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대승기신론원효소(大乘起信論元曉疏)』 현대적 해석 ⑥

수선님 2020. 3. 8. 12:17

『대승기신론원효소(大乘起信論元曉疏)』 현대적 해석 ⑥

 

중생심衆生心의 구조와 기능

故 강정중(시인)

열반이란 현존(現存)을 바꿔 놓은 말이다. 무엇으로 바꿀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행(行)이며, 공덕(功德)이다.
지금까지 대승(大乘)이란 무엇인가, 그 뜻을 밝힌 마명(馬鳴) 보살의 논설과 원효(元曉)의 주석을 읽어 왔다. 이제부터는 대승이란 중생심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설한 마명 보살의 논설을 염두에 두고 그 중생심을 구체적으로 해석하는 논설과 원효의 독자적인 주석을 읽게 된다. 그럼 마명 보살의 논설과 그에 대한 원효의 주석을 읽어 가면서 필자의 해설을 적어 두기로 하겠다.

논(論)
이미 뜻을 세운 부분에 대해서 설했다. 다음엔 해석을 하는 부분을 설하겠다.
해석을 하는 부분은 세 가지로 나누겠다. 어떻게 셋으로 하는가 하면 첫째는 올바른 뜻을 나타내고, 둘째는 잘못된 집착을 고치게 하고, 셋째로는 불도(佛道)로 나아가는 모습을 개별적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겠다.

소(疏)
세 장(章)으로 논설의 체제를 갖추는 가운데 그 첫째인 “올바른 뜻을 나타내고”라는 것은 전에 “대승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밝힌 뜻을 본격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이다. “잘못된 집착을 고치게 하고, 불도로 나가는 그 모습을”이라는 것은 사념(邪念)을 버리고 올바른 문에 따르게 함을 말한다.

논(論)
올바른 뜻을 나타내는 데는 일심(一心)의 법(法)에 의해서 세운 두 가지의 문이 있다. 어떻게 둘로 하는가. 첫째는 진여문(眞如門)이고, 둘째는 생멸문(生滅門)이다. 이 두 가지의 문은 각각 일체의 법을 총섭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두 문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疏)
처음에 “일심의 법에 의해서 세운 두 가지의 문이 있다.”라고 한 것은 『경(經)』에 “적멸(寂滅)은 이름하여 일심이라 한다. 일심은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심진여문(心眞如門)이라 말하는 것은 즉 『경』의 “적멸은 이름하여 일심이라 한다.”를 해석한 것이다.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경』 속의 “일심은 여래장이라 이름한다.”를 해석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법(法)은 무생무멸(無生無滅), 본래부터 지금까지 적정(寂靜)으로써 다만 이는 일심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을 심진여문이라 한다. 그러므로 “적멸은 이름하여 일심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또 이 일심의 체(體)는 본각(本覺)으로서 뿐만 아니라 무명(無明)에 따라서 동(動)하여 생멸(生滅)을 만든다. 그러므로 이 문에 있어서 여래(如來)의 성(性)은 숨겨져서 나타나지 않음으로 여래장이라 이름한다. 『경』에 “여래장은 선(善)과 불선(不善)의 인(因)이다. 능히 널리 일체취생(一切趣生)을 일으켜 만들어 낸다. 예를 들면, 기아(伎兒)와 같이 제취(諸趣)를 변화시키며 나타낸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뜻은 생멸문에 있기 때문에 “일심은 여래장이라 이름한다.”라고 말한다.
이는 일심의 생멸문을 밝힌다. 하문(下文)에 “심생멸(心生滅)이란,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생멸심(生滅心)이 있다.” 내지 “이 식(識)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각(覺)의 뜻, 둘째는 불각(不覺)의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모름지기 알아야 한다. 다만 생멸심만을 취하여서 생멸문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생멸하는 자체(自體) 및 생멸하는 상(相)을 함께 취하여 전부 생멸문 안에 있다는 뜻인 것이다.
해설
“적멸(寂滅)은 이름하여 일심(一心)이라 한다.” “일심은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한다.”는 인용문의 경(經)은 『입능가경(入楞伽經)』 「청불품」. 제1권, p.519.a. 1~2행.(『大正藏』 제16권, 龍樹 著, 羅什 譯) ‘적멸’이란 진여(眞如)를 가리킨다. 원효가 『대승론(大乘論)』에서 밝힌 바와 같이 무생(無生)이며 무멸(無滅)이기에 적멸이라 한다. ‘멸(滅)’이란 생멸의 인과(因果)가 없는 상태. “일심은 여래장이라 이름한다.”라는 것은 여래장이 곧 일심이라는 뜻이 아니라 일심의 생멸하는 현상은 여래장에 입각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라는 뜻이다. 이 생멸하는 현상의 바탕은 일심의 체(體)이다. 이 체를 본각(本覺)이라고 해석하는 점에 원효의 독자적인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한 본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무명(無明)으로 인해서 마음이 동(動)하여 여러 가지 상념이 생멸을 한다 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헛된 상념들이 생멸을 하기에 여래장이 보이지 않지만 여래장은 부동(不動)한 상태로 자기의 바탕인 체(體)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제되는 것은 진여문(眞如門) 보다는 오히려 여래장 속에 개별적인 바탕으로 되어 있는 자체(自體)에 의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바로 이 자체를 원효는 본각이라 말하고 있다.
“여래장은 이건 선(善)과 불선(不善)의 인(因)이다.”라는 인용문의 경은 『사권능가경(四卷楞伽經)』 p.510.b. 4~5행.(『大正藏』 제16권) 여래장의 관점에서 보면 일심은 생멸하고 변화하는 동적인 상태 밖에는 달리 인식되지 않는다. 선(善)과 불선(不善)의 인(因)이라고 설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일체취생(一切趣生)이란 여러 가지 형상과 형태의 출생을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취(趣)는 여러 가지의 나타남, 중생이 번뇌를 일으켜서 그 업(業)으로 취향(趣向)함을 가리키기도 한다.
‘기아(伎兒)’는 기예(技藝)를 부리는 사람. 마술사(魔術師). “모름지기 알아야 한다. 다만 생멸심(生滅心)만을 취하여서 생멸문(生滅門)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생멸하는 자체 및 생멸하는 상을 통틀어 취하는 것이 전부 생멸문 안에 있다.”라는 해석에서 원효가 지적하는 ‘생멸하는 자체’는 각(覺)과 불각(不覺)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자체는 본각이라 하였지만 실은 본각과 불각은 동일한 각인 것이다. 심생멸(心生滅)의 입장에서 보면 본각을 불각이라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각의 과제에서 자세히 다루게 된다.
‘생멸하는 상’이란 염(染)・정(淨)을 가리킨다. 여기에 대해서도 다음에 해석하게 된다. 여기서는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생멸심이 성립한다는 것만 이해하여 두면 될 것이다. 점차로 읽어 가면 부담이 없이 분에 따라서 이해를 하게 될 것이다. 기다림이나 준비도 하나의 수행(修行)일 것이다. 이렇게 기다리는 단계를 가리켜서 가행(加行)이라 부른다.

소(疏)
그렇다면, 두 가지의 문(門)이 어찌 일심이라 하는가. 일러 염정(染淨)의 제법(諸法)은 그 성(性)이 무이(無二)이다. 진망(眞妄)의 두 문은 다름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일(一)이라 한다. 이 무이의 도리〔處〕는 제법 안의 실(實)로서 허공과 같지 않고, 성(性) 스스로 신해(神解)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심(心)이라 한다. 하지만 이(二)가 있지 않는데 어찌 일(一)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일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어떤 것에 의하여 심이라 말하는가. 이처럼 도리(道理)는 언설(言說)을 떠나고, 사려(思慮)를 끊는다. 무엇으로 이름할지 모르니 강호(强呼)로 하여 일심이라 했다.

해설
“염정의 제법은 그 성이 무이이다.”라는 말의 ‘성(性)’은 본성(本性), 즉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은 인과론으로 붙여진 이름이고 이 두 법(法)은 하나의 본성에서 일어난 것임을 밝힌다. 무명(無明)으로 일어난 심적 활동을 염법, 진여로 일어나는 심적 활동을 정법이라 할 뿐이지 활동하는 그 심(心)의 본성은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진(眞)과 망(妄)도 심의 본성에 있어서는 서로 다름이 없다는 것을 밝힌다.
“무이(無二)의 도리〔處〕”의 ‘도리’는 원문에는 ‘처(處)’로 되어 있다. “제법 안의 실”이란 실질(實質). 염정이나 진망(眞妄)은 현상적인 것이지 그 실질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뜻이고 그러므로 일심이라 한다고 말한다. ‘신해’는 진(眞). 즉 본성 그 스스로 진실하고 이것은 허공처럼 실질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 이상은 일심을 그 본성에서 해석한 것이다. “언설을 떠나고, 사려(思慮)를 끊는다.”는 말은 일심의 일(一)이 산술적인 일(一)도 아니고, 대개념(對槪念)으로 이(二)에 대한 일(一)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벌써 일심의 일(一)은 신해(神解)인 진(眞)의 차원에서 밖에는 달리 논의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원효는 여기서 말하고, 그러므로 억지로 이름을 하자면 일심 밖에는 달리 부를 수도 없다고 적어 두고 있다.

소(疏)
“이 두 가지의 문(門)은 모두 각각 일체의 법(法)을 총섭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위의 「입의분(立義分)」의 “이 심(心)은 즉 일체의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을 섭하기에”를 해석한다. 위에서는 심이 일체법을 섭하는 것을 바로 밝히고, 지금 여기서는 그 두 문이 각각 일체법을 총섭함을 밝힌다. “이 두 문이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라는 것은 이는 두 문이 각각 총섭하는 뜻을 해석한다. 진여문(眞如門)은 염정(染淨)의 통상(通相)이다. 통상 외에는 개별적으로는 염정이 없기 때문에 염정의 제법(諸法)을 총섭할 수 있음을 밝히려 한다. 생멸문(生滅門)은 개별적으로 염정법을 밝히지만, 염정법이 해당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에 역시 일체의 제법을 총섭한다. 통(通)과 별(別)이 다르다 하더라도 똑같이 물리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두 문은 서로 떨어지지 않음으로써”라고 말한다.
총석(總釋)의 뜻을 마친다.

해설
진여문에서만 일체법(一切法)을 섭하는 것이 아니라 생멸문에서도 일체법을 섭하기에 두 문이 각각 총섭한다고 말하고 있다. “진여문은 염정의 통상이다.”라는 것은 따로 따로 섭하는 별상(別相)에 대한 말이다. 통상은 전체적인 상(相)이며, 별상은 개별적인 상이다. ‘상’이란 속성(屬性). 염정의 제법을 총섭하기에 진여문은 염정의 통상이라 한다. 생멸문에서는 별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나타나지 않는 바가 없으니 이 역시 제법을 총섭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진여문에서나 생멸문에서나 각각 제법을 총섭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통상과 별상은 그 속성은 다르지만, 서로 물리치지 않는다.”는 뜻은 보는 입장이 다를 뿐이지 보이는 대상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심도 두 문으로 볼 때는 심이 두 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보이는 그 대상인 심은 하나인 것이다. 염정법도 마찬가지이다.
염법은 생멸하는 현상심, 정법(淨法)은 진여(眞如)라고 부르는 심의 실재이다. “두 문이 서로 떨어지지 않음으로써”라는 것은 심진여(心眞如)와 심생멸(心生滅)이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우리들이 논할 때에 두 가지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고, 실은 그 기능면에서 볼 때도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 화합식(和合識)을 해석할 때 자세히 설명하게 된다.

별기
진여문, 이는 제법의 통상이다. 통상 외에는 달리 제법이 없다. 제법은 전부 통상에 섭하여지는 것이다. 흙가루는 질그릇의 통상이고 통상을 벗어나서는 달리 질그릇이 없으며, 질그릇은 전부 흙가루를 섭하는 것이 되는 것과 같다.
진여문 역시 이와 같다.
생멸문은 즉 진여가 선(善)과 불선(不善)의 인(因)이며, 연(緣)과 화합하여 제법을 만들어 변화시킨다 하더라도 항상 진성(眞性)을 깨트리지 않기 때문에 이 문에 있어서 또 진여를 섭한다. 흙가루의 성질이 모여서 질그릇을 이루는 것과 같이 항시 흙가루 성질의 속성을 잃지 않기 때문에 질그릇의 문은 흙가루를 섭한다. 생멸문도 역시 그렇다.
설사 두 문은 따로 따로 체(體)가 없다 하더라도 두 문이 서로 떨어져서 상통(相通)하지 않는다면 응당히 진여문 안에는 이(理)만을 섭하고 사(事)는 섭하지 않을 것이다. 생멸문 안에는 사만을 섭하고 이는 섭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두 문은 서로 융통하여 제한하는 구분이 없다. 이렇기 때문에 모두 각각 일체의 이와 사의 제법을 통섭한다.
그러므로 “두 문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해설
‘통상’이란 통틀어서 전체적으로 보는 속성. 이 속성에는 실은 생멸(生滅)현상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달리 제법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이 통상이란 이름은 생멸문 안의 별상과 구별하기 위해서 붙인 이름이다. ‘별상’이란 생멸하는 개별적인 속성을 의미한다.
원효는 흙가루와 질그릇을 예로 들어서 통상과 별상을 설명하고 있다. 흙가루는 진성(眞性)으로 통상이고 질그릇은 그 진성이 사(事)로 현상적으로 나타난 별상이다.
‘이(理)’는 사리(事理)의 이, 즉 진여(眞如). ‘사(事)’는 사리(事理)의 사, 즉 생멸현상. 질그릇이 흙의 진성(眞性)을 포함하고 있으니 흙과 융통하고 있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가지만, 흙가루가 질그릇이라는 사(事)를 포섭하고 있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이 후자의 경우는 흙가루의 진성이 있음으로 질그릇이라는 현상적인 사물이 존재하게 되므로 그렇게 말한 점도 있고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벌써 흙가루의 진성은 질그릇이라는 현상적인 사물을 예비하고 있으므로 제법을 통섭하고 있다고 말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원효의 글을 읽어 보면 이처럼 우리의 존재는 영원한 진리로 벌써 예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의 존재는 우주적인 영원한 진성의 나타남이라고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도리(道理)이다.

별기
묻는다. 만일 두 문(門)이 각각 이(理)와 사를 섭한다면, 무엇 때문에 진여문(眞如門) 안에는 다만 대승의 체(體)만을 나타내고, 생멸문(生滅門) 안에는 자체(自體)와 상(相)과 용(用)을 나타내는가?
답한다. 섭하고 있는 뜻과 나타내고 있는 뜻은 다르다. 왜냐하면 진여문, 이것은 상(相)을 없게 하여 그로써 이(理)만을 밝힌다. 상을 없게 하더라도 제거하는 것은 아니고 그러므로 상을 섭하고 있는 것이고 상을 없게 하는 것도 나타나는 것이 아님으로 상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 생멸문은 이를 취하여 그로써 사를 성립시킨다. 이를 취하지만 그 이를 깨트린 것이 아님으로 이를 취할 수 있고 이를 취하여 없애지 않기 때문에, 또한 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뜻에 의하기 때문에, 서로 다름을 설했다. 통틀어서 논하면 이 두 뜻은 똑같다. 이렇기 때문에 진여문 안에도 응당히 현상적인 상을 나타내야 하지만, 생략을 하였기 때문에 설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해설
원효는 여기서 자문자답의 형식으로 두 문의 기능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먼저 무엇 때문에 진여문에서는 체만을 나타낸다고 설하고 생멸문에서는 자체와 상과 용을 나타낸다고 설하는가라는 의문을 세우고 설명을 한다. 여기에 대한 답은 섭하고 있다는 뜻과 나타내고 있다는 뜻이 다름을 들어서 그 이유를 밝힌다. 실은 진여문도 상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타내지만 진여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로 환원됨으로, 다른 것과 구별되어서 나타나 보이지 않을 따름인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의 색깔은 다른 색깔과 구별해서 감지되는 법이지만 모든 것이 똑같은 색깔이라면, 구별해서 그 색깔을 밝혀낼 수도 없으니 색깔이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바로 이 점을 가리켜서 “상을 섭하지만 그 상을 없게 하면서 제거하지도 않는다.”라고 원효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상이 있으면서도 나타나지 않는 상을 일상(一相)이라 한다. 일법계(一法界)가 일상이라 할 때는 진여만을, 즉 진여의 체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원효는 섭하고 있다는 말의 의미와 나타내고 있다는 말의 의미가 서로 다름을 전제로 해 두고 있는 것이다. ‘상을 없게 하는 것’이란 상을 없게 하는 그 속성. 원문에는 ‘민상(泯相)’으로 되어 있다.

별기
묻는다. 두 문이 같지 않다는 뜻은 이제 알았지만, 아직 두 문이 섭하는 바의 이(理)와 사(事)를 모르겠는데 또 문에 따라서 서로 다른 뜻이 있는가, 없는가.
답한다. 문에 따라서 구별해 보면 역시 같지 않다. 진여문 안에 섭하는 바의 사는 이건 분별성이다. 제법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본래부터 지금까지 적정(寂靜)으로써 다만 망념(妄念)에 의해서만이 차별이 있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생멸문 안에서 설하는 바의 사는 의타성(依他性)이다. 제법은 인연의 화합으로 생멸(生滅)이 있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두 성(性)은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다른 것도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인연이 만들어 내는 바의 생멸의 제법은 망념을 떠나지 않고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분별성은 의타와 다름이 없고, 또한 생멸문에 있다. 또 인연으로 생하는 것은 자(自)와 타(他) 및 공(共), 이 전부가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에 의타성은 분별과 다르지 않고, 또한 진여문에 있다.
이와 같이 두 성은 다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같은 것도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분별성은, 본래부터 지금까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없는 것도 아니다. 의타성은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더라도 또 없는 것도 아니다. 이러므로 두 성은 또한 잡란(雜亂)하지 않는다. 『섭론(攝論)』에 삼성(三性)이 서로 맞서는 것을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 마땅히 이처럼 설해야 한다. 능히 이 삼성(三性)의 불일불이(不一不異)의 뜻을 이해한다면 백가(百家)의 쟁(諍)도 불화(不和)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해설
분별성이란 유위(有爲)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작용. 이 식별(識別)은 주객(主客)의 상대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짐으로 망분별(妄分別)의 성격을 띠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 주객의 상대적인 입장을 초월해서 진리만을 보게 되는 지혜를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한다. 의타성이란 말 그대로 타(他)에 의해서 생멸을 하기에 부쳐진 이름이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고도 한다. 인연이 화합함으로써 생겼다가 인연이 없어지면 멸(滅)하게 되는 법(法)이다. 타에 의해서 생멸을 하기에 유(有)이면서 비유(非有)이고, 비무(非無)인 것이니 이것을 가유법(假有法), 또는 비유사유법(非有似有法)이라고 한다. “인연으로 생하는 것은 자와 타 및 공, 이 전부가 불가득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와 타 그리고 이 자타를 함께 하는 공이란 의타성으로 인식되는 것이므로 그 실체가 없기에 이렇게 설명을 한 것이다.
‘백가’란 수많은 평자(評者). 이들이 각자 일가견을 세우기에 이런 이름으로 부른다. ‘쟁(諍)’은 논쟁(論爭). ‘삼성’이란 여기서는 유식(唯識)에서 말하는 삼성. 제법을 객관적인 유(有)의 방면에서 관찰하여,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타기성・원성실성(圓成實性)을 가리킨다. 변계소집성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새끼줄을 뱀으로 보는 것과 같은 심적 작용. 사물을 인식할 때는 견(見)과 상(相)의 관계에서 심적작용이 일어나는데, 이 주관인 견을 아(我), 객관인 대상의 상은 법(法)으로 집착하게 된다. 이렇게 집착함으로써 가짜의 실체를 나타내게 하는 심적 성향을 가리켜서 이름한 것이 소집성(所執性)이다.
‘변계(遍計)’는 외계(外界)를 아집(我執)에 입각해서 두루 실체인 것으로 계량(計量)하는 것. 이러한 의미에서 변계소집을 정유리무(情有理無)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情)은 망정(妄情)이다. 이는 사리(事理)의 이(理). 즉 진(眞)이다.

 

여래장 사상의 이해

여래장 사상

여래장은 여래의 씨라는 뜻으로 누구나 지니고 있는 여래의 가능성, 즉 모든 생명의 무한한 가능성을 설명하고 있다.

(1)여래장의 의미

여래장(tathagata-garbha)은 여래의 씨라는 의미이다. 누구나 지니고 있는 여래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상은 《법화경》과 《열반경》을 통해 생겨났다. 유식과 불성의 통합사상은 바로 여래장사상인 것이다. 즉, 모든 생명을 가능성의 존재로 보고 그 무한한 가능성을 여래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의 근본취지는 바로 이 가능성을 깨닫는 일이다. 특히 대승불교운동과 함께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게 부각된다. 왜냐하면 부파교단에서는 부처라는 인격을 절대적 타자(他者)로 보려는 경향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여래장사상은 확립된다. 또 한국불교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교리의 하나로 인식되는 것이다.
여래장사상의 핵심적 문헌으로 《대승기신론》이 있다. 이 경전에서는 여래장을 한마음〔一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심의 대표적인 표현은 합장이다. 흔히 요즈음은 악수를 하곤 하지만, 악수는 그리스시대 이전부터 서로 무기를 지니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비롯된 인사법이다. 그에 비해 합장은 두 손을 공손하게 한마음임을 내보이는 인사법이다. 너와 내가 일심이므로 하나라는 상징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합장을 통해 서로의 두 마음이 하나로 융합된 조화로운 세계가 펼쳐진다고 하겠다.
여래장사상의 일심은 크게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으로 나뉜다. 진여는 '참되고 한결 같다'는 의미이다. 사물의 본성이며 깨달은 자의 세계이다. 반면 생멸이란 '덧없는 나고 죽음의 세계'를 가리킨다. 우리들 마음도 이와 같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만약 진여적 측면을 계발한다면 부처로서 살아간다. 그러나 생멸의 측면을 내 마음의 본성으로 착각하면 중생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진여문은 말을 떠난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진리의 면이다. 생멸문은 말로써 설명이 가능하다.
그 일심을 또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면 삼상(三相)이 된다. 삼상이란 본질, 모습, 기능이며 혹은 삼대(三大)라고도 한다.
본질〔體〕과 드러난 현상의 모습〔相〕, 기능〔用〕으로 일심을 구분하게 된다. 여기서 여래장의 본체는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亂言〕, 기능과 상은 설명이 가능하다〔依言〕.
보조국사 지눌은 이러한 설명을 하였다.
"일심의 작용이 무엇인가? 밥 먹을 때 밥 먹게 하고, 담소할 때 말하게 하고, 차 마실 때 마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의 경우 이것이 일심의 작용인줄 모른다. 밥 먹을 때 단지 손의 작용이라 여기고, 말할 때 단지 입이 움직여 말하는 줄로 안다. 그 모든 것은 일심의 작용 아닌 바가 없다."
중생이 일심의 존재이면서 그 일심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우리는 결국 실향민이다. 불교의 목표가 성불이라면 여래장사상은 그 고향을 일심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 점에서 여래장 사상은 대승불교의 이론적 궁극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래장의 내용

여래장을 보살심(菩薩心)과 범부(凡夫)·이승심(二乘心)으로 구분해 보면 보살심에 속하는 것은 제 8식인 아뢰야식이며 범부·이승심에는 제6식,7식이 해당된다.
생멸의 상을 넷으로 나누었을 때 우리 중생들은 맨 마지막의 멸상 10가지로부터 출발한다. 살생·도둑질·음행·망어·악담·이간질·거짓말·탐·진·치가 그것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위와 같이 그릇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중생들이 깨닫지 못한 상태〔不覺〕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들은 자각을 하게 된다. 각과 비슷한 상태이지만 탐·진·치·만(慢)·의(疑)·견(見)은 아직 버리지 못한 상태, 이를 상사각(相似覺)이라고 한다. 이 상황에서는 행동으로서 열 가지 나쁜 일을 범하지는 않으나 밑바닥에는 집요하게 나〔我〕를 내세우고 있다.
이것이 잘 극복되면 수분각(隨分覺)이 된다. 수분각은 나에게 집착한 상태이다. 자신에 대해 어리석고(我慢), 자기만을 사랑하며(我愛), 자신만 잘났다고 느끼며(我慢), 자기를 내세우고(我見)있는 것이다.
주변에 얽매여 고통받는 모습을 업계고상(業繫苦相)이라 한다.
이는 기업상(起業相)에서 왔으며, 기업상은 이름과 글자에 집착하는 상(計名字相)에서 비롯되었고, 계명자상은 사물에 집착하는 상(執取相)에서 나왔다. 집취상은 이어져 내려오는 상속상(相續相)에서 왔으며, 이는 알려고 하는 지상(智相)에서 왔다.
위와 같은 육추가 얽혀져 중생이 겪는 육도윤회의 원인이 된다.
삼제는 나 이외의 객관인 경계상(境界相), 주관(能見相), 무명이 주관과 객관으로 변형되는 무명업상(無明業相)의 세 가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집상응(執相應)이 있다. 자기 집착에 상응하여 그릇됨을 일으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잘못 이어져서 나쁜 결과를 낳게 된다. 분별지상응(分別智相應)은 분별력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란 능소(陵所: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어야 가능하다. 동체대비의 이론적 근거는 '색즉시공'의 관계와 동일하다. 내가 있고, 네가 있다는 양자의 합일에 있다. 능소의 구별이 있는 한은 불가능한 것이다.
일심의 사상은 심생멸, 생멸의 인연, 생멸의 상 등 세 가지로 파악하기도 한다. 심생멸의 입장에서 각을 보면 본래의 깨달음인 본각과 본각이 작용을 시도하는 시각(始覺)으로 양분하고 있다. 본각이란 본래의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모든 생명은 부처이다. 그 본질적 깨달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와 반대이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있는 그 가능성을 모르기 때문이다〔不覺〕. 따라서 아무리 본각이라고 할지라도 그 본각을 향한 힘찬 시동이 필요하다. 그 시동을 시각(始覺)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 불각(不覺)은 무명인 근본불각과 업에 얽혀 헤어나지 못하는 지말(枝末)불각이 있다. 이러한 일은 현실 고에서 비일비재하다.
생멸의 인연은 마음과 뜻과 의식이라는 것, 즉 제 6, 7, 8식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생멸의 상은 삼세와 육추의 두 가지 상과 두 가지 종류의 훈습에 의해 설명된다. 훈습(薰習)이라는 용어는 독특한 불교용어이다.

"생선을 엮어 맨 새끼줄은 생선 비린내가 난다. 안개 속을 걷는 자는 아무리 깨끗하려 하여도 안개 속에 옷이 젖는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세상의 악 속에 빠져 나올 생각을 아니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든다."

부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다.
결국 훈습이란 향(香)과 같다. 향을 사르면 향내음이 온몸에 젖음과 같은 의미이다.
훈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지극히 근본적인 선천적 훈습과 후천적 훈습의 두 가지이다. 또한 정법(淨法)훈습과 염법(染法)훈습의 두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정법훈습이란 무명의 삶을 극복하기 위하여 나아가는 훈습이며, 염법훈습은 무명에 삶을 맡기며 퇴보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와 환경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결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래서 선지식이 필요하고, 선우(善友)가 필요하다. 부처님은 중생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선지식이 될 수 있다.

 


여래장 사상(如來藏 思想) - 蓮海


目次
1. 序言
2. 如來藏存在의 論證
3. 如來藏의 모습
4. 染法緣起
5. 淨法緣起
6. 結言


一. 序言

'如來藏思想이란 비록 衆生이 煩惱 즉, 客塵에 속박되어 있으나 如來藏-즉 부처의 胎, 種子, 性, 可能性-을 본래 갖추고 있는 故로 여래가 될 수 있다.' 라는 命題를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 소위 如來藏 思想이다.
이 如來藏思想은 우선 우리 衆生들에게 成佛할 수 있다는 信念을 심어줌과 동시에 衆生世間의 存在樣相을 設明하고 實踐修行의 근거를 마련해 주는 매우 중요한 大乘哲學思想인 것이다. 즉 一切衆生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如來藏을 모든 法 즉 生死에서 열반의 根本實相으로써 證得해야 할 究竟目的으로 삼으며 그를 證得해야 '바르게 산다'(解脫, 涅槃)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여래장의 선언은 우리 중생에 비로소 解脫涅槃의 희망과 확신을 주는 佛, 菩薩, 慈悲의 결정인 것이다.


二. 如來藏 存在의 論證

如來藏(佛性)이라는 동일한 문제 즉 本性을 顯現치 못하고 왜 煩惱妄想의 拘縛凡夫로 남아 있는가? 왜 煩惱는 일어났으며 그 根據는 무엇인가? 하는 問題를 놓고 두 가지 樣相을 보였을 바 唯識系統→自性淸淨에 도취되거나 讚美하는 현실 문제를 論하고 그 原因을 찾는 동시에 인간 現實心의 정체(唯識無境)를 밝히는데 주력하는 까닭에 표면상으로는 如來藏心設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다. 唯識의 實性은 眞如라고 간단히 모든 妄의 근저에 眞如性 있음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眞如性을 전연 不動(不生不滅)하는 것으로 妄과는 교섭치 않는다고 하여 二元的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異孰世間이란 識에 갈무리되어 있는 種子의 현현일뿐 眞如 그 자체의 緣起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자체적으로 현실의 문제에 달관하면 자연 초극하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그 本質인 淸淨心이 나타나게 된다고 하였다. 이렇듯 妄染緣起만을 주로 다루고 眞如는 不可思議하다 하여 뒤로 미루고 있다.
如來藏心系統→自性淸淨만을 讚揚하여 이상에만 치우친 감이 있다. 물론 次界에서도 현실적 衆生世間(染法緣起)의 모습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煩惱의 존재를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次界에서는 (객진번뇌) 하고 하여 결코 이 煩惱가 本貝心性을 汚染시켜 완전히 타락시킬 수는 없다고 한다. (일시적 동요는 있음)
이렇듯 마음의 本性은 淸淨하고 煩惱는 객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데서 발생된 <如來藏思想>은 <如來藏經>에서 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하여 처음으로 如來藏이라는 槪念을 사용한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如來藏思想의 등장과 함께 이를 주장하는 여러 가지 大乘經典群이 탄생되었고 이로부터 ①②③기를 거쳐가며 점차 祖職化되고 深化되어 간다.

① 여래장사상 제 1기 경전
如來藏經, 不增佛減經, 勝曼經..이때까지는 마음의 문제에 관해서 本性不潔의 측면 즉 如來가 될 수 있는 因正因佛性에만 관심을 집중하였다.

② 여래장사상 제 2기 경전
보성론(4∼5c 성립 견해)에 이르러 그 思想的 體系가 定立 됨으로써 大乘佛敎의 한 학파적 성격을 띠고 조직화된다. 그러나 아직도 煩惱所染에 관한 考察 (즉 무슨 이유로 煩惱에 물들게 되었나?)하는 문제는 충분치 않다. 여기서는 아직까지 如來藏思想의 이상적인 측면 즉 本性淸淨과 마음의 淨化에만 중점을 두고 추구하는 체계에 머물고 있었다.→돈오적 입장의 선풍
이 시기에는 大乘藏儼經論, 佛性論등이 조직되었다.

③ 如來藏思想 제 3기 經典
그 후 次思想은 Alaya (阿梨耶 : 眞妄與合)식의 체계에 의하여 苦滅諦<마음의 정화>를 해명하기 위해서 원래 苦集諦<마음의 汚染>의 考察에 目標를 둔 唯識設과 交涉을 함으로써 해결이 어려운 <인간의 現實的 마음의 問題>에 접근한다.
이에 속하는 經論에는 능가경 대승기신론 등이 있다.


三.如來藏의 모습

여러 經論을 통하여 '如來藏'에 대응하는 여러 가지 名義가 있으나 다 찾아보기도 벅차고 다만 반야경의 <空>에 의한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을 대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 ①空如來藏→隱覆→所藏→如實空鏡
在 -+
+-- ②不空如來藏→含→能藏→因薰習鏡

① 空如來藏: 우리의 마음중 諸佛이 證得한 淸淨法身의 體로 如來의 無量한 공덕을 가지고 있으므로 如來藏이라 하여 煩惱와 契合하지 않으므로 空이라 함 즉, 如來의 本體는 不變이며 寂滅, 平等이다. 비록 煩惱에 隱覆되어 있으나, 그 煩惱는 객진이라 결코 결합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예) 染(소금물) 가운데에 淸淨(물) 만을 잡아 말하고 소금은 客 (객) 이라 하여 비록 일시적으로 섞인 듯 하나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煩惱가 비록 여래를 구속하나, 其實 存在的 立場에서 보면 있는 것이 아닌 幻인 까닭이다. 이를 唯識에서는 計所集性이라고 하며 노끈과 뱀의 비유를 든다.
비록 無名의 마음속에 뱀이 있어 스스로의 心性을 구속하나 어찌 뱀이 있는 것이랴. 즉, 번뇌란 노끈을 보고, 뱀이라고 착각한 것이라서 오직 주관적 망념에 의해 生起한 幻일 뿐 실제가 아니다. 따라서 번뇌의 斷滅이라는 것도 실은 뱀이라는 착각이 없어진 것이니, 원래 없던 것임을 어찌하랴 바로 우리의 마음의 淸淨한 부분을 잡아 말하는 것이니 우리는 이 에 의해서 法身如來를 證得할 수 있다.

② 不空如來藏
一切法은 如來의 智慧德相을 自相으로 하고 있으며 또 煩惱와도 不 不異라고 하는 面이다. 故로 나타내지 못하는 법이 없을 때 不供이라 한다.
예) 모든 물(水: 淸淨하여 자신을 고집하지 않음)은, 흐르는 성질, 적시는 성질, 맑은 성질, 받아들이는 성질 등이 있어 모든 草木을 생장시킨다.
眞 ─┐
├──知合=無始時來의 界
妄 ─┘
여기에서는 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無始時來로 부터의 性이라면 斷滅할 수 없을 터인데 成佛할 때는 妄을 그대로 두고 성불하는 것인가?
물에서 소금을 제거하고 물만 남겨 성불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두고 마음을 쉬어 성불하는 것인가?
그 해결방법으로는
첫째 不樂因果(망의 단멸) 不時因果(망에 어둡지 않음)이며
둘째 煩惱를 끊지 않는다. 끊으면 衆生과의 통로가 끊어져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셋째 금강경 註에 聖人이 差別없는 중에 差別을 일으켜 중생을 제도한다. 고 하는데 이는 (無住生心) 진실로 온갖 차별의 근을 끊지 않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의 실체는 잘 보아 어둡지 않고 잘 알게 되면 그것에 의해서 구속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그것이 있던 없던 무슨 상관이랴. <경계를 다스려 편안하려하지 말고 마음을 다스려 편안하라>煩惱라는 것도 결코 나를 괴롭히지 못하니 괴로움의 책임을 번뇌에 묻지 마라. 불 보살은 번뇌를 타고 삼계에 자유로이 출몰하지 않는가?


四. 染法緣起

우리 마음의 모습이 위에서 말한 대로라면 어떻게 自性이 淸淨한 如來의 性이 왜 煩惱를 일으켜 스스로를 읽었는가? 그 최초 원인이 무엇인가? 또 어찌하면 이 垢縛을 해탈하고 本具의 如來를 현현할 것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所謂 如來藏 緣起設이다.
즉, 生死流轉의 과정과 涅槃還滅의 길을 설명한다. 여기에서 所謂 如來藏이라는 말을 아뢰야식으로 대치하여 眞과 亡의 與合을 말하여 해결하려 한다.
① 覺이란 動이며 隨緣이다. < 生命이란 動을 내놓고 생각할 수 없다. >
② 그 覺의 動으로 인하여 如來藏이 피로하여 졌다. 즉, 흐리터분하여 졌다는 것이다. (마음의 흔들림)
有覆無記의 최초 형태와 이것이 身見등을 일으키나니 곧 無明(근본)이다.
覺이 動한다는 것은 明(강생요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무엇인가 무조건적으로 밝혀 알려 하는 마음의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이다. 이것이 唯識設에서는 見分의 성립이다.
③ 이 마음의 흔들림 즉 '明' 때문에 상대적으로 모른다는 ' 無明 '이 생겨나게 되었고,
④ 이 ' 無明의 動搖 '는 무엇인가 ' 알아져야 할 ' 그 무엇이 幻影처럼 등장하였고
⑤ 이를 취하는 마음 때문에 소위 業相이라는 것이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자증 증자증하여 스스로 분별하여 六 의 거친 번뇌를 야기시키고 이로부터 種子를 만들어 스스로를 구속하고 異熟으로 自己의 業種子에 대응하는 器世間과 衆生世間등을 지어 自相을 삼아 들어앉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번뇌는 幻(잘못봄)이라고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했다.
< 뱀은 실재하지 않는다. 고로 '잘못봄' 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환인 줄을 알면 <共知> 된다. 끊으려 하지 마라 그것도 잘못이다.


五. 淨法緣起

淨法인 眞如의 自體內로 還入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衆生이 本具하고 있는
① 心眞如의 熏習力(자체 정화능력의 발동)과 苦痛을 싫어하고 樂을 좋아하여
② 涅槃을 찾는 衆生의 감정(포고발심) 과
③ 불보살의 교화에 의하여 당연히 이 幻滅의 길을 가야 한다는 온당성을 발견하여 이로부터 修行하는 힘으로 淨法의 세계를 이탈하여 眞如界로 환입하는 것을 말한다.


六. 結言

우리가 生死에 流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천적으로 본래 자연히 見足한 本覺의 如來藏心이 一片의 無明 즉, 根本不覺을 生하여 이 不覺이 점점 증장하여 끊임없는 생사에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을 초탈하자면 不覺을 퇴치하여야 하는 것이요, 그러려면 始覺의 용맹한 作用(修行)이 필요한 것이다.
① 우선 佛陀될 수 있는 性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확신하고
② 스스로 그릇된 길을 걸어 왔음을 크게 뉘우치며
③ 누구와 수행에 의하여 成佛할 수 있음을 확신하며
④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
그 노력에 의하여 근본 자리에 되돌아갔을 때 여기에는 始. 本의 구별이 없어지고 淨法의 진여계만 혼도 드러나게 될 것이니 이것이 淨法緣起의 究意點이며 如來藏을 말하는 目的이다.

 


여래장사상의 성립과 사상적 의의

[ 목 차 ]

< 서 론 >
< 본 론 >
I 여래장 사상의 역사
II 여래장 사상의 교리
III 승만경에 나타난 여래장 사상
IV 여래장과 他사상과의 관련성
< 결 론 >

- 참 고 문 헌 -

 

< 서 론 >

대승불교의 사상은 중관사상과 유식학으로 대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불교계에서 유력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불교 철학에서도 이 두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두 사상의 영향력을 가장 잘 담은 사상으로 여래장 사상을 들 수가 있는데, 극단적으로는 여래장은 중관학과 유식학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장이라는 것은 반야의 깨달음(空)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이며 알라야식 사상의 발전적 측면이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소위 '비판불교'는 여래장의 이러한 전통적 측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아트만론과 유사하다는 측면만 부각하여 '여래장은 불교가 아니다.'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단정은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신의 한계만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라는 것은 고정된 이론이 아니고,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서 방편적으로 설해지는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설 방법이 바로 석존 당시부터 행해졌던 대기설법(對機說法)의 방편인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본문에서는 여래장 사상의 내용과 의의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 본 론 >

I. 여래장 사상의 역사

1. 중기 대승경전

용수 이후에 연이어 많은 대승경전들이 작성되었다. 그 이후부터 밀교가 훙륭하는 6, 7세기 무렵까지 성립된 경전을 임시로 '중기 대승 경전'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 내용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면 초기 경전이 종교문학적인 것에 비해 중기 경전은 교의적 요소가 많다는 점이 특색이다. 소승불교에서 그 교의는 아비달마(Abhidharma, 論)라 불리는 문헌으로 발표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아비달마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지만 그것에 상당하는 '論( stra)이 4∼5세기 무렵부터 작성되었다. 대표적인 중기 경전은 논의 선구적 역할을 다해 논에 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교의 이론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 시대의 사상적 특징은 주체 문제가 중심이 되고 있다. 불교는 무아를 설해 주체를 부정하는 듯한 교의적 표현을 지녔지만 그것은 주체 문제를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 도리어 깊은 성찰을 거듭한 결과였다. 대승불교운동의 전개는 인도 종교사에 있어서 힌두교 운동과 서로 통하는 관계에 있으며, 넓은 의미에서는 힌두교 운동의 일환이라고도 평가되고 있다. 두 종교는 세계관의 명확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종교 현상에 있어서 평행성이 인정된다. 따라서 이 시대에 대승불교도가 그 사상을 교의화하려고 할 때 많든 적든 바라문교(Brahmanism)의 자아 철학( tman-vidy )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불교는 자아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주체는 마음(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경우 주체 문제의 추구에 있어서 부처님의 구제를 중심으로 하는 입장과 보살의 주체적 실천을 중심으로 하는 입장이 각각 분명하게 나타나게 되고 이론화되었다. 전자에 있어서는 중생의 마음(衆生心)이 부처님의 구제에 대응하는 원리로 생각되어 여래장(如來藏, tath gata-garbha), 불성(佛性, buddha-dh tu) 등의 교의가 구성되고, 후자에 있어서는 알라야식( laya-vij na)·유식(vij apti-m tra) 등의 교의가 성립하였다. 그리고 각각에 있어서 관련 경전이 작성되고 있다. 여래장과 불성은 실질적으로 거의 같은 개념이지만 후자의 불성은 주로《涅槃經》에 설해지며, 이 경은 여래장 사상만이 아니라 여러 문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또한 여래장과 유식의 양 계통의 사상에 대한 전망을 가진《능가경(楞伽經)》도 작성되었다.


2. 여래장계 경전

여래장은 특징적인 사상임에도 그 사상의 성격상 전반적으로 그다지 조직된 교의를 형성하지 못한 경향이 있다. 따라서 제 경전은 꽤 자유로운 형식으로 여래장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여래장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경우,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경우라도 그 기조가 여래장사상과 서로 통한다고 인정되는 경전도 있다. 여래장을 언급하고 있는 경전과 논을 들면 다음과 같다.


A. 여래장을 언급하는 경전
①《如來藏經》, 불타발타라역 1권, 불공역 1권, 티베트역
②《不增不減經》, 보리유지역 1권
③《앙굴마라경》, 구나발타라역 4권
④《大法鼓經》, 구나발타라역역 2권, 티베트역
⑤《승만경(勝 經)》
⑥《열반경(涅槃經)》
⑦《능가경(楞伽經)》
⑧《무상의경(無上依經)》, 진제역 2권
⑨《대승밀엄경(大乘密嚴經)》, 地波詞羅역 3권, 불공역 3권, 티베트역

B. 여래장을 논하는 논서
①《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
②《대승법계무차별론(大乘法界無差別論)》, 견해저, 제운반야역 1권
③《입대승론(入大乘論》, 견의저, 도태 등 번역
④《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 미륵의 논서
⑤《불성론(佛性論)》, 세친저, 진제역 4권
⑥《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저. 진제역 1권, 실차난타역 1권

여래장을 기술하고 있는 경전 중에서《열반경》·《능가경》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본래 조그마한 경전이 많다. 문학적으로 이들 경은 주제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서로 독립된 것으로서 교의상 분명하게 관련이 있다고 인정되지 않은 것 같다. 또한 성립의 순서도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공통된 문제의식은 인정되므로 논리적 연관을 더듬는 일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여래장경》·《여래장엄지혜광명입일체불경계경(如來莊嚴智慧光明入一切佛境界經)》·《부증불감경》·《승만경》등이 중요하다. 또한《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은 이의 대표적인 논서이다.

 

II 여래장 사상의 교리

1. 여래장의 의미

여래장의 원어는 Tath gata-garbha인데, tath gata는 여래, garbha는 태아·모태의 의미이다. 이 언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경은 가장 일찍 성립한 것으로 추정되는《여래장경》이다. 여기서는 여래장이 중생에 대한 설명어로서 사용되는데, 즉 '중생은 여래의 태아이다'라는 정도의 의미였던 것 같다. 그것이 추상화되어 교의적 개념이 되었지만 중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즉 중생이 그 안에 여래가 될 태아를 품어 여래의 소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후자처럼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여래장은 중생과 붓다의 동일성 사상 위에서 발달한 것이기 때문에 대승의 일원적 사상, 또는 성불 문제를 둘러싼 교의사상은 모두 이것에 관련되어 있다. 예컨대 깨닫지 못하고 미망과 깨달음이 둘이 아닌 것(迷悟不二)·보리(菩提, bodhi)·보리심(bodhi-citta)·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prak ti-pari uddhi-citta) 등은 중생 마음의 본래 성품이 청정한 것이며 번뇌는 우발적인 것으로 청정한 마음을 더럽히는 것에 지나징 않는다(客塵煩惱)는 사상으로서, 원시경전 이래로 설해져 여래장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처럼 여래장 사상의 성립요소가 되었던 사상은 꽤 다채롭지만, 가장 기초적인 사고방식을 제공한 것은 중생에 있어서 붓다의 변재성(遍在性)을 설한《화엄경》<여래출현품>의 사상이었을 것이다. 중생에 있어서 성불 가능성을 확인하고 구제의 보편성을 수립한 것이 이 사상의 목적이었으므로 그것은 당연히 고려될 수 있는 사실이다. 여래장을 논급한 논서나 경전이 일반적으로 아미타불 신앙과 관계가 있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자성청정심·객진번뇌의 교리는 이미《아함경》에 나타나며, 부파불교의 논서를 매개로 하여 대승경전에서도《반야경》을 비롯하여 널리 설해지고 있다. 또한 여래장과 같은 계통의 '如來性(tath gata-dh tu, 如來界)' 사상은 이미《유마경》에도 나타나며, 지겸譯(222∼253년경)의《유마힐경》을 비롯하여 나집역·현장역에도 보이는데, 거기서 여래성은 지저분한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에 비유되어 "여래성은 바로 번뇌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설해지고 있다. 이 비유는 지참역(146-189)의《유일마니보경》에도 보이며, 거기서는 이 여래성이 번뇌 속에 있으되 더럽혀지지 않는 '보살법에 비유되어 있다. 이 보살법은 보살의 본성이란 뜻으로 불성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법화경》의 보살법 등과 같은 계통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여래장 게통에서는 '일승(一乘, eka-y na)' 사상이 설해지는데, 이것은 '삼승(三乘)'의 중생에게도 성불의 性이 있음을 설한 사상이다. 이 일승사상은 여래장사상으로 귀착한다. 삼승의 사람이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실유불성론(實有佛性論)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실유불성설은 여래장 사상과 다른 것이 아니다.《법화경》이나《화엄경》의 일승사상도 이와 같은 사상의 흐름 속에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일승·보살법·여래성·자성청정심 등의 사상의 흐름을 생각할 때, 여래장사상은 유구하고도 풍부한 전사(前史)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보성론》이 自說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하는 경전이 대단히 많다는 점도 알 수 있다.

 

2. 여래장 연기

여래장 사상은《보성론》에서 완성되었다고 해도 좋겠지만, '여래장연기'의 사상은《대승기신론》에 이르러 성립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여래장과 無明이 일체화한 '아라야식'을 토대로 미혹의 인식계의 전개와 번뇌의 斷盡을 연기의 이론을 적용하여 開示한 것은《기신론》에 이르러서라고 볼 수 있다. '여래장연기'라는 말은 법장의《대승기신론의기》에 처음으로 나타난다.《기신론》은 <인연분>·<입의분>·<해석분>·<수행신심분>·<권수이익분>의 5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심을 이루는 것은 <입의분>과 <해석분>이다. <입의분>에서는 대승을 '法과 義'로 나누어 설명한다. 법은 곧 '중생심'이다. 법이란 '眞의 존재'라는 의미인데, 대승이라는 법은 바로 중생의 마음이며, 우리 범부의 마음에 '大'와 '乘'의 힘이 갖춰져 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대승은 대승의 가르침으로 생각되지만, 대승경전에서 설한 대승이나 일승의 의미는《기신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범부의 마음에 갖춰진 자성청정심, 여래장을 말하는 것이다. <해석분>에서는 <입의분>에서 설하는 一心·二門·三大를 해석하고 있는데, 이 부분이 전체의 7할을 차지한다. 즉《기신론》의 본문이다.《기신론》에서는 그 후에 '四信'과 '五行'을 설하는데, 이것은 <수행신심분>에서 설해진다.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의 二門 중에 심생멸문에서 대승 즉 중생심을 밝힌다. 여래장연기는 여기서 설해지는 것이다. 심생멸문에서는 마음의 본성이 '여래장'으로 설해진다. 이것은 인간의 성불할 수 있는 본성을 말하는데, 특히 번뇌로 덮여 있을 때 여래장이라고 한다. 번뇌를 떠났을 때는 '법신'이라고 한다. 在纏位의 법신이 여래장이다. 범부에게 있어서는 여래장은 非顯在的이지만, 그래도 역시 실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처럼 여래장의 先在性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의 마음이 미혹에 빠져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래장연기가 설해진다. 미혹으로부터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마음의 연속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연속만으로는 미혹은 미혹 그대로이다. 하지만 미혹에는 미혹 자체를 부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기부정의 힘이 갖춰져 있다. 미혹에 빠져있는 범부가 미혹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 미혹과 깨달음의 관계를 연속과 단절이 뒤얽힌 것이라고는 설하지 않으며, 不常(연속의 부정)·不斷(단절의 부정)의 공의 입장에서 이해한다. 즉 현실을 '불상·부단'이라는 하나의 것으로 보며, 연속과 단절의 二元의 종합으로 보지 않는다. 이 불생불멸의 진여와 번뇌의 근원인 무명이 不一不로 화합해 있는 것을 아라야식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진망의 화합식이다.

《기신론》의 아리야식은 유식의 알라야식처럼 잠재심은 아니다.《기신론》에는 잠재심과 표면심이라는 대응관계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종자와 현행의 관계는 설해지지 않는다. 이 아리야식에는 무명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아리야식에 필연적으로 인식계가 전개된다. 이 아리야식으로부터 인식계의 전과정을 '3세 6추(三細 六序)'로 나타낸다. '3세란' 미세한 인식계로서, 이 마음의 활동은 의식으로써는 인식되지 않는 것으로 無明業相·能見相·境界相가 있으며, '6추'란 거친 마음의 활동으로서, 의식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자각적 활동으로 智相·相續相·執取相·計名字相·起業相·業繫苦相이다. '3세 6추'의 전개를 識의 관점에서 業識·轉識·現識·智識·相續識의 5식으로 나타내며, 마지막의 상속식을 意識이라고도 한다. 이상의 3세 6추·5의와 의식은 불각의 전개이기 때문에, 망념 세계의 문제이다. 이렇게 망념 세계의 전개를 밝힌 뒤에, 심성·자성청정심과 망념·무명의 상호관계를 밝힌 점이 유식과는 다른 여래장설의 특색이다. 이것이 '眞妄交徹'을 설하는《기신론》의 훈습론이다. 유식설의 훈습론은 표면심의 작용이 아뢰야식에 훈습하는 것을 설하지만, 진여가 아뢰야식과 서로 훈습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여래장설에서는 진여가 심성·자성청정심·무념 등으로 불리며, 현상심과 같은 장면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 때문에 불가분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 바로《기신론》의 독특한 설인 진여와 무명의 상호영향, 즉 훈습이 설해지게 된다. 이것을 '染淨相資'라고 한다.


III 승만경의 여래장 사상

1. 승만경에 나타난 여래장 사상

《승만경》에서는 <如來眞實義功德章>·<十大受章>·<三大願章>·<攝受正法章>·<一乘章> 등에 보살의 수행이 설해져 있으며, 그 수행을 통하여 여래장·법신의 開顯을 밝히려 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의 <無邊聖諦章> 제6에서 <自性淸淨章> 제13까지는 여래장 자체에 대해 설해져 있다. 다음의 <眞子章> 제14에는 "여래장이 범부에게 갖춰지는 것은 알기도 어렵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에 단지 붓다의 말씀을 믿을 수 밖에 없으며, 붓다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는 큰 이익이 있다."고 설해져 있다. 여기에 여래장이 '信의 종교'임이 드러나 있다. 그 뒤에 유통설로서의 <승만장>이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일체 중생에게는 여래장이 있으며, 중생이 아무리 윤회를 되풀이하고 번뇌에 오염되더라도 여래장은 오염되지 않고 소실되지는 않는다."는 것은《여래장경》의 설이다.《여래장경》은 "일체 중생의 탐·진·치 등 갖가지 번뇌 중에는 여래의 지혜·여래의 눈·여래의 몸이 있어서, 결가부좌하여 엄연부동하다"고 설하고, 이 여래장을 아홉 가지 비유로 밝히고 있다. 이 아홉 가지 비유는《불성론》이나《보성론》등으로 계승되었다. 또한《승만경》에 이르면, "여래장은 자성청정이면서도 번뇌에 오염되는데, 이 관계를 범부가 알기 어렵다"는 것이 강조된다. 여기서 여래장이 불타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미혹·범부의 근거이기도 하다는 것이 설해지게 된다. 즉 "세존께서는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생사가 있다고 설하신다. … [하지만] 여래장에는 생사가 없다. 여래장은 유위의 상을 떠나 있으며, 상주불변하다. 따라서 여래장은 依·持·建立이다."라고 설해진다. 즉 여래장이 染과 淨의 근거(依持)라고 설해지고 있다. 유식불교의 생사의 근거라는 것(즉 알라야식은 깨달음의 근거는 아니다.)은 이해하기 쉬우나, 염과 정, 무상과 상주라는 쌍방의 근거인 여래장을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다. 이 여래장이 염정의 근거라는 것이 여래장연기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승만경》은 여래장의 자성청정·객진번뇌염의 사상과 더불어 여래장의 본성을 5臟으로 밝히고 있다. 5장이란 여래장·법계장·법신장·출세간상상장·자성청정장이다. 이 설은《불성론》이나《보성론》, 진제역《섭대승론석》등에 인용, 해설되어 있으며, 순차적으로 여래장의 自性·因·至得·眞實·秘密의 의미라고 풀이되어 있다. 또한《승만경》에 의하면, 여래장에는 공·불공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여래장은 迷悟의 근거라는 점에서, 染에 사로잡히지 않는 '공'의 성질이 없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와 동일한 무량무변의 공덕과 [그 본성이 변치 않는] '불공'의 성질이 없으면 안된다. 이것이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의 의미이다. 공여래장은 번뇌가 궁극적으로는 허망임을 간파하는 '공의 지혜'에 기초하고 있다. 불공여래장이란 범부에게 있어서도 眞實佛法이 불공임을 말한다. 그러나 이 '불공'도 공의 지혜에 의거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여래장은 상주불변하는 不思議한 佛法이지만, 그것은 6식 및 心法智를 초월한 것이며, 6식으로써 여래장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범부에게도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苦를 싫어하고 열반을 희구할 수가 있다. 이처럼 여래장은 6식을 초월하고 상주불변하며, 常樂我淨의 성질을 갖지만, '我'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된다. "여래장은 我가 아니고, 衆生이 아니며, 命이 아니고, 人이 아니다"고 설하고 있다. 하지만 我와 여래장의 차이를 밝히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대승의《열반경》에서는 "여래장이 곧 '我'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여래장은 존재론적으로는 아트만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인식론적·실천적으로는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불교의 공의 입장이다. 안이하게 여래장을 '有'로 상정한다면, 그것은 여래장을 잘못 주장하는 셈이 될 것이다. 여래장은 6식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6식 중에서 그 존재성을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래서《승만경》에서는 空에 住하여 붓다의 말씀을 신봉하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트만과 여래장의 차이는 아트만이 존재론적으로 설해지고 있는데 비해, 여래장은 실천적인 입장에서 주장되고 있다는 점이라 하겠다. 그라나 다음 시대에는 여래장과 我의 관계로부터 윤회의 주체로서의 알라야식과 여래장의 관계가 새로운 문제거리로 대두되게 되었다. 위의《여래장경》이나,《승만경》에서는 여래장과 알라야식의 결합은 생각되고 있지 않다. 또한 대승의《열반경》·《대법고경》·《앙굴라마경》·《부증불감경》등에도 여래장은 설해지고 있지만, 체계적이지 않으며, 여래장경전으로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알라야식과 여래장의 융합을 설하고, 여래장 즉 알라야식의 사상을 전개한 것은《능가경》이며, 뒤에 나온《밀엄경》이 있다.


2. 승만경에 나타난 여래장 사상의 의의

《승만경》은 상주불변의 법신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존재는 시간의 규정 아래 있는 유위법과 시간을 초월한 무위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진리는 무위법에서 나타나게 된다. 苦·集·滅·道의 사성제 중에서 고·집·도의 셋은 유위법이기 때문에 진실한 의미에서의 진리는 유위법을 떠난 상주의 멸제 뿐이다. 그것도 번뇌를 소멸한 것이 멸제는 아니다. 현상적인 소멸을 초월한 상주불멸의 법신이 멸제인 것이다. 생기와 상대되는 현상세계를 표현한 멸(滅, niroddha)의 의미가 부정을 매개로 그것과 차원을 달리하는 실재계(實在界)의 '소멸되지 않는 것(不滅=常住)'의 의미로 발전한다고 하는 사고법은 변증법적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또한 종전의 불교에서는 현실세계를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이라고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진리였고, 반대로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보는 것은 미망으로 가르쳐 왔다.《승만경》은 이같은 진리의 부정적 견해를 근거로 한 다음, 법신은 상·락·아·정의 4바라밀의 성질을 가진 것이라 한다. 이런 사고법도 변증법적인 것으로서 무아를 설한 불교가 '아(我)'를 인정하기에 이른 것은 그 의미 내용이 인도 정통철학의 자아(自我, tman)와 전혀 다른 것이라 말할 수 있으므로 불교사상에 있어서 특기해야 할 사항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법신이 번뇌에 싸여 있을 때 여래장이라 불리지만 여래장 자체는 본래적으로 깨끗한 마음인 자성청정심이고 다만 밖으로부터 번뇌로 더럽혀져 있는데 지나지 않은 것이다. 여래장은 일체법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므로 유위의 제법도 무위의 제법도, 혹은 미혹해 있는 윤회도 깨달음인 해탈도 모두 여래장에 기반을 두고 성립한다. 그러므로 여래장의 기초적인 사상은《승만경》에 거의 다 망라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IV 여래장과 他사상과의 관련성

1. 여래장 사상과 불성론과의 관계

불성의 원어는 Buddha-dhatu로 추정되고 있다. 성(性)에 해당하는 dh tu는 보통 계(界)로 번역되어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여기서는 근거·원리와 같은 의미이다. 결국 부처임의 근거가 불성인데, 이런 측면에서보면 여래장은 불성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만 유위의 제법을 끊어 얻어진 해탈을 불성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무아(無我)는 아집을 끊은 것이지만 '아(我)'의 관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 '아(我)'를 불성이라 이름붙인다. 또 부처님은 중도에 의해 '我가 있는 것(有我)'과 '我가 없는 것(無我)'을 설하는데, 我란 여래장의 의미로서 이것을 가리켜 모든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불성의 존재는 범부·성문·연각의 사려가 미치는 바가 아니고, 다만 부처님만이 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 정통철학이나 세간 사람들이 '我는 엄지 손가락 만한 크기'라든지, '我는 겨자씨 만한 크기'라고 하고 논의하고 있는 것과는 전연 의의를 달리한다. 그렇다면 왜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설하는가. 그것은 이같은 외도 범부의 망상을 부정하기 위해 무아라하는 것이지 그것은 아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상주불변하고 진실한 것이 我이므로 여래도 역시 我라고 부르는 것이다. 불성과 여래장은 동의어이지만, 하나의 경전에서 동시에 쓰이지는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여래장과 유식론과의 관계

여래장은 실천적 입장에서 이해해야 하지만, 이것을 존재론적 입장에서 취급하게 되면, 여래장과 알라야식의 결합이 문제시된다. 유식설에 있어서는 알라야식은 '망식(妄識)'이다. 이에 비해 여래장의 입장에 설 경우에는 알라야식은 진여와 무명이 결합한 것으로서 '眞忘和合識'이 될 수 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진망화합식으로서의 알라야식은 진제의 역어로 '아리야식(아려야식)'이라고 하며, 망식의 알라야식은 '아뢰야식(현장의 번역어)'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단순히 번역상의 차이로 원어는 laya-vij na이다. 유식설에서는 아뢰야식을 이숙식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전생의 업의 과보로서의 식이기 때문이다. 이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이다. 윤회의 주체인 아뢰야식으로는 깨달음의 淨法을 발견할 수가 없다. 이에 비해 여래장의 사상은 번뇌로 오염된 마음의 밑바탕에 오염되지 않은 자성청정심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 청정한 것까지도 포함시켜 아리야식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것이 화합식이 되는 것이다. 이 妄과 眞, 染과 淨이라는, 본래 합일불가능한 것을 합일시키고, 아리야식의 전개를 설하는 것은《대승기신론》이다. 따라서 여래장연기설은《대승기신론》에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3. 여래장과 중관론과의 관계

여래장 사상은 유식설 속에서 그 체계가 조직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공사상(空思想)의 방편설이라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여래장사상인 독립된 학파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중관(中觀)을 잇는 하나의 독립된 제3의 학파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어래장사상은 대승의 궁극적인 진리인 空의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공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중관에 있어서도 공사상은 긍정과 부정의 두 측면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의 측면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대해 여래장사상은 공사상이 지닌 無의 측면보다는 有의 측면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근본적인 개혁이었다고 이해된다.

< 결 론 >

여래장은 현실적으로 번뇌에 쌓여 있는 중생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부처와 동질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교설이다. 이러한 점에서 여래장사상이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자비의 측면을 계승하는 사상체계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런 여래장사상은 불교의 전통 가운데 보편적인 저류(低流)를 이루는 것으로서, 따라서 '여래장이 불교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의 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주장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래장 사상은 여래장이 중생심과 불성이 양립하고 있는 것이라서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래장 교설의 본래 의도는 이러한 난해성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을 설정해 놓고 그 신(信)의 측면을 강조한 불교의 종교적 부흥 운동이라는데 더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 참 고 문 헌 -

1. 대승불교, 시즈타니 마사오, 스그루 신죠, 문을식譯, 도서출판 여래, 서울: 1995
2. 인도불교의 역사(下), 히라카와 아키라, 이호근譯, 민족사, 서울: 1994
3. 불교강좌편, 정승석, 대원정사, 서울: 1994
4. 初期 如來藏思想의 三寶觀 硏究, 朱敏晃, 東國大學校 大學院, 1986年度 碩士 學位 論文

 


여래장 사상의 형성 및 연원

대승불교의 시대에 생겨난 수많은 대승경전 가운데 공통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는 부처와 중생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 중생에 관한 부처와 자세와 중생 자신의 발심 수행이라는 실천 자세의 문제이다. 물론 부처와 중생과의 관계는 원시불교 이래 가장 중요한 사상적 맥락을 이어온 것이지만 그것은 대승불교에서 특히 강조되고 여래장, 불성 사상으로 발전되었다고 보여진다. )

우리들의 주체적인 마음을 탐구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여래장 사상은 유식 사상과 연관성을 가진다. 즉 여래장은 중생심 안에 해탈의 심성인 여래성이 있다는 입장이고, 유식 사상은 마음이 일체 존재의 근원이라는 근원적인 입장에서 마음의 현실적 기능 분석에 치중하고 있다. 과거에 지은 온갖 업의 영향으로 오염되어 있으면서 외부세계와의 접촉에서 생긴 관념을 축적하는 마음의 창고로서 아래야식은 이로부터 다시 일체의 현상을 산출하길 반복하는 윤회의 주체이지만, 이 아래야식이 오염의 상태를 씻고 청정하게 되면 곧 해탈이 이루어 진다. 이 아래야식을 통하여 우리가 처한 생사의 세계가 열반의 세계로, 중생이 부처로 전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생사와 열반 중생과 부처는 근원적으로 분리되어 있는가? 혹은 그 근원은 동질적인 것이 다만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에 있어서 다른 것인 양 분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은 긍정적인 답변을 우리는 불성 또는 여래장 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성불의 근거가 중생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근거가 곧 여래장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여래장은 곧 진여(眞如)라고도 표현된다. 진여란 정의를 내릴 수도 없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궁극적인 진실을 표현하는데 쓰이는 유일한 용어이다. 즉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에서 진여라고 한다. 그것을 달리 말해서 여래장이라 한다. 진여와 여래장은 우주의 모든 사물이 지닌 참된 상태이며, 부처의 원천이며, 깨달음의 근거이다. 그것이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는 시간이나 공간과 관계없는 깨달음 자체이지만, 움직일 때는 인간의 형상으로 삶의 일상적인 방식과 양상을 취한다. 그러나 이론의 전개과정에서 여래장은 두 가지 측면으로 구별되기도 한다. 우선 여래장을 깨달음 자체인 법신과 구별하여,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상태를 여래장이라 하고, 깨달으면 법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입장에서 전자를 더러움에 싸여 있는 진여 즉 유구진여(有垢眞如)라 하고, 후자를 더러움이 없는 진여 즉 무구진여(無垢眞如)라 한다. 이러한 입장으로 인하여 여래장 사상과 유식 사상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양 사상을 조화 통일시키려는 『능가경』, 『대승기신론』 등의 경론이 다수 제작되고 마침내 여래장 사상은 유식설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성불 가능성의 개념으로 최초로 등장하는 개념은 종성(gotra)이다. 이 개념은 원래는 바라문 가계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나 원시경전에 도입되어 gotrabhu 즉 종성인, 수행의 과정에서 성인이 되기 직전의 경지에 이른 비구 또는 일반인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종성은 불교에서는 범부의 종성을 버리고 성인의 종성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부파불교 시대에는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수행의 계위(階位)에 적용되기도 하고, 일체 중생의 종성을 성문, 연각, 보살의 3 종성으로 나누는데도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 시대에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으로 등장한 것은 보살사상이다. 이것은 일체 중생 중 불법을 듣고 발심하는 자는 모두 보살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모두 여래의 가족이며, 여래의 자식이다. 이러한 입장은 여래장 사상에서 더욱 현저한데 여래장 사상에서는 종성이라는 개념을 모두 확산시켜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의 종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같이 여래장 사상은 일체 중생에게 모두 예외없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중생은 그 가능성 때문에 여래장이라 불려진다. 여래장의 원어는 tathagatagarbha이다. tathagata는 여래, garbha는 태아 모태를 의미한다. 이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가장 일찍이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래장경』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중생을 설명하는 말, 예를 들면 ‘중생은 여래의 태아이다’라는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이 추상화되어 교의적 개념이 되었으나, 중생을 지시하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즉 중생이 여래의 태아로서 여래 안에 포용되어 있는 상태, 또는 중생이 자신 안에 여래가 될 태아 혹은 여래의 소질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후자의 경우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여래장의 의미를 『보성론』에서는, 첫째 일체 중생은 성장하여 여래로 될 소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래의 태아이다. 둘째, 중생들에게 있어서는 여래의 성격이 아직 발휘되지 않고 여래의 태내에서 자고 있다. 그러나 그 잠자고 있는 태아는 여래이며 그것은 진여이다. 세째, 중생은 번뇌 때문에 자기에게 잠재하고 있는 여래의 성격을 태아처럼 감추어서 표면에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생의 태아는 여래성이다.
이처럼 여래장 즉 ‘여래이어야 할 태아’는 결국 중생에 있어서 번뇌에 덮혀서 나타나지 않는 무량번뇌소전(無量煩惱所纏)되어 있는 ‘여래이어야할 인因 또는 본질’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래를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보게 되면 그것은 곧 법신과 동일시된다. 법신 사상은 대승불교에 있어 구체화된 것이지만 원시불교에 있어서도 법의 관념으로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법 즉 진리 중시의 불교의 입장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법신의 개념은 대승불교에 있어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이라는 이신설(二身說)로 먼저 나타난다. 색신이란 중생을 위해 방편으로 나타낸 몸이고, 법신은 부사의한 법으로 이루어진 몸임과 동시에 붓다의 배후에 있는 절대신, 나아가 법계와 같이 광대 무변한 존재는 의미를 가진다.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여래의 몸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生身이요, 하나는 法身이다. 생신이라 함은 방편으로 중생을 위해서 化生한 몸이다.
여래의 몸은 상주하는 몸이며, 깨뜨릴 수 없는 몸이며, 잡식하지 않는 몸이니 곧 법신이다.

라고 하여 여래의 본질이 곧 법신이며, 또 법신은 상주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법신 상주의 사상은 『법화경』, 『화엄경』,『정토계 경전』 등 대승경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상이다. 이러한 법신사상이 발달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 여래의 지혜가 일체 중생에게 광대 무변하게 미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 것. 둘째, 그 지혜에 기초한 여래의 자비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여래장계 경전에서 법신의 편만성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여래장 사상에서 말하는 ‘중생 안에 있는 여래’란 결국 여래의 지혜, 또는 여래의 법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중생계와 법계는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세계의 다른 이름이다. 『부증불감경』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여,

사리불아, 중생계를 떠나서 법신이 있지 않고, 법신을 떠나서 중생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계가 곧 법신이고, 법신이 곧 중생계이다. 이 두 법은 뜻은 같고 이름만 다르다.

중생계란 여래장과 동의어이다. 그것은 무량한 번뇌에 덮혀 있는 여래이다. 중생계와 법계가 같다는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양자 사이에는 마음의 전환이 요구된다. 그러면 이와같이 우리들 속에서 무량한 번뇌에 덮혀있는 여래이어야 할 본질 또는 因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객진번뇌(客塵煩惱)에 덮혀 있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다.

여래장은 중생과 붓다의 동일성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의 일원적 사상 또는 성불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교의 사상은 모두 이에 관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미오불이(迷悟不二) 보리 보리심 법신 법계(法界) 자성청정심 등이 그것이다. 특히 자성청정심은 중생의 마음의 본성은 청정한 것으로, 번뇌는 청정한 마음을 우발적으로 염오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客塵煩惱)는 사상인데, 이는 원시경전 이래 주장되어 온 것으로서 여래장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와 같이 여래장 사상의 성립요소가 되었던 사상은 상당히 다채롭다. 그 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관념을 제공한 것은 붓다가 중생에 편재(偏在)함을 설하였던 『화엄경(華嚴經)』 여래출현품 )의 사상일 것이다. 중생의 성불 가능성을 확인하고 구제의 보편성을 수립하는 것이 여래장 사상의 목적이었으므로 이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래장에 대해 언급하는 경론이 일반적으로 아미타불 신앙과 관계깊은 점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여래장 사상의 성립은 그 학설의 내용으로 보아 대승의 공사상을 이어받아 해탈의 주체인 우리들 마음에 대한 고찰을 중심으로 하여 성립되었다. 이것은 여래장 삼부경이라 일컬어지는 『여래장경』 『부증불감경』 『승만경』 등에서 그 사상이 성립되고 『구경일승보성론』에서 체계를 갖추게 된다. 이들 경론에서는 해탈의 주체인 마음을 고찰하여 중생과 여래가 동일함을 강조하고, 성불의 근거를 거기서 찾는다. 그리고 그 동일성의 근거로서 법신편만(法身扁滿), 진여평등(眞如平等), 여래성(如來性) 등을 제시하여 ‘일체중생유여래장(一切衆生有如來藏)’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 여래장 사상은 인도 대승불교의 역사에 있어서는 중관학파나 유식학파와 같이 하나의 학파로서 성립하지는 못하였다. 그 경향은 티벳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중국에서는 화엄종의 법장(法藏)이 여래장 사상을 여래장연기종으로 독립시켜서 실상종(實相宗), 대승종교(大乘終敎), 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 등이라 불러 하나의 독립된 체계로 설명하고 있다. 법장의 이러한 견해도 당시 중국에서 많이 연구되고 있었던 『불성론』이나 『대승기신론』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 보여진다. 다시 말하면 『대승기신론』이 여래장과 아래야식이 같다는 것을 설명하고 여래장 연기설을 주장한 것에서 여래장 사상을 하나의 독립된 사상 체계로서 설명한 것이다.

이같이 인도에 있어 하나의 학파로서 체계를 갖추지 못한 여래장 사상은 그 사상의 내용에 있어서도 여러 불교 학파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여래법신이 상주한다는 것과 모든 중생에게 여래장이 있다는 여래장 사상의 입장은 그 유적(有的)인 표현으로 인하여 인도 정통사상에서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실체인 아트만과 유사한 것으로 오해되어 공사상을 주장하는 중관학파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유부 등으로부터는 여래장 사상을 포함한 대승사상이 붓다의 근본 가르침이 아니라는 비판 속에서 부정되어지고 있다.

 


여래장사상의 실천적 이해 (정 호 영)

Ⅰ. 여래장사상의 역사적 의미와 그 연구 방향
Ⅱ. 여래장계 경론에 나타난 여래장사상의 전개
Ⅲ. 여래장사상의 원환적 구조
Ⅳ. 맺음말


Ⅰ. 여래장사상의 역사적 의미와 그 연구 방향

여래장사상이 근대의 학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보성론》의 산스크리트본이 존스톤에 의해 1950년 출판된 데에서 비롯된다. 산스크리트본 《보성론》의 출판 이후 우이 하쿠쥬의 일본어역, 나카무라 쥬류의 산스크리트와 한역의 대조본,,타카사키 지키도의 영역 및 일본어역 등이 출판되는 등 《보성론》을 중심으로 하는 여래장사상 연구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여래장사상의 체계적 논서인 《보성론》은 우리말로도 번역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역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전혀 주를 달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연구자료로 충분히 활용되기 어렵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최근 《보성론》에 관한 연구가 발표된 바는 있지만, 그것은 대개 《보성론》에 집중되어 있을 따름으로 《보성론》 이후 여래장사상이 후기 인도불교사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여래장사상이 인도 대승불교에서 하나의 학파로서 독립된 지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여래장학파라 하지 않고 여래장사상으로 명명하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곧 여래장사상이 대승불교 전체에 대한 이해에 긴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우리가 여래장을 소박하게 '우리에게 갖추어져 있는 성불의 가능성'으로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이 경우 여래장은 성불을 궁극목표로 하는 대승불교의 원초적 이상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여래장사상은 대승불교 <인간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불의 당위성을 대전제로 하면서 한편으로 유식학이 인간의 미혹된 현존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여래장사상은 여래와 다르지 않은 인간의 내재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로부터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다. 또한 유식학이 인간의 앎과 의지 그리고 성불에의 과정을 밝히고 있다면, 여래장사상은 깊은 종교체험에서 드러나는 부처님의 자비 그리고 한없는 인간에의 신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여래장사상은 동북아시아 불교에서, 때로는 여래장이라는 명칭 그대로, 때로는 불성이라는 이름으로 불교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래장 또는 불성은 소박하게는 핍박받는 민중의 고통을 위무하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촉발시키고 인간의 궁극적 자유와 해방을 일깨우는 가르침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며, 나아가서는 법상종의 일분무성(一分無性)과 열반종의 중생유성(衆生有性) 논쟁, 천태의 성구(性具)와 화엄의 성기(性起) 문제, 그리고 즉심즉불(卽心卽佛)을 강조하는 선종에서 목석(木石) 또한 불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 등을 촉발시키는 기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여래장사상이 5세기 초에 성립된 《보성론》에서 그 사상체계가 확립된 이후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여래장사상이 불교의 전통을 준수하기 보다는 우파니샤드 또는 베단타철학과 습합된 것이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극단적인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기본적으로 여래장사상을 법신(法身)의 일원론 또는 계(界, dha-tu)의 일원론으로 평가하는 데에 따른 것이다. 우파니샤드 및 베단타철학이 브라흐만 일원론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승인된 사항이다. 그런데 이는 여래장사상을 법신 또는 계의 일원론으로 해석함으로써 베단타와 여래장의 사상적 구조에 아무런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파니샤드베단타가 환원주의적 일원론 또는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에 근거하고 있음에 반하여 여래장사상은 비환원적 불이론 또는 실존적 존재론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명확히 이해하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우파니샤드의 브라흐만은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생성되고 그것에 의해 유지되며 그것으로 귀환하는 바의 것이다. 말하자면 브라흐만 이외의 제2의 것은 없다는 것이다.
베단타는 이러한 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세계는 환영(maya)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우파니샤드베단타에는 실존이 자리잡을 여지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여래장사상은 실존을 배제하지 않는다. 비록 세계가 그리고 중생이 염오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염오되어 있는 사실을 현실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보성론》에 인용되어 있는 《승만경》의 산스크리트문은 여래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즉 "여래의 법신이 번뇌의 외피(klesakosa)를 벗어나지 않는 것을 여래장(tathagatagarbha)이라 한다." 여기에서 번뇌를 외피(外皮)라고 한 것은 번뇌가 법신과 구별되며, 나아가서는 번뇌가 법신에 비해 부차적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번뇌가 비실재로 간주됨으로써 그 존재가 전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아님을 주목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즉 번뇌는 비록 궁극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하고 있음은 엄연한 현실이며, 나아가 여래장은 번뇌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위 문장의 한역은 이러한 점을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klesakosa(번뇌의 외피)가 번뇌장으로 번역되고 있음이 바로 그것이다. 산스크리트에 있어 kosa와 garbha는 전혀 다른 낱말이다.
그러나 한역자는 이것을 모두 장(藏)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번뇌와 여래장 또는 번뇌와 법신 사이에 위계적 차이를 두는 것이 여래장사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라는 한역자의 적극적인 해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보성론》에서 여래장의 '존재'가 언급될 때 항상 astitva가 사용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있음'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이 말은 `있다'를 의미하는 동사원형 as의 삼인칭 단수 현재(asti)에 추상명사어미(tva)를 결합시킨 것으로, 영어의 is-ness에 상응한다. 그러면 《보성론》은 왜 전통적으로 존재의 의미로 사용되어온 어휘 sat를 사용하지 않고 astitva를 사용하고 있는가? sat는 동사 as의 현재분사로서 영어의 being에 해당된다. 이 경우 sat는 영어의 being과 같이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분석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있다'라는 동사의 현재분사라는 점에서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현실(act of existence)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의 명사로서 사용될 때에는 '있는 것' 즉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의 의미를 갖는다.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은 이 두 가지 의미 가운데 전적으로 후자의 의미로 사용한다. 이 경우 sat는 결국 현실과는 분리되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본질 또는 실체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래장사상에서 여래장은 번뇌와 분리되어 있는 본질실체가 아니다. 《보성론》이 존재의 의미로서 astitva를 사용하는 것은 이와 같이 여래장이 현실과 괴리된 본질이 아님을 명백히 하기 위한 것이다. 여래장은 번뇌와 무관계한 실재가 아니다. 여래장은 번뇌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여래장이 연기의 사상과 관련을 맺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이다. 여래장사상이 소위 불이론(不二論, advayavada)으로 불릴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여래장사상에 대한 오해가 주로 여래장사상을 환원주의적 일원론 또는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으로 규정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래장사상은 여래장의 형이상학적 우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은 어디까지나 여래장과 번뇌의 불가분리를 확인하며, 그럼으로써 중생을 본질과
실존의 복합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오해가 제기되는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분석적 사유가 갖는 문제점을 간단히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사물에 대한 앎을 추구할 때 우선 그것을 부분들로 분해하는 데에 익숙하다. 말하자면 어떤 사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때 그것을 작은 조각으로 쪼개고 그렇게 쪼개어진 조각을 다른 조각과 분리시킨 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많은 부분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무시하게 된다. 그러나 한 사물의 의미는 언제나 단순한 부분들의 총합 이상이다.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은 이와 같이 사물을 분할하고 분할된 부분들을 대립시키고 나아가서는 합리적인 사유법칙에 따라 부분들의 양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속과 변화라는 한 사물의 두 측면 가운데 변화를 폐기하고 불변성영원성을 이 세계 바깥에 정립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많은 대승경전 특히 《승만경》, 《보성론》 등이 강조하고 있는 불가사의(不可思議, acintya)의 의미를 재음미하여야 할 것이다. 이들 경론에서 불가사의는 단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즉 중생은 여래가 될 가능태로서의 여래장이지만, 동시에 번뇌와 분리되지 않은 존재 즉 번뇌장이라는 점이 합리적 사유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15) 이러한 언명은 결국 깨달음과 미혹이 공존하며, 여래가 동시에 중생이라는 역설적 사실을 지칭한다. 그러면 이러한 선언의 참다운 의미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명제의 진리성은 어떻게 입증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과 앎과 실천의 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합리적 사유를 뛰어넘는 지식은 일차적으로 믿음을 통해 수용된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은 우리의 실존적 반성과의 대립, 그리고 그 대립의 극복을 통해 '주체적 앎'으로 전환된다. 만약 믿음의 내용이 단지 우리를 강요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독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만약 우리가 이를 반성없이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굴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단순한 수동적 인식의 태도가 아니다. 믿음은 진리에의 적극적인 참여이며, 진리의 실천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여래장사상은 '모든 사람은 부처님'임을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결코 부처님일 수 없다. `나는 미혹된 중생'일 따름인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부처님이라는 부처님의 말씀과 나는 중생이라는 나의 실존적 반성은 예리하게 대립된다. 그런데 이 대립은 결코 어느 한쪽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부처님으로 환원될 때 그것은 자기기만 또는 과대망상이며, 중생으로 환원될 때 그것은 자기소외 또는 절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제 대립은 우리가 어느 한쪽에 안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립은 끊임없는 긴장이며, 역동적인 활동이다. 그리고 이 활동은 종교적 실천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 종교적 실천 또는 수행이란 바로 '나'의 행위이다. '모든 사람은…'이라는 보편명제가 '나는…'이라는 특칭명제로 전환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수행의 주체적 측면을 통해서이다. 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은 부처님'이라는 일반적 진리가 수행을 통해 비로소 `나는 부처님'이라는 주체적 진리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중생이 번뇌장이면서 동시에 여래장이라는 불가사의, 합리적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믿음과 실천을 통해 궁극적인 진실로 입증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확인된 앎의 내용은 단순한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나의 전 인격의 참여를 통해 완성된 지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자성청정심 객진번뇌염(自性淸淨心 客塵煩惱染)'이라는 여래장사상의 근본명제를 하나의 위대한 종교적 진리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 명제는 겸허한 믿음과 역동적인 실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주체적인 앎을 통해 그 참다운 의미가 드러나는 것임을 확인한다.
이상의 여러 측면을 염두에 둘 때 여래장사상은 단순히 이성적 합리성 차원에서 논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래장사상은 불교 일반이 그러하듯 합리성을 초월하는 깊은 종교적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그 연구 또한 종교적 수행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만 여래장의 존재에 관한 의미가 충분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Ⅱ. 여래장계 경론에 나타난 여래장사상의 전개

여래장이라는 어휘 및 '일체중생은 여래장이다.'라는 선언이 최초로 등장하는 경전은 《여래장경》이다. 그런데 《여래장경》은 일체중생이 여래장이라는 점을 자세히 논증하기보다는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아홉 가지의 비유 중 첫 번째의 비유는 '시든 연꽃 속의 화불(化佛)'로서 그 구체적인 내용은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무수한 연꽃 하나 하나에 여래가 앉아 있는 모습을 연출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선남자여, 시든 연꽃잎에 여래가 좌선을 한 채로 광명을 발하고 있는 것을 그대는 볼 것이다. 여래도 이와 같이 지혜와 여래의 눈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의 무량한 번뇌에 감싸여 있는 모든 중생들의 내부에 동등한 지혜와 동등한 눈을 가진 여래가 결가부좌하고 부동으로 앉아 있음을 본다. 선남자여, 그리하여 윤회를 반복하는 중생 안에 있으면서도 여래의 본성(dharmata)이 조금도 염오되지 않음을 보고 그 여래들은 나와 다르지 않다[如我無異]고 말한다. 이와 같이 여래는 여래의 눈으로 일체중생은 여래장(sarvasattvas tathagatagarghah)이라고 관찰한다.
그리고 천안(天眼)을 가진 사람은 시든 꽃잎들을 제거하고 그 안의 여래를 현출시킨다. 이와 같이 여래도 불안(佛眼)으로 일체중생이 여래장임을 관찰하여 그 중생들의 번뇌를 제거시키고자 법을 설한다. 이것이 다 이루어지면 여래는 있는 그대로 현출한다.
선남자여, 이것은 보편타당한 진리(dharmanam dharmata, 諸法의 法性)로서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하여도 출현하지 않아도 이들 중생은 항상 여래장이다. 이 법을 듣고 수행한 보살들은 모두 번뇌로부터 해방되어 여래가 되고 여래의 활동을 세상에 편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생이 여래장이라는 사실은 여래의 지혜에 의해 확인된다는 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하는 목적은 중생을 성불토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읽을 수 있다. 결국 여래출현의 궁극적 이유는 여래의 대비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이 여래장이라는 사실은 여래의 설법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에게 알려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여래의 자비의 설법과 이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래장경》은 《승만경》, 《부증불감경》과 함께 여래장 삼부경으로 불린다. 이 가운데 《승만경》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여래장을 `무량한 번뇌장에 감싸여 있는 여래 법신'으로 정의함으로써 여래장사상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루고 있다.
《승만경》은 한편으로 "여래장에 관한 앎은 곧 여래의 공에 관한 앎"이라고 하면서 공(空)과 불공(不空)의 두 가지 여래장에 관해 언급하고 또 이 공에 관한 앎은 일체의 성문벽지불이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공과 불공의 문제를 단순히 합리적으로 해석하면―이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공은 번뇌의 비존재를, 그리고 불공은 여래장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쉽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결국 여래장과 번뇌의 대립모순을 해소하기 위하여 복합적인 한 인간을 두 부분으로 분할하고 이 두 부분을 전적으로 다른 두 영역 또는 전혀 이질적인 두 차원으로 간주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A와 B가 모순된다 하더라도―여기에서 모순은 양립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지만―A와 B가 다른 공간 또는 다른 시간에 있다면 둘은 공존할 수 있다는 합리화의 사유방법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주체적 앎'에서 모순은 결코 두 개의 차원으로 해체될 수 없다. 동시에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도 없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둘 때 《승만경》이 공여래장을 '여래장이 번뇌장을 벗어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장과 번뇌장이 구별됨을, 그리고 불공여래장을 '여래장이 불가사의한 불법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은 것'이라
고 하는 것은 여래장이 엄연히 불가사의한 불법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여전히 번뇌장과 공존함을 함축하고 있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과 불공은 여래장과 번뇌가 서로 다른 것이면서도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며, 불가분리이지만 서로 혼효(混淆)되지 않고 엄연히 구별되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승만경》이 여래장을 무위법의 소의처일 뿐만 아니라 유위법의 소의처이기도 하다고 함으로써 이른바 여래장 염정의지설(染淨依支說)을 제기하고 이것이 후대의 여래장 연기설의 근거가 되었던 점 또한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으로 증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증불감경》은 일체의 중생이 삼계육도를 왕래하며 윤회생사를 거듭하고 있는 바, 중생의 바다에 증감이 있는가라는 샤리푸트라의 질문에 증감의 견해는 그릇된 것임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서 일법계(一法界, eka-dharmadhatu)를 여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계(dhatu)라는 개념이다. 산스크리트어 dhatu는 동사원형 dha에서 파생된 말로 일차적으로 그 위에 무엇을 두는 장소로서의 공간을 의미한다. 계(界)로 한역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공간은 인도철학에서 종종 보편적인 것, 불변적인 것의 비유로 사용된다. 개인의 자아와 우주적 실체의 동일성을 논증하면서 이는 항아리 속의 공간과 우주의 허공이 다르지 않은 바와 같다고 하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 dhatu는 이러한 점에서는 본질본성의 의미를 갖는다. 이 경우 법계는 법성(法性 dharmata, 사물의 본성)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dhatu라는 말은 동시에 광물이 놓여 있는 곳, 즉 광상(鑛床)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후에 정련(精練)된다면 금은보석이 될 것이 현재 불순물과 섞여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dhatu는 후에 무엇이 산출될 기반(akara)으로서 인과의 관계에서는 원인(hetu)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태와 현실태의 관계에 있어서는 가능태를 의미한다. 그러면 원인 또는 기반, 가능태 또는 잠재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서 잠시 여래장과 동의어로 간주되는 불성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의 사상을 담고 있는 《열반경》에 대한 한 조사에 따르면 불성에 상응하는 산스크리트는 buddha-dhatu로서 본성 또는 실체의 의미를 갖는 svabhava(自性)가 buddha와 결합된 용례는 한 번도 없다. 이것은 불성이 불타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성불의 근거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여 준다. 다시 말하여 buddha-dhatu의 개념에는 '변화', '발전'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buddha-dhatu는 불변하는 본질로서의 buddha-svabhava 또는 buddha의 추상명사로서의 buddhata, buddhatva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dhatu라는 한 낱말에서 '불변의 본성'과 '변화(발전)의 근거'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읽을 수 있다. 여래장사상이 본질론인가 혹은 발전론인가 하는 상이한 해석도 dhatu의 의미의 이중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여래장사상이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으로 규정되기보다는 종교적 실천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하여 왔다. 여래장은 추상적 관념의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미망에 물들어 있는 우리가 궁극에 있어 여래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인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자기구원의 당위성을 깨우쳐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부증불감경》의 일법계에서 간단히 일계(一界)란 무엇인가?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여 하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곧 《부증불감경》이 일원론을 지지함을 의미하는 것인가? 여래장사상을 법신의 일원론 또는 계의 일원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대개 《부증불감경》의 일계의 개념에 의존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경의 명칭에 제시되어 있는 바의 부증불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부증불감경》은 어리석은 범부가 지혜가 없어 여래께서 열반을 설할 때에 감소의 견해, 증가의 견해를 갖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감소의 견해란 열반을 세계의 부정[斷見] 또는 일종의 허무로 파악하거나[滅見] 열반은 없다고 하는 견해를 말하며[無跡槃見], 증가의 견해란 열반이 수행 등을 통하여 새롭게 정립되거나[始生跡槃見] 필연적인 이유없이 갑자기 나타난다는 견해[無因無緣忽然而有見]를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들은 결국 형식논리적 사유방법에서 비롯되는 실체론적 견해들임에 틀림없다. 미혹된 현실에 대한 자각이 현실을 부정하고 열반을 지향할 때, 우리의 소박한 형식논리는 열반을 이 세계와는 대립된 '어떤 것'으로 파악한다. 세계가 전적으로 부정되고 열반이 절대적인 것으로 정립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절대주의(Absolutism)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거주하는 이 세계밖에 다른 세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미혹된 현실의 부정이 세계의 부정으로 간주된다면, 열반을 얻는다는 것은 허무에 떨어지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허무주의(nihilism)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부증불감경》이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절대주의허무주의적 견해들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부증불감경》이 말하는 생사와 열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생사의 부정이 새로운 열반의 정립을 의미하지 않는다[不增]는 점에서 생사와 열반은 다른 것이 아니며, 생사의 부정과 함께 열반도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不減]는 점에서 생사와 열반은 같은 것도 아니다. 결국 생사와 열반은 불일(不一)불이(不異)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생사와 열반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부증불감의 논리를 전제할 때 《부증불감경》의 일계는 단순히 생사와 열반의 평면적 동일성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생사를 본질과 현상으로 해체하고 이 생사의 본질은 열반과 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일차원적 분석을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부증불감경》이 생사와 열반의 동일성을 말하는 경우에도 여기에는 생사의 부정과 열반의 부정이 있는 것이다. 절대부정을 매개로 하여 비로소 긍정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계는 단순한 긍정을 통해 정립되는 일치가 아니라 절대부정을 통해 확립되는 절대긍정의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점은 확실히 우리의 세간적 지식을 넘어선다. 《부증불감경》이 "깊고 깊은 의미는 궁극적 진리이며, 궁극적 진리는 곧 중생계이다. 중생계는 곧 여래장이며, 여래장은 곧 법신"이라고 하여 중생계와 여래장과 법신의 일치를 주장할 때에 '깊고 깊은 의미', '궁극적 진리'라는 말을 앞세우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기원후 5세기 초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보성론》은 《여래장경》, 《승만경》, 《부증불감경》에서 제시된 여래장사상을 계승하며 이를 체계적으로 조직한 대표적인 논서로 평가된다. 그런데 《보성론》은 그 첫머리에서 논의 핵심주제가 7가지임을 스스로 제시하고 있다. 불(佛, buddha), 법(法, dharma), 승(僧, sangha), 성(性, dhatu), 보리(菩提, bodhi), 공덕(功德, guna), 업(業, karman)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불법승은 삼보를 지칭하는 것인데 《보성론》은 법보승보가 불보의 일보(一寶, eka-ratna)로 귀일되는 것으로 분석한다. 법보승보는 불보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성론》은 일보 즉 불보가 어떻게 성립되는가의 문제로 나아간다. 이에 대한 분석이 7가지 핵심주제 중의 나머지 넷이다.
《보성론》은 이를 보성(寶性, ratnagotra)의 네 측면으로 간주한다. 그러면 《보성론》의 보성 또는 성보리공덕업의 통칭인 보성의 보다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먼저 보성의 gotra와 7주제 중의 dhatu가 모두 성으로 번역되는 점을 명확히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dhatu의 의미는 이미 앞에서 설명된 그대로이다.
이에 대해 gotra의 어원적 의미는 소[牛]의 거처라는 뜻이지만 그 의미가 확대되어 보물 또는 금속이 매장되어 있는 산, 가계 또는 그 가계에 전승되는 능력의 의미로 사용되며 한역경전에서는 대개 종성(種姓, 種性) 또는 간단히 성(性)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gotra가 특히 가계 또는 그 가계에 공통되는 성품이라는 인격적인 요소와 깊이 결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보와 관련하여 gotra가 사용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성론》에서 gotra는 dhatu와 동의어로 사용되며 모두 여래장을 지칭한다. 동시에 이들 어휘는 《보성론》 자체에서 인(因, hetu)으로 주석된다. '삼보 출현의 인(triratnotpatti-hetu)'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 `보성'이란 단적으로 삼보 출현의 원인을, 그리고 《보성론》이라는 논의 제목은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을 의미한다.
이러한 보성의 네 측면 가운데 '성'은 구체적으로 여래장을 의미하며, 이 부분이 《보성론》의 핵심이 된다. 그리고 '보리'는 여래장이 현현된 결과로서의 여래를, '공덕'은 십력(十力) 사무외(四無畏) 등의 여래의 속성을, '업'은 여래의 한량없는 자비의 활동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리가 여래장이 현현된 `결과'라고 하였지만, 엄밀하게 말하여 《보성론》은 성을 인(因)으로, 보리공덕업을 연(緣)으로 규정한다. 이것은 보리공덕업이 넓은 의미에서 원인의 입장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보리공덕업이 결과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인위(因位)의 여래장에 갖추어진 능력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7주제 가운데 뒤의 4주제는 모두 여래장에 대한 분석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보성론》은 한편으로 보성의 네 측면을 유구진여(有垢眞如, samala tathata), 무구진여(無垢眞如, nirmala tathata), 이구(離垢)의 불공덕(vimala buddhagunah), 승리자(佛)의 활동(jinakriya)으로 명명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특히 유구진여는 성 또는 여래장을 지칭하는 것으로 구와 진여, 즉 번뇌와 여래장의 대립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유구진여와 무구진여의 관계에 대하여 "(이 둘은) 인과관계에 있지만, 인과는 동질로서 유구, 무구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진여로서 무차별불이"라고 하는 해석은 단순하게 질적인 동일성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이제껏 지적하여 온 본질주의적 해석의 한 예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지극히 평면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구와 진여의 대립 그리고 유구와 무구의 대립이 없으며, 그럼으로써 치열한 수행에 수반되는 극적 긴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유구진여 안에서도 구와 진여의 대립을, 그리고 유구진여와 무구진여의 관계에서도 진여의 동일성 보다는 유구와 무구의 대립을 발견하고 이를 극복코자 하는 치열한 노력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Ⅲ. 여래장사상의 원환적 구조

《보성론》은 치밀한 이론적 분석과 다양한 비유를 통해 여래장의 의미를 세밀하게 검토하고 있으며, 그 영역도 광범위하여 논의내용 전체를 간단히 요약하기는 어렵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기왕의 여러 연구서에 맡기고, 여기에서는 《여래장경》의 '일체중생은 여래장이다(sarvasattvas tathagatagarghah)'라는 선언을 《보성론》이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여래장사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얻기로 한다. 그런데 《보성론》이 이 문장을 인용하고 그 의미를 분석하는 것은 여래장에 대한 다양한 설명에 앞서서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편으로 `일체중생은 여래장'이라는 명제가 여래장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선언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명제에 대한 해석이 차후의 세부적인 분석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보성론》의 이 명제에 대한 해석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보성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구진여에 대해 (경에) '일체중생은 여래장'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중생의 무리에 불지(佛智)가 침투하기 때문에, 그 (중생의 무리가) 무구인 점이 본래 (불과) 불이(不二)이기 때문에, 불의 종성에 그 과(果)를 설정[假設]하기 때문에, 모든 유신자(有身者, 중생)는 불(佛)의 태(胎, 여래장)라고 설해졌다.
정각자(正覺者)의 신(身)이 편만하기 때문에, 진여가 무차별이기 때문에, 종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유신자는 항상 불의 태라고 설해졌다.
요약하면 세 가지 의미에 의해 세존은 `일체중생은 항상 여래장'이라고 설하였다. 즉 일체중생에 (1)여래의 법신이 편만한다는 의미에 의해, (2)여래의 진여가 무차별이라는 의미에 의해, (3)여래의 종성이 존재한다는 의미에 의해서이다.
여기에서 《보성론》은 일체중생이 여래장이라는 점을 세 가지 측면으로 분석하고 있다. 산문부분의 용어로 말하면 법신의 편만, 진여의 무차별, 종성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보성론》 자신은 이것을 '여래장의 세 의미[三義]'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산문부분을 자세히 보면 법신, 진여, 종성이 항상 '여래'와 결부되어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여래장에 관한 논의가 중생의 관점이 아니라 여래의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간단히 말하여 《보성론》은 '중생', '여래장'에서 '여래'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래장에 관한 논의가 세속적 인간의 자기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여 준다. 오히려 깊은 종교체험을 통해 확인된 여래의 성격에 대한 통찰이 여래장의 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보성론》은 이러한 논의에서 여래를 자비의 존재로 파악한다.
자비의 강조는 법신의 개념에도 명백히 나타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법신색신의 개념을 통하여 색신을 무상한 육신의 몸, 법신을 영원한 이법의 몸으로 생각하는 데에 익숙해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법신이 초역사적 진리로 간주되고 있음을 말하여 준다. 그러나 《보성론》은 특히 해탈신과 법신에 관한 논의에서 전자를 무루(無漏), 후자를 편지(遍至) 또는 전자를 자리(自利), 후자를 이타(利他)의 존재로 규정한다. 여기에서 편지는 중생에게 두루 미침을 의미한다. 결국 법신의 편지는 법신의 이타적 성격, 자비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법신의 편만(遍滿)'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법신의 편만은 일차적으로 여래법신이 두루 가득 차, 있지 않은 곳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어떠한 중생도 여래법신을 벗어나 있지 않음을, 그래서 모든 중생이 본성적으로 여래법신임을 가리킨다. 결국 법신 편만은 일체중생이 여래장임을 확인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편만 또는 편지가 여래의 자비를 강조하는 개념이라는 앞서의 논의를 염두에 둘 때 법신의 편만은 침투되지 않는 곳이 없는 여래의 크나큰 자비의 활동을 지칭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체중생이 여래장'이라는 명제 속에서 여래의 활동을 발견하는 《보성론》의 깊은 종교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법신편만과 관련하여 여래장이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는 점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일체중생은 여래의 태아이다(tathagatasyeme garbhah sarva-sattvah)' 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여래장(tathagatagarbha)이라는 복합어는 '여래의 태아(tathagatasya garbhah)'로 분석되고 있다. 다시 말해 중생은 여래라는 모태에 감싸여 있는 태아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태아 또는 모태라는 생물학적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사상의 원초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여래의 크나큰 품안에 감싸여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나타나는 종교적 환희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법신편만의 인식은 이제 자신을 여래의 가족의 일원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가능적 여래로서 새롭게 태어남을 인식하는 것이다.
《보성론》은 또한 '일체중생은 여래장'이라는 명제를 '진여의 무차별'로 분석하고 있다. 우리는 앞장에서 '보성의 네 측면'을 언급할 때 유구진여무구진여의 문제가 단순히 진여로서의 평면적 동일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한 바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진여의 무차별을 언급하는 참다운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진여무차별을 언급하는 목적이 '일체중생이 여래장'이라는 명제를 해석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체중생이 여래장'이라는 명제는 나의 미혹된 현실과는 대립된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여의 무차별'은 단순히 유구진여무구진여의 무차별이 아니라, 부정될 수 없는 우리의 미혹된 현실 속에서 여래와 차별없는 진여가 발견됨을 지적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 여래와 차별없는 진여는 어떻게 발견되는가? 이것은 '법신편만'이라는 종교적 사실을 전제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법신편만'이라는 종교적 사실이 나에 의해 진리로 받아들여짐으로써 나는 나의 본성이 진여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여무차별'은 종교적 인간의 자기이해로 확립된다. 《보성론》이 여래장을 '여래, 즉 진여가 이 모든 중생들의 태아이다(tathagatas tathataisam garbhah sarvasattvanam).'라고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여래는 진여로 정의되며, 동시에 중생이라는 모태 속의 태아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것은 '법신편만'에서 여래가 모태로, 중생이 태아로 간주되었던 것과는 반대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은 모태태아 관계의 역전은 각각의 중심체가 바뀌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법신편만'에서 중심적인 존재가 여래였다면, '진여무차별'의 중심체는 중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심체의 전환은 '법신편만'이라는 종교적 진실이 이제 나의 주체적 확신으로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진여무차별'은 `법신편만'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 주체적 앎으로 전환되어 제시되는 분석명제인 것이다.
그러면 '일체중생은 여래장'이라는 기본명제의 세 번째 분석명제 '종성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우선 `존재'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서 우리는 '여래장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때 존재는 astitva의 번역어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우리가 존재로 번역한 말은 sambhava이다.
구체적으로 앞서 인용한 I.27의 주석산문 중의 '여래의 종성에 존재한다는 의미에 의해'는 산스크리트본에서 tathagata-gotra-sambhavarthena로 되어 있다. 그런데 sambhava는 '있다'를 의미하는 동사(bhu)의 명사형에 `함께'를 의미하는 접두어(sam)가 결합된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어원적으로 여러 요소들의 결합, 결합에 의한 형성 또는 그렇게 형성된 존재를 의미한다.
이러한 어원적 의미를 염두에 둘 때 tathagata-gotra-sambhava는 여래의 종성이 무엇을 형성시킨다는 의미에서 `여래종성의 현성(顯成)'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앞서 인용한 게송 I.27의 "불(佛)의 종성에 그 과(果)를 설정[假設]한다."는 문장의 의미를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과 즉 결과는 주석에 따르면 자성신수용신변화신의 삼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종성을 원인으로 파악하고 그 종성 속에서 종성의 결과인 여래의 출현을 예견함을 명시하고 있다. 《보성론》이 여래장을 '여래의 종성'과 관련하여 '여래성(如來性)이 이들 일체중생의 태아이다.(tathagatadhatur esam garbhah sarva-sattvanam).'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점을 뚜렷이 하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진여무차별'에서와 같이 중생이 모태로 제시되고 있다. 다만 '진여무차별'에서는 여래가 태아로 간주되고 있는 데에 대해, 이곳에서는 여래성(tathagatadhatu) 또는 여래종성(tathagatagotra)이 태아로 간주되고 있다. 우리는 앞서 dhatu는 가능태를 가리키며, 이 개념에는 변화발전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의미를 고려할 때 `종성의 존재'는 결국 주체적 존재로서의 중생의 성불에의 노력, 즉 한없는 종교적 실천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제까지 우리는 《보성론》의 여래장의 분석 즉 법신의 편만, 진여의 무차별, 종성의 존재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각각 종교적 진실에 대한 믿음, 이에 대한 주체적 확신 그리고 그러한 확신의 적극적 실천의 문제로 파악하였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여래의 자비, 여래의 지혜 그리고 여래의 활동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소위 `여래장의 세 의미'는 참다운 종교적 인간의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며 동시에 절대적 존재인 여래의 참모습을 밝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여래의 종성'에서 종성이 원인의 지위에 있는 것이지만 그 가운데에 결과가 예상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 결과란 제불여래에 다름 아니다. 한편 여래는 법신으로서 중생 가운데 편재한다. 결국 여래는 중생이 여래장인 소이연이며, 그럼으로써 중생을 진정 중생이게끔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여래법신은 여래장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종성이 현성한 결과이며, 중생의 종성 또한 법신으로 현성할 원인이면서 여래법신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법신과 종성이 상호 인과관계에 있음을 말하여 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법신과 종성의 상호 인과관계는 여래장사상이 원환적 구조로 조직되어 있음과 무관하지 않다. 여래장사상이 (1)법신편만의 개념을 통하여 `여래에서 중생으로'라는 자비의 하향도를, (2)진여무차별로써 '중생은 곧 여래'라는 무분별의 반야를, 그리고 (3)종성의 존재 개념을 통하여 `중생에서 여래로'라는 구원의 상향도를 제시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 장의 첫머리에서 법신, 진여, 종성이 일관되게 여래와 연관되어 논의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여래장이 여래의 입장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제 우리는 법신, 진여, 종성이라는 여래장의 세 의미를 중생의 입장에서 다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법신, 진여, 종성이 각각 중생의 믿음과 앎과 실천과 정확히 대응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여래의 법신, 진여, 종성은 중생의 믿음, 앎, 실천과 결합됨으로써만 참다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중생으로부터의 (1)'일체중생은 여래장'이라는 여래의 설법에 대한 믿음과 (2)이 믿음을 통하여 '일체중생은 여래장'이라는 보편명제가 `나는 여래장'이라는 특칭명제로 전환된 앎우리는 이것을 주체적 참여의 앎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3)이러한 자각 속에서 '객진번뇌염'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쉼없는 실천이 유기적으로 결합됨으로써 여래장은 그 본연의 의미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Ⅳ. 맺음말

우리는 이 글의 첫머리에서 여래장사상의 역사적 의미를 되돌아보고 현대의 몇몇 연구 결과를 검토하였다. 그 과정에 우리는 여래장사상이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으로 해석됨으로써 여래장사상 본래의 의미가 왜곡되고 불교의 종교성이 퇴색되는 결과를 목도하였다. 우리는 여래장계 경론에 그렇게 오해될 여지가 있는 개념들이 등장한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개념도 그 전체의 의미구조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여래장계 경론의 핵심개념들을 역사적 맥락에서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보성론》에서 말하는 '여래장의 세 의미'의 연관관계를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 종교적 실천의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었다.
이제 여래장사상의 '자성청정심 객진번뇌염'의 명제는 우리에게 자기완성의 끝없는 노력을 요구하는 메시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여래장사상은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참여를 촉구하는 엄숙한 종교적 진리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대방광여래장경>은 <부증불감경> <승만경>과 함께 ‘여래장삼부경’이라고 일컬어지며 이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경이다. 1권으로 되어 있으며, 8세기 중엽 인도출신의 학승 불공이 번역했다. 작은 경전인 만큼 매우 간결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내용도 소박하다. 중심 내용은 누구나 여래의 품성과 여래종자를 모두 간직하고 있으나 그것을 계발하지 못하고 번뇌망상과 무지에 싸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번뇌 속에 윤회해도 번뇌가 없어지는 순간 중생에게도 여래의 지혜와 법신이 나타난다고 설하고 있다. 특히 여래장에 대한 9가지 비유는 구경일승보성론과 불성론에 계승되어 조직적으로 체계화 되었다.

<대방광여래장경>에서는 우리의 현실을 ①시든 꽃 가운데 있는 부처님 ②많은 벌꿀 속의 달콤한 꿀 ③겨껍데기 속의 알맹이 ④더러운 속에 있는 진금(眞金) ⑤땅 속에 있는 금은보화 ⑥종자 속에 있는 싹 ⑦더럽고 낡은 옷에 싸인 진금상 ⑧천한 여인이 화인하고 있는 전륜왕 ⑨장막 속에 있는 금상 등의 9가지로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든 꽃과 많은 벌, 겨껍데기, 더러운 속, 땅 속, 종자 속, 더럽고 낡은 옷, 천한 여인, 장막 등은 중생이 번뇌에 덮여진 상황을 의미하고 있으며, 부처님, 달콤한 꿀, 알맹이, 진금, 금음보화, 싹, 진금상, 전륜왕, 금상은 여래의 성품을 간직한 여래장을 의미한다. 즉 모든 중생은 다 여래의 지혜 안에서 거두어지고 여래의 법신은 인위(因位)와 과위(果位)를 통해 변하지 않지만, 중생의 경우에는 여래의 법신을 간직하고 있어도 번뇌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여래의 과덕(果德)은 다 범부의 마음 속에도 포장되어 있으므로 능히 자신의 마음을 닦으면 스스로 자신에게 여래장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모든 중생은 번뇌에 싸여 있을 뿐 그 자체는 성불인 것이며 원래부터 성불인 상태다. 또 이 경을 읽고 외우며 베껴써서 다른 사람에게 널리 알리면 헤아릴 수 없는 복을 얻게 되며, 그 보람은 무수한 탑과 누각을 세워 부처와 보살들을 공양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설하고 있다.


3. 대승의 일심법

≪기신론≫ 대승의 뜻을 세움

대승이란 총괄하여 설명하자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두 가지 인가? 첫째는 법(法)이요, 둘째는 뜻(義)입니다. 법이란 중생의 마음(衆生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곧 일체의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섭하니, 이 마음에 의하여 대승의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이 마음의 진여상(眞如相)이 대승의 체(體)를 보이기 때문이고, 이 마음의 생멸인연상(生滅因緣相)이 대승 자체의 상(相)용(用)을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뜻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세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체대(體大)이니, 일체의 법은 진여로써 평등하여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상대(相大)이니, 여래장(如來藏)에 한량없는 성공덕(性功德)이 구족함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용대(用大)이니,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의 착한 인과(因果)를 잘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본래 힘입는 것이기 때문이며, 일체의 보살이 모두 이 법에 힘입어서 여래의 경지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원효≫ 일심이문(一心二門)

처음 중에 ‘법이란 중생의 마음을 말한다’고 한 것은 자체를 법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이제 대승 가운데 일체의 모든 법이 다 별다른 체가 없고 오직 일심을 써서 그 자체를 삼기 때문에‘법이란 중생의 마음을 말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마음이 곧 일체의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섭한다’고 한 것은 대승법이 소승법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진실로 이 마음이 모든 법을 통섭하여, 모든 법 자체가 오직 이 일심이니, 소승의 일체 모든 법이 각기 자체가 있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심을 대승의 법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이하는 문(門)에 의하여 각각 세운 것입니다. 아래에 뜻을 해석하기를 심법(心法)은 하나이지만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진여문(眞如門) 중에 대승의 체(體)가 있고, 생멸문(生滅門) 중에 체의 상(相)용(用)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승의 뜻이 이 세 가지에서 지나침이 없기 때문에 일심에 의하여 대승의 뜻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승의 자체를 잘 보인다’고 한 것은 바로 생멸심 안의 본각심(本覺心)이니, 생멸의 체(體)와 생멸의 인(因)입니다. 그러므로 생멸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여문 중에는 바로‘대승의 체(體)’라고 말하고, 생멸문 중에서는‘자체(自體)’라고 한 것은 깊은 이유가 있으니, 아래 해석 중에 이르면 그 뜻이 스스로 드러날 것입니다.

‘상(相)용(用)’이라고 말한 것은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여래장 중에 한량없는 성공덕상(性功德相)을 잘 나타낸 것으로 이것이 바로 상대(相大)의 뜻입니다. 또 불가사의한 업용(業用)을 나타낸 것으로 바로 용대(用大)의 뜻입니다. 둘째는 진여가 일으킨 염상(染相)을 상(相)이라 하고, 진여가 일으킨 정용(淨用)을 용(用)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래 글에서 ‘진여(眞如)의 정법(淨法)은 실로 염(染)이 없지만, 다만 무명(無明)으로 훈습(薰習)되기 때문에 곧 염상(染相)이 있는 것이며, 무명(無明)의 염법(染法)은 본래 정법(淨法)이 없지만, 다만 진여(眞如)로 훈습(薰習)되기 때문에 곧 정용(淨用))이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