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 보리심 수행

곰림바르빠 3. 자비심, 이타심, 보리심이 필요하다.

수선님 2020. 2. 23. 13:04

곰림바르빠 3. 자비심, 이타심, 보리심이 필요하다.

자비심(慈悲心)이 발동(發動)한 보살들은

모든 유정(有情)을 해탈(解脫)케 하려는 분명한 서원(誓願)을 세웁니다.

자비심(慈悲心)은 수행의 초기 단계나 중간 단계 그리고 마지막 단계 할 것 없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위의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보살들이란 자비심이라는 강력한 동기가 일어나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일체지를 이루려는 서원을 세운 위대한 존재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결심이 이타적인 생각에서 깨닫고자 하는 마음인 보리심(菩提心)입니다.

이것은 자비심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다음, 자신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버림으로서, 너무나 행하기 어렵지만 흐름을 끊지 않고 긴 세월을 쌓아야 하는 공덕(功德)과 지혜(智慧)의 자량(資糧)에 집중해 들어갑니다.

보리심을 일으킨 힘으로, 그 모든 것을 언제 다 충족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지 말고, 육바라밀을 포함한 보살의 수행을 하나씩 밟아 나가야 합니다. 그 결과 보살들은 무한한 공덕과 지혜를 많은 노력 없이도 점점 쌓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확실한 공덕(功德)과 지혜(智慧)의 자량(資糧)을 원만하게 구족(具足)할 수 있습니다. 자량(資糧)을 원만하게 구족(具足)하면 일체지(一切智)는 손 안에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일체지의 근본은 오직 자비(慈悲)뿐이며 가장 먼저 [이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일체지의 근본 바탕은 “오직” 자비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이라는 단어는 자비심이 일체지의 핵심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원인과 조건들을 부정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체지는 자비심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자비심은 꼭 필요한 원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자비심만으로 충분하다면 앞에서 설명한 보리심이나 방편의 수행이 필요하다는 말은 모순일 것입니다.

『불설법집경(佛說法集經)』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세존이시여, 보살은 너무 많은 법(法)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한 가지 법이라도 제대로 지니고 바르게 깨우친다면 부처의 모든 법은 그의 손 안에 있게 됩니다. 한 가지 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즉 대비심(大悲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은 자비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비심을 근본으로 보리심이 생깁니다.

그렇게 누군가가 보살행(菩薩行)을 계속해나가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주제의 결론은 자비심 없이는 자신보다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깨달으려는 수승(殊勝)한 마음인 보리심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타심이 없이는 육바라밀 같은 대승 보살행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즉 이러한 과정이 없이는 불성(佛性)을 확인하는 일체지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비심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대비심(大悲心)을 모두 섭수(攝受)하신 불세존(佛世尊)들은 자리(自利)를 원만하게 모두 이루셨어도 끝내 유정(有情) 세계 안에 머무시며, 성문(聲聞)처럼 열반(涅槃)의 최고 적정처(寂靜處)에도 들지 않습니다. 유정을 살펴보시고 열반의 적정처를 불타는 철옥(鐵獄)으로 여겨 멀리 하시는 세존들께서 [그렇게] 무주열반(無住涅槃)하시는 원인(因)은 바로 대비심입니다.

자비심은 수많은 경전들에서도 찬탄(讚歎)하고 있는 것으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쨘드라끼르띠(Candrakīrti, 月稱)는 깨달음의 길에서 시작단계나 중간단계 그리고 마지막 단계 할 것 없이 가장 핵심적인 것은 자비심이라고 말하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시작단계에서는 자비심을 근본 바탕으로 해서 보리심이 생깁니다.

또 보살이 마지막 목적을 이루려면 육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중간단계에서도 자비심은 똑같이 중요합니다.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자비심은 부처님이 무주열반(無住涅槃)하시는 이유입니다. 즉 부처님이 깨달음의 지복상태에 머물지 않고 중생을 위해 일하는 원동력이 바로 자비심입니다. 자비심은 부처님께서 무주열반하시는 동기이며,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였음을 보여주는 법신(法身)과 남들을 위한 목적을 성취하였음을 보여주는 색신(色身)을 완성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비심의 힘으로 이 허공계가 다할 때까지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헌신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목적을 이루고 나서도 보리심의 중요성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까말라실라께서 인용하고 있는 쨘드라끼르띠의 다른 논문에서도 이 주제에 대한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또한 대중들에게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전통에서는 어떤 특정한 철학적 견해가 경전의 권위 자체만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개인 각자가 철학적 견해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려면 기본적으로 논리와 이성에 의지해야 합니다. 지식의 대상들은 폭넓게 분명히 드러난 현상과 부분적으로 감춰진 현상 그리고 완전히 감춰진 현상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부분적으로 감춰진 현상은 직접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논리적인 적용이 필요합니다. 이 때 분석의 대상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추론(推論)에 의해 인식할 수 있습니다. 추론을 통한 인식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의 논리식(論理式) 즉, 논법(論法)이 필요합니다. 또, 입문 단계에 있는 사람은 완전히 감춰진 현상을 과학적 논리나 합리적인 추론만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현상은 우리의 경험으로도 증명하기가 곤란합니다. 바로 이런 경우에 믿을만한 경전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먼저, 권위 있고 믿을 만한 경전의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유효하고 믿을 만한 스승의 가르침으로 그것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경전의 권위는 직접적인 인식에 위배되지 않는 분명한 현상에 대한 가르침이나 추론에 위배되지 않는 부분적으로 감춰진 현상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믿음에 근거해서 추론적 인식에 위배되지 않는 완전히 감춰진 현상에 대한 이중 삼중의 분석에도 틀림이 없어야 합니다. 즉 경전의 권위에 대한 유효성은 논리적 이성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가르침의 본래 의미나 주요한 목적과 관련하여 그 내용이 사실이거나 유효하다면, 다른 목적과 관련하여서도 그 유효한 면을 추론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르침을 수행하는 주요한 목적은 명확한 선성(善性, 또는 涅槃이나 一切智)의 상태를 이루는 것입니다. 인간이나 천상계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일반적인 목적입니다. 따라서 분명한 선성(善性)을 깨닫기 위한 과정을 제시하는 가르침은 어떠한 논리적인 검증에도 그 허물을 찾을 수 없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어떤 의문이 어려운 것 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이라면, 그 보다 단순한 문제들과 관련한 것들은 그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스승이란 이러한 가르침을 주시는 존경스럽고 의지할만한 분을 말합니다. 스승은 자비심을 수행한 힘으로 깨달음을 얻으신 분입니다. 스승이 가진 커다란 자비심은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진실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게 큰 자비심의 힘으로 스승은 제자가 장애를 제거하여 보다 완전한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며,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과정에 대한 가르침을 줍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경험하신 깨달음에 비추어 가르침을 펴셨습니다. 부처님은 궁극적인 실체를 직접 깨달으시고 그 진리를 드러내시는데 아주 능숙하셨습니다.

부처님의 헌신은 무조건적이고 지칠 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일을 영겁의 세월동안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준비 해왔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고 이해함으로서 여러분 스스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주제나 수행을 입증할 때는 특정한 경전의 가르침을 인용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수많은 오류와 의심을 제거할 수 있고, 새로운 통찰의 힘을 얻기 위한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560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