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과 수행

초기불교 제5장. 있음에 대한 분석

수선님 2020. 2. 23. 13:01

제5장. 있음에 대한 분석

    

오온의 이해(70)

오온(五蘊, pañcakkhandhā)이란 무엇인가. 현상계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를 일컫는 말이다. 물질현상(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현상계란 ‘나’에 의해 경험되는 세계를 가리킨다. 곧 ‘나’에게 비추어지고 ‘나’에 의해 이해된 세계를 말한다. 이와 같이 오온이란 ‘나’에게 포착된 경험적 요인들을 다섯 갈래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오온으로 구성된 세계란 ‘나’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오온의 가르침은 다름 아닌 ‘나’ 자신에 관한 것이며 ‘나’ 자신에 대한 분석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즉 “하늘 위에 하늘 아래 오로지 나 홀로 존귀하다.”는 구절이 있다. 얼핏 ‘나’만을 내세우도록 조장하는 가르침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자. 사실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혼자만의 존재이다. ‘나’ 자신과 더불어 ‘내’가 처한 모든 환경은 ‘나’ 대로의 경험과 이해가 빚어낸 결과이다. 설령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계신다고 하더라도 그분들을 떠올리는 ‘내’가 우선 존재해야만 한다. 결코 그분들이 ‘나’일 수 없으며, 세상의 여느 존재와도 다른 ‘내’가 지금 이렇게 있을 뿐이다.

‘나’란 존재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밀폐된 공간에 비유할 수 있다. ‘나’에 대한 관념이 강해질수록 폐쇄된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질식의 공포는 더해 간다. 그런데 ‘내’가 존재하는 한 밖으로 빠져 나갈 여지는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더욱이 밀폐된 공간 너머의 또 다른 ‘나’를 상정할 수도 없다. 그렇게 된다면 그때의 ‘나’는 이미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라는 생각은 이러한 폐쇄공포증으로 야기된 정신착란의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를 가정하더라도 현재 경험하는 이 모든 것이 밀폐된 공간 속 혼자만의 이야기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오온설은 ‘나’라는 밀폐된 현실을 자각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모은다. 대부분의 중생들은 오온이라는 장막에 갇힌 채 살아간다. 그럼에도 그러한 사실마저 망각한다. 심지어는 그들이 빚어내는 ‘나’라는 허상에 붙들려 안달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양상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물질현상을 자아라고 관찰한다. 혹은 자아가 물질현상을 소유한다고, 혹은 자아가 물질현상이라고, 혹은 물질현상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한다.… 느낌․지각․지음․의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SN. III. 102).” 오온설의 취지는 이러한 ‘나’라는 견해의 장막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데 있다.

오온을 자아로 착각하는 경우를 ‘현재의 몸에 매인 견해(有身見, sakkāyadiṭṭhi)’라고도 한다. 현재의 몸에 매인 견해는 물질현상이라든가 느낌이라든가 충동․생각․이미지 따위와 하나가 되도록 만든다. 스스로를 ‘나’라는 신화(神話) 속에 가두어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봉쇄한다. 이러한 상태의 오온에 대해서는 ‘5가지 집착된 경험요소’ 즉 오취온(五取蘊)이라고 달리 일컫는다. 붓다는 오온 각각에 대해 질병과 같은 것으로, 종기와 같은 것으로, 죄악으로 보라고 이른다(MN. I. 435). 그리하여 오취온의 상태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한다. 지금 이 순간 이처럼 자명하게 포착되고 있는 ‘나’마저 오취온의 뒤엉킴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물질현상(色)(71)

물질현상(色, rūpa)이란 무엇인가. 오온(五蘊)의 첫 번째 항목으로서 느낌이나 지각 따위의 정신현상과 대조를 이루는 물질적 경험내용을 가리킨다. 자신의 몸을 비롯하여 외부적으로 보거나 듣는 감각적 대상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것에 대해 경전에서는 땅의 요소(地大), 물의 요소(水大), 불의 요소(火大), 바람의 요소(風大)라는 4가지 요소(四大)와 이들 4가지로부터 파생된 물질현상(四大所造色)으로 설명한다(MN. I. 185). 이들은 ‘나’의 육체를 비롯하여 외부의 물질적 환경까지를 망라한다고 할 수 있다.

물질현상은 ‘나’의 경험을 통해 드러난다. 땅의 요소는 뻣뻣하거나 부드러운 것으로, 물의 요소는 흐르거나 적시는 것으로, 불의 요소는 뜨겁거나 차가운 것으로, 바람의 요소는 호흡 따위의 움직임으로 경험된다(MN. I. 185-188). 이들이 경험되는 양상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맞닥뜨린다(ruppati).’라는 이유로 물질현상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맞닥뜨리는가. 차가움과도 맞닥뜨리고, 뜨거움과도 맞닥뜨리고, 배고픔과도 맞닥뜨리고, 목마름과도 맞닥뜨린다. 파리․모기․바람․파충류 따위와의 접촉에도 맞닥뜨린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맞닥뜨린다는 이유로 물질현상이라고 부른다(SN. III. 86).”

물질현상은 자명하게 포착되는 특성을 지닌다. 몸으로 경험되는 차가움이라든가 뜨거움 따위는 무엇보다도 직접적이다. 혹자는 이러저러한 물질현상을 두고 “과연 누가 이들을 만들었을까.” 혹은 “이들은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있을까.” 따위의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물질현상은 그러한 의문에 앞서 존재한다. 이점에서 그때그때의 물질현상이 먼저이고 그것의 원인이라든가 배경에 대한 반추는 나중의 일이다. 오온으로서의 물질현상은 관념적인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눈․귀․코 따위에 의해 포착되는 현재의 것이든 마음으로 경험하는 과거와 미래의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물질현상은 순간순간 몸과 마음을 통해 경험되는 대상으로 존재한다.

오온의 물질현상이란 있는 그대로(yathabhūtaṁ)의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자연과학적 사물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어젯밤에 마셨던 시원하고 달콤했던 음료가 아침에 깨어나서 살펴보니 해골에 담긴 빗물이었다고 치자.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시원함도 달콤함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물질현상은 경험하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 ‘나’ 자신이 처해 있는 그때그때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경전에서는 물질현상에 대해 갠지스의 물거품과 같이 공허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가르친다(SN. III. 140).

붓다는 물질현상을 무상(無常)으로, 괴로움(苦)으로, 무아(無我)로 관찰하라고 이른다(SN. III. 21). 무상이란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것은 외계의 자연과학적 변화를 가리키지 않는다. 무상의 진리는 물질현상을 통해 드러나는 ‘나’ 자신에 관한 가르침이다. 다시 말해서 ‘나’에 의해 포착되는 물질현상의 덧없음과 허망함을 일깨운다고 할 수 있다. 괴로움이라든가 무아의 진리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 들어가야 한다. 괴로움이란 그러한 물질현상에 대해 품게 되는 정서적 반응을 가리키며, 무아 또한 바로 그것의 허구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물질현상은 ‘나’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나’의 바람이나 의도대로 따라와 주질 않는다. 예컨대 물질현상으로 이루어진 ‘나’의 육신은 ‘내’가 원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며, 또한 ‘나’의 바람이나 의지에 따라 늙거나 병드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육신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그것이 야기하는 괴로움에 빠진다. “‘물질현상이 바로 나다.’라는 [견해에] 사로잡힌 자에게 물질현상은 변화하여 다른 것으로 바뀐다. 물질현상이 변화하여 다른 존재로 바뀌는 까닭에 근심․슬픔․괴로움․불쾌․절망이 일어난다(SN. III. 3).”

오온의 물질현상이란 객관적인 실재가 아니다. 이것은 계량화된 수치로 측량하거나 계산하기 곤란하다. 뻣뻣함이라든가 뜨거움 따위의 방식으로 포착되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경험을 통해 존재할 뿐이다. 이와 같이 물질현상은 ‘나’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포착되며 있는 그대로의 실재와는 무관하다. 이것에 대한 집착과 갈망은 사막의 신기루를 쫒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붓다는 물질현상에 대한 욕구(欲貪, chandarāga)를 내려놓으라고 이른다. 그리하면 그것은 뿌리가 잘린 야자수처럼 다시는 자라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SN. III. 27).

느낌(受)(72)

느낌(受, vedanā)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의 느낌은 오온의 두 번째 항목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각(想)이나 지음(行) 따위와 더불어 정신현상에 속한 경험의 갈래를 일컫는다. 감각적 접촉(觸)을 통해 발생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정 따위가 곧 그것이다. “느껴지는 것을 느낌이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느껴지는가. 즐거움도 느껴지고 괴로움도 느껴지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도 느껴진다. 이와 같이 느껴지는 것을 느낌이라고 한다(MN. I 293).”

느낌은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된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라는 3가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대념처경』에서는 이러한 3가지에 대해 육체적인 것(sāmisa)과 정신적인 것(nirāmisa)에 의한 2가지 분류방식을 추가한다. 그리하여 즐거운 느낌,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이라는 방식으로 도합 9가지 느낌을 나열한다(DN. II. 298). 한편 오온의 가르침과 관련된 경전에서는 눈․귀․코․혀․몸․마음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이라는 6가지 분류법을 더욱 선호한다(SN. III. 60).

이러한 6가지 분류는 보거나 듣는 일체의 과정이 느낌의 발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앞서의 9가지 분류는 정신적 수준에 따라 느낌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붓다는 이들 외에도 5가지, 18가지, 36가지, 108가지 방식으로 느낌을 분류하기도 한다(SN. IV. 231-232). 이러한 다양한 분류는 삶의 모든 국면이 특정한 느낌의 발생과 연관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갖가지 느낌에 노출된 개개인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즐거운 느낌은 추구하고 괴로운 느낌은 배척하기 위해 애쓴다. 어쩌면 삶의 전 과정이 이것의 연장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따라서 모든 법은 결국 느낌으로 통한다고 언급되기도 한다(AN. IV. 339).

오온의 느낌이란 인간의 실존을 이루는 주된 요인으로 기능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강제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좋은 소리를 듣거나 맛있는 것을 먹거나 부드러운 감촉을 경험할 때 발생하는 즐거운 느낌은 집착의 대상이 되어 ‘나’를 유혹한다. 한편 추한 것을 보거나 불쾌한 소리를 듣거나 입에 맞지 않은 것을 먹거나 부드럽지 못한 감촉을 경험할 때 발생하는 괴로운 느낌은 분노의 상태로 ‘나’를 몰아간다. 이와 같이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를 수취온(受取蘊) 즉 ‘집착된 느낌의 경험요소’로 일컫는다.

느낌에 집착하면 느낌과 하나가 되고 만다. 이러한 사례는 동물의 삶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동물들은 본능적인 느낌과 하나 된 상태로 살아간다. 이러한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느낌에 매이지 않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인간만이 옳음을 위해 배고픔이라는 괴로운 느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지난 역사를 통해 두각을 나타냈던 수많은 위인들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목격된다. 여러 철학자들이 이점에 주목하였고 또한 이러한 능력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느낌이란 한순간에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결코 ‘나’ 자신과 하나일 수 없다. 이러한 느낌을 대처하는 ‘나’의 태도는 곧 ‘나’의 됨됨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느낌에 대해 무상한 것으로 알거나 보는 실천을 닦으면 어리석음(無明, avijjā)이 제거되고 밝은 앎(明, vijjā)이 일어난다고 가르친다(SN. IV. 50). 느낌이란 그 자체로는 유혹거리에 불과하지만 통찰의 대상이 될 때 깨달음을 이끄는 매개로 바뀐다.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게 느껴지는 것에 대해 뛰어난 지혜로써 알고 두루 알게 되면 탐욕이 바래고 버려져 괴로움을 종식시킬 수 있다(SN. IV. 18).”

지각(想)(73)

지각(想, saññā)이란 무엇인가. 오온의 세 번째 항목으로서 느낌(受)이나 지음(行) 따위와 더불어 정신현상에 속한 경험의 갈래를 일컫는다. 감각적 접촉(觸)을 통해 느껴진 대상을 마음에 떠올리는 과정이 곧 그것이다. “지각하는 것을 일컬어 지각이라고 한다. 지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푸른색도 지각하고 노란색도 지각하고 붉은색도 지각하고 하얀색도 지각한다. 이와 같이 지각하는 것을 가리켜 지각이라고 한다(SN. III. 87).”

지각이란 외부로부터 전달된 감각적 내용을 내부적으로 재확인하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퍼뜩 스쳐가는 순간의 대상일지라도 그 특징을 붙잡아 떠올리는 순서를 밟아야만 한다. 이렇듯 인간은 내부적으로 떠올리는 과정을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에게 인식된 모든 것은 마음에 떠올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푸른색을 푸른색으로 노란색을 노란색으로 인식할 수 없다. 동일한 현상에 대해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되는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사물은 지각과 더불어 구체적인 모습과 빛깔로 파악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지각을 통해 드러난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reality)가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감관을 통해 전달된 사물은 접촉(觸)이라든가 느낌(受) 따위의 과정을 거친 연후에 지각의 단계로 넘어간다(MN. I. 111-112).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들은 지각에 앞서 발생하며 지각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지각을 통해 드러난 푸른색 혹은 노란색 따위에는 즐겁거나 괴로운 개인적인 느낌이 이미 투영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지각이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마음(意)으로 포착된 현상을 이미지화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것은 각각의 감관에 대응하여 다음의 여섯으로 나뉜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지각의 무리가 있다. 물질현상에 대한 지각, 소리에 대한 지각, 냄새에 대한 지각, 맛에 대한 지각, 감촉에 대한 지각, 마음현상(法)에 대한 지각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지각이라고 한다(SN. III. 60).” 이들 가운데 앞의 다섯은 현재 발생해 있는 사물과 관계되지만 마지막의 마음현상(法)에 대한 지각은 과거와 미래의 대상까지를 망라한다.

마음현상에 대한 지각이란 마음이라는 내부의 감각기능(意根)을 통해 발생한다. 과거를 기억하거나 미래의 일을 떠올리면서 지각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때에도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들이 추가적으로 개입될 수 있다. 예컨대 과거의 즐겁거나 괴로웠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유쾌하거나 씁쓸한 느낌을 덧씌우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최초의 감각적 지각에서 생겨난 이미지가 마음에 의한 지각의 단계를 걸치면서 채색․변형될 수 있다. 이것이 지나치게 반복되면 현실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주관적 이미지의 장벽에 갇히게 될 수 있다.

지각의 위험성은 편견과 착각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자신의 지각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 이와 관련하여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무더운 여름의 마지막 달 한낮에 신기루가 생기는데 눈을 가진 사람이 이것을 쳐다보고 면밀히 살펴보고 근원적으로 조사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텅 빈 것으로 드러나고 공허한 것으로 드러나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비구들이여, 신기루에 무슨 실체가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어떠한 지각이라 할지라도 바로 이와 같다(SN. III. 141).”

그러나 지각은 긍정적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아직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무상에 대한 지각(無常想), 무아에 대한 지각(無我想), 부정함에 대한 지각(不淨想) 따위를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명상이 그것이다. 이들은 무언가를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혐오하는 상태에 빠져 있을 경우에 사용된다. 집착하거나 혐오하는 바로 그 대상을 떠올린 다음에 그것이 무상하다거나 부정하다는 지각을 일으키는 방법이 그것이다. 특히 이러한 명상은 일상의 괴로움이라든가 병증의 완화를 위한 단기적 처방으로 권장되었다. 실제로 경전에서는 이것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육체적 질병이라든가 괴로움이 제거될 수 있다고 기술한다(AN. V. 109).

이와 같이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지각은 부정적인 상태를 개선하거나 통찰의 힘을 기르기 위한 목적에서 활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지각이란 양날을 지닌 칼에 비유할 수 있다. 이것은 망상(戱論)을 발생시키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잘 활용하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다음의 경문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지각에 대해 뛰어난 지혜로써 알고 두루 알게 되면 탐욕이 바래고 버려져 괴로움을 종식시킬 수 있다(SN. III. 27).”

지음(行)(74)

지음(行, saṅkhāra)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의 지음은 오온의 네 번째 항목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각(想)이나 의식(識) 따위와 더불어 정신현상에 속한 경험의 갈래를 일컫는다. 마음으로 짓는 의도라든가 습관적 경향 따위가 여기에 망라된다. 실제로 이것은 의도(思, sañcetanā)와 동일시되는 용례를 보이기도 한다. “보이는 것에 관련된 의도, 소리에 관련된 의도, 냄새에 관련된 의도, 맛에 관련된 의도, 감촉에 관련된 의도, 마음현상에 관련된 의도가 있다. 이들을 지음이라고 한다(SN. III. 60).”라는 경문이 그것이다.

지음이란 상카라(saṅkhāra)를 번역한 것으로 ‘온전히(saṁ)’ ‘만들다(√kṛ)’라는 의미로 분석된다. 그런데 이것은 초기불교의 개념들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이 개념은 내면의 다양한 의도를 가리키는 동시에 그러한 의도가 바깥으로 체화되어 나타난 경우도 포함한다. 내면적 의도로는 탐냄(貪)이라든가 성냄(嗔) 따위의 부정적 심리를 비롯하여 믿음(信)이라든가 마음지킴(念) 따위의 긍정적 기능들이 망라된다. 한편 그러한 의도가 바깥으로 표출되어 나타난 것이 경험세계이다. “일체의 상카라는 무상이다(諸行無常, sabbe saṅkhārā aniccā).”라고 할 때의 그것은 경험세계 자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DN. II. 198).

경험세계란 ‘나’의 방식으로 경험된 세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가 아니다. 경험세계의 성립에는 ‘나’의 존재가 전제되며, 이렇게 해서 드러난 세계란 결국 ‘내’가 지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표현하는 용어가 곧 지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지음은 경험세계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업(業, kamma) 개념과도 통한다. 그리고 이 경우의 지음은 언어적 지음(語行), 육체적 지음(身行), 마음에 의한 지음(意行)으로 나뉜다(MN. I. 301). 이들은 몸(身)․입(口)․마음(意)라는 3가지 측면에서 경험세계를 조건 짓는 ‘응보적 힘’으로 작용한다.

지음은 경험적 요인들(五蘊) 즉 물질현상(色), 느낌(受), 지각(想) 따위가 생겨나고 유지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비구들이여, 지어낸 것(有爲)을 계속해서 짓는 까닭에 지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지어낸 것을 계속해서 짓는가. 물질현상(色性)으로 지어낸 [결과로서의] 물질현상(色)을 계속해서 짓는다. 느낌(受性)으로 지어낸 [결과로서의] 느낌(受)을 계속해서 짓는다. 지각(想性)으로 지어낸 [결과로서의] 지각(想)을 계속해서 짓는다. 지음(行性)으로 지어낸 [결과로서의] 지음(行)을 계속해서 짓는다. 의식(識性)으로 지어낸 [결과로서의] 의식(識)을 계속해서 짓는다(SN. III. 87).”

오온으로 이루어진 경험세계는 ‘내’가 지어낸 ‘나’만의 이야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는 신화(神話) 속에 빠져 살아가는 주인공이 바로 범부 중생(衆生, satta)이다. 이러한 대부분의 중생들에게 지음은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실질적 요인이 된다. 그러나 결국 ‘나’ 혹은 ‘중생’이란 어디까지나 지음으로 이루어진 조작된 상상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게송은 새겨둘 만하다. “그대는 왜 ‘중생’이라는 상상을 하는가. 마라여, 그대는 그릇된 견해에 빠져 있다. 단지 지음의 더미일 뿐 여기에서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은 찾을 수 없다(SN. I. 135).”

초기불교에서 지음은 가라앉혀야 할 현상으로 간주된다. 그래야만 ‘나’ 혹은 ‘중생’이라는 족쇄를 약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것이 가능할까.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배우지 못한 범부는 물질현상(色)을 ‘나’로 관찰한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바로 그러한 관찰은 지음(行)에 속한다.… 갈애(愛)로부터 그러한 지음이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그러한 지음이란 무상한 것이고 지어낸 것이고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갈애도 또한 무상한 것이고 지어낸 것이고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번뇌는 지체 없이 소멸한다.… (SN. III. 96-97)”

의식(識)(75)

의식(識, viññāṇa)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의 의식은 오온의 다섯 번째 항목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지각(想)이나 지음(行) 따위와 더불어 정신현상에 속한 경험의 갈래를 일컫는다. 곧 어떠한 현상에 대해 ‘인식하는 작용’ 혹은 ‘식별하여 아는 작용’을 가리킨다. “의식하는 것을 일컬어 의식이라고 한다. 의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 것도 의식하고 쓴 것도 의식하고 단 것도 의식하고 떫은 것도 의식하고 떫지 않은 것도 의식하고 짠 것도 의식하고 싱거운 것도 의식한다. 이와 같이 의식하는 것을 가리켜 의식이라고 한다(SN. III. 87).”

의식은 문헌에 따라 다양한 용례를 보인다. 특히 이것은 후대의 불교에 이르러 형이상학적 주체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의식이란 외부의 대상에 대한 인식적 반응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경우의 의식은 감각의 방식에 따라 통상 여섯으로 구분된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의식의 무리가 있다. 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혀의 의식, 몸의 의식, 마음의 의식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의식이라고 한다(SN. III. 64).” 이들은 각각에 상응하는 감각대상들에 대한 정신적 반응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의식은 느낌(受)이라든가 지각(想) 따위가 개입되기 이전의 단순한 감각적 의식에서부터 이들을 거친 연후의 숙성된 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느낌이라든가 지각 따위가 개입되기 이전의 감각적 의식에는 아직 온전한 경험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후에 전개될 구체적 인식의 조건으로 기능할 뿐이다. 예컨대 파란색 물체를 마주했을 때 최초로 발생한 눈의 의식(眼識)은 단지 어떠한 빛깔의 존재를 알아챌 뿐 그것이 파란색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아직 느낌(受)이라든가 지각(想) 혹은 지음(行) 따위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숙성된 의식은 경험내용과 더불어 점점 더 분명해지고 구체화된다. “의식(識)은 물질현상(色)을 수단으로 삼아 분명해지고 확립된다. 물질현상을 대상으로 삼아, 물질현상을 기반으로 삼아, 즐거움의 자리로 삼아, 성장하고 증가하고 풍만해진다. [의식은] 느낌(受)을 수단으로 삼아…, [의식은] 지각(想)을 수단으로 삼아…, 의식은 지음(行)을 수단으로 삼아 분명해지고 확립된다. 지음을 대상으로 삼아, 지음을 기반으로 삼아, 즐거움의 자리로 삼아, 성장하고 증가하고 풍만해진다(DN. III. 228).”

이렇듯 의식은 느낌이라든가 지각 따위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와 같이 숙성의 과정을 거친 의식은 최초의 감각적 의식과 다르다. 이것은 구체적인 경험내용과 함께 다양한 마음현상을 수반한다. 이 경우의 의식은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정신적 주체로 여겨질 수 있다. 혹은 정신적 실체라든가 내면의 영혼과 같은 것으로 오인될 수도 있다. 실제로 초기불교 경전에는 이러한 의식을 두고 윤회의 여정을 통해 거듭 태어나는 영혼과 같은 것으로 잘 못 이해했던 사례가 언급되기도 한다(MN. I. 256).

영혼으로 오인된 의식은 집착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존재하는 ‘나’라는 그릇된 견해를 부추긴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에 집착한 상태 즉 식취온(識取蘊)에 빠져 있는 경우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조건(緣)이 없으면 어떠한 의식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MN. I. 259).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닦을 것을 권한다. “의식을 자아로 관찰하지 않고, 자아가 의식을 소유한다거나, 자아가 의식이라거나, 의식에 자아가 있다거나, ‘나는 의식이다거나, 나의 의식이다.’라고 관찰하지 않는다.… 그러한 이에게는 근심․슬픔․괴로움․불쾌․절망이 일어나지 않는다(SN. III. 5).”

십이처(十二處)(76)

십이처(十二處, dvādasa-āyatanāni)란 무엇인가. 여섯의 내부적 영역(六內處)과 외부적 영역(六外處)을 일컫는다. 구체적으로 눈(眼)과 시각대상(色), 귀(耳)와 소리(聲), 코(鼻)와 냄새(香), 혀(舌)와 맛(味), 몸(身)과 감촉(觸), 마음(意)과 마음현상(法)이라는 감각기능과 감각대상의 영역을 가리킨다. 이들은 통상 6가지 안팎의 영역(六內外處)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보거나 듣거나 상상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12가지 안에 포함된다. 붓다는 십이처를 통해 인간의 앎과 경험이 지니는 한계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경험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십이처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물질현상(色)․느낌(受)․지각(想) 따위의 오온(五蘊)은 ‘나’의 실존을 이루는 경험적 요인들을 다섯의 갈래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반면에 십이처는 그러한 요인들이 과연 어떠한 토대 위에 성립해 있는가를 밝힌다. 오온은 주객이 혼융된 ‘나’의 현실을 가리키는 반면에 십이처는 그러한 현실의 발생 배경을 드러낸다. 즉 오온이라는 경험적 요인들이 여섯 쌍의 감각기능(根)과 감각대상(境)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어떠한 감정이나 믿음 혹은 사고방식을 품게 되더라도 그것은 십이처를 지반으로 쌓아 올린 모래성에 비유할 수 있다.

십이처는 안팎의 영역이 서로 의존해 있는 양상으로 묘사된다. 예컨대 눈과 시각대상, 귀와 소리 등은 서로를 기대어 존재한다. 귀가 없는 소리는 있을 수 없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안팎의 현상들은 서로가 서로를 의존하면서 괴로움의 실존을 만들어낸다. “눈(眼)과 시각대상(色)을 조건으로 눈의 의식(眼識)이 생겨난다. 이 셋의 화합이 접촉(觸)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取)이, 집착을 조건으로 있음(有)이, 있음을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온갖 괴로움의 다발(苦蘊)이 생겨난다. 귀(耳)와 소리(聲)를 조건으로,… 마음(意)과 마음현상(法)을 조건으로[도… 마찬가지이다](SN. IV. 90).”

십이처에서 마지막 6번째 쌍에 해당하는 마음과 마음현상은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여타의 감각기능들은 매 순간 자신들이 상대하는 고유의 감각대상들과 관계할 뿐이다. 그들의 작용은 오직 현재 경험되는 대상에 국한되며 과거나 미래의 대상들에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감각기능은 마음에 떠오르는 대상들 즉 과거에 경험했거나 미래에 예상되는 것을 상대로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마음은 현재의 범위를 벗어난 대상들로까지 앎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붓다는 십이처를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앎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SN. IV. 15).십이처를 벗어난 무엇은 그 존재의 여부마저도 따질 수 없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십이처의 영역을 넘어선 절대적 존재(神)에 대한 환상을 품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의 인식이 지니는 한계를 망각한 결과로서 ‘토끼의 뿔’이나 ‘허공에 핀 꽃’에 비유할 수 있다. 일상적인 생각이나 관념에서부터 범우주적 차원의 형이상학에 이르기까지 십이처라는 틀을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붓다는 십이처를 세상(loka)의 발생과 사라짐에 결부시키기도 한다(SN. IV. 87).

십이처가 세상의 발생과 소멸로까지 확대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서 전개되는 세상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십이처를 적극 대처해 나감으로써 세상의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고 언급한다. 그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괴로움을 종식시킬 수 있는 열쇠가 다름 아닌 여섯의 감각기능에 있다고 언급한다(SN. IV. 95). 또한 여섯의 감각적 접촉의 영역을 잘 길들이고 잘 지키고 잘 단속하면 괴로움을 극복하고 즐거움을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SN. IV. 70). 십이처는 괴로움의 현실이 발생하는 무대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종식시키고 즐거움을 얻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십이처를 다스림으로써 즐거움을 성취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여기에서 비구는 눈으로 시각대상을 보면서 드러난 모습(nimitta)이나 수반되는 특징(anubyañjana)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눈이라는 감각기능(根)을 단속하지 않으면 탐욕이라든가 불쾌함 따위의 나쁘고 옳지 못한 법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 실천한다. 눈이라는 감각기능을 지키고 눈이라는 감각기능에 대한 단속을 행한다.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혀로 맛을 보면서… 몸으로 감촉을 느끼면서… 마음으로 법을 인식하면서 드러난 모습이나 수반되는 특징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마음이라는 감각기능을 단속하지 않으면 탐욕이라든가 불쾌함 따위의 나쁘고 옳지 못한 법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 실천한다. 마음이라는 감각기능을 지키고 마음이라는 감각기능에 대한 단속을 행한다. 그는 이와 같이 거룩한 감각기능의 단속을 갖추고서 내부적으로 손상됨이 없는 즐거움(樂, sukha)을 경험한다(DN. I. 70).”

십팔계(十八界)(77)

십팔계(十八界, aṭṭhārasa-dhātuyo)란 무엇인가. 여섯의 감각기능(六根)과 여섯의 감각대상(六境) 그리고 이들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여섯의 의식(六識)을 내용으로 한다. 십팔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은 독자적인 경계를 유지하면서 경험세계를 발생시키는 원리가 된다. 십팔계의 계(界)란 빨리어(Pāli) 다뚜(dhātu)를 한역한 것이다. 붓다에 따르면 일체의 괴로움은 조건에 의해 발생하고 사라진다. 그는 이러한 조건에 의한 발생과 소멸에 대해 ‘확립된 계(ṭhitā dhātu)’라는 표현을 사용한다(SN. II. 25). 이때의 계란 ‘변화하지 않는 원리’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계란 특정한 현상이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원리에 해당한다. 이것을 지님으로써 그러한 현상은 다른 무엇과 뒤섞이지 않는 독특성을 지속하게 된다. 예컨대 물이 기름에 섞이지 않는 이유는 물은 물대로 기름은 기름대로의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저마다의 고유한 정체성을 흩뜨리지 않는다. “중생들은 계에 따라 함께 모이고 함께 어울린다. 저열한 신념을 가진 중생들은 저열한 신념을 가진 자들과 함께 어울리고 좋은 신념을 가진 중생들은 좋은 신념을 가진 중생들과 함께 모이고 함께 어울린다(SN. II. 154).”

십팔계란 구체적으로 눈(眼)과 시각대상(色)과 눈의 의식(眼識), 귀(耳)와 소리(聲)와 귀의 의식(耳識), 코(鼻)와 냄새(香)와 코의 의식(鼻識), 혀(舌)와 맛(味)과 혀의 의식(舌識), 몸(身)과 감촉(觸)과 몸의 의식(身識), 마음(意)과 마음현상(法)과 마음의 의식(意識)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 각각의 요소는 경험세계의 최소 단위에 해당하는 동시에 다양한 경험적 내용을 전개시키는 원리(界)라고 할 수 있다. 접촉하거나 느끼거나 지각하거나 상상하는 모든 것이 이러한 18가지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십팔계는 불변의 형이상학적 실체(實體, substance)가 아니다. 이들은 경험세계의 분석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경험적 차원을 떠나지 않고서 경험세계의 발생을 해명한다. “눈(眼)과 시각대상(色)을 조건으로 눈의 의식(眼識)이 발생한다. 이 셋의 부딪힘이 접촉(觸)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있다. 그는 느끼는 그것을 지각한다(想). 그는 지각하는 그것을 생각한다(尋). 그는 생각하는 그것을 망상한다(戱論).… 이렇게 해서 과거․미래․현재에 걸쳐 눈으로 의식되는 시각대상에 관해 망상에 오염된 지각(想)과 관념(思量)이 생겨난다.… [귀와 코 등에서도 마찬가지이다](MN. I. 111-112).”

십팔계는 오온(五蘊) 및 십이처(十二處)와 비교되곤 한다. 오온은 ‘나’의 현실을 주객이 혼융된 경험의 갈래들로 단순하게 뭉뚱그려 분류한 것이다. 십이처는 오온을 여섯의 감각기능과 감각대상으로 환원해 놓은 것으로 오온의 발생 배경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십팔계는 십이처의 마음(意)에서 의식(識)을 따로 분화시킨 다음 다시 이 의식을 여섯의 감각기능에 배대하여 세분화해 놓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여섯 의식(六識)은 사실 십이처의 마음(意)과 별개의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각기 고유한 감각기능에 의존하여 작용한다는 점에서 독자성을 지닌다.

눈(眼) ⇔ 시각대상(色) ⇔ 눈의 의식(眼識)

귀(耳) ⇔ 소리(聲) ⇔ 귀의 의식(耳識)

코(鼻) ⇔ 냄새(香) ⇔ 코의 의식(鼻識)

혀(舌) ⇔ 맛(味) ⇔ 혀의 의식(舌識)

몸(身) ⇔ 감촉(觸) ⇔ 몸의 의식(身識)

마음(意, =여섯 의식) ⇔ 마음현상(法) ⇔ 마음의 의식(意識)

십팔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은 경험세계의 기본 원리에 해당한다. 이것을 망각하고서 이들 너머의 무언가를 떠올리게 되면 바로 그 순간 경험의 차원으로부터 일탈하는 셈이다. 다름 아닌 관념의 유희에 빠져들게 된다. 붓다는 이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경험세계를 넘어선 절대적 존재 혹은 창조주 따위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도록 하였다. 인간이 품는 모든 지각(想, saññā)과 관념(思量, saṅkhā)이란 결국 눈과 시각대상과 눈의 의식 따위에 근거할 뿐이다. 십팔계 바깥에서 경험세계의 원인을 찾는 행위는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십팔계를 구성하는 개개의 요소들 또한 절대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근원적 실재는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붓다는 이들 역시 오온이라든가 십이처의 항목들과 마찬가지로 경계해야 하고 다스려 나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어떠한 온(蘊)과 계(界)와 처(處)이든 그것에 대해 헤아리지 않고, 그것에 빠져 헤아리지 않고, 그것을 통해 헤아리지 않고, ‘그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헤아리지 않는다. 그와 같이 헤아리지 않는 자는 세상에 대해 어떤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으므로 동요하지 않는다. 동요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완전한 열반에 든다(SN. IV. 24).”

아래의 경문 또한 유사한 맥락에서 괴로움의 끝에 도달하게 되는 이치를 잘 드러낸다. 깊이 새겨둘 만하다. “ …그대가 보았거나 들었거나 생각했거나 의식한 사물과 관련하여, 보게 되었을 때는 본 것만 있고, 듣게 되었을 때는 들은 것만 있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는 생각한 것만 있고, 의식하게 되었을 때는 의식한 것만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그대는 그것에 의하지 않는다(na tena). 그대가 그것에 의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거기에 없다(na tattha). 그대가 거기에 없다면 그대는 이 세상에도 없고 저 세상에도 없고 양쪽의 중간도 없다. 바로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esevanto dukkhassa)(SN. IV. 73).”

십이연기설의 취지(78)

십이연기(十二緣起)란 무엇인가. 괴로움의 현실이 전개되는 과정을 12단계로 분석해 놓은 것이다. 12단계란 구체적으로 무명(無明), 지음(行), 의식(識), 정신․물질현상(名色), 여섯 영역(六入), 접촉(觸), 느낌(受), 갈애(愛), 집착(取), 있음(有), 태어남(生), 늙음․죽음(老死)을 가리킨다. 붓다는 늙음․죽음이라는 실존의 괴로움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방식으로 있음이라든가 집착 따위를 거슬러 올라가 결국은 무명을 조건으로 일체의 괴로움이 생겨나는 과정을 밝혀냈다. 바로 이것이 12단계로 구성된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 즉 십이연기이다.

연기설의 중요성은 다음의 경문을 통해 드러난다. “연기를 보는 자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자 연기를 본다(M. I. 190-191).” 이 언급은 붓다의 모든 가르침이 다름 아닌 연기로 집약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다음의 경문 역시 연기설의 의의와 성격에 관련하여 새겨둘 필요가 있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태어남(生)에 의존하여 늙음․죽음(老死)이 있다. 이것은 확립된 원리(ṭhitā sā dhātu)이며, 법으로서 확립된 것(dhammaṭṭhitatā)이며, 법으로서 고정된 것(dhammaniyāmatā)이며, 이러한 조건을 지닌다는 것(idapaccayatā)이다. 여래는 이것을 깨달았고 또한 분명하게 알았다. [있음․집착․갈애 따위의 나머지 다른 항목들도 마찬가지이다](SN. II. 25).”

붓다는 연기의 이치를 스스로 고안해 낸 것이 아니며 다만 깨달았을 뿐이다. 이것은 여래(如來)의 출현 여부와 상관이 없이 괴로움에 노출된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진리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변화하지 않는 절대적인 법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러한 사람에게는 십이연기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아라한(阿羅漢)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로움에 지배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한에서 십이연기는 ‘법으로서 확립된 것’이며 ‘법으로 고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십이연기와 관련하여 반드시 유념해 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이 가르침은 객관적 실재의 발생과 소멸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괴로움의 현실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게 되면 십이연기에 대해 세계의 구조를 밝히 위한 형이상학적 주장으로 오인할 수 있다. 그러나 붓다는 형이상학자도 자연과학자도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괴로움의 실존을 극복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바로 그러한 동기에서 괴로움이 구체화되는 경로를 드러냈을 뿐이다.

십이연기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여타의 사변적․형이상학적 견해들과 궤도를 달리한다. 예컨대 십이연기에 대한 기술 앞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나타난다. “‘모든 것이 있다’는 것도 하나의 극단적 견해요, ‘모든 것이 있지 않다’는 것도 하나의 극단적 견해이다. 여래는 이들 두 극단에 다가가지 않고 가운데에서 가르침을 드러낸다(SN. II. 17).” 십이연기는 ‘있음’과 ‘있지 않음’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장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지지하고자 의도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이들 모두를 해소하기 위한 가르침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방식으로 붓다는 단일성과 다수성의 문제, 괴로움의 주체 문제, 영혼과 육체의 동일성 여부 등에 대해서도 벗어나야 할 극단으로 간주하였다(SN. II. 20-77).

붓다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이란 있는 그대로의 실재(reality)를 받아들이기 힘든 구조이다. 뿌리 깊은 무지와 습관적 경향들 그리고 갈애와 집착 따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당시 유행했던 대부분의 사변적․형이상학적 견해들이 바로 이점을 간과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웠지만 그러한 논리의 이면에는 항상 탐욕과 증오 따위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결국 편견과 아만으로 기울어 자신과 타인에게 괴로움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붓다는 그러한 형이상학적․사변적 견해들과 전혀 다른 맥락의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세계를 해석하려는 인간의 인식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여 실재로부터 유리되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밝혀 낸 것이다.

십이연기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결과로서 도출된 가르침이다. 이것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인 무명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의 최종 귀결은 다름 아닌 늙음․죽음이다. 붓다는 무명이 소멸하면 나머지 지분들 또한 순차적으로 소멸하며, 결국에는 늙음․죽음으로 대변되는 일체의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것이다(SN. II. 1-2). 이러한 십이연기의 교설은 무명의 제거를 통해 괴로움의 해소를 꾀하는 처방책으로서 치유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의 십이연기를 세계의 기원이나 구조를 해명하기 위한 형이상학의 일종으로 간주하는 것은 본래의 취지를 벗어난다고 할 수 있다.

십이연기의 해석(79)

십이연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선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라는 용어부터 살펴보자. 문자 그대로 분석하자면 ‘~을 향하여(paṭi)’, ‘다가가서(icca)’, ‘일어남(samuppāda)’이 된다. 온전한 의미로 옮기자면 ‘~을 조건으로 한 발생’ 정도가 무난하다. 특히 초기불교에서의 연기란 늙음․죽음으로 대변되는 괴로움의 현실이 조건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괴로움이란 본래적인 것도 아니고 우연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럴만한 조건에 의해 발생했다가 사라진다. 붓다는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12단계에 걸친 연쇄적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바로 그것이 십이연기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연기의 교설을 2단계, 3단계, 5단계, 9단계, 10단계, 12단계라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한다. 이들 모두는 괴로움에 떨어지게 되는 경로를 해명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들 가운데 12단계의 십이연기가 가장 온전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십이연기는 괴로움(苦), 괴로움의 원인(集), 괴로움의 소멸(滅),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道)이라는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과 결부되어 설명되기도 한다(AN. I. 177). 붓다는 가르침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역량에 따라 각기 다른 단계로 구성된 다양한 연기의 교설을 제시했다. 따라서 각각의 방식은 나름의 의미와 쓰임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연기설의 기본 구조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발생하므로 저것이 발생하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SM. II. 70).” 12단계에 이르는 각 지분들은 바로 이러한 형식으로 엮이어 있다. 예컨대 태어남(生)이 있을 때 늙음․죽음(老死)이 있고 태어남이 없으면 늙음․죽음도 없다. 또한 태어남이 발생하므로 늙음․죽음이 발생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죽음도 소멸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태어남은 있음(有)을 조건으로 하고, 있음은 집착(取)을, 집착은 갈애(愛)를 조건으로 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최초의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나머지 11가지 지분들이 발생하고 소멸한다.

후대에 이르면서 십이연기의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각각의 지분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입장과 순차적으로 발생한다는 입장이 그것이다. 전자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는 경구에 근거한다. 이러한 해석에 입각하면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폭력 혹은 살생의 상황(老死)이 발생했을 때 그러한 행위를 발동시키는 어리석음은 무명(無明)이며, 그것을 저지르려는 의도는 지음(行)이며, 그러한 대상에 대한 인식은 의식(識)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십이연기의 전체 지분이 동시적으로 작용한다.

한편 후자는 각각의 지분들이 순차적으로 발생하여 작용한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발생하므로 저것이 발생하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라는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때의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자리한다. 예컨대 과거의 삶에서 누적된 무명(無明)과 지음(行)이 현재의 삶에서 발현되는 의식(識)의 조건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앞선 지분들은 이후의 지분들에 대해 인과적 조건으로 작용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윤회설과 결합하여 과거생에서 현재생, 그리고 미래생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논리가 되기도 한다.

특히 후자의 순차적 해석은 다시 3가지로 세분화된다. 먼저 12찰나에 걸쳐 각각의 지분들이 부단히 연달아 발생한다는 연박(蓮縛)연기설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아득히 먼 과거의 무명과 지음에 의해 현재생이 초래되고, 또한 현재생의 있음에 의해 아득히 먼 미래생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있게 된다는 원속(遠續)연기설이 있다. 마지막으로 각각의 지분들이 직전의 과거생과 직후의 미래생 그리고 현재생이라는 삼세에 걸친 인과적 관계로 엮인다는 분위(分位)연기설이 그것이다. 이들 중 맨 후자는 부파불교시대 이래로 가장 널리 인정되었으며,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이라는 명칭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십이연기에 대해서는 상이한 해석이 존재한다. 그러나 각각의 해석에는 나름의 장점이 존재한다. 예컨대 모든 지분이 동시적으로 작용한다는 입장에 따르면 어리석음에 빠지는 즉시 괴로움의 현실에 처하게 된다. 바로 이것은 어리석음을 제거하면 그 즉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이치 또한 용이하게 드러낼 수 있다. 한편 후자의 순차적 해석은 괴로움이 전개되고 소멸하는 점진적 과정을 묘사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미래의 괴로움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일깨운다. 따라서 어느 한 해석만이 전적으로 옳다고 단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

늙음․죽음(老死)(80)

늙음․죽음(老死, jarāmaraṇa)이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연쇄적 과정에서 마지막 항목에 해당한다. 늙음․죽음은 태어남(生)을 조건으로 발생하며, 생명을 지닌 존재라면 예외 없이 맞이하는 보편적 괴로움이다. 이것이 가져오는 심리적 중압감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늙음․죽음은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 따위의 수식어와 함께 묘사되곤 한다(SN. II. 2). 늙음․죽음은 괴로움으로 뒤엉킨 인간의 실존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십이연기의 가르침이 의도하는 궁극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는 데 있다.

경전에 나타나는 십이연기의 정형구는 다음의 형식을 취한다.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지음(行)이 있고, 지음을 조건으로 의식(識)이 있고,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물질현상(名色)이 있고, 정신․물질현상을 조건으로 여섯 영역(六入)이 있고, 여섯 영역을 조건으로 접촉(觸)이 있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있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있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取)이 있고, 집착을 조건으로 있음(有)이 있고, 있음을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老死),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 등이 있다(SN. II. 2).”

그런데 위의 정형구는 늙음․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무명으로부터 출발한다. 또한 무명에 대해 꿰뚫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선언적으로 제시되는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무명의 교리를 미리 알지 못한다면 이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순서는 무명 즉 ‘진리에 대해 모르는 상태’가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해준다. 나아가 무명을 제거하면 괴로움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교훈을 부각시킨다(SN. II. 4). 따라서 앞서의 정형구는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처방으로서 십이연기의 취지를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십이연기를 다루는 대부분의 경전들은 맨 먼저 앞서의 정형구를 제시한다. 그러나 각각의 지분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로 옮겨가면 맨 마지막의 늙음․죽음부터 다룬다. 이것은 십이연기에 대한 세부적 이해가 현실의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됨을 의미한다. 갖가지 괴로움에 노출되어 하루하루 불안하게 연명해 나가는 바로 그러한 상태가 십이연기를 깨달아 나가는 첫 번째 관문이 된다. 즉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 등이야말로 십이연기의 자각을 위한 매개가 된다. 이들은 결코 관념적인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늙음․죽음은 생명을 지니고 있는 한 언젠가는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무리에서의 늙음, 노쇠, 이빨빠짐, 머리희어짐, 주름짐, 수명의 감소, 감각기능의 쇠퇴이다. 이것을 늙음이라고 한다. 또한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무리에서의 사라짐, 사라져감, 파괴됨, 무너짐, 죽음의 신에 의한 죽음, 임종을 맞이함, 경험요소(蘊)의 무너짐, 시체로 놓여짐이다. 이것이 죽음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늙음․죽음이라고 한다(SN. II. 2-3).”

인용문에 나타나는 늙음․죽음은 대체로 생리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에 대해 제삼자의 시각으로 접근하면 그냥 무덤덤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적용되는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다른 무게로 느껴질 수 있다. 한 발짝 한 발짝 ‘나’에게 다가오는 늙음․죽음은 결코 후퇴하는 법이 없다. 더욱 중요한 점은 바로 이것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괴로움의 강도는 커질 수밖에 없다. 십이연기는 바로 이와 같은 ‘나’ 자신의 현실에 대한 자각이 전제될 때 비로소 ‘나’를 위한 가르침이 될 수 있다.

태어남(生)(81)

태어남(生, jāti)이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11번째에 해당한다. 태어남은 늙음․죽음(老死)의 조건이 되며 또한 그 자체는 있음(有)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태어남이란 특정한 생명체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거기에는 생명체의 종류만큼 다양한 양상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인간으로의 태어남, 동물로의 태어남, 천신으로의 태어남 등이 있다. 또한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국가라든가 시대․인종․성별 따위의 변수가 있을 수 있다.

십이연기의 태어남에 관한 일반적 설명은 다음과 같다. “태어남이란 무엇인가.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무리 안에서의 태어남, 생겨남, 들어감, 자라남, 경험요소(蘊)의 나타남, 영역(處)의 획득이다.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한다(SN. II. 3).” 바로 이것으로 인해 12번째 지분에 해당하는 늙음․죽음이 발생하게 된다. 만약 애초부터 태어남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노쇠라든가 사라짐의 괴로움을 겪을 이유가 없다.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감각기능의 쇠퇴라든가 육체의 무너짐이라는 늙음․죽음의 괴로움을 걸머지게 된다.

십이연기의 연쇄적 과정을 윤회설(輪回說)에 결부시키면 태어남이란 죽고 난 이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즉 내세(來世)의 재생을 의미한다. 다음의 경문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어리석은 자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다른 몸을 받는다. 그는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남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하고, 늙음․죽음,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이라는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SN. II. 24).” 이 경우의 태어남은 전생(前生)에서 누적된 어리석음이 후생(後生)의 다른 존재로 이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일단 태어나면 바로 그 생에서는 늙음․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한평생 받아야 하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 미리 고정된다는 잘못된 견해에 빠지게 될 위험성이 있다(SN. III. 212.) 바로 이러한 사고는 설령 현생에서 깨달음을 얻더라도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자포자기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나아가 실천․수행의 목표가 현생에서 얻어지는 인격적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세에 재생하지 않는 것으로 왜곡될 수 있다. 이점에서 십이연기의 태어남을 죽음 이후의 재생에 국한시키는 해석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붓다는 전생이나 후생이 아닌 당면한 현실로서 드러난 태어남과 죽음에 관심을 가졌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붓다가 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일 것이다.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들 세 가지 법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여래․아라한․정등각은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고, 여래가 가르친 법과 율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러한 세 가지 법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세상에 출현하였고, 여래가 가르친 법과 율도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AN. V. 144).”

붓다는 전생 혹은 후생에 압도되어 현생의 삶을 체념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마음으로 지금을 살아가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다. 현재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극복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법을 제거하지 못하면 태어남도 제거할 수 없고, 늙음도 제거할 수 없고, 죽음도 제거할 수 없다. 무엇이 셋인가. 탐냄을 제거하지 못하고, 성냄을 제거하지 못하고, 어리석음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들 세 가지 법을 제거하지 못하면 태어남도 제거할 수 없고, 늙음도 제거할 수 없고, 죽음도 제거할 수 없다(AN. V. 144).”

있음(有)(82)

있음(有, bhava)이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10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있음은 태어남(生)의 조건이 되며 또한 그 자체는 집착(取)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있음에 대한 경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있음에는 이러한 3가지가 있다. 감각적 욕망에 의한 있음(欲有), 물질현상에 의한 있음(色有), 물질현상을 지니지 않은 있음(無色有)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있음이라고 한다(SN. II. 3).”

초기불교 경전에서 있음에 관한 자세한 해설은 찾아보기 힘들다. 위의 인용문 또한 해설이라기보다는 양상의 나열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것만으로는 명확한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있음은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가장 난해한 개념의 하나로 간주되곤 한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태어남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은 그 의미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있음이란 태어남을 가능하게 해주는 무엇이다. 이것은 태어남의 여건 혹은 배경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가지 있음(三有)에 대한 이해를 위해 삼계(三界)의 가르침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삼계란 감각적 욕망에 지배되는 세계(欲界), 물질현상에 지배되는 세계(色界), 물질현상을 벗어난 세계(無色界) 등을 가리킨다. 이들 삼계는 다시 지옥계․아귀계․축생계․인간계․천상계 등의 윤회의 세계로 나뉜다. 이들 중에서 앞의 셋은 괴로움으로 점철된 세계이며 뒤의 둘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뒤섞인 세계이다. 특히 뒤의 둘 가운데 인간계는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세계를 가리키며, 천상계는 신(神)들의 영역으로서 물질현상을 벗어난 차원(無色界)까지를 포함한다.

삼계는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반복되는 장소이다. 인간계에 속한 중생들은 어머니의 모태를 통한 태생(胎生)의 방식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축생계의 중생들은 태생과 난생(卵生) 등으로, 지옥계․아귀계․천상계에 속한 중생들은 마음으로 홀연히 나타나는 화생(化生)으로 태어난다. 한편 인간계의 일부 수행자들은 현재의 상태 그대로 홀연히 천상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언급되기도 한다(DN. I. 215). 십이연기의 11번째, 12번째 지분에 해당하는 태어남과 늙음․죽음은 바로 이러한 양상을 묘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3가지 있음이란 삼계의 가르침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있음에 대해 후대의 주석가들은 ‘업의 있음(業有, kammabhava)’과 ‘재생의 있음(生有, upapattibhava)’으로 풀이한다. 전자는 새로운 몸으로 재생하도록 이끄는 ‘업 지음’에 해당하고, 후자는 그 결과로서 받게 되는 과보(果報)를 가리킨다. 이들을 종합하면 있음이란 내생(來生)의 태어남으로 연결되는 현생(現生)의 업일 수도 있고, 또한 전생(前生)의 업을 조건으로 한 현생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러한 있음이란 새로운 태어남으로 이어지는 씨앗과 열매에 비유할 수 있다.

있음이란 갖가지 모습의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펼쳐지는 연극무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무대의 배우들은 각자 자신의 대본을 지닌다. 그러하듯이 중생들은 자신이 속한 무대에서 자신들의 각본대로 살아간다. 그들을 위한 무대장치와 각본은 전생과 현생에 걸쳐 이전에 지은 업들로 구성된다. 또한 거기에는 지금 품고 있는 내면의 결의라든가 의지 따위가 얼마간 반영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업의 있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존재로의 태어남이 펼쳐진다. 그러한 펼쳐짐은 죽고 난 이후의 재생일 수도 있고 혹은 현생에서 경험하게 되는 거듭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집착(取)(83)

집착(取, upādāna)이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9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집착은 있음(有)의 조건이 되며 또한 그 자체는 갈애(愛)를 조건으로 발생한다. 집착이란 특정한 대상을 자신의 소유로 움켜쥐거나 붙잡으려는 정신적 작용을 가리킨다. 이것을 통해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펼쳐지는 있음의 무대가 펼쳐지게 된다. “집착에는 이러한 4가지가 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慾取), 견해에 대한 집착(見取), 계율과 서원에 대한 집착(戒禁取),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我語取)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집착이라고 한다(SN. II. 3).”

감각적 욕망이란 감각을 만족시키려는 욕구를 가리킨다. 이것은 대개 유혹적인 대상과 마주하였을 때 발생한다. 농토, 대지, 황금, 소나 말, 노비나 하인, 여자나 친척 따위가 그것이다(Sn. 769게송). 특히 이것은 본능적 쾌락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성적(性的) 행위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 용례로 나타난다(AN. V. 264). 감각적 욕망은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반드시 부정적인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예컨대 감각적 욕망은 건전한 경제생활의 동기가 될 수도 있고, 재가자의 경우 원만한 가정생활을 위한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한편 견해는 어떠한가. 이것 또한 필수불가결한 삶의 요소이다. 특히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가 견해의 유무에 있다. 인간은 바른 견해를 통해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갈 여지를 미리 차단한다. 그러나 견해란 양날의 칼과 같이 때로는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견해에 갇혀 자신을 경직되게 하고 타인을 억압한다. 또한 이것으로 인해 동물에게는 존재하는 않는 죄의식이나 자학 혹은 자살 따위의 비극이 발생한다. 대규모 살육이나 전쟁 혹은 종교적․이데올로기적 박해 등에도 항상 견해의 문제가 수반된다.

계율과 서원에 대한 집착은 대체로 종교생활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계율을 준수하고 서원을 세우는 것은 종교적 삶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 그 사람의 인격을 다듬고 고양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지나치면 해로운 독약으로 바뀔 수 있다. 예컨대 모든 젊은이가 불살생(不殺生)이라는 계율에 얽매여 군 입대를 거부한다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혹은 종교적 신념으로 수혈을 거부하다가 목숨을 잃는다거나, 상식에 반하는 행위를 일삼는 경우 또한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이란 무엇인가. ‘나’로 여겨지는 현상들에 붙들려 스스로를 고정된 틀 안에 가두는 경우를 말한다. 『담마상가니』에서는 이것을 ‘현재의 몸에 매인 견해(有身見)’로 바꾸어 말한다(Dhs. 212-213). 예컨대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현상(色)에 집착하여 바로 그것만을 참된 자아(我, attan)라고 고집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혹은 느낌(受)이나 지각(想), 지음(行), 의식(識) 따위에 매달려 그러한 현상들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은 스스로를 한정된 범위 안으로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4가지 집착의 대상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때로 적극적인 삶으로 이끄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들에 대해 움켜쥐거나 붙잡으려는 마음이 발생하면서부터이다. 집착과 더불어 이들은 스스로를 포박하는 사슬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해서 갖가지 괴로움의 실존이 전개되는 있음(有)의 무대가 펼쳐진다. “비구들이여, 집착하기 마련인 현상들에서 달콤함을 즐기며 머무는 자에게 갈애는 증가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집착을 조건으로 있음이, 있음을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 등이 발생한다(SN. II. 84-85).”

갈애(愛)(84)

갈애(愛, taṇhā)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8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갈애는 집착(取)의 조건이 되며 또한 그 자체는 느낌(受)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갈애란 타는 목마름으로 물을 구하듯 특정한 대상에 온통 쏠려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것으로 인해 집착에 빠져 온갖 실존의 괴로움을 걸머지게 된다. “갈애를 기르는 자들은 집착의 대상을 기르는 자들이고, 집착의 대상을 기르는 자들은 괴로움을 기르는 자들이며, 괴로움을 기르는 자들은 태어남과 늙음․죽음,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 따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SN. II. 109).”

갈애는 눈․귀․코 따위의 여섯 감각기능을 통해 발생한다. “갈애에는 6가지가 있다. 보이는 것에 대한 갈애, 소리에 대한 갈애, 냄새에 대한 갈애, 맛에 대한 갈애, 감촉에 대한 갈애, 마음현상에 대한 갈애이다(SN. II. 3).” 이렇듯 갈애는 감각기능에 따라 여섯으로 분류된다. 이와 관련하여 거북이의 사지를 노리는 재칼의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이 거북이가 사지와 목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내밀면 바로 그것을 붙잡아 끄집어 내 먹어야지.… (SN. IV. 178).” 이와 같이 여섯 감관을 내미는 순간 갈애라는 재칼에게 붙잡혀 괴로움의 나락에 떨어진다.

갈애는 십이연기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교리적 가르침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특히 이것은 사성제(四聖諦)에서 괴로움의 원인(集聖諦)으로 거론된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있음에 대한 갈애(有愛), 있지 않음에 대한 갈애(非有愛) 등이 그것이다(SN. V. 421). 이 사성제에 대해 십이연기가 지니는 차별성은 무명(無明)에서부터 느낌(受)에 이르는 연쇄적 조건을 통해 갈애가 발생하는 경로를 밝힌다는 점이다. 즉 갈애란 진리에 대한 통찰의 결핍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며, 이것에 뒤이어 집착과 있음 따위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란 생리적 욕구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예컨대 식욕(食慾)이라든가 성욕(性慾) 따위가 그것이다. 물론 적절한 생리적 욕구는 삶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주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건전한 생리적 욕구에 갈애의 불길이 옮겨 붙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욕망의 불구덩이에 빠지게 되면 통제 불능의 상황이 발생한다. 이것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십이연기의 마지막 지분에 해당하는 늙음․죽음은 바로 그러한 상황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있음에 대한 갈애’와 ‘있지 않음에 대한 갈애’는 견해(見)의 문제와 관련된다. 전자는 죽고 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무엇에 대한 견해(常住論)와 연관되어 있다. 후자는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허무주의적 견해(斷滅論)와 맞닿아 있다. 이들은 현재의 자기를 영속화하려는 심리를 반영하거나 혹은 현실의 불만에 대한 자포자기적 경향과 통해 있다. 이들로 대변되는 견해들 간의 갈등은 일순간의 멈춤도 없이 다툼․싸움․논쟁․상호비방․중상모략․거짓말 따위를 조장해 왔다(Sn. 862-877게송).

그렇다면 갈애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갈애란 감관에 와 닿는 현상들에 대해 즐겁거나 기분 좋은 것으로 간주하여 탐닉할 때 생겨난다. 따라서 갈애를 제거하는 방법은 이와 다르게 관찰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든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을 무상하다고 보고, 괴로움으로 보고, 무아라고 보고, 질병과 같은 것으로 보고, 두려움으로 본다면 그들은 갈애를 제거한다(SN. II. 110-111).” 또한 경전에서는 갈애를 부수어 해탈한 사람이야말로 더 이상 특정한 존재양상(流轉, vaṭṭaṁ)에 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SN. VI. 391).

느낌(受)(85)

느낌(受, vedanā)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의 느낌이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7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을 가리킨다. 느낌은 갈애(愛)의 조건이 되며 또한 그 자체는 접촉(觸)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느낌이란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일체의 감정을 망라한다. 십이연기의 느낌은 발생 경로에 따라 여섯으로 분류된다. “느낌에는 이러한 6가지가 있다. 눈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귀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코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혀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몸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 마음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이다(SN. II. 3).”

느낌은 다섯의 경험적 요인 즉 오온(五蘊)의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즉 물질현상(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한다. 오온은 인간의 실존을 5가지 경험의 갈래들로 엮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오온의 가르침에서는 이들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라든가 경과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다만 순간순간 경험하게 되는 이들 현상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할 때 괴로움이 증폭된다고 가르칠 뿐이다. 오온설은 이들 각각에 대해 ‘나의 것’이 아니며 또한 이들을 매개로 ‘나’를 내세울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데 주력한다.

오온에 귀속되는 느낌은 즐겁거나 괴로운 감정 자체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십이연기에서의 느낌은 첫 번째 지분인 무명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지분인 늙음․죽음이 구체화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등장한다. 따라서 각각의 느낌은 동일한 개념이지만 전달하는 메시지가 다르다. 오온과 달리 십이연기의 느낌은 그것이 발생하는 인과적 조건과 함께 그 이후의 경과에 대해서도 밝힌다. 따라서 이것은 각자가 경험하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도대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깊이 있는 사색이 가능하도록 해준다.

십이연기의 연쇄적 과정에 입각할 때 무명(無明)이라든가 지음(行) 따위가 존재하는 한에서 느낌의 발생은 불가항력적이다. 전생에 지은 것이든 혹은 현생에 뿌린 것이든 이전에 지녔던 인식과 행위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지금의 상황에 영향을 미친다. 바로 이것이 6가지 방식의 감각적 접촉을 통해 드러나는 느낌의 양상이다. 예컨대 누군가에게 해로움을 끼쳤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그 앙갚음이 되돌아온다고 보아야 한다. 바로 그 결과가 지금 이렇게 눈이나 귀나 몸을 통해 경험하는 괴롭거나 쓰라린 느낌이다.

이러한 느낌의 발생을 억지로 거스르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사실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자체는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설령 나쁜 행위의 과보로 괴로움을 겪는다손 치자. 마땅히 받아들이고 감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삶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이러한 부류의 느낌들은 어느 누구도 대신 겪어 줄 수 없다. 어쩌면 각자만의 고유한 인생은 감당하기 힘든 괴롭고 쓰라린 느낌에 직면했을 때라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것을 어떠한 태도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는 곧 그 사람의 인격과 됨됨이에 직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느낌에 지배되면 본능의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바로 그 순간부터 탐욕과 분노의 사슬에 매이게 된다. 갈애(愛)와 집착(取)과 있음(有)으로 이어지는 십이연기의 나머지 지분들은 그러한 과정에 대한 순차적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늙음․죽음(老死)으로 대변되는 괴로움의 실존은 그것의 최종 귀결에 해당한다. 따라서 느낌이란 거룩한 삶과 저속한 삶으로 갈라지게 만드는 갈림길에 비유할 수 있다.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매이지 않고 느끼고,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에 매이지 않고 느낀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이 잘 배운 거룩한 제자이다. 그는 태어남과 늙음․죽음,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에도 매이지 않는다(SN. IV. 209-210).”

접촉(觸)(86)

접촉(觸, phassa)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의 접촉이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6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을 가리킨다. 접촉은 느낌(受)의 조건이 되며 또한 그 자체는 여섯 영역(六入)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접촉이란 눈 따위의 여섯 감각기능(根)과 그들에 대응하는 외부의 대상(境)들 그리고 그들 각각을 식별하는 의식(識)이 만나 이루어지는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접촉은 다음의 여섯으로 분류된다. “접촉에는 6가지가 있다. 눈의 접촉(眼觸), 귀의 접촉(耳觸), 코의 접촉(鼻觸), 혀의 접촉(舌觸), 몸의 접촉(身觸), 마음의 접촉(意觸)이다(SN. II. 3).”

접촉이란 말 그대로 안팎의 대상과의 접촉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신체적 접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여섯의 감각영역 전체에 걸쳐 발생한다. 이것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受)을 비롯하여 갈애(愛)와 집착(取) 따위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서적 과정이 뒤따른다. 따라서 이것은 경험세계가 전개되는 실제적 관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사의 희로애락은 그때그때 발생하는 접촉을 통해 펼쳐지는 한바탕 놀이에 비유할 수 있다. “괴로움[의 세계]란 조건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접촉이다(SN. II. 33).”

그런데 접촉이란 외부 대상과의 무미건조한 만남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접촉이란 번뇌를 지닌 것으로 집착을 낳는다(Ps. I. 22).”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이것은 이미 접촉의 단계에서부터 주관적인 편견과 왜곡이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을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 동물들은 뱀 따위의 파충류 동물을 본능적으로 혐오한다고 한다. 덩치 큰 고릴라도 갑자기 뱀을 만나게 되면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한다. 이것은 수백만 년 전부터 누적시켜 온 영장류 고유의 성향에 따른 것이다.

이렇듯 눈이나 귀로 안팎의 현상을 접촉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알게 모르게 누적시켜온 습관과 성향이 작동한다. 눈으로 보든 귀로 듣든 무언가를 마주하는 그 순간부터 저마다의 성향에 따른 고유의 반응들이 작용한다. 이미 자신들만의 색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각자가 경험하는 색감은 다를 수밖에 없다. 동일한 현상에 대해 서로 다른 감정을 갖게 되는 근원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경험세계 안에서 완전무결하게 객관적인 무엇을 기대하기란 힘들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접촉은 여섯 영역(六入)의 단계를 걸치지 않고 바로 정신․물질현상(名色)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Sn. 872게송). 특히 그때의 접촉은 언어적 접촉(命名觸, adhivacana-samphassa)과 신체적 접촉(有對觸, paṭigha-samphassa)으로 나뉜다. 전자는 개념을 통한 정신적 접촉을 가리키고 후자는 눈․귀․코․혀․몸이라는 감각기능에 의한 물질적 접촉을 가리킨다. 이들은 경험세계가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차원에 걸친다는 당연한 사실을 환기시킨다. 이점에 근거할 때 유물론(唯物論)과 유심론(唯心論) 따위와 같이 어느 한 쪽만을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타당성을 지니지 못한다.

또한 경전에는 무명과의 접촉(無明觸)이라는 용례도 나타난다(SN. III. 46). 이것은 무지로 인해 그릇된 견해를 품게 되거나 혹은 잘못된 세계관에 빠지는 경우를 묘사한다. 예컨대 “무명과의 접촉으로 느껴지는 것을 통해 ‘나는 존재한다(asmīti).’라는 따위의 [그릇된 견해가] 있게 된다(SN. III. 46쪽).”라는 경문이 그것이다. 이 언급은 접촉이라는 것이 형이상학적 견해의 발생과 긴밀한 상관관계에 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감정적 차원이든 정신적 차원이든 혹은 형이상학적 견해의 차원이든 경험세계의 다양성만큼이나 접촉이 작용하는 방식 또한 다양하다.

이상의 용례들은 경험세계 전반에 걸쳐 접촉이라는 개념이 지니는 중요성과 의의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십이연기에서의 접촉은 느낌과 갈애와 집착과 있음이라는 나머지 지분들을 길러 내는 자양분에 해당한다. 따라서 접촉이란 십이연기의 최후 귀결에 해당하는 태어남과 늙음․죽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접촉이라는 자양분을 두루 알게 되면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3가지 느낌에 대해서도 두루 알게 된다. 거룩한 제자가 3가지 느낌에 대해 두루 알게 되면 그에게는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고 나는 말한다(SN. II. 99).”

여섯 영역(六入)(87)

여섯 영역(六入, saḷāyatana)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의 여섯 영역이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5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을 가리킨다. 여섯 영역은 접촉(觸)의 조건이 되며 또한 그들 자체는 정신․물질현상(名色)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여섯 영역이란 눈이나 귀 따위의 감각기능을 중심으로 하는 인식 발생의 장(場)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섯 영역이란 무엇인가? 눈의 영역(眼處), 귀의 영역(耳處), 코의 영역(鼻處), 혀의 영역(舌處), 몸의 영역(身處), 마음의 영역(意處)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여섯 영역이라고 한다(SN. II. 3).”

여섯 영역은 십이처(十二處)의 가르침과 중첩된다고 할 수 있다. 십이처란 눈(眼)과 시각대상(色), 귀(耳)와 소리(聲), 코(鼻)와 냄새(香), 혀(舌)와 맛(味), 몸(身)과 감촉(觸), 마음(意)과 마음현상(法)을 가리킨다. 이들은 인간의 경험내용을 6쌍의 12가지로 단순 분류한 것이다. 이들 각각은 경험이 성립하는 토대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인식의 한계를 일깨운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무지하면 경험하는 모든 것이 스스로의 인식능력과 맞물려 발생한다는 사실을 놓치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을 배제한 가운데 절대불변의 형이상학적 실체를 추구하게 된다.

그런데 십이처에서는 각각의 세부 항목들이 어떻게 해서 구체화되는지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 십이연기의 여섯 영역은 바로 이 부분을 보완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섯 영역은 무명(無明)에서부터 늙음․죽음(老死)으로 귀결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등장한다. 특히 5번째 지분인 여섯 영역은 4번째 지분인 정신․물질현상(名色)과 구분이 되며 바로 그들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물질현상에 속한 눈․귀․코 따위의 감각기능 자체와 여섯 영역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여섯 영역이란 정신․물질현상이 6가지 감각적 채널의 방식으로 분화되어 드러난 양상에 해당한다.

여섯 영역은 단순히 눈․귀․코 따위의 감각기능(六根)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들은 보거나 듣거나 맡는 따위의 여섯 대상(六境)과 함께, 눈의 의식이나 귀의 의식 등의 여섯 의식(六識)까지를 망라한다. 즉 감각기능(根)과 대상(境)과 의식(識)이 6가지 패턴으로 어우러지는 장(場)이 곧 여섯 영역이다. 이것에 앞선 지분들로는 4번째의 정신․물질현상(名色)과 3번째의 의식(識) 따위가 있다. 이러한 개별적 요인들은 여섯 영역에 이르러 비로소 통합적으로 엮이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 이후의 지분인 접촉(觸)의 발생 조건이 형성되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눈․귀․코 따위에 대해 무상하고(無常) 괴롭고(苦) 무아(無我)라고 누누이 강조한다(SN. I. 1이하). 또한 이들의 달콤함(味)과 위험함(患)을 바른 지혜로 알아차려야 한다고 되풀이한다. 그러나 생리적 기능으로서의 눈 따위가 괴로움일 수 없다. 또한 이들 자체가 달콤하거나 위험한 것일 수도 없다. 그렇지만 바로 이들이 여섯 영역에 배속되는 감각기능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들 각각에는 무명(無明)에서부터 지음(行)을 걸쳐 의식과 정신․물질현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계기들이 전제된다. 이러한 계기들이 영향을 미치는 한에서 눈․귀․코 따위는 경험세계를 왜곡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정신․물질현상(名色)(88)

정신․물질현상(名色, nāmarūpa)이란 무엇인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4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정신․물질현상은 여섯 영역(六入)의 조건이 되며 또한 그들 자체는 의식(識)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정신이란 빨리어(Pāli)로 나마(nāma)라고 부르며 ‘이름’ 혹은 ‘명칭’이라는 원래의 의미를 지닌다. 한편 이것과 짝을 이루는 물질현상이란 루빠(rūpa)를 번역한 것으로 ‘명칭에 의해 지시되는 형태’를 가리킨다. 정신은 어떠한 형태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고, 물질현상은 그것을 통해 지시되는 형태 혹은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물질현상은 이름과 형태를 지닌 개체화된 사물의 성립 근거가 된다. 이것에 대한 일반적인 해설은 다음과 같다. “정신․물질현상이란 무엇인가. 느낌(受)․지각(想)․의도(思)․접촉(觸)․마음냄(作意)이 있다. 이것을 정신(名)이라고 한다. [땅(地)․물(水)․불(火)․바람(風)의] 4가지 요소(四大)와 4가지 요소에 의존한 물질현상(四大所造色)이 있다. 이것을 물질현상(色)이라고 한다(SN. II. 3-4).” 이러한 정신․물질현상은 서로 맞물리는 방식으로 작용하면서 이후 전개되는 경험적 과정의 조건이 된다.

경우에 따라 정신․물질현상은 ‘식별하여 아는 작용’으로서의 의식(識)을 발생시킨다고 기술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3번째 지분인 의식을 조건으로 4번째 지분인 정신․물질현상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순서가 역전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정신․물질현상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고 또한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물질현상이 있다(SN. II. 104).”라는 경문이 그것이다. 따라서 정신․물질현상과 의식이 발생하는 순서는 반드시 일방적이지 않으며 서로를 의존하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상호의존성은 괴로움의 발생을 10단계로 설명하는 십지연기(十支緣起)에서 두드러진다.

초기불교에서의 정신(名)이란 경험세계를 초월한 정신적 실체를 가리키지 않는다. 다만 이것은 물질현상과 짝을 이루는 경험적 요인을 의미할 뿐이다. 후대의 해설가들에 따르면 정신의 세부 항목인 느낌․지각․의도․접촉․마음냄 따위의 다섯은 인식의 발생에서 전제되어야 할 최소한의 마음요소(遍行心所, sarvatragata-caitta)에 해당한다. 한편 물질현상(色)이란 땅․물․불․바람의 4가지 요소(四大)와 이들에 의존한 것(四大所造色)들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들 또한 차가움이라든가 뜨거움 따위로 경험된다고 언급되듯이 순전한 물리적 실체는 아니다(SN. III. 86). 물질현상 역시 순수한 객관적 사물이 아니며 인식능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렇듯 정신이란 영혼 따위의 정신적 실체가 아니며 물질현상 역시 객관적․물리적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현실의 경험을 위해 전제되는 정신적․육체적 능력으로 규정할 수 있다. 바로 이들이 작용하는 한에서 여섯 영역(六入)의 단계를 통한 일련의 정서적․인지적 과정이 뒤따르게 된다. 이것은 육체와 정신을 아우르는 인지적․생리적 작용이 현실의 경험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십이연기의 가르침은 늙음․죽음(老死)이라는 실존의 괴로움이 내부적 원인으로부터 구체화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한편 정신․물질현상에 배속되는 느낌과 접촉은 십이연기의 정식 지분들 가운데 7번째와 6번째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독립된 지분으로서의 느낌과 접촉은 여섯 영역이라는 감각채널을 거친 이후의 것으로 실제적이다. 그러나 정신․물질현상의 단계에 속한 느낌과 접촉은 꿈속에서와 같이 오직 마음에 속한 것으로 실재성을 지니지 않는다. 또한 후대의 해설가들은 이러한 정신․물질현상의 단계에서 그 이후의 지분들로 넘어가는 과정을 실재론적(實在論的) 분화(分化)의 방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예컨대 수태(受胎)와 더불어 시작된 현재생의 의식(識)이 정신․물질현상으로 분화되고, 다시 이것이 눈이나 귀 따위의 감각기능으로 분열․증식해 나간다고 풀이한다.

이러한 해석은 십이연기의 지분들이 삼세(三世)에 걸친 인과적 관계로 엮인다는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과 맥락을 같이한다. 후대의 해설가들에 의해 고안된 이것에 따르면 무명(無明)과 지음(行)이라는 두 지분은 과거생에, 의식(識)에서부터 정신․물질현상을 걸쳐 있음(有)에 이르는 여덟 지분은 현재생에, 태어남(生)과 늙음․죽음(老死)이라는 두 지분은 미래생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해석은 현재생의 의식이 과거생의 무명과 지음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명하게 규명하지 못한다. 또한 의식에서 정신․물질현상으로 분화되는 과정을 오로지 태아(胎兒)의 발육 과정에 한정시키는 문제점을 노출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감안할 때 정신․물질현상의 단계에서 여섯 영역(六入)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매순간의 인식과 경험이 구체화되는 계기적 양상 정도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의식(識)(89)

의식(識, viññāṇa)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의 의식이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3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을 가리킨다. 의식은 정신․물질현상(名色)의 조건이 되며 또한 그것 자체는 지음(行)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의식이란 어떠한 현상을 ‘의식하거나 식별하여 아는 것’을 가리킨다. 예컨대 시거나 맵거나 쓰거나 달거나 쏘거나 짠 것 따위를 알게 해주는 것으로 설명된다(SN. III. 87). 이와 같은 의식의 작용은 눈(眼)이나 귀(耳) 따위를 통해서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보아야 한다.

의식은 감각기능(根)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눈의 의식(眼識), 귀의 의식(耳識), 코의 의식(鼻識), 혀의 의식(舌識), 몸의 의식(身識), 마음의 의식(意識)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의식이라고 한다(SN. II. 4).” 이렇듯 의식은 감각기능에 따라 여섯 갈래로 나뉜다. 그러나 십이연기에 배속된 의식은 실제 감각기능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십이연기에서의 의식은 여섯 영역(六入)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것으로 과거의 삶에서 누적된 지음(行)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이들은 꿈에서처럼 감각기관에 직접적으로 의존하지 않고서 마음으로만 작동하는 여섯 갈래의 정신적 흐름들이다.

의식이라는 용어의 대표적인 쓰임은 다섯의 경험적 요인들 즉 오온(五蘊)의 하나라는 것이다. 오온의 의식이란 물질현상(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 가운데 마지막의 그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오온의 가르침에서는 의식의 발생 경위에 대해 따지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실존을 구성하는 주요 내용의 하나로서 의식이 존재하며, 바로 그것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면 괴로움이 증폭된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초점을 모은다. 오온의 가르침은 경험적 요인들 각각에 대해 ‘나의 것’이 아니며 ‘나’를 개입시킬 수 없다는 점을 일깨울 뿐이다.

또한 다른 일부의 경전에서는 의식이란 눈(眼)․귀(耳)․코(鼻) 등의 감각기능(根)이 시각대상(色)․소리(聲)․냄새(香) 따위의 대상(境)에 대해 일으키는 반응으로 설명한다(MN. I. 111-112). 그런데 이때의 의식 역시 오온에서와 마찬가지로 경험적 내용으로서의 그것에 국한될 뿐이다. 그러나 십이연기의 의식은 정신․물질현상(名色)과 여섯 영역(六入) 너머에서 작동한다. 이 경우의 의식이란 과거생 혹은 현재생에서 누적시켜 온 몸(身)과 입(口)과 마음(意)을 통한 잠재적 성향(三行)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이것은 비록 6가지 감각적 형식을 취하지만 정신적 흐름으로만 존속하면서 현재 경험하고 있는 사실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후대의 주석가들은 바로 이것을 윤회의 와중에 새로운 생명체로 이어지는 재생연결의식(結生識)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된 의식은 과거생과 현재생을 관통하는 윤회의 주체로 여겨질 수 있다. 실제로 경전에는 의식을 이와 같이 오인한 사례들이 나타난다(SN. I. 120-122). 그러나 이 경우의 의식이란 경험세계 안에서 그 존재의 여부를 입증하기 어렵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실체의 일종으로 여겨질 수 있는 소지가 크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의식에 대해서는 ‘의식하거나 식별하여 아는 것’이라는 원래의 의미만을 엄격히 고수할 필요가 있다. 곧 마음속으로 이루어지는 갖가지 방식의 앎에 국한시켜야 한다.

십이연기에 따르면 무명이 소멸하면 지음이 소멸하고 지음이 소멸하면 의식도 소멸한다(SN. II. 1-2). 따라서 십이연기의 의식이란 무명이 존속하는 한에서만 작용하는 제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음을 조건으로 하는 이것은 “지음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왜곡되게 의식하거나 식별하여 아는 것”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바로 이 의식에 의존하여 십이연기의 나머지 지분들이 순차적으로 뒤따르게 된다. 이와 같은 의식은 결코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일시적이고 가변적이다. 따라서 의식의 소멸과 함께 슬픔․비탄․괴로움․불쾌․번민 따위로 귀결되는 나머지 지분들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SN. II. 2).

의식이 지니는 의존적 성격을 망각하게 되면 무명과 지음이 소멸하더라도 의식은 계속된다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현재의 삶이 지속되는 한 의식은 변함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십이연기의 과정에 육체적인 죽음과 탄생을 개입시켜야만 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설령 무명을 제거하더라도 현재의 의식은 소멸하지 않으며 다만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게 될 의식’ 즉 재생연결의식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십이연기의 연쇄적 과정은 다음과 같이 보완되어야 한다. “무명이 소멸하면 지음이 소멸하고 지음이 소멸하면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게 될’ 의식이 소멸한다.”

지음(行)(90)

지음(行, saṅkhārā)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의 지음이란 무명으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2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을 가리킨다. 지음은 의식(識)의 조건이 되며 또한 그것 자체는 무명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지음이라는 용어는 맥락에 따라 다양한 쓰임으로 나타난다. 먼저 의식의 조건이 되는 용례로는 다음을 꼽을 수 있다. “이것은 어떤 것을 의도하고 어떤 것을 계획하고 어떤 것에 대해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의식을 확립시키는 바탕이 된다(SN. II. 65).” 여기에서의 지음이란 내면으로 짓는 의도와 계획과 잠재적 성향 따위를 가리킨다. 이것의 누적을 통해 의식이 특정한 방식으로 굳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십이연기를 해설하는 대부분의 경전에서는 지음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지음에는 이러한 세 가지가 있다. 몸에 의한 지음(身行), 말에 의한 지음(口行), 마음에 의한 지음(意行)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지음이라고 한다(SN. II. 4).” 이것을 통해 지음의 작용이 몸과 말과 마음이라는 세 영역에 걸쳐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몸으로 드러나는 습관적 성향이라든가, 말로써 드러나는 은밀한 의향이라든가, 마음으로 꿈틀대는 의도 따위가 그것이다. 이들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의식이란 ‘세 겹으로 이루어진 지음’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의식하거나 식별하여 아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지음이란 무명에 기생하여 자라난다. 이것은 진리에 어두운 까닭에 품게 되는 내면의 정서와 감정을 망라한다. 예컨대 어떤 이유로 이웃 간에 다툼이 벌어졌다고 치자. 한번 뒤틀린 관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앙금은 깊어만 간다. 마주칠 때마다 불쾌함이 더해 간다. 심지어는 이웃으로 산다는 자체가 불편하게 생각된다. 제발 이사라도 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절실해진다. 그런데 바로 그 이웃집 아줌마가 어렸을 적 헤어졌던 친누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그 동안 품었던 불쾌한 감정과 생각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미웠던 그 모습마저 달라져 보일 것이다. 이렇듯 지음이란 진리에 눈을 뜨게 되는 순간 화로에 떨어지는 눈처럼 녹아 없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십이연기의 지음은 후대의 해석가들에 의해 전생의 업(業)과 동일시되곤 하였다. 이것은 과거생에서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행위로서 현재생이나 미래생에서 응보적 작용력을 지닌다. 바로 그 결과가 어머니 모태에서 현재의 몸이 이루어지는 첫 순간 작동하는 재생연결의식(結生識)이다. 이러한 의식은 미래생에 또 다른 여인이 ‘나’를 잉태하는 순간 현재생에서 지은 ‘나’의 업을 떠안고서 작동하게 될 그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연기(緣起) 해석이 곧 삼세양중인과론(三世兩重因果論)이다. 이러한 설명은 업과 윤회의 관념을 십이연기의 가르침에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낸다는 점에서 나름의 설득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해석을 따르든 십이연기에서의 지음이란 의식이 형성되기 이전의 것이다. 따라서 내부적이고 잠재적인 작용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지음이란 경험세계의 구성요인으로서 외부적 현상 일반에도 적용된다. 예컨대 제행무상(諸行無常) 즉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sabbe saṅkhārā aniccā).”라고 할 때의 지음이 그것이다. 이점에서는 물질현상(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 따위의 오온설(五蘊說)에 등장하는 지음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지음이라는 개념은 잠재적인 측면은 물론 구체화된 현상까지를 망라하는 포괄성을 지닌다. 지음이라는 용어에 비추어 ‘세상은 내면에서 지어가는 방식대로 드러나는 것’임을 생각해 보게 된다.

무명(無明)(91)

무명(無明, avijjā)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의 무명이란 늙음․죽음(老死)으로 귀결되는 십이연기의 지분들 가운데 맨 처음 등장하는 항목을 가리킨다. 이것을 조건으로 지음(行) 이하 의식(識)이라든가 정신․물질현상(名色) 따위로 이어지는 십이연기의 연쇄적 과정이 뒤따르게 된다. 나머지 십이연기의 모든 지분들은 바로 이 무명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무명이 있을 때 나머지 지분들이 있고 무명이 없으면 나머지 모든 지분들도 없다. 무명이 발생하므로 나머지 지분들이 발생하고 무명이 소멸하면 나머지 모든 지분들도 소멸한다.”

결국 늙음․죽음(老死)이라는 괴로움의 실존은 무명이라는 장막에 갇힌 까닭에 맞이하게 되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이다. 십이연기의 가르침은 이러한 최초의 무명을 제거하는 것을 본래의 취지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무명이란 빨리어(Pāli)로 아비디야(avidyā)이며 ‘지식의 결핍(nescience)’으로 옮길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과학적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십이연기의 무명이란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능동적인 힘을 지닌다. 이것은 어떠한 사실에 대해 순박하게 모르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무명이란 오해와 편견에 사로잡혀 부적절한 사고와 정서에 휩쓸리는 경우를 가리킨다.

무명의 의미는 뒤따라 발생하는 지음(行)을 떠올릴 때 더욱 분명해진다. 예컨대 누군가를 오해하여 그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해졌다고 치자. 그러한 불편한 심경은 몸(身)이나 말(口)이나 마음(意)의 방식으로 작용하면서 서로의 관계를 알게 모르게 더욱 뒤틀리게 한다. 거기에서 그 상황을 야기한 최초의 오해를 무명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로 인해 발생한 불편하고 부적절한 정서와 행위는 지음 이하의 지분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십이연기의 가르침은 이와 같은 왜곡된 인식과 존재의 과정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무명이란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로 일관되게 설명된다(SN. II. 4 등). 즉 인간 존재가 괴로움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苦聖諦), 그것의 원인은 내면의 갈애에 있다는 것(集聖諦), 그러한 괴로움은 극복될 수 있다는 것(滅聖諦),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존재한다는 것(道聖諦)에 대해 모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결국 사성제를 모르는 까닭에 바람직하지 않은 정신적․육체적 과정들이 촉발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무명이란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서 헤매는 상태에 다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성제에 대한 무지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탐욕과 갈애를 제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사실 사성제를 깨닫는 과정에는 괴로움에 대한 완전한 이해(pariññāta), 갈애의 끊음(pahīna), 소멸의 실현(sacchikata), 팔정도의 닦음(bhāvita)이 포함된다(SN. V. 421 이하). 따라서 무명의 제거를 통해 십이연기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은 이러한 사성제의 체득과 동일한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 일부 경전에서는 십이연기의 전체 내용을 사성제의 구조에 편입시켜 설명하기도 한다(AN. I. 177).

십이연기에 대한 통찰은 단순한 두뇌게임이 아니다. 이것은 사성제에 대한 깨달음을 전제로 한다. 즉 깨달음의 체험이 있어야만 지음(行)이라든가 의식(識)을 걸쳐 늙음․죽음(老死)으로 연결되는 연쇄적 과정에 매이지 않게 된다. 비로소 초연한 관찰자로 남아 괴로움이 증폭되는 양상을 꿰뚫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십이연기는 깨달음을 이미 실현한 상태에서 얻는 통찰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가르침에 대한 묘사는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의 붓다가 스스로의 깨달음을 반조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등장한다(Vin. I. 1; Ud. 1).

법(法)의 이해(92)

법(法, dhamma)이란 무엇인가. 불(佛)․법(法)․승(僧)이라는 삼보(三寶)의 하나로서 불교라는 종교의 구심점이 된다. “법을 귀의처로 삼아 의지합니다(dhammaṃ saraṇaṃ gacchāmi).”라는 경문이 곧 그것이다. 이처럼 법이란 귀의의 대상으로서 현실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그러한 이유에서 반드시 실재해야 한다. “목숨을 다하여 귀의합니다(pāṇupetaṃ saraṇaṃ gataṃ).”라고 하는 믿음의 맹세 또한 바로 이 법에 근거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귀의의 대상이 되는 법이란 무엇인가. 불교라는 종교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그와 동일한 인격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법이란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붓다의 가르침은 경전으로 집성되어 후대 사람들에게도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 또한 경전의 가르침은 붓다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경전은 그 자체로서 법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사성제(四聖諦)와 십이연기(十二緣起)는 경전의 가르침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정된다. 이들은 괴로움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의 원인과 소멸에 이르는 과정을 밝힌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즉 귀의의 대상이 되는 법이란 ‘괴로움을 극복하고 즐거움을 얻도록 하는 것(離苦得樂)’이다. 붓다는 바로 이것을 통해 스스로의 괴로움을 해소했고 또한 이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점에서 나머지 다른 가르침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이란 붓다에 의해 고안된 것이 아니며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먼 옛적부터 깨달은 분들이 걸었던 길을 발견했을 뿐이라고 한다(SN. II. 106).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에는 일정한 양상과 패턴이 존재한다. 또한 모든 현상은 나름의 인과적(因果的) 절차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진다. 붓다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해 괴로움을 차단하고 제거할 수 있었다. 법이란 붓다가 발견해 낸 인과적 절차에 해당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아가 사물이 발생하고 사라지는 원리 혹은 법칙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후대의 해석가들은 법에 대해 ‘실체(實體)로서 있는 것(dravyaḥ sat)’, ‘자신의 특성을 유지하는 것(svalakṣanadhāraṇa)’ 등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의 법이란 고정된 물리적 법칙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무명(無明)으로부터 시작하여 늙음․죽음(老死)으로 귀결되는 십이연기의 전개 과정은 고정된 법칙이 아니다. 즉 7번째 지분인 느낌(受)이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8번째 지분인 갈애(愛)가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이유는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법이란 조건에 의한 가능성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법이란 논의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때의 법에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뉘앙스가 망라된다. 따라서 바람직하지 않은 사고와 행위를 표현하는 용어들에도 법이라는 수식이 적용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 가지 법을 갖춘 자는 저절로 지옥에 떨어진다(AV. V. 303).”라는 문구가 그것이다. 이 경우의 법이란 옳지 않은 불건전한 사고와 행위를 가리킨다. 이렇듯 법의 의미는 긍정적인 측면에만 제한되지 않으며 일체의 대상을 지칭하는 용도로 확대되기도 한다.

이러한 용례들에 근거하여 아비담마불교(Abhidhamma)에서는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유형의 정신적․물질적 현상을 개념화한다. 또한 그렇게 해서 얻어진 개념들을 통해 법의 목록을 작성한다. 예컨대 믿음(信)이라든가 마음지킴(念) 따위의 바람직한 마음요소(心所)들은 물론 자만(慢)이라든가 질투(嫉) 따위의 부정적인 요소들까지도 한데 엮어 82가지 혹은 75가지에 이르는 법의 항목들을 나열한다. 그들에 따르면 법이란 실재하는 현상에 대한 개념화된 명칭이며, 또한 개념으로서의 법은 반드시 구체적인 지시 대상을 지닌다.

아비담마불교에 따르면 중생들이 겪는 대부분의 괴로움은 허구적 관념들에 휘둘린 결과이다. 자아(attan)이니 영혼(jīva)이니 하는 것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 내세우는 이러한 실체 관념은 인습(saṁvṛti)이나 명칭(paññatti)이 빚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이들은 아무런 실재성을 지니지 않음에도 집착과 갈등의 원인이 되곤 한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러한 허구적 관념들을 제거하고자 경험적 사실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개념적 요소들을 법의 항목으로 내세웠다. 마음(心, citta), 마음요소(心所, cetasika), 물질현상(色, rūpa) 따위를 구성하는 세부 개념들이 그것이다.

아비담마의 법 해석은 있는 그대로(yathabhūtaṁ)의 실재만을 다루었던 붓다의 가르침을 계승하려는 취지에서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개념으로서의 법 또한 인위적 약정에 불과하며 아무런 실재성도 없다고 보았던 대승불교와 부딪히면서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법이란 단순․명확하고 동질적이며 경험적 사실에 직접 대응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법 또한 분별(分別, vikalpa)의 산물이며 그것에 대한 지나친 추구는 개념적 사물을 실재(reality) 자체와 혼동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대승불교에서 볼 때 아비담마의 법 해석은 관념적 유희의 또 다른 양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93)

유위(有爲)는 무엇이고 무위(無爲)는 무엇인가. 유위란 빨리어(Pāli)로 상카따(saṅkhata)이며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지어낸’, ‘만들어낸’, ‘조작된’ 따위로 옮길 수 있다. 한편 무위란 부정형 접두사가 첨가된 아상카따(asaṅkhata)로 ‘지어내지 않은’, ‘만들어내지 않은’, ‘조작되지 않은’ 따위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유위란 ‘만들거나 지어낸 인위적인 것’을 의미하고 무위란 ‘지어내지도 조작되지도 않은 본래적인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범부들은 스스로의 눈높이가 허락하는 범위에서만 인식한다. 이것은 개구리가 움직이는 물체만을 식별할 수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렇듯 중생들은 자신의 눈 위에 덧씌워진 색안경을 통해 본 색깔만을 진실한 것으로 오인하고 고집한다. 그러나 그렇게 포착된 색깔이란 사실 색안경을 통해 ‘조작된 것’에 불과하다. 경험세계를 구성하는 다섯의 구성요소들 즉 오온(五蘊)이 이러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경험세계는 결국 스스로 ‘지어낸 것’이고 ‘조작해낸 것’이다. 유위란 오온을 비롯하여 경험세계를 구성하는 일체의 대상(dhamma)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무위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색안경을 벗고서 있는 그대로를 마주할 때 드러나는 세계로 설명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구들이여, 무위란 무엇인가. 탐냄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다. 비구들이여, 바로 이것이 무위이다(SN. IV. 359).” 이것에 비추어 ‘지어낸 것’도 아니고 ‘조작된 것’도 아닌 무위란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가라앉았을 때 나타나는 경지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무위란 초기불교 이래로 피안(彼岸)의 세계로 일컬어진다. 번뇌에 물든 차안(此岸)의 중생들이 떨치고 건너가야 할 이상향으로 묘사되곤 한다(SN. IV. 373.).

초기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탐냄․성냄․어리석음이 소멸된 경지는 열반(涅槃)으로 풀이되곤 한다(SN. IV. 251). 따라서 무위란 열반과 동일한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열반과 무위의 실현은 초기불교의 궁극 목적에 해당한다. 실천․수행이란 결국 유위로부터 무위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도, 삼매의 닦음도, 사념처와 팔정도도 무위에 이르는 길로 설명된다(SN. IV. 360). 이들을 닦음으로써 스스로 지어낸 경험세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면 그것으로 무위에 도달한 셈이다.

그러나 무위의 성취란 쉽지 않다. 인간이 살아가는 경험세계 자체가 유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구사하는 개념들 역시 유위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심지어 지금 언급하고 있는 ‘무위’라는 명칭마저 언어적 관습을 통해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 바로 이것에도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얼마든지 개입될 수 있다. 무위를 마치 손안에 거머쥘 수 있는 전리품인 양 오해하여 ‘나는 무위를 성취하였다.’라고 선언하는 사례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개념적 사고의 틀 안에서 획득하는 무위란 착각에 불과하다.

무위란 만질 수도 잡을 수도 없다. 무위를 잡으려는 시도는 물속에 비친 달을 잡으려는 어리석음에 비유할 수 있다. 무위란 그러한 시도들마저 완전히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위란 의지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비우고 버리는 것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무위에 이르는 길로 언급되곤 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삼매의 닦음, 사념처와 팔정도 따위도 이러한 맥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들이 무위에 도달하는 길일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스스로를 비우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무아․윤회 논쟁(94)

무아(無我, anatta)란 무엇이고 윤회(輪廻, saṁsāra)란 무엇인가. 무아란 ‘나’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고 윤회란 그러한 ‘내’가 지속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로는 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모순에 당혹감을 느끼는 듯하다. 만일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윤회가 가능하겠는가. 이러한 당혹감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중대한 모순이 내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으로 연결되는 듯하다. 사실 ‘무아․윤회 논쟁’은 한국불교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쟁점의 하나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나름의 논지를 펼쳤다.

붓다는 오온(五蘊)으로 드러나는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물질현상(色)이든 느낌(受)이든 경험세계의 모든 것은 ‘나’의 바람이나 소망과 상관없이 발생했다가 사라진다.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무지 없다. 요컨대 오온이란 ‘나의 것’이 아니며 또한 그들을 매개로 ‘나’라든가 ‘나의 자아’를 내세울 수 없다. 그렇다고 오온 밖의 또 다른 ‘나’를 설정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설령 그러한 ‘나’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지음(行)이나 의식(識) 따위의 오온이 빚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오온과 별개로 존재하는 ‘나’를 내세우는 것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한 이유에서 무아이다.

윤회(輪廻)란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괴로움의 현실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괴로움의 지속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일컬어 윤회라고 한다. 이것은 무아를 망각한 상태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거짓된 ‘나’를 내려놓지 못한 까닭에 초래되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의 연속이 곧 윤회이다. 초기불교의 궁극 목적인 열반 혹은 해탈이란 바로 이 윤회로부터 벗어난 경지에 다름이 아니다. 무아와 윤회의 가르침은 거짓된 ‘나’에 붙잡힌 상태로부터 벗어나라는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회란 무아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즉 무아와 윤회는 본래부터 모순적이다. 무아의 실현은 곧 윤회가 없는 상태이다. 혹은 반대로 윤회에 매여 있다는 것은 무아를 모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무아와 윤회가 모순된다고 해서 당혹감을 느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만약 이들의 관계에 당혹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곧 이상과 같은 교리적 맥락을 놓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윤회란 없다. 바로 이러한 경지야말로 초기불교에서 지향했던 이상향이다.

후대의 아비담마불교(Abhidhamma)는 윤회의 양상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한다. 그들은 극복해야 할 타깃을 명확히 하려는 취지에서 그러한 작업을 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비담마의 정교한 윤회 해석은 윤회 자체를 옹호하려는 취지로 오인되는 듯하다. 그 결과 아비담마적 분석을 통해 무아와 윤회를 짜깁기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연기설(緣起說)을 바탕으로 무아와 윤회를 회통시키려는 견해들이 그러하다. ‘무아․윤회 논쟁’의 배경에는 이러한 억지스러운 견해들이 자리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연기설은 어디까지나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 과정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붓다는 늙음․죽음이라는 괴로움의 실존을 드러내기 위해 연기의 가르침을 펼쳤다. 이것은 초기불교의 경전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나타나는 사실이다. 연기설을 바탕으로 윤회에 접근해 들어간 아비담마의 교리체계 또한 괴로움이 유전되는 과정을 밝히는 데 초점을 모을 뿐이다. 즉 무아를 망각한 까닭에 벌어지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의 악순환을 조명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의 경전 어디에서도 연기를 통해 무아를 해명하는 직접적인 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무아의 가르침은 연기설이 아닌 오온설과 상관하여 나타나곤 한다. 붓다는 오온으로 드러나는 경험세계에 속지 말라는 취지에서 무아를 가르쳤다. 혹은 자기중심적 편견으로 있는 그대로를 왜곡하지 말라는 뜻에서 오온의 무아를 일깨웠다. 이렇듯 무아설과 연기설은 그 배경이 다르다. 연기설과 무아설을 통합시키려는 시도는 초기불교의 테두리 안에서는 용인되기 힘들다. 결국 이러한 사실을 간과한 ‘무아․윤회 논쟁’은 정당성을 지니기 어렵다. 한국불교학계에서 ‘무아․윤회 논쟁’의 파장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 논쟁 자체에 내포된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초기불교 본래의 가르침에 충실했더라면 이러한 수고로움은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2708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