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눈을 볼 수 있는가?
— 원측의 유식과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의 비교1)—
한자경(이화여대)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세계인식에서 인식과 존재의 화해: 원측과 칸트
1) 원측의 유식사상에서 인식과 존재
2)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에서 인식과 존재
3. 마음은 마음을 알 수 있는가?
1) 칸트: 자기인식의 불가능성
2) 원측: 마음의 자기증득 가능성
4. 깨달음의 의미
5. 마치는 말
1) 불교철학계에서 유식사상가로서의 원측을 다룰 때에는 흔히 원측의 사상이 규기의 사상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西明學派가 慈恩學派와 어떻게 구분되는지에 주로 주목한다. 현장의 제자로서 중국 법상종을 완성한 규기는 중관과 유식을 대립으로 놓고 유식 내에서도 안혜∙진제 계통의 구유식을 비판하면서 호법∙ 현장 계통의 신유식을 주장한데 반해, 원측은 중관과 유식, 구유식과 신유식을 모두 포괄하여 종합하는 융합적 사유를 보여주고 있음이 강조된다. 이 방면의 대표적 연구로는 정영근, “원측의 유식사상: 신구유식의 비판적 종합”(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1994); 이만, 『한국의 유식사상』(장경각, 2000); 남무희, “원측의 화쟁적 유식사상”(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편, 『불교학보』, 2007); 백진순, “몸의 밀의∙ 불가지성에 대한 법상종의 해석:“원측과 규기의 해석을 중심으로”(한국철학회 편, 『철학』, 2008) 등이 있다. 그러나 본고의 목적은 원측을 서양철학자 칸트와 비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측을 다른 유식사상가들과 비교하여 그 특징을 드러내는 것에 주목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본문 2절에서 논하듯 원측이 견분으로 상분을 보는 우리의 일상의식에서도 아뢰야식이 현상세계(상분)를 형성하기에 ‘유식’이 성립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신유식과 통하는 것이고, 본문 3절에 논하듯 원측이 우리의 식 자체를 자증분으로 논하며 아뢰야식을 자성청정심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구유식과 통하는 통찰이라고 본다. 이렇듯 논자 또한 원측과 마찬가지로 구유식과 신유식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 강조하는 바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 ‘일천제 성불론’이나 ‘범부수행론’ 등 원측사상의 여타 특징들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세계를 보는 눈은 눈 자신을 보지 못한다.” 비트겐슈타인이 ? 『논리철학논고』? 에서 한 말이다.2) 눈은 세계를 보고, 세계는 눈에 의해 보여진 세계이다. 그런데 그렇게 세계를 보는 눈은 세계의 한계로서 존재할 뿐 보여진 세계 속에 다시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눈은 눈을 볼 수 없다. 여기서 눈은 인식주체를 뜻하며,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주체로서의 형이상학적 자아는 세계를 알지만, 그렇게 세계를 인식하는 인식주체 자체, 형이상학적 자아 자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차라리 침묵해야 한다. 3)
이것은 인식과 존재, 주체와 객체를 이원적으로 분리하는 서양철학의 결론이기도 하다. 인식은 존재의 인식이지만, 둘은 궁극적으로 서로 화해될 수 없는 타자이다. 양초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루스의 운명처럼, 인식은 존재를 향해 나아가되 인식이 일어나는 곳은 존재 바깥이며, 존재와 맞닿는 순간 인식은 끝난다. 인식은 존재 외부에서 3인칭 시선으로만 성립한다. 존재와 분리된 인식은 인식객체 내면으로 침투하지 못해 객체 자체를 알지 못하고, 시선이 외부로 향해있기에 인식주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나를 알지 못한다면, 내가 세계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안다한들 그 앎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한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내가 세계에 대해 과연 참다운 앎을 가질 수 있겠는가? 정말로 나는 나를 알 수 없는가? 내가 나를 알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어떻게 해야 내가 나(나의 본래 성품)를 알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지눌은 『수심결』에서 다음과 같이 답한다.
다만 그대 자신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편을 쓰겠는가? 만일 방편을 써서 다시 알기를 구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제 눈을 보지 못하므로 눈이 없다 하여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제 눈인데 왜 다시 보려 하는가? 만일 잃지 않았음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4)
2)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5.633의 명제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은 실제로 눈을 보지 않는다.”이다.
3) 이상은 『논리철학논고』의 명제 “나는 나의 세계이다.”(5.63),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주체는 오히려 세계의 한계이다”(5.632), “세계 속 어디에서 형이상학적 주체가 발견될 수 있겠는가?”(5.633),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여야 한다.”(7) 등을 해설한 것이다.
4) 지눌,? 『목우자수심결』?(? 』?(? 『한국불교전서』?, 』?, 권4, 710상), “只汝自心, 更作什麽方便. 若作方便, 更求解會, 比如有人,
눈을 다시 보려고 하는 것을 꾸짖는 것을 보면 지눌도 눈은 눈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양의 불교철학자들도 과연 눈은 눈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였을까? 인식주체는 인식주체 자체를 알 수 없고, 그래서 결국 인간은 인간 자신을 알 수 없다고 보았을까? 동양에도 인식과 존재의 분열이 있었을까?
본고에서는 ‘나는 나 자신을 알 수 있는가’의 문제를 ‘눈이 눈을 볼 수 있는가’의 비유적 물음을 통해 다뤄보기로 한다. 이 문제에 대해 동서의 두 철학자, 원측(613~696)과 칸트(1724~1804)가 어떻게 생각하였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인간의 자기인식가능성에 관한 두 가지 사유방식을 대비시켜 보고, 이를 동서 사유방식의 차이로 논해보겠다.
2. 세계인식에서 인식과 존재의 화해: 원측과 칸트
자아의 자기인식을 논하기 전에 우선 밝혀져야 할 것은 자아의 인식능력이며, 이것은 자아의 세계인식을 통해 드러난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미 세계를 알고 세계와 관계하며 살아간다. 이는 곧 우리에게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일 존재와 인식이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면, 즉 우리의 인식이 세계존재 외부에서만 발생한다면, 세계인식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에게 세계인식이 있다는 것은 세계존재와 우리의 인식이 분리되지 않는 지점, 인식과 존재가 상호 침투하여 하나가 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식이 존재의 인식인 만큼, 존재는 인식된 존재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존재는 인식하는 마음 바깥의 존재가 아니라, 인식하는 마음에 포섭된 존재, 마음과 다르지 않은 존재이다. 3~4세기에 발흥한 유식불교는 처음부터 이점을 강조하여 논하였지만, 서양철학에서 이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논한 사람은 18세기 칸트가 처음이다. 본절에서는 유식불교의 원측과 서양철학의 칸트, 두 철학자가 세계인식에 있어 인식과 존재를 어떤 의미로 화해시키는지를 각각 살펴본다.
1) 원측의 유식사상에서 인식과 존재
‘유식’은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상적 의식 차원에서 보면 식뿐만
不見自眼, 以爲無眼, 更欲求見. 旣是自眼, 如何更見. 若知不失, 卽爲見眼.”
한국불교와 서양철학아니라 식과 구분되는 식의 대상(경)으로서 물리적 사물세계도 있기에 ‘유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식’이 성립하는 차원은 우리의 일상적 표층의식인 제6의식이나 그 기반인 제7말나식이 아니라, 그보다 더 심층식의 차원일 수밖에 없다. 우리 마음 심층의 식인 제8아뢰야식을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유식’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 과정이 ? 『해심밀경』?에 』?에 나온다.
갑(미륵): 위빠사나 삼매에서 행해진(형성된) 영상은 마음과 다른가, 다르지 않은가?
을(세존): 당연히 다르지 않다. 그 영상은 오직 식일 뿐이다. 식의 인식대상은 오직 식이 변현한 것일 뿐이다.5)
여기서 위빠사나 삼매(비발사나 삼마지)는 수행을 통해 도달한 특정한 경지를 말한다. 본래 유식학파는 요가차라(Yogacara)로서 요가수행을 하는 유가행파였다. 요가수행자들이 특정 수행의 경지에서 평상시에 의식되지 않던 영상들이 펼쳐지는 것을 경험하고는 그것의 정체를 묻는다. 예를 들어 삼매에 들어 관세음보살이나 불국토, 천계나 지옥 등의 영상을 본다면, 과연 그것이 마음 밖의 어떤 실재를 본 것인지 아니면 그냥 마음이 그린 것인지, 그러니까 그것이 마음과 다른 것인지 다르지 않은 것인지가 궁금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을은 영상은 식과 다르지 않다고 답한다. 식의 대상인 영상은 식이 변화하여 현현(변현)한 것, 식소현(識所現)이라는 것이다. 이 구절로부터 ‘식의 대상은 식의 변현으로서 그 자체 식일 뿐’이라는 ‘유식(唯識)’이 성립한다.
그들은 요가수행을 통해 마음 표층의 감각작용(전오식)이나 사려분별작용(제6의식/제7말나식)을 가라앉힌 상태에서 평상시에 의식되지 않던 영상을 보게 되고, 그 영상이 결국 마음 심층에서 작용하는 심층식(제8아뢰야식)이 산출한 영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어 그들은 유식의 원리가 수행의 정심(定心)에서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마음인 산심(散心)에서도 타당한지를 묻는다. 즉 흔히 객관적 대상세계를 본다고 여기는 지각에 있어서도 그 영상은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인가?
갑: 만약 유정이 본성에 따라 색 등을 반연하는 마음에 의해 형성된 영상에 머문다면,
5) 미륵 저, 현장 역,? 『해심밀경』?, 』?, 권6 分別瑜伽品 (? 『대정신수대장경』?, 』?, 권30, 698상중; 『한국불교전서』?, 』?, 권1, 304하 이하), “[갑] 諸毗鉢舍那三摩地, 所行影像, 彼與此心, 當言有異, 當言無異. [을] 當言無異, 由彼影像, 唯是識故. 我說識所緣, 唯識所現故.”
눈이 눈을 볼 수 있는가?
그 영상 또한 마음과 다름이 없는가?
을: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런데 어리석은 범부들이 전도된 생각으로 인해 영상에 대해 그것이 오직 식일 뿐임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 전도된 이해를 일으킨다. 6)
일상적인 대상인식에 있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도 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은 곧 영상이며, 영상은 인식하는 마음(能緣心)과 다르지 않다. 보여진 영상은 곧 보는 마음이 변현한 것,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라는 것이다.7) 결국 정심에 있어서든 산심에 있어서든 마음이 보는 영상은 바로 그 마음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형성하는 마음과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의 인식대상은 그렇게 우리의 식이 형성한 것이므로 식과 다를 바가 없는데, 일반 범부가 그러한 유식성을 모르고 대상을 식과 다른 것, 식 바깥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전도된 생각인 것이다. 이에 대해 갑은 다시 문제제기하고, 을이 답한다.
갑: 형성된 영상이 마음과 다르지 않다면, 마음이 다시 마음을 본다는 말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을: 어떤 법(존재)도 법(존재)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이 이와 같이 일어날 때에는 이와 같이 영상이 현현한다. 마치 잘 닦인 청정한 거울면에 의거해서 본질을 대상으로 삼아 다시 본질을 보면서도 ‘내가 지금 영상을 본다’고 말하거나 ‘본질을 떠나 별도로 현현하는 소행영상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8)
보여진 영상이 보는 마음과 다를 바 없다면, 결국 마음이 마음을 본단 말인가?
6) 미륵 저, 현장 역,? 『해심밀경』?, 』?, 권6 分別瑜伽品 (? 『대정신수대장경』?, 』?, 권30, 698중;? 『한국불교전서』?, 』?, 권1, 307하), “[갑] 若諸有情, 自性而住, 緣色等心, 所行影像, 彼與此心, 亦無異耶. [을] 亦無有異, 而諸愚夫, 由顚倒覺, 於諸影像, 不能如實, 知唯是識, 作顚倒解.”
7) 우리는 흔히 定心의 影像은 상상의 산물이고 散心의 영상은 실재의 반영이라고 간주하여, 전자에서는 유식이 성립해도 후자에서는 유식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이런 구분이 근거 있는 구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 해심밀경?은 경?은 의도적으로 정심과 산심을 나란히 논하고 있다. 정심이든 산심이든 우리가 직접 보는 것은 분명 영상일 뿐이며, 그 영상을 일으켰다고 추정되는 실재가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설정하는 실재는 우리의 인식대상인 영상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8) 미륵 저, 현장 역,? 『해심밀경』?, 』?, 권6 分別瑜伽品 (? 『대정신수대장경』?, 』?, 권30, 698중; 『한국불교전서』?, 』?, 권1, 305하 이하), “[갑]若彼所行影像, 卽與此心, 無有異者, 云何此心, 還見此心? [을]此中無有少法, 能見少法. 然卽此心如是生時, 卽有如是影像顯現. 如依善瑩, 淸淨鏡面, 以質爲緣, 還見本質. 而謂我今見於影像, 及謂離質別有所行影像顯現.”
그렇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을은 거울의 비유를 든다. 마음이 일어나 영상이 현현하고 마음이 그 영상을 지각하는 것을 내가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보면서도, 나 자신(본질)과 나의 거울상(영상)을 구분해서 ‘나는 지금 본질 아닌 영상을 본다’라고 말하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거울을 통해 나 자신(본질)을 보고 있다. 그렇듯 나는 사물을 볼 때도 내 마음이 그린 영상을 보지만, 그 영상이 내 눈 망막 위나 두뇌 신경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내 바깥의 사물과 구분되지 않기에, 나는 영상을 보되 결국 사물을 보는 것이다. 지각에 있어 지각대상인 사물과 지각된 영상은 구분되지 않는다. 이렇듯 비유가 뜻하는 바는 내가 본 내가 거울이 그린 영상이듯이, 내가 본 세계는 내 마음이 그린 영상이라는 것이다. 보여진 세계는 보는 마음이 그린 영상이다. 그리고 내가 나(영상)를 보는 것이 곧 영상을 그린 거울을 보는 것이듯이, 내가 세계(영상)을 보는 것이 곧 그 영상을 그리는 나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거울 속 나를 보면서 결국 거울을 보고 있듯이, 내가 세계를 보는 것은 곧 마음 속 세계를 보는 것이며 결국 마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은 마음을 본다.
그렇다면 마음이 마음을 보고, 눈이 눈을 본단 말인가? ‘마음이 마음을 본다’는 말의 의미를 보다 상세히 규정하기 위해 원측은 『해심밀경소』? 에서 갑의 반문을 다음과 같이 보충셜명한다.
마음이 다시 마음을 본다는 것은 세간의 진리에 위배된다. 눈은 자신을 보지 못하고(眼不自見),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키지 못하고, 칼은 자신을 베지 못한다.9)
그리고 이에 대해 원측은 여기에서 ‘마음이 마음을 본다’는 것은 갑이 생각하듯 ‘안불자견’이라는 세간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답한다. 마음이 마음을 본다는 것은 마음이 마음에 의해 형성된 영상을 본다는 것이지, 그 영상을 보는 마음(견분)이 그 보는 마음(견분) 자체를 다시 본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상은 마음이 전변한 것이기에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시 자기 마음을 본다’고 말하는 것이지, 견분이 다시 견분을 보기에 ‘자신을 본다’고 말하는 것이
9) 원측, 『해심밀경소』?, 』?, 권6 分別瑜伽品 (? 『한국불교전서』?, 』?, 권1, 305하), “此心還見此心, 便違世間. 眼不自見, 指不自指, 刀不自割.”
아니다.10)
마음에 의해 보여진 세계가 그렇게 세계를 보는 마음과 다르지 않기에 ‘마음이 마음을 본다’고 말하는 것이지, 그 말이 곧 세계를 보는 마음이 그 마음 자체를, 눈이 눈 자체를 다시 본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2)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에서 인식과 존재
마음이 세계를 보되 그 세계가 마음이 형성한 것이기에 마음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마음은 세계를 보면서 결국 마음 자신을 본다는 것을 서양철학에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밝힌 철학자는 칸트이다. 우리가 인식한 세계가 세계를 인식하는 우리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렇게 존재와 인식이 상호 침투하여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칸트는 그 둘 간의 공통의 형식을 들어 논한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은 직관과 사유, 감성과 지성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세계를 보는 직관형식(감성의 형식)은 시간과 공간이고, 우리가 세계를 사유하는 사유형식(지성의 형식)은 범주 내지 원칙이다.11) 그런데 이 형식은 우리의 인식형식이면서 동시에 그 인식의 틀에 따라 인식되는 대상세계의 존재형식이기도 하다.
경험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동시에 그 경험의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12)
인식의 형식이 곧 인식대상의 형식이고, 경험의 조건이 곧 경험대상의 조건이다. 우리의 대상세계가 바로 우리의 인식형식 내지 경험조건에 의해 형성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식과 존재(인식대상)의 일치의 근거를 칸트는 인식자의 의식에서 발견하며, 이러한 근거를 ‘초월적 의식’ 또는 ‘초월적 통각(Transzendentale Apperzeption)’이라고 부른다.
10) 원측, 『해심밀경소』?, 』?, 권6 分別瑜伽品 (? 『한국불교전서』?, 』?, 권1, 307중), “然則彼影, 心所變故, 還不離心, 是故說言, 還見自心, 非謂見分還見見分, 故言自見.”
11) 직관형식과 사유형식 그리고 그 둘을 종합한 도식과 원칙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생략한다. 졸저 『칸트철학에의 초대』? (서광사, 2008)과 졸고 「경험세계의 가상성: 세친과 칸트의 비교」(칸트연구, 23집, 2009)에서 이미 상세히 논한 바 있다.
12) 칸트,? 『순수이성비판』?, 』?, B197.
우리는 직관에서의 다양함의 종합 및 [사유에서의] 객관에 대한 개념의 종합에서, 따라서 일체 경험된 대상의 종합에서 의식의 통일이라는 초월적 근거를 만나게 된다. ⋯ 이 근원적인 초월적 조건이 바로 초월적 통각이다.13)
이 초월적 통각의 근거 위에서 칸트는 인식된 세계가 인식자 너머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는 대상세계 안에서 바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을 논한다. 즉 우리가 세계에서 세계의 존재원리로 발견하는 수학적∙ 자연과학적 진리는 바로 우리 자신이 세계에 집어넣은 것, 즉 우리 자신의 직관형식과 사유형식의 원리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상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보편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칸트는 주장한다.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세계와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얻어내는 경험적 진리일 뿐이라면, 우리는 귀납추리의 한계로 인해 결코 보편타당한 인식을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수학적 진리와 자연과학의 기본원리는 그 인식의 근원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 선험적 진리이기에 경험적 인식과 달리 보편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 안에 집어넣은 것을 우리가 세계 안에서 다시 발견하기에, 그 앎은 보편타당성을 가진다. 그 인식의 근원이 인식주관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인식객관인 대상세계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식된 세계는 인식하는 마음을 떠난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세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즉 마음은 세계를 형성하며 그렇게 형성된 세계 안에서 다시 자기 자신을 본다. 이처럼 우리에 의해 인식된 세계는 우리 마음 바깥의 객관 실재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형식에 따라 형성된 세계이며, 칸트는 이런 세계를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계’라는 의미에서 ‘현상(Erscheinung)’이라고 부른다. 현상세계는 마음이 만든 세계이고 마음은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므로, 따라서 마음은 마음을 본다고 말할 수 있다.
현상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관이 감각기능을 갖는 한에서 그 주관과 관계해서만 존재한다.14)
13) 칸트,? 『순수이성비판』?, 』?, A106. 시공간이 직관의 다양을 종합하는 형식이고 범주가 사유의 개념을 종합하는 형식인데, 일체 경험대상이 바로 그러한 형식을 따라 종합되므로, 인식형식이 곧 존재형식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일체 종합의 근거가 바로 의식의 통일성, 초월적 통각인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초월적 통각’을 시간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내감으로서의 ‘경험적 통각’과 구분한다.
14) 칸트, 『순수이성비판』?, 』?, B164.
이상 원측과 칸트에서 마음이 마음을 본다는 것이 일차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았다. 마음이 세계를 보는데, 그 세계가 마음이 그린 세계로서 마음과 다르지 않기에, 마음이 마음을 본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마음이 세계를 보되 결국 마음을 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세계가 마음 바깥의 객관 실유(實有)가 아니라 마음의 전변활동에 따라 형성된 가유(假有) 내지 현상이며, 마음은 그렇게 세계를 형성하는 주객 포괄적 마음 내지 우주적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계를 영상 내지 현상으로 포괄하는 마음을 유식은 ‘아뢰야식’이라고 부르고, 칸트는 ‘초월적 통각’ 내지 ‘초월적 자아’라고 부른다. 아뢰야식 내지 초월적 자아가 현상세계를 형성하기에, 그렇게 형성된 세계가 마음을 떠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보되 결국 마음을 보는 것이다. 다만 마음은 마음을 보되 마음이 그린 영상, 마음의 그림자만을 본다.
3. 마음은 마음을 알 수 있는가?
마음은 세계 안에서 자신을 보되 단지 자신의 그림자만 볼 뿐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자신의 그림자 대신 마음 자체를 보는 것도 가능한가? 마음은 자신이 그린 세계를 보는 대신 그렇게 세계를 보는 마음 자체를 볼 수 있는가? 세계를 보는 눈이 눈 자체를 볼 수 있는가? 마음에 의해 그려진 세계만 볼 뿐 세계를 보는 눈 자체를 보지 못한다면, 이는 꿈꾸면서 꿈의 세계만 볼 뿐 꿈꾸는 자기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 자각이 없는 동안 꿈은 계속 될 것이며, 만약 나를 꿈 속 나가 아니라 꿈꾸는 나로 자각한다면 그때 비로소 나는 꿈에서 깨어날 것이다. 결국 세계를 보는 눈이 눈 자신을 볼 수 있는가의 물음은 우리가 인생의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가, 우리가 존재의 실상을 여실하게 알 수 있는가를 묻는 물음이다. 마음이 자신에 의해 그려진 세계를 보는 대신 마음 자체를 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1) 칸트: 자기인식의 불가능성
마음이 마음을 보는 방법으로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반성(反省)이다. 마음이 바깥으로 향해 세계를 보다가 그 시선의 방향을 안으로 되돌려서 방금 전 세계를 보던 그 마음을 대상화해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세계 대신 마음이 마음의 대상(소연/
상분)으로 주어지며, 마음은 그렇게 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대개 이와 같은 반성의 방식으로 알아본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해 마음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여진 마음은 이미 보는 마음 그 자체가 아니라, 반성을 통해 대상화된 마음, 대상으로 변현된 마음, 영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이렇게 포착된 마음은 마음 자체(초월적 자아)가 아니라 현상화된 마음(경험적 자아)일 뿐이라고 말한다. 외부 세계처럼 공간형식을 따라 대상화된 외적 현상은 아니지만, 시간형식을 따라 내적으로 직관된 내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마음 자체에 의해 내적으로 변현된 내적 영상, 마음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반성과 같이 마음을 대상화하지 않고 마음을 그 자체로 직접 인식하는 길은 없는가? 칸트는 이 물음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한다. 칸트에 따르면 초월적 자아는 선험적 형식에 따라 현상세계를 구성하며 그렇게 구성된 현상세계에 대해 직관과 사유를 통해 다양한 경험적 인식뿐 아니라 보편타당한 선험적 인식까지도 얻어낼 수 있지만, 그렇게 세계를 형성하고 인식하는 초월적 자아 자체에 대해서는 인식할 수가 없다.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태를 직접 바라보는 직관과 그에 대한 개념적 사유가 요구되는데, 초월적 자아에 대해서는 사유할 수는 있지만 직접 직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다섯 감각기관을 통한 감성적 직관 이외에 비감성적 직관, 지적 직관이 없기 때문이다.15)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인식도 갖지 못하고, 단지 나에게 나타나는 대로의 나[현상으로서의 나]에 대한 인식만을 가질 뿐이다. ⋯ 지적 직관의 방식으로라면 알 수 있었을 그런 나 자신[초월적 자아]을 [나는] 인식할 수 없다.16)
이처럼 칸트는 자아는 세계를 보되 그렇게 세계를 보는 자아 자체를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자아에 의해 보여진 세계에 대해서는 인식과 존재를 화해시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보면서, 그렇게 인식하는 인간 자신에 관한 한 다시 인식과 존재를 분리시켜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되 인간 자체를 알지는 못한다고 본 것이다.
15) 이런 이유에서 칸트는 궁극적 주체, 자아 자체에 대한 서양 전통형이상학의 논변을 모두 오류추리라고 비판한다. 현상세계의 인식을 위한 개념이나 원리들을 현상 너머의 것에 적용하였다는 점에서 범주적용의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 변증론 중 론 중 오류추리론 참조.
16) 칸트, 『순수이성비판』?, 』?, B158-159.
2) 원측: 마음의 자기증득 가능성
반면 불교는 마음이 마음을 직접 알 수 있다고 본다. 마음이 마음을 직접 직관하는 길을 ? 해심밀경?은 경?은 지(止)와 관(觀),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구분을 통해 설명한다. 원측은 ? 해심밀경소? 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서로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논한다.
[위빠사나와 사마타가] 다름이 있지 않은 것은 비록 사마타가 위빠사나의 소연인 문(聞)과 사(思)의 상분의 경계를 반연하지는 않지만, 그 문과 사 두 지혜의 소연경 상의 견분의 마음을 반연하기 때문이다.17)
위빠사나에서는 마음이 주∙ 객, 견∙ 상으로 나뉘어 견분이 상분을 바라본다. 예를 들어 문혜와 사혜의 내용을 경계로 삼아 깊이 사유하면, 즉 심사(尋伺)하면, 그렇게 경계를 보는 마음은 견분이고 보여진 경계는 상분이다. 위빠사나는 마음에 주어지는 내용(상분)을 세밀히 주시하는 마음 활동(견분)이다. 반면 사마타에서는 그렇게 마음에 주어지는 내용(상분)을 주시하지 않고, 오히려 상분을 보는 견분의 마음 자체를 본다. 그런데 견분의 마음을 보되 만약 앞서 보던 마음(견분)을 다시 대상화해서 바라본다면, 이는 곧 다시 견분을 상분화하여 대상으로 보는 것이 되므로 바른 사마타가 아니라 위빠사나의 연속으로서 반성에 그치고 말 것이다. 사마타는 마음을 대상화하지 않은 채 마음 자체를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대상화함이 없이 어떻게 자신을 볼 수 있는가?
마음을 대상화 내지 이원화하지 않고 마음 자체를 보는 길은 마음에 대상을 두지 않고 마음을 비우면서도 마음으로 깨어있는 방법뿐이다. 대상인식에서처럼 세계를 대상으로 취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반성에서처럼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취하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성성하게 깨어있는 것이다. 그때 대상을 여읜 빈마음은 그 한 찰나에 마음 자체를 보게 된다.
17) 원측, 『해심밀경소』?, 』?, 권6 分別瑜伽品 (『한국불교전서』?, 』?, 권1, 304하), “非有異者, 以奢摩他, 雖不能緣, 毗鉢舍那, 所緣聞思, 相分之境, 而能緣彼聞思, 二慧所緣境上, 見分之心.” 불교는 처음부터 수행을 통해 얻는 지혜(수혜)를 교리적 가르침을 들어서 아는 지혜(문혜)와 생각해서 아는 지혜(사혜)와 구분하였다. 문혜와 사혜가 이성적 차원에서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면, 수혜는 그렇게 개념적으로 이해한 것을 몸소 터득하는 깨달음, 마음이 지혜에 계합하는 증득이다.
사마타는 마음을 산란하지 않게 하기 때문에 오직 마음을 반연한다.18)
대상을 좇아 산란하지 않되 마음으로 깨어있으면, 한마디로 적적하되 성성하면, 마음은 스스로를 대상화함이 없이, 주객분별 없이 자신을 알게 된다. 사마타를 통해 얻게 되는 이러한 마음의 지혜를 ‘무분별지혜’라고 한다. 이 무분별지혜를 원측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지혜에는 견분은 있고 상분은 없다. 취할 상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상분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견분은 있지만 무분별이므로 능취(주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지 취[마음의 활동]가 아주 없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상분은 없지만 이것[지혜]이 진여(眞如)의 모습을 띠고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진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증분(自證分)이 견분을 반연할 때 변화시키지 않고서 반연하는 것처럼, 이것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 변화시켜서 반연한다면 직접 증득하는 것이 아니다.19)
사마타에서는 마음을 비워 마음을 보므로 마음 안에 따로 대상(상분)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견분은 있고 상분은 없다’고 말한다. 마음활동인 견분을 다시 대상(상분)화하여 바라보면 마음을 변화시켜 반연하는 것이기에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를 ‘깨달아 안다’는 의미의 ‘증득’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반면 사마타에서처럼 마음을 대상화하여 변화시키지 않고 무분별 상태로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반연하면, 그것이 곧 ‘마음의 증득’이다. 이때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은 견분으로서 상분을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 자체인 자증분으로서 견분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증분이 견분을 반연할 때 변화시키지 않고 반연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마타의 방식으로 증득된 마음, 주객분별, 견상분별을 넘어 무분별 지혜로써 알려진 마음이 바로 ‘진여(眞如)’이다. 세계를 형성하고 세계를 보는 마음인 아뢰야식 내지 초월적 자아의 핵심이 곧 진여인 것이다. 진여는 이원화되는 영역, 일체의 상대적 경계를 넘어선 마음 바탕을 뜻한다. 진여는 의식내용으로 개념화되거나 대상화되지 않으며 생성소멸을 넘어선 것이다. 현상세계로 전변하는 마음의 바탕이 곧 진여이다.
18) 원측, 『해심밀경소』?, 』?, 권6 分別瑜伽品 (『한국불교전서』?, 』?, 권1, 308중), “奢摩他, 令心不散, 故唯緣心.”
19) 원측, 『해심밀경소』?, 』?, 권6 分別瑜伽品 (『한국불교전서』, 권1, 300하 이하), “此智見有相無. 說無相取, 不取相故. 雖有見分, 而無分別, 說非能取, 非取全無. 雖無相分, 而可說此帶如相起, 不離如故. 如自證分, 緣見分時, 不變而緣, 此亦應爾. 變而緣者, 便非親證.”
이처럼 원측은 우리에게 견상으로 분열되어 상분을 연하는 견분으로서의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견상을 포괄하는 자증분(自證分)으로서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논한다. 즉 마음은 의식보다 더 심층에서 세계를 형성하는 자로서 활동하는데, 그 마음은 그저 에너지나 기(氣)로서 무자각적으로 활동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마음이기에 자신의 활동성을 스스로 자각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증득할 수 있기에, 그렇게 스스로 증득하는 마음을 ‘자증분’이라고 한다.20) 마음은 사마타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득한다.
마음의 증득은 마음의 반성과 어떻게 다른가?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을 마음a가 마음A를 보는 것이라고 구분해보자. 보고자 하는 마음a는 수행의 출발점으로서 우리의 표층의식, 제6의식, 경험적 의식이고, 도달하고자 하는 마음A는 수행의 목적지로서 심층마음, 진여심, 초월적 의식이다. 반성은 마음a가 표층의 제6의식 차원에 머무르면서 마음A를 대상화해서 고찰하는 것이다. 그렇게 대상화하여 반성의 방식으로 고찰하면, 마음A는 그 자체가 여실하게 알려지지 않고, 대상화되고 현상화된 측면, 즉 마음a의 작용에 의해 변형된 측면만 밝혀지게 된다. 반면 증득은 마음a가 표층의식의 자리를 떠나 심층의 마음A의 자리로 나아가 마음A가 됨으로써 마음A를 알게 되는 것이다. 마음a가 마음A를 대상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마음A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마음a가 마음A의 자리로 나아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을 ‘계합(契合)’이라고 한다. 마음a는 자신의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가 마음A와 계합함으로써, 한마음이 됨으로써 마음A를, 즉 자기 자신을 여실하게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마음이 마음 자체를 본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의식인 마음a가 자기 자신을 표층적인 제6의식으로 알지 않고, 자신을 심층의 마음A로, 식 자증분으로, 진여로 자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마타로써 자신 안의 마음인 진여를 증득하게 된다. 그렇게 세계를 보는 눈을 보고, 세계를 아는 마음을 증득함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보여진 세계 속에서 찾지 않게 된다. 보여진 세계 전체가 마음이 그린 영상이고 마음이 만든 현상이라는 것을 알아, 인생의 꿈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존재의 실상을 여실하게 알게 된다고 말한다.
20) 이 자증분이 견상을 포괄하면서 마음을 스스로 자각하므로 또 다른 증자증분을 둘 필요가 없어, 원측은 호법의 4분설을 따르지 않는다. 원측은 마음이 세계를 보는 것은 견분과 상분 2분설로 설명하고, 마음이 마음 자체를 자각하는 것은 자증분 1분설로 설명한다.
4. 깨달음의 의미
세계를 보는 마음을 보기 위해, 세계를 아는 나 자신의 본래면목을 깨닫기 위해, 불교에서는 수행을 한다. 마음의 대상을 비우고 빈마음이 되어 대상 아닌 마음 자체를 직접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반성적 사유를 통해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가 직접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타의 방식으로 마음을 증득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눈을 표층 의식에 두지 않고 심층 마음으로 가져가 그 심층에서 눈뜬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별적인 표층의식이 아니라, 주와 객, 나와 세계가 분별되기 이전 마음 심층에서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다. 이것을 마음의 증득, 무분별지혜의 증득, 진여의 증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와 같이 마음 심층에서 눈 떠 나의 본래 면목인 진여심을 깨닫는 순간, 나는 그러한 마음의 자기자각성이 본래 처음부터 내 안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마음은 언제나 이미 마음 자체를 알고 있다. 우리에게는 이미 본각(本覺)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마음의 본래적 자기자각성을 원효는 ‘성자신해(性自神解)’라고 하고, 지눌은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심층의 진여에는 주와 객, 나와 세계의 분별이 없기에, 일체 중생이 모두 이미 마음A로 활동하며 살고 있다는 것, 모두가 이미 하나의 마음으로 서로 소통하여 하나의 기세간을 형성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표층적인 의식의 소통 이전에 우리가 이미 마음 심층에서 하나로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석가성불시 산천초목 동시성불’이며, ‘중생이 곧 부처’인 것이다. 누구나 심층 마음은 진여심이며 그 진여심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면서, 다만 그 의식이 표층에 매여 있기에 자신의 진여성, 불성을 자각하지 못할 뿐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본래적 자기자각성을 영가 현각은 다음과 같이 논한다.
‘고요함을 아는 지’가 아니고 ‘자신을 아는 지’가 아니라고 해서 무지라고 할 수 없다. 스스로 성이 밝아서 목석과 다르기 때문이다. 손이 여의봉을 잡지 않거나 스스로 주먹을 쥐지 않는다고 해서 손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손의 편안함이 토끼뿔과 다르기 때문이다.21)
21) 영가 현각, 『선종영가집』?, 』?, 권4 奢摩他頌 (『대정신수대장경』?, 』?, 권48, 389하), “亦不知知寂, 亦不自知知, 不可爲無知. 自性了然故, 不同於木石. 手不執如意, 亦不自作拳, 不可爲無手. 以手安然故, 不同於兎角.”
고요함이나 여의봉은 마음에 주어지는 외적 대상이고, 자신이나 주먹은 마음이 스스로를 대상화한 내적 대상이다. 그러한 외적 또는 내적 대상이 없어도 마음은 언제나 마음으로 깨어있기에 ‘목석과 다르다’고 하며, 그러한 자기자각성의 마음, 본각의 마음이 없지 않고 있기에 ‘토끼뿔과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말하는 ‘안불자견’은 눈이 눈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눈이 이미 자신을 알고 있으니 다시 보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다. 아는 능력으로서의 눈은 눈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알려고 대상화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라는 것이다.
본성의 자각은 반드시 밝은데, 허망하게 자각을 밝히려고 한다.22)
마음이 이미 자신을 밝게 알고 있는데, 이를 다시 밝히려고 대상화해서 바라봄으로써 결국 주와 객으로 나누어 분별하게 되는 것이 문제이다. 마음을 밝히고자 대상화해서 고찰하면, 대상화하는 마음a에 의해 마음A가 오히려 환으로 변형되어 알려지게 된다. 유식은 우리의 일상의식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심층 마음의 활동을 대상화하여 왜곡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유근신과 기세간이 아뢰야식의 상분이고, 그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뢰야식의 견분이다. 아뢰야식의 견분은 세계 전체를 보는 눈이다. 그런데 우리의 말나식이 이 아뢰야식의 견분을 대상화하여 취하면서 그것을 아와 아소, 나와 나 아닌 것, 자아와 세계로 분별하여 집착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번뇌의 제7[말나]식은 제8아뢰야식의 견분을 연하여 아와 법으로 집착한다.23)
이와 같이 아뢰야식의 견분을 취해 아와 아소로, 아와 법으로 집착하는 말나식의 작용에 의해 우리 안에 아집과 법집이 생겨나게 된다. 우리의 일상적인 표층의식인 제6의식은 바로 이와 같은 말나식의 집착 위에서 작용하는 식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마음 심층에 진여가 있고 본각이 있어도, 자신을 그 마음A로 알지 못하고 표층적인 분별적 마음a로만 안다. 수행을 통해 마음A와 계합하기 전에는 아뢰야식에 대해
22) 반라밀제 역, 『수능엄경』?, 』?, 권4 見道分 (『대정신수대장경』?, 』?, 권19, 120상), “性覺必明, 妄爲明覺.”
23) 원측, 『해심밀경소』?, 』?, 권3 心意識相品, (『한국불교전서』?, 』?, 권1, 219상), “有漏第七, 唯緣第八, 賴耶見分, 執爲我法.”
들어도 마음a의 입장에서 마음A를 대상화해서 자아로 집착하게 된다. 그러므로 ? 해심밀경? 에서는 아뢰야식을 발견하여 ‘유식’을 설하면서도 그 아뢰야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한다.
아타나식[아뢰야식]은 심히 깊고 미세하며, 일체 종자가 폭류와 같다. 나는 범부와 어리석은 자에게 열어 설하지 않으니, 그들이 그것을 분별하여 자아라고 집착할까봐 두렵다.24)
아뢰야식의 견분을 대상화해서 취하면, 그것이 환 아닌 것을 환으로 만드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을 아는 것, 눈이 눈을 보는 것은 계합의 방식이어야지, 대상화 또는 개념화의 방식 내지는 반성의 방식인 한, 보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보지 못하게 되는 자기모순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은 눈을 다시 보려하기 전에 자신이 이미 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라고, 마음을 알려고 하기 전에 그 마음이 되어 하나로 계합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대상적 분별지를 변화시켜 무분별지혜를 증득하는 ‘전식득지(轉識得智)’가 뜻하는 바이다.
5. 마치는 말
칸트가 ‘눈은 눈을 볼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반성의 방식으로는 마음 자체를 알 수 없고, 반성이 아닌 지적 직관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면 원측은 반성의 방식이 아닌 수행을 통한 계합의 방식으로 눈이 눈을 볼 수 있다는 것, 마음이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논한다. 마음 자체가 자기 증득의 ‘자증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인식하는 세계에 관한 한, 원측이나 칸트는 둘 다 인식과 존재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통찰하였다. 세계는 마음에 의해 인식된 세계로서만 존재하기에, 마음은 세계 안에서 마음 자신을 본다. 그렇지만 그렇게 세계를 보는 마음 자체에 관한 한, 칸트는 마음은 마음으로 존재하되 마음 자체를 알 수 없다고 보았고, 원측은 마음을 자기 자각적 존재라고 보았다.
칸트는 왜 마음은 마음 자체를 알 수 없다고 보았을까? 우리는 여기에서 인식과
24) 미륵 저, 현장 역, 『해심밀경』?, 』?, 권3 심의식상품, (『대정신수대장경』, 권30, 692하; 『한국불교전서』?, 』?, 권1, 231중), “阿陀那識甚深細, 一切種子如暴流. 我於凡愚不開演, 恐彼分別執爲我.”
존재의 완전한 일치는 오직 신(神)에게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서양사유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인간을 안다는 것은 다른 말이다. 내가 인형을 만들면, 나는 인형을 알지만 인형은 자기 자신을 모른다. 그렇듯 신이 인간을 만들었기에 인간을 아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나는 내가 만든 것만을 알 수 있을 뿐, 나를 아는 자는 내가 아니라 나를 만든 신이다.25)
반면 불교는 모든 생명체를 그 바깥에서부터 만들어진 자로 이해하지 않고 그 자체 안에 생명의 근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생명의 근원은 일체 생명체 안의 불생불멸의 진여 자체이다. 진여는 모든 생명체 내면의 진여심이고 우주심이며 마음A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안다. 각각의 생명체가 표층의식에서만 눈뜨지 않고, 심층 진여의 차원에서 눈뜬다면 본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는 진여를 증득하게 된다. 이처럼 불교는 자신 안의 진여의 증득, 마음의 자기 증득을 지향한다. 부처 내지 각자(覺者)의 일체지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이든 선이든, 원측이든 지눌이든, 불교에서 ‘안불자견’을 말할 때는 눈이 눈 자신을 알 수 없다거나 인간이 인간 자신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교는 처음부터 인식 주체로서의 인간 자신에 대한 절대적 앎, 궁극의 깨달음을 지향하였으며, 대승은 그 궁극의 깨달음이 이미 우리 일반 중생 안에 실현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눈은 그 자체가 봄(앎)이며, 마음은 이미 자기 자신을 알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세계를 아는 눈이 눈 자신을 모른다면, 우리는 결코 인생의 꿈에서 깨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일체를 여실하게 알자면, 마음은 세계를 알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알아야 한다. 다른 것을 밝게 비추는 빛은 그 자신이 가장 밝은 법이다. 마음이 이미 마음 자신을 알고 있기에 그 마음이 세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25) 그러나 인식되지 않는 것이라면 결국 그것의 존재주장도 무의미해진다. 초월적 자아는 인식할 수 없다는 그의 결론에 따라 칸트 이후 철학자들은 칸트가 논한 초월적 자아를 단지 논리적 근거에서 설정한 ‘논리적 주어’ 또는 ‘형식적 주어’라고 단정해버린다. 초월적 자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유의 정합성을 위한 논리적 요청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출처; 불교문화연구원 佛紀2556년(2012년)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2821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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