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과 수행

불교의 인생관 - 무아(無我)와 공(空)에 대하여

수선님 2020. 1. 26. 11:56

'무아' 와 '공' 이 두 단어는 같은 의미로서, 처음에는 '무아' 라고 했던 말을 대승불교 시대에는 '공' 이라 하여, 그 의미를 사상적으로 더욱 심오하게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무아(無我)란 '내가 없다', '주체가 없다,' '영혼이 없다,'등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란 주체나 영혼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니다', '진실한 나의 모습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無我의 '我'는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설하는 절대원리인 개인존재 아트만(자아)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본래의 자기를 실현해야 한다고 설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아'란 참다운 주체성의 확립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자아의 부정이나 주체성의 방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비단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에 다 해당되므로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는 다 무아 하다'는 의미로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합니다. 여기서 '제법'이란 '모든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소박한 '無我'사상이 대승불교가 되면 '空'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그 의미가 훨씬 깊고 심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깊고 심원한 '空' 사상이란 어떠한 사상일까요? 우리들은 자기를 남과 구별하여 독자적인 존재라 생각함으로써 이를 실체화하거나 절대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실체로서의 자기를 '자아'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상'이나 '무아'의 설명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불교에서는 이 '자아'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생겨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의 식물이 싹을 트기 위해서는 직접 싹이 되는 종자와 싹을 트게 도와주는 환경, 즉 수분과 햇빛과 온도와 공기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싹을 트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인 종자를 '인'이라 하고 간접적인 원인인 싹을 트게 도와주는 환경을 '연' 이라 하여, 모든 존재는 인연에 따라 생성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지, 아무런 원인이나 조건도 없이 내가 처음부터 나 자신으로서 여기에 있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든 존재나 현상은 이것을 성립시키고 있는 원인이나 조건이 없어지면 소멸되어 버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 자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자아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도 그것이 독자적인 실체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존재를 실체로써 파악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꿀단지와 요강단지는 외견상으로 상당히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항아리를 요강단지로 쓰면 냄새나는 요강단지가 되고, 꿀단지로 쓰면 단내가 나는 꿀단지가 됩니다. 여기에 냄새나는 요강단지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요강단지를 깨끗이 씻어 꿀을 담아 놓고 먹으라고 한다면, 적어도 이것이 요강단지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끊는 물로 소독해 위생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설명해 봐도 상을 찌푸리며 먹기를 꺼려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요강단지였다는 것을 몰랐던 사람을 처음부터 꿀단지의 꿀을 맛있게 먹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의 항아리를 두고 깨끗한 꿀단지니, 더러운 요강단지니 하는 상반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럽다'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오직 우리들의 마음에 의한 것이며, 그 자체는 '더럽다' '깨끗하다'를 초월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공'입니다.

다시 말하면, 항아리 그 자체는 '공'으로서 더럽고 깨끗한 것을 초월해 있습니다. 오직 '더럽다' '깨끗하다' 하며 구애받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이 멋대로 '더럽다' '깨끗하다'고 하는 관념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우리들은 자기 마음대로 만든 개념에 집착하고 그것에 구속되어 결국 어찌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집착을 버리고 자유롭게 너그럽게 구김살 없이 살아가는 것, 이것이 '공'의 철학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큰일을 성사시키려고 할 때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마음을 비운 상태'란 어떠한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 즉 원래의 순수한 마음 그대로의 상태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공' 의 의미입니다. '더럽다' '깨끗하다' 뿐만 아니라 '선과 악', '길고 짧음'. '예쁘고 못남'등 상대의미를 초월한 것이 '공'입니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이라는 경전에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하여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이 즉 공이고 공이 즉 색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색'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문장을 바꾸어 해석해 보면, '모든 존재하는 것은 공이며, 그 공은 곧 모든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공'은 종종 '비어 있다'는 의미로서 잘못 이해되어, 허무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을 단순히 '비어 있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유(有)' 의 반대 개념인 '무(無)' 즉 '없다' 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므로 사물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공'의 해석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왜냐 하면 '무'란 '유'와 마찬가지로 사물을 실체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 이란 결코 사물을 '없다', 즉 '무'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은 인연에 의해 성립되므로 사물이 홀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출처: http://www.heungcheonsa.org/bbs/board.php?bo_table=beobhoe3&wr_id=65&pag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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