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우주의 진실을 깨달은 것이 연기법…불교의 핵심 교리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연기법에 대해 『연기법, 우주의 진실』이라는 책에서 저자 신용국은 “연기법은 우주의 진실이고, 따라서 인간이 삶에서 찾는 진리가 연기법이며, 또한 연기법은 인간의 삶과 인간의 존재가 찾는 인과율(因果律)에 대한 해답”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연기법은 우주의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인간이 삶에서 찾는 진리입니다. 인간의 삶은 인과율로 뒤덮여 있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부터 나의 존재에 대한 질문, 세계가 작동하는 인과에 대한 질문, 자연과 우주의 인과에 대한 질문, 사회의 제도나 관습,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질문들로 뒤덮여 있는 것이 인간의 삶인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의 존재 자체도 인과율입니다.
매 순간의 선택에 대하여 자신의 존재성을 결정하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떤 인과율의 상태이며, 세계나 존재, 우주를 이해하는 사상 또한 어떤 인과율적 구조의 관념인 것입니다.
연기법(緣起法)은 인간의 삶과 인간의 존재가 찾는 인과율에 대한 해답입니다. 우주의 진실이기에 인간 존재의 해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주의 진실을 깨달으시고 이를 연기법이라 명명하신 분입니다. 부처님에 의해 우주의 진실이 이 땅에서 비로소 각성되기 시작한 것이며,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류에게 개벽에 다르지 않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깨달으신 후, 부처님의 일생은 연기법의 전파에 있었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승가에게도 불법(佛法)을 지켜 자신을 닦음은 물론 세상에서 법을 밝혀 나갈 것을 유언으로 남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불제자라면 연기법에 대한 확고한 이해는 물론, 연기법의 전법에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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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론(緣起論)은 연기를 중심한 불교 교리체계
연기론(緣起論)이란 연기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 교리 체계이다. 현상적 사물 곧, 유위(有爲)는 모두 인(因: 직접원인)과 연(緣: 간접원인)에 따라 생긴다고 보는 불교의 교설을 말한다.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이며 산스크리트어 patītya-samutpāda(쁘라띠뜨야 삼우뜨빠다)의 번역어로, 불교의 가장 중요한 중심사상이다.
『아함경』에선 석가모니가 연기를 깨달았다고 선언한다. 중도와 더불어 연기는 석가모니가 설한 중요한 우주의 존재 원리이다. 불교는 이 우주만물이 연기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우주는 누가 만들 수도 없고, 누가 없앨 수도 없는 것이다. 우주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不生不滅),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不增不減)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원융무애(圓融無礙: 모든 존재가 서로 방해됨이 없이 일체가 되어 융합한다는 불교의 이상적인 경지 또는 그에 관한 사상)하게 존재할 뿐이다. 불교는 이 우주를 신(神)이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로 연기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연기가 불교의 세계관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연기는 석가모니가 창시한 것이 아니다. 석가모니는 연기법은 이 세상에 나기 전에도 있었으며, 열반한 뒤에도 그대로 존재할 것이라며 “연기법이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잡아함경 제20권)고 설했다. 이와 같이 우주 만물이 서로서로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은 진리로서 정해져 있다. ‘법(法)’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하여 ‘연기법’이라 하고 이에 대한 다양한 학설을 연기론이라고 한다. 따라서 연기법은 우주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는 존재 법칙이다.
모든 삼라만상은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서 서로에게 의지하여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우주 만물 중에 홀로 독립되어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서로 의지하여 상생하면서 연기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며 법을 보는 사람은 연기를 보느니라”(중아함경). “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며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느니라”(상응부경전). 결론적으로 연기를 바로 보는 것이 법을 바로 보는 것이며, 법을 바로 보는 것이 성불(成佛)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연기를 바로 깨치면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수행하는 것도 이 연기법을 몸으로 깨치고 인격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개이다.
◆인연(因緣)과 연기(緣起)는 어떻게 다른가
인연(因緣)과 연기(緣起)는 어떻게 다른가. 연기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이것이라는 것은 다른 무엇 무엇과 더불어(with)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가르침’이다. 인연(因緣)이라는 단어는 인(因·직접원인)과 연(緣· 간접원인)의 결합이고 연기(緣起)는 직접 원인과 간접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바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존재도 혼자서 존재하고 혼자서 사라지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이 인연으로 결합되었다는 것이 불교의 세계관이다.
연기란 단어는 ‘인연소기(또는 인연생기)’의 준말로, 이것(인)과 다른 무엇(연)으로, 더불어 일어난다(소기, 생기)는 뜻이다. 따라서 인연과 연기를 구분 짓는 것은 어떻게 보면 무의미하다 할 수 있다. 실제로 12인연은 12연기라고도 불려진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이 전반적인 불교의 흐름으로, 특히 화엄에 오면 인연과 연기는 조금 다른 뜻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연기는 총체적, 입체적 개념이라면 인연은 부분적, 평면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연기가 3차원적 개념이라면, 인연은 1차원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즉 인연의 얽히고 섞임, 그리고 상호 작용을 비로소 연기라 할 수 있다.
인연(因緣)은 산스크리트어 hetu-pratyaya(헤투 프라티야야)라고 한다. 인(因, hetu)이라는 것은 결과를 만들기 위한 직접적이고 내재적인 원인, 연(緣, pratyaya)은 인을 도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간접적이고 외적인 원인(조건이나 상황)이다.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고 한다.
불교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일체의 사물은 각각의 인연이 합해져 만들어지는 것으로, 항상 변화하고 일순간이라도 멈추지 않는다. 인연이 합해짐에 따라 생기(生起)하였던 것은 인연이 없어짐으로써 소멸한다. 인연에 의해 생기하는 것은 '인연생(因緣生)‘, '연생(緣生)’, '연기(緣起)‘ 등으로 부른다. 대승(大乘)에서는 인연에 의해 생기하는 일체의 존재를 공(空)이라 한다. 또 '인으로서 연'의 의미로, 단지 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연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인(因)과 연(緣), 곧 안에서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과 그 인(因)을 밖에서 도와 결과를 만드는 간접적인 힘이 되는 연줄, 모든 사물은 이 인연에 의해 생멸한다고 한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일체 만물은 모두 상대적 의존관계에 의해 형성된다고 한다. 동시적 의존관계(주관과 객관)와 이시적(異時的) 의존관계(원인과 결과)로 나누어진다.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 직접적 원인을 인(因)이라 하고, 인과 협동하여 결과를 만드는 간접적 원인을 연(緣)이라 한다. 가령 농사의 경우에 종자를 인이라 하고, 비료나 노동력 등을 연이라 한다. 이 경우 아무리 인이 좋다 할지라도 연을 만나지 못하면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따라서 인도 물론 좋아야 하지만 연도 또한 좋아야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면 상생상화(相生相和)의 선연(善緣)을 맺어야 한다. 기계적 의미의 원인과 결과 관계가 아니라 인(因)이 있어서 연(緣)을 만나면 반드시 과(果)가 있다는 말인 인연과를 줄여서 인연이라고도 한다. 인 없이 연만으로는 과가 있을 수 없고, 인이 있다 할지라도 연을 만나지 못하면 역시 과가 있을 수 없다. 인과 연이 있으면 반드시 과가 있고, 과가 있다는 것은 인과 연이 만났다는 뜻이다
불교에선 모든 것이 생기하거나 소멸하는 데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보고, 생멸에 직접 관계하는 것을 인이라고 하며, 인을 도와서 결과를 낳는 간접적 조건을 연으로서 구별하는데, 실제로 무엇이 인이고 무엇이 연인가를 확실히 구분하는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연은 ‘인과 연’, ‘인으로서의 연’의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이 양자를 일괄해서 연이라고 하며, 인연에 의해서 사물이 생기하는 것을 연기(緣起)라고 하며, 발생한 결과를 포함해서 인과라고도 한다. 인연, 연기, 인과는 불교 교리의 가장 근본적인 사고방식인데, 반드시 인(因)에서 과(果)로 가는 시간적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동시적인 상호의존관계, 조건도 의미한다. 인연은 본래의 의미에서 더욱 확대되어서 유래, 내력이나 사물의 도리의 의미로 이용되는데, 인연을 ‘트집’의 의미로 이용하거나 ‘연기가 나쁘다’라는 표현방법은 본래의 의미에서는 멀어진 뜻이다.
연기(緣起)는 산스크리트어 pratītya samutpāda를 뜻에 따라 번역한 것으로 인연생기(因緣生起: 인과 연에 의지하여 생겨남, 인연따라 생겨남)의 준말이다. 한역(漢譯) 경전에서는 발랄저제야삼모파다(鉢剌底帝夜參牟播陀)로 음차하여 표기한 경우도 있다. 산스크리트어: pratītya의 사전적인 뜻은 '의존하다'이고 samutpāda의 사전적인 뜻은 '생겨나다, 발생하다'이다.
연기는 인연생기 즉,인(因: 직접적 원인)과 연(緣: 간접적 원인)에 의지하여 생겨남 또는 인연(因緣: 통칭하여 원인)따라 생겨남의 준말로, '연(緣: 인과 연의 통칭으로서의 원인)해서 생겨나 있다' 혹은 '타(他)와의 관계에서 생겨나 있다'는 현상계의 존재 형태와 그 법칙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 있어서의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因)과 조건(緣)하에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 생겨난다는 것을 말한다. 연기의 법칙, 즉 연기법(緣起法)을 원인과 결과의 법칙 또는 줄여서 인과법칙(因果法則), 인과법(因果法), 인연법(因緣法)이라고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고대 인도에서는 인과법에 대해 여러 이론들이 있었으므로, 연기법은 붓다가 설한 인과법, 또는 불교에서 주장하는 인과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잡아함경』 제12권 제299경 〈연기법경(緣起法經)〉에서 연기법은 자신이나 다른 깨달은 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고 출현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우주(법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보편 법칙, 즉 우주적인 법칙이며, 자신은 단지 이 우주적인 법칙을 완전히 깨달은[等正覺] 후에 그것을 세상 사람들을 위해 12연기설의 형태로 세상에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연기관계(緣起關係)에는 유전연기(流轉緣起)와 환멸연기(還滅緣起)의 두 가지가 있다. 연기관계를 인과관계(因果關係)라고도 하는데, 예를 들어 불교의 근본 교의인 사성제에서 고(苦) · 집(集)의 2제(二諦)의 관계는 괴로움이라는 결과와 괴로움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으로서의 갈애 또는 망집의 관계로서, 미혹되게 하고 괴로움을 겪게 만드는 인과관계 즉 유전연기(流轉緣起)이며, 이에 대해 멸(滅)·도(道)의 2제(二諦)의 관계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이상의 경지인 열반의 증득이라는 결과와 열반을 증득하게 하는 원인으로서의 불교의 수행의 관계로서, 미혹을 벗어나게 하고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는 인과관계 즉 환멸연기(還滅緣起)이다.
연기에 대한 불교 교의를 연기설(緣起說)이라고 한다. 석가모니가 12인연(十二因緣) 또는 12연기(十二緣起)의 연기설을 가르친 이래 불교 역사에는 여러 가지의 연기설이 출현하였다. 부파불교의 업감연기(業感緣起), 중관파의 공사상(空思想), 유식유가행파의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대승기신론의 진여연기(眞如緣起)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화엄종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진언종의 육대연기(六大緣起) 등이 있다.
◆연기론의 형성과 변천
모든 사상(事象)은 항상 서로 관계되어 성립하기 때문에 불변적·고정적 실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공(空) 사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연기사상이다. 초기 불교에서 노사(老死)는 태어나는 것에 의해 일어나며, 또한 괴로움은 사랑의 번뇌에 의해 생기거나 인간의 근원적인 무지(無知·無明)에 의해 생기며, 반대로 번뇌가 없어지면 고통도 없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계열화하여 무명에서부터 노사에 이르는 합계 12항(項)을 세는 연기설(緣起說)이 확립되었다.
12항의 각 항을 생략해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며(此起故彼起),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도 없어진다(此滅故彼滅)”(『잡아함경』 335)라고도 한다. 다만, 초기의 여러 경전에는 그 밖의 잡다한 연기설도 혼재해 있다. 부파불교(部派佛敎) 가운데 가장 큰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업(業)이라는 설(說)이 추가되었고, 이 십이지를 우리들의 과거ㆍ현재ㆍ미래의 3세(世)에 걸친 것으로 각기 나누어 시간적인 생기(生起)를 중심으로 연기설을 풀이하여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을 확립했다.
그밖에 육인(六因)ㆍ사연(四緣)ㆍ오과(五果)를 헤아리고 인과 연의 결합에서 과(果)가 생기하는 현상을 자세히 고찰한다. 석가모니가 십이인연(十二因緣) 또는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연기설을 가르친 이래 불교 역사에는 여러 가지의 연기설이 출현했다. 구사종(俱舍宗)의 업감연기(業感緣起), 유식종(唯識宗)의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ㆍ『대승기신론』의 진여연기(眞如緣起)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화엄종(華嚴宗)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진언종(眞言宗)의 육대연기(六大緣起) 등이 있다.
⓵ 인과율(因果律)
일체 존재는 생멸하고 변화하여 무상하다. 그러나 계속 변화하지만 제멋대로가 아니고 ‘일정한 법칙 속에서 변화한다’는 것이 연기(緣起)이고 인과율(因果律)이다. 주체적 인간과 객체적 대상 사이에는 능동적 작용이 가해지면 그에 상응하는 필연적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이고 인간과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이런 관계가 성립한다. 그리고 인간의 주체적 의지적 작용을 업(業·karma)이라 부르고 필연적 결과를 보(報·vipaka)라고 부른다. 이것이 업보(業報)라고 하는 것이다.
⓶ 인연화합(因緣和合)
이 인과율이 적용되는 객체가 연(緣)이다. 인(因)과 연(緣)이 화합해서 보(報)가 나타나는 것이다. 우유가 치즈나 버터로 변하려면 일정한 온도와 환경이라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인이라 하고 다음에 우유라는 연이 있어 치즈가 된다. 즉 인과 연이 합해 보가 나타나는 것이다. 인은 1차적 원인이요 연은 2차적 원인이다.
⓷의타기성(依他起性)의 세계
사물의 변화는 이렇게 원인과 조건이 합하여 결과인 보(報)를 만든다. 그러나 보는 다시 하나의 새로운 인(因)이 되어 다른 연과 화합하여 또 다른 보를 만들어 상호 영향을 미치며 존재하게 된다. 이런 구조로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가지고 세상이 상호 연관되어 존재하니 의타기성(依他起性)의 세계라고 한다. 결국 모든 존재는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 되어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가지고 존재하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절대적 자존자(自存者)는 없다, 결과물인 동시에 원인이기도한 이 의타기성(依他起性)의 원칙은 우주 존재계의 법칙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나비효과’라는 이론도 결국 이것이다. 적도의 바다에 햇빛이 내려쬐면 수증기가 되어 구름이 되고 구름은 찬 공기를 만나 비를 만든다. 다시 비는 대지를 적시고 식물도 키우지만 기압차를 만들어 돌풍도 만들고 태풍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주는 에너지로 꽉차있다. 이 에너지가 연(緣)을 만나 새로운 물체가 되고 그 물체는 또 다른 연을 만나 변화하고 새로운 인(因)이 된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어떠한 우주의 존재도 이 법에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법계(法界)이다. 불교의 12연기설은 인간 존재에 대한 연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도 이 법의 예외가 아니므로 성경에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한 것이다. 인과율(因果律)의 법칙은 불교의 법만이 아니라 기독교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법인 것이다.
연기법 수행
연기법의 수행은 자신이 경계에 부딪힐 때마다 끊임없이 그 경계를 지켜보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경계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으로 대표되는 모든 종류의 존재론적 관념들과 그로부터 부정적인 감정들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존재론적 관념은 자신의 존재는 물론 자신과 일대일(1:1)로 대칭하는 모든 존재들도 개별의 유아(有我)로 생각하는 관념이어서 존재를 우주의 한 티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관념들이다. 존재를 개별의 유아로 생각하는 관점에선 우주의 보편 절대가 인간의 외부나 내부에 대칭하여 존재해야만 하는 반면, 존재를 연기 무아(無我)로 생각하는 관점에선 우주의 보편 절대가 인간의 외부나 내부에 따로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무아의 관점에서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우주적 존재여야 한다.
존재론적 관념들과 그로부터 부정적인 감정들은 존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존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존재를 불행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존재를 분노, 탐욕, 어리석음에 매몰되도록 하여 스스로를 상(傷)하게 만드는 관념들이며, 따라서 존재가 존재의 실상인 우주적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관념들이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인 모든 관념들이나 그로부터의 부정적 감정들을 극복하고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연기법적 사고이며, 존재방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법적 존재방식을 실천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삼법인(三法印: 불교의 근본교리를 이루는 세 가지 진리로서 ①제행무상諸行無常, ②제법무아諸法無我, ③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하고 이 세 가지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더하면 사법인이 됨), 중도, 사성제, 십이지연기, 팔불게(八不偈) 등이라고 할 수 있다.
팔불게는 용수(龍樹, AD 150~25: 용수는 범어 나가라주나Nagarjuna의 漢譯, 인도의 대승불교의 철학적 이론을 정립했고 화엄경을 쓴 것으로 알려짐) 보살의 중관론(中觀論) 초품에 나오는 중도사상(中道思想: 有나 空에 치우치지 않는 절대 진실의 도리)을 표방하는 팔불게이다.
이는 바로 공사상(空思想)을 천명한 것으로 생멸(生滅)·단상(斷常)·일이(一異)·내거(來去) 등의 여덟 글자가 부정적으로 표시된 것이며 이 팔불(八不)에 의해 도출된 사상이 곧 ‘팔부중도(八不中道)’이다. 연기(緣起)하여 생(生)한 일체의 모든 법은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 것으로서 어떠한 자성(自性)이 있지 않은 공(空)임을 표명한 것이다.
연기법은 우주의 궁극 성품이 작용하는 도(道)이다. 견성 수행이 궁극 성품을 직접 관(觀)하여 그 성품에 합체되기를 원하는 수행이라면, 연기법 수행은 궁극 성품이 작용하는 도를 관(觀)하여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궁극성품화 하는 수행이다. 인간의 존재는 무아이므로, 연기법을 자신의 존재성으로 취하는 수행이야말로 인간의 존재를 궁극성품화 하는 수행이라는 것이 연기법 수행의 논리이다. 연기법 수행은 석가모니 말씀에 주목하는 수행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궁극의 실체나 궁극의 절대에 대해서는 있다 없다는 생각조차도 내지 말고 오직 연기법에 의지할 것을 당부했다.
물론 연기 무아의 우주를 이루는 궁극 성품이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연기존재인 인간이 궁극 성품을 직접 관하거나 합체하려는 노력은 궁극 성품과 연기존재인 인간이 서로 대(對)를 짓게 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노력이나 수행은 연기법에 위배됨은 물론 왜곡된 관념을 궁극 성품으로 잘못 취하는 결과를 낳게 하는 것이다. |
견성(見性)을 수행으로 삼는 이들은 궁극 성품 자체가 무애자재하거나 청정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래서 궁극 성품을 보거나 합체되는 것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연기를 이루는 궁극 성품이라면 이는 무애자재하거나 혹은 청정하지도 않아야 할 것이다. 무애자재한 본성이라면 구속을 내지 못할 것이고 청정한 본성이라면 더러움을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 성품은 무애자재도 아니고, 구속도 아니며, 청정도 아니고, 더러움도 아닌 것이다.
연기법의 수행을 위해선 머릿속에서 궁극 성품을 지칭하여 생각하는 일체의 관념을 버려야만 한다. 청정 자성, 마음의 본래자리, 여래장, 진여불성, 순수의식 등의 일체 관념들은 형용할 수 없고 취할 수 없는 궁극성품을 지칭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 관념은 연기법이 만법을 움직이는 절대의 법이 아니라 궁극 성품의 작용하는 도(道), 즉 비법(非法)의 법임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들에 불과한 것이지, 수행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관념들이다.
연기법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관념들을 머리에 이고 맹신한다면, 이는 연기법을 버리고 방편에 불과한 궁극 성품의 관념들을 목적으로 취하는 전도망상에 다름 아니게 된다. 궁극 성품을 대상으로 하여 견성의 수행을 취하려는 것은 일확천금을 이루려는 몽상에 다름아니다. 한 번 견성으로써 형용할 수 없는 부처의 경지를 단박에 취하겠다는 일확천금의 꿈이다.
그러나 연기법 수행은 그러한 일확천금의 관념들을 경계한다. 마음의 업습(業習)과 존재를 구속하는 세상의 잘못된 관념들을 헤치고 바르게 존재함, 바르게 생각함, 바르게 행동함을 평생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 연기법 수행인 것이다.
수행하고 수행하여 연기법을 더 이상 의도적으로 수행해야 할 필요가 없을 때까지 수행해야 하는 것이 연기법 수행이다. 연기법 수행의 첫 단계는 자신의 존재가 우주적 존재임을 아는 공부(육체 속의 존재가 아니라 인식되는 우주와 세계가 곧 자신의 존재임을 아는 공부)이다. 자신의 의식이 인연이 됨으로 하여 자신이 인식하는 우주의 모든 의미와 감성이 연기(緣起)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모두가 우주적 존재인 것이 그 실상(實相)이다. 이 첫 단계를 알기 위해선 십이지연기로부터 해석되는 인식의 일어남과 자아(自我)의 일어남,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등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연기법 수행의 다음 단계는 무상(無常)함을 아는 공부이다.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일어나는 현상의 법을 통찰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공부이다.
형상의 법으로서 일어나는 현상이 객관의 실재가 아니라 인식하는 자신을 포함한 무수한 인연의 연기 존재들이 이루는 인연으로부터 연기한 또 하나의 연기 존재임을 통찰하는 공부이다. 다시 말해, 일어나는 현상을 존재론적 인과율이 아니라 연기법의 인과율로써 통찰하는 공부인 것이다. 무상함의 공부는 자신이 마주하는 형상이나 의미들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이고, 제행무상(諸行無常)임을 속속들이 알아서 집착이나 머무름이 없도록 하는 공부이다.
무상함의 공부를 존재의 무상함을 공부하는 것으로 알아서는 안된다. 물론 존재도 무상한 것이지만, 그러나 정작 무상함을 아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무상하여 공(空)한 관념들이나 형상, 욕망에 굳이 집착하는 잘못된 존재방식을 알아차리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무상함의 공부는 인식하는 자기 자신은 물론 인식되는 대상에 대해 순식간에 일어나는 잘못된 집착이나 욕망, 분노, 어리석은 편견 등을 알아차려 이들이 무상하고 공함을 깨우치는 공부인 것이다.
이 두 번째 단계를 알기 위해선 삼법인, 팔불게, 중도, 연기 등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연기법 수행의 마지막 단계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공부에 의지하여 자신의 잘못된 존재방식을 삶의 매 순간들에서 교정하는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별로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없다. 그야말로 머리로써 논리적 사실들을 공부하는 법등명(法燈明)의 공부이다. 그러나 연기 무아를 믿어 실천하는 마지막 단계야말로 자신의 업습을 제어하고 세상의 어리석은 관념들에 대항하는 자등명(自燈明)의 수행이다.
마음챙김이나 명상수련이 필요하다면 이러한 수행을 위해서 필요할 것이다. 시시때때로 덮쳐오는 업습의 욕망이나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탐욕貪欲,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이 세 가지 번뇌는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므로 삼독三毒이라 함)로부터 회광반조(回光返照: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는 뜻으로, 불교 선종禪宗에서 언어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마음 속의 영성을 직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비유하기도 함. 원불교에서는 매순간 매일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행위와 삶을 돌아 비추어보라고 가르치고 있음)하여 벗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러한 욕망이나 부정적 감정들을 즉시적으로 알아채고, 또 이겨내는 마음의 근기를 키워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연기법 수행에서 마음의 수련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연기법의 지혜이다. 아무리 수련이 수승하다 하더라도 연기법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면 수련의 방향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수련이 연기법 수행을 오도(誤導)하는 전도망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해탈은 자신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에 대한 인과율을 보는 것이다. 그 인과율을 궁극 성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견성 해탈을 말할 것이요, 그 인과율을 연기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연기법 해탈을 말할 것이다.
연기법 해탈에서는 연기법 수행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이 수행을 잃으면 중생이요, 이 수행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부처인 것이다. 비록 수행이라고 말하였으나, 연기법 수행은 특정한 종교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요, 종교이다. 수행 그 자체가 해탈이자 오류와 미망의 존재방식을 극복하는 참된 존재방식이어서 수행과 삶, 종교가 모두 하나이다. 그래서 삶이 진행하는 한, 불교의 수행은 끝날 수 없으며 끝나서도 안 되는 것이다.
연기법 수행을 질식시키는 것이 견성 수행이다. 견성 수행과 연기법 수행은 양립할 수 없다. 연기 무아를 수단으로 삼고, 관념적 해탈을 목적으로 삼는 견성 수행은 연기법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연기법 수행의 관점에서 견성 수행은 파사현정(破邪顯正)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견성 수행으로부터 모든 기복(祈福)이나 주술, 신비나 도력의 불교가 파생된다.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본 것과 수행의 방식을 주장하며, 자기 식의 종교적 신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힌두에 그렇게 많은 신들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 견성 수행을 말하는 혹자는 성품을 보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보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계합(契合: 부합, 사물이나 일이 조금도 틀림없이 서로 꼭 들어맞음. 자기가 뜻하는 바와 합치하거나 상통하게 됨)하는 것이 최상의 도라는 말도 한다. 그러나 본다고 하는 것이든 혹은 계합한다고 하는 것이든, 그 대상이 궁극 성품의 작용하는 도가 아니라 궁극 성품 그 자체라면 이는 견성이다.
궁극 성품을 전제로 하는 것은 지은 자와 지어진 자를 대(對)를 지어 나누는 전변론적 사고방식이다. 전능하며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브라흐만이 우주를 창조하고, 자신은 우주의 각 존재물에게로 내재해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 힌두의 전변론적 우주관이며, 그래서 모든 존재는 유아(有我)이다. 견성은 그러한 전변론적 우주관에서나 가능한 발상인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은 전변론적 관념들을 삿되다고 파하는 법이다. 연기법은 지은 자와 지어진 자를 대를 지어 나누는 능작인과 소작인을 부정하는 법이며, 따라서 어떤 존재도 하나의 독립된 개체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제법무아의 법이다. 불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는 모든 존재가 불성을 가져서가 아니라, 서로에 의지하여 있는 중중무진의 존재방식이므로 범아일여라고 한다.
견성이 연기법에 위배되는 이유를 간단히 서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보는 자로서의 연기존재는 보이는 대상의 연기존재에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보는 자로서의 연기존재가 스스로 존재하는 진여의 본성까지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보는 자는 연기존재가 아니라 ‘보는 자’로서 상주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나는 ‘보는 자’로서 상주하는 유아(有我)여야만 견성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일체 만법이 무상한 무아(無我)라고 하는 연기법에 위배되는 것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진실하고 여여한 궁극 성품은 진실하고 여여한 궁극 성품에 의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또 말한다. 견성 수행을 통해 진실한 성품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진실한 성품을 관(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진실한 성품이 되기 위해서는 견성을 해야 하는 것이고, 견성을 하기 위해서는 진실한 성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 이는 서로를 모순으로 물고 있는 무한 모순의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뭐꼬?’하고 묻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연기법을 묻는 것이 아니라 궁극 성품을 묻는 행위라면 보는 행위의 모순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견성을 말하는 사람들은 명상 수행으로부터 일어나는 마음의 평정지심을 굳건히 하는 것이 궁극 성품에 계합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부처님은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사무색처四無色處의 하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무색계 제4천의 경지. 욕계·색계의 거친 생각은 없지만 미세한 생각이 없지 않은 무색계 제4천의 경지) 등의 명상 수행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 수 없다고 설하였다.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번뇌로 이어지는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의 관점에서 본다면 평정지심이란 아무리 잘 보아도 십이지연기의 다섯 번째 단계인 육입을 멸한 무소유처 혹은 십이지연기의 네 번째 단계인 명색을 멸한 비상비비상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 수행은 생로병사 번뇌의 첫 단계인 무명과 그로부터의 행(업습)을 멸하는 수행이다. 그리고 그 수행은 한 번의 깨달음으로써 멸해지기를 바랄 수 없는 수행이다.
여기에서 다시 십이지연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무명(無明, avidyā, ignoranc)이란 다시 말해 밝지 못한 상태라는 것은 근본진리(무상, 무아 등)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무명을 처음에 두는 까닭은 시간적으로 시초라기보다는 윤회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행(行, saṃskārā, disposition)은 진리에 대한 어두움으로 인해 인간의 모든 행위는 특정한 경향성을 갖게 되고. 몸짓이나 말, 생각은 행위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형성하고, 동시에 잠재적 힘으로 의식에 저장돼 조건이 갖추어지면 외적으로 표출된다, 식(識, vijñāna, consciousness)이란 업, 혹은 경향성으로, 의식의 형태로 존속한다. 인간이 죽을 때, 육체는 소멸하지만 의식의 흐름은 무상하게 변하면서도 일정한 경향성을 가지고 이어진다,
명색(名色, nāma-rūpa, psycho-physical personality)에서 명은 정신적 요소를 말하고 색은 육체적 요소를 가리킨다. 일정한 경향성을 가지고 지속되던 의식이 물질적 토대와 결합하여 인간존재의 초기단계에 접어든다, 육입(六入, sadāyatana, six sense-perceptions, six sense-organs)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주위의 자양분을 받아들여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이 분화된다. 여섯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인데 불교에선 마음도 하나의 지각기관으로 본다. 촉(觸, sparsa, contact)은 여섯 가지 지각기관이 그것들에 상응하는 대상과 접촉하게 된다. 눈은 색이나 형체, 귀는 소리, 코는 냄새, 혀는 맛, 몸은 감촉, 마음은 생각이 그 대상이다. 수(受, vedanā, feeling)는 감각을 가리킨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그 대상들과 접촉함으로써 감각이 형성된다. 감각은 크게 즐거운 것, 괴로운 것,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 등 셋으로 분류된다.
애(愛, tṛsnā, craving)는 감각에 대한 애착이 일어난다. 즐거운 것에 대해선 끝없이 향유하려는 탐욕이 일어나고, 괴로운 것에 대해서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좋고 싫음에 대한 분별과 집착이 이후의 단계를 지배해 괴로움을 낳고 급기야 윤회의 원동력이 된다. 취(取, upādāna, grasping)는 탐욕과 증오에 따라 대상을 취하거나 버린다. 전 단계의 결과이자 전 단계가 강화된 형태이다. 유(有, bhava, becoming, existence)는 현존재가 이와 같은 경로를 거치면서 한 개체로서 완성된다. 전 단계인 집착은 현존재의 구성요건이자 다음 생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혹은 유를 다음 생의 예비적 단계로 해석하기도 한다.
생(生, jāti, birth)은 집착의 힘에 의해 또 다른 생이 이어진다, 노사(老死, jara-marana, aging and death)는 한 번 태어난 이상 늙고 죽는 것은 피할 수 없고. 죽으면 사후의 의식은 또다시 새로운 물질적 토대를 찾는다.
요즘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논쟁이 다시 불교계에서 제기되는 것 같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은 불교의 근본을 논하는 논쟁이라 해도 다름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논쟁은 우월을 논하는 논쟁이 아니라, 파사현정의 논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돈오에서의 오(悟)를 성품을 보는 오로 아는 것이 돈오돈수이며 견성이다. 그러나 돈오에서의 오는 연기법의 이치를 깨닫는 오이어야 하며, 그래서 수행은 연기법의 이치를 자신의 삶에서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수행이어야만 한다. 이것이 연기법 수행인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이 선(禪)이라고 하는 것도 돈오돈수하는 견성 수행의 전유물인 것처럼 오도되고 있다. 그러나 선을 산중 선방의 적멸한 선으로 말하는 것은 선을 죽이는 것에 다르지 않다.
연기법으로써 깊게 들여다보는 지혜의 실천이 바로 살아있는 선 즉, 활선(活禪)이다. 선은 삶의 일상에서 존재의 업습과 세상의 미망(迷妄)을 헤치며 파사현정하는 생명의 선이어야 하는 것이다. 선을 실천하며, 연기법을 실천하며, 부처님의 도를 실천하며, 이 땅에 불국토를 실천하는 길은 궁극 성품이라는 미망들을 불교에서 제거하는 것이 첫 걸음이다. 존재와 우주의 실상을 말하는 종교가 세상의 미망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그 어떤 종교, 어떤 사상이 참된 세상을 인도할 수 있을까?
그러나 현대의 불교를 보는 것은 참으로 한탄스럽다. 돈과 권력을 위해 부처님 이름을 도적질하는 후안무치한 인간들이 불교의 스승, 불교의 실세로 행세하고 있다. 불교가 자신의 참 모습도 정립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인도하는 참된 사상이 되기를 소원하는 것은 그야말로 공염불일 뿐이다.
불교를 정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진은 바로 견성 수행이냐 혹은 연기법 수행이냐를 가려내는 것이다. 궁극 본성을 보는 것이냐, 아니면 궁극 본성이 작용하는 도를 보는 것이냐의 문제를 파사현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기법에 비추어 볼 때, 두 가지 법 중에서 하나는 파사의 대상이고 다른 하나는 현정의 대상이다.
모든 존재가 자신의 우주에서 인과(因果)의 근원이요, 우주적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연기법에서, 대상을 구하여 인과를 해탈한다는 수행 자체가 연기법을 부정하는 오류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를 모두 불교의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궁극 성품을 실체로 하는 힌두적 오류를 이어나가려는 것일 뿐이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고 했듯이 불교의 모든 법, 모든 수행은 연기법으로 귀일해야 한다. 인간은 인과(因果)를 묻는 자(者)이다. 자신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에 대한 인과를 묻는 자인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해탈에 존재와 세계의 인과 실상을 밝히는 연기법 외에 또 무엇이 필요할까?
법정스님의 ‘인연’에 대한 명구(名句)
함부로 인연을 맺지마라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은 구분해서 인연을 맺어야한다. 진정한 인연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인연을 맺도록 노력하고 스쳐가는 인연이라면 무심코 지나쳐버려야 한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헤프게 인연을 맺어놓으면 쓸만한 인연을 만나지 못하는 대신에 어설픈 인연만 만나게 되어 그들에 의해 삶이 침해되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인연을 맺음에 너무 헤퍼서는 안된다. 옷깃을 한번 스친 사람들까지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 것은 불필요한 소모적인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지만 인간적인 필요에서 접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위에 몇몇 사람들에 불과하고, 그들만이라도 진실한 인연을 맺어 놓으면 좋은 삶을 마련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만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좋은 일로 결실을 맺는다 아무에게나 진실을 투자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내가쥔 화투패를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는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인연을 맺음으로써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피해도 많이 당하는데 대부분의 피해는 진실 없는사람에게 진실을 쏟아 부은 대가로 받는 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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