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원효대사(元曉大師)

수선님 2020. 2. 9. 12:33

원효대사


원효(617~686)는 한국 불교사에 길이 남을 학자이자 사상가이다. 또 파계와 이적을 보인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고승으로 널리 알려져 이다. 성은 설씨이고 원효는 법명이다.

소년시절에는 화랑이었으나 도중에 깨닫은 바가 있어 출가할 것을 결심하였다. 648년 황룡사에서 중이 되어 각종 경전을 연구하고 수도에 정진 하였으나 특정한 스승을 모시고 경전을 공부하지는 않았다. 나이 34세 때 풍조에 따라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으나 육로로 고구려를 통과하다가 잡혀 귀환하였다. 십년 뒤 다시 의상과 함께 해료로 당나라로 가려고 하였으나 여행 도중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후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로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있던 요석공주에게서 아들 설총을 얻었다. 이것이 원효의 나이 39세에서 44세 사이에 일어난 일이 었다.

그는 어느날 한 광댇가 이상한 모양을 한 큰 표주박을 가지고 춤추는 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 깨달은바가 있어 화엄경의 이치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노래에 담았다.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는다' 는 내용의 '무애가'(無 歌)이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친 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였으며 술집과 기생집도 드나들었다. 쇠칼과 쇠망치를 가지고 다니며 돌에 글을 새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가야금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는 또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명산대천을 찾아 좌선을 하는 등 기이한 해동을 서슴치 않았다.

한번은 왕이 100명의 고승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었는데 다른 승려들이 원효가 품행이 방정치 못하다고 헐뜯어 초청 대상에서 제외된 일이 있었다. 이후 왕비가 종기를 앓게 되었는데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효과가 없자 왕은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드려다. 한 무당이 말하기를 "다른 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약을 구하라" 고 하였다. 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 사신 일행이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자 바닷속에서 한 노인이 나와 다 흩어지고 순서 뒤바뀐 종이뭉치를 내밀며 "보살행을 설명해주는 불경이오. 원효대사에게 청하여 소(소)를 짓게 하여 이를 풀이하면 왕비의 병이 나을 것이오" 하고 일러주었다.

그리하여 원효가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식서를 지어 황룡사에서 설법하게 되었다. 그의 강설은 도도하고 질서정연하였으며 오만하게 앉아 있던 고승들의 입에서 찬양하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강설을 끝낸 원효는 "지난날 나라에서 백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그 안에 끼일 수 없더니. 오늘 아침 단 한 개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마당에서 나 혼자 그 일을 하는 구나"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고승들은 부끄러워하며 깊이 뉘우쳤고, 원효는 그뒤 조용한 곳을 찾아 수도와 저술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에는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부 240여권이나 된다. 특히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론]은 여간한 고승이 아니고서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작이다.

또한 그는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르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종파주의적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다.

그것을 오늘날 우리는 '화쟁(和諍)사상' 이라 부른다. 이것은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의 실천을 강조하는 일심(一心)사상, 그리고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는 뜻의 '무애사상'과 함께 원효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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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불기(元曉佛 )

성사(聖師) 원효는 속성(俗性)이 설씨(薛氏)로 그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 하는데,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묘가 있다. 아버지는 담날내말(談捺乃末)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지금의 장산군<章山郡>이다) 남쪽 불지촌(佛地村)의 북쪽 율곡(栗谷) 사라수(娑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는데, 불지란 마을 이름은 혹 발지촌(發智村:세속에서는 불등을촌<佛等乙村>이라 한다)이라고도 한다.

사리수라는 것은 세간에서 말하기를, 법사의 집이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임심을 하여 만삭일 때 마침 이 골짜기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을 하게 되자 황급히 나머지 집으로 돌아 가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놓고 그 안에서 거처했으므로 인하여 그 나무를 사라수라고 불렀다. 그 나무의 열매 역시 예사 것과는 달라 지금까지도 사라율(裟羅栗)이라고 한다.

옛부터 전해오기를, 옛날 한 절의 주지가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마다 밤 두 개씩을 주자 종이 관아에 호소했다. 관리가 괴이하게 여겨 밤을 가져다 조사해보니 한 개가 사발 하나에 가득 차므로 이에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했기 때문에 율곡이라 이름한 것이다.
법사가 이미 출가하고서는 그 집을 희사하여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고, 나무 옆에다 절을 세우고 이름을 사라사(裟羅寺)라 하였다.

법사의 행장(行狀)에는 이르기를 [경사(京師) 사람이다] 하였으나 이는 조고(祖考)를 따른 것이며, 당승전(唐僧傳)에는 이르기를[본래 하상주(下湘州)사람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인덕(麟德:당 고종의 연호) 2년 사이에 문무왕(文武王)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십량주(십良州)를 설치하였는데 하주는 바로 지금의 창령군(昌寧郡)이다. 압량(押粱郡)은 본래 하주에 속한 현이며,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인데 혹은 상주(湘州)라 쓰기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의 자인현(慈仁縣)에 속하니, 바로 압량에서 나뉘어진 것이다.

법사의 아명은 서당(誓幢)이고 제명(弟名)은 신당(新幢:당<幢>이란 것은 세속에서 모<毛>를 말한다)이었다. 처음에 어머니가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했는데 장차 출산을 하게 되자 오색 기운이 땅을 덮었으니, 진평왕 39년 인 대업(大業:수<隋>양제(煬帝)의 연호)13년 정축이었다. 나면서부터 영리하여 스승을 두지 않고 혼자 배웠는데 그의 유방(遊方)한 시말과 성대한 포교의 자취는 모두 당전(唐傳)과 행장에 실려 있으나 다 기록하지 못하고, 오직 향전에 실린 한 두가지 이상한 일만 기록한다.

대사가 일찍이 하루는 춘의(春意)가 동하여 거리에서 노래부르기를 [누가 나에게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주련가. 내가 하늘을 떠 받힐 기둥을 깍아 보련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때 태종(太宗: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그걸 듣고는 말하기를 [이 대사가 아마 귀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 듯하다.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막대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요석궁(瑤石宮: 지금의 학원이 이것이다)에 홀로 된 공주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불러오도록 했다. 궁리가 왕명을 받들어 찾아보니 이미 남산을 거쳐 문천교(蚊川橋:사천<沙川>인데 세속에서는 연천<年川> 또는 문천<蚊川>이라 부르며, 다리 이름은 유교< 橋>이다)를 지나고 있었다. 궁리를 만나자 원효는 일부러 물 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궁리가 대사를 찾아 궁궐로 인도하여 옷을 갈아 입히고 말리게 하므로 그곳에서 유숙하였는데, 공주가 과연 임신하여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태어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으니, 신라의 10현(賢)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방음(方音)으로 중국과 신라의 속물명(俗物名)을 통회(通會)하고 6경(經). 문학을 훈해(訓解)하여, 지금도 해동에서 경을 공부하는 자들의 전수(傳受)함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원효가 계율을 지키지 않고 설총을 낳은 이후부터는 속복(俗服)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호하였다. 우연히 어릿광대가 굴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였으므로 그 형상으로 도구(道具)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의 [일체(一體) 무애인(無碍人)은 한결같이 생사를 벗어난다]라는 구절로써 무애라 이름하고, 인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포시켰다.

일찍이 이를 지니고 수많은 부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화영(化詠)하고 돌아왔다. 그래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까지도 모두 (佛陀)의 이름을 알고 나무의 칭호를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크다고 하겠다.

그가 출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佛地)라 하고 절의 이름을 초개(初開)라 하였으며 스스로를 원효라 부른 것은 대개 불일(佛日)을 처음으로 빛냈다는 뜻이다. 원효 역시 방언인데, 당시 사람들이 모두 향언(鄕言)으로 새벽이라는 뜻으로 일컫는다.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편찬하다가 제4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절필(絶筆)했다. 또 일찍이 공무로 인해 몸을 백송(白松)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모두 위계(位階)의 초지(初地)와 같다고 하였다. 또 해룡(海龍)의 인도에 따라 노상에서 조서(詔書)받고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으면서는 필연(筆硯)을 소의 뿔 사이에 놓고 했다 하여 각승(角乘)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또 본각(本覺)과 시각(視覺)의 은미한 뜻을 나타낸 것이며, 대안법사(大安法師)가 와서 배열하여 종이를 붙였으니, 이 역시 음을 알고 화창(和唱)한 것이었다.

입적(入寂)하자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진용(眞容)을 빚어 분황사에 안치하고는 부모를 잃은 슬픔의 뜻을 경모하여 표하였는데, 설총이 옆에서 예(禮)를 올리니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아 지금까지도 돌아본 채있다. 원효가 일찍이 거주하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이 찬한다.

각승(角乘)은 처음으로 삼매축(三昧軸)을 열고,
무호(舞壺)는 마침내 만가(萬街)의 풍습이 되었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잠을 자고 가니,
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보는 그림자 쓸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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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펼친 불법해석 `백미'...인도-중국 고승들 교과서역할 ##.

「문화유산」을 「문화재」와 구별하고자 한다. 모든 문화재는-석탑이 나 불상과 같은 「유형」문화재든 혹은 판소리나 살풀이춤과 같은 「무형」 문화재든-가시적인 것이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유산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문화재는 그 대상을, 혹은 그 기능 을 보유하고 있는 개인이나 기관의 전유물이 되기 마련이다. 문화유산 은 그러나 그를 계승한 겨례의 모두가 공유할 수도 있다.

예컨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 원본」은 문화재이지 만 우리들이 누구나 쓰고 있는 한글은 문화재는 아니고, 우리의 자랑 스런 문화유산이다.

그처럼 우리의 민족유산 가운데엔 한국문화형성에 근원적인 활력소 가된 「사상」도 있다. 단순한 문화재의 탐방이 아니라 문화유산을 더듬 어보려는 이 「기행」은 그래서 오다가다 눈에 보이지 않은 「사상」의 계 곡도 찾아가 보고자 한다.

지난 수천년동안 한국민족과 한국문화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이 있다면 불교사상과 유교사상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무릇 종교는 언제나 위대한 예술의 산모이자 보모의 구실을 해왔 다. 그뿐만 아니라 종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로 「사상」 그 자체의 원동력이 되었다. 기독교를 떼어놓고 서양사상의 발전을 생각할 수 없 다. 한국사상과 불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육당 최남선은 단적으로 「조선인은 불교로 말미암아서 철학을 알았다」고 적고 있다. 「극히 실 천적인」 동시에 「극히 사변적인」 불교의 내용 때문이다.

삼국통일 시기의 신라에 살던 원효(서기 617∼686), 속명 설서당은 「첫새벽」을 뜻하는 그의 법명 그대로 비단 한국의 불교사상만이 아니 라 철학사상 일반에 있어서도 큰 새벽을 연 밝은 별이었다.

원효의 전기는 도대체 「사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최고의 수준에 서 전범적으로 예시한 삶처럼 보인다.

만일 사람을 「주의자」와 「자유인」의 두 범주로 나눌 수가 있다면, 또는 계율을 지키는 사람과 계율을 벗어나는 사람으로 구별할 수가 있 다면 원효는 철두철미한 자유인이요, 계율주의자가 아니라 파계자이 다. 그는 남들이 하는 데로 순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중심에서 이탈한, 상괘를 벗어난, 그런 의미에서 「엑센트릭」한 기인처럼 보였다.

당시 당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서는 특히 김춘추가 당 에 다녀온 뒤 당의 의관까지도 모방하는, 외래문물 숭상풍조가 귀족사 회에 풍미하고 있었다. 원효도 한때는 의상과 더불어 당에 유학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입당구법(당에 들어가 불법을 공부하는 일)의 길목에 서 한밤중에 그런 줄도 모르고 무덤 속에서 잠자다 목이 말라 해골 썩 은 물을 달게 마시고 다음날 홀연히 큰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했 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결과적으로 원효가 「해외파」가 되기를 단념하고 「국내파」로 머물게 되면서 신라 불교는 외래사상의 수입단계 를 지양하고 독자적인 사상을 얻어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돌아온 원효는 분황사에 틀어박혀 좌선수도하면서 불경공부에 몰입 하게 된다. 그는 한편으로 차디찬 내성적인 침잠의 생활을 하는가 하 면 다른 한편으론 거리에 나가 누구하고도 어울리는 호탕한 생활을 하 기도해서 당시의 승려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고 경원하게 되었다. 속세 의 사람들이 원효를 좋아한 것과는 달리 승려들이 그를 싫어한 까닭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계율을 무시하고 기행을 일삼는데도 불구하고 교리에 관한 학식과 설법에서는 아무도 그에게 맞설 수가 없었으니 말 이다.게다가 원효는 그의 용모까지 출중하였다 하니….

마침내 원효는 태종무열왕의 둘째딸로 혼자된 요석공주와 파계하여 아들을 얻게 된다. 엑센트릭한 원효 전기의 한 클라이막스이다. 그러 나 그 파계의 소생이 한국 유교의 문묘에 배향된 십팔유현중에서도 첫 번째로 모시고 있는 설총이라니 만만치가 않다.

파계승 원효는 그로부터 승복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낮 춰 부르며 대중교화에 나섰다. 당시의 승려들이 수도 경주의 대사원에 서 귀족생활을 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효는 지방 마을의 길거리를 두루 누비며 무애가를 지어부르고 가무와 잡담으로 서민들 사이에 끼 어들어 불법을 설법하는 교화작업에 힘썼다. 무애가는 화엄경의 「일절 무애인/일도출생사」(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생사를 벗어 나리로다)라는 귀절에서 따온 노래이다.

그러나 이처럼 대중교화의 행적이 있은 뒤에 「소성거사」는 다시 「원 효사상」으로 돌아가 혈사에서 학문적인 구법에 침잠하였다. 그는 행동 인이자 동시에 사색인이요, 거리의 사람이자 동시에 서안의 사람이었 다. PC도 타자기도, 아니 볼펜도 연필도 없었던 옛날에 원효가 1백여 종 240권의 책을 저술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분량이다. 그중에서 지금 은 20부 22권의 저서만이 1천3백년의 장구한 세월을 뚫고 잔존하고 있 다.

그 가운데는 소의 두 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집필했다는 저술배경 에 일화도 많은 「금강삼매경소」(금강삼매경소), 원효사상의 중심 개념 인 「화쟁」을 풀이한 「십문화쟁론」 등도 다행이 남아있다. 그러나 원효 철학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주는 연구저작으로는 「대승기신론소」를 듣 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대승기신론」는 「 금강경 」 「원각경」 「능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 의 근본경전인 사교과에 속하는 논서이다 . 마명의 저작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치않고 산스크리트 원본은 발견되지 않은채 한역본만 유통 되고있다. 그 내용은 치밀한 구성, 간결한 문체, 독창적인 철학체계등 모든 면에서 불교문학사상 최대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대승기 신론」은 당시 인도에서 대립하고 있던 중관파와 유가파(유식파)의 양 대 불교사상을 지향, 화합시켜 「진과 속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진속 일여), 「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니라」(염정불이)는 사상을 나타낸 논서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는 현실세계(속)에서 깨달음의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수행함으로써 완성된 인격(진)을 이룩할수 있 으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염오한 단계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 「진속일여」「염정불이」의 사상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을 대하자마자 스스로의 삶과 학문의 목표와 너 무나 맞아떨어짐에 감명을 받아 기존의 논의에관한 9종의 연구서를 내 놓았다. 그 가운데서 4권(대승기신론소 2권, 대승기신론별기<별기>2권) 이 현재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으나 나는 그를 이해하고 해석할 위치에 있지않다.다만 원효의 이 저서가 불교세계, 또는 세계 불교의 교판(부 처의 가르침을 분류하여 해석한 교상판석의 준말) 역사상 차지하는 자 리만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국가나 종파를 초월하여 널리 유포된 「대승기신론」에 관해서는 수 백여종의 주석서들이 나와있으나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기신론 삼소」라 일컫는다.중국 정영사의 혜원(서기 523∼592)의 주석서인 「정 영소」, 신라의 원효대사의 주석서인 소위 「해동소」, 그리고 중국 화엄 학의 대가 법장(서기 643∼712)의 「현수소」가 곧 그것이다.

기신론의 3소 중에서도 원효의 「해동소」는 혜원의 「정영소」를 그 내용에 있어 단연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신론」 주석의 백미 라 일컫는 법장의 「현수소」는 「해동소」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대 목이 허다하며 원효의 견해를 표현만 바꿔 재정리한 면도 적지가 않 다. 요컨대 「현수소」는 「해동소」가 있어서 비로소 그를 토대로 저술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의 징관이 스승 법장으로부터 「해동기신소 의」를 배웠다고 증언하고 있음을 「송고승전」도 밝히고 있다.

원효는 젊은 시절에 도당유학을 단념하고 국내에 머물었으나 그의 학문과 사상은 국경을 넘어 중국, 일본, 인도로 멀리 세계화되었다.

「불출호 지천하」란 노자의 말과 같이 그는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능 히 세계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최정호 ·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