학자들이 주장을 합니다. 삼종외도를 인정하게 되면 업인과보는 부정되어야 되고, 업인과보를 인정하게 되면 삼종외도가 부정이 되야 합니다. 그런데 절충론은 둘다 인정을 해버린거야. 그럼 시소의 양끝이 다 올라갔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 안되는거죠. 그래서 절충론은 올바른 진리론이라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백프로 진리를 찾기 위해서 또하나의 견해가 제시되어 지는데 그걸 제3의 진리론이라 그럽니다. 업인과보도 아니고 삼종외도도 아닌 제3의 진리를 그러면 찾아야 되겠군요 하는 사고방식을 제3의 진리론이라 그럽니다.
무진리론이 왜 잘못되었을까를 논증하라. 무진리론이 잘못되었음을 논증하라. 끝까지 가보지도 않고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 단정하기 어렵죠. 근데 여러분들 부처님을 통해서 제3의 진리를 찾아보지도 않고 제3의 진리가 없다라고 하는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봤죠. 왜? 안에서 찾은게 업이고 밖에서 찾은게 삼종외도인데 제3의 진리가 굳이 있으려면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장소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장소가 없으니 제3의 진리도 없다. 논리가 탁 들어 꽂히잖아. 그러다보니 무진리론이 나왔죠. 무진리론도 그자체로 치명적인 결함을 하나 가지고 있어. 요게 뭐냐? 우리가 진리가 뭔지는 모르지만 진리가 없지는 않다라고 하는 것만 증명해내도 뭡니까? 상당한 경집니다. 도 튼다는 걸 너무 먼데서 찾지 말아요. 지혜를 얻으면 되. 그 지혜를 얻어야 해탈해. 그 지혜를 얻기 위해서 삼매에 드는거야. 그리고 삼매를 보존하기 위해서 계율을 지키는거야. 그래서 계정혜 해탈입니다. 그리고 해탈지견까지 가는 겁니다. 여러분들 불교학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를 얻고자 하는 중요한 방법론 입니다. 불교학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정진시킬수가 있다? 지혜를 증진시킬수 있다. 그동안 여러분이 갈고 닦은 계율과 삼매를 바탕으로 뭡니까? 지혜를 이제 일으킬 차례야. 그 지혜를 일으켜야지 뭐다? 해탈이 눈앞에 다가오고 해탈지견이 기대가 되는거야. 보면은 여러분 계율 잘 지켜요. 보면은 여러분들 틈틈히 삼매에 드는 사람들이 많다는걸 알아요. 그런데 지혜를 일으키지를 못해. 마 삼매에 든것이 목적인줄 알아. 아닙니다. 그 삼매 속에서 무얼 일으켜야 된다? 지혜. 제대로 계율을 지키고 삼매를 수습해서 지혜가 터져나와야 되. 정말 제대로 공부했는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터트려봐요. 무진리론이 잘못되었음을 논증하라(이건 여러분들께 맡깁니다). 부처님은 이게 잘못되었다고 딱 부정합니다.
자 무진리론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진리는 있다. 있다면은 여러분들 둘 바깥에 있는 겁니까? 제3의 진리론이 부정되었기 때문에 둘 바깥에 있는 건 아니죠. 둘다를 더하면 됩니까? 절충론이 부정되었으니까 둘다를 더하면 안되죠. 없지는 않고 둘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둘다를 더할수도 없으면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수밖에. 요 논리의 흐름을 여러분들 심사숙고 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제가 제안하는 요 논리의 흐름만 잘 따라 들어가도 지혜라는 것이 무언가에 대한 감각지를 얻을 수가 있어. 지혜가 별거 아냐. 그런 철두철미한 빈틈없는 논리의 전개가 지혜라는 거야.
결국 우리는 업인과보설을 택하면 사회적 부조리 또는 우주론적인 문제등에 걸리게 되고 즉 B그룹에 걸리게 되고 삼종외도설에 돌아가면 업보적 현상에 걸리게 된다. 즉 A그룹을 설명 못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두 입장의 절충을 생각할 수 있다. 이게 세번째 절충론이죠. 우주론적 큰 범위는 삼종외도설의 어느 하나로 그리고 눈앞의 현실에서의 업보적 현상은 업인과보설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두 입장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가지 원리로 백점이다라고 하는 전제에 어긋나기 때문에 진리로서의 자격이 없다. 그럴 경우 우리는 거기서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실은 이 사이에 제3의 진리론과 무진리론에 대한 사유가 축약되어 있는 겁니다.) 그게 뭐였습니까? 진리가 없는건 아니니까 있는거고 있다해도 둘바깥에는 없고 그렇다고 둘다를 더한것도 아니니, 둘중에 하나를 택하는 수밖에. 여러분 지금까지의 사유는 어느 종교고 부정하지 못하는 사윱니다. 어떤 문화사상이나 종교사상을 가진 사람도 지금 부처님이 진행한 이 사유방식의 객관성과 엄정성과 진정성에 흠결을 내지는 못합니다. 딱 똑같이 점수 줬잖아요. 50점이니 진리가 아니다 해서 절충론 내놨고 절충론도 안된다해서 제3의 진리론 내놨고 제3의 진리론도 안된다해서 무진리론까지 밀려 들어갔잖아요. 그러나 무진리론도 틀렸다라는 것을 깨달으시면서 반전이 시작된겁니다. 그럼 진리 있다 이거야. 있다면은 어떻다? 제3의 진리 안되고, 절충도 안되고 그럼 어떻다? 둘중에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여러분 그때까지는 불교가 없었어.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전까지는 불교가 없었어요. 부처님은 아주 편안하고 무언가에 제한받거나 제한당하지 않은 상태로 자유로운 마음으로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기로 앞에 서셨던 겁니다. 부처님께서 이쪽이 더 낫다라는 판단을 어떻게 하게 되었느냐 하는 근거가 나와가 있습니다.
그럴경우 우리는 여기서 어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의 존재를 포기할 수 없다? 의지의 존재를 포기할 수 없다. 왜? 그리고 인간과 자연 및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성립하는 업보적 관계도 결코 단념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이에 비해 삼종외도설은 추측 그것일 뿐이다.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한 신등의 원리 때문에 자명한 사실을 포기할 수 없지는 않는가. 자 여러분 답이 나왔죠. 우리가 왜 업인과보를 택해야 된다고 그랬습니까? 업인과보도 50점, 삼종외도도 50점이지만 이 두가지 50점의 색깔이 달라. 업인과보의 50점은 사실로서의 50점이고, 삼종외도설의 50점은 가설로서의 50점이다라는 거야. 고 단어(사실과 가설)가 키워드라는 것을 콕 집어 낼수 있어야 한다. 똑같은 50점이라도 사실로서의 50점과 가설로서의 50점이 있다면은 여러분 어느 50점을 택할래요? 우리가 무언가를 증명을 할때는요. 두가지 근거를 가지고 증명을 합니다. 수사반장이 수사를 해가꼬 범인을 잡아낼때는 반드시 두가지 증거를 필요로 한다 그래요. 하나가 심증(그럴싸하다고 생각이 드는걸 심증이라 한다), 저놈이 이번사건을 일으켰을 개연성이 가장 크다 그래서 심증이 간다. 그런데 심증만 가지고 범인이라고 할 수 없다. 물증이 필요해. 그래서 샅샅이 조사해보니까 머리카락이 하나 떨어져 있는데 DNA조사를 해보니까 그놈꺼하고 똑같애. 니가 범인이지? 딱 끝납니다. 그랬을때 그심증과 물증을 다갖춘것을 뭐라 그런다? 사실이라 그래. 그런데 심증은 갖추었는데 물증은 갖추지 못한걸 보고 뭐라 그런다? 가설이라 그럽니다 여러분들. 물증만 가지고 또 되는건 아닙니다. 심증이 반드시 또 있어야 합니다. 왜? 범인을 잡을적에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는데 그사람하고 DNA가 같다고 범인이라 하면 안됩니다. 범행동기가 분명해야 되고, 범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개연성이 있을 때 범인이에요. 왜? 누군가가 그사람한테 죄를 덮어 씌우려고 그사람 머리카락을 갔다놓았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결정내릴려면 하나는 심증, 머릿속으로 그럴수밖에 없겠네 하는 시나리오가 짜져야 되. 그다음에 그걸 증명해주는 물증. 이 두가지를 갖춰야지 우리가 하는 주장이 가설이 아니라 사실의 이야기가 된다. 그랬을때 요 심정을 갖추는 것을 보고 부처님은 알지자 를 쓰셨고, 물증을 갖추는 것을 보고 부처님은 볼견자 를 쓰셨습니다. 그 두가지를 합쳐가지고 뭐가 나왔다? 지견이 된거야. 그래서 계.정.혜.해탈 다음에 해탈지견 그러죠. 지견이라는 것이 불교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어야 된다라는 메시집니다. 붓다가 하는 이야기는 뭐다? 가설이 아니라 사실이어야 한다. 불교는 무엇에 입각하여 세워진 종교다? 사실에 입각하여 세워진 종교지, 가설에 입각하여 세워진 종교가 아니라고 하면서 차별화시키기 시작합니다. 불교가 훌륭한것은 불교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토대를 둔 종교다. 이걸 여러분들께서 명심을 해야합니다. 선하게 산사람이 결국에는 어떻게 됩니까? 출세하는거 우리가 보죠. 선하게 살았으니 잘됬네 심증이 갈뿐만 아니라 실제 선하게 사는 사람이 출세하는걸 내눈으로 봤잖아. 물증이 있잖아. 업인과보가 얻은 50점은 과소평가 해서는 안됩니다. 불교가 얻은 업인과보의 50점은 뭐다? 심증과 물증이 모두 갖추어진 지견의 대상 사실로서의 50점 입니다. 똑같이 50점인데 하나는 가설이고 하나는 사실이면은 누가 가설을 택해? 사실을 택했지. 그래서 부처님은 이걸 택하십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우리는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뽑아낼 수가 있어요. 업인과보를 택했다 이거야. 그런데 무엇으로 택한겁니까? 업인과보를. 사실이기 때문에 업인과보를 무어로 택한 겁니까? 옳지. 진리로 택했다는 거야. 우리가 어차피 업인과보를 진리로 택했다면은 이 업인과보를 가지고 죽자사자 B그룹을 설명해내지 않으면 안되 이제.
B그룹 중에 대표적인 사건을 하나 봅시다. 열심히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궁핍함을 면치 못하고 죽는 경우. 열심히 살았는데 빛 못보고 죽는 사람 한둘이 아닙니다. 전생? 우리가 삼종외도를 왜 버렸는데 가설이라서 버린거 아냐? 왜 가설이라 그랬어요? 물증이 없어서 가설이라 그런거 아냐? 전생 기억하는 사람 손들어 봐. 전생을 우리가 증명을 할려면은 어제에 대한 물증은 뭐였어요? 어제에 대한 기억이 어제에 대한 물증입니다. 그럼 전생에 대한 물증은 뭡니까? 맞습니다 여러분. 전생이 맞고 윤회가 맞습니다만은 무비판적으로 전생과 윤회를 도입하면 틀립니다. 불교는 절차야 차례야 근거야. 근거를 갖추고 절차와 차례를 지켜갖고 나올자리에 그말이 나와야만 맞다고 해주는 거다. 아직은 그말 나오면 안되. 전생이 틀린게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나오면 안됩니다. 윤회가 틀린게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나오면. 그게 나오지 않으면 안되는 근거를 가지고 내놔줘야 되. 여러분 윤회를 도입하면요. 방금 이야기했죠. 기억의 문제. 기억이 바로 물증인데 내가 이런 얘기하면 왜? 전생 기억하는 사람있다고 안합니까 이래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럼 나는 꼭 물어 봅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중에 스스로가 자기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아무도 손 안들죠. 하나 더 물어 볼까요? 높은데서 떨어지는 꿈 안꿔본 사람 손들어 봐요. 내 오늘 천기누설을 하나 할테니까 잘 들어봐.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을 손들어 봐 해도 아무도 안드는데 높은데서 떨어지는 꿈 안꿔본 사람 손들어 봐라해도 아무도 안들어.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는데 높은데서 떨어지는 꿈을 안꿔본 사람도 한명도 없다라는 거야. 이게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 것 같아요? 있어. 성철스님이 쓴 책에 어떤 사람이 희한한 소리를 하길래 그 지역에 찾아가보니까 진짜 그때 그런 사람이 살았다 카더라. 그러니까 그게 그 사람 전생이 아니냐. 이런 기사를 많이 적어 놓으면서 전생이 있다라는 것을 은근히 이야기하는 책자가 있어요. 성철스님께서 방편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용납이 되지만은 진실로 그것이 사실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하고 그 기록을 남겼으면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래요. 숙명통 있잖아요? 전생 기억하는 신통. 그런데 여러분 숙명통이라고 하는건 잘 읽어야 합니다. 숙명통은 전생을 기억하는 신통이 아니고 겁 이전을 기억하는 지혜입니다. 겁은 한우주가 생성되었다가 소멸될때까지 걸리는 우주론적 시간 단위를 겁이라고 합니다. 그럼 겁 이전은 뭡니까? 태초 이전에 이세상이 뭐였는지 니가 아냐 이소립니다. 도를 트면 그걸 안다 이거야. 그걸 숙명통이라 그래. 무슨 전생 비디오로 촬영하듯이 기억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외도의 잘못된 오류에 빠집니다. 최근에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나는 전생을 믿지 않았다 라는 책을 쓴 사람이 있었어요. 소위 전생최면이라고 하는게 아주 열풍처럼 휩쓸고 지나갔어. 최면을 딱 걸어보니까 전생이라 그러더래. 그래서 정신적인 노이로제나 히스테리를 그 전생에 들어가서 문제의 병소를 발견해서 치료를 하니까 치료가 잘 되더라. 이 전생최면에 관련된 이야기를 일으킨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브라이언 윌리스라고 하는 미국의 정신과 의사입니다. 이 사람이 나는 전생을 믿지 않았다라고 하는 책을 씁니다. 지금은 믿는다라는 말입니다. 제 아는 정신과 의사가 브라이언 윌리스로부터 전수를 받았어요. 그래가 했는데 자기가 최면을 걸어 치료를 하면서 그 치료하는 이야기를 가끔 나한테 해줘요. 어떤 사람이 히스테리가 심하여 전생으로 데리고 들아갔더니 전생에 러시아 병사였다. 러시아 혁명때 바위 위에서 적에게 잡혀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죽는 그런 전생의 말로를 기억에 떠올린다라는 거야. 그게 노이로제의 원인이 되가꼬 그걸 지금 치료 중이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사람한테 이야기했어. 다시 한번 최면을 걸어서 전생으로 데리고 가봐라. 들어가서 러시아 말한번 해봐라고 그랬어요. 그래 데꼬 들어가서 러시아 말 한번 해봐라고 하니깐 못하는 거야. 전생에 러시아 병사였으면 지 이름정도는 기억을 해야할 것 아냐. 지가 입은 옷이니 투구니 하는것은 낱낱히 이야기하면서 이름자 하나 못말하나. 이상하지 않느냐. 전생을 최면에 걸었을 적에 자 지금부터 전생입니다 하고 암시를 주느냐 지가 그냥 쑥 들어가서 전생을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하느냐 했더니 암시를 준데요. 최면상태라고 하는 것은 최면을 건자는 신과 같고 최면에 걸린자는 절대적 수동상태에 빠집니다. 밖에서 그게 전생이라고 하면 그게 전생이고 내생이라면은 내생인거야. 그게 무슨 신빙성이 있나. 나중에 그 아는 사람 이야기가 자기 이제 그거 안한데요. 왜 안하냐고 물으니 치료효과가 없더라는 겁니다. 나중에 브라이언 윌리스를 찾아봤더니 의사 때려치우고 사이비 종교하고 있더랍니다. 다시 숙명통 이야기를 내가 좀더 할게 있어. 내가 처음에는요. 내가 숙명통을 얻어야 되겠다 전생 함 기억해야 되겠다 숙명통을 얻는 법을 쫙 연구를 했어요. 색계사선에 들어서 숙명에 마음을 기울이면 숙명통이 터진다고 경전에 딱 나옵니다. 내가 문글어 잠그고 밥만 넣어라하고 며칠을... 색계사선에 딱 들어서 가꼬 전생에 마음을 기울여 가꼬 전생을 볼려고, 볼려고 했는데 안보이더라고. 두가지가 떠오른거야. 하나는 상여가 보여. 그리고 하나는 넓은 바다야. 배한척이 보여. 내가 전생에 어분가? 하고 문을 열고 나왔는데 나중에 그게 뭔가 알았어. 제가 부산하고도 영도하고도 청학동이란 곳에서 태어났어요. 그 청학동 꼭대기에 살았어요. 그때 내가 두살 반 될때까지 여기 살았다. 섬사람들이 사람이 죽으면은 그 위에 뭍으러 상여를 끌고 올라가는 길가에 살았데요. 나중에 우연히 그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들었어. 그러니까 내 아주 어릴때 두살 반때를 기억한거에요. 그래 전생기억 아니에요. 그런데 이 두살 반때 보다 더 과거를 기억해냈어. 어머니 모태에서 내가 태어날때를 기억해냈어. 대단하죠? 여러분도 다 기억합니다. 그게 높은데서 떨어지는 꿈이야. 우리 기억의 시작은 거기서 끝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때는 아무 기억이 안나. 인간의 기억은 컴퓨터와 달라 가지고 흔적이나 스쳐갔다고 다 기억하는거 아닙니다. 지 생존에 필요한거만 기억하고 특별한 것만 기억해. 아주 잘만든 기억장치에요. 이 망각이라고 하는 것은 병이 아닙니다. 버려야 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지워버리는 장치가 우리한테 있는거야. 여러분들 높은데서 떨어지는 꿈을 한번 생각해봐요. 한없이 떨어지기만 합디까 바닥이 있어서 무사히 내립니까? 한없이 떨어지기만 하다가 깬다고. 바닥이 안느껴지죠? 그게 태어날 때 느낌입니다.
그 이전으로 기억이 거슬러가지는 못합니다. 기억안되. 기억이 안되는데 전생이라고 하는데 무슨 물증이 있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생을 끄집어 들일려면은 끄집어 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뭐가 있어야 된다? 근거가 있어야 되. 그 논리적인 바탕이 있어야 되겠죠. 마치 삼종외도가 안되고 업인과보가 되었던 것은 이건 가설이고 이건 사실 아니냐라고 하는 누가봐도 그렇구나하고 수긍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듯이 우리가 이제 어떻습니까? 업인과보로 이쪽 B그룹을 설명할 적에 전생이니 윤회니 하는 걸 도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하나가 있어. 그 이유가 뭐냐를 알아내야 되. 우리가 전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그 결정적인 틈새가 무언가를 공개합니다. 마지막 시간 기대해도 좋습니다. 개봉박두.
업인과보가 사실이기 때문에 이 업인과보를 진리로 택했다. 업인과보를 택했다는 것은 업인과보의 입장에서 백점을 받아야 되. 그러면 문제로 제시되었던 B그룹을 이 업인과보의 입장에서 설명을 해야지 50점이 추가 되어서 백점이 됩니다.
이 어떤 틈새가 있는가 하면 여러분들. A라는 그룹은 업인과보가 설명을 잘했다. B그룹은 삼종외도가 지금까지 설명을 잘하고 있었죠. 그런데 요놈은 가설, 이놈은 사실 그래서 이놈을 택했죠. 그러면 이놈으로 이쪽 부분까지 설명이 들어와야 되는데 그 틈새가 뭘까? 지금까지 우리가 한가지 얽매어 있었어요. 그 얽매어 있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게 뭐냐면은 우리가 제3의 진리론을 어떻게 부정했는가 다시 생각해보자. 제3의 진리론이 논리적으로 어떤 문제점이 있었어요? 업인과보는 우리안에 답을 찾은거고, 삼종외도는 우리밖에서 답을 찾은 거라면은 제3의 진리론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그런 어떤 곳이 논리적으로 가능해야만이 제3의 진리도 가능하다 이거야. 논리적으로 그런 제3의 진리를 상정할 수 없다. 그러니 제3의 진리는 없다.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진행한 우리의 진리론이 공간적인 접근에 일관하고 있었다하는 큰 지적을 남깁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난데 이 하나의 세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로서의 진리를 찾으려면은 더이상 공간적인 입장에서 해답을 모색해 가꼬는 답이 안나온다는 이야깁니다. 둘다 더하지는 못하고 둘밖에는 아예 답이 없고 이런건 다 공간적 접근이다 이거야.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하나를 택한게 뭡니까? 왜 택해야 됬습니까? 무진리론이 깨졌거든. 그러니 답은 있다, 없다? 있어. 그런데 둘밖에도 없고 둘다도 아니면 둘중에 하나를 택해야 되는데 사실이니까 업인과보밖에 택할 수 없어. 그러니 답은 업인과보가 맞는거야. 맞는데 아직 점수를 50점 밖에 못냈다. 나머지 50점을 딸려면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것 중에 치명적인 제한사항 하나를 걷어내야 되. 그 제한사항이 공간적으로만 지금 접근해 왔다는 거야. 일단 쳐다보면 우리가 공간적으로만 느껴지죠. 공간적으로만 접근하니까 기껏해야 50점 밖에 못받은 거야. 백점을 받으려고 한다면은 공간을 넘어서서 당연히 시간이지. 이런 시간적 전개로서의 윤회를 고타마 부처님께서 떠올리시게 된 것은 더이상 눈에 보이는 공간적인 접근을 해가꼬는 답이 안나오니깐 뭡니까? 그러면 시간으로 가야되지 않느냐 라고 하면서 시간으로 돈거야. 처음부터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없이 시간을 떠올려가꼬 윤회한다라고 뻥 터뜨린게 아니다. 새로운 틈새가 시간이야. 왜 시간을 건들지 않을 이유가 뭐있어. 그죠? 공간의 안밖을 다 건드렸으면 이제 시간을 건드려 봐야지. 시간을 딱 건드리니까 어떻게 됩니까? 아하 업인과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공간에서만 성립한다라고만 보지말고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는 시간적 과거의 세계와 시간적 미래의 세계를 업인과보에게 한번 허용해주자. 그래서 업인과보가 과거 현재 미래로 그 범위를 넓힐 수 있다라고 봐주자. 그러면 B그룹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이 갑자기 확 열려 버리는 거야. 불교라는 종교에서 윤회는요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나오는 거지 처음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업이야기 나오다가 업의 문제점을 풀기 위한 하나의 아이디어로 시간의 문을 열어재친거야.
B그룹에 소속된 4가지 문제. 1.다양한 출생의 문제 2.결론이 없는 듯한 죽음의 문제. 이 두가지 문제를 업보의 현상으로 보면 다음과 같이 분석이 될 것이다. 하나는 과보는 현재 인식되고 있지만 그 업인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경우와 업인은 현재 인식되고 있지만 그 과보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경우로. 불교라는 종교에서 중요한거는 개별적 교리에 대한 정보가 아닙니다. 그 개별적인 교리가 교리상호간에 어떤 유기적인 연결고리를 가꼬 절차와 조직 속에서 연결되는가가 중요해. 이게 여러분들 불교라는 종교를 공부하는 요령 중에 요령입니다. 진짜 중요한건 순서입니다. 뭐가 먼저 나오고 뭐가 뒤에 나오는지 알아야 되. 윤회가 부처님 가르침 입니다만은 순서를 틀리게 잡으면 부처님 가르침 아닙니다. 여러분이 윤회라는것에 대하여 정확히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 만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게 뭐다? 윤회라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순서상 언제쯤 나오는가를 알아야 되. 그랬을 때 최소한 업의 가르침이 먼저 나온 다음에 업인과보가 진리논쟁에 휩싸이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종적인 방안으로 시간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윤회 개념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 넘어와야 되는거야. 그래야 윤회를 바로보고 앞으로도 여러분들이 불교학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그렇게 접근을 해나가야지 성취하는 바가 있다. 순서를 잘 지켜라. 파격 파격 그러는데 파격 좋아하면 안됩니다. 철저히 순서를 지켜가꼬 더이상 순서를 지킬 필요가 없어졌을때 파격이지 뭐가 순서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파격을 하면 안되. 글 중에 제일 글을 잘쓰는 사람이 추사입니다. 추사의 글이 훌륭한 것은 추사의 글이 파격적이기 때문입니다. 추사의 글에는 룰도 없고 스탠다드도 없습니다. 막 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추사 흉내를 내. 막써 지도. 그래서 글쟁이를 배리는 것은 추사라는 말이 있어. 추사가 막쓰게 된거요 글씨 체라는 체는 다 통달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스탠다드에는 모른것이 없이 완전히 통달하고 나니깐 파격이 나오는거지 예를들어 여러분들이 파격하면은요 내가 좋은 정신과 의사 소개시켜줄께.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순서를 탁탁 지켜가꼬 정석대로 움직여 나가야 됩니다. 먼저 업을 탁 공부하고 업을 공부할때는 어떻게 공부해라? 말뜻이 뭐냐. 주체가 뭐냐. 전제가 뭐냐. 목적이 뭐냐. 방법이 뭐냐. 방향이 뭐냐. 그래가꼬 업의 정의를 탁내린 다음에 외행동 아니냐 이거야. 그러면 바깥에 육경들이 있을거 아니냐 그러면 업에 대해서 육경들이 무슨 반응을 보인다? 필연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걸 보라 그런다. 그러면 그 업과 보사이에 관계를 따져야 할것 아니냐. 그게 뭐다? 인과관계다. 그게 업인과보의 법칙이다. 그러면 이 업인과보의 법칙이 다 성립이 되느냐? 성립이 되는 그룹도 있지만 성립이 되지 않는 그룹도 있다. 그 성립이 되지 않는 그룹은 오히려 삼종외도가 더 잘 설명한다. 그러면 어느걸 우리는 진리라 해야 하느냐. 이것도 50점, 이것도 50점이다. 절충을 해볼까? 절충은 진리론의 전제에 어긋나. 제3의 진리를 찾아볼까? 제3의 공간이 없어. 그러면 진리를 없다라고 할까? 무진리론을 논리적으로 잘못 되었음을 검증하라 숙제 나갔어. 그러니 진리는 없는게 아니니 있어. 그러나 제3의 진리가 부정됬기 때문에 둘밖에는 없어. 그리고 둘을 다 포함시키는 절충론이 포기 되었기 때문에 둘을 더해도 안되.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둘중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되. 같은 50점인데 뭘 택할까? 업인과보를 택한다. 이유는? 삼종외도는 가설이고 업인과보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러면 업인과보를 진리로 택했기 때문에 이 업인과보로 B그룹을 설명 해내야 된다. 이미 B그룹이 업인과보로 설명이 되지 않는걸 봤지 않느냐. 그러나 그이유가 뭐였을까? 공간적으로만 접근했기 때문에 설명이 안된것 아니겠냐. 그러면 공간말고는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틈새가 없냐? 있다. 그게 시간이다. 그래서 업인과보를 시간적 관점에서 조망해보니까 아 현세에만 업인과보를 적용하지 말고 과거와 내세에도 업인과보의 팔을 한번 넓혀보자. 그게 업인과보가 삼세윤회한다는 관점이고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다양한 출생의 문제도 전생에 업인이 있었다면 다 풀리고, 결론이 없는듯한 죽음의 문제도 내생에 과보가 있을거다라고 말하니까 그런대로 풀리는 거야. 이건 우주론적인 생성의 문제도 풀어내고 미시세계의 기묘함의 문제에 대해서도 조망을 가능하게 합니다.
삼세윤회라는 아이디어를 성취하고 나면요. 마지막으로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할게 하나가 있어. 삼세윤회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가설이라는 겁니다. 진리 논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것은 사실이냐 가설이냐의 판단입니다. 우리가 삼종외도를 택하지 않고 업인과보를 택한 이유가 뭐였어요? 하나는 가설이라서 버렸던 거야. 누가 신을 봤냐고 말하는것과 똑같이 누가 전생을 봤냐 이거야. 누가 자기전생이 뮈라든데요 이래 말하지 말고 자기가 자기 전생을 아는사람 손들어 봐.
이처럼 윤회의 개념을 도입하고 나면 여러가지 논점이 따라야 한다. 첫째 초기불교내의 교설인 무아설과 윤회설의 조화가 문제가 된다. 윤회한다면 뭐가 윤회한다는 말이냐? 무아라고 해나꼬. 무아라 그러면 영원한 나는 없다라고 그랬는데 뭐가 다음 생에까지 연결이 되고 하는 윤회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어?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유명한 초기불교 학자들이 윤회를 부처님의 교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경우를 실제 만납니다. 둘째 생사의 교체순간에 존재 양태가 난해하다. 윤회라고 하는 것은 전생에서 이생으로 이생에서 내생으로 다시말해 생사가 두번, 세번 교차가 됩니까, 안됩니까? 죽고 나고 죽고 나는것 아니에요? 그럼 죽었다가 날때 죽음과 생이 교차됩니까, 안됩니까? 교차되죠 그죠? 그 순간이 뭔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으면은 이 이야기는 희론에 불과합니다. 미스테립니다 이게. 이것도 우리한테 안보이는 부분이에요. 우리가 알 수 있는건 태어난 뒤부터 우리에게 정보가 남아있지 전생에 대한 정보가 없을뿐 아니라 전생과 이생이 교차되는 순간의 정보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않느냐 이거야. 물증이 확보된게 하나도 없다는 소립니다. 세째 전생 또는 숙세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음도 한번쯤 생각해 봐야된다. 넷째 이 생에서 지은 업이 어떻게 다음 생 또는 보다 먼 미래의 생에 과보를 불러 들일 수 있는가도 문제로 등장합니다. 그럼 여러분들 A가 B에게 천만원을 꿔줬는데 그 자식들도 모르고 주변사람도 모르는데 둘다 죽어 버렸다. 그 두사람이 오래살아 있었다면 B가 이자를 부쳐서 채무를 변제 해버리면 두사람 사이에 업인과보가 성립한다. 근데 둘다 죽어버렸어. 그러면 다음 생에 갚아야 되고 받아야 되겠지. 그런데 다음생에 어떤 놈이 꿔졌는지 지가 누구에게 꿔졌는지 지가 전생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기억이 안나는데 누구한테 꾸어줬는지 알고 찾을 것이며 누구한테 빌렸는줄 알고 가서 갚을거냐 이거야. 죽음이란게 개입되면 모든게 미스테리로 빠집니다 여러분들. 물증이란게 확보가 안되. 이건 뭐다? 삼세윤회는 아직 사실이 아니라는 거야. 가설이라는 겁니다. 삼종외도는 가설이라 쳐놔놓고 자기는 가설이면서 도입하면 그거 모순 아닙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죠. 이걸 또한 우리가 어떤식으로 해소를 해야 될껀거 하는 것도 윤회를 도입하지 않으면 문제가 안되는데 윤회라는 아이디어를 도입하고 나면 문제가 된다.
다른 종교는 윤회를 도입하고 났을 때 발생되는 문제를 얼버무려. 근데 불교는 이런 문제가 있다는것을 오히려 공개해. 그건 뭡니까? 그런 문제를 풀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는 소리겠지. 어떤 개념 하나를 가지고 같다라고 해버리면 안되. 그 개념이 등장하는 순서가 어디냐에 따라서 천차만별이 되고 그 개념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솔직한 자세로 임하느냐 얼버무리느냐에 따라서 그 개념의 정보에 대한 자세도 상당히 달라집니다. 불교는 솔직합니다. 윤회를 도입하면 이런 문제가 있다라는 것을 경전 안에서 공개해 버립니다. 이렇게 결점 많은 윤회설을 부처님이 주장을 한거야. 그 결점이란 단어를 완곡하게 말하면 윤회라고 하는 아이다어도 가설아니냐는 거야. 이 문제를 우리는 부처님에 의해서 어떻게 극복되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눈앞의 현실을 기반으로 업보의 원리를 도출했을 때 업보의 원리로 해결되지 않는듯한 문제가 인식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해결되지 않는듯한 문제가 무슨 문젭니까? B그룹 4가지 문제. 그런 4가지 문제에 대해서 삼세윤회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그 문제들을 해결한 것입니다. 여기서 업보의 삼세윤회는 뭐다? 자명한 현실에 바탕을 둔것임을 잊어선 안된다. 이러한 업보윤회의 원리를 도출하고 나니 다시말해 윤회라는 걸 도입하고 나니 다시 본항목에서 지적한 4가지 정도의 난점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이 난점에 봉착하여 역시 지금까지의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즉 난점을 해결할 새로운 논리를 업보윤회설에 바탕하여 도출해야 한다는 태도이다. 왜냐하면 이들 일련의 원리는 자명한 현실에서 출발하였고 또 그것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데 위의 4가지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관점은 삼세윤회설에 철저한 논리적 기반을 두어야 하고 삼세윤회설은 업인과보의 원리에 그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업인과보의 원리는 바로 십이처설에 또한 그 본질적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삼세윤회설이나 그 이상의 새로운 관점도 십이처설에 근본적으로 그 근거를 두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다 보면 삼세윤회설은 단적으로 인식될 것을 강조하는 십이처설과는 엇갈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이는 것만이 있다라고 주장은 십이처설에 바탕을 두고 나온 삼세윤회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이게 무슨 모순이냐 이말이야. 그러나 오히려 십이처설에 철저히 바탕을 두고 성립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즉 검증되지 않는 가설에 불과한 신등을 세우기 보다는 현실에서 관찰 가능한 사실들을 중심으로 업인과보의 삼세윤회설이라는 필연적 귀결을 이끌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업인과보의 삼세윤회설도 브라흐마니즘등 처럼 일종의 가설임은 틀림이 없다. 왜? 물증이 아직 안나왔으니까. 그러나 신의 설등보다는 월등하게 합리적일 뿐 아니라 현실적인 엄연한 사실과 현상에 의해 그 타당성이 뒷바침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설이긴 하지만 이 가설은 진리성을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둘다 물증이 없으니까 가설이긴 가설이죠. 그런데 두가설 중에 삼세윤회를 택해야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삼종외도라는 가설은 가설로 일관하는 가설입니다. 시작단계부터 가설이였어. 유신론은 시작이 신인데 그시작이 가설로 시작한 거거든. 그러니까 시작부터 끝까지 가설이야. 근데 삼세윤회는 업인과보에 바탕을 둔 가설이죠. 그리고 그 업인과보는 사실이였죠. 삼세윤회는 사실에 바탕을 둔 가설이다. 불교를 한다는 것은 선택의 기로에 서서 보다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선택할 줄 아는 슬기를 일으키는게 불교하는 거야. 업인과보와 삼종외도 50대50으로 선택을 강요받을 때 하나는 사실이고 가설이야 해서 타당하게 선택을 했듯이 이제는 가설 대 가설이 붙어서 선택을 선택을 강요받으면 하나는 사실에 바탕한 가설이고, 하나는 가설로 일관하는 가설이니까 그래도 사실에 바탕한 가설을 택할거 아니냐. 삼세윤회라는 것은 그렇게 해서 또한번 인정을 받게 되는 겁니다. 또한번 재신임을 받게 되는 겁니다.
시작은 십이처가 시작입니다. 업이라고 하는건 육근의 업이죠. 보라는것은 육경의 보였죠. 그럴때 육근, 육경은 존재고 업과 보는 사건이였잖아요. 존재가 있어야 사건이 나올거 아닙니까. 그래서 시작은 엄밀히 말하면 12처설이 시작입니다. 이 12처설을 연구해 보면은 업보라는 사건이 발견이 되고 업보라는 사건에 성립하는 관계를 추적하다 보면은 인과라는 관계가 발견이 됬던것이 업인과보의 법칙입니다. 업인과보의 법칙을 인정하고 나니까 다양한 출생의 문제, 결론이 없는 듯한 죽음의 문제, 우주론적인 생성의 문제, 미시세계의 기묘함의 문제라는게 나왔어. 이 다결우미라는 4가지 문제를 풀기위해서 업인과보의 법칙을 다시 반성해 보니깐 너무 공간에 집착했어. 그래서 시간의 문을 열어재치니까 업인과보가 삼세윤회한다. 그래서 여러분들 불교 윤회설의 정식 명칭은 업인과보의 삼세윤회입니다. 반드시 업인과보를 붙이면서 삼세윤회라고 해야된다. 업인과보의 삼세윤회. 이렇게 업인과보의 삼세윤회를 택하게 되었던 것도 사실은 업인과보의 법칙이 50점이지만(B그룹을 설명 못해도) 사실이였기 때문이야. 그래가꼬 그걸 밀고 들어간게 삼세윤횝니다. 그래서 삼세윤회를 도입하고 나니까 무아설하고 조화가 되니 안되니, 생사가 교차할 때가 미스테리니, 기억이 나니 안나니, 업이라는게 어떻게 과보를 불러들이니 못하니. 무생기업이라는 문제가 나와. 이런 문제는 삼세윤회가 가설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설을 택해야 되는 이유는 십이처나 업인과보라고 하는 사실에 바탕을 둔 가설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업인과보의 삼세윤회라는 아이디어를 택할 수 밖에 없다.
근데 내가 여기서 마무리를 짓고 싶은것은 이겁니다. 만약에 부처님이 삼세윤회라고 하는 것을 사실로 격상시킬 수 없다라고 하면은 영원히 저게 가설로 남는다고 하면은 우리에게 설하셨겠느냐. 부처님이 누구냐. 여래가 누구냐 했을때 금강경에서 뭐라 그럽니까? 여래는 사실을 말하는자가 여래라는 거에요. 이게 가설로 국한데고 가설로 끝난다면 삼세윤회를 말했겠어요? 부처님은 결국 이 삼세윤회를 가설의 굴레에서 사실로 격상시키셔야 되. 그래야지 설하실 수 있는 근거가 생겨. 그럴려면(사실로 격상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실과 가설의 차이는 딱 한가지야. 물증이 있느냐 없느냐죠. 삼세윤회와 관련된 물증을 확보해버리면 사실이 됩니다. 그랬을때 삼세윤회와 관련된 물증을 확보한다는건 뭐냐? 요 4가지 문제를 완벽하게 푸는걸 뜻합니다. 기억의 문제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해명해주고, 이 생의 업인이 다음생에 어떻게 과보를 불러들이는가의 메커니즘에 대해서 분명히 설명해주고 생사가 교차하는 순간의 미스테리를 가따가 커텐을 열어재쳐주고 궁극적으로 무아설하고 윤회설이 어떻게 조화가 되는가에 대해서 티끌만한 의심도 가지않은 완벽한 해명을 제시해준다면은 뭐다? 삼세윤회는 사실이 될거에요. 그럼 그렇게 할까요, 안할까요? 합니다. 어디서 그렇게 할까요 그러면? 12처설로부터 시작해가꼬 아직 가설까지 남아있는 여기(가설로서의 삼세윤회)까지를 크게 뭐라고 부르느냐? 업의 가르침이라고 불러. 불교를 넷으로 나눈다면 이건 업의 가르침이라고 그래. 그러나 불교를 여섯으로 이야기하는 경우 여기까지의 가르침을 12처10업설법문의 가르침 이라고 그런다. 12처설에서 시작하여 가설로서의 삼세윤회를 제안하고 아이디어를 제출하는 데서 끝납니다. 이걸 사실로서 격상시키는건 업의 가르침 안에서는 해결이 안된다. 그럼 업의 가르침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넷으로 이야기할 때? 연기의 가르침. 삼세윤회를 사실로 격상시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연기의 가르침이야.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업의 가르침으로 끝날 수가 없는거에요. 연기의 가르침은 워낙 심오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세단계의 법문 조직을 가집니다. 그게 불교를 여섯으로 이야기 할때 첫번째가 12처10업설 법문이고 두번째가 육육법설 법문, 세번째가 오온사제설 법문, 네번째가 12연기설 법문이다. 따라서 이제 여러분들은 연기의 가르침 속에서 이 4가지 주제(무아설하고...)를 중심으로 한 궁극적인 불교학적인 문제가 어떻게 사실로 격상되고 완전한 해명을 맞이하게 되는가를 염두해두고 연기의 가르침을 살펴들어가면은 아주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하나더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 상기시켜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이 삼세윤회의 가르침 또는 아이디어를 제공받으면서 요 다양한 출생의 문제나 결론이 없는 듯한 죽음의 문제는 풀었는데 요것(삼세윤회)이 어떻게 우주론적인 생성의 문제와 미시세계의 기묘함을 해결하는가는 여러분들과 구체척으로 따지진 안했어. 교재에 공업... 이 내용이 우주론적 생성의 문제를 해결해준다. 미시세계의 기묘함의 문제는 삼세윤회로 설명은 가능하나 연기의 가르침 속에서 더 잘 다루어진다. 교재에는 우주론적 생성의 문제까지만 나온다.
이 모든 논의에 있어서 맥 중의 맥이 뭔줄 압니까? 무진리론이 잘못되었음을 논리적으로 증명을 해야되. 진리가 있다를 택하니깐 업인과보를 선택하고...(중략) 연기의 가르침이 나오고, 에초에 진리가 없다하고 그쳤으면 이런 이야기가 필요 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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