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철학

깨달음

수선님 2020. 2. 9. 14:29

 

불교 사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이 세계의 모든 사물물이 갖고 있는 상호 의존적인 연기의

이법을 깨닫는 것이다. 곧,

우주의 삼라만상을 일즉다의 현현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모든 현상이 우주 전체에서 상호 의존적이며

불가분의 부분들로 나타난다는 것, 다시 말해 동일한 궁극적인

실재가 여러가지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본디 동양의 전통들은

우주 전체를 다양한 만물에서 나타내며,

만물은 전체의 부분들로서 전체와 부분과의 상호 작용을

일으키는 궁극적이고도 불가분의 실재에 관해

여러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을 힌두교에서는 부라만, 불교에서는 법신(法身),,

도교에서는 도(道)라고 부른다.

이것은 모든 개념과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것을 일러 진여(眞如 )라고도 부른다.

불성(佛性)에 의해 진여로 의미지어지는 것은

만물의 전체적인 전일성 (全一性) 곧 모든 것을 포용하는,

심층적인 통괄자를 나타낸다.

부처님께서 6년 동안의 수행 끝에 우르베에라 마을 네에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밑에서 최초로 힘리롤 깨우치셨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에 부처님께서 무엇을 깨달으셨느냐고 물어온다면 그에 대한 대답이 그리 쉽지 않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우다나경(經)’과 율장(律藏)을 통하여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하신뒤에 칠일 동안 정좌(正坐)하신 채로 해탈의 열락(悅樂)을 즐기시다가 그 명상에서 일어나시어 처음으로 연기(緣起)의 이법 순역(理法順逆)의 순서에 따라 설하시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생기(生起) 하므로 이것이 생기한다”

“곧, 무명(無明)에 의하여 생활 작용이 있고, 생활 작용에 의하여 식별 작용이 있고, 식별 작용에 의하여 명칭과 형태가 있고, 명칭과 형태에 의하여 여섯 가지의 감수기능이 있고, 여섯가지의 감수기능에 의하여 대상과의 첩촉이 있고, 대상과의 접촉에 의하여 감수작용 있고, 감수작용에 의하여 망집이 있고, 망집에 의하여 집착이 있고, 집착에 의하여 생존이 있고, 생존에 의하여출생이 있고, 출생에 의하여 늙음과 죽음, 우울함, 슬픔, 괴로움, 고독, 번뇌가 일어난다. 이렇게 하여 이 괴로움의 모든 응어리가 생긴다.”

그러나 이 순관(順觀)에 대하여 그 역관(逆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시고 있다.

“그러나 탐욕을 없앰으로써 무명(無明)을 남김없이 지멸(止滅)하면 생활작용이 지멸한다. 생활작용이 지멸하면 식별작용이 지멸한다…출생이 지멸하면 늙음과 죽음, 우울함, 슬픔, 괴로움, 고독, 번뇌가 지멸한다. 이렇게 하여 이 괴로움의 모든 용어리가 지멸한다.”

여기서 우리는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12연기 (緣起)라고 불리는 위의 연기의 이법이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깨달으신 진리임을 알 수있다.

불교 사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세계의 모든 사물들이 갖고 있는 상호 의존적인 연기의 이법을 깨닫는 것이다. 곧, 우주의 삼라만상을 일즉다(一卽多)의 현현으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모든 현상이 우주 전체에서 상호의존적이며 불가분의 부분들로 나타난 는 것. 다시 말해 동일한 궁극적인 실재가 여러가지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본디 동양의 전통들은 우주 전체를 다양한 만물에서 나타내며 만물은 전체의 부분들로서 전체와부분과의 상호 작용을 일으키는 궁극적이고도 불가분의 실재에 관해 여러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을 힌두교에서는 부라만, 불교에서는법신(法身), 도교에서는 도(道)라고 부른다. 이것은 모든 개념과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것을 일러 진여(眞如)라고도 부른다. 불성(佛性)에 의해 진여로 의미지어 지는 것은 만물의 전체적인 전일성 (全카生) 곧 모든 것을 포용하는, 심층적인 통괄자를 나타낸다.

일상의 생활에서는 우리는 이 만물의 통일성을 깨닫지 못하고 세계를 개별의 대상들과 사건들로 나눈다. 물론 이 분할이 우리의 일상적 환경을 다루는 데에는 유용하고 필요하나, 그것을 실재의 참 모습을 나타내 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분별하고 개념화하는 지성이 궁리해 낸 하나의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개별적 사물들과 사건들이 라는 우리의 추상적 개념을 자연의 실상이라고 믿는 것은 망상이다.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이 망상을 ‘마야(幻)’ 의 주술에 걸려 있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무명(無明)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깨달음이란 수행과 참선 또는 명상을 통하여 마음을 집중시키고 가라앉혀서 실상을 여실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명상에 대한 범어인 삼마디(Samadhi;三味)는 그글자가 지닌 뜻대로 ‘정신적인 평형’을 의미한다. 그것은 조화롭고 평온한 마음가짐을 가리키는데, 그 가운데서 우주의 기본적인 통일성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청정한 삼매에 들게 되면 우주의 절대적인 전일성율 의식할 수 있고, 모든 것을 꽤 뚫어 보는 통찰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은 신비적 체험의 중심적 특성이다.

불교에서는, 독립적으로 또는 외따로 존재하는 객관적 바깥 세계가 있고 그 역동적인 힘 속에 자신을 삽입시킨다고는 믿지 않는다. 불교에서 볼 때에 외적인 세계와 내적인 세계는 동일한 직물(織物)의 양면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모든 힘과 사건들이 그리고 의식의 형태와 그 대상물의 실낱들이 서로 연관지어져 하나의 분리될 수 없는 끝없는 망(網)으로 짜여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불교의 근본 이상은 지적인 분별과 감정적인 오탁으로 만들어진 이 대립적인 세계를 넘어서서 정신적인 무분별의 세계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성취하는 것이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지관(止觀;acintya) 곧 ‘무념(無念)’의 세계에 이르게 되는 절대적인 여실지견으로 전환하는 데에 있다. 모든 대립적인 것들의 통일이 거기에서 하나의 생생한 체험으로 성취된다. 모든 대립적인 것이 양극적인 것이라는 개념 곧 광명과 암흑, 득(得)과 실(失), 선(善)과 악(薦)들이 동일한 현상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불교인의 생활방식에서 기본적인 원리 중의 하나가 된다.

우리는 힌두교나 불교에서 사용하는 인도철학의 중요한 술어들의 동적인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브라만(Brah-many)’은 산스크리트어인 ‘브리흐(Brih)’ -성장하다- 에 그 어원을 두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것은 동적이며 생생하게 살아있는 실재를 암시한다. 인도 철학의 거장 라다크리슈난(S.RadhaKrishnan)의 말을 빌리면, ‘브라만’이라는 말은 성장을 의미하며 생명, 운동, 진행을 암시하고 있다고 한다.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은 이와 같이 고정된 형(形)이 없고 영생하며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형태들을 초월하면서도 운동과 연관되어 있다.

한편, 리그베다(Rig Veda)에서는 우주의 역동적인 본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리타(Rita)라는 다른 술어를 사용한다. 이 술어는 ‘움직인다’는 뜻을 지닌 ‘ri’에 그 어원을 두고 있는데, 리그베다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그 본디의 의미는 ‘모든 사물의 과정 또는 자연의 질서’이다.

리타의 베다적인 개념은 뒤에 모든 사물과 사건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을 표현하도록 발전되었던 업 (業Karma)의 사상을 앞선 것이다. ‘카르마’라는 말은 ‘활동’을 뜻하며 모든 현상의 활동적인 상호작용 곧 역동적인 상호관계를 표시한다. 바가바드 기타에는 “시간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은 자연의 힘들이 서로 얽혀 나타 난다”고 기술되어 있다. 부처님께서는 카르마의 전통적인 개념을 가지고 그 역동적인 상호 연결의 개념을 인간의 상황에까지 확대시킴으로써,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카르마는 세간에서의 끝없는 인과(因果)의 사슬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부처님은 개오(關펌)의 경지에서 멸진시켰던 것이다.

본디 힌두교에서 보여 지는 일반적인 세계상은 유기적인 것으로서, 성장하고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우주이니 곧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정적인 형태들은 ‘미야’ 즉 환상의 개념에 과한 것으로 본다. 여기에서 한걸옴 더 나아가서, 모든 형상의 무상성(無常性)이라는 세계상이 불교의 시발점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복합된 것(諸行)들은 무상하다”고 말씀하시고 이 세계의 모든 고(苦)는 이 세계를 움직이고 변화하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고정된 형상으로, 사물로, 인간으로 받아들여 그것에 집착하려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설파하셨다. 따라서 역동적인 세계관이 바로 불교의 근본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다크리슈난(S.RadhaKrishnan)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역동셜(dynamism)의 놀랄만한 철학은 2천5백년 전에 붓다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사물의 무장성과 끊임없는 변화와 전환에 감명 받고 변화의 철학을 세운 것이다. 그는 실체, 영혼, 단자(單子), 물체 들을 힘, 운동, 연속, 과정들로 변형시켜 실재의 역동적인 개념을 채택하였다.”

불교에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뜻히는 삼사라{Samsara;)라고 부른다. 또 우리는 이 세계에는 집착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깨달은 사람(覺者 :붓 )이란 생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그와 함께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말

하기도 한다. 결국, 불교의 깨달음이란 연기법(緣起法)과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中道)를 깨닫는 것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