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염불(念佛)의 의의(意義)
念者人人現前一念也 佛者人人本覺之眞性也 現前一念 覺悟本覺眞性 卽是可謂 上根人念佛也 是與佛不二 與佛不離之行也
(염자인인현전일념야 불자인인본각지진성야 現前一念 각오본각진성 즉시가위 상근인념불야 시여불부이 여불부이지행야) - 智度論 (지도론) -
다음에는 염불(念佛)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공부가 익어져서 한 고비를 넘어서면 염불이고 화두고 다 초월해 버립니다. 그러나 화두나 염불이나 묵조나 모두가 다 한고비를 넘어서기 전에 습인(習忍)을 익혀서 마음이 딱 자성(自性) 곧, 불성(佛性) 한자리에 머물기 전에 하는 것이지 익은 사람들한테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땅히 부질없는 시비논쟁은 말아야 합니다.
염불이라 할 때의 염(念)이란, 사람 사람마다 마음에 나타나는 생각을 염이라 하고 불(佛)은 사람 사람마다 갖추고 있는 깨달은 근본 성품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 아는 소식 아닙니까, 염불 공부란 우리 눈 앞에 좋다 궂다 시비분별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우리 본각(本覺)의 참 성품을 각오(覺悟)하는 것이요 이것이 곧 참다운 염불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와 내가 본래 하나임을 재확인하는 공부입니다. 생각은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것이고 부처도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본각진성(本覺眞性)인데 생각생각에 부처를 여의지 않고서 염(念)하는 것이 참다운 상근인(上根人)의 염불인 것입니다.
이러한 염불은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부처를 떠나지 않는 것 입니다. 부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를 떠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업장 때문에 자꾸만 떠나 버리니까 우리가 떠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부처임을 재확인 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또는 미운 사람이나 고운 사람이나 다 부처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 입니다. 미운 사람도 부처요 좋아하는 사람도 부처라고 깨달으면 미워도 미운 사람에 집착하지 않고 좋아도 좋아하는 사람에 걸리지 않는 것 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한테나 남한테나 이런 도리를 역설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2. 염불(念佛)의 방법(方法)
1. 칭명염불(稱名念佛)
2. 관상염불(觀像念佛)
3. 관상염불(觀想念佛)
4. 실상염불(實相念佛) ; 불(佛)의 법신(法身)이 비유비공(非有非空)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묘심(妙心)임을 관조(觀照)하는 염불(念佛)
2. 관상염불(觀像念佛)
3. 관상염불(觀想念佛)
4. 실상염불(實相念佛) ; 불(佛)의 법신(法身)이 비유비공(非有非空)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묘심(妙心)임을 관조(觀照)하는 염불(念佛)
염불에도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보통 염불이라고 하면 부처의 이름, 명호를 외우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있고 또는 부처의 상호 32상(三十二相)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춘 원만 덕상을 관찰하는 관상염불(觀像念佛)이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그림을 보면 기분이 좋듯이 부처님의 상호만 보아도 우리 마음에 우러러 숭앙이 되고 한결 안심이 되고 아늑한 평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또 관상염불(觀想念佛)이 있습니다. 음은 똑같습니다만 앞의 것은 상(像)을 관찰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상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공덕(慈悲功德)이라든가 훤히 빛나는 지혜광명(智慧光明) 등 부처님의 공덕을 상상하는 염불입니다.
그 다음은 실상염불(實相念佛)입니다. 이것은 현상적인 가유(假有)나 허무에 집착하는 무(無)를 다 떠나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이른바 법신(法身)자리를 생각하는 염불인 것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자리를 생각하는 실상염불이 참다운 본질적인 염불입니다. 이른바 법의 실상, 내 인간 생명의 실상, 우주 생명의 실상, 이것을 우리가 관찰하는 것입니다. 관찰은 분명히 뚫어지게 안 보이니까 볼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생각만 해도 관(觀)이라는 뜻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부처의 법신(法身)은 있지도 않고 또는 공(空)하지도 않은 중도실상의 생명의 광명을 관조하는 염불이 곧 실상염불입니다.
이런 데서 우리가 의심을 품는 문제는 부처님의 명호에 대해서 입니다. 우리 스님네나 재가 불자들 가운데 '어떤 부처를 염해야 할 것인가?'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분이 있습니다.
지장경(地藏經)을 보면 지장 보살을 염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되어 있고 아미타경(阿彌陀經)을 보면 아미타불을 한 번만 잘 염해도 극락세계에 간다고 되어 있고 또 관음경(觀音經)을 보면 욕심 많을 때나 마음이 괴롤울 때나 또는 무엇이 안될 때나 좋은 사람 만나고 싶을 때나 모두가 관세음 보살을 염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佛者)들은 '뭘 염해야 좋을 것인가?'또는 '다 한꺼번에 염해야 할 것인가?'하고 마음에 갈등을 갖습니다.
그런데 가령, 지장 보살님을 위주해서 염하면 관세음 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보다도 지장 보살을 염하는 것이 훨씬 공덕이 많다는 생각을 하고 염할 때는 사실은 공덕을 크게 감하는 것입니다. 참답게 지장보살을 염하는 것이 못됩니다. 또는 관세음 보살님을 염한다 하더라도 아미타불이나 지장 보살 염불은 별로 공덕이 없고 관세음 보살을 염하는 것이 가장 수승하다고 생각할 때도 참다운 공덕이 못되고 부처님 법에 여법한 염불도 못됩니다. 아미타불을 염할 때도 같은 도리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법은 무장무애(無障無碍)하고 평등일미(平等一味)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라는 평등일미 자리에는 높고 낮은 우열이 있을 수 없는 것 입니다. 따라서 어느 명호(名號)나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오, 주여!' 하고 기독교 식으로 한 명호만 했으면 될 것인데 무슨 필요로 복잡하니 많은 부처님의 명호가 필요 있을 것인가? 하고 의단을 품기가 쉽습니다. 이런 때는 부처님의 불성공덕(佛性功德)을 생각해야 됩니다. 불성공덕은 무한 공덕입니다. 불가설(不可說)이라, 어떻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쪽으로도 무한하고 또는 지혜로운 쪽으로도 무한하고 또는 지구 덩어리가 베풀어 주는 은혜 공덕으로 보더라도 무한합니다.
그래서 많은 부처와 보살 명호는 이른바 생신(生身) 보살이 아니라 법신(法身) 보살 명호로, 모두가 다 부처 공덕을 상징한 것입니다. 무장무애한 무량공덕을 자비로운 쪽으로는 관세음(觀世音) 보살이고 지혜로운 쪽으로는 문수(文數) 보살, 대세지(大勢至) 보살이고 또는 원력(願力)쪽으로는 보현(普賢) 보살이고 또는 죽어서 가는 영가를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쪽에서는 지장(地藏) 보살, 인로왕(引路王) 보살이고 또는 병고를 다스리고 구제하는 쪽에서는 약사여래(藥師如來), 약왕(藥王) 보살입니다. 또는 법신 부처님이 하늘에 있는 달이나 별이나 그런 광명체로 화현(化現)하는 쪽에서는 이른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요, 일광(日光) 보살, 월광(月光) 보살이고 또 북두칠성 등 28수(宿) 그런 쪽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칠성(七星)입니다. 예경할 때에 보십시오. 산신(山神)을 외울 때도 처음에 만덕고승(萬德高僧) 성개한적(性皆閑寂)이라는 말을 합니다. 역시 부처님 가르침 따라 성중(聖衆)을 먼저 내놓고서 나중에 산신이 나와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청정무비한 무량공덕 이 산에 들어가 있으면 산신인 것이고 물에 들어가 있으면 용왕(龍王)인 것이고 우리 지구에 들어 있으면 지장 보살이요 또 별에 들어 있으면 치성광 여래인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올바른 해석이 되겠지요. 따라서 어떠한 때에 중생이 근기 따라서 산신 불공을 하더라도 우리 중생이 볼 때에 산인 것이지 바로 본다면 부처님 화신(化身)인 것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할 때도 산은 그냥 산이요, 물도 그냥 마시는 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바로 불성(佛性)의 산으로, 불성의 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해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경을 보면 다 그런 도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본다면 지장 보살을 부르나 또는 무엇을 외우나 간에 '부처님의 화신으로, 부처님의 공덕으로 우리 중생을 다스리는, 자비로 구제하는 공덕 명호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우리 마음이 부처님한테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지장 보살이나 무엇을 염해도 공부에 조금도 손해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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