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과 수행

관법(觀法)

수선님 2020. 1. 12. 12:16

 

관법(觀法)

 

Ⅰ. 불교(佛敎) - 수행(修行)의 종교(宗敎)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다. 불교는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와는 달리 수행을 중심으로 하면서 자력적(自力的) 구제(救濟)와 타력적(他力的) 구제(救濟)원리의 조화를 함께 추구하는 종교이다.

현재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각 종파마다 각기 다른 수행법인 참선, 간경, 염불, 발원, 참회, 예불, 사경, 지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실천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실천의 궁극적 목적은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깨달음의 존재로 전환되는 것이다. 불교의 수행은 단순한 닦음이나 앎이 아니라 바뀌는 것이요, 깨달음의 존재로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범부(凡夫)에서 성인(聖人)으로의 전환인 것이다. 「알에는 나비가 없으나 적절한 여건을 충족시켜주면 알에서 애벌레로,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그 번데기에서 나비로 전환되듯이」

그러나 그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소승불교(小乘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가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으며, 대승불교에서도 법상(法相), 삼론(三論), 천태(天台), 화엄종(華嚴宗)과 같은 현교(顯敎)는 각기 그 교의와 닦고 증득하는 방편이 있고, 선종(禪宗)에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정토종(淨土宗)에서는 왕생성불(往生成佛)을 밀교(密敎)에서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말하는 것이 다르다. 그러므로 이른바 백천방편(百千方便)과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이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 이래로 깨달음의 길로 가려는 수많은 중생의 노력이 끝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제 그 처절했던 수행법의 행적을 더듬어봄으로써 소모임의 주제인 관법(觀法)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관법이란 마음에 전심하여 부처나 법의 일정한 대상을 관찰하고, 염(念)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불교의 실천 수행법이다. 사리를 마음에 떠올려 밝게 하여 마음의 움직임을 막고 그 결과로 생기는 정신집중에 의해 모든 법의 참된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법이란 실천수행을 의미하며, 관(觀)․수관(修觀)․관념(觀念)․관상(觀想)․관행(觀行) 등도 비슷한 말이다. 일상관(日想觀)․월륜관(月輪觀)이나 구상관(九想觀) 처럼 갖가지 구체적인 생각을 마음에 떠올려 관하는 초보적인 것에서부터, 구체적인 것에 의탁하여 깊은 교의(敎義)나 불교의 이치를 관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류가 있으며, 그 내용도 극히 다양하다. 예를 들면, 호흡의 숨을 세는 것에 의해서 마음을 통일하여 흐트러진 마음의 혼란을 제어하는 수식관(數息觀), 시체의 부정함을 관찰하거나 항상 마음에 그 변화의 상태를 생각해 내는 것에 의해서 애욕적인 탐욕의 마음이 높아짐을 억제하는 부정관(不淨觀), 아름답고 우아한 것을 관찰하고 항상 마음에 생각하는 것에 의해서 노여움의 마음이 높아지는 것을 억제하는 자비관(慈悲觀), 모든 존재가 인연에 의해서 성립되고 있음을 관찰하여 실제적인 선입견이나 억견(臆見)을 버리고 올바른 깨달음에 도달하는 인연관(因緣觀), 아미타불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 이름을 외우는 것에 의해서 죄에 대한 두려움에서 빠져 나와 청정하고 편안한 심경에 이르려고 하는 염불관(念佛觀) 등이 있다.

 

 

Ⅱ. 초기불교의 수행법

1. 붓다의 수행법

 

 

고타마 싯타르타는 정반왕(淨飯王)의 아들로 태어나 물질적 풍요 속에 젊은 시절을 보냈으나 현세적인 삶의 만족보다는 인간의 근본 문제인 생노병사(生老病死)에 깊은 사색을 하던 중 모든 부귀와 영화를 뒤로하고 태자라는 신분마저도 버린 채 무상(無上)의 도(道)를 얻기 위해 사문(沙門)의 길을 걷는다.

그는 숲 속에 자리를 잡고 깊은 명상에 잠긴다. 그러나 이래가 지나도록 얻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완전한 수행자가 된 그는 스승을 찾아다닌다.

처음으로 ‘박가바’라는 선인을 찾아가 육체적 고행법을 배운다. 그러나 고타마 싯타르타의 목적은 천상에 태어남이 아니라, 생사의 고통을 떠남에 있었기에 다른 스승을 찾아야했다.

태자는 ‘알라라 칼라마’라는 선인을 찾아 아무 것도 없다고 관(觀)하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배워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싯타르타는 다시 그 당시의 최고의 수행자로 알려진 욷타카 라미풑다를 찾았다. 그에게서는 상념(想念)이 있는 것은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관(觀)하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서도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깨달아야겠다는 비상한 각오로 피나는 육체적 고행을 육 년간이나 지속했으나 고행에 대한 회의만이 생겨나고 고행도 결코 정도(正道)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태자는 당시에 유행하던 수행(修行)의 이조류(二潮流)인 수정주의(修正主義)와 고행주의(苦行主義)를 다 버렸다.

태자는 지나치게 지쳐버린 몸을 회복하기 위하여 니련선하(尼蓮禪河)에 목욕을 한 후 근처에 사는 ‘수자타’라는 소녀가 주는 우유죽을 마셨다. 기운을 차린 태자는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어린 시절 쟝부 숲 속에서 명상하고 정신을 통일하여 사선(四禪)에 도달한 경험을 기억해내고 보리수 아래에 단정히 앉아 깊은 명상에 들게된다. 그리하여 칠일 째 되는 날 찬란한 샛별이 반짝일 때 세상의 모든 이치는 환히 그 앞에 드러났다. 드디어 무상(無上)의 도(道)를 얻어 부처를 이룬 것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두 극단을 떠난 깨달음, 즉 중도(中道)의 이치를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붓다는 출가 후 교법(敎法)을 배워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라 수행(修行)을 통하여 깨달음을 성취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붓다의 모든 법은 수행의 결과로서 체득(體得)된 것이다.

 

 

2. 초기 불교수행법 속의 관법

 

 

초기불교에 있어서 수행의 중점은 자신의 심리를 제어하는 것에 있었다. 어떤 심리에도 제약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대상을 그대로 볼 때 진리가 구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자신이 갖고 있는 편견과 집착을 제거하는 중점을 둔다. 번뇌는 본래 청정한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에 이것을 제거하면 본성인 지혜가 그대로 현현(顯現)하여 진리 자체를 체득한다는 것이다. 번뇌에 의해서 더럽혀지지 않은 원래의 마음을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하는데 이와 같이 번뇌를 벗고 자성청정심에서 얻는 경지를 초기불교에서는 피안(彼岸), 윤회(輪廻)에서의 해탈(解脫), 부사(不死), 안은(安穩)의 경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부사(不死)는 윤회(輪廻)로부터의 해탈(解脫)을 의미하며 이러한 경지는 불교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인도사상계의 해탈관이었다.

붓다가 본 생노병사(生老病死)의 허물이란 것도 편견과 집착을 말하며 이는 다시 말해 무명(無明), 갈애(渴愛), 아(我), 아만(我慢) 등의 자성청정심을 흐리게 하는 속박이다. 이 속박들을 관하여 붓다는 무상의 안은(安隱) 열반을 얻은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었던 붓다의 수행법의 특징은 무엇인가?

붓다 수행의 특징은 한 순간의 완전한 성취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성취 아님도 아닌 것에 있다. 피안(彼岸)․해탈(解脫)․안은(安穩)의 성취라는 것은 보리수 아래의 성도(成道)에 의해서 성취한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지만, 이러한 경지는 6년의 고행기간 동안에도 체험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붓다가 내세운 중도행(中道行)이란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녹야원(鹿野苑)에서 행한 최초의 설법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모든 욕락(欲樂)에 탐착하는 것은 하열(下劣)한 범부(凡夫)가 행할 바로서 거룩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짓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하는 것도 그 자체가 괴로움이며 거룩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짓이다. 이 양 극단을 여읜 중도(中道)야말로 여래(如來)가 깨달은 바이다. 이것은 눈을 뜨고 지식을 열어, 적정(寂靜)․증오(證俉)․정각(正覺)․열반(涅槃)에 이르게 하는 도(道)이다. 비구여! 무엇을 일컬어 여래(如來)가 깨달은 중도(maijhima patipada)라고 하겠는가...... 이것은 곧 8지(支3)의 성도(成道)이니,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이니라.

 

 

이는 당시 수행법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으로, 양극단(兩極端)이라 함은 육사외도(六師外道)중 쟈이나교의 고행주의와 푸라나․아지타의 쾌락주의로서 붓다는 이 두 가지를 다 버린 것이다. 이는 또한 태자 시절에 경험한 쾌락의 생활과 출가 후의 고행의 경험에서 체득된 것이라 더욱 귀중한 득과(得果)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중도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붓다가 중요시한 것은 의식작용(意識作用)의 지멸(止滅)과 오관(五官)의 통제이다. 즉 수행자가 끊어야 할 심리로서 들고 있는 것은 kodha(怒), raga(欲情), taha(渴愛), mana(自意識), kopa(憤怒), vitakka(辱), vicara(伺), lobha(貪), dosa(瞋), moha(惠), middha(隨眠), kama(愛欲), mivarana(五蓋) 등이다. 말하자면 감관(感官)에 의한 감애(感受)와 그것에 의해서 초래되는 생각이다.

붓다가 오관(五官) 즉 오근(五根)의 통제를 수행에 있어서 중시한 것은 오관은 외계(外界)와의 접촉기관이므로 이를 방일(放逸)하면 마음이 혼란 되기 때문이었다. 오관의 통제에 대해서는『사문과경(沙門果經)』을 위시하여 『아함』과 『니카야』의 도처에 설명되고 있다. 예를 들면,

 

 

眼으로 色을 보되 그 相에 집착하지 말고 그 味에 집착하지 말라

 

 

라고 하여 이(耳)․비(鼻)․설(舌)․신(身)의 성(聲)․향(香)․미(味)․촉(觸)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형식으로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이는 견(見)․문(聞)․각(覺)․지(知)에 대하여 욕심과 집착을 내지 말라는 것인데 이를 불교용어로는 섭근(攝根 ; guttindriya)라고 한다. 붓다의 섭근법(攝根法)의 특징은 외계의 사물을 보지도 느끼지도 않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초기불교 수행의 핵심은 중도행(中道行)을 기반으로 한 의식의 지멸(止滅)과 감관(感官)의 통제, 아욕(我欲)의 법욕(法欲)으로의 전의(轉依)에 의한 심리적 안정의 추구였다.

이를 위해 심신을 닦는 수행법은 교화할 대상이 다양한 만큼 여러 가지로 시설되고 있다. 붓다가 초전법륜(初轉法輪)에서 밝히고 있듯이 올바른 지혜를 체득하는 길은 팔정도(八正道)의 실천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하였다. 이는 초기불교에서는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으로 정리될 수 있다.

삼학(三學)이란 모든 행위에 있어서 악(惡)을 버리고 선(善)을 키워 몸을 보호하는 계율(戒律)로서의 계학(戒學)과, 일체 마음의 경동(傾動)을 없애고 고요하고 편안한 경지를 나타내는 법으로서의 정학(定學)과, 모든 번뇌를 없애고 진리를 철견(徹見)하려는 법으로서의 혜학(慧學)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 계(戒)․정(定)․혜(慧)․삼학(三學)은 실천 수행의 총괄적 보편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니원경(般尼原經)』에는

 

 

만약 계․정․혜의 행(行)을 갖추지 못하면 윤회(輪廻)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갖추면 마음이 저절로 열리어 문득 천상(天上)․인간(人間)․아귀(餓鬼)․축생(畜生)․지옥(地獄)의 세상을 보게되고 온갖 중생들의 생각하는 바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총괄적이고 보편적인 것에 따른 행법(行法)도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 많은 수행의 행법(行法) 가운데에서도 특히 그 하나의 주된 과정으로 되어 있는 것이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이라는 것인데 초기불교시대의 출가자(出家者) 들이 행하였던 전문적인 수행법이다.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이란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혹은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堤分法)이라고도 하는데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신족(四神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를 합한 37가지의 행법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모두 불교의 목적인 보리(菩提)를 얻게 도와주는 법이란 뜻에서 일컬어지는 말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수행자가 정학(定學)의 수습(修習) 이전에 먼저 계학(戒學)을 닦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즉 수행자는 불(佛), 법(法), 승(僧) 삼보에 귀의하여 믿음을 확고히 한 연후에 계(戒)를 몸에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를 지켜야만 심신이 안정되기 때문에 선정(禪定)의 실수(實修)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선정의 실수에 들기 전에 그 예비적인 수행으로 호흡관(呯吸觀 ; 수식관), 부정관(不淨觀), 사념처관(四念處觀), 삼해탈문(三解脫門) 등 여러 가지 관법이 있다.

 

 

(1) 수식관(數息觀 ; 호흡관)

 

 

그러면 초기불교의 예비적 수행법으로 고른 호흡 즉 조식(調息)하는 것을 관하는 수식관(數息觀 ; 隨息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수식관은 안반염(安般念) 또는 입출식념(入出息念)으로 한역(漢譯)되고 팔리어로는 ānāpāna-smrtih이다. 이는 입식(入息)의 수나 출식(出息)의 수를 헤아려 이로써 마음을 한 경(境)에 거두어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산란한 마음을 없애고 바로 정(定)에 들게 하는 수행법(修行法)이다. 수식관(數息觀)에 대해서『잡아함경(雜阿含經)』과『안나반나념경(安那般那念經)』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을 닦아야 한다. 만약 비구가 안나반나념을 닦아 익히되 많이 닦아 익히면 심신(身心)이 쉬게 되고 각관(覺觀)이 있어도 고요하고 순수하며 분명한 생각을 익혀 만족하게 된다.

그래서 들이쉼을 생각하고는 그 생각을 잘 잡아매어 잘 관하고, 내쉼을 생각하여 그 생각을 잡아내어 관 한다. 짧고 긴 호흡이 몸에 들어올 때, 일체 호흡을 느끼고 몸에 들어오는 모든 호흡을 잘 관하고 몸에서 나가는 모든 숨에 대해서도 잘 관 한다. 또 모든 몸에서 작용하는 숨과 들이쉼을 관하고 모든 몸에서 작용하는 숨과 들이쉼에 대해서도 잘 공부하고 모든 몸에서 숨과 내쉼을 관하고 모든 몸에서 작용하는 숨과 내쉼에 대해서도 잘 관한다.

기쁘고 즐거울 때 심신(身心)의 작용에서 들이쉼과 내쉼을 느낀다. 마음의 작용 속에서도 들이쉼과 내쉼의 느낌을 잘 관한다. 또 그 느낌을 관하는 것을 관 한다. 마음 속 깊이 마음의 기쁨과 마음의 고요함과 마음의 해탈에서 들이쉼을 느끼고 그것들과 함께 들이쉼을 느끼는 것을 관한다. 또 마음의 해탈에서 내쉼을 느끼고 그것들과 함께 내쉬는 느낌을 관한다. 무상과 단절과 무욕에서 들이쉬는 숨이 없어짐을 관찰하고 들이쉬는 숨이 없어짐을 잘 관한다. 내쉬는 숨의 없어짐을 관찰하고 내쉬는 숨의 없어짐을 관찰하는 것을 관한다. 이것이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이다. 이것을 닦으면 신심이 쉬게 되고 각관이 있어서 고요하고 순수하며 분명한 생각을 닦아 익혀 만족하게 된다.

 

 

안나반나(安那般那) 호흡수련에 관한 위의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을 관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에 수반되는 모든 마음의 작용까지 모두 관찰하라는 점이다. 또한, 모든 작용을 관찰하는 당체(當體)도 관(觀)하라고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수식관을 비롯하여 모든 수행방법들은 심상(心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관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 심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영상(影像)들은 바깥의 경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변현(變現)된 것이다. 훗날 대승의 유식(唯識)에서는 이 모든 마음의 작용을 식(識)의 소변(所變)이라고 한다.

또한 위 경문(經文)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현상을 관하는 그것을 또 관하라고 한 점이다. 이는 실제로 수행을 해본 이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으로 항상 관하면서 그냥 그대로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붓다는 안나반나를 행하면서 모든 영상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하는 그 체(體)도 관하는 것이다.

붓다는 깨닫고 나서도 다양한 수행을 취하였고 수식관을 통해서도 성인(聖人)․신(神)․범(梵)․유각(有覺)․무각(無覺)․여래(如來)의 세계를 성취할 수 있으며, 그 세계를 호흡의 관찰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완결된 해탈도(解脫道)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수식관이 보다 높은 차제의 수행으로 가는 징검다리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수행법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니카야』의 경문(經文)을 참고해 보면 안나반나념을 통해서 초선(初禪)․이선(二禪)․삼선(三禪)․사선(四禪)에 들고 숙명통(宿命通)․천안통(天眼通)․누진통(漏盡通)의 삼명(三明)을 깨닫고, 사제(四諦)를 깨닫고, 해탈을 성취하고 해탈했음을 아는 해탈지견(解脫知見)을 성취했다고 한다.

 

 

(2) 사념처관 (四念處觀 ; 수식관, 부정관, 백골관)

 

 

호흡법외에도 여러 수행법이 있다. 이들 수행법들은 삼십칠도품에서 일정한 순서로 등장한다. 즉 사념주(四念住) 또는 사념처(四念處, smrtyupasthānāni,satipatthānā)․사정근(四正勤,samyakprahānāni,sammāppadhānā)․사신족(四身足;rddhipādāh, iddhipādā)․오근(五根, indriyāni)․오력(五力, balāni)․칠각지(七覺支, bodhyanhāni,bojjhangā)의 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때때로 팔정도(八正道, aryāstāngamārgah, ario atthangiko maggo)도 언급된다. 이 중 초기경전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수행법이 사념처관(四念處觀)이다.

사념처관를 붓다가 어떤 수행법 보다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일까. 육신으로 이루어진 이 몸으로 모든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행하고 고집하므로 모든 중생들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를 맹목적으로 집착하여 출세간의 도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붓다는 경전 곳곳에서 몸(身:kāyah)은 부정하다고 관하고, 느낌들(受:vedanāh)은 고(苦)라고 관하고, 마음(心:cittam)은 무상(無常)하다고 관하고, 사물들 또는 관념들(法: dharmāh, dhammā)을 무아(無我)라고 관하는 사념처(四念處)를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육신의 구성요소를 관하여 수행의 틀로 삼았으므로 사념처관을 신관(身觀)이라고도 한다. 사념처(四念處)에 대한 『아함』의 교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음에 사법(四法)이 있으니 사념처(四念處)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비구는 육신(肉身)을 신(身)으로써 관하되 게으르지 않게 정근하며 잊지 않고 억념(憶念)하며 세속의 탐욕과 근심을 버린다. 수(受)․의(意)․법(法)에 대한 관도 이와 같다.

 

 

사념처(四念處)에 대한 내용은『중아함(中阿含)』의『염처경(念處經)』에 자세히 설명되어 신(身)․수(受)․심(心)․법(法)의 사념처에 대하여 어떻게 관(觀)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신념처(身念處)는 관신부정(觀身不淨)이니 우리의 육신이 깨끗하다[淨]고 집착하는 것을 떠나 이 몸은 부정(不淨)하다고 관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상당히 깨끗한 것 인양 여겨 다듬고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어느 구석 어느 구멍하나 깨끗한 것이 없는 것이다. 가죽․살 ․피․고름․뼈 등의 물질이 합해져 이루어진 부정물(不淨物)이 이 몸이 아닌가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떻게 몸을 身念處와 같이 觀하는가. 비구는 行하면 행하는 줄 알고, 머무르면 머무르는 줄 알며, 앉으면 앉는 줄 알고, 누우면 누운 줄 알고, 자면 자는 줄 알고, 깨면 깨는 줄 알고, 자다 깨면 자다 깨는 줄 안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안의 몸(內身)을 觀하는 것처럼 觀하고 밖의 몸(外身)도 몸을 관하는 것처럼 하되 생각(念)을 오로지 하여 몸에 머물게 한다. (그러면) 知․見․明․達이 있게 된다. 이것을 비구가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고 하는 것이다

… 중 략 …

또한 비구는 몸을 몸 그대로 관한다. 비구는 아래윗니를 서로 붙이고 혀를 위쪽 잇몸의 천장에 붙이고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려 치유하고 끊고 멸하고 그치게 한다.

 

 

행(行)․주(住)․좌(座)․와(臥) 뿐만 아니라 잠을 잘 때까지도 관하라고 하며 안의 몸(內身)과 밖의 몸(外身)도 관하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위 경문(經文)에서는 혀를 입천장에 붙이는 구체적 좌선 행법까지 설명하고 있다. 안의 몸을 관하는 데에『念處經』에서는

머리털․터럭․손톱․살갗․가죽․살․힘줄․뼈․힘줄․심장․콩팥․간․허파․큰창자․작은창자․지라․위․똥․뇌수․눈꼽․땀․눈물․가래침․고름․피․기름․골수․침․오줌을 들고 이를 관(觀)하되, 그릇에 담긴 벼씨․조씨․갓씨․무우씨․겨자씨등 여러 가지 종류를 분명히 보듯이 하라

 

 

고 한다. 또한 낱낱이 경계에 대하여

 

 

비구는 몸에 있는 모든 계(界) 즉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계(識界)를 관 해야 한다.

 

 

고 하여 내가 몸에 있다고 하는 아상(我想)을 몸 그 자체를 관함으로 소멸시키고 있다. 그래서『염처경(念處經)』에서는 신념처(身念處)를 설하면서 수식관(數息觀)을 더불어 설하고 부정관(不淨觀)․백골관(白骨觀)을 설하는 것이다.

이로써 붓다의 수행법은 수식관을 하더라도 사념처의 관법으로 하는 것이며 사념처(四念處)를 관하더라고 호흡을 관하는 것이 포함되니 각각의 수행관은 독자적인 체계를 갖고 있어도 실질적인 내용은 서로 넘나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신념처(身念處) 가운데 시설되는 부정관(不淨觀)과 백골관(白骨觀)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는 몸을 몸 그대로 관해야 한다.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에 가죽과 살과 피가 없어져 오직 힘줄만이 이어져 있음을 보고 난 후에 그것을 본 그대로 자기에게 견준다. 이제 내 몸도 이와 같아서 이 法이 함께 있는 한 떠날 수가 없구나

 

 

붓다는 아상(我想)이 범부 중생에게는 가장 끊기 어려운 것임을 알고 신념처를 설하는 가운데에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보고 자신의 몸도 그와 같이 됨을 관(觀)하라고 한 것이다. 『염처경(念處經)』에서는 이외에도 시체가 날이 가면서 까마귀나 솔개에게 쪼이고 승냥이나 이리에게 먹히며 불에 태워지고 땅에 묻히어 다 썩어 문들어지는 것을 관하라고 하기도 하고 해골이 묘지에 뒹굴면서 여러 가지 색으로 문들어지는 것을 관하라고 한다. 관하는 목적은 자신의 몸도 그와 같이 됨을 자각시키기 위함이니 이러한 수행법은 실재로 티벳의 관법(觀法)으로 도입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몸을 관하게 되면 몸의 더러움과 깨끗함을 모두 여의어 몸의 공성(空性)을 체득하게 된다. 몸의 공성의 체득은 위 경문에서도 인용했듯이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육체이기에 신념처를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수념처(受念處)란 관수시고(觀受是苦)니 우리의 마음에 낙(樂)이라고 느끼는 음행(淫行)․자녀(子女)․재물(財物) 등을 보고 참다운 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괴로움을 수반하는 것이니 참다운 낙이 아니고 이는 모두 고통(苦痛)이다라고 관하는 것이다.

 

 

어떻게 각(覺)을 각념처와 같이 관(觀)하는가. 비구는 즐거운 감각을 느끼면 즐거운 감각을 느꼈다고 알며 괴로운 감각을 느끼면 괴로운 감각을 느꼈다고 알며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는 감각을 느끼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이라고 안다. 즐거운 몸․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몸, 즐거운 마음․괴로운 마음․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마음을(이와 같이 알며) 즐거운 식사․괴로운 식사․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식사를 즐거운 식사도 없고 괴로운 식사도 없으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식사도 없다고 알며, ........

 

 

심념처(心念處)는 관심무상(觀心無常)이니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常]이 아니고 늘 생기고 멸하고 하는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관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줄로 생각하기 쉽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몸을 움직이고 있는 마음조차 항상 찰나찰나(刹那刹那)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 찰나(刹那)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어떻게 마음(心)을 심념처(心念處)와 같이 관(觀)하는가. 비구는 욕심이 있으면 욕심이 있다고 참다이 알며, 욕심이 없으면 욕심이 없으면 욕심이 없다고 참다이 알며, 성냄이 있고 성냄이 없는 것을 (참다이 알고), 어리석음이 있고 어리석음이 없는 것을 참답게 알고........

 

 

심념처관(心念處觀)은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을 그대로 아는 것인데, 마음의 현상 그대로를 관하게 되면 마음의 현상이 무상하여 본래 없는 것을 알게 된다. 법념처(法念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법념처(法念處)는 관법무아(觀法無我)이니 위의 세 가지를 제외한 만유(萬有)에 대해서도 실로 실체(實體)가 없다[無我]라고 관하는 것이다. 실로 이세상의 모든 것은 다 인연이 화합으로 이룩된 것이어서 본래 어떤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결코 변하기 말아야 할 것이나 아무리 눈을 돌려봐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순간도 쉬지 않고 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체의 제법(諸法)은 무아(無我)라고 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법(法)을 법념처(法念處)와 같이 관(觀)하는가. 눈은 색(色)을 연(緣)하여 안으로 번뇌가 생긴다. 비구는 안에 실로 번뇌가 있으면 안에 번뇌가 있다고 참답게 알며, 안에 번뇌가 생기면 그것을 참답게 알며, 만일 생겼던 번뇌가 소멸해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것을 참답게 안다. 이와 같이 귀․코․혀․몸 또한 이와 같으며 뜻(意)은 법을 연하여 안으로 번뇌가 생기는 것이다.

 

 

법을 관한다는 것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로 그 대상 즉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받아들일 때 생기는 모든 결과, 다시 말해 번뇌를 그대로 아는 것이다. 내육처(內六處)와 칠각지(七覺支)를 관하는 것은 법념처에 포함된다.

지금까지 사념처관(四念處觀)의 각 지분(支分)을 살펴보았다. 사념처 관법은 어떤 곳에서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수행방법이고 그 안에 다양한 수행법과 수행에 나타나는 현상이 포함되어 있어서 수행차제의 한 단계이면서 동시에 완결된 수행체계임을 알 수 있었다.

 

 

 

 

 

 

 

 

 

시산회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yc012175/15942950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