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기본적 성격
마성스님
1 . 진리에 대한 접근 방법
오늘은 진리에 대한 접근 방법과 불교의 기본적 성격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진리에 대한 접근 방법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스님들의 법문 중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이 그대로 유통되고 있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출처가 불명확한 정보들은 초심자들에게 오히려 불교를 잘못 인식시킬 염려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주로 스님들이 불교설화나 전설, 혹은 스님들의 일화를 들려주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내용으로는 도저히 대중들을 선도할 수가 없습니다. 단 한마디의 설법일지라도 근거와 출처가 명확한 내용일 때 비로소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전에 근거한 인용문과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구분하여 대중들에게 전달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어디까지가 불설(佛說)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견해인지를 다른 청중들이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전혀 숨기지 않았고, 결코 제자들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 맹목적이고 순종적인 믿음을 이끌어 내기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신중한 검토와 지적인 탐구를 역설했습니다. 부처님은 『깔라마 숫따(Kalama-sutta)』에서 전거(典據)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제시해 놓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깔라마(Kalama)들에게 들려준 유명한 권고는 불교학 연구에 있어서 방법론의 시야를 넓히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경전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께사뿟따(Kesaputta)는 코살라국에 있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깔라마’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부처님께서 자신들의 도시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 조언을 구하기 위해 부처님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곳을 방문하는 몇몇 사문(沙門)들과 바라문들은 저마다 오로지 자신들의 견해에 대해서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욕하고 멸시합니다. 또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이곳에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의심스럽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종교 역사상 유래가 없는 다음과 같은 충고를 그들에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의심은 의심스러운 일에서 일어난다. 깔라마들이여, 풍문이나 전설이나 소문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경전의 내용으로, 단순한 논리나 추론 또는 상황을 두루 살핌으로, 어떤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숙고한 결과로,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고, 그대들의 스승이라는 생각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지 마시오.”
“깔라마들이여, 그러나 그대들 스스로가 ‘악하고 비난받을 것이며 무익하다’고 알면 그것을 과감히 버리시오. 그리고 ‘선하고 비난받을 것이 아니며 이익이 된다’고 스스로 알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머무시오.”
그리고 나서 붓다는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탐욕, 증오, 미혹이 일어났다면 이것들이 그에게 이익이 되겠느냐, 손실이 되겠느냐? 이것들은 비난받을 것이겠느냐, 비난받지 않을 것이겠느냐?”
“세존이시여, 그것들은 그에게 손실이 될 것이고 비난받을 것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깔라마들이여, 어떤 사람이 탐욕, 증오, 미혹에서 벗어났다면 이것들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느냐, 손실이 되겠느냐? 이것들은 비난받을 것이겠느냐, 비난받지 않을 것이겠느냐?”
“세존이시여, 그것들은 그에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비난받을 것이 아닙니다.”
“깔라마들이여,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대들에게 ‘풍문이나 전설이나 소문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경전의 내용에도 이끌리지 마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1)
부처님께서 깔라마들에게 가르쳤던 핵심 요지는 누구든지 그것을 먼저 시험해 보지 않고, 믿을 만한 근거라는 이유로 어떤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진리와 관련된 진실임을 증명한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보아 진술의 결과를 테스트해야만 되며, 그리고 나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깔라마들에게 들려 준 훈계에 따르면, 전적으로 권위를 배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2)
다시 말해서 부처님은 “보고나 전통, 소문이나, 종교적 성전의 권위, 논리나 추론, 겉모양의 고려, 사변적 견해에 대한 기쁨, 외관상의 가능성, ‘이것이 우리의 스승이다’라는 관념 등에 이끌리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모두 진리에 접근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부처님께서는 『비망사카경(Vimamsaka sutta, 思察經)에서 제자는 붓다 자신조차 시험해 보아야만 그가 따르는 스승의 진정한 가치를 완전히 확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비구들에게 말했습니다.3) 맹목적인 믿음으로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교의 정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과 제자들 간의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우리는 우리들의 스승을 공경하고 그분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을 존경한다.”고 말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아, 너희들이 확신하는 것은 너희들 스스로가 깨달은 것일 뿐만 아니라 보고 파악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4)
이와 같이 진실한 탐구에 대한 철저하고도 엄격한 입장에 따라 불교의 한 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이 금의 순도를 측정하기 위해 그것을 태우고 잘라 보고 문질러 보듯이, 너희들도 단순히 나에 대한 존경 때문이 아니라 내 말을 면밀히 검토해 보고 난 뒤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5)라고 했습니다.
불교는 강제나 강압과는 거리가 멀며 추종자들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면밀히 검토해 보라고 불교에서는 권합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들은 불교의 이러한 성격을 반길 것입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눈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부처님은 법(法, Dhamma)과 율(律, Vinaya), 즉 교의와 계율은 어떤 특정한 가르침이 그 사람에게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측정하기 위한 척도로서 제공된 것이라고 진술했습니다. 부처님의 믿을 만한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진술은 이와 같이 “이 경전과 계율을 비교하여 양립할 수 있는 것”6)이어야만 합니다. 근거의 힘은 붓다의 진짜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 진술의 입장에서 말하면 그것은 권위의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법과 율에 합당한 것인지 시험해 보고, 자기 자신의 경험과 비교함으로써 그 정확성이 확인되고 결정되면 그때 받아드리면 됩니다.
불교의 교설에서 언급된 참고 혹은 자료에 대한 네 가지 공식[四大限定]이 있습니다.
⑴ 부처님에 의해서 직접 선포된 교의나 계율.
⑵ 승단의 승려 집단에 의해서 선포된 것.
⑶ 법과 율에 정통한 장로들과 지도적인 사람들이 포함된 승려 회의에 의해서 선포된 것.
⑷ 교의와 계율에 정통한 한 승려에 의해 선포된 것.7)
비록 어떤 교의(敎義)나 계율(戒律)에서 유래된 근거나 자료일지라도, 반드시 그 출처를 조사하고, 불교교리의 전체와 함께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이와 같이 했을 때, 어떤 교설이 경과 율을 벗어났다면, 경과 합치하는 것이 아니고, 율과 일치하지 않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분명히 세존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스님들에 의해서 잘못 전해진 경우일 것입니다. 그런 것은 과감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만일 교설 혹은 계율이 “실천으로서 완성되거나 취해졌고, 분명히 ‘실패와 근심’으로 이끌지 않을 때, 붓다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8)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비록 부처님이나 자신의 스승이 한 말일지라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의심해 보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확인해 보는 절차를 거친 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누가 말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진리인가만을 문제삼아야 합니다. 저명한 교수가 말했다고 해서 모두 진리가 아니고, 범죄자가 말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진리라면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바로 진리에 접근하는 올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2 . 불교는 불교일 뿐이다
최근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다’라는 말이 화제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불교가 과학이다’라고 표현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서구의 불교학자들이 이미 100년 전에 사용했던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불교의 어느 한 부분적 특성을 드러낸 것 일뿐, 불교의 본질을 완전히 드러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단정적 표현은 자칫 불교의 본질을 왜곡시킬 염려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에는 표식이 없다’는 월폴라 라훌라 스님의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교는 종교인가, 혹은 철학인가’라는 질문이 간혹 제기된다. 불교를 무엇이라고 부르든 상관이 없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명명(命名)하든지 불교의 본질은 그대로다. 명칭은 대수롭지 않다.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하여 부여한 ‘불교’라는 명칭조차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 부여한 이름은 비본질적인 것이다. 이름 속에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것에, 다른 이름을 부여하더라도 냄새는 향기로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삐야닷시(Piyadassi) 스님도 월폴라 라훌라 스님과 똑같은 견해를 피력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붓다의 가르침을 ‘불교(Buddhism)’라 부르고 ‘주의(-ism)’나 ‘논(-ology)’ 가운데 포함시키지만 어떤 명칭을 붙이든지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종교, 철학, 불교 또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떤 이름을 붙여도 좋다. 이러한 명칭들은 진리와 해탈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불교를 영어로 부디즘(Buddhism)이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 속에는 ‘붓다주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올바른 용어가 아닙니다. 붓다는 무슨 주의를 제창한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방 상좌불교국에서는 부디즘이란 영어 대신에 ‘붓다-사사나(Buddha-sasana)’라는 팔리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를 더욱 좋아합니다. ‘붓다-사사나’란 ‘부처님의 가르침(Teaching of the Buddha)’이란 말입니다. 원래 붓다 재세시 그의 가르침은 붓다-와짜나(Buddha-vacana, 붓다의 말씀), 붓다-사사나(Buddha-sasana, 붓다의 가르침), 삿투-사사나(Satthu-sasana, 스승의 가르침), 사사나(Sasana, 메시지 혹은 가르침) 혹은 담마(Dhamma, 법, 진리)와 같이 여러 가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누가 어떻게 부르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불교는 불교일 뿐입니다. 불교 이상도, 불교 이하도 아닙니다. 붓다의 가르침에는 정치·경제·사회·윤리 등 제반 분야에 해당되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한 가지 측면에서만 불교를 바라보고, 불교는 철학이다, 심리학이다, 과학이다 등으로 규정짓는 것은 부분적인 진리일 뿐입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모든 학문의 영역이 다 용해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일찍이 서구의 학자들은 불교의 합리성, 논리성, 과학적 실증주의 등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교는 과학과 같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서구인이 불교에 대해 호감을 갖는 이유도 이러한 불교의 특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티베트 인들은 경험적 관찰을 통해 많은 과학적 진리들을 발견했습니다. 과학과 불교의 접근 방법은 다르지만, 둘 다 진리를 보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달라이 라마는 말했습니다.
불교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며,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어느 한 특정 부분만을 강조하는 것은 불교의 본질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불교는 인간형성의 길이다’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일생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이 바로 인간형성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가르침의 진수를 정확히 이해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르게 이해한 것을 수행함으로써 열반의 경지를 실현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형성의 길인 것입니다.
Notes:
1) Anguttara-nikaya (PTS), Vol. Ⅰ, pp.188-193.
2) Nandasena Ratnapala, Buddhist Sociology (Delhi: Sri Satguru Publications, 1993), p.7.
3) Majjhima-nikaya (PTS), Vol. Ⅰ, p.317f.
4) Majjhima-nikaya (PTS), Vol. Ⅰ, p.317f.
5) Jnanasara-samuccaya, 31.
6) Digha-nikaya (PTS) Vol.Ⅱ, p.124, p.128.
7) Digha-nikaya (PTS), Vol.Ⅱ, p.123.
8) Nandasena Ratnapala, Buddhist Sociology, p.8.
[說法文案 2547년(2003) 2월호
[출처] 불교의 기본적 성격 / 마성스님|작성자 둘이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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