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淸華) 큰스님께서는 24세시 백양사 운문암에서 송만암 대종사의 상좌이신 금타(金陀) 대화상을 은사로 출가,득도하셨습니다. 이후 50여년간 대흥사, 진불암, 상원암, 남미륵암,월출산 상견성암, 백장암,벽송사, 백운산 사성암, 혜운사, 태안사 등 성지의 토굴에서 묵언, 일종식 및 장좌불와의 좌선으로 오로지 수행정진하셨으며, 원통(圓通)불법을 선양하고, 엄정한 계율의 준수와 염불선을 주창하셨습니다. | |
우리 중생(衆生)들은 그냥 이 몸 이대로 좋다, 이 몸 이대로 귀엽다고 생각하므로 우리가 탐심(貪心)을 내고 하겠지요. 그러나 이 몸 이대로는 귀(貴)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깊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더러운 것만 충만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념주관(四念住觀)도 이 몸이 더럽다는 부정관(不淨觀)입니다. 부정(不淨)이라, 우리가 부정한 것을 좋다고 생각하고 구할려고 생각하므로 그때는 고(苦)가 안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몸은 결국은 과학적(科學的)으로 본다면 무상(無常)한 것이고 무아(無我)입니다. 과학적(科學的)으로 볼 때 우리 몸은 무상(無常)인 것이고 무아인 것입니다. 내 몸뚱아리가 무상한 것이고 무아인 것인데 자기 소유(所有)가 어디에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사회의 형태도 마땅히 우리 승가(僧家)에서 하는 그런 생활로 앞으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갑자기 받으라 하면 되겠습니까. 먼저 느끼고서 우리 승가(僧家)부터서 모범(模範)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마음부터서 제도(濟度)해서 자기 마음으로 느끼고 해야지 공산혁명 모양으로 억지로 다 그렇게 공평(公平)하게 분배 할려고 하면 그때는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우리가 이상적인 것은 원래 내 것이 없고 아무 것도 내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도 결국은 내 소유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적어도 출가한 수행자(修行者)는 자기 평생 내 소유(所有)는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만약 출가한 수행자가 내 소유가 내 몸뚱아리도 내 것이고 내 책도 내 것이고 내 사는 집도 내 것이고 할 때는 그때는 수행자가 아닙니다. 사실이 빈 것이므로 사실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해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딱 비우고 다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분명히 갖추고 있다. 경(經)에도 보면은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확신해 버리면 확신은 즉시에 불퇴위(不退位)라! 공부가 후퇴(後退)가 안됩니다. 나한테도 석가(釋迦)와 더불어서, 예수와 더불어서 모든 신통(神通)을 다 갖추고 있다. 이른바 명행족(明行足)이라. 이른바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내가 갖추고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내가 아픈 것이나, 내가 모르는 것이나, 내가 부족한 것이나 우리가 부족하게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계발(啓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중생(衆生) 보고는 금덩어리 짊어지고 빌어먹는 거지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 짊어지고 있고 모두가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무량의 공덕을 갖추고 있어 놓아서 어떠한 물질적(物質的)인 소유(所有)가 자기 것이 아니다 하더라도 우리가 조금도 비관(悲觀)할 필요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장에 금방 죽는다 하더라도 손해(損害)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 몸뚱아리 자기 것이 아닌데 금방 몸 버리면 금방 다른 몸 받는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했으면 바로 극락(極樂)으로 가는 것이고, 극락은 진여불성(眞如佛性)과 하나가 되어 버리면 그때는 극락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되나 사업(事業)에 실패(失敗)하나, 자기가 죽으나, 자기 이웃, 가까운 사람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나 어떠한 경우도 슬퍼하고, 손해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중생(衆生)의 있지 않은 상(相)만 바꿔지고 변동(變動)이 있는 것이지 본 바탕은 그대로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른바 운문(雲門) 스님 말씀대로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매일매일 좋은 날이고 좋은 일이곤 합니다. 가부좌(跏趺坐)를 하실 때는 - 가부좌 하시는 것이 공부하기에 제일 좋은 자세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가부좌 한 이 모습이 정삼각형(正三角形) 모습입니다. 기하학(幾何學)을 배워서 아시지만 삼각추(三角錐)가 결국은 제일 안정(安定)된 것 아닙니까. 따라서 이 정삼각형 이 모습이 모든 모습 가운데 제일 안정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모아서 이렇게 하나로 가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 모습이 지혜(智慧)가 가장 발동하기 쉬운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용수보살(龍樹菩薩)도 차가부좌자(此跏趺坐者), 가부좌 이것은 최안온불피급(最安穩不疲及)이라. 가장 편안(便安)하고 피로(疲勞)를 모른단 말입니다. 다리를 양쪽으로 서로 엇갈리게 맞끼우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다만 이 모습을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여도 무방한 것인데 아무튼 가부좌(跏趺坐) 하는 모습이 최안온불피급(最安穩不疲及)이라, 가장 편안하고 가장 피로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차도급자(此道及者)라, 이런 모습이 지혜(智慧)가 발동하기가 쉬운 것이므로 이제 도(道)가 빨리 통(通)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마왕견기(魔王見其) 기심수포(其心愁怖)라, 도(道)가 빨리 되어 가거니 그대는 마왕(魔王)이 두려워서 접근을 못합니다. 가장 안정되고 가장 지혜가 발동하는 그런 모습이기 때문에 이 모습만 보고도 결국은 마구니가 침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금상첨화(錦上添花)로 그야말로 다시 없는 큰 힘이 되어서 무서운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부좌(跏趺坐)를 하실 때는 꼭 단정히 앉아서 허리를 구부리거나 그래 놓으면 역시 상하 호흡(呼吸)이 제대로 잘 안 돌아가는 것입니다. 단정히 앉아야 그래야 이제 호흡이 순탄하게 되고 소화(消化)도 잘 됩니다. 이른바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 맑은 기운이 수승(水昇), 물 수(水)자, 오를 승(昇)자, 막은 기운인 수기(水氣)가 위로 올라가고 화강(火降)이라, 불 화(火)자, 내릴 강(降)자, 다스운 기운이 아래로 내려간다. 시원한 기운이 위로 올라가고 다스운 기운이 아래로 내려가야 그래야 이제 우리 생리(生理)의 가장 정상적인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되면은 호흡(呼吸)도 차근차근 맑아 옵니다. 또는 그 반대로 호흡 공부를 하다 보면 그렇게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그야말로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 시원스런 기운이 올라가고 더운 기운이 내려갑니다. 그래서 좌선(坐禪)할 때에 자기 몸이 좀 거북한 분이나, 또는 좌선 할 때는 오랫동안 하다 보면 자기 호흡이 무슨 원수같습니다. 호흡이 원수가 되어서 빡빡하고 방이 좀 덥기나 하고 더구나 콧물도 나오곤 합니다. 그런 때는 물론 적당히 조절하면 좋겠지만 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좀 해버리면 그런 것이 대부분 다 물러 갑니다. 부처님 경전(經典) 가운데서 아나파나경(阿那波那經)이라, [아나파나]란 호흡(呼吸)이란 뜻입니다. 입식출식(入息出息)이라. 그런 경이 있을 정도로 호흡만 해서 성불(成佛)하는 법(法)이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마음 활동과 호흡은 둘이 아닙니다. 마음이 거칠면 호흡도 거칠고 호흡이 고요해지면 마음도 고요해 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 마음 다스리기가 굉장히 어려운 때는 호흡을 간단하게 겸비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맨 처음에 가부좌(跏趺坐) 해서 막 들어앉아서 산란스러운 마음이 안 가시고 밖에서 보는 것이 자꾸만 걸리고 할 때는 가만히 호흡운동을 합니다. 호흡운동(呼吸運動)할 때도 잘 못하면 도리어 병(病) 나기가 쉬운 것이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어떻게 주의해야 하는가 하면 그것은 표준이 있는 것인데 - 좀 지루하시드라도 호흡 문제나 앉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제가 말씀을 좀 더 드립니다만 - 심장세균(深長細均)이라, 깊을 심(深)자, 호흡을 길게 하고, 길 장(長)자, 호흡을 길게 하고, 가늘 세(細)자, 가늘게하고, 고를 균(均)자, 호흡을 고르게 하고, 호흡을 깊고, 길고, 가늘고, 고르게 합니다. 이렇게만 주의하면 호흡에 대해서 병이 안걸립니다. 그러나 억지로 길레 할려고 하고 억지로 가늘게 할려고 하고 그렇게 치우치면 그때는 호흡 때문에 병이 생기는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깊고, 길고, 가늘고, 고르게] 그와 같이 하면 무리가 없도록까지 길게 하면 좋습니다. 그래서 호흡(呼吸)으로 공부하시는 분들이 아나파나 호흡경(呼吸經)을 보아도 좋으나 그 경은 간단한 것이라 거기에서 깊은 구체적인 시사는 얻기는 좀 곤란스럽고 역시 요가수트라(Yoga-sutra:요가경전)같은 것은 순수 호흡만 가지고서 우리한테 가르치는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그것은 파탄잘리(Patanjali)라는 분이 체계를 세운 것인데 [요가수트라]를 보시면 좋겠고, 이쪽 중국권(中國圈)에서는 혜명경(慧命經)이라, 이것은 화양(華陽) 도인 그분이 낸 것인데 약간 과장이 되어 있어 놓아서 우리가 너무나 거기에 치우치면 곤란스럽겠지만 아무튼 참고가 됩니다. 아무튼 요가수트라 또는 혜명경 또는 부처님께서 하신 아나파나경 그런 경에 가서 호흡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런 경을 설사 모른다 하더라도 심장세균(深長細均), 호흡을 [깊고 길고 가늘고 고르게] 이렇게 하시고, 또 한가지 주의하실 것은 이른바 유식(留息), 그래서 요가에서는 쿤달(Kundal)이라고 합니다만 우리가 숨을 들어 마시면 이렇게 오랫동안 멈춘단 말입니다. 머무를 유(留)자, 숨쉴 식(息)자, 유식(留息)이라. 멈추는 것인데 숨을 좀 멈추고 있으면 숨이 아랫배로 가서 전신(全身)으로 갑니다. 보통 일반 숨들은 이렇게 가슴까지 가서 횡격막(橫隔膜) 미처 못 가고서 나와버리기 때문에 전신으로 호흡이 못 갑니다. 다만 흡(吸)을 해서 가만히 멈추고 있으면 그때는 호흡이 전신으로 갑니다. 따라서 오랫동안 멈추면 멈춘만큼 그때는 더 많이 갑니다. 그러나 억지로 너무 오래 멈추면 그도 역시 부작용이 옵니다. 따라서 앞서 심장세균(深長細均) 모양으로 깊고 길고 가늘고 고르게 이러한 모양으로 처음에 무리가 없도록 숨을 들어 마셔가지고 무리 없도록까지, 가사 5초나 몇초나 1분이나 그와 같이 멈춥니다. 그렇게 멈추는데 그런 동작을 차근차근 더해갑니다. 가사 오늘은 5초나 숨을 멈추었으면 내일은 1분이나 그와 같이 해서 차근차근 2분 3분 숨을 멈추는 시간을 늘려갑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는 우리 전신(全身)에 가서 숨이 고루고루 다 삼투(渗透)가 됩니다. 그래 버리면 그때는 몸이 시원해 옵니다. 우리 몸이 거북한 것은 호흡이 제대로, 우리 혈액순환(血液循環)이 제대로 안되어서 그러는 것인데 혈액순환(血液循環)이 왕성하고 우리 호흡이 산소(酸素)를 공급해 준다고 생각할 때 그때는 우리 몸이 항시 상쾌하고 가볍단 말입니다. 그래서 드디어는 자기 호흡이 딱 끊어져야 합니다. 호흡이 지식(止息)이라. 이른바 삼매(三昧)에 들려면 자기 호흡 소리도 자기 스스로도 의식을 못하고 정작 호흡이 거의 끊어질 단계가 되어 버려야 그래야 이제 삼매에 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머리가 무겁다든가 또는 상기가 온다든가 그런 분들은 억지로 화두(話頭) 하려고 말고 억지로 염불(念佛) 하려고 말고서 놓아 버리고 호흡만 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호흡을 해가지고서 너무 꾸벅꾸벅 혼침(昏沈)이 온다고 생각할 때는 다시 화두도 챙기고 염불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공부인들은 그때그때 다만 선행적(先行的)으로 믿음이 '모두가 다 조금도 틈도 없고, 조금도 다른 것이 없는 모든 공덕(功德)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이다.' 이렇게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 버릇이 잘못되어서 안믿어 온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루 공부하면 한만큼 그때는 차근차근 그에 따른 믿음이 더 깊어 갑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확신(確信)을 한 다음에, 믿음을 확립시켜 가면서, 믿음을 확립 시킬려면 자꾸만 우리가 부처님 법문(法門)을 되뇌어야 합니다. 아! 모두가 마음 뿐인데 내가 잘못보아서 좋다고 보고, 궂다고 보는데, 이와 같이 자꾸만 자기를 타이르고 부처님 법문(法門) 쪽으로 우리를 다스려 갑니다. 가다보면 결국은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도 모두가 빈 것이라는 것이 차근차근 인상(印象)이 박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믿고서 그래 놓고서 자기가 자기한테 맞는 법을 골라서 전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화두(話頭)나 염불(念佛)이나 다 좋은 것입니다. 주문(呪文)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 법, 도인들 법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우리한테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를 진여불성으로 이끌기 위해서 하신 법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꼭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뱀이 허물을 벗듯이 우리 중생의 허물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언제 벗어도 벗는 것입니다. 게으르면 금생(今生)도 못 벗고 이제 내생(來生)도 못 벗고, 몇 천 생 동안 윤회(輪廻) 바퀴를 돌다가 이제 더욱더 고생을 받고 말겠지요. 기왕에 벗을 바에는 금생에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미가 허물을 못 벗으면 성충(成蟲)이 못 되겠지요. 따라서 우리 인간(人間)도 역시 우리 중생(衆生) 허물을 못 벗으면 내내야 참다운 자기(自己)는 못 되는 것입니다. 가짜 자기, 망령(妄靈)된 자기 때문에 자기도 고생하고 남도 고생을 시킨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바로 믿고서 가부좌(跏趺坐)를 하실 때는 그와 같이 꼭 단정히 앉고 또는 긴장하면 긴장하는 그걸로 해서 마음이 그만큼 장애(障碍)가 되는 것이므로 긴장을 하지 말고 긴장을 다 풀어버리고 결국은 단정히 앉아서 - 단정히 앉아야만 호흡(呼吸)도 잘 되는 것이고 동시에 망념(妄念)도 덜하고, 모양 자체가 벌써 사마외도(邪魔外道)를 물리친단 말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안되겠습니다만 그렇게 하다 익숙해지면 가부좌(跏趺坐)하는 모습은 몇일 동안 있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러나 맨 처음에 공부하실 때는 꼭 그때그때 포행(布行)을 해서 가급적이면 한 시간 동안 앉으시고 나머지 10분 동안 포행해서 풀어버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저희 같이 나이 먹은 사람들은 귀찮으니까 그냥 앉아 있어 버립니다만 사실은 한 시간씩 앉고서 푸시는 것이 좋습니다. 참선(參禪) 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하십시오. 일본(日本)의 선방(禪房)에서는 의무적으로 포행을 시킵니다. 그러나 자기 공부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때그때 알아서 하시는 것은 좋지만 하여튼 가급적이면 한 시간 하시고서 포행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도록 하시고 자기 눈은 그때그때 관법(灌法)을 주로 하시는 분은 눈을 뜨시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관법을 않고 화두(話頭)나 염불(念佛)을 하시는 분들은 감고 뜨시는 것은 알아서 하시지만 원칙은 반폐반개(反閉反開)라, 본 듯 만 듯 하는 것이지요. 어디 보는 것도 아니고 안보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와 같이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정면(正面) 똑바로 보는 것이 훨씬 더 혼침(昏沈)을 덜 합니다. 고개를 아래로 숙여 버리면 그때는 꾸벅꾸벅 혼침이 더 빨리 옵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시고서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인데 우리가 진여불성 부처님을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볼 수가 없지만 모든 관법(灌法)이나 조문(弔文)이나 화두(話頭)나 그런 것은 볼 수 없는 우리 중생을 보게끔 하기 위해서 관법이 있고 화두가 있단 말입니다. 가사 일상관(日想觀)이라, 일상관은 서산(西山)을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보고서 공부하는 그런 관법입니다.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는 것을 자꾸만 생각하고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거기에 따라서 마음이 모아지고 정말로 그때는 해와 같은 광명(光明)이 보인단 말입니다. 광명(光明)이 원래 없으면 보이겠습니까만 사실은 원래 빛이 천지우주(天地宇宙)는 우리 중생이 보는 눈부신 그런 빛이 아닌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빛이 항시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하나의 생명(生命)의 빛이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공부하던지 공부가 사무쳐서 정말로 마음이 딱 모아져서 망상(妄想)이 줄어들면 그때는 그에 따라서 차근차근 빛이 비춰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할 때도 역시 내가 공부해 나가면 아주 그 행복(幸福)스러운 진여불성(眞如佛性)의 빛이 비추어 오는구나. 이렇게 기대하고 하는 공부는 손해가 없습니다. 우리가 없는 허상(虛想)을 생각하면 모르겠지만 실지로 빛이 있는지라 빛을 미리 생각하고 하는 것은 공부에 손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광명관(光明觀)이라 또는 일상관(日想觀)이라는 관법(灌法)이 있습니다. 또는 법계관(法界觀)이라. 법계관은 화엄경(華嚴經) 식인데 법계관은 우주(宇宙)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순수(純粹)한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광명(光明)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하는 것도 이제 공부에 손해가 없는 것인지라 다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면은 근본(根本) 믿음이 '내가 지금 한치 앞의 진여불성 자리를 못 본다 하더라도 일체 존재가 어김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이다.' 이렇게 믿고서 화두(話頭)를 하나 주문(呪文)을 하나 염불(念佛)을 하나 관법(灌法)을 하나 그때는 어떤 공부도 무방한 것입니다. 다만 자기 스스로 마음이 혼침(昏沈)이 올 때는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서 화두나 염불이나 관법을 애쓰고 하는 것이고, 또는 마음이 좀 들뜨면 가만히 놓아 버리고서 그냥 호흡(呼吸)만 해도 무방하고, 따라서 마음이 혼침이 올 때 일으키는 요령 또는 마음이 들뜰 때 마음을 가라 앉히는 요령 그런 것은 자기 스스로 해보시면 짐작이 됩니다. 이렇게 해야 이른바 정(定)과 혜(慧)가 쌍수(雙修)가 됩니다. 우리 진여불성 자리는 원래 지혜(智慧)와 선정(禪定)이 같이 온전히 다 원만히 갖추고 있어 놓아서 우리 공부하는 방법도 역시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지혜와 선정의 공부가 같이 되어가야 그래야 이제 진여불성(眞如佛性)하고 빨리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항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로 해서 모두가 다 허망(虛妄)한 것이고 있는 것은 결국은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이다. 이렇게 비추어 보는 반야(般若)의 지혜(智慧), 거기다가 우리 마음을 산란스럽게 않고 진여불성을 우리가 생각하는 그 마음을 이렇게 이어간단 말입니다. 그 마음을 지속시키는 그것이 이른바 참다운 삼매(三昧)로 우리 마음을 유도(誘導)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이른바 정혜쌍수(定慧雙修)가 됩니다.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語錄)의 대요가 돈오점수(頓悟漸修)라, 먼저 문득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고서 그 다음에 차근차근 거기에 입각해서 닦아라 하는 것입니다. 돈오점수(頓悟漸修)나 돈오돈수(頓悟頓修)나 원래 똑 같은 뜻입니다. 해석상의 차이 뿐인 것이지. 그리고 정혜쌍수(定慧雙修)라. 도서(都序)나 화엄경(華嚴經)이나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語錄)이나 모두가 다 대요(大要)가 무엇인가 하면은 돈오점수(頓悟漸修)하고 정혜쌍수(定慧雙修)입니다. 우리가 문득 자기(自己)나 일체존재(一切存在)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부처다. 이렇게 문득 깨달아 놓고서 아직 증명(證明)은 범부(凡夫)이므로 못했겠지요. 그래 놓고서 우리가 힘 따라서 그 자리를 닦아 나아간단 말입니다. 닦아 나가되 정혜쌍수(定慧雙修)라, 모두가 부처라는 그런 반야의 지혜를 놓치지 않고서 그 지혜를 간직하면서 정(定)이라. 정은 선정(禪定)이라는 정(定) 자입니다. 반야의 지혜를 지속시키는 것 보고 정(定) 그럽니다. 그렇게 되어야 이제 지관균등(止觀均等)이라, 지(止)와 관(觀)과 어울러지는 것이고 정(定)과 혜(慧)가 같이 어울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같이 되어야 마치 부처님 경전(經典)이나 논장(論藏)에 그런 비유가 '새가 양쪽 날개쭉지가 있어야 잘 날으고, 달구지의 바퀴가 양쪽이 있어야 잘 달리듯이 우리 공부도 역시 본래 달구지에 양쪽 바퀴가 있고 새도 본래로 날개쭉지가 두 개 있듯이 우리도 역시 본래불성(本來佛性) 가운데는 지혜(智慧)와 자비(慈悲)와 선정(禪定)이 온전히 갖추어 있어 놓아서 그렇게 거기에 맡게끔 공부를 해야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과 계합(契合)이 잘 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공부를 하시되 이제 음식(飮食)도, 음식 이것이 우리 공부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너무 말씀이 길어 갑니다만 자주 말씀 드릴 수 없어서 제가 생각 난김에 말씀 드립니다만 음식을 많이 먹으면 그야말로 참 그런 원수가 없습니다. 공부할 때는 항시 우리 위장(胃腸)이 좀 빈듯한 그렇게 되어야 혈액순환(血液循環)이 빠르고 몸이 가벼울 것인데 위(胃)에 가서 무엇이 많이 들어 있어 놓으면 산소(酸素)가 뇌(腦)에서 위장의 음식을 소화(消化) 시킬려고 위장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면 결국은 머리도 무겁고 혼침(昏沈)도 오고 그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많이 먹어 놓으면 그때는 의래 식곤증(食困症)이 옵니다. 음식과 우리 공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관계를 잘 모른 사람들은 그냥 아! 기운(氣運) 타가지고 화두(話頭)를 많이 하려면 고기도 먹어야 하고 다른 음식도 많이 먹어야 한다고 그러지마는 그런 분들은 정말로 뜨겁게 생명(生命)을 내 던지고 공부를 해 본 경험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또는 부처님 말씀은, 부처님 계율(戒律)은 모두가 다 우리 중생들의 공부를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거짓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을 앞서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의 허물을 벗겨서 성자(聖者)의 몸이 되고 성자의 마음이 되게끔 하기 위해서 있는 법문(法門)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적게 먹으라고 했으면 적게 먹어야 합니다. 따라서 될 수록 배가 고플 정도로 잡수시면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공부가 잘 되어 갑니다.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계(戒) 받을 때도 오계(五戒)에는 없지만 사미십계(沙彌十戒)에는 역시 불비시식(不非時食)이라. '때 아닌 때 먹지 말라.' 물론 지금은 그렇게 하기가 어렵지만, 모두가 계율(戒律)로 설해도 그냥 잃어버리고 설하시는 분도 지금은 적당히 하면 되겠지 하지만 부처님 경전(經典)에서 하신 말씀은 모두가 다 꼭 우리 중생(衆生)을 성불(成佛)로 이끄는 말씀입니다. 때 아닌 때라는 것은 결국 오후(午後)는 모두가 때 아닌 때입니다. 때 아닌 때에 먹어 놓으면 무엇이 있는 것인가? 오후에 안먹어 놓으면 어떠한 공덕이 있는 것인가? 소음(少淫)이라, 음탕(淫蕩)한 마음이 줄어들고, 소수(少睡)라, 잠이 줄어 들고, 득일심(得一心)이라, 마음이 하나로 빨리 모아지고, 무하풍(無下風)이라, 몸에 풍이 안생기고, 신득안락(身得安樂)이라, 몸이 안락스럽고, 이것이 다 중후불식유오복(中後不食有五福)으로 부처님 경전에 명문화(明文化) 되어 있습니다. 우리 젊으신 스님네들은 이성(異性)의 음욕(淫慾) 때문에 항시 괴로움을 받는 것입니다. 혈기(血氣)가 왕성할수록 더욱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 내 음욕을 줄일 것인가? 이런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고기를 많이 안먹고 기름기 있는 것을 많이 안먹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그런데가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음욕(淫慾) 줄어들고, 욕심(慾心) 줄어들고, 잠 줄어지고 합니다. 우리가 백근, 이백근 무거운 짐을 지고 어디를 갈려면 모르겠지만 우리가 공부할려고 생각하면 많은 활력이 필요치를 않습니다. 따라서 갑자기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할려면 장애(障碍)가 있을 것입니다만 아무튼 우리들은 그런줄을 알아야 합니다. 알고서 공부를 해야 그래야 이제 손해가 안가는 것이고 그래서 백장청규(百丈淸規)에도 역시 조죽중재(朝粥中齋)라, 아침에 죽을 먹고 낮 한 때 재를 먹고 말입니다. 오후(午後)는 안먹는다는 말입니다. 작업(作業)을 할 때는 우리가 조금 간식(間食)을 먹습니다만 그러나 오후불식(午後不食) 이것이 원칙입니다. 원칙이나 아! 지금 사람들은 근기(根機)가 약하니까 그래서는 안된다. 지금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에 비해서 근기가 절대로 약하지 않다고 봅니다. 두뇌(頭腦)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훨씬 더 영리합니다. 지금 장수(長壽)하는 것을 보십시오.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 였는데 이제 한국(韓國)도 평균 수명이 70이라고 하자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때에 지금 사람들이 근기가 절대로 약하지가 않습니다. 다만 자기 몸 관리를 너무 과다하게 합니다. 너무 많이 먹고 함부로 합니다. 따라서 어디가서 공부하던지 간에 우리 불자님들이 금생(今生)에 성불(成佛)할려고 마음 먹을 때는 꼭 음식(飮食)은 항시 명심해서 우리가 염두에 두고 부처님 계율(戒律)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겁초(劫初)에 인간(人間)들은 그때는 음식(飮食)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 필요가 없는 것인가? 겁초 인간은 몸이 광명(光明)이기 때문에 이런 몸이 아니기 때문에 그때는 음식의 섭취가 필요치가 않단 말입니다. 차근차근 오염(汚染) 되어서 이렇게 각 원소 집합체인 세포(細胞)가 우리 몸을 이루면서부터 이제 에너지 소모가 되므로 보충하기 위해서 음식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것도 꼭 필요할 정도로 도인(道人)들이 우리 생리(生理)를 관찰(觀察)해서 계율(戒律)을 세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법문(法門)에 대해서 어떤 면에 대해서든 생리(生理)나 심리(心理)나 모두 다 전폭적인 시비(是非)를 합리적인 의미를 가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먼저 선오후수(先悟後修), 돈오돈수(頓悟頓修) 말입니다. 먼저 이것 저것 모두가 다 타성일편(打成一片) 하나로 모아버려야 그래야 마음이 열어집니다. 우리가 '마음 열어버려라' 하지만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 모르면 마음이 못 열어집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오직 물질(物質)이 아닌, 공간성(空間性)도 시간성(時間性)도 또는 인과율(因果律)도 초월(超越)해 버리면 결국은 다 마음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입니다. 이것 뿐만 실상(實相)인 것이고 딴 것은 모두가 다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입니다. 이렇게 느끼시고 공부하시면 종전에 몸이 좀 거북했다 하더라도 정말로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꼭 가볍게 풀릴 것입니다. 설사 우리 집안의 영가(靈駕)가 와서 우리를 침노한다 하더라도 그냥 제도(濟度)가 된단 말입니다. 정말로 영가 몸도 비(空)고 - 분명히 모든 것이 다 빈(空) 것인데 - 확실히 비었다고 믿고 되뇌이고 공부를 한다면 자기 주변의 영가도 제도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공부에 진일보(進一步)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 않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
출처 - http://bowonsa.net/bo/board/view.php?menu_id=78&no=126&start=80&Mode=&how=&S_date=&S_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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