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스님

기복(祈福)과 작복(作福) / 마성스님

수선님 2020. 1. 26. 11:28

기복(祈福)과 작복(作福)

마성 지음

 


 

흔히 한국불교를 기복불교(祈福佛敎)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한국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정한 이해보다는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복을 비는 기도가 크게 성행하고 있다. 복을 비는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복은 빌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은 짓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마음 다스리는 글'이란 것이 불자들간에 널리 유행되고 있다. 이 글의 첫머리가 "복은 검소함에서 생기고 덕은 겸양에서 생긴다."라고 되어 있다.

 

 

한국의 불자들은 극성스럽게 기도도량, 영험도량을 찾아 다닌다. 어느 곳에서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라는 소문만 나면 진위 여부에 전혀 상관없이 떼를 지어 다닌다.

 

 

기복은 외부에서 구하는 것이고, 작복은 내부에서 찾는 것이다. 복을 외부에서 구함으로 이러한 신앙형태는 타력적(他力的)이다. 반면 복을 내부에서 구하는 것은 자력적(自力的)이다.

 

 

사실 짓지 않은 복을 기원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복은 스스로 지어야만 언젠가 결실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박복(薄福)한 사람이 횡재(橫財)를 하면 오히려 뜻밖에 얻은 그 재물로 말미암아 더 큰 불행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

 

 

노력하지 않고 분수에 맞지 않게 큰 복을 바라는 것은 곧 불행의 시작이다. 기복자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요행을 바라는 사행심(射倖心)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사람은 자연적으로 자신의 노력보다는 요행수를 바라는 경향이 농후하다. 자신의 노력의 대가로 정당한 부를 축척 하려고 하지 않고, 복권이나 증권과 같은 일확천금(一攫千金)을 꿈꾸는 베짱이와 같은 사람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작복자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복을 지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사람은 자연적으로 오직 자신의 근면과 성실한 자세로 자신의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노력가형이다. 이런 사람은 가령 뜻밖에 재물을 얻는 횡재를 만났다 할지라도 자신의 노력 없이 얻어진 것이기에 크게 기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횡재로 말미암아 재앙을 초래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런 사람은 그러한 재물로 오히려 더 큰 복을 지으려고 하게 된다.

 

 

인간으로서 가장 완벽한 복을 짓고 받은 분은 석가모니불이다. 그 분께서는 얼마나 큰 복을 지으셨기에 세상을 떠나신 지 이미 2500 여 년이 지났건만, 그 분의 형상을 모시고 그 분과 같은 복색만 하고 있어도 최소한 먹고 입고 살수 있는 집은 걱정이 없으니, 저 점술가나 역술가들도 한결같이 불상을 모시고 영업을 하고 있다.

 

 

한때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서 아니룻다를 위해 복을 지은 일이 있다. <증일아함경>의 역품(力品)에 나오는 '복 짓는 사람'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서 많은 대중을 위해 법을 설하고 계실 때였다. 그 자리에 아니룻다도 있었는데, 그는 설법 도중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부처님은 설법이 끝난 뒤 아니룻다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 너는 어째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느냐?"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의 괴로움이 싫어 그것을 버리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는 설법을 하고 있는 자리에서 졸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
아니룻다는 곧 자기 허물을 뉘우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제부터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부처님 앞에서 졸지 않겠습니다."

 

 

이때부터 아니룻다는 밤에도 자지 않고 뜬눈으로 계속 정진하다가 마침내 눈병이 나고 말았다. 부처님은 그에게 타일렀다.

 

 

"아니룻다, 너무 애쓰면 조바심과 어울리고 너무 게으르면 번뇌와 어울리게 된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아니룻다는 전에 부처님 앞에서 다시는 졸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을 상기하면서 타이름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룻다의 눈병이 날로 심해진 것을 보시고 부처님은 의사 지바카에게 아니룻다를 치료해 주도록 당부했다. 아니룻다의 증상을 살펴본 지바카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아니룻다께서 잠을 좀 자면서 눈을 쉰다면 치료할 수 있겠습니다만, 통 눈을 붙이려고 하지 않으니 큰일입니다."

 

 

부처님은 다시 아니룻다를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 너는 잠을 좀 자거라. 중생의 육신은 먹지 않으면 죽는 법이다. 눈은 잠으로 먹이를 삼는 것이다. 귀는 소리로 먹이를 삼고, 코는 냄새로, 혀는 맛으로, 몸은 감촉으로, 생각은 현상으로 먹이를 삼는다. 그리고 여래는 열반으로 먹이를 삼는다."

 

 

아니룻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러면 열반은 무엇을 먹이로 삼습니까?"
"열반은 게으르지 않는 것으로 먹이를 삼는다."

 

 

아니룻다는 끝내 고집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눈은 잠으로 먹이를 삼는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차마 잘 수 없습니다."

 

 

아니룻다의 눈은 마침내 앞을 볼 수 없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애써 정진한 끝에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육안을 잃어버린 아니룻다의 일상생활은 말할 수 없이 불편했다. 어느 날 해진 옷을 깁기 위해 바늘귀를 꿰려 하였으나 꿸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 말로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은 나를 위해 바늘귀를 좀 궤 주었으면 좋겠네."라고 하였다.

 

 

이때 누군가 그의 손에서 바늘과 실을 받아 해진 옷을 기워 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부처님인 것을 알고 아니룻다는 깜짝 놀랐다.

 

 

"아니, 부처님께서는 그 위에 또 무슨 복을 지을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룻다, 이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법이란, 보시와 교훈과 인욕과 설법과 중생 제도와 위없는 바른 도를 구함이다."

 

 

아니룻다는 말했다.

 

 

"여래의 몸은 진실로 법의 몸인데 다시 더 무슨 법을 구하려 하십니까? 여래께서는 이미 생사의 바다를 건너셨는데 더 지어야 할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 아니룻다, 네 말과 같다. 중생들이 악의 근본인 몸과 말과 생각의 행을 참으로 안다면 결코 삼악도(三惡道)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쁜 길에 떨어진다. 나는 그들을 위해 복을 지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힘 중에서도 복의 힘이 가장 으뜸이니, 그 복의 힘으로 불도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아니룻다, 너도 이 여섯 가지 법을 얻도록 하여라. 비구들은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한다."

 

 

한국의 불자들이 하루빨리 기복적 신앙에서 벗어나 작복적 신앙으로 전환한다면, 한국불교는 날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출처 : http://www.ripl.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