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림바르빠 1. 인과(因果) - 무명, 무지란 무엇인가? 그리고 해결방법
이와 같이 일체지(一切智)는 원인(因) 없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며, [만일 원인 없이 일체지가 생길 수 있다면] 모든 것은 항상 일체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생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으로도 속박(束縛)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 어떤 것도 일체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 부분적으로 생기는 모든 사물(事物)은 원인에 의존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체지도 역시 때에 따라 부분적으로 [생기는] 것이며, 언제든지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곳에서나 그런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렇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원인(因)과 조건(緣)에 의존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위의 구절에서는 언제나 존재 하는 것과 언제나 그렇지 않고 때에 따라 가끔씩 존재하는 것의 두 가지 유형의 현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에서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니며 때에 따라 가끔씩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암시합니까? 이러한 질문은 아주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암시하는 것은 원인들에 의존하는 순간적인 것을 말합니다. 사실 어떤 특정한 사물은 원인들이 발생하는 어떤 특정한 때에 생겨납니다.
어떤 특정한 사물이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니라 가끔씩 발생한다는 것은 그들이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조건들에 의지하여 발생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현상은 항상 그런 것이 아니라 가끔씩 때에 따라 원인과 조건들에 의지하여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다양한 유형이 있습니다. 먼저 원인들에는 실제원인, 직접원인, 간접원인, 동류원인, 부차원인 등의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조건들에도 객관조건, 원인조건, 직전(直前)조건 등의 다양한 종류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따라 변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한 곳에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조건지어진 현상은 형상(形相)과 의식(意識) 그리고 두 가지 다 아닌 경우의 세 가지의 범주(範疇)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형상(形相)은 모양과 색깔 등의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의식(意識)은 모양도 색깔도 없으며 어떤 물리적인 용어로도 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은 느낌이나 감각만으로도 자연스럽게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시간이라는 개념은 형상도 아니고 의식도 아닌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는 모든 것을 아는 의식을 말합니다.
일체지는 흙이나 돌 바위 산 같은 것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식의 대상으로 기능하는 무언가에 의해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인식의 대상이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일체지(一切智)는 모든 완전함을 다 포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는 경지입니다.
세 가지 범주 중에 조건지어진 현상은 의식의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알고 이해하는 것이 의식의 기능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해하겠어요.”, “알았어요.”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의식이나 감각으로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눈의 의식 즉 안식(眼識)이 무언가를 볼 때, “나는 저 모습을 보고 있어.”라고 말합니다. 또 마음의 의식 즉, 여섯 번째인 의식(意識)이 행복이나 고통을 경험할 때는 “나는 행복해.” 또는 “나 힘들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경험한다.” “나는 본다.” “나는 듣는다.”라고 말할 때는 의식이 매개체로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무언가를 인식하고 아는 것은 의식의 기능입니다.
의식들은 지식과 집중력 그리고 예리함 등에 따라 다양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예는 인간의 의식을 동물의 의식과 비교해보면, 인간의 의식이 다양한 대상을 훨씬 넓게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들 역시 교육 수준과 경험에 따라 다릅니다. 더 많이 교육받고 더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 더 넓은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과 이해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발전합니다. 필요한 조건들을 만나면 인식 능력은 증가하고 지식의 대상이 확장되어 이해가 깊어집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은 잠재력을 완전히 개발할 수 있습니다.
일체지(一切智)는 대상에 대한 마음의 인식 능력을 완전히 개발한 상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체지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것을 각각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는 지혜는 의식에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원인과 조건에서 발생한 개념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이것은 일체지 역시 원인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일체지는 원인 없이도 생겨날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러면 모든 의식들이 다 일체지의 상태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마치 사물이 원인과 조건 없이 발생하여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생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으로도 속박(束縛)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 어떤 것도 일체지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만약 사물이 다른 원인과 조건에 의지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것에도 속박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것도 일체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기능적으로 움직이는 현상은 특정한 때에 생길 수 있는 것이지 언제나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때에 필요한 조건이 이루어지고 방해하는 조건이 없으면, 의식은 모든 현상에 대한 지식을 갖춘 일체지로 전환할 수 있게 됩니다.
사물이 언제 어느 곳에서나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물들이 원인과 조건에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원인과 조건에 의지한다는 틀 안에서 보면, 일체지(一切智)에 대한 결과적 성취는 원인과 조건 즉 바르고 완전한 원인과 조건들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더불어 일체지를 이루려는 강력한 동기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체지는 원인과 조건들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상가(Asaṅga, 無箸)의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생긴 존재가 결과라는 말입니다. 조건들에는 부동(不動)조건, 무상(無常)조건, 잠재조건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은 무상(無常)조건과 관련한 것입니다. 또, 어떻게 일체지가 의식에서 생길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는 잠재조건에 관해서 설명해야 합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은 의식의 본래 속성입니다. 의식의 본성은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대상을 파악하는 것에서 생깁니다. 이렇게 보면, 인식하는 속성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제 질문은 인식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그렇게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는 가에 관한 것입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은 의식의 본래 속성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완전한 지식의 상태를 볼 수 없게 마음을 가로 막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음 질문은 어떻게 그러한 장애들이 생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그런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대상을 바르게 인식할 수 없게 하는 의식의 장애는 무지(無知)입니다.
무지(無知)는 존재의 실체를 왜곡하고 극단적인 견해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우리가 무지(無知)에 대해 말할 때는 무언가 필요한 조건이 결여되어 있거나 대상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 조건을 말합니다. 다양한 유형의 무지(無知) 중에서 실제를 왜곡하는 무지가 가장 근본적인 무지입니다.
그리고 이 무지가 가장 큰 장애입니다.
이 무지를 분석함으로서 제거할 수 있는 결론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마음의 허물은 우선 무지와 무지의 잠재력에서 오는 것입니다.
먼저 무지를 마음에서 분리할 수 있는지 아니면 끝을 볼 수 있는지에 대해 관찰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무지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무지는 실제에 대한 바른 이해를 왜곡합니다. 그것은 대상을 잘못 인식하게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해 대응하는 바른 이해를 갖춤으로서 무지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실제를 왜곡하는 무지와 그 무지에 대응하는 방법은 모두 다 원인과 조건에 의지합니다. 그들은 똑같이 필요한 조건을 만나면 자라나고 장애의 요소들이 사라지면 소멸합니다. 그렇다면 둘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가 궁금할 것입니다. 실제에 대한 바른 이해를 왜곡하는 무지가 대상에 대한 잘못된 마음이라면, 그것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무지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이해하는 것을 옳다고 믿는 것일 뿐입니다.
인식을 통해 인지된 대상을 유효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인식은 무지로 인해 왜곡된 인식이기 때문에 유효한 인식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실제에 대한 바른 이해를 왜곡하고 있는 무지는 끝을 볼 수 있습니다.
무지로 인한 마음은 유효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물에 본래의 성품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을 인식하는 것은 유효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이 두 가지 마음은 서로 직접적으로 부딪치고 있습니다.
대상의 무자성 즉, 무아(無我)를 인식하는 마음은 무지한 마음에 대응하는 강력한 처방입니다.
이렇게 해서 무지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어떠한 인간의 고통도 그에 대응하는 적절한 대처법을 활용하여 줄여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상대적인 요소를 만나면 그들의 잠재력이 감소되는 사물들의 특성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마음이 본래의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마음의 긍정적인 속성입니다.
이것은 유효한 인식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마음의 본성이 긍정적인 속성에 익숙해지면 무한하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아무리 긍정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어도 무한히 확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몸이 아주 거친 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친 속성을 가지고는 무한하게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무지(無知)한 마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때는 ‘실재(實在)’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따른 몇 가지 질문들이 있습니다.
실재는 무엇인가?
실재에 관한 잘못된 마음은 어떤 것인가?
어떻게 해서 마음은 실재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가?
실재 또는 실유(實有)에 대한 공성(空性)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래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완전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실유를 입증할 논리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실유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길들여지지 않은 의식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논리적으로 천착해 들어가면, 실유 즉,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무언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 다른 경우를 발견합니다. 즉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겉으로 나타난 모습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속적인 일에서는 누군가가 깨어났다고 말합니다. 깨어남은 나타난 모습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 모순 때문에 생깁니다. 즉, 무언가에서 깨어나 본래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꿈과 같은 상태에서 얼마나 자주 깨어나는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의 상황을 놓고 점검해 봅시다.
동물들과 비교하면 우리의 마음에는 무한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그 실체를 분석할 능력이 있습니다.
반면에 동물은 나타난 그대로만을 파악합니다.
물론 인간들도 서로의 능력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세하게 분석해 보면, 마음이 일반적으로 옳다고 인식하는 것들은 좀 더 깊은 의미에서 보면 잘못된 경우도 많습니다. 현상이 존재하는 방식은 그런 마음들이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닙니다. 즉 공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이나 집들처럼 무상(無常)한 것들에 대한 인식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 중에는 수세기 또는 수천 년 동안을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그러한 것들이 순간순간 변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항상 그대로 거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원자(原子)나 입자(粒子) 단위에서 이들을 살펴보면 어느 한 순간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현대의 과학에서도 이와 유사한 발견을 통해 하나 둘씩 검증해 나가고 있습니다.
딱딱하게 움직이지 않고 항상 그대로 있을 것만 같은 대상들도 그 실제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한 순간도 그대로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558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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