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불교와 동북아 불교(佛敎=Buddhism)와 불교사상은 인도 사상사와 동북아 사상사의 한 축이자 인도 문명과 역사 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갈래다. 불교는 인도문명에서 탄생해 성장했고, 후에는 동아시아문명에서 다 시 한 번 번창했다. 이 장에서 우리는 다음의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불교는 어떤 맥락에서 탄생했고 핵심 교리는 무엇인가? 인도 불교는 어떻게 발전되어 갔는가? 그리고 동북아 불교는 어떤 성격이며, 오늘날 불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1. 인도문명과 불교의 탄생 ‘인도’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오래된 국가나 민족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러나 고대 인도는 수많은 문화들이 공존하는 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인도는 다양한 지역들/국가들을 포함하는 ‘아대륙’ 이다. 그럼에도 ‘인도’를 하나의 이름으로 묶을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한 지역들/국가들 또는 문화들을 관 류하는 공통의 기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공통의 기반이란 바로 ‘힌두교’이다. 그러나 불교는 힌 두교 일반과 다른 성격을 띠었다. 그 때문에 인도라는 태어난 장을 떠나 동아시아와 같은 다른 문화 적 장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불교는 ‘인도문명’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불교 는 힌두교와 대립한 만큼 영향을 크게 받았다. 때문에 우리는 우선 ‘인도적 사유와 실천’ 일반이 무 엇인지 생각해봐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붓다1)의 사유와 실천의 고유함이 무엇인지를 함께 고려해 보아야 한다. 1) 인도문명의 성격과 그 철학적 바탕 고대세계에 그리스, 인도, 동북아 세 문명은 철학적 수준까지 사상이 생성되었지만, 각기 다른 방 식으로 사유를 전개해 나갔다. 그리스 문명이 우주에 대한 경이에서 출발해 자연철학을 발전시켰고, 동북아 문명은 춘추전국시대라는 난세를 극복할 정치 철학적 고민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2) 반 1) ‘붓다(Buddha)’는 ‘깨달은 이’를 뜻한다. 불교의 개조(開祖)인 고타마 싯다르타를 가리키는 여러 호칭 들 중 하나이다. 한자로는 불타(佛陀)이다. 잘 알려져 있는 다른 호칭들로는 부처님, 석가세존(釋迦世 尊, 또는 간단히 세존), 석가모니(釋迦牟尼), 석가여래(釋迦如來, 또는 간단히 여래) 등이 있다. 여기에 서는 붓다로 칭한다. ‘佛陀’는 ‘Buddha‘를 음역한 것이지만(번역할 경우에는 ’覺者‘ 정도가 될 것 같 다), 재미있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佛’에서 ‘弗’은 ‘아니다’, ‘버리다’ 등을 뜻하며, 그래서 ‘佛’은 인 간이 아닌, 인간을 초월한 분 또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분, 모든 실체성을 버린 분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또, ‘陀’는 언덕이 ‘비탈지다’, ‘험하다’ 등을 뜻하며 붓다의 고행을 암시하고 있다. 인도 불교의 적지 않은 용어들이 음역되었으나, 음역 자체에도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스며들게 한 경우들이 많아 잘 음미할 필요가 있다. 2) 물론 사태를 너무 단순화하는 것은 곤란할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본격적인 철학(philosophia) ― ‘필 로소피아’란 ‘소피아’=지혜를 사랑함을 뜻한다 ― 을 발전시키기 이전에 이미 정치적 맥락에서의 소피 이정우 ∥ 세계철학사 대장정 Ⅳ : 아시아 세계의 철학 - 인도·한국편 - 2 - 면 인도적 사유는 ‘삶과 죽음의 고통’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업’과 ‘윤회’의 세계관이 있다. 세상 만물은 업과 윤회를 겪을 수밖에 없고, 때문에 ‘삶과 죽음의 ‘고(苦)’를 순환적으로/반복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다. 바로 ‘고’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인 ‘해탈’에의 의지가 인 도의 종교와 철학의 특징이자 철학적 바탕인 것이다. 애초에는 순수 종교적 방식으로 이러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고대 인도인들은 그리스-로마인들처럼 다양한 신들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고, 자연과 신들의 위대함에 대해 찬탄했다. BC 15~3세기 에 걸쳐 기록된 『베다』는 이러한 찬탄의 기록물이다.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르면서 세계에 대한 이 들의 인식도 변하고 그것을 기록한 『베다』의 내용도 달라져 간다. 인도인들은 세계를 지배하는 근 원적 이치와 모든 신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신3)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모든 것이 귀일(歸一)하는 ‘하나’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다시 세월이 흐르면서 인도인들은 인간의 중요성을 파악하게 된다. 인 간이 어떤 행위를 통해서 세계에, 심지어 신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문명의 역사가 인간이 자신의 ‘주체성’을 찾는 과정이듯, 인도인 역시 자신의 주체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인간의 행위란 바로 제식(祭式)이었다. 그래서 종교적 행위의 중심에는 장엄한 제식이 중 심이 된다. 『베다』 역시 제식에 관한 내용이 담기게 되고, 이 제식을 주관하는 계급이 바로 브라만 계급이다. 4) 이렇게 힌두교의 원형인 ‘브라만교’가 형성된다. 브라만교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다. 우주의 근본 이치인 ‘범=브라만’과 각 개인의 이치 ‘아 =아트만’이 하나라는 이야기이다. “브라만은 우주의 아트만이고, 아트만은 우리 내면의 브라만이다.” 브라만교는 이 사상을 통해서 우주로부터 소외(疎外)되어 겪는 삶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했 다. 그러나 브라만교의 교리와 형이상학은 새롭게 등장한 사상들에 의해 도전받게 된다. 특히 제식 제일주의는 보다 자유로운 사상들에 의해 비판 받았다 브라만 계층의 특권은 사회를 억압하는 힘이 되었으며, 이에 저항하는 목소리는 점차 커졌다. 그러나 불교처럼 새롭게 등장한 각종 사조들도 『베다』를 통해 이어져 온 인도 철학의 기저에서 완전히 단절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서도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되어 온 인도적 사유의 전통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업’, ‘윤회’, ‘고’, ‘해탈’과 같은 인도 철학의 주요 개념들이 모두 『우파니 샤드』에서 비롯한다. 아를 터득했다. 그리고 이 지혜를 우주 전체로 확장했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귀족과 평민 사이의 정치적 투쟁 과정에서 ‘정의(正義)’라는 소중한 가치를 얻었고, 우주 또한 정의에 의해 지배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고무되어 자연철학을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동북아 인들은 정치철학을 위주로 하는 사유를 발전시켰지만, 동시에 자연/우주의 이치를 파악하고 그것을 개념화하려는 이론적 사유 또한 발전시켰다.(『주역』이나 기(氣)의 탐구는 이런 경향을 대변한다) 그리고 이 이론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면서 정치적 사유를 세련화해 갔다고 할 수 있다. 3) ‘지배하는’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할 수도 있다. 인도의 유일신은 세계를 창조한 신으로 이해되는 경우 도 있지만, 더 고유하게는 모든 존재들이 바로 그것의 화신(化身)=‘아바타’인 그런 유일신이다. A가 B 를 ‘만드는’ 경우가 있고(예컨대 사람이 자동차를 제작하는 경우), A가 B를 ‘낳는’ 경우가 있으며(예컨 대 남녀가 자식을 낳는 경우), A가 B로 ‘화’하는 경우가 있다(예컨대 물이 얼음으로 화하는 경우). 첫 번째 경우는 외적인 관계이다. 두 번째 경우는 물리적으로는 외적이지만, 의미상으로는 내적인 관계 이다. 세 번째 경우는 내적인 관계이다. 고대 인도의 사유에서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곧 유일신과 내 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의 아바타들이다. 4) 잘 알려져 있듯이, 인도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라는 네 계층으로 이루어진 ‘카스트 제 도’를 통해 영위되었다. 브라만은 ‘브라흐만’으로 표기되기도 하며, 브라만 계층을 뜻하기도 하고 이 들이 제시하는 제1 원리(first principle)를 뜻하기도 한다. 한자로는 ‘바라문(婆羅門)’이라고 한다. 이정우 ∥ 세계철학사 대장정 Ⅳ : 아시아 세계의 철학 - 인도·한국편 - 3 - 여기서 ‘업(業)’이란 산스크리트어 ‘karma’를 번역한 말이다. ‘카르마’는 ‘행한 것’을 뜻한다. 한 인 간이 행한 것은 사라지지 않고 그 인간에게 업보로 남아 힘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좋은 행위를 할 때나 나쁜 행위를 할 때나 우리는 “업을 쌓고 있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인도적 사유에서 업의 개 념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형태보다 훨씬 강하다. 우리는 자신의 행위가 업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잘 알지만, 이런 인과관계는 때로는 성립하지 않고, 심지어 필연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 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도 사유에서 업이란 우주적 섭리로서 반드시 성립하는 법칙이다. 현대 인 도 철학의 거장인 라다크리슈난은 ‘업’을 “윤리세계에 적용되는 질량불변의 법칙과 같은 것”, “도덕 적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업’은 ‘윤회’ 개념과 연동되어 있다. 윤회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업이라는 개념도 의미를 상실한다. 만일 업이 과거(전세)에서 현재(현세), 그리고 미래(내세)로 계속 이어지지 않는다면, 전세의 업이 현 재에 작용할 수 없고, 때문에 현세의 업이 미래인 내세의 업에도 작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업과 윤회 개념은 서로 끝없이 반복된다. 때문에 업과 윤회는 ‘고(苦)’를 불러온다. 이처럼 불교를 포 함한 인도의 모든 종교/철학은 바로 이 ‘고’를 벗어나 ‘해탈’을 목적으로 한다. 2) 경험 분석을 통해 정립되는 붓다(고타마 싯다르타)의 불교 철학 붓다의 불교의 출발점 또한 삶과 죽음이 고뇌 속에 있으며, 따라서 해탈을 목표로 삼는다. 붓다 사유의 중핵은 고뇌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에 철학적 해명에 있다. 붓다의 철학은 삶/경험의 분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분석5)의 결과로 등장하는 것이 ‘오온(五蘊)’ 이라는 개념이다. 오온이란 우리의 삶/경험을 구성하는 다섯 범주인데, 색(色) · 수(受) · 상(想) · 행 (行) · 식(識)을 말한다. 먼저 ‘색’은 물질성이다. 여기서 물질성이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 한정된 물질성이다.6) ‘수’는 감응과 같은 느낌이고, ‘상’은 눈 · 귀 · 코 · 혀 · 피부 · 마음으로 보이는 색 · 들리는 소리 · 냄새 · 맛 · 촉감 · 사유대상을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와 ‘상’의 차이는 ‘수’가 정서적 차원이라고 한 다면, ‘상’은 인지적 차원이란 점이다. ‘행’은 유위(有爲)를 말한다. 마음으로만 행한 경우[思]이든 실 5) 붓다가 분석한 것은 인식주체를 접어놓은 객관세계의 요소들이 아니다. 이 점에서 그리스 자연철학자 들로부터 오늘날의 자연과학에까지 이어져 온 ‘~소(素)’, ‘~자(子)’ 등과 같은 존재요소들이 아니다. 그 렇다고 붓다가 순수하게 인식주체만을 분석한 것은 아니다. 저기 보이는 구름이 내가 “없어져라!”고 외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삶/경험을 채우는 인식 내용들이 순수하게 인식주체의 산물 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붓다는 객관주의자/유물론자도 주관주의자/유심론(唯心論)자도 아니다. 붓 다가 분석하려 한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살아가는 세계 자체이다. 그러나 불교의 출발점은 어 디까지나 인간의 고뇌에 있기 때문에 방점은 주체 쪽에 찍힌다. 6) 불교에서 감관은 눈 · 귀 · 코 · 혀 · 피부[眼耳鼻舌身]만이 아니라 마음[意]까지 포함한다. 이 여섯 감관과 맞물려 있는 ‘대상’이 색(보이는 것 일반) · 소리 · 냄새 · 맛 · 촉감 · 사유대상[色聲香味觸法] 이다. 전자인 6근을 ‘6내’로 후자인 6경을 ‘6외’로 일컫기도 하며, 양자를 합해 ‘12처(處)’라 한다. 붓 다가 분석한 경험세계는 바로 이 6근(六根)과 6경(六境)이 맞물려 있는 세계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경험적 사실들이 바로 5온이다. 즉, 우리의 경험세계는 5온으로 분석되며 이 5 온이 성립하게 되는 인식론적 구조가 12처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12처로 조건 지워져 있기 때문에 5온의 세계를 살아간다고 요약할 수 있다. 붓다는 이 12처를 넘어가서 이야기하는 것을 거부하며, 이 점에서 인식론 상 경험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정우 ∥ 세계철학사 대장정 Ⅳ : 아시아 세계의 철학 - 인도·한국편 - 4 - 제 행동을 한 경우이든 결국엔 모두 인간주체가 만들어낸 것이다. ‘식’은 정신작용인데, 붓다에게서 식은 독립적 실체가 아니다. ‘식’은 ‘안이비설신의’를 조건으로 ‘색성향미촉법’에 대해서 성립하는 정 신작용이다. 그래서 ‘식’은 다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으로 구분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삶/경험은 크게 다섯 범주로 나뉜다. 집착은 바로 ‘나’의 경험세계를 ‘나’라는 실체와 굳게 결부된 실 재로 여기는 데에서 생겨난다고 본다. 때문에 나를 실체성을 갖춘 존재로 여기게 되고, 이를 붓다는 ‘아집(我執)’이라 한다. 따라서 붓다는 오온의 세계를 실재로 착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진실을 깨달아 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진실이란 모든 것이 연기의 법칙에 따라 생성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7)의 법칙은 무엇인가?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늙음 · 죽음[老死]은 어디에서 오는가? 태어남[生]에서 온다. 태어남은 어디에서 오는 가? 존재[有]에서 온다. 존재는 어디에서 오는가? 집착[取]에서 온다. 집착은 어디에서 오는가? 갈애[愛]8)에서 온다. 갈애는 어디에서 오는가? 느낌[受]에서 온다. 느낌은 어 디에서 오는가? 접촉[觸]9)에서 온다. 접촉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섯 장소[六入]10)에서 온다. 여섯 장소 어디에서 오는가? 정신적-물질적 현상[名色]에서 온다. 명색은 어디 에서 오는가? 의식작용[識]에서 온다. 의식작용은 어디에서 오는가? 유위[行]에서 온 다. 유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어리석음[無明]에서 온다. 어리석음이 모든 것의 원인이 다.(「붓다짜리따」, XII) 이런 연기의 법칙을 깨닫지 못하게 되면 삶에서 경험하는 세계와 경험하는 ‘나’를 실체화하게 된 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집과 집착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집착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연기 의 법칙과 반대 방향으로 향해야한다. 어리석음은 유위를, 유위는 차례로 의식작용, 심 · 물, 감관들, 접촉, 느낌, 갈애, 집착, 존재를 발생시키며, 결국 생(로)병사가 어리석음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따 라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유의에서 벗어나게 되고, 연이어 다른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마침내 생(로)병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방됨을 위해 사람들은 어떤 실천적 노력을 행해야 하는가? 붓다는 실천론으로 ‘팔정도 (八正道)’를 제시한다. 붓다의 가르침을 올바로 깨닫는 ‘정견(正見)’, 이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기고자 하는 의지인 ‘정지(正志)’, 그리고 이에 입각한 바른 말[正言]과 행동[正業], 바른 생활[正命], 나아가 이를 끝없이 정진하는 ‘정정진(正精進)’함이 필요하다. 또한 늘 바른 마음을 지켜나가는 ‘정념(正念)’, 삼매의 경지를 이어나가는 ‘정정(正定)’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팔정도이다. 7) ‘연기’로 번역되는 ‘paticcasamuppâda’는 ‘~을 향하여-다가가-일어남(pati-icca-samuppâda)’을 뜻 한다. 그래서 ‘~에-연하여-일어남[緣起]’이다. 앞에서 인용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 으면 저것이 없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는 구절은 붓다의 연기 개념을 잘 보여준다. 8) ‘갈애(渴愛)’는 ‘tanhâ’의 번역어이다.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갈애가 윤회를 가져오며, 해탈의 장애물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끊음, 자름, 풀음의 가장 핵심적인 고비를 형성한다. 갈애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慾愛], 있음에 대한 갈애[有愛], 없음에 대한 갈애[非有愛]가 있다. 9) 접촉이란 안 · 이 · 비 · 설· 신 · 의라는 조건에 입각해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에 대한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이 발생하는 것을 뜻한다. 10) 여섯 장소는 6근과 6경 그리고 6식을 합한 18계(界)를 뜻한다. 즉, 근, 경, 식이 교직되는 여섯 장소 를 뜻한다. 이정우 ∥ 세계철학사 대장정 Ⅳ : 아시아 세계의 철학 - 인도·한국편 - 5 - 이상과 같은 붓다의 가르침을 ‘사성제(四聖諦)’라 한다. 우리는 처음에 ‘고제(苦諦)’를 접했다. 그리 고 삶의 고뇌가 어떻게 생겨나는가를 12연기설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것이 곧 ‘집제(集諦)’이다. 그 리고 12연기를 거꾸로 생각해 봄으로써 고뇌로부터의 벗어남을 이해했다. 이것이 ‘멸제(滅諦)’이다. 마지막으로 멸제를 이룰 수 있는 길로서의 8정도를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도제(道諦)’이다. II. 붓다 사후 불교의 전개 붓다는 입적하기 전에 제자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난다야, 너희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구나. ‘스승님의 가르침이 이제 사라져버렸다. 이제 스승님은 떠나버리셨다.’ 하지만 아난다야, 그렇게 생각하지 말거라. 내가 떠난 후에는, 내가 지금까 지 가르치고 세워놓은 법(法)과 율(律)을 너희들의 스승으로 삼으려무나.” 붓다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던 제자들은 4차에 걸쳐서 대(大)결집을 하게 되며, 이 과정을 통해서 『니까야』와 『아함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 붓다의 법과 율에 대한 해석이 갈라지게 되고, 교단 또한 갈라지게 된다. 처음에는 붓다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상좌부(上座部)’와 붓다 가르침을 보다 유연하게 해 석하고자 한 ‘대중부(大衆部)’가 갈라졌다. 뿐만 아니라 이후 교단은 여러 갈래들로 더욱 세분해 갈 라지게 된다. 이렇게 다원화된 불교를 ‘부파불교’라 한다. 또한 내용상으로는 아비달마 불교라고 부르 기도 한다.11) 아비달마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더욱 철학적으로 접근했고, 그 결과 ‘경’과 ‘율’ 외에 많은 ‘논(論)’들이 만들어진다. 경·율·논 이 셋을 합해 ‘삼장(三藏)’이라 부른다. 1. 부파불교 혹은 아비달마불교의 발달 부파불교는 세분하면 20개에 달하는 부파로 분열되었다. 상좌부의 경우 철학적 성격이 강하여 많 은 논서들을 남겼다. 반면 대중부는 종교적 성격이 강하다. 상좌부 중 큰 족적을 남긴 갈래는 좁은 의미의 상좌부, 설일체유부(說一體有部), 경량부(經量部), 독자부(犢子部) 등이다. 상좌부와 설일체유 부는 붓다의 분석적인 측면을 이어받았다. 붓다가 ‘5온’ 등으로 삶의 세계를 분석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세부적인 분석을 추구했다. 그 분석의 과정에서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존재에 다다르게 되면 이를 다르마=‘법’으로 칭했으며, 바로 이러한 법의 존재와 법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이 이 들 사유의 핵심을 형성했다. 설일체유부라는 말 자체에 담겨 있듯, ‘일체유’ 즉 모든 존재를 분석하 11) ‘아비달마(阿毘達磨)’는 ‘abhidharma’를 음역한 것이다. ‘다르마[法]’는 ‘being’ 또는 ‘reality’라 할 수 있으며, ‘아비-다르마’는 ‘on being’ 또는 ‘on reality’라 할 수 있다. 결국 아비달마불교는 ‘존재- 론’이라 할 수 있다. 부파불교는 때로 ‘소승불교’라 불린다. 이른바 ‘대승불교’가 성립한 이후, 부파불교는 대승불교에 의해 ‘소승불교’로 폄하되어 불렸다. 그러나 이는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부르는 이름이므로 학술적인/객관적 인 용어로는 적합지 않은 말이다. 이정우 ∥ 세계철학사 대장정 Ⅳ : 아시아 세계의 철학 - 인도·한국편 - 6 - 고자 한 것이다.12) 이들의 사유는 생성하는 가운데 생성하지 않는 실체들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실체 주의(substantialism) 혹은 본질주의(essentialism)라 불릴 수 있으며, “‘나’는 공에 불과하지만 ‘법’들 은 실재한다[我空法有]”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경량부와 독자부는 상좌부, 설일체유부가 붓다의 본지를 배반하고 실체주의나 본질주의 로 빠졌음을 문제시 삼는다. 이들은 현재 · 과거 · 미래(삼존)에 걸쳐서 항존(恒存)하는 법들의 존재 를 부정했고, 오로지 생성하는 현재 세계만을 인정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붓다의 반-실체주의로 되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철저한 반-실체주의의 결과로 업과 윤회를 설명하지 못하게 되고, ‘세계’가 환상에 불과하게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때문에 이들은 다시 생성의 밑바닥에서 어떤 ‘식’을 찾 고자 노력한다. 이런 경향은 훗날 ‘유식불교’가 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의 사유에는 세계 의 근본 실체 인정하려는 ‘실체론적’ 경향과 생성존재론으로 가려는 ‘생성론적’ 경향이 대랍한다. 그 리고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차원을 인정하려는 ‘실재론적’ 경향과 모든 것을 마음의 문제로 보려는 ‘유심론적’ 경향 사이에 대립과 긴장이 존재한다. 이 대립과 긴장은 이후 전개되는 불교의 역사를 관 통하며 이어진다. 2. 대승불교의 전개와 발달 이 점은 붓다 입적(BC 400년 전후로 추정) 후 약 400년 후에 “소승불교”를 비판하면서 스스로를 “대승불교”라 지칭한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면서 확인된다. 아비달마 불교는 ‘아’의 실체성은 부정하 고 이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들로서의 ‘법=다르마’들을 강조한다. 대승불교 계통은 이를 비판하면서, 철저한 생성존재론적 입장을 취한다. 즉 이들에게 모든 것은 ‘공(空)’에 불과하다. 여기서 ‘공’이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공’이란 사람들이 실체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연기의 법칙’에 따 라 생성하고 있는 세계의 단편적 모습일 뿐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개념이다. 또한 대승불교의 주창자 들은 “소승불교”가 중생 구제를 외면하고 자신의 안심(安心)만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이 점에서 대 승불교는 진리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아라한(阿羅漢)’이 아니라 중생의 구제 또한 목표로 하는 ‘보살(菩薩)’이 되고자 한다. 대승불교는 아비달마 불교가 추구한 높은 수준의 진리 세계가 아니라 보다 대중적인 세계를 추구 했다. 우선 대승불교는 붓다에 대한 이해에서도 아비달마와 달랐는데, 즉 역사적 붓다 외에도 초월적 인 붓다를 상정했다. 또, 붓다 외에도 다른 많은 보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모든 중생들이 ‘성불’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개했다. 또한 앞에서 언급했듯이 ‘보시’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적-사회적 운 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때문에 대승불교는 이미지의 차원에을 포함해 다양한 문화적 장치들(불탑, 불 상, 불화 등등)을 만들기도 했다. 대승불교의 성공은 ‘공’에 대한 깨달음 즉 ‘반야’13)의 진리를 기초 12) 상좌부는 신체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28색법(色法), 정신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52심소법(心所法)을 상 세하게 분석했으며, 여기에 마음 자체(‘식(識)’의 작용)인 심법을 합해 81개의 유위법을 제시했다. 그 리고 열반이라는 하나의 무위법을 더해, 결국 82개의 법으로 모든 것을 분석했다. 설일체유부는(『구 사론』의 예를 든다면) 11색법, 46심소법, 1심법, 14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의 72개 유위법과 3개 의 무위법으로 분석해, 총 75개의 법으로 모든 것을 분석했다. 13) ‘반야(般若)’는 ‘prajnâ’를 음역한 말이다. ‘pra’는 ‘앞으로’를 뜻하며, ‘jnâ’는 ‘알다’를 뜻한다. 공 이정우 ∥ 세계철학사 대장정 Ⅳ : 아시아 세계의 철학 - 인도·한국편 - 7 - 로 삼은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대중적 성격에 힘입은 결과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비달마 불교가 갖추고 있던 수준 높은 지적 엄밀성과 정직함이 훼손된 것 또한 사실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의 입적 이후 미륵(彌勒)이 출현할 때까지 중생들을 고통으로부터 지켜주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이다. 여성적인 이미지로 표상되며, 대중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이기도 하다. 대승불교의 입장을 가장 간명하게 보여주는 개념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이다. 아래의『반 야심경』은 간략하고 공 사상을 온축하고 있다. 1.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2.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멸도(滅度)했느니. 3.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4. 사리자[사리뿌뜨라]여! 색은 공과 다른 것이 아니고 공 자체 색과 다른 것이 아니니, 색이 곧 공이 요 공 자체 곧 색이로다. 수 · 상 · 행 · 식이 모두 또한 마찬가지로다.14) 5.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6. 사리자여! 이 모든 법들이 공의 성격을 띠기에,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더러 의 진리를 깨닫는 ‘지혜’ 또는 ‘통찰’을 뜻한다. 14) ‘아’를 오온의 모임으로서 해체한다고 해서, 오온 자체는 실체로 여겨도 되는가? 오온 자체도 실체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이정우 ∥ 세계철학사 대장정 Ⅳ : 아시아 세계의 철학 - 인도·한국편 - 8 - 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요,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로다.15) 7.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 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8. 하여 공의 차원에선 색도 수 · 상 · 행 · 식도 없으며, 안도 이 · 비 · 설 · 신 · 의도 없고 색도 성 · 향 · 미 · 촉 · 법도 없고 또 안계에서 의식계까지도 모두 없으며,16) 발생하는 무명도 소멸하는 무명도 없으며 또한 발생하는 노사도 소멸하는 노사도 없으며,17) 나아가 ‘고집멸도’조차도 없고 또한 지혜 · 득도조차도 없도다.18) 9.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10. 득도에의 집착조차 넘어섰기에, 보리살타[보살]는 오로지 반야바라밀다에 의거할 뿐이니, 마음에 거리낌 없어 거리낌이 없기에 공포도 사라지고, 전도몽상19)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드나 니.20) 11.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12.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이 반야바라밀다에 의거해 위없이 높은 깨달음을 얻었나니. 13.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 波羅蜜多呪 卽說呪曰. 14. 하니 알지어다, 반야바라밀다는 신성한 주문이요 무명을 떨어낸 주문이요 위없이 높은 주문이요 비할 바가 없는 주문임을. 모든 고뇌를 떨쳐버릴 수 있어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으니, 이에 반야 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하노라. 바로 이렇게 설하나니. 15.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16.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21) 3. 실재론적 경향들(유식사상, 여래장사상) 대승불교는 이후 자신들의 공사상 또한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자 했다. 『금강경』, 『유마경』, 『법화경』, 『화엄경』 등을 비롯한 대승불교 경전들은 불교적 깨달음의 경지를 문학적으로 뛰어나 게 표현했다. 하지만 이 경전들은 철학적인 정치함에서는 한계를 보였다. 2~3세기에 활동한 나가르 주나는 최고의 논사로서 대승불교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공사상의 핵심을 다룬 여러 저작들과 ‘중 관철학’이라 불린 그의 사상은 이후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22) 나가르주나는 실체론과 단멸론을 모두 15) 생멸(生滅), 구정(垢淨), 증감(增減)이 모두 실체를 전제했을 때 성립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16) 아비달마불교, 특히 설일체유부에서 말하는 ‘일체’ 즉 6근, 6경, 6식, 18계가 모두 실체가 없음을 말 하고 있다. 17) 12연기설을 말한다 해서, 12연기의 요소들(무명→노사, 노사→무명) 자체를 실체로 여겨서는 안 됨을 말하고 있다. ‘발생하는 무명’이란 집도의 순서에서의 무명이며, ‘소멸하는 무명’이란 멸도에서의 무명 이다. 그 다음의 ‘발생하는 노사’와 ‘소멸하는 노사’도 마찬가지이다. 18) 깨달음을 추구한다고 해서 깨달음 자체에 집착하면 안 됨을 말하고 있다. 『금강경』과 함께 음미하면 좋다. 19) ‘전도몽상(顚倒夢想)’은 그릇된 생각을 말한다. 20) ‘구경열반’은 명사적으로 이해하면 바로 아래에 나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즉 위없이 높은 깨달음을 말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anuttarâ samyaksambodhi’의 음역이며, 번역은 ‘무상정득각(無上正等覺)’이다. 21) 원어는 “gate gate pâragate pârasamgate bodhi svâhâ”(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 와하)이다. 이정우 ∥ 세계철학사 대장정 Ⅳ : 아시아 세계의 철학 - 인도·한국편 - 9 - 거부했던 본래적인 붓다의 입장을 다시 정립하고자 했다. 공사상은 세계의 존재를 단순히 부정한 것 이 아니다. 공사상은 우리가 세계의 존재자들에 실체론로 오인하고 이를 집착하는 것을 비판할 뿐이 다. “색즉시공”인 것은 분명하지만 반면 “공즉시색”이기도 한 것다. 이제 나가르주나를 계기로 대승 불교는 아비달마불교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존재론을 정립할 수 있었다. 불교의 대중화는 다른 전통 종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기존 전통 종교 신봉자 또한 자신의 철학 을 재정립해야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AD 320년경에 성립된 굽타 왕조는 당대의 다양한 국가들과 문화들을 통합해 인도 고전문화를 집성한 왕조이다. 이 굽타 왕조에서 재정립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 타났고, 그 결과가 바로 바라문교를 새롭게 재창조한 힌두교의 탄생이다. 힌두교는 불교가 부정한 신 화적 세계를 다시 부활시키고, 다신교적이면서 동시에 일신교적인 종교를 재정립했다.23) 하지만 굽 타왕조는 불교를 완전히 배척하지 않았으며, 이런 분위기에서 힌두교와 불교는 서로 공존하며 발전 하게 된다. 이 시대의 대승불교를 ‘후기 대승불교’라 하며,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이 이론적 기반이 다.유식사상은 『해심밀경』을 기초로 하는데, 아비달마불교와 나가르주나의 중관 사상이 각각 ‘유’와 ‘공’을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했다면, 유식사상의 경우 스스로는 그 중용을 취해 ‘중(中)’을 기반으로 사유를 전개했다. 24) 유식사상은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법’을 부정한다. 반면 어디까지나 ‘마음’을 인 정한다. 즉 유식사상은 일종의 유심론인 것이다. 유식사상에 따르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빚어낸 것들일 뿐이다.” 유식사상에 의하면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외부가 아니라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를 돕는 기법이 ‘요가’이다. 유식철학은 6~8세기에 걸쳐 더욱 정교해지는데, 주로 유식의 인식론과 논리학25)이 그 주요 영역 이다. 이 과정에서 힌두교사상과 치열한 논전을 주고받았고, 그 결과 6~8세기는 인도의 철학적 사유 는 그 정점에 달한다. 바수반두를 이은 디그나가, 다르마키르티를 비롯한 많은 논사들이 이 과정에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정점에 달한 불교는 인도 내에서는 점차 쇠퇴하고,26) 그 대신 동아시아에서 더욱 발전한다. 다른 한편, 힌두교는 9세기 이후에도 계속 발전했고, 이후에도 여러 변동이 있었음에 22) 중관철학(中觀哲學)의 핵을 이루는 나가르주나의 『중론』, 『대지도론』과 그의 제자인 아리아데바[提 婆]가 쓴 『백론(百論)』은 ‘삼론’으로 불렸으며, 중국에서는 이 세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삼론종(三論 宗)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명가(名家)사상이 곧 쇠퇴한 것과 마찬가지로, 논리적 분석을 선호하 지 않는 동북아 사유의 풍토에서 삼론종은 이내 시들해진다. 23) 힌두교는 종교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다신교이면서도, 모든 신들의 배후에는 그 모두가 귀일하는 유 일신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다즉일 일즉다(多卽一 一卽多)’의 사유이다. 특히 브라만=비슈누=시바라 는 삼신일체(三神一體)의 구도가 기본적이다(브라만은 우주의 창조자이고, 비슈누는 우주의 보존자이 고, 시바는 우주의 파괴자이지만, 이들은 별개의 신들이 아니라 유일신의 상이한 아바타들일 뿐이다) 이런 구도가 인도문명이 그토록 다원적이면서도 동시에 그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지속되도록 만든 중 요한 원동력이 된다.(붓다는 객관적 존재들로서 상상된 신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들이라는 관념 또는 문화에 관련된 언급들은 종종 발견된다. 붓다는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는 생각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비판한다) 24) 『해심밀경』은 동북아에서는 ‘법상종(法相宗)’의 소의경전이 된다. 논리적이고 치밀한 법상종 역시 동 북아에서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25) 불교적 맥락에서 말한다면 인식론은 ‘식’ 자체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고, ‘논리학’은 이 탐구에서 나타나는 논리적 형식(logical form)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26) 유식 · 여래장 이후에는 밀교(密敎)가 등장하는데, 그 핵심 경전은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 頂經)』이다. 헤이안 시대에 일본 불교를 흥기시킨 사이초(最澄)와 구카이(空海)는 당으로의 유학을 통 해 밀교를 들여오게 되고, 밀교는 일본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게 된다. 이정우 ∥ 세계철학사 대장정 Ⅳ : 아시아 세계의 철학 - 인도·한국편 - 10 - 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도의 정통을 유지하고 있다. III. 우리에게 불교란 무엇인가?(동북아의 불교) 불교라는 종교/철학은 우리 동북아 문화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불교가 전래된 것은 한 멸망 이후 3세기부터이며, 중국은 남북조 시대, 한반도의 삼국시대인 4~6세기이다. 불교가 전성기를 이룬 시기는 당 제국 시대, 통일신라 · 고려 시대, 일본의 헤이안 시대인 7~9세기이다. 불교가 처음 들어오기 시작한 때는 중원의 한 제국이 멸망한 혼돈의 시대다. 이 혼란은 중국의 당 나라와 한반도의 통일신라가 천하통일을 이루는 7세기까지 지속되었다.27) 이 혼란의 시대에 사람들 은 불교의 해탈에 관심을 가졌다. 동북아에 들어온 불교28)는 도교와 유사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불교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 한다. 예컨대 붓다는 “황로불타(黃老佛陀)”29)라는 신, 다르마(법)는 ‘도’, 니르바나(해탈)는 ‘무위’, 아르하트(아라한)는 ‘진인(眞人)’으로 받아들여졌다. 불교를 도교를 투 영해 수용한 것이다. 또한, 불교가 다분히 주술적이고 기복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여졌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이해되고 연구되기 위해서 먼저 번역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번역은 쉽 지 않았다.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등 인도의 언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했기 때문에 상형문자인 한 문과는 달랐다. 이런 언어적 혹은 문화적 차이 때문에 인도 불경을 한역하는 것은 지난했다. 이때 쿠 마라지바=구마라습(鳩摩羅什)에 의해 결정적 번역이 이루어졌다. 이 구마라습의 번역서들은 한자문 명권에서는 그 자체 원전이 된다. 한자라는 언어의 성격 때문이겠지만, 동북아의 사유는 추상적 분석보다 구체적 직관을 향한다.30) 이것이 제자백가 중에서 서양의 논리학파에 해당하는 명가가 별다른 발전을 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인도에서 들어온 논리학 ― ‘인명(因明)’이라 불렸다 ― 역시 크게 환영받지 못 했다. 가령 삼론종이라든가 법상종 같은 종파는 곧 쇠퇴해버렸고, 그 대신 대중적이고 직관적이고 문 학적인 대승 경전들이 인기를 얻었다. 동북아 사유의 이런 성향은 마침내 그 고유한 불교를 낳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선종(禪宗)’31)이 27) 이 시대는 중원과 변방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다양한 이민족들이 혼재되어 활동한 시대였으며, 또 중 원의 힘이 약화된 틈을 타서 중원 바깥에서 여러 국가들이 세워진 시대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다원 화’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중심의 와해가 오히려 다원화의 흐름을 가능케 한 것이다. 다른 한편, 이 시대는 ‘혼돈’과 ‘파괴’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또한 동시에 ‘생성’과 ‘창조’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 시대에 오히려 동북아 문화의 잠재력이 활짝 피어났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에 역시 혼돈의 시대(‘암흑 시대’)를 맞이했던 유럽이 문자 그대로 암흑시대를 보낸 것과 대조적이다. 어떻게 이런 혼란의 시대에 유럽과 대조적으로 오히려 찬란한 문화의 꽃이 필 수 있었는지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이다. 28) 불교는 또한 동남아시아에도 전파되었다. 특히 『니까야』가 동남아로 전파됨으로써 많이 읽혔고, 동 남아시아가 불교화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동남아의 불교는 별다른 학문적 발전을 이 루지는 못했다. 29) ‘황로’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말한다. 한 제국 초기에 유행했던 사조가 ‘황로지학’이며, 이후 유교사회가 도래한 뒤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30) 이는 번역어들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컨대 ‘인간의 참된 본성’이라는 철학적 표현은 ‘본래면목(本來 面目)’/‘진면목(眞面目)’ 즉 ‘참된 얼굴과 눈’으로 번역되었다. 또, ‘본질’, ‘실체’ 같은 전문 용어들은 ‘안청(眼睛)’ 즉 ‘눈동자’로 번역되었다. 31) ‘선’은 명상을 뜻하는 ‘dhyâna’를 음역한 ‘禪那’에서 ‘那’가 탈락한 것이다. 불교의 삼학(三學)인 계 (戒) · 정(定) · 혜(慧) 중에서 ‘정’과 통한다. 그래서 ‘선정’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기도 한다. 이정우 ∥ 세계철학사 대장정 Ⅳ : 아시아 세계의 철학 - 인도·한국편 - 11 - 다. 선종은 복잡한 이론적 언어 ― 갈등(葛藤) ― 를 끊고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창한다. 때문에 선불교는 언어를 초월하고자 했기 때문에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을 통해서 진리가 이어진다. 32) 선종 외에도 동북아 불교는 실재론적 경향과 종합적 경향 그리고 타율적 경향이라는 흐름을 만든 다. 먼저 실재론적 경향 역시 동북아 사유의 근본 성격 때문이다. 동북아의 철학 전통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그대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동북아의 사상이 형이상학보다는 정치철학을 중심으 로 발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동북아에서는 여래장사상 같은 실재론적 경향을 더 폭넓게 받 아들였고, 현상과 본질 ― 상(相)과 성(性) 또는 사(事)와 리(理) ― 사이에 단절은 없다는 입장을 취 하게 된다. 또 다른 동북아 불교의 중요한 특징은 종합하려는 경향이다. 이는 이미 이루어진 학문적 성과들을 일정한 틀로 종합 · 정리하는 경향 ― ‘교상판석(敎相判釋)’ ―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천태종과 화엄 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천태종은 불교의 역사를 붓다의 일생에 걸친 설법으로 압축 · 재구성했 다. 또, 화엄종은 깨달음의 단계를 열 단계 즉 10지(十地)로 정리해 설명한다. 이렇게 동북아 불교는 이미 이루어진 불교사상들을 종합 · 정리하는 작업에 많은 노력을 쏟았다. 마지막으로 동북아 불교의 특징은 타율적 경향이라 할 수 있다. 본래 불교는 구원을 얻는 종교가 아니다. 본인 스스로 깨달음을 찾아 가는 종교이다. 이점에서 불교는 자율적이다. 그러나 동북아의 불교, 특히 정토종 계통의 불교는 타자로부터 구원을 얻고자 한다. 자율적 깨달음의 능력이 부족한 대중이 어떤 타율적 힘에 의해 구원받기를 갈구하기 때문에, 대중화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대중은 극락세계를 갈구하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염불(念佛)을 외우게 된다. (‘나무’ 는 ‘namo’의 음역으로, ‘귀의한다’는 뜻이다) 불교사상은 동북아문명에 심대한 발자취를 남겼고, 문화적 성취 또한 컸다. 하지만 동북아 불교는 몇 가지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선종이 주류가 되면서 ‘반(反)지성주의’적 흐름이 주 가 되는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불교가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취급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현실적인 불평등을 묵인한다는 점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불교가 적극적 역할을 하지 못한 사실 도 이와 관련된다. 또 하나, 기복적 경향이 강한 대중에게 영합하면서 종교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비즈니스’나 ‘네트워크’로 작동하면서 거대한 기득권이자 자본으로서 기능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불교의 지적 엄격성, 보살의 본래적 가치, 불교 성립의 의미 등을 돌아보면서, 초심을 반추해볼 필요 가 있을 것이다. 32) 선종의 실질적인 시조는 6조 혜능(慧能, 638~713)이다. 선종은 혜능의 남종과 신수(神秀, ?~706)의 북종으로 나뉘어 전개되었으며, 이후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을 비롯한 많은 종파들로 나뉘어 만개했다. 선사들을 저작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이들이 남긴 어록들이 『경덕전등록』, 『벽암록』, 『무문 관』 같은 책들에 수록되어 있다.
[출처] 인도 불교와 동북아 불교|작성자 임기영 인문학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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