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수행문화의 가능성
임 승 택
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sati@knu.ac.kr
* 목차
1. 시작하는 말
2. 문화로서의 요가
3. 현대사회에 대한 진단
4. 요가 실천의 사회적 함의
5. 초기불교 수행과의 비교
6. 요가 수행문화의 정착을 위한 제언
1. 시작하는 말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인도를 중심으로 계승된 요가(Yoga)가 이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가르침으로 인식되고 있다. 도심의 대로변을 걷다 보면 요가원을 알리는 간판이나 광고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요가는 이미 도시문화의 일종으로 편입되어 현대적 삶의 일부로 정착된 듯한 느낌마저 갖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 확산과 번영에도 불구하고 현재 실천되고 있는 요가의 양상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당장 대부분의 요가원에서 보급하고 있는 요가의 내용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부터 반성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요가의 가르침은 외부적 여건에 구애되지 않는 내면의 평온을 일깨우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오늘날 요가원에서 가르치는 요가란 체중감량과 몸매 가꾸기에만 초점을 모으는 듯하다.
장구한 세월만큼 수많은 문헌을 통해 축적된 요가의 지식은 실로 엄청난 분량에 이른다. 사실 인도에서 출현한 거의 모든 종교적․철학적 가르침은 요가와 일정한 상관관계에 있다. 전통적으로 인도에서는 특정한 종파나 학파에 상관없이 수행(修行, bhāvanā)에 전념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요가를 지닌 사람(yogī)’ 혹은 ‘요가를 실천하는 사람(yogācāra)’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요가라는 것이 단순히 몸을 비틀거나 만뜨라를 암송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양한 전통에 따라 전해지는 요가의 가르침은 방대하면서도 체계적인 형이상학적․종교적․생리학적 내용을 지닌다. 이것에 대해 ‘기묘한 육체적 포즈를 취하는 것’ 정도로, 혹은 ‘호흡에 관한 테크닉’ 쯤으로 오인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이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대중화된 요가를 무작정 비판할 수 없다. 일단 이것에 의존하여 많은 사람들이 건강과 미용에 도움을 받고 있다. 또한 이것을 통해 요가의 가르침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늘날의 대중화된 요가를 굳이 인도적 전승에만 연계시킬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 지지를 얻어가는 듯하다. 그러나 요가의 유통 양상이 어떻든 요가의 가르침이 아직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만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요가가 가져 올 수 있는 이익과 혜택이 충분히 소개되지 않고 있다. 요가란 몸과 마음을 아우르는 전인적 가르침이며, 윤리적․육체적․심리적 수행을 망라하는 포괄적 내용을 지닌다. 우리의 주변에서 행해지는 요가는 이러한 깊이와 넓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점은 요가 수행문화의 정착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요가 수행문화의 가능성을 살피는 작업에서 현대사회가 지니는 특수성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아래 살아가는 현대인은 무한경쟁의 틈바구니에 놓여있다. 이것이 요가의 실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새롭게 등장하는 각종의 요가프로그램들은 상품성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각종의 장치들로 무장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요가의 가르침은 이러한 경쟁의 분위기와 무관하다. 예컨대 고전요가의 궁극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식별지(識別知, viveka-khyātir)의 성취가 경쟁의 산물일 수 없다. 오히려 이것은 모든 경쟁과 다툼을 포기하고서 철저하게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갈 때라야 비로소 발현될 수 있다. 어쩌면 이점에서 전통적인 요가의 가르침과 현대사회의 특수성은 구조적으로 상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더 이상 요가의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많은 현대인이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빈곤감을 호소한다. 외부적․감각적 쾌락의 추구를 통해 그것을 해소해 보려고 시도하지만 오히려 더욱 깊은 공허감에 봉착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신성의 회복을 역설하는 요가의 가르침은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물질적 조건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신성에 대한 추구는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만의 보편적 본성일 수 있다. 물론 현대사회의 특수성을 무시하고서 요가 수행문화의 가능성을 논의할 수 없다. 그러나 요가의 가르침에 내포된 몇몇 측면은 현대사회의 특수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본고는 현대사회에서 요가수행문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목적을 둔다. 이것을 위해 필자는 문화현상으로서의 요가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요가의 실천은 개인적이지만 사회적․문화적 배경을 배제할 수 없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특수성이 전통적인 요가의 가르침에 변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한편 요가의 실천이 지니는 사회적 함의에 대해서는 요가의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고전요가의 ������요가수뜨라(Yoga-Sūtra)������를 중심으로 정신성으로서의 뿌루샤(puruṣa)와 물질적 조건으로서의 쁘라끄리띠(prakṛti)라는 이원론이 지니는 철학적 의의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또한 본고의 후반부에서는 고전요가의 실천법과 초기불교의 그것을 비교하고자 한다. 이들에 대한 조명은 요가의 이론과 실천이 지닐 수 있는 명암을 분명히 하여, 요가 수행문화의 현대적 가능성을 구체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2. 문화로서의 요가
문화란 “진리를 구하고 끊임없이 진보․향상하려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 또는 그에 따른 정신적․물리적인 성과”로서 학문․예술․종교․도덕 따위를 가리킨다.1) 다소 투박한 정의이지만 이것을 통해 요가(yoga) 또한 문화라는 개념과 내용적으로 유사하며 전형적인 문화현상에 속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요가수뜨라������에는 팔지칙(aṣtānga)이라는 일련의 실천적 단계들이 제시된다. 팔지칙은 윤리적․신체적․심리적 수행을 망라하는 것으로 학문․종교․도덕 등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여러 측면들을 망라한다.2) 이렇듯 요가 역시 문화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포괄적인 내용을 지닌다. 또한 끊임없이 진보․향상하려는 인간의 정신적․물질적 성과의 일종으로 규정할 수 있다.
사실 문화라는 개념은 간단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175가지 문화 개념이 비교된 적이 있다.3) 또한 “문화란 영어에서 가장 복잡한 두세 가지 단어 중 하나이다.”라고 언급되기도 하였다.4) 심지어 문화란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언급되기도 한다.5) 이러한 다의성 역시 요가가 보여준 그간의 모습과 유사하다. 시대별로 요가는 3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6) 『요가수뜨라』에 근거한 고전요가(Classical-Yoga)와 그 이전 및 이후의 시기에 유행하였던 Pre-Classical-Yoga, Post-Classical-Yoga가 그것이다. 이들은 형이상학적 배경도 다를 뿐만 아니라 실천적 측면에서도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Post-Classical-Yoga에 속했던 딴뜨리즘(Tantrism)은 늘 소수의 분파들로 갈라졌으며 상호간에 배타적이었고 심지어 적대적이기도 하였다.7) 그럼에도 요가라는 명칭은 그들 모두를 한데 아우르는 데 부족함이 없다.
부르크하르트(Jakob Burkhardt)는 문화를 종교 및 국가로부터 구분되는 비권위주의적인(nonauthoritarian) 무엇으로 규정한다.8) 그에 따르면 문화란 “물질생활의 향상 또는 정신적 도덕적 생활의 한 표현으로서 자연적으로(spontaneously) 일어난 모든 것의 총칭이며 온갖 사회적 교류, 기술, 예술, 문학, 과학 등이 다 그것이다.” 이와 같은 비권위주의적․자발적 특성은 문화라는 개념이 지닌 다의적으로 측면의 한 원인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요가 또한 50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분화․발전을 거듭해 왔다. 전승의 과정에서 나타난 비권위주의적․자발적 특성은 요가가 지닌 본래적 측면의 하나일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요가는 국가권력이나 종교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계승되고 있다.
리처드 니버(Richhard Niebuhr) 또한 문화의 ‘본질’에 대해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문화라는 개념이 지닌 주요 특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9) 첫째 문화란 인간생활에 복잡한 양상으로 얽혀 있으며 언제든지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둘째 문화라는 선물은 인간이 성취한 결과이며 그것을 받는 사람의 편에서 애쓰지 않고서는 결코 주워지지 않는다. 셋째 인간의 성취란 모두 어떠한 목적을 위해 의도된 것이며 성취 결과로서의 문화란 가치의 세계이다. 넷째 모든 문화는 다원주의적 특징을 지향하며 문화가 추구하는 가치는 단 하나가 아니다.
이러한 니버의 언급은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요가가 지니는 세부적 측면들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개인은 각자의 방법대로 요가를 실천할 수 있고 또한 요가의 특정 요소를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 이점은 요가의 실천이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특수성을 반영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10) 그러나 요가의 전통은 각각의 분파들이 속한 시대적․지역적 특성과 환경을 반영하면서 고유의 색채를 분명히 하였고, 또한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점에서 요가가 지닌 사회성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요가의 실천은 개인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의 드러난 양상은 늘 사회적이었다.
요가는 ‘인간의 성취’ 결과이다. 이것은 니버가 기술한 문화의 두 번째 특징에 해당하는 것으로, 저절로 주어지는 ‘자연의 선물’과 뚜렷이 구분이 된다. 요가는 노력과 학습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으며 결코 노력 없이 성취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요가의 어원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난다. 요가란 소나 말을 고삐로써 제어하는 것처럼 인간의 감관을 제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11) ‘제어의 방법’으로서의 요가는 부단한 노력과 실천을 의미한다. 이점에서 현대 요가학자들이 요가의 정의와 관련하여 ‘인위성, 적극성, 변화의 추구’와 같은 특징을 언급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12) 요가는 의식적인 실천에 의해 계승되어 왔다. 이러한 노력은 세대에 걸쳐 누적되어 왔으며, 그러한 노력의 흔적들은 방대한 요가 문헌들에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다양한 요가의 흐름은 가치의 실현이라는 일관된 목적을 지닌다. 이점은 니버가 언급한 문화의 세 번째 특징에 해당한다. 인도철학사에 등장했던 각각의 학파 혹은 종파들은 해탈(mokṣa)이라는 이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요가라는 개념을 공유하였다.13) 그러나 그들이 실천했던 요가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예컨대 초기불교나 베단따(Vedānta)처럼 업과 윤회를 심리적 관점에서 해명해 들어간 학파에서는 지혜의 요가(jñāna-yoga)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자이나교(Jainism)와 미망사(Mīmāṁsā)처럼 실재론적 입장에서 접근해 들어간 학파에서는 행위의 요가(karma-yoga)에 치중하였고, 유신론적 업 해석을 고수했던 학파들에서는 신애의 요가(bhakti-yoga)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렇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에게서 요가는 해탈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수단이었다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
이상과 같은 논의는 니버가 언급한 문화의 네 번째 특징인 다원주의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문화란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시도이며, 그 동력은 개인 및 개인이 속한 집단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모든 개인은 각자의 특수한 주장과 취미를 가지며 육신, 마음, 자기, 타인, 자연 혹은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관심 등 복잡다단한 욕구를 지닌다. 이점에서 문화가 실현하려는 가치는 하나일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다양한 갈래로 등장했던 요가의 분파들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그간의 역사를 통해 요가는 다수의 전통을 형성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러한 양상은 다원주의적 요가라는 독특한 양상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은 다원주의적 요가의 흐름은 사회 전체를 이끌어가는 무수한 가치들의 한 측면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3. 현대사회에 대한 진단
기존의 연구에서 필자는 현대사회에 대한 불교적 관점에서의 진단을 시도한 적이 있다.14) 이러한 진단은 요가라는 관점에도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다루어야 할 내용은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의지와 무관하게 현대인의 삶을 조건 짓는다. 다음으로는 이것을 반영하는 소비주의의 양태이다. 우리는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생산과 소비에 참여하는 것 같지만 큰 맥락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적 소비주의의 영향 아래에 놓인다. 이러한 양상은 우리의 선택 범위를 넘어서 우리 스스로를 외부적으로 강제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반성은 현대사회에서 개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와 행복에 관한 문제로까지 자연스럽게 논의의 범위를 확대시킬 수 있다.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 neoliberalism)란 1970년대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경제적 자유주의 중 하나이다.15) 이것은 국가권력의 개입 증대라는 현대복지국가의 경향에 반대하여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원리의 현대적 부활을 지향하는 사상적 경향으로 규정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의 논의가 가능하지만 가장 큰 특징은 세계화에서 찾을 수 있다.16) 신자유주의 이전까지의 기업들은 대체로 자국 내 몇몇 기업들과 경쟁하면서 어렵지 않게 생존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국가 간의 장벽을 허물어 자국에서도 세계적인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기업 간의 경쟁은 우선 낮아진 상품가격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소비를 증진하고 자금의 흐름을 원활히 하는 효과로 이어졌다. 또한 이러한 효과는 기업의 투자 조건을 유리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는 소비와 투자가 동시적으로 늘어나는 선순환의 세계경제를 주도한 것으로 평가되곤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모든 영역에서 시장적 가치를 강요한다. 그 결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경향을 지니며, 경쟁에 취약한 대다수 서민들의 삶을 더욱 열악하게 만든다는 지적이 대두되고 있다.17) 실제로 신자유주의자들이 시행한 정책들은 양극화 현상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18) 시장의 원리는 경쟁력이 약한 소규모 기업들을 급속도로 도태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한 거대자본을 소유한 극소수의 대기업이 전체 시장을 독점하도록 만드는 역기능을 야기한다. 나아가 경쟁력을 지니지 못하는 어떠한 정책적 대안이나 조처들마저도 용납하지 않는다. 심지어 경쟁력을 명분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관습이나 제도적 장치들을 사적인 영역으로 전환되도록 강요한다. 따라서 이 체제는 전통적인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지니는 문제점에 관한 더 이상의 세부적 논의는 본고의 성격을 벗어난다. 다만 여기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이 현대인의 소비문화 및 요가의 실천양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모은다. 그렇다면 우선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소비의 문제는 과연 어떠한가.19) 오늘날의 소비문화가 개개인의 증대된 소득과 낮아진 상품가격에 맞물려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과거에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제품들을 어렵지 않게 구매할 수 있다. 또한 대중교육의 확산은 상류층의 문화적 독점을 붕괴시켰고 계층을 뛰어 넘는 다양한 소비욕구를 증대시켰다. 또한 이러한 분위기는 개인주의적 사고방식과 결합하여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구매활동을 합리화하거나 부추긴다. 한편 거대자본에 의해 조종되는 대중매체는 개개인의 소비욕구를 자극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소비주의의 확대와 재생산에서 큰 역할을 담당한다.
오늘날의 소비문화에 대해서는 비판론과 옹호론이 공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인이 왜곡된 소비풍조의 영향 아래 놓여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실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정적 동요와 충동 그리고 이것을 부추기는 외부적 요인들에 의해 소비활동에 나선다. 특히 거대자본에 의해 통제되는 대중매체는 소비활동 자체를 행복과 자유 그리고 자기실현과 동일시하도록 유도한다.20) 또한 이것에 현혹된 소비자는 소비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주체성이 확보된다고 오인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망과 권태로 이어지는 괴로움의 원인이 될 뿐이다. 이와 같은 왜곡된 소비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추구하는 행복과 가치는 전도된 환상에 불과하다.21)
요가의 실천양상 또한 이러한 분위기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1990년대 이후 요가는 급속도로 대중화, 상업화, 의료화의 길을 걷고 있다. 대체의학의 심신요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요가와 명상은 다양한 심신치유 프로그램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22) 요가시장에서도 인도의 전통적인 방법만이 선호되는 것은 아니며, 현대인의 욕구와 필요를 적절하게 충족시키는 방법들이 새롭게 모색되면서 현대요가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많은 대중들로 하여금 요가의 가르침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점에서 일단의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초래한 부정적 측면들 또한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먼저 요가 자체가 신자유주의의 흐름이 강요하는 경쟁의 잣대를 피해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대자본과 결탁한 몇몇 프로그램들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대다수 전통들은 뒷전으로 물러나는 사태가 예견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색채를 띤 요가는 급속히 상품화되는 추세를 겪고 있다. 상품화된 요가는 전인적 가르침이라는 본래의 성격을 상실하게 된다. 경제성과 효용성에 매달려 가시적인 효과에만 집착하는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양상은 요가 자체가 왜곡된 소비주의에 일조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광고에 등장하는 늘씬한 요가의 모델들은 요가라는 상품의 구매욕을 충동질하기 위해 조작된 이미지일 뿐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에 현혹된 상태에서 접하는 요가는 그 자체가 전도된 환상일 수 있다. 돈벌이를 위한 요가프로그램들은 어디까지나 상품으로 존재한다. 시장에 출하된 상품들은 소비자를 유혹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으로 포장된다. 그러한 와중에 오랜 역사의 검증된 방법들은 차즘 도외시되고 구매심리를 자극하는 과시적․기교적 방법들만이 활개를 치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해방을 위한 가르침으로서의 요가가 세속적 욕망의 굴레를 덧씌우는 족쇄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전통적으로 요가의 가르침에서 탐내지 않음(aparigraha)이라든가 청정(śauca), 만족(saṁtoṣa) 등은 간과할 수 없는 실천적 덕목이다. 특히 ������요가수뜨라������에서는 탐내지 않음의 계행이 확립되면 전생(轉生)의 상태(janma-kathaṁtā)를 알 수 있다고 하였고,23) 만족의 권계를 지키면 천상이나 지상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상의 즐거움을 얻게 된다고 역설한다.24)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분위기에서 이러한 가르침이 제대로 받아들여지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논리는 불만족과 결핍의 상태를 오히려 더 옹호하고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 많은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법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고 부추긴다. 기상천외한 새로운 기법의 개발만이 상품성과 경쟁력을 담보할 수 있다고 충동질한다. 바로 그것만이 무한경쟁의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4. 요가 실천의 사회적 함의
요가라는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응은 어떻게 모색될 수 있을까. 혹은 이러한 체제 아래 요가의 실천이 지닐 수 있는 사회적 함의는 과연 어떠한가. 이에 관해서는 요가의 다양한 분파들만큼 많은 갈래의 답변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효과적인 논지 전개를 위해 『요가수뜨라������에 일단의 초점을 모으고자 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고전요가의 실천론이 지니는 고유의 측면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또한 여기에 내포된 사회적 가능성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추후 고전요가 이외의 다양한 가르침들에도 확대․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요가수뜨라������에 따르면 참된 자아이자 주체인 뿌루샤(puruṣa)는 어떠한 외부적 여건과도 동일시될 수 없다. 이것은 결코 대상화될 수 없는 순수 의식적 존재이며 방관자(draṣṭṛ)로서의 의미를 지닌다.25) 인간의 괴로움이란 이러한 방관자로서의 뿌루샤를 망각하고서 쁘라끄리띠(prakṛti)라는 물질적․외부적 조건에 함몰되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망각해 버린 데 원인이 있다. 이것을 신자유주의라는 사회적 차원에 적용시키면 앞에서 언급했던 왜곡된 소비주의에 현혹된 자아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상태에 처한 개인은 스스로의 주체성을 망각하고서 자기 자신을 상품의 이미지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소비행위를 통해 자신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이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적 소비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전개되는 무지(無知)의 양상일 것이다.
뿌르샤에 대응하는 물질적 실재인 쁘라끄리띠는 현상계의 질료적 원인(upādāna-kāraṇa)으로서 무한한 창조적 힘(śakti)을 지닌다. 쁘라끄리띠에 의한 현상계는 끊임없는 진화(pariṇāma)와 해체(pralaya)의 과정을 겪는다. 진화란 쁘라끄리띠로부터 일체의 현상이 전개되는 과정이며 해체란 쁘라끄리띠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는 뿌루샤의 향수(bhoga)를 위한 목적성을 지니며 해체는 뿌루샤의 해방(apavarga)을 위한 과정이다. 마치 철이 자석에 이끌리듯 쁘라끄리띠는 뿌루샤의 향수를 위해 스스로를 전개시켜 나간다. 이것은 소비자를 유혹하기 위해 급속도로 진화해 나가는 상품의 변모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진화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뿌르샤 즉 소비자의 향수를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뿌르샤의 자기망각 혹은 쁘라끄리띠와의 동일시이다. 이렇게 해서 특정 상품과 동일시되는 자기망각의 상태가 완결된다.
왜곡된 소비주의 혹은 현혹된 자아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은 스스로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상품의 이미지는 구매자의 힘과 명성과 성공을 상징한다. 어떤 상품을 입고 타고 쓰느냐로 그 사람의 인격마저 평가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러한 미혹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소비활동으로부터 분리된 인격적 주체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뿌루샤의 독존을 자각하는 식별지(識別知, viveka-khyātir)를 여기에 적용할 수 있다. 고전요가에서는 이것을 통해 쁘라끄리띠가 야기한 현상계와의 동일시를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26) 사실 뿌루샤는 본래부터 쁘라끄리띠와 다른 초월적 존재이다. 다만 전변을 거듭하는 와중에 뿌루샤의 독존을 망각하는 상태가 발생했을 뿐이다. 쁘라끄리띠의 유혹과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뿌루샤가 본래부터 초월적이라는 인식이 절대적이다.
고전요가의 실천론은 삼매라는 내면의 평정을 통해 식별지를 발현시키는 방법론적 절차를 취한다. 현혹된 자아의 상태에서는 식별지가 발현되지 않는다. 일단은 쁘라끄리띠에 부화뇌동하여 날뛰는 마음의 동요(citta-vṛtti)를 가라앉히는 것이 급선무이다.27) 이러한 내면의 안정을 발판으로 현혹된 자아의 상태에 대한 반성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지적인 견해(darśana)는 해탈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설명된다.28) 식별지는 단순한 지식의 누적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체의 지적 견해가 소멸할 때 일어나는 초이성적 성격의 것이다. 이점은 소비주의에 현혹된 상태를 벗어나는 과정이 그다지 수월하지 않다는 사실과 맞물린다. 특정 상품이 발산해 내는 이미지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통한 과시의 욕구를 다스릴 수 있는 성숙한 지성이 요구된다. 단순한 이론적 지식만으로는 그때그때의 감정과 충동에 휩쓸리게 된다.
������요가수뜨라������에서는 마음의 동요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실천수행(abhyāsa)과 욕망의 포기(vairāgyābhya)를 제시한다.29) 실천수행이란 팔지칙(aṣtānga)을 포함하는 것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서 쉬지 않고 반복되어야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30) 한편 욕망의 포기란 일체의 현상에 대해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31) 사실 실천수행을 통한 집중의 과정과 욕망의 포기는 별개의 내용이 아니다. 집중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곧 욕망의 포기로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가수뜨라������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실천수행의 측면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이점에서 고전요가는 이론적 측면에 치중된 모습을 보이는 자매학파 상키야(Sāṇkhya)와 차별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요가수뜨라������는 육체와 정신을 아우르는 원만하고 체계적인 수행을 강조한다. 그것만이 욕망에 지배되지 않는 성숙된 인격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식별지를 얻기 위한 요가의 여정과 왜곡된 소비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 완전히 동일할 수는 없다. 특히 후자의 과정은 신자유주의의 영향 아래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한편 소비주의에 현혹된 자아의 상태가 개인의 삶 전체를 커버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 또한 설령 그러한 상태를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이상적인 삶이 보장된다고 볼 수도 없다. 예컨대 경제적 무능으로 소비주의의 유혹으로부터 불가피하게 거리를 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더구나 그러한 현혹된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 반드시 요가의 팔지칙이 동원되어야 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거기에는 건전한 소비습관을 길들이기 위한 학습과 계몽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따라서 이상에서 기술한 은유적 표현은 실제 상황과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점을 감안하더라도 고전요가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이 지니는 의의는 충분히 곱씹을 만하다. 뿌르샤와 쁘라끄리띠라는 두 개념은 시대적 배경과 상관없이 육체와 정신을 지닌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해 효과적인 이해와 분석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외부적 조건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신성의 자각을 일깨운다. 이러한 정신성의 자각은 물질적 조건에 휩쓸리기 쉬운 현대적 삶에 전면적인 반성의 계기를 가져다 줄 수 있다. 특히 이상에서 언급했듯이 식별지의 발현을 위한 여정은 왜곡된 소비주의의 대안 모색에 충분히 참고가 될 수 있다. 외부적․객관적 존재로서의 삶과 주체적․초월적 존재로서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한에서 고전요가의 이원론적 가르침은 지속적으로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팔지칙의 경우는 어떠한가. 현대사회의 특수성을 인정하더라도 금계(yama)와 권계(niyama)라는 윤리적 실천은 여전히 필요하다. 오히려 무절제한 감각적 쾌락에 노출되기 쉬운 현대인이야말로 금계와 권계의 실천이 가져올 수 있는 이로움에 대한 인식이 더욱 필요하다. 또한 감관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이 존재하는 한에서 좌법(āsana)과 조식(prāṇāyāma)과 제감(pratyāhāra)의 실천 역시 지속적으로 요구된다. 특히 이들은 외모를 중요시하는 현대인의 경향에 자연스럽게 부합한다. 아울러 집중(dhāraṇā)과 선정(dhyāna)과 삼매(samādhi)의 심리적 실천 또한 정신적 동요와 방황을 가라앉히기 위한 효과적 수단으로 남는다. 많은 현대인이 스트레스성 질환과 같은 내면의 괴로움에 짓눌려 있으며, 이것으로 인한 중압감은 날이 갈수록 확산되는 추세이다. 선정과 삼매는 이와 같은 내부적 갈등과 번민을 잠재우는 직접적 수단이 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방식으로 고전요가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요가를 통해 외부세계에 대한 혁명적 변화를 유도해 내기란 쉽지 않다. 뿌루샤의 입장에서 쁘라끄리띠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이란 관조자로 남아 지켜보는 것이다. 따라서 요가를 통해 사회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끌어내기란 애초부터 한계를 지닌다. 사실 요가에서 바라보는 외부세계는 어디까지나 관조의 대상이지 투쟁하거나 맞서 싸워야 할 장소가 아니다. 그러나 이점을 인정하더라도 요가의 관조적 태도는 나름의 긍정성을 지닌다. 이것은 내면의 탐욕을 절제하지 못한 채 사회구조의 변혁을 부르짖는 섣부른 몸짓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발할 수 있다. 사회구조의 변혁을 꾀해 왔던 진보적 움직임들이 이러한 문제로 인해 자신과 주변을 오히려 혼탁하게 만든 사례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목격되곤 한다.
요가는 내면으로부터 시작되는 변화를 통해 사회 전체의 변화를 유도한다. 요가의 실천은 어느 누구와도 대체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 타자로서의 개개인에 초점을 맞춘다. 사회란 결국 그들이 모여 이루어지며, 그러한 이유에서 그들 각각이 이루어내는 내적 변화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개인적인 해탈이 곧바로 사회적 차원의 해탈이 될 수는 없다. 또한 요가가 가르치는 관조적 태도가 사회적 현안으로부터 멀어지거나 혹은 그것을 회피하게 만들 위험성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직(satya)이라든가 불살생(ahiṁsā), 탐내지 않음(aparigraha) 따위의 대서계(大誓戒, mahāvrata)에 바탕을 둔 지혜(prajñā)의 개발은 이러한 취약점과 위험성을 적절히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400년에 걸친 대영제국의 식민통치를 종식시킨 마하트마 간디(Mahātma Gandhi, 1869-1948)는 내면으로부터 시작되는 변혁이 사회 전체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성공적 사례를 제공한다.32) 그는 사회적․정치적 실천에 불살생이라든가 정직, 청정 따위가 접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절대적 타자로서의 뿌르샤는 객관적 존재로서의 ‘너’ 혹은 ‘우리’의 영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로지 홀로 존재하는 실존적 주체로서의 ‘나’를 가리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요가의 가르침은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유형의 실천적 움직임 또한 바로 이 ‘나’를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점에서 요가의 실천이 지닐 수 있는 사회적 함의는 결코 적지 않다.
5. 초기불교 수행과의 비교
여기에서는 초기불교와의 비교를 통해 고전요가의 실천론이 지니는 독자적 측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것을 통해 고전요가의 실천․수행에 내포된 장점과 단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초기불교와 고전요가는 수행전통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승되고 있다. 이들은 서로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각자의 실천론에서 나타나는 장․단점에 대한 비교는 예전과 다른 환경에 속한 현대적 수행문화의 모색에 참고가 될 것이다.
������요가수뜨라������는 요가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된다. 초기불교와 대비되는 고유의 측면이 바로 여기에서부터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요가란 마음의 동요를 없애는 것(yogaś-citta-vṛtti-nirodhaḥ)”이라는 정의는 고전요가의 일차적 관심사가 내부의 평온에 있음을 나타낸다. 사실 내면의 평온에 대한 추구는 고전요가 이전부터 확립되어 내려온 뿌리 깊은 전통에 속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렇듯 내부의 동요를 가라앉힌 평온의 상태를 일컬어 사마타(samatha)로 표현한다. 이러한 사마타의 실천은 들뜨거나 흥분된 상태를 가라앉히기 위한 여러 기법을 포함한다. 좌법(āsana), 조식(prāṇāyāma), 제감(pratyāhāra) 등은 사마타를 얻기 위한 예비적 테크닉에 해당한다. 한편 집중(dhāraṇā)과 선정(dhyāna)과 삼매(samādhi) 등은 본격적인 사마타의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사마타는 정신적인 향상을 위한 첫 걸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감정적 동요와 흥분을 다스려야만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초기불교가 발생할 무렵의 요가는 대체로 사마타에 초점을 모았던 듯하다. 출가 직후 붓다(Buddha)는 사마타 위주의 요가를 접했다.33) 그러나 그는 사마타를 통해 얻어진 평온과 고요가 영구적이지 않다는 발견하게 된다. 한때 고요해진 마음이라도 내․외의 여건이 변화하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지혜(paññā)를 통해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방법을 고안해 낸다. 있는 그대로(yathabhūtaṁ)를 관찰하도록 유도하는 위빠사나(vipassanā)가 그것이다. 위빠사나는 모든 현상의 본래적 특성을 확인함으로써 탐욕도 분노도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취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게 하여 탐냄(lobha)․성냄(dosa)․어리석음(moha)으로 대변되는 부정적 심리로부터 자연스럽게 벗어나도록 한다.
초기불교의 실천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라가 결합된 형태를 취한다.34) 이들의 동시적 실천은 일시적인 안정을 영속적인 것으로 확고히 해줄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실천방식은 이후 다른 종파의 수행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실 A.D. 4세기 무렵에 정착된 고전요가도 예외가 아니다.35) 앞서 언급했던 요가의 정의는 고전요가의 전반적 분위기가 사타마에 비중을 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요가수뜨라������에는 더 이상 사마타에 치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비중 있는 개념들이 등장한다. 예컨대 관조자(draṣṭṛ), 홀로 머무름(kaivalya), 식별지(viveka-khyāti), 통찰의 지혜(prajñā) 따위의 용어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쁘라끄리띠와 뿌루샤라는 이원론적 형이상학의 귀결로서 도출된 고전요가 고유의 개념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직관을 바탕으로 영속적인 안정을 의도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사마타보다는 초기불교의 위빠사나에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연구를 통해 필자는 사마타 혹은 선정의 실천과 관련하여 초기불교와 고전요가를 비교한 적이 있다.36) 거기에 따르면 초기불교와 고전요가의 선정 체계는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 특히 『요가수뜨라』에는 2가지 선정 분류의 방식이 존재하는데 이들 모두는 불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수용한 것이나 혹은 그것을 보완하여 체계화한 것이라고 한다.37) 또한 『요가수뜨라』에서는 ‘미세한 생각마저 없는 선정(無伺等至, nirvicāra-samāpatti)’의 상태에서 진리를 간직하는 통찰의 지혜(prajñā)가 생긴다고 기술한다.38) 한편 초기불교에서는 네 번째 선정(第四禪)의 상태에서 ‘번뇌를 다한 지혜(漏盡智, āsavakkhayañāṇa)’를 얻을 수 있다고 밝힌다.39) 이점은 고전요가와 초기불교 모두에게서 선정이나 삼매라는 심리적 안정을 기반으로 통찰의 지혜가 발생한다는 입장이 공유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와 고전요가는 동일한가. 물론 그렇지 않다. 초기불교는 기존의 실천․수행에 위빠사나 혹은 통찰의 지혜라는 개념을 첨가함으로써 자신만의 색채를 분명히 하였다. 한편 고전요가는 전통적인 요가적 실천법을 팔지칙의 형태로 정립하는 동시에, 식별지라든가 통찰의 지혜라는 개념을 첨가함으로써 더욱 체계적인 실천․수행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기에는 초기불교의 영향이 일부 반영된다. 이러한 체계성은 고전요가의 고유한 특징으로 간주될 수 있다. 특히 육체를 먼저 다스리고 마음을 닦는 과정으로 넘어가는 것은 상식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수행의 순서이다. 선행하는 육체적인 이완은 정서적 안정을 위한 적절한 준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고전요가의 이러한 체계성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뜻밖에도 이러한 고전요가의 체계성은 치명적 취약점으로 바뀔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초기불교의 실천․수행이 육체에 대한 인위적 조작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40) 초기불교에서는 모든 현상에 대해 다만 있는 그대로 관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와중에 내면의 감정과 정서를 왜곡 없이 지각하게 되고, 또한 무상(無常)․괴로움(苦)․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점에서 초기불교의 실천은 좌법이라든가 조식 혹은 제감 따위의 과정을 걸치는 고전요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초기불교에서는 육체에 대해 조작을 가하게 되면 관찰해야 할 내면의 심리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조작 자체에 탐욕이라든가 분노 따위가 스며들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초기불교는 좌법(āsana)과 조식(prāṇāyāma)과 제감(pratyāhāra)이라는 육체적 실천을 건너뛴다. 또한 육체적 통증이라든가 심리적 갈등과 같은 부정적 현상들마저 다만 통찰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또한 그것만으로도 부정적인 정서와 심리를 다스릴 수 있다고 가르친다. 예컨대 격앙된 감정이 발생했을 때 그것에 대해 오롯하게 집중하다보면 평온한 상태가 얻어진다고 본다. 격앙된 상태를 억지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관찰함으로써 그것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일깨운다. 이러한 방식으로 감정의 발생과 변화와 소멸을 주시함으로써 그것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고 가르친다. 초기불교 경전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육체적․정신적 괴로움을 극복해 나가는 일화들이 여러 차례 소개된다.41)
이러한 사실 외에도 초기불교에서 육체적 조절을 배제했던 데에는 별도의 중요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육체에 대한 조절과 통제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실천에 갇히게 만들 위험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초기불교는 고전요가의 체계적 방법과 달리 오로지 마음을 닦는 데 주력한다. 이것은 급진적이고 편향된 가르침으로 오해될 여지마저 남긴다. 그러나 초기불교는 바로 이점을 스스로의 실천적 장점으로 내세운다. 육체적 조절을 전제로 하는 실천은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나기 힘들다. 몸이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영역에 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적 조절을 위주로 하는 명상은 타인과의 관계 문제에서 개방된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마음을 다스리는 데 주력했던 초기불교의 실천은 고전요가에 비해 보다 용이하게 윤리적․사회적 차원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었다.42)
탐욕(貪)․분노(嗔)․어리석음(癡) 따위는 개인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것인 동시에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이들 부정적 성향들이 문제시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전제 위에서이다. 따라서 이들을 다스려 나가는 것은 개인적인 삶을 바로 세우는 의미와 더불어 사회 전체를 정화해 나가는 기초가 될 수 있다. 이점은 초기불교의 관심사가 다방면의 사회적․정치적 문제들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43) 바로 이점은 전통적인 요가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적 차원의 문제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사실과도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요가의 실천적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육체에 대한 조절과 통제가 반드시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선 몸이 허약한 초보 수행자의 경우 육체적 실천으로부터 정신적 실천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적절한 좌법과 조식은 짧은 시간에 육체의 피로를 풀고 정서적인 이완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거시적 차원에서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이상에서 언급한 고전요가의 실천적 취약점이 오늘날에까지 그대로 답습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기존의 취약점을 분명히 인식한 바탕 위에서라면 얼마든지 개선된 실천적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초기불교 역시 기존의 요가 전통을 개선하고자 했던 시도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초기불교든 고전요가든 이론보다는 실천에 주력했다. 그렇다면 그러한 실천을 통해 완성의 경지에 도달했던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유감스럽게도 짧은 시구들로 이루어진 ������요가수뜨라������는 이에 관한 구체적 언급이 없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방대한 문헌군은 이러한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한 내용을 전한다. 이것을 통해 고전요가의 이상적 인물상에 대해 떠올려 보는 것은 얼마간 가능하다. 초기불교에서는 완성에 도달한 이들을 아라한(arahant)으로 부르며, 그들이 행할 수 없는 9가지(九不能)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①의도적인 살생을 행할 수 없다. ②주지 않은 물건을 몰래 가져갈 수 없다. ③성적(性的)인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 ④의도적인 거짓말을 할 수 없다. ⑤자신을 위해 물건을 쌓아 놓고서 임의로 사용할 수 없다. ⑥충동에 이끌린 행위를 할 수 없다. ⑦분노를 일으킬 수 없다. ⑧어리석음에 빠질 수 없다. ⑨두려움에 빠질 수 없다.44)
위의 9가지는 『요가수뜨라』의 금계(yama) 및 권계(niyama)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금계와 권계의 가르침에도 사회적 맥락으로 해석해 낼만한 내용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위의 9가지에는 왜곡된 소비문화의 대안 모색에 적용될 수 있는 구체적 내용들이 나타난다. 특히 ⑤와 ⑥이 그러하다. 이들은 충동적 행위와 왜곡된 소비주의로부터 벗어나 살아가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은 쁘라끄리띠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뿌루샤의 독존을 지향하는 고전요가의 이상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점에서 내면의 평정을 흩트리지 않고 물질적 조건에 좌우됨이 없이 초연하게 살아가는 것은 초기불교와 고전요가에서 지향했던 공통의 관심사였다고 할 수 있다.
6. 요가 수행문화의 정착을 위한 제언
요가의 실천 대상은 수행자 자신의 몸과 마음이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대신하여 몸과 마음을 닦아 줄 수 없다. 이점에서 요가의 실천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다. 그러나 요가가 사회성을 지닌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요가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특정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요가의 사회성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도시문화는 과거와 달리 여유로운 요가의 실천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 도시문화에 소속된 어느 누구라도 요가를 배우기 위해 하루 중 일부의 시간을 어렵싸리 쪼갤 수밖에 없다. 어쩌면 현대요가의 변수가 바로 여기에서 찾아질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미 언급했듯이 요가 수행문화의 정착을 고려하는 작업에서 현대사회의 특징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 사항이다. 근본적으로 요가란 감각적․말초적 쾌락의 길과는 반대의 방향을 추구한다. 물질적 조건에 지배된 상태로부터 벗어나 내면의 정신성을 회복하는 데 궁극의 목적을 둔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적 경쟁의 논리는 감각적․말초적 쾌락을 경쟁력의 강화를 위한 주요 자원으로 활용한다. 사실 일반인을 요가로 이끄는 수단으로 이것만큼 강력한 것은 없어 보인다. 실제로 요가원에 등록하여 수강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용과 체형관리를 목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어떠한 조건에서도 마음의 평정과 행복이 가능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요가의 본질적 가르침과는 거의 무관하다. 이점을 일깨우지 못하는 요가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그 지속성과 생명력을 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무한경쟁의 사회적 분위기는 요가의 실천에 부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운다. 많은 지도자들이 일반인의 관심과 욕구를 증대시키기 위해 새로운 방법들을 모색한다. 특히 이점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등장한 수많은 요가프로그램들이 좌법(āsana)에 주력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수백에 이르는 고난도의 변형된 좌법들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원래의 좌법은 「게란다-상히타」에 32가지, 「하타요가-프라디피카」에 20여 가지, 「시바-상히타」에 4가지뿐이다.45) 이들 전통적인 좌법은 수백 년에 걸친 검증의 시간을 걸쳤다. 그러나 새롭게 쏟아진 기묘한 좌법들이 그러한 검증의 시간을 버텨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나친 고난도의 좌법은 그만큼 부작용의 위험도 크다. 이점을 간과하고서 시도된 변형된 좌법들은 언젠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임에 분명하다.
요가 수행문화의 정착을 위해 지도자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였던 ‘지도자과정’ 혹은 ‘단기이수과정’ 따위에 대해서는 많은 반성이 요구된다. 짧은 기간에 고액의 수강료를 지불하는 지도자육성프로그램들이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그리하여 불과 몇 달 남짓한 기간에 속성으로 지도자자격증을 얻은 수많은 사람들이 요가원을 개설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결과 충분한 자질과 경험을 갖추지 못한 지도자들이 한정된 여건에서 제 살 깎아 먹기식 경쟁을 펼쳤다. 이러한 사태는 결국 요가계 전반에 대한 실망과 불신을 야기하였고 장기간에 걸친 요가산업의 불황으로 이어졌다. 이것으로 인해 대다수 신출내기 지도자들이 상당한 금전적․정신적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사례는 충분한 대책 없이 시작된 요가의 상업화가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뼈아픈 교훈이다.
어쩌면 요가의 대중화와 상업화는 피할 수 없는 추세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요가의 현대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필요하다면 적절하게 상업성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그래야만 이 분야에 종사하려는 사람들이 꾸준히 뒤를 잇게 것이다. 그러나 요가에 대해 잘못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결코 금물이다. 그릇된 이해로 시작된 요가는 별도의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한 실망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것은 결국 요가를 저버리게 만드는 원인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점을 어떻게 해서 피해 나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요가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부터 요가를 체계적으로 학습해야 한다. 또한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적․학술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요가의 긍정적․부정적 측면들에 대해 성숙된 안목을 갖추어야만 요가의 가르침을 장기적으로 원만하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요가의 다양한 실천 양상이 야기하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요가는 장구한 세월을 통해 다수의 전통에 의해 계승되어 왔다. 따라서 일관된 실천 양상을 기대하기 힘들다. 어쩌면 이것은 요가의 본래적 측면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일반인에게 통일성 없는 실천은 오해와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지도자마다 제각기 다른 처방을 내린다면 신뢰감을 갖기란 힘들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분위기에서 검증되지 않은 섣부른 기법들이 끼어들 가능성마저 열려있다. 한편 딴뜨리즘의 영향을 받은 몇몇 방법들에는 일반적인 사회관습에 비추어 용인되기 힘든 내용들도 포함된다.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들만이 그러한 가르침을 적절히 소화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요가 기법을 무작정 대중화할 수 없다는 사실도 문제이다. 이상과 같은 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공신력 있는 전문가 집단을 중심으로 다양한 실천법을 검증하고 정리․소개하는 작업이 시도되어야 한다.
이쯤에서 요가의 사회적 회향 또한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요가의 실천은 개인적으로 진행되는 특성을 지닌다. 그러한 이유에서 수행자는 응당 자기 자신의 몸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몸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집착과 아만을 키우게 될 위험성이 있다. 또한 타인이나 주변의 상황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경향마저 생겨나게 할 수 있다. 사실 요가의 실천이 사회적 현안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 되거나 혹은 비판의식을 둔감하게 만든다는 지적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이러한 양상은 요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누적시켜 건전한 요가 수행문화의 정착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이제 요가는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도 적절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많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요가의 이로움을 알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회적 실천의 문제에서 요가가 지닌 고유한 측면들은 충분히 감안되어야 한다. 요가의 가르침이 본래적으로 정치적 색채가 강하지 않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외부적 실천에 매몰되어 내면적인 가르침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잊는 일도 결코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러 요가를 사회적․정치적 현안으로부터 소외시켜야 할 이유도 없다. 요가를 전인적 가르침의 하나로 인정할 수 있다면, 요가의 실천가가 자신의 여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회적․정치적 행동에 나서는 것 또한 인정되어야 한다.
당장 생각할 수 있는 사회적 실천으로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프로그램의 운영, 건전한 소비문화를 위한 시민운동, 쾌적한 삶을 위한 환경운동,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인권운동,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한 각종의 사회사업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 볼 수 있다. 이들은 ������요가수뜨라������에 언급된 불살생(ahiṁsā)․정직(satya)․청정(śauca)․만족(saṁtoṣa)․자애(maitrī)․연민(karuṇā) 등의 가르침과 직․간접적인 관련성을 지닌다. 이들에 대한 실천은 개인적으로 모색될 수도 있을 것이고, 요가동호인 혹은 공식적인 요가단체의 명칭으로도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 진정성을 가지고 이러한 실천에 매진한다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는 내면의 부정성을 다스리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천의 수혜자는 누구보다도 이것을 행하는 본인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실천은 요가 수행문화를 확산시키고 정착시키는 데 훌륭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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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희승 감수, 『민중 엣셋스 국어사전』, 서울: 민중서림, 2006, 872쪽.
2) 이태영, 「요가수행에 대한 고찰」, 『인도철학』제2집, 서울: 민족사, 1992, 81-104쪽.
3) 신국원, 『신국원의 문화 이야기』,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2, 58쪽.
4) 신국원, 앞의 책, 59쪽 재인용.
5) 박명희, 『여가문화의 이해』, 서울: 대왕사, 2010, 240쪽.
6) Georg Feuerstein, Encyclopedic Dictionary of Yoga, London, Unwin Paperbacks, 1990, 81쪽, 261쪽, 276쪽.
7) Andre Padoux, ‘Tantrism’,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vol. 14,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1978, 276쪽.
8) 김재준 옮김(Richhard Niebuhr), 『그리스도와 문화』,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46쪽 재인용.
9) 김재준 옮김, 앞의 책, 47-54쪽.
10) 예컨대 Bhagavagīta에는 순수성(sattva), 격정성(rajas), 둔중성(tamas)이라는 3가지 기질에 따른 요가의 실천 양상이 다양하게 논의된다. BG, 17장 1-28게송 참조.
11) Surendranath Dasguta, Yoga Philosophy -In Relaation to Other Systems of Indian Thought, Delhi, Motilal Banarsidass, 1974, 44쪽.
12) 박효엽, 「과정으로서의 요가」, 『요가학 연구』제7호, 한국요가학회, 2012, 20쪽.
13) 임승택, 「업 개념의 형성과 발달 과정에 대한 고찰」, 『철학연구』제103집, 대한철학회, 2007, 156쪽 이하
14) 임승택, 「불교적 웰빙 담론의 모색」, 『동서사상』제1집, 경북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2006, 9-13쪽.
15) 위키백과사전, http://ko.wikipedia.org/wiki/%EC%8B%A0%EC%9E%90%EC%9C%A0%EC%A3%BC%EC%9D%98> 참고.
16) 안병영,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충격과 대응」,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이념․현실․대응』, 서울: 나남출판, 2000, 22-55쪽.
17) 전병유,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양극화」, 『신자유주의 대안론』, 경기도 파주: (주)창비, 2009, 99-110쪽.
18) 안병영, 앞의 책, 33-38쪽.
19) 박경준, 「불교적 관점에서 본 소비대중문화」, 『불교학보』제36집, 동국대불교문화연구원, 1999, 154-156쪽 참고.
20) 김미숙 옮김(Sulak Sivaraksa), 「자본의 폭주에 대한 불교적 진단」, 『불교평론』제6권 3호, 336-347쪽.
21) 임승택, 앞의 논문(2006), 11-13쪽.
22) 예컨대 보디스켄(body-scan)이라든가 하타요가(hatha-yoga)의 방법을 초기불교의 위빠사나(vipassanā) 명상과 접목시켜 고안해 낸 ‘사띠에 근거한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MBSR)’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밖에도 만성적인 우울증 치료를 위해 만들어진 ‘사띠에 근거한 인지치료(MBCT)’, 경계성 성격 장애와 일반적인 정동 조절에 사용되는 ‘변증법적 행동치료(DBT)’, 불유쾌한 감각들을 대처하기 위한 ‘수용-참여 치료(ACT)’ 등도 이와 유사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Christopher K. Germer에 의하면 동양 전통의 명상은 서구적 전통에 기반을 둔 그 어떤 치료법보다 불안․우울증․공황장애 등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며, 가장 현대적이고 두드러진 형태의 행동치료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또한 미국에서 활동하는 심리치료사 중 41.4%가 마음지킴(sati, mindfulness)이라는 초기불교 명상의 원리를 자신들이 선호하는 치료지향(favored orientation)으로 삼는 것으로 나타났다. Christopher K. Germer, “Mindfulness and Compassion in Western Psychotherapy”, The Fress in 2009 Fall Conference of Korean Association of Buddhism and Psychotherapy, 21쪽; 「법보신문」, 1025호(2009년 11월 30일자), 보도기사.
23) “탐내지 않음의 계행이 확립되면 전생(轉生)의 상태를 알 수 있다(aparigraha-sthairye janma-kathaṃtā-saṃbodhaḥ).” YS. 2-39게송.
24) “만족을 통해 최고의 기쁨이 획득된다(saṃtosād-anuttamaḥ sukha-lābhaḥ).” YS. 2-42게송.
25) “방관자와 [외부적으로] 보이는 [대상과의] 동일시야말로 제거되어야 할 [괴로움의] 원인이다(draṣṭṛ-dṛśyayoḥ saṃyogo heya-hetuḥ).” YS. 2-17게송.
26) “무지가 사라짐으로써 [현상계와의] 동일시 또한 사라진다. 이것이 [괴로움의] 그침이며 보는 자의 독존이다. 그침을 얻는 방법은 동요 없는 식별지이다(tad-abhāvāt saṃyoga-abhāvo hānaṃ tad-dṛśeḥ kaivalyam. viveka-khyātir-aviplavā hāna-upāyaḥ).” YS. 2-25, 26게송.
27) ������요가수뜨라������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아래의 유명한 정의가 그것이다. “요가란 마음의 동요의 지멸이다(yogaś-citta-vṛtti-nirodhaḥ).” YS. 1-2게송.
28) 이와 관련하여 후대의 주석서인 ������요가브하샤������에서는 “지견은 해탈의 원인이 아니다(na darśanaṁ mokṣakāraṇam). 2-23”라고 설명한다.
29) “그러한 [마음의 동요를] 지멸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실천수행과 욕망의 포기이다(abhyāsa-vairāgyābhyāṃ tan-nirodhaḥ).” YS. 1-12게송.
30) “그러나 [실천수행은] 오랜 시간에 걸쳐 쉬지 않고 신중히 반복해야 비로소 확고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sa tu dīrgha-kāla-nairantarya-satkāra-āsevito dṛḍha-bhūmiḥ).” YS. 1-14게송.
31) “욕망의 포기란 경험되거나 전해진 대상에 대해 [발생하는] 갈애를 제압한 의식이다(dṛṣṭa-ānuśravika-viṣaya-vitṛṣṇasya vaśīkāra-saṃjñā vairāgyam).” YS. 1-15게송.
32) 강종원 옮김(Ajit Dasgupta), ������무소유의 경제학������, 솔출판사, 2000, pp.37-51, 280-284쪽; 임승택, 앞의 논문(2006), 5-6쪽.
33) 출가 직후 붓다는 당시 유명한 요가수행자였던 Ālāra-Kālāma와 Uddaka-Rāmaputta에게 찾아가 ‘아무 것도 없는 경지(無所有處定, ākiñcaññāyatanasamāpatti)’와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非想非非想處定,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māpatti)’라는 선정을 배웠고 또한 이를 체득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Vin. I. 7쪽; MN. 163-165쪽 등.
34) 이와 관련한 전형적인 경구로 다음을 거론할 수 있다. “통찰의 지혜가 없는 이에게 선정은 없고 선정을 행하지 않는 이에게 통찰의 지혜는 없나니, 선정과 통찰의 지혜가 함께 있을 때 그는 실로 열반의 가까이에 있다(Natthi jhānaṃ apaññassa paññā natthi ajhāyato, Yamhi jhānaṃ ca paññā ca sa ve nibbāṇasantike).” Dhammapada, 372게송, 54쪽; 임승택, 「초기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사마타와 위빠사나」, 『인도철학』11권 1호, 인도철학회, 2001, 205-234쪽 참조.
35) 이태영, 「고전요가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연구」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1992, 35-37쪽.
36) 임승택, 「불교의 선정과 요가의 삼매에 대한 비교연구」, 『회당학보』 5집, 회당학회, 2000, 215-251쪽.
37) 『요가수뜨라』에 나타나는 두 가지 삼매의 분류체계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 savitarkā-samāpatti -- savitarkā-samādhi ������
sabīja-samādhi ������ nirvitarkā-samāpatti ������
������ ������ savicārā-samāpatti -- savicārā-samādhi ������ saṃprajñāta-samādhi
������ ������ nirvicārā-samāpatti ������ ������
������ ānanda-samādhi ������ ������
������ asmitā-samādhi ������ ������
������ asaṃprajñāta-samādhi
nirbīja-samādhi ������
������- - - - - - dharma-megha-samādhi - - - - - - - - - ������������
(마음집중의 대상에 따른 분류) (마음의 상태에 따른 분류)
위의 도식에서 뒤쪽의 savitarkā-samādhi(有想三昧)와 savicārā-samādhi(無想三昧) 등의 구분은 마음의 상태가 불안한가 혹은 고요한가에 따른 것으로 dharma-megha-samādhi(法雲三昧)와 함께 불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앞쪽의 sabīja-samādhi(有種子三昧)와 nirbīja-samādhi(無種子三昧) 등의 구분은 마음의 집중 대상이 거친 것인가 혹은 조악한 것인가에 따른 삼매의 구분은 불교의 영향을 자체적으로 보강하여 체계화한 것이라고 한다. 임승택, 앞의 논문(2000), 226-227쪽.
38) “미세한 생각마저 없는 [선정(無伺等至)이] 확립되었을 때 마음은 평정되고 맑아진다. 거기에 진리를 간직한 통찰의 지혜가 있다.(nirvicāra-vaiśāradye'adhyātma-prasādaḥ/ ṛtaṃ-bharā tatra prajñā).” YS. 1-47, 48게송.
39) 예컨대 Mahāsaccakasutta에는 ‘번뇌를 다한 지혜(漏盡智)’를 얻는 일련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즉 첫 번째 선정(初禪) ⇒ 두 번째 선정(第二禪) ⇒ 세 번째 선정(第三禪) ⇒ 네 번째 선정(第四禪) ⇒ 전생의 거처를 기억하는 지혜(宿主隨念智) ⇒ 하늘의 눈을 가진 지혜(天眼智) ⇒ 번뇌를 소멸한 지혜(漏盡智)가 그것이다. 이들 중에서 처음의 넷은 선정의 상태를 가리키고 뒤의 셋은 그러한 선정을 바탕으로 얻는 통찰의 지혜(三明)에 해당한다. MN. I. 246-249쪽 참조.
40) 임승택, 『위빠사나 수행관 연구』, 서울: 경서원, 2007, 16-20쪽.
41) DN. II. 99쪽, 128쪽, 140쪽, 158쪽, 162쪽 등.
42) 임승택, 『붓다와 명상』, 서울: 민족사, 2011, 66-68쪽.
43) 물론 초기불교 경전은 전문 출가자를 대상으로 하는 가르침을 위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Kalupahana가 지적하듯이 바라문교의 카스트(caste) 제도에 대한 비판과 같은 사회적 언급 또한 자주 나타난다. 또한 붓다는 정치적 문제에 관련하여, 신(神)의 임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중적 합의와 도덕적 순수성에 의해서 그 권위를 인정받는 ‘보편군주(轉輪王, cakkavatti)’의 개념을 강조하곤 하였다. 나아가 재가자를 대상으로 하는 재산관리법에서부터 사회복지의 실천과 연관된 가르침들도 상당 분량 존재한다. 이러한 사회적 가르침은 고전요가의 계보를 잇는 문헌들에서는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AN. II. 67쪽; AN. III. 10쪽; 김종욱 옮김(D. J. Kalupahana), ������불교철학사������, 서울: 시공사, 1996, 61쪽; 박경준, 「원시불교의 사회․경제사상연구」, 동국대박사학위청구논문, 1992, 136쪽 이하.
44) DN. III. 133쪽; 임승택, 앞의 논문(2006), 17-18 재인용.
45) 이태영, 『요가의 이론과 실천』, 서울: 민족사, 1996, 68-69쪽.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2707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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