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불성
(1)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불교에서는 사람 개개인에게 본래 구족한 본성(本性)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그
본성은 곧 부처님의 본성입니다. 경전에서는 이를 불성(佛性)이라고 하고 여래장(如來藏)이라고도 합니다. 대승경전인 열반경에는 모든 중생들이
불성이 있다고 하는데 이를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합니다.
여기에서 중생(衆生)의 범위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란
의미로 쓰일 때에는 생명이 있는 것(有情物) 뿐만 아니라 무정물(無情物)까지도 불성이 있다는 것이 되지만,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라고 할 때에는
곤충이나 미물(微物)들 까지 불성이 있다는 것이 되며, 중생을 인간에만 한정시켜 쓰고 있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衆生과 佛性과의
관계에 있어서 衆生을 어느 범위로 하느냐에 따라 佛性의 해석에 커다란 차이가 있게 됩니다.
(2) 불성이란 무엇인가?
먼저 중생을 인간의 경우에 한정하게 되면 불성이 인간의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인간은 오온(五蘊), 즉 색(色 : 肉體)이라고 하는 물질적인 부분과 수(受 : 感覺), 상(想
: 表象), 행(行 : 意志), 식(識 : 認識)이라고 하는 정신적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불성은 이 오온 가운데 있다고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합니다. 그러면 오온의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해 열반경은 비파(13줄의 반원형 가야금)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악기에서 소리가 나는데 그 음색(音色)은 줄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다른 어떤 부분에서 나오는가? 음색(音色)은
분명히 비파에 있지만 어느 부분에 있는지 의문이 생겨 분해하면 그 소리가 없고 조립하면 그 소리가 나오므로 비파에 소리가 없다고도 할 수 없고
있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불성도 이와 같은 것이다.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는데 그러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오온으로
이루어진 개체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각각의 분해된 거기에 있는 것인가? 그러나 각각의 그 어디에도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오온으로 이루어진 개체에 불성이 확실히 있다. 그러므로 비파의 소리처럼 불성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그 어느 쪽도 아닌 것이다."
그러한 불성을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몸에 갖고 있으면서도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많은 번뇌의 구름이 덮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번뇌는 바른 선지식에게 인도되어 수행을 하고
번뇌를 여의고 나면 반드시 불성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3) 불성(佛性)의
비유
불성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계기로 소멸되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크기로 헤아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열반경(涅槃經) 제9권에서는 불성을 달과 별에 비유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달이 둥글다거나 일그러졌다고 하지만, 달은 언제나 둥근 그대로 있다. 더한 것도 덜한 것도 없다.
불성 또한 이와 같아서 항상 머물러 생멸함이 없는 것인데 다만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서 생멸이 있을 뿐이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25권에는 "예를 들면 그믐날에는 참으로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믐달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달이 없다고 할 수 없듯이 불성도 지금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는 안된다. 다만 범부(凡夫)가 그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같은 열반경 제9권에는 " 별은 낮에는 전혀 보이지 않아서 별이 없어진 것처럼 생각되는데
별 그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태양이 지면 별은 나타나는 것이다. 불성도 이와 같아서 번뇌가 소멸되면 불성은 본래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4) 불성(佛性)의
실상(實相)
열반경은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하여 불성은 중생 각자에 내재(內在)되어 있다고 이해되고
있지만 실은 그와 같이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경전에 가르친 곳도 있습니다.
"만약 중생가운데 불성이 있다고 하면 옳지 않다. 왜냐하면
중생은 다름 아닌 불성이요, 불성은 다름 아닌 중생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때는 정(淨:佛性)으로 보고 어떤 때는
부정(不淨:衆生)으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불성이 중생 가운데에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과 불성과는
본성상(本性上) 같은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결국 중생이란 번뇌에 덮여 있는 상태의 불성을 의미하고, 불성이란 번뇌가 장차 제거되는 상태의 중생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붓다는 깨달은 중생이고 중생은 깨닫지 못한 붓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나타나 있는 모습에
의해서 불성이나 중생이라고 구별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의 도원선사(道元禪師)는 열반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의 의미를 일체중생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고 해석하지 않고 "일체중생 모두가 불성이다"라고 해석합니다. 불성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의 실상 그대로가 불성이 나타남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禪師는 불성을 제법의 실상이라는 점에서
파악한 것입니다.
불성이나 自性은 「일체의 모든 존재(法)는 본래 공(空)한 것이며, 무아(無我)인 그 사실을 깨닫는 자각적인
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성이나 자성도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일체의 모든 존재의 본래 모습은 공(空)한 것이다」라고 하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의 범주를 벗어나, 영원히 불변하는 실체적(實體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불성을 우파니샤드에서 주장하는 윤회의 주체인 영혼(Atman)과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영혼은 윤회의 주체이고 영원 불변하는 실체적
존재이기 때문에 태어나고 죽는 일을 거듭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불성은 본래 공한 것이기 때문에 나고 죽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도 「일체의 모든 존재(法)의 공(空)한 실상(實相)은 태어남도 없고 죽는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설하고 있습니다.
나) 심(心)
정말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알 수 있는 것들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존재의 시공에 대해서 그 어떤 명확한 정의도 내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존재하며, "나"라는 존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시간은 왜 흘러가며 과연 공간의 끝은 있는가? 가도가도 끝이 없는
이 광대한 우주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듯 우리의 삶이란 의문투성이며 "나"라는 존재는 나의 "마음"이라는 것에 의해
생로병사하고 번뇌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이 마음의 속박을 끊어버리지 못하는 한 결국 삶이란 마음으로 꾸는 꿈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불교적으로 분석해 놓은 것이 유식(唯識)의 학문체계입니다. 유식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8가지로 구분해서 이
식(識)이 세계를 이루는 것일 뿐 현실세계에 그 어떤 실체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나에게 눈이 없다면 이 세상은
칠흑과도 같은 암흑일 뿐이고 색(色)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눈과 귀가 없다면 세상은 암흑 속에서 침묵할 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눈·귀·코·혀·몸·의식·(眼·耳·鼻·舌·身·意) 이 없다면 이 세상은 암흑 속에서 침묵하며 냄새도 맛도 촉감도 나아가 사량분별까지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거기다가 제7식과 아뢰야식(阿賴耶識)인 제8식마저 없다면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미혹할 수도 윤회할 수도
없는 무(無)일 뿐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識)이 없다면 현실이란 결국 무(無)이며 공(空)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 공(空)과 현실
현대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참으로 많은 자연의
신비를 밝혀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논리마저도 과학자들이 증명해 보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세계의 기원은 무(無)이며 물질의 본질 또한 그 근원을 파고 들어가 보면 마침내는 공(空)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현실은 마음으로 만들어 낸 것일 뿐 실제성이 없어서 우리의 삶 또한 꿈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세계와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불교는 현실과 세계에 대한
절대적 부정에서 출발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절대적인 자기부정을 통하여 궁극적인 진리의 세계를 표출해 내는 것이 불교이며,
이점에서 불교가 여타의 종교나 철학과 대별되는 독창적인 부분입니다.
삶과 현실은 무상(無常)한 것이어서 그 본질은 無이며
空입니다. 그러나 이 철저한 절대부정 아래 깨어난 세계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묘유(妙有)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무상한 꿈에서
깨어나 보니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중생의 마음은 바로 불성(佛性)을 여의지 않은 여래의 마음이며 현실은 그대로가 연기(緣起)일 뿐, 그
무엇도 비로자나법신체가 아님이 없다는 것에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견성(見性)해 보니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인 선(禪)의 세계이며 현실의 부정(空)을 거친 절대긍정(妙有)의 불국정토의 구현이며 깨어난 자의 세계인 것입니다.
출처: http://www.heungcheonsa.org/bbs/board.php?bo_table=beobhoe3&wr_id=66&page=5&pag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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