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참선의 요체(要諦) - 2 청화스님

수선님 2020. 1. 12. 12:12


      청화(淸華) 큰스님께서는
      24세시 백양사 운문암에서
      송만암 대종사의 상좌이신
      금타(金陀) 대화상을 은사로
      출가,득도하셨습니다.

      이후 50여년간 대흥사, 진불암, 상원암,
      남미륵암,월출산 상견성암,
      백장암,벽송사, 백운산 사성암,
      혜운사, 태안사 등 성지의
      토굴에서 묵언, 일종식 및
      장좌불와의 좌선으로 오로지
      수행정진하셨으며,
      원통(圓通)불법을 선양하고,
      엄정한 계율의 준수와
      염불선을 주창하셨습니다
      .


참선(參禪)의 요체(要諦) - 2 청화스님

그 뿐만 아니라 나 가운데도 우주 전체가 다 들어 있고 또는 개별적인 모든 것들 가운데도 우주가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법성게(法性偈)를 외우지 않습니까. 화엄경(華嚴經)까지는 아직 못 배웠다 하더라도 법성게 도리는 화엄경의 대요를 말한 것입니다. 법성게 도리는 일중일체(一中一切)라, 하나 가운데 일체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일체 가운데도 하나가 다 들어 있는 것이고, 이런 도리를 알아야 비로소 반야(般若)의 도리를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 공(空)d이거니, 모두가 다 본래가 공이거니, 하나 가운데 전체가 안 들어 있고 전체 가운데 하나가 안들겠습니까. 다 공이라는 소식만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도리가 다 통한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요.

물질이라고 생각할 때 하나 가운데 전체가 다 들어 가겠습니까? 안들어 가나 물질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는 겨자씨 가운데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다 들어가는 것이고 또는 한덩이의 흙더미 가운데도 우주가 다 들어갑니다.

이렇게 물질은 눈꼽 만큼도 없고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 말씀대로 본래 무일물(無一物)이라. 물질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본래 아무 것도 없거니 우리가 좋다, 궂다 나쁘다, 그르다 하는 그런 소식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자리를 느끼고서 그런 자리에서 스승을 생각하고, 제자를 생각하고, 아들을 생각하고, 자기 재산(財産)을 생각하고, 지위(地位)를 생각해야 그래야 우리가 그르치지가 않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자기 아들을 사랑하고 딸을 사랑하고 해야 자기 아들 딸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은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금방 깨달아 버리면 오랫동안 고생할 것도 없고 우리가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이고 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 마음이 그렇게 깨닫지를 못합니다.

나쁜 버릇 때문에, 습관성(習慣性)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화두(話頭)라는 그런 문제를 들고서 우리가 이제 때묻지 않은 그런 문제를 들고서 우리가 오랫동안 의단(疑團)도 하는 것이고 참구(參究)도 하는 것이고 또는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나 부처님 명호를 들고서 생각생각에 하마 그런 나쁜 습관성이 나올세라 우리가 공부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염염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생각에 우리가 공부하는 때묻지 않은 그런 생각을 하여 나아가야, 우리의 그런 때묻어 버린 우리 마음에 들어 있는 잠재의식(潛在意識)같은 것이 차근차근 힘을 못 쓰고 이제 줄어져 갑니다.

본래 그런 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결국 바른 생각만 하면 없어져 버립니다.

그림자가 있다 하더라도 해가 뜨면 사라지듯이 우리 번뇌망상(煩惱妄想)은 그와 똑 같습니다.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존재가 아닌 그런 그림자만 두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그림자에 속지 않고서 그림자의 노예(奴隸)만 안 되고서 정말로 바른 생각만 쌓아 나간다고 하면 그런 것은 흐트러지고 맙니다.

그런 것이 너무나 오랫동안 습관(習慣)을 붙여 놓아서 갑자기 안 나가므로 우리가 바른 생각을 하기 위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할 때 그 문제는 여러 가지 거시 많이 있으나 육조단경(六組檀經)에서 한가지 규범(規範)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시삼마(是甚徼) 선(禪)이라!

한문(漢文)을 우리식으로 발음하면 '시심마'라. 이 시(是)자, 심할 심(甚)자, 어찌 심(甚)이라고도 합니다. 어찌 마(徼)자. 따라서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뜻입니다. 심할 심자를 중국식 발음을 하면 '삼'이라고 발음을 합니다. 같은 뜻이지만 중국식 발음을 할 때는 시삼마, 우리식 발음은 시심마입니다.

그것은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육조단경식으로 말하면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밝기는 해와 달보다도 더 밝고 - 우리 중생들의 생각에는 해와 달보다 더 밝은 것이 없지 않습니까 - 검기는 칠(漆)보다 더 검고,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이고 그런 것이 항시 조금도 나와 떨어짐이 없이 나와 더불어 있지만 내가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우리가 그것은 내내야 불성(佛性)이 아닌가 그냥 짐작이 되시겠지요. 따라서 따지고 보면 불성(佛性)이 무엇인가? 법계(法界)가 무엇인가란 말입니다.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그 뜻이나 똑 같은 뜻입니다. '시심마'라는 것과 똑 같은 뜻입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는데 그것은 해와 달보다 더 밝고 또 검기는 칠 보다 더 검고, 그러므로 제일 밝고 제일 검고 하므로 모든 것이 무한한 가능성이 거기에 다 들어 있다는 것이 되겠지요.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이고 있다는 말은 천지(天地)를 두루해 있다는 말입니다. 천지를 두루해 있는 그것이 나와 항시 같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불성(佛性)아 아니고 따로 무엇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불성 도리를 그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성입니다' 그래버리면 간단히 끝나겠지요. 그러나 그건 불성 도리를 우리 중생들이 보고 체험한 것이 아닙니다.

습관성(習慣性)이 다 나가버려야, 습관성이 다 걷혀버려야 불성을 우리가 증명(證明)할 수가 있는 것이지 습관성이 남아 있을 때는, 쉬운말로 약해서 말하면 습기(習氣) 아닙니까. 갖추어 말하면 습관성이고, 습기가 녹아지기 전에는 우리가 이치(理致)로만 알 뿐이지 증명(證明)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증명해서 알아야만이 불성공덕(佛性功德)이 무한의 공덕인데 그 무한의 공덕을 자기도 좀 맛보고 좀 쓸 수가 있는 것이지 그냥 이치로 해서는 내내야 무어 밥 좀 덜 먹으면 배고프고, 또 욕계(欲界)에 있어 놓으면 이성적(理性的)인 욕심 이것 저것 다 못 떠나고 그럽니다.

습기(習氣)가 빠져버려야 욕심(慾心)도 빠지고 진심(瞋心)도 빠지고 다 빠져 버립니다.

불성(佛性) 가운데는 세간적(世間的)인 욕심이 있을 수가 없으므로 그렇게 되어야 하겠지요. 따라서 우리가 그와 같이 미처 증명을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알기는 알았지만 '이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내내야 '불성이 무엇인가?'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우주에 충만(充滿)해 있고 바로 우주가 불성이다. 이런 도리야 불교 초보인도 대부분 알 것이지만 증명(證明)은 못 해 있습니다. 증명을 못 한다고 생각할 때는 괴로운 것은 괴롭고 남이 자기를 좀 구박(驅迫)하거나 자기를 비방(誹謗)하면 성을 내곤 합니다. 죽을 때는 자기(自己) 몸뚱아리 아까워서 죽기 싫고 말입니다.

이래 버리면 결국은 생사해탈(生死解脫)은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 고통(苦痛) 가운데 가장 지독한 고통이 죽음에 대한 고통 아닙니까.

불교(佛敎)라는 것은 죽음을, 생사해탈을,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떠나서 위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이 불법인데 우리가 그냥 이치(理致)로만 알아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증명(證明)을 하기 위해서 그 불성 도리와 자기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하나로 추수리는, 마음을 통일시키는 방법이 기도(祈禱)를 모시는 것이고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고 또는 참선(參禪)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화두(話頭)를 들고 어느 문제(問題)를 '이뭣고?'라든가, 또는 조주(趙州) 스님께서 말씀하시 무(無)자라든가, 보조국사(普照國師)나 그런 어른들은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제일 많이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화두문중(話頭門中)에서는 무문관(無門關), 즉 제일 먼저 무자화두를 말씀했습니다. 무자화두는 어떤 것인고 하면은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한테 - 조주 스님은 당나라 때의 위대한 대선사(大禪師)입니다. -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부처님 경전에 개나 소나 사람이나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은 다 부처님의 성품(性品), 부처가 되는 성품이 있다고 말했으므로 어렴풋이 그 분도 믿었겠지요.

믿었으나 자기가 보지 아니 했으므로 확실히는 느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개 같은 막나니 짓도 많이 하고 판단도 못하고 자기 먹을 것만 좋아하는 그런 중생이 무슨 놈의 불성이 있을 것인가? 불성이라는 것은 완전무결(完全無缺)한 것인데 그런 개 따위에 무슨 불성이 있을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어가지고 이제 조주스님한테 가서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단 말입니다. 그때 조주스님 말씀은 '무(無)'라. '없다'.

어째서 없다고 했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개한테는 불성이 개 안에만 있고 밖에는 없다고 보겠습니까. 또는 그 불성이 개 머리에가 있다고 보겠습니까, 가슴에가 있다고 보겠습니까. 우리 사람한테 불성이 있다고 보겠습니까. 우리 사람한테 불성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 불성이 우리 발에가 있습니까? 머리에가 있습니까?

그 불성이라는 것은 바로 우주의 성품(性品)인데 우주(宇宙)의 법계성품(法界性品) 이것이 불성인데, 법계성(法界性)이나 불성(佛性)이나 같은 뜻입니다. 모두가 다 우주의 본성(本性), 우주의 정기(精氣)입니다. 그런 것이 불성인데 불성이 개 안에가 있고 밖에가 있고 그렇게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말씀으로 일체중생 개유불성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부처의 성품이 있다. 이러해서 잘 몰라서 잘 못보고 안에가 있는가? 밖에가 있는가? 그렇게 의심이 나서 그렇게 물었지만 적어도 이치라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밖에가 있고 안에가 있고 하지가 않단 말입니다.

도처(到處)에 개 몸 전체에 개 몸 전체가 불성 덩어리고 또는 밖에도 역시 불성 덩어리고 또는 우리가 현재 이와 같이 있는 우리 분위기(雰圍氣) 내에도 결국은 불성 덩어리 뿐입니다.

이런 도리를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물리학적(物理學的)으로 맡겨버려야, 물리학은 실험(實驗)을 통한 것이므로 사실로 믿겠지요. 물리학적으로 믿어버리면 확신(確信)이 더 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분위기 가운데 산소(酸素)나 수소(水素)나 탄소(炭素)나 질소(窒素)나 그런 각 원소(元素)가 있다는 것은 시인 하겠지요. 산소나 수소나 질소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 분위기가 못됩니다.

저 진공(眞空) 상태까지 올라가 버리면 모를까, 또 이 대기권(大氣圈) 내에는 희박(稀薄)하고 농(濃)하고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산소, 수소, 탄소, 질소 이런 것들이 모두가 다 혼합 내지 결합되어 있습니다.

또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들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산소나 수소 그런 것은 전자(電子)나 양자(陽子)나 중성자(中性子)나 그런 것들이 적당히 결합해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했습니다.

자 그러면은 전자나 양자는 또 무엇인가? 그것은 알 수 없는 소립자(素粒子)라 하는 알갱이란 말입니다. 알 수 없는 소립자는 또 무엇인가? 그것은 에너지의 파동(波動)에 불과합니다.

「에너지」라는 이것은 물질(物質)이 아닌 것입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에너지」라고 했지 않습니까.

따라서 현대 물리학은 우주를 구성하는 장(場)에너지가 즉 우주에는 마당 장(場)자, 장(場)에너지가 충만(充滿)해 있다고 봅니다. 장에너지 속에는 그야말로 전자기장(電磁氣場) 에너지가 거기에 가득히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가 전자나 양자나 그것도 역시 에너지라 하는 것으로 이루어 지고 모두가 다 소립자(素粒子)같은 - 그야말로 물질인가 아닌가 모르는 가장 미세한 것이 중성미자(中性微子)라는 것인데, 중성미자는 공간성(空間性)이 없습니다. 공간성이 없으므로 물질이라 할 수도 없겠지요. - 그런 것들이 이렇게 쌓이고 저렇게 모이고 해서 전자가 되고 양자가 되고 또는 전자, 양자가 모여서 산소가 되고 했습니다. 산소나 수소나 그런 원소가 적당히 결합하여 분자(分子)가 되어서 이렇게 우리 세포(細胞)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에너지 차원(次元)에서 보면 내내야 우리 몸뚱아리도 에너지의 형상화(形象化) 에너지의 상(相)에 불과하고 나무나 흙이나 다이아몬드나 모두 다 하나의 에너지의 상에 불과합니다.

상(相)을 떠나서 볼 때는 무엇인가? 상을 떠나 버리면 에너지 뿐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우리가 한 번 돌이켜 봅시다. 색즉공(色卽空)이요, 공즉색(空卽色)입니다. 색은 바로 물질 아닙니까. 물질 바로 공이요, 내 몸 바로 공입니다. 허나 인연(因緣)이 익어져서 이루어져서 인연이 모아지면 그때는 역시 상(相)을 낸단 말입니다. 상을 나투므로 그때는 공즉색입니다.

이렇게 현대 물리학이나 현대 철학이나 모든 것이 이런 것이 내내야 가까스로 부처님의 반야심경(般若心經) 도리에 이르러 있습니다. 그야말로 부처님 가르침, 심심미묘(甚深微妙)하고 참 감사(感謝)해서 마지않는 가르침입니다. 현대물리학, 철학 모두 다 해서 현대 문명이라 하는 것이 간신히 불교에 이르러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겨우 현미경(顯微鏡)이나 기타 여러 가지 논리체계(論理體系)나 그런 걸로 해서 추상적(抽象的)으로 증명(證明)한 것이지 그네들이 에너지 자체가 무엇인가? 그것은 아직도 모릅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 - 1955)같은 천재(天才)도 물랐습니다.

그러한 것은 순수(純粹)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우리 번뇌(煩惱)를 다 멸해 버린 성자(聖者)의 안목(眼目)에서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성자의 청정(淸淨)한 안목에서 볼 때는 「그 에너지 실체(實體)가 우주(宇宙)에 충만(充滿)해 있고 모든 공덕(功德)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훤히 보이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보는 것보고 견성(見性) 그럽니다. 볼 견(見)자, 성품 성(性)자, 그런 우주의 본래 성품인 그 불성을 우리가 직접 본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까지 보기 위해서는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과거 전생(前生)에 나쁜 습관성(習慣性)을 많이 안 짓고 또는 금생(今生)에도 좋은 선근(善根)을 타고 나와서 금생도 환경이 좋아서 어릴때부터서 아! 물질(物質)은 다 허망(虛妄)하다. 그대 몸도 허망하다. 이와 같이 허망무상(虛妄無常)한 소식을 자꾸 들었으면 모르려니와 학교에서 배운 것이 모두가 있다는 것만 배웠기 때문에 즉, 말하자면 무명(無明)만 배웠기 때문에 우리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화두를 들고 오랫동안 앉아 놓으면 차근차근 습관성이 힘을 못쓰고 그때는 그림자같이 이스러집니다.

바로 염불(念佛)도 오래 해야 한번 하면 한만큼 부처님 명호(名號)라는 것은 바로 본체(本體)를 불성(佛性)자리를 상징적(象徵的)으로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에 한 번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한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하면 그때는 한 번 한만큼 우리 업장(業障)이 녹아지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도 '정말로 화두 이것이 진여불성을 의미했다'. '우주의 본체를 의미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참구(參究)할 때는 한 번 참구한 만큼 우리 업장이 녹아 옵니다.

따라서 지금 묵조선(默照禪)도 지금 원불교(圓佛敎)는 묵조선을 합니다. 또는 중국이나 일본이나 조동종(曺洞宗)에서는 묵조선을 합니다. 그도 그것이 선(禪)이 아닌 것이 아니라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관조(觀照)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 자리를 우리가 구한다면 다 선(禪)입니다.

가사 하다못해 기독교식으로 하나님을 참구하고 '오 주여!'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저 내 밖에 있다. 이럴 때는 그게 선(禪)이 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법신불(法身佛)과 똑같이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 안계신 곳이 없고 능하지 않음이 없고 이것이 바로 우주의 본체다. 이렇게 생각할 대는 '하나님!' 해도 좋습니다.

지금 앞으로의 시대(時代)는 이렇게 해야 할 그런 시대입니다. 불교(佛敎)는 원래 모든 문화(文化)를 다 포섭하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에는 무엇은 들어있고 무엇은 안들어 있으면 불성이 되겠습니까.

일즉일체(一卽一切)라. 하나 가운데 다 들어있어야 그래야 불성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요소나 이슬람교의 요소나 다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선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하는 선은 그런 화두를 참구하는 선 '이뭣고'도 좋고 '무'자도 좋고 '뜰앞에 잣나무다'라는 화두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 자리를 의미해 있습니다.

그렇게 분명히 제일의제(第一義諦) 그 자리를 딱 느끼고 그 자리르 우리가 참구해 나가는 태도를 갖추어야 하지 그렇지 않고서 상대적(相對的)인 문제가지고 의심하면 그것은 상기(上氣)만 되는 것이지 공부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조(默照)하시는 분도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이른바 법계연기(法界緣起) 자리 - 불법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연기법(緣起法)이 불법 아닙니까. 불법은 바로 연기법입니다. 연기법도 그냥 방편(方便) 연기법은 이것저것 다 모아서 인(因)과 연(緣) 따라서 잠시간 모아 있다. 그러므로 고유(固有)한 것이 없다. 이렇게만 보는 것은 이것은 천박한 방편(方便)연기(緣起)입니다.

참다운 연기법은 법계연기(法界緣起), 진여연기(眞如緣起)입니다. 진여법성(眞如法性)이 인연(因緣) 따라서 그때그때 이 현상(現象)세계를 만듭니다. 나나, 너나 또는 하늘에 있는 천체(天體)나 모두가 다 법계(法界),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성(佛性)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이 법계연기 따라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어느 것도 진여불성이 아님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능엄경(弭嚴經) 도리(道理)입니다.

선도리(禪道理)라는 것은 순간 찰나도 진여법계를 안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본체이기 때문입니다. 본체에서 하나하나 용(用)을 해야지 본체를 떠나버리면 그때는 선객(禪客)이 아닙니다.

남한테 얻어 맞으나 자기 제자한테 매를 때리나 법계(法界)에 입각해서 나와 네가 둘이 아니라는 자리에서 때리면 무방합니다. 그러면 절도 있게, 꼭 알맞게 합니다.

마땅히 이렇게 묵조하는 선, 잠자코 자기 불성을 비추어 보는 선, 이런 때는 나나 너나 모두가 다 우주 만유의 진여법계(眞如法界)로부터 되었다. 이렇게 생각해야 그래야 참다운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염불(念佛)도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우나 우리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외우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그런 법계(法界)로부터서, 법성(法性)으로부터서 되었다. 이렇게 하면서 법성자리 그 자리를 우리가 목표로 해가지고서 염불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진심염불(眞心念佛)입니다.

'절'도 지금 삼천배 해라, 몇 천 배 해라. 그런 말 저런 말 많이 합니다. 그런 절도 반야(般若)와 더불어서 해야 참다운 절입니다.

그냥 몇 천 배 해라, 그래가지고 다리가 아프네, 공덕이 있네, 없네, 어쩌고 합니다만 그렇게 할 때가 지금 아닙니다. 꼭 반야와 더불어서 해야 합니다.

반야의 지혜와 더불어서 하는 절은 무엇인고 하면은 지금 절을 하는 대상(對象)이나 절을 하는 나나 모두가 둘이 아닙니다.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고 천지가 바로 둘이 아니다. 이런 자리에서 우리 마음이 진여법성 자리, 그 부처의 자리로 가고 싶어하는 그런 간절한 갈앙심(渴仰心)으로 절을 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참다운 절이고, 그래야 몸도 가볍습니다.

내 몸뚱아리도 물질이 아닌데 '이 몸뚱아리가 절대로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신통자재한 사람들은 자기 몸뚱아리도 하늘을 올라갑니다. 무게가 몇 십 키로그램이 된다고 생각하면 공기(空氣)를 타고 공중(空中)으로 올라 가겠습니까.

100미터 고도에 올라 갔을 때하고 지금 지상에 있을 때하고 무게가 같지 않습니다. 저 성층권(成層圈)에 올라가 있을 때하고 여기 있을 때의 우리 몸무게가 같지 않습니다. 인력권 밖의 먼 진공(眞空) 속에 들어가면 우리 몸무게는 없어져 버립니다.

우리가 느끼고 무겁다, 가볍다, 좋다, 궂다 하는 것이 모두가 상대적(相對的)인 하나의 식(識)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절대적(絶對的)인 식(識)에 있어서는 절대의 관념(觀念),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제법공(諸法空) 도리(道理)로 생각하면 그때는 근본 에너지가 이것이 공이므로 에너지가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였다 하더라도 그림자가 몇 천개 모여도 그림자이듯이 그것들이 몇 천개 모여서 세포가 되고 세포가 몇 천 개 모였다 하더라고 공은 결국은 공입니다.

따라서 무게가 없습니다. 내 몸뚱아리 무게가 없다고 믿고서 절을 하시는 것과 나는 분명히 육십키로다, 오십키로다, 이렇게 생각하고 절하는 것과 어디가 더 편하시겠습니까?

화두(話頭)를 참구하고 염불(念佛)을 한다 하더라도 나도 공, 너도 공, 모두가 다 텅텅 빈 불심(佛心)뿐이다. 환희심(歡喜心)이 넘치는 그런 광명(光明), 행복(幸福)이 넘치는 그런 광명(光明)의 불심(佛心)뿐이다, 불성(佛性)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빠르겠습니까.

내 몸뚱아리 암(癌)이 있다, 무엇이 있다, 이것도 중생들이 하나의 범부 의사(醫師)가 약간 부조화(不調和)스럽게 세포(細胞)가 구성된 것보고 암이다. 그렇게 말한 것이지 암도 본래로 공(空)입니다. 근본 원소가 공이므로 암 그것도 원소로 구성된 것인데 암이 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것을 포함한 나한테는 모두가 공이다. 아픈 것도 공이다. 이렇게 확실히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병(病)도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인도(印度)의 신지학(神智學)이라. 귀신 신(神)자, 지혜 지(智)자, 배울 학(學)자입니다. 신지학은 모두가 다 범신론적 브라흐만(Brahman)이라 하는 정신법(精神法)으로 해서 병을 고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고, 몸 이것은 마음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음만 바로 먹으면 음식은 먹은 듯 만 듯 해도 무방합니다. 욕계(欲界)에만 음식이 있는 것이지 색계(色界) 이상은 음식이 없습니다.

세 가지 수행 방법(話頭禪, 默照禪, 念佛禪) 가운데서 간추려서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노는 입에 염불이라, 아직 자기 행법(行法)이 굳어지지 않은 분들은.....

어떻게 해도 다 무방합니다만 반야지혜(般若智慧)와 더불어서 하셔야 참다운 선(禪)입니다.

저 서산(西山)에 뉘엿뉘엿 지는 태양(太陽)을 관(觀) 하나, 또는 극락세계(極樂世界)의 땅을 관하나 모두가 다 제법공(諸法空) 자리, 제법공인 동시에 모두가 다 불성(佛性)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관(觀)해야 합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십육관(十六觀)처럼 지상관(地想觀)이라. 땅을 관찰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 땅은 우리가 일반적인 관념으로 보는 땅을 관찰(觀察)하는 것이 아니라, 극락세계(極樂世界)의 영롱한 땅으로 관찰합니다. 물질이 아닌 영롱한 땅을 관찰합니다.

따라서 그런 것이 모두가 다 바꿔서 말하면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관하는 것입니다. 제법공 도리를 보고서 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모두가 다 선(禪)입니다.

그러나 아직 자기 행법이 정해지지 않으신 분들은 우선 제일 쉬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그런 부처님 명호(名號)로 염불(念佛) 하면서, 자기 속으로 염불을 되뇌이면서 생각생각에 그런 염불한다는 생각마저 끊어지도록까지 한다고 생각할 때는 참 쉽습니다.

화두를 하시고 관법을 하시고 그렇게 이미 하신 분들은 좋지요. 모두가 다 다만 거기다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반야의 지혜아 더불어서 해야 참다운 참선(參禪)이 됩니다.

그러나 아직 정하지 않은 분들은 염불을 화두로 해서, 염불(念佛)도 '나무아미타불' 할 때는 가사 '나무' 빼버리고 될 수록 간략히 '아미타불'을 화두로 해서 하셔도 좋고, 아미타불 화두가 근래에 와서는 저 만공(滿空) 스님이나 더 올라 가서는 저 서산(西山) 스님이나 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또 관음(觀音)이 좋으신 분들은 똑같은 것이므로 관음송(觀音誦)을 하시는 것이고,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좋으신 분들은 또 그렇게 하셔도 무방합니다. 다만 관음(觀音)과 지장(地藏)과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진여불성(眞如佛性)과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시고서 원융무애(圓融無碍)라. 이렇게 생각하시고 하면 다 좋습니다.

이렇게 하시는데 공부해 나갈 때는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이 있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그야말로 평소에 못 느꼈던 것이 자꾸만 자기 몸을 괴롭힙니다. 평소에 그렁저렁 살 때는 그렇지 않지만 정말 우리가 진여불성 자리로 간다고 생각할 때는 반발이 옵니다. 평소에 아프지 않은 것도 아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반야 지혜와 더불어서 이러한 것들이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데 내가 범부(凡夫)이므로 아픔을 느낀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 색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촉감도, 또는 우리가 분별하는 관념(觀念)도 모두가 원래 있지가 않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범부가 잘 못 보아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느끼고 부정을 다 해버려야 합니다.

성불(成佛)까지는, 견성(見性)까지는, 진여불성(眞如佛性)하고 온전히 하나가 될 때 까지는 쉽지가 않습니다. 쉽지 않기 때문에 그 가운데 여러 가지 그 경계(境界)가 많이 나옵니다.

법당에 모신 부처님 같은 모양도 나오고 별스러운 모양이 다 나옵니다. 더러는 몸이 뜨겁기도 하고 몸이 차갑기도 하고, 더러는 몸이 공중에 뜨기도 하고 별별것이 다 나오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하나의 경계이므로 그런 경계에 대해서 절대로 붙잡히지 마십시오.

붙잡히지만 않으면 몸이 제아무리 천근만근 무겁다 하더라도 이것이 허망한 것이다. 착만 안하면 얼마 안가서 사라지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꼭 상(相)이 없이 원래가 상이 없는 것이므로 우리 진면목은 원래가 상이 없습니다. 상이 있는 것은 우리 무명(無明)으로 봐서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이 없이 공부를 하실 대 정말로 가속도(加速度)로 공부가 익어 갈 것을 믿어 마지 않습니다.

화두(話頭)나 염불(念佛)이나 관법(灌法)이나 주문(呪文)이나 모두가 다 좋은 수행법(修行法)입니다.

다만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과 더불어서 하셔야 그래야 참다운 공부고 참다운 염불(念佛)이고 참다운 주문(呪文)이고 참다운 화두(話頭)고 참다운 관법(灌法)이고 참다운 선(禪)입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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