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원효대사 법문 - 자유론

수선님 2020. 2. 9. 12:48

자유론(自由論) Ⅰ

만약 우리가 태어나서 80∼90년간 하루 밥 세끼 잘 챙겨먹으며 건강하게 사는데 만족한다면, 그래서 그 속에 초월도 없고 신화도 없고 자유도 없다면 우리네 인생 자체가 너무 서러운 게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언뜻 돌아보면 대단히 초라하고 무미건조하고 의미 없어 보여도 때로는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때로는 초월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꿈을 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이 원효의 자유,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다는 그의 무애론(無碍論)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입니다.

원효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요. 원효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지극히 구체적인 보통인들의 밑바닥 삶까지 완벽하게 내려왔던 사람입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공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원효의 글 중에서 ‘공자도 대단한 성인이지만 부처님과 더불어 논하기는 힘들다’고 비판한 구절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노자나 장자와는 어떻게 다를까요. 원효의 저서 속에는 현지우현지(玄之又玄之), 묘계환중(妙計環中) 등 노장 철학의 문구들이 구체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자는 그야말로 우리들의 시시한 삶으로부터 너무 멀리 가버렸고, 장자는 높은 산에 앉아서 기웃거리고 있을 뿐 사실상 여기까지 내려오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비해 원효는 보통 사람들의 삶과 다를 바 없는 밑바닥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원효가 밑바닥에만 머물렀다면 더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죠. 하지만 원효는 끝없이 초월을 시도하고 끝없이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원효다운 원효’라 하겠습니다.

『삼국유사』에서도 원효를 제목 붙이기를 원효불기(元曉不羈) 즉 원효는 굴레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걸림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송고승전」에서도 그가 일정한 틀에 박히지 않고 상당히 자유로왔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걸림이 없음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삶의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불교는 삶에 대한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따라 해야 할 실천적 가르침입니다.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인식의 내용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마치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지는 자전거처럼 끊임없는 동적인 과정, 정지하지 않는 것, 끝없이 부딪히며 살아가는 실존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리는 온 몸으로 획득되고, 살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진정으로 살기 위해서는 이론이나 인식이 아니라, 실존으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상의 긴장된 삶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해방’이란 마음 놓고 사는 것입니다. 마음을 들고 마음조리면서 사는 것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그리고 초조합니다. 스스로 만든 감옥을 탈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탐욕적인 여러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도 해방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초월하게 되며, 초월함으로써 해방되는 것이라고 이르셨습니다. (『잡아함경』 중의 연소경)

불교도들이 행하는 주된 노력은 모든 조직화로부터의 해방 또는 해탈입니다. 일에서 걸림이 없으므로 무애(無碍)라 하고, 걸림이 없음으로 해탈인 것입니다. 인간은 온갖 사슬과 속박으로부터 마땅히 해방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허구의 자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너무 자아가 강해서 그릇이 물이 가득 차 있다면 제 이야기는 물론이요 원효의 이야기도, 부처님 이야기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선 거절부터 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누에는 자신이 토해낸 실로 자신을 묶어 마침내 고치 속에서 꼼짝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미는 자신이 뽑아낸 거미줄을 둘러치고 그 위를 자유롭게 다닙니다. 잘못하면 스스로를 뽑아낸 실에 구속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실을 자유로운 활동의 무대로 만드는 지혜, 그것은 보살의 지혜입니다.

이것은 『입능가경』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원효는 자아로부터 벗어난 해방자였고 자유인이었습니다. 불교로부터도, 승려라는 행색으로부터도, 지식으로부터도, 명예로부터도, 계율로부터도 그는 언제나 자유로웠습니다.

불교에 입문해 고승대덕으로 추앙받던 그가 갑자기 승복을 훌훌 벗어버리고 스스로를 소성거사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속인들처럼 사랑을 하고 아들을 낳습니다. 한편 그의 저서에서 드러나듯이 원효가 얼마나 깊은 사유를 했습니까. 그런데 어느날 길거리에서 춤추고 박을 치고 다니며 사람들로부터 돌팔매를 맞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지식으로부터도 자유로왔습니다. 아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이 낫고, 즐기는 것보다는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원효는 언어가 아닌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계율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자유롭게 살다간 사람입니다.

그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이론적으로 규명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이를 구현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무애사상(無碍思想)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자유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항상 마음의 자유, 자아로부터의 해탈을 강조합니다. 물론 바깥으로부터의 사회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여전히 중요합니다. 이는 인간이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이상 우리의 공업(工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초점은 우선 자아로부터의 해탈에 맞춰져 있습니다. 주위에서 아무 간섭도 안하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졌을 때 그래서 온갖 잔소리들을 안들어도 될 때 우리가 편안할 것 같지만, 막상 자기 번뇌망상에 얽매이기 시작할 때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이를 어떻게 벗어나느냐가 중요한데 원효는 자아로부터의 해탈을 위해 일정한 범위나 틀 속에 안주하기를 거부했다. 그 주체적인 방법으로 유방외(遊方外)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범위를 스스로 설정을 하고 나이가 몇이니 내 직업이 무엇이니 하는 범위를 설정하곤 합니다. 그런데 원효는 어떤 카테고리도 넘어서서 놀고자 한 것입니다. 원효가 ‘유방외(遊方外)’, ‘초출방외(超出方外)’ 등의 표현을 즐겨 썼던 것도, 무애의 자유인으로 행동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나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원효 『화엄경』에 나타나는 이 게송을 재발견했고, 이로부터 無碍라는 용어를 꺼내호로병에 이를 새겨서 다녔습니다.

걸림 없이 행동하는 원효의 모습을 『송고승전』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의 발언은 미친 듯 난폭하고, 예의에 어긋났으며, 행동은 상식의 선을 넘었다. 거사와 함께 주막 이나 기생집에도 들어가고, 誌公과 같이 금빛 칼과 쇠지팡이를 가지기도 했고, 혹은 주석서를 써서 『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하고, 혹은 사당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즐기고, 혹은 여염집에서 유숙하고, 혹은 산수에서 坐禪하는 등 계기를 따라 마음대로 하여 일정한 규범이 없었다.

고려 명종(明宗) 때 문신 이인로(1152~1220)의 『파한집』에서는 원효가 시중 잡배들과도 어울렸다고 했고, 『삼국유사』에서는 원효가 노래하고 춤추며 천촌만락을 다니며 대중을 교화했다고도 전합니다. 길거리에서 ‘자루 없는 도끼’를 빌리고자 노래를 했다거나, 소를 타고 거리를 다니면서 『금강삼매경』의 주석을 했다거나, 논에서 벼를 베고 있는 여인에게 희롱삼아 그 벼를 달라고 했다거나, 혜공과 함께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먹었다거나, 사복과 더불어 죽은 사복모를 장사지냈다는 등의 여러 모습에서도 원효의 활달하고 자유로운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물론 길거리를 다니며 여인이 필요하다고 외치고 다니는 광경이나, 문천교를 지나다가 일부러 냇물에 떨어져 옷을 적셨다는 행동에는 설화적 윤색도 보입니다. 후대 사람들은 원효의 환속을 실계나 파계로 평가해 오지만, 원효 자신은 그러한 행위를 과연 파계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특히 일정한 계율의 틀 속에 갇혀버리는 경우야말로 계를 범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그의 확신이나, 『보살계본지범요기』 등에 나타나는 계율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확신에 찬 그의 이해 등을 염두에 둘 때, 원효 스스로 요석공주와의 사랑을 파계로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설총을 얻은 뒤에 스스로 승복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자신을 낮추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이광수가 『원효대사』에 서술한 것처럼 항상 자신이 잘못했다고 굽신거리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느끼는 원효는 잘못해서 여자를 취했느니, 아이를 낳았느니 하면서 줄곧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를 거듭하는 삶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유론(自由論) Ⅱ

원효의 무애자재한 모습을 설화식으로 표현한 이야기들에서는 원효가 무애자재(無碍自在)하여 일시에 몸을 백 곳에 나투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몸을 백그루 소나무에 나타냈다(分軀於百松)’ ‘몸을 백가지로 나투었다[分百身]’ ‘몸을 여러 곳에 나타냈다(數處現形)’ ‘백 곳에 형상을 드러냈다(百處現形)’ 등의 표현이 대개 이 뜻입니다. 일찍이 원효는 송사(訟事)로 인해 몸을 백 그루의 소나무에 나타냈던 일이 있고, 이로 해서 모두들 그의 위계(位階)를 초지(初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불교교리에 근거를 둔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원효는 현재 화엄지(華嚴地)에 머무는 대권보살(大權菩薩)로 이해되기도 했고, 성종성(聖種性)의 대종사(大宗師)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화엄경』에서는 52, 혹은 53계단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 등 보살의 수행계위 52위 중 십지(十地)는 41위로부터 50위에 해당하고, 십지 중의 초지(初地)는 환희지(歡喜地)입니다. 환희지는 보살이 무량겁을 수행한 끝에 처음으로 의혹을 끊고 깨달음에 눈을 뜬 경지이며, 이 경지에 도달한 보살은 나머지 십지 사이에 두번째 무량겁을 겪은 뒤 성불을 하게 됩니다. 부처의 이치를 깨달아 다시는 성인의 지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자신을 이롭게 하면서도 남을 이롭게 하는 행동을 하므로 기쁨이 많아 환희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언제나 싱글벙글하는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신(十信)으로부터 십회향(十廻向)까지는 범부의 위치[凡夫位], 그리고 초지(初地) 이상은 성자의 위치[聖者位]로 구분됩니다. 이와 같은 구분에 의할 때, 원효의 위계가 초지(初地)였다거나 그가 화엄지(華嚴地)에 머무는 대권보살(大權菩薩)이었다는 설은 그가 성자(聖者)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는 인식을 토대로 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원효가 성종성(聖種性)의 대종사(大宗師)였다는 설은 다음의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영통사대각국사비명「靈通寺大覺國師碑銘」에 보입니다.

불법이 양(梁) 대통(大通) 원년 정미(527)년에 처음 신라에 들어온 뒤 1백여 년 만에 의상(義想)과 원효(元曉)가 일어나니, 두 분은 성종성(聖種性)의 대종사(大宗師)였다. 말광(末光)의 비친 바 여파(餘波)의 가한 바에 모두 암흑 속에서 벗어나 고명(高明)에 나아갔다.

불체성(佛體性)의 종류를 여섯 가지로 분류한 육종성(六種性) 중의 네 번째가 성종성(聖種性)입니다. 이것은 십지위(十地位) 중에서 종성(種性)을 증견(證見)하고 범부의 성(性)을 끊은, 즉 성자의 위치에 들어간 단계를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원효의 설명이 참고가 됩니다. 그는 “십지위(十地位) 중에서 종성(種性)을 증견(證見)하고서 범부(凡夫)의 성(性)을 끊기 때문에 성종성(聖種性)이라 한다”고 하여 십지(十地)의 보살위(菩薩位)는 곧 성종성(聖種性)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해석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에는 초지보살(初地菩薩)이 부지런히 정진하면 백 명의 부처를 볼 수 있고, 능히 백 가지로 변신할 수 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원효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부처의 몸이 실제로는 작은 티끌의 수와 같이 많은 몸이 아니지만, 자재(自在)한 때문에 티끌과 같은 몸을 나타낸다.(如來之身 實非微塵 以自在故 現微塵身) (「열반종요(涅槃宗要)」)

이처럼 원효는 초지보살이 능히 백 가지로 변신할 수 있다고 한 『화엄경』의 구절을 자재(自在)한 때문에 수많은 몸을 나타낸다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초지보살은 대자유의 몸이 된다는 『화엄경』의 내용과 원효가 백 곳에 몸을 나타내었기에 그의 위계를 초지라고 했다는 설화는 같은 문맥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너무 바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몸이 열 개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원효가 일시에 몸을 백 가지로 분신했다는 이야기에는 소박한 사람들의 희망이 투영되기도 했고, 원효 무애행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원효의 위계가 초지(初地)였다고 하는 것은 그가 이입(理入)의 경지를 넘어서 행입(行入)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입이란 이론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행입이란 실제적인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치에 따라 믿고 이해하였으나, 아직 증득하여 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입(理入)이라고 한 것이니, 계위(階位)가 초지(初地) 이전에 있다. 행입(行入이라고 한 것은 이치를 증득하여 수행하여 무생행(無生行)에 들어갔기 때문에 행입(行入)이라고 한 것이니, 계위가 초지 이상에 있다. (「금강삼매경론」, 김달진 p.351)

六行 중 앞의 信·住·行·回向의 四位는 理入의 계위고, 뒤의 地·等覺의 二位는 行入에 해당 한다.(此六行中 前四位是理入階降 後二位者 行入差別) (「金剛三昧經論」)

행입(行入)이란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이해의 단계를 지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의 단계로 접어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원효(元曉)의 위계(位階)가 초지(初地)에 해당한다는 인식은 그의 실천행(實踐行)에 대한 높은 평가에 그 배경이 있습니다. 원효의 실천행이 수행(修行)은 물론이고 교화(敎化)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었던 사실을 유의하면, 그의 위계가 초지(初地)에 해당한다는 평가는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석궁에서 아리따운 공주를 품에 안고 봄꿈을 꾸었던 원효, 공주와의 만남은 우발적인 파계도 실수도 아니었고, 무애도인의 도력을 자랑삼아 시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속을 떠나 불문으로 갔던 그가 다시 세속의 거리로 돌아오는 강렬한 몸짓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원효는, “戒相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계바라밀을 具足한다”고 했고, 또 “출세법(出世法)은 세간법(世間法)을 치유하는 법이고, 출출세법(出出世法)은 출세법을 치료하는 법이다”라고 한 「섭대승론」의 구절에 주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8地 이상의 보살은 출세로부터 다시 벗어나며, 이런 보살이 머무는 곳은 이미 더러운 땅이 아니라 깨끗한 땅이라고 토로했습니다.

그가 거사의 모습으로 살았다고 해서 불교를 아주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더욱 열심히 교학에 정진했고, 한층 자유롭게 교화했습니다. 그가 환속했다고 세속에서만 살았던 것도, 또한 대중의 교화에만 전념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의 교학은 만년까지 지속되었고, 절에서 머문 경우도 많습니다.

그는 55세에 행명사(行名寺)에서 「판비량론」을 저술했고, 분황사에서는 「화엄경소」를 지었으며, 초개사에서 현풍을 드날렸고, 마침내 혈사에서 입적했습니다. 원효는 요석공주와 설총, 그 처자식에게 집착하면서 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곁을 훌훌히 떠나가 버리거나 수행자라는 구실을 붙여, 인간적인 정이나 세속적인 의무를 외면해 버린 비정하고 무책임한 사내는 아니었습니다.

원효는 穴寺에서 많이 살았고, 또한 입적도 이 절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혈사 곁에 설총의 집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설총은 그 유해를 부수어 흙에 섞은 뒤 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셔 두고 공경 사모하며 매우 슬퍼했다고도 합니다. 아들 설총이 분황사의 원효소상 옆에서 절하니 그 소상이 문득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기에 고려 후기까지도 이 절의 원효상은 옆을 돌아보는 자세로 있었다고도 합니다.

「금강삼매경론」에는 출가와 재가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곧 이 경 ‘입실제품(入實際品)’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이상(二相)에 있지 않느니라. 비록 출가하지 않 았다 할지라도 在家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 때문이다. 비록 법복이 없고, 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를 갖추 지 않았다 할지라도, 또한 布薩에 들어가지 않았다 할지라도, 능히 제 마음으로 無爲自恣하여 성과(聖果)를 얻으며, 이승(二乘)에 머무르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갈 것이고, 뒤에 地를 다 채우게 돨 때에 불보리(佛菩提)를 이루게 될 것이다.

菩薩 如是之人 不在二上 雖不出家 不住在家故 雖無法服 不具持波羅提木叉戒 不入布薩 能以自心 無爲自恣 而獲聖果 不住二乘 入菩薩道 後當滿地 成佛菩提 (「金剛三昧經論」)

 

 

자유론(自由論) Ⅲ

한국불교에는 큰 병폐가 하나 있습니다.

불·법·승(佛法僧) 할 때 승가라는 것은 사부대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출가 남녀, 재가 남녀 모두가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거룩한 스님이라고 번역해, 30년간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한다고 노래로 불러왔습니다. 그 후로 스님들은 신도들을 저 밑바닥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철저히 잘못된 것입니다. 언어가 사람을 규정해버린 것입니다.

원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승복을 입고 있어 거추장스럽고 자유롭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출가와 재가, 그 어느 한 쪽에도 머무르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금강삼매경의 “비록 출가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재가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대목은 원효의 출가와 환속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 구절에 대해 원효는 말했습니다.

“경전에서 이 두 모습에 있지 않으며 비록 출가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재가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한 것은 도속이변(道俗二邊)의 상에 떨어지지 않기에 변(邊)을 떠나는 훌륭한 이익이다.”

또한 그는, “비록 法服은 없더라도 聖果를 얻는다”고 한 경전의 구절을 “敎門에서 제정한 계율에 구애를 받지 않고 능히 제 마음으로 도리를 판단하고 소연히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지만 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自在의 훌륭한 이익”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출가와 재가, 혹은 道俗 두 가지 모습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원효의 이 말은 그의 還俗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보게 해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에게 의미 있는 것입니다. 출가자나 재가자라는 구별 없이 붓다는 “가족생활을 이끌면서도 나의 가르침을 훌륭하게 실행하여 드높은 영적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수없이 많다”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청정한 행은 산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세속에 살더라도 맑고 깨끗한 행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원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맑고 깨끗한 행(梵行)이라 함은 이 사람의 형상이 비록 세속의 모습을 해도 마음이 일미(一味:道俗을 합친 말)에 머물러, 이 일미로써 일체의 맛을 포함함에 비록 모든 맛, 즉, 풍진 세속의 더러움에 발 디디더라도 일미의 맑고 깨끗한 행을 잃지 않는다.

세속에 발붙이고 살면서도 청정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처염상정(處染常淨:더러운 곳에 처하되 항상 깨끗하다)하는 연꽃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원효의 말처럼, “연꽃은 진흙물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원만히 향기롭고 초졸하여 온갖 아름다움을 두루 갖추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원효는 바람 부는 세상의 거리,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전개되는 삶의 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7세기 전쟁 통에 정신이 없을 때입니다. 그가 일찍이 벗어나고자 했던 삼계(三界)의 옛 세속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佛性의 실현은 出世間을 통해서만 실현되지는 않습니다. 금욕적인 생활로 자기를 지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삶을 통해, 세상 속에서, 현실 속에서 불성은 실현되는 것입니다.

“정계(正戒)에 머물면서 교만한 자는 소선(小善)에는 완전하지만 대금(大禁)을 범한 경우로 전복위화(轉福爲禍)가 된다”는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의 이야기처럼, 적은 善에 머물러 만족할 일이 아니라 우리들 가슴속 보배를 꺼내어 세상에 쏟아 놓는 적극적인 실천행이 중요한 것입니다.

원효는 비록 거사의 차림과 광대의 모습으로 돌아왔을망정 그는 이미 옛날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일찍 속복을 벗어버리고 출가자의 길을 갔듯이 돌아올 때도 미련 없이 승복을 벗어버리고 왔습니다. 원효는 40대 초반에 이미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하면서 높은 콧대를 스스로 꺾고 낮은 곳으로 임했던 것입니다. 황량한 세속의 거리로 되돌아온 소성거사, 그 모습은 밖으로 드러난 것일 뿐, 그는 이미 옛날의 원효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사람이 비록 외모가 못생겼더라도 만약 보배로운 영락으로 그 몸을 장식하면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부러워한다.”

보살들의 영락은 공덕의 상징입니다. 보살은 고해의 뗏목이자 어두운 거리의 등불이며, 험한 세상의 다리입니다. 그리고 보살은 커다란 수레(大乘)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그 수레에 태우고 거친 광야를 지나 저 피안의 언덕으로 실어다 주기 때문입니다.

원효는 말했습니다. “삼승의 사람들을 태우고 일승의 저쪽 언덕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큰 다리라고 한다.” 이를 두고 만해(萬海)는 “당신은 행인, 나는 나룻배”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을 우리는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큰 다리도 있고 외나무 다리도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다리입니다. 한 선생으로서 다리가 돼야 합니다. 강단에 서서 돌아서서 학생들이 비난한다면 그것은 형편없는 다리입니다. 아니 다리가 아니고 그 다리 때문에 학생들이 모두 빠져죽습니다.

부모 또한 다리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부모를 통해 저 곳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다리이기도 하고, 수레이기도 하고, 배이기도 합니다.

원효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니면서 「금강삼매경론」을 저술했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를 불러 각승(角乘)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저술에는 수레라는 표현이 가끔 보입니다. 보살은 “일체의 지혜를 가득 실은 보배로운 수레를 타고 삼계의 옛집으로 돌아오고”, “신통한 보배 수레를 타고 더 넓은 광야에 노닌다”고 했던 등이 그 예입니다. 또한 원효는 수레에 대해서 『허공장경(虛空藏經)』을 인용하여 설명한 바 있습니다. 대중을 피안의 세계로 실어 나르고자 하는 보살은 먼저 수레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수레는 튼튼한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의 사섭법이 곧 네 개의 바퀴에 해당합니다.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양설(不兩舌), 불악구(不惡口), 불기어(不綺語), 불탐욕(不貪慾), 부진에(不瞋), 불사견(不邪見) 등의 열 가지 착한 행은 바퀴살입니다. 수레의 네 바퀴는 말할 것도 없지만, 바퀴살 하나라도 완전하지 못하면 수레는 피안에 이르기 전에 고장 날 것입니다.

견고한 마음이자 변함없는 마음인 굴데빗장은 이상이 없는가? 수레를 끌고 갈 마소는 자애로운 마음〔慈〕, 남의 고통을 제거해 주려는 마음〔悲〕, 남의 기쁨을 함께 하려는 마음〔喜〕, 집착을 버린 평등한 마음〔捨〕등의 사무량심을 갖추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수레는 누가 몰 것인가? 그는 참다운 선지식인가? 참다운 인생의 스승이 아니고서 어떻게 대승이라는 수레를 몰고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수레를 언제 출발시킬 것인가? 철모르는 사람이 그 때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철든 사람은 계절을 아는 사람이고, 기후를 아는 사람이며, 출발의 시간을 아는 사람입니다.

피안으로 향해 가는 방향은 정확한가?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勤], 바른 마음 수행[正念], 바른 집중[正定]의 팔정도에 의지하지 않고는 피안으로 가는 바른 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대중을 실어 나를 수레는 튼튼해야 하고, 그 수레를 끌고 갈 마소는 잘 길들여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레를 몰고 갈 이는 지혜로워야 하고 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많은 사람들을 안전하고 확실하게 피안으로 싣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레를 끌고 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그러나 원효는 말했습니다. “본각(本覺) 중에는 세속을 비치는 지혜가 있고, 모든 착한 일을 생길 수 있게 한다”고. 그것은 마치 자석이 바늘을 끌어당기듯, 일부러 생각을 내지 않더라도 힘과 쓸모가 있다고도 했습니다. 원효, 그는 분명 수레를 몰만한 선지식, 많은 사람들의 스승이었습니다.

 

 

자유론(自由論) Ⅳ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원효불기(元曉不羈)조에 찬을 붙이기를 ‘무호만가풍(舞壺萬街風)’ 즉, 춤추는 호로병이 일만거리에 바람처럼 걸어다녔다고 표현했습니다. 원효 스님이 호로병을 들고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노래하고 다니며 대중을 교화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원효가 만난 사람들은 다양합니다. 거사·밭가는 노인·가난한 사람·산골의 무지몽매한 사람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광대·백정·술장사·기생 등 시중잡배들과도 어울렸습니다. 그리하여 길거리의 아이들이나 부인들까지도 모두 원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의 익살과 웃음, 노래와 춤 등은 삶에 지친 거리의 사람들에게는 신나는 일이었고, 가끔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을 겁니다.

원효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성이 있음을 믿었고, 비록 지금은 번뇌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의 경우도 그 번뇌의 구름이 걷힐 날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대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대들은 모두 다 부처가 될 수 있기에.” 『법화경』의 이 구절을 원효는 「법화경종요」에 인용한 바 있습니다. 골품제 사회에서의 이 같은 발언은 예사로운 것이 아닙니다. 원효는 “날개 작은 새는 산기슭에 의지하여 형을 기르고, 작은 고기는 여울물에 엎드려 본성을 편안히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소승적인 범부의 삶 또한 소중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원효는 보경(普敬)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두루 공경한다’는 것은 자기를 던져 중생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고, 여기에는 넘쳐나는 보살정신이 보입니다. 원효의 대중 교화는 수순중생(隨順衆生)이었고, 동사섭(同事攝)이었습니다. “보살은 대비방편으로 모든 세간에 들어가 갖가지 모습으로 그들과 더불어 동사하여 성불하도록 교화한다.” 이것은 『유마경』 방편품의 내용입니다.

원효의 교화에는 일정한 틀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상대방의 근기에 따라 교화했다는 것이고, 갖가지 방편을 동원했다는 의미로도 이해됩니다. 그는 많은 사람을 모으고, 또 흥미를 유발시키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일, 이것은 수순방편(隨順方便)이기도 합니다. 원효는 수순방편을 해석하여 “먼저 갖가지 재물을 보시하여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고, 그로 하여금 설하는 것을 듣도록 하고 그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교리를 설하기 전에 먼저 재물을 베풀어주어 실질적인 이익을 주는 것이 대중을 기꺼이 따르게 하는 방편이라는 원효의 이 말을 통해 그가 이론이 아닌 실제적인 방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열 한 개의 얼굴을 가진 십일면관세음보살상에서 아래의 본면을 진실면이라 하고 위의 부분을 방편면이라 합니다. 그래서 진실과 방편이 쌍을 이룬다고 합니다. 진실만 있으면 대단히 무미건조하고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방편만 있는 경우에는 기교만 장황할 뿐 돌아서면 남는게 없습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한 얼굴을 가질 때도 있고, 방편의 얼굴을 가질 때도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무애도인은 방편의 얼굴만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방편만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사기입니다. 그러나 진실만 있으면 바보입니다. 그러므로 진실과 방편을 골고루 가져야 합니다.

원효는 대중의 교화를 위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둔하거나 재간이 적은 사람은 글이 많고 뜻이 광범하면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들로 하여금 하나의 게송을 외워 항상 생각하게 한다면 마침내 일체의 불법을 두루 알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부처님 제자 중에서도 주리간특(周利槃特)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머리가 나빠서 게송 한 구절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습니다. 승가에서 쫓겨날 지경이 되자 부처님은 그에게 수건 한 장을 주면서 그것으로 남의 신발을 닦아주라고 일렀습니다. 머리 아프게 게송 같은 걸 외울 필요가 없이 다만 이 수건으로 남들의 신발을 깨끗이 닦는 일에 전념하라고 한 것이죠. 부처님으로부터 남의 신발을 깨끗이 닦는 일에 전념하라는 가르침을 들은 후부터 그는 아무런 잡념 없이 부지런히 신발만을 닦았습니다. 아무런 잡념 없이 정성을 다해 남의 더러운 신발을 닦는 과정에서 주리간특은 마음이 정화되었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대중에게는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촌철살인하는 언어나 몇마디 구호만으로도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대중심리입니다. 그러므로 원효가 대중 교화에 어려운 이론이나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기보다는, 간단한 염불이나 게송, 노래와 춤 등을 즐겨 사용했던 것은 당연합니다. 원효의 노래로 무애가, 미타증성가 등이 있었습니다. 무애가는 현재 가사가 전하지 않는데, 『화엄경』 중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는 구절에서 제목을 취했다고 합니다. 미타증성가는 정토사상을 노래한 것으로 그 게송 일부가 지금도 전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원효의 대중교화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우연히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했다. 원효는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 들어 『화엄경』의 “일체 무애인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라는 문구에서 따서 이름지어 무애(無碍)라고 하며,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천촌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吟詠하여 돌아왔으므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無)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원효의 위대성은 두 축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엄청난 사상의 깊이 교학적으로 큰 학승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가서 쉽게 전달하는 교화를 펼치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원효의 교화에는 혜공(惠空)이나 대안(大安) 등의 행적과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특히 무애가(無碍歌)와 무애무(無碍舞)의 경우, 무애의 대자유인이기를 희망했던 원효의 생각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비문에는 “근심하고 슬퍼하는 모습의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무애무에 대한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이 무애무는 조선전기까지 전해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의 이인로(李仁老) 등은 무애무를 구경하고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이들 시에 의하면, 무애무는 자라처럼 움츠리기도 하고 곱사처럼 등을 굽히기도 하며, 두 소매를 휘젓기도 하고,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추는 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춤의 춤사위에는 여러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두 소매를 흔드는 것은 이장(二障)을 끊어야 한다는 손짓이고, 다리를 세 번 들었다 놓는 것은 삼계(三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발짓이었으며, 몸을 움츠린 것은 사람을 따른다는 시늉이고, 그리고 등을 굽히는 것은 모든 것을 다 포섭한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온갖 장애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지만,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두 가지 장애는 가장 근본적인 장애입니다. 인간을 구속하고 결박하는 두 가지 장애와 그것으로부터의 초극에 이르는 길을 원효는 「이장의(二障義)」를 통해서 규명했습니다. 이장(二障)이라는 것은 두가지 장애, 즉 우리를 얽어매는 근본적인 두 가지 구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는 인집(人執)인데 나와 내 것이라는 관념에 집착해서 나를 이롭게 하는 것 탐욕을 부리고 해치는 것에는 분노하는 것, 즉 에고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일은 이론으로만 안되고 수행을 통해서 극복이 가능합니다.

또 인연으로 일어나는 것은 본래 자성이 없는데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을 법집(法執)이라고 합니다. 달리 말해 이데올로기나 주의주장, 종교에 집착하는 것도 엄청난 구속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검은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고 행복하게 잘 살면 되지 이데올로기가 밥을 먹여줍니까. 이에 사로잡히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또한 종교도 이 험한 세상을 건너가는 뗏목일 뿐 그 뗏목을 붙잡고 가려니까 온갖 갈등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효가 온몸으로 뛰어나려고 했던 그 장애를 이론적으로 파고 들어간 것이 「이장의」입니다. 요즘 정신분석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좋아해서 칼 융의 이론과 「이장의」를 연결한 글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

 

 

 

 

 

 

출처: http://w3devlabs.net/hb/archives/category/%ec%9b%90%ed%9a%a8%eb%8c%80%ec%82%ac%eb%b2%95%eb%ac%b8/page/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