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진여眞如-대승기신론과 관련하여

수선님 2020. 1. 12. 12:14

불교에서 의미하는 중생심의 근원이 되는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

내용

진여는 우주 만유의 실체로서 현실적이며 평등 무차별한 절대의 진리로 불교의 여러 학파에서 끊임없이 연구되어 왔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에 입각하여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가 주장한 설을 널리 채택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일심(一心)을 참되고 한결같은 본체적인 면과 변화하고 움직이는 현상적인 면으로 나누고, 이를 심진여(心眞如)와 심생멸(心生滅)이라 하였다. 그리고 참되며 한결같은 진여는 말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이언진여(離言眞如)를 간략히 밝히고, 이어서 그래도 감히 말로써 설명해 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을 밝힌 의언진여(依言眞如)의 장을 두었다.

본체로서의 진여가 과연 절언인가 부절언(不絶言)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있을 수 있고 논쟁이 전개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진여를 사(事, 現象)에 대한 이(理, 본질적인 원리)로 이해하고, “이 이(理)는 언설을 절한 것도 아니고 언설을 절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理)는 언설을 절한 것이며 또한 언설을 절하지 않은 것이기도 함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원효는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에서 이언진여에 대한 몇 가지 점을 말을 빌려 밝히고 있다.

① 진여는 전체성·보편성·영원성을 지닌 대총상(大總相)이며, ② 진여는 참된 이해를 낳게 하는 원리원칙으로서의 법(法)이고, ③ 진여는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되며, ④ 일심을 그 체(體)로 하고 있고, ⑤ 불생불멸(不生不滅)로서 시간성을 초월하고 있으며, ⑥ 망념(妄念)을 떠나 있기 때문에 말로써 설명될 수 있는 것도, 문자와 개념으로 알릴 수 있는 것도, 분석적 사변이 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진여에 대한 두번째 설명은 말에 의지하는 방법이다. 말에 의거한 진여 설명은 부정으로서의 공[如實空]과 긍정으로서의 공[如實不空]으로 다시 분류된다. 궁극적인 실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여실공을 세웠고, 진여의 자체에는 완벽한 상태의 공덕이 갖추어져 있음을 밝히기 위하여 여실불공을 세운 것이다.

즉, 여실공의 진여는 유상(有相)도 아니고 무상(無相)도 아니며, 비유상(非有相)도 비무상(非無相)도 아니라고 하여 일체의 상대적인 모습을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여실불공으로서의 진여는 영원하여 불변하고 공평무사한 법이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실불공의 진여가 깨달은 사람에게만 온전히 드러난다는 사실을 원효는 상기시키고 있다.

진여에 대한 세번째의 설명은 진여를 본체[體]와 속성[相]과 작용[用]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진여의 체는 보이지 않는 초험적인 것이고 선험적인 것이다. 그것은 모든 현상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진여 그 자체이며, 본각(本覺)이기도 하다. 이 체의 모습은 범부라 하여 주는 일이 없고 부처라 하여 늘어나는 것이 아니며,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것이라고 한다. 진여의 상은 진여한 마음이 갖는 완벽한 덕성이다.

그 덕성이란 ① 대지혜이고 광명이며[大智慧光明], ② 모든 대상세계를 남김없이 두루 비춰 주며[偏照法界], ③ 진실한 인식이며[眞實識知], ④ 그 본래의 성격은 청정한 마음이며[自性淸淨], ⑤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유자재하고 더러움이 없으며[常樂我淨], ⑥ 청량하고 변화됨이 없으며 자재로운 것이다[淸凉不變自在].

이 여섯 가지 진여의 속성들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본체를 세속적인 표현을 통하여 열거한 예에 불과하다고 원효는 단서를 붙였다. 진여의 용은 진여심의 작용면에의 위대성이다. 이 용에 대한 설명은 본각을 회복해서 가진 부처를 내세워 설명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진여의 용이 무슨 까닭으로 있게 되는가를 주로 다루고 있다.

즉, 진여의 작용은 ① 제불여래(諸佛如來)가 본래 부처가 되려고 수행하는 단계에서 대자비를 발하여 갖가지 바라밀(波羅蜜)을 닦아 중생을 포섭하여 교화하고, ② 대서원(大誓願)을 세워 무한한 겁(劫)을 통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모든 중생계를 해탈시킨다. ③ 일체의 중생을 자신의 몸과 같이 여기기 때문에 따로 중생관(衆生觀)을 두지 않는다. 그 이유는 중생과 자신의 몸이 진여이고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이다.

원효는 진여의 작용이 있게 되는 이 세 가지 중에서 ①을 결과가 나타나게끔 하는 행위, 즉 본행(本行)이라 하였고, ②를 본래의 소원[本願], ③을 위대한 능력을 지닌 대방편(大方便)이라 하였다. 그리고 대방편의 지혜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없애고 본래의 법신(法身)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과 불가사의한 여러 가지 작용이 저절로 나타나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 작용은 참되고 한결같아 두루 미치지 않는 데가 없으며, 중생이 보고 듣는 데 따라서 그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결국 진여의 작용은 대방편의 지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초월자적인 존재가 힘없고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베푸는 그 무엇이 아니라 중생심 그 자체의 작용이며, 진여한 중생심 속에서 스스로가 어떻게 보고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서 발현되는 작용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원효의 진여에 대한 주장은 중생의 본체를 설명하는 데 있어 후대의 우리 나라 불교계뿐만 아니라 중국 및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시산회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yc012175/15944758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