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 보리심 수행

곰림바르빠 4. 자비의 근본 평등심(平等心)

수선님 2020. 2. 23. 13:06

곰림바르빠 4. 자비의 근본 평등심(平等心)

자비심은 일체지의 상태를 깨닫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원인들 중에 하나입니다.

자비심은 수행의 시작단계나 중간단계 그리고 수행을 다 마치고 나서도 아주 중요합니다.

이제 질문은 자비심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비(慈悲)를 수행하는 단계에 처음 들어가 [어떻게] 시작하는 가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먼저 평등심(平等心)을 길러서, 모든 유정(有情)을 향한 집착(貪)과 분노(瞋恚)를

버릴 수 있는 마음(捨)의 심성(心性)을 계발(啓發)해야 합니다.

자비심은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모든 중생들에게 집중하는 마음입니다.

자비심에는 지혜와 관련한 세 가지의 유형이 있습니다. 즉,

1. 유정 중생들에게 집중하는 자비심과

2. 현상에 집중하는 자비심

3. 그리고 감춰진 뜻에 집중하는 자비심의 세 가지를 말합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중생들이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이 세 가지는 그 의도가 다른 것이 아니라 집중하는 대상이 다른 것일 뿐입니다.

1. 유정 중생들에게 집중하는 자비심은, 무상이나 본래의 성품이 공성인 중생들의 속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유정 중생 자체에 집중하는 것 입니다.

2. 현상에 집중하는 자비심은 유정 중생에게 집중할 뿐만 아니라,

유정 중생의 무상한 실체에도 집중하는 자비심을 말합니다.

3. 마찬가지로 감춰진 뜻이 있는 것 즉,

이것은 본래의 성품이 결여되어 있는 중생들의 본성에 집중하는 자비심을 말합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자비심은 공덕을 쌓는 친절한 마음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어떤 특정한 종교를 믿는가 안 믿는가의 문제는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일반적인 선성(善性)은 그가 일으키는 친절한 마음의 형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친절한 사람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으며 친근감을 느끼게 합니다.

심지어는 동물들에게도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자신들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 주위를 빙빙 돌면서 즐거워합니다. 반대로 공격적인 악의를 품고 다가오는 사람은 동물이나 새들도 금방 눈치를 챕니다. 그런 사람의 목소리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달아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친절한 동기나 따뜻한 마음은 극히 소중한 성품입니다. 자비심을 지닌 사람은 모두에게 존경받으며 그 기쁨에 찬 모습 때문에 어디서나 친구가 따릅니다. 동료들 사이에서 기쁨을 주고 있는 사람을 보면 한 눈에 그가 자비로운 동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단편적인 예를 들어보면 친절함에 대한 의미가 보다 분명해질 것 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 어떠한 값도 치르지 않고 다른 이들의 가슴 속에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평화롭고 행복한 상태가 아니라면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 해도 주변에 친구들이 모여든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경쟁적이고 공격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의 재산을 다 준다 해도 제대로 된 이익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애정 어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항상 마음이 즐겁고 평화로울 것입니다. 따라서 친절한 마음과 협조적인 자세는 나와 남 할 것 없이 지금 이 순간과 앞으로도 행복을 얻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입니다.

협조적인 마음에서 생긴 긍정적인 성품은 바랄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들은 자기의 종교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고 하며 인내와 관용을 기르고 다른 사람을 돕는데 관심을 가지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기본적인 원리들에 대해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것입니다. 특히 불교에서는 가르침의 기본 바탕을 자비심에 두고 있으며, 이 자비심에 대한 수행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자비심을 수행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는 고통스런 존재들에게 사랑과 연민을 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의 본래 성품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무한한 중생들에게 집중하면,

그 모든 중생들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강력한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먼저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기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평등성(平等性)에 대한 수행입니다.

보통 중생들을 대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마음 상태를 점검해보면,

- 친근함을 느끼는 부류,

- 혐오하는 부류,

- 무관심한 부류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정한 존재들을 가까운 친구나 친척들로 여깁니다. 하지만 자신과 친구와 친척들 그리고 과거에 가지고 있던 것들이나 지금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가지게 될 것을 방해하고 해롭게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어떤 이들에게는 거리를 둡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그들에게 혐오감이나 증오심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을 길러야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목적에 관심이 더 많으며 다른 이들에 대한 자비심은 그냥 겉으로만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심을 일으키려면 먼저 모든 중생들을 따로 구분하여 보지 말고 똑같이 생각하는 평등심을 길러야 합니다.

또 우리가 친구나 친척들에게 특히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대하는 것은

결국 집착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드러난 친절 속에는 이기적인 동기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은 나를 이롭게 해, 그리고 저 사람은 나하고 이런 관련이 있어”라는 편견을 가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친절”이라는 용어는 무언가 집착에 더 가까운 말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비심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자비심은 남들의 이익 즉 남들의 행복과 고통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처럼 다른 이들도 고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비로운 사람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려는 긍정적인 자세를 키워갑니다.

일반적으로 친구나 친척에게 갖는 친근감을 집착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더 심해지지 않도록 줄여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집착과 자비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몇몇 책들에서는 “집착”이라는 용어를 자비심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하지만 집착이 자비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집착은 실제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비심은 실제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려는 동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평등성을 개발하는 데는 두 가지 주요한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관계의 불확실성 즉, 무상(無常)과 고(苦)에 대해 생각하고 다른 이들에 대한 증오와 집착의 무익함을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중생이 행복을 바라고 고통에서 자유롭고 싶어 하는 똑같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보고, 모든 존재들에게 편견 없이 대하는 자세를 기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평등성을 개발하는 위의 두 번째 방법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유정(有情)은 안락(安樂)을 바라며 고통을 원치 않는다는 것과 무시이래(無始以來) 윤회해 온 유정 중생이 수백 번을 나의 친인척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모두 헤아려 보면, 여기에 차별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어떤 것에는 아주 집착하고 어떤 것에는 아주 분노하였었던가, 그러므로 나는 모든 유정에게 마음을 평등하게 대하리라.’라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행동할 수 있도록 중립적인 상태에서 시작하며, 친구와 적에게도 역시 평등심(平等心)을 길러야 합니다.

모든 유정 중생들이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며, 행복을 원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고립된 존재들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의 행복과 고통은 우리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이에 대한 상호 관련성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유정 중생들은 시작도 없던 그때부터 우리에게 직접 간접적으로 많은 이익을 주고, 친절을 베풀어 왔습니다. 이들이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애쓰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편견 없는 자세를 기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당연한 것입니다.

누구나 다 똑같은 마음으로 대하려면 어떤 특정한 개인들에 대해서 먼저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즉 세 가지 유형의 개인들에 대해 관상을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 생에서 나를 해롭게 하는 적들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주는 친구에 관한 것, 또 다른 하나는 이롭지도 해롭지도 않은 낯선 이에 대한 것입니다.

마음이 반응하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점검해 보면, 적들을 대하는 마음은 “이 사람은 나의 적이야.”라고 반응하며, 초조해하고 성내며 미워합니다. 친구를 생각하면 마음은 가라앉고 편안해 집니다. 낯선 사람에게는 싫거나 좋은 감정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실, 편견과 이기심 그리고 좁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나 친척에게 집착하는 것은 이 생에서 받고 있는 순간의 이익 때문입니다.

또 적을 미워하는 것 역시 지금 당장 자신에게 해로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날 때부터 친구는 없습니다.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요. 자신의 적도 처음부터 적의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런 관계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살다보면 지금 이 순간 최고의 친구가 내일 철천지원수로 변하기도 합니다. 또 너무나 미워하던 적이 가장 믿을 만한 친구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과거의 수많은 생을 가지고 말하면, 이런 관계가 별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런 이유들만 봐도 적을 향한 증오나 친구를 향한 집착은 순간에 스쳐가는 잠깐의 이익을 위한 속 좁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좀 더 넓은 눈으로 멀리 바라보면, 평등성은 집착이나 증오의 무익함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 줍니다.

지속적인 수행을 통하여 친구와 적과 낯선 사람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모두 평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행의 폭을 넓히면 이웃이나 동족들에게까지 이 마음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결국 수행은 전 세계의 모든 존재들에게로 넓혀갈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개인을 대상으로 시작하여 완전한 평등성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넓은 범위를 대상으로 수행하면 보편적인 평등성을 얻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다시 구체적인 개인으로 돌아와서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변화를 살펴보면 그렇게 많이 나아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수행은 점차로 수행의 폭을 넓혀가는 것이 좋으며,

이 방법은 과거의 많은 스승들이 제안하고 칭찬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무시이래(無始以來) 윤회해 온 유정”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업과 번뇌의 영향으로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는 지속적인 순환의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 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 원인이 영원한 것이라면 그 결과도 당연히 영원해야 할 것입니다. 존재의 윤회는 자재천(自在天, Īśvara) 즉 전능한 창조주라고 생각하는 신(神)에 의지하여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윤회하는 존재입니까?

그것은 원인에 근본적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윤회하는 존재가 태어나는 두 가지 근본적인 원인은 번뇌입니다.

그 중에서도 번뇌가 더 지배적입니다.

번뇌들 중에서도 실제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 생기는 무지(無知)가 가장 심각합니다.

무지는 외부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의식에서 생긴 실제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의식이 존재하는지 안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어떠한 결론도 확실히 내리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의식이 사물의 본성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무지는 다른 모든 번뇌의 근본 뿌리에 해당하며, 의식이라는 연속체를 가지고 윤회하는 존재로 탄생하는 원인입니다. 따라서 의식은 시작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의식에 시작이 있었다고 한다면 수많은 궤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생물이 생기기 이전의 무생물을 의식의 시작점으로 인정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생물적인 결과는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원인과 결과는 같은 범주(範疇)에 속한 것입니다. 물리적 대상의 원인과 결과를 살펴보면 결과는 보통 본래의 원인과 똑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식도 역시 유사한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 순간 의식은 같은 범주 안에서 순차적으로 생겨납니다.

지금 이 순간의 의식이 다음 순간 의식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불교 경전들에서는 시작도 없는 마음 즉 무시이래(無始以來)의 마음 또는 시작도 없는 존재 혹은 유정 중생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윤회하는 존재들에게 시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무시이래(無始以來) 윤회해 온 유정”에서 유정은 무수한 세월동안 우리의 친척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유정 중생들에 대한 친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 직접 간접적으로 우리를 이롭게 해 왔습니다. 이 생에서 우리의 친구와 친척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만 봐도 분명합니다. 낯선 사람들 역시 공덕을 쌓는 바탕으로서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애(慈愛)와 자비(慈悲)는 우리에게 그렇게 친절했던 무한한 유정 중생들을 기억하는 속에서 길러야 합니다.

이러한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보리심이 생깁니다. 따라서 공덕과 지혜를 쌓는 수행은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유정 중생들 모두와 관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위없는 목적을 성취하려면 유정 중생들을 친절로 대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샨띠데바(Śantideva, 寂天) 보살의 『입보리행론(入保提行論)』은 이러한 관점에서 유정 중생들이란 결국 그들의 본래 불성(佛性)을 회복하도록 도우려는 부처와 다르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정 중생들은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무한한 가치와 도움을 줍니다.

세속적인 차원에서 적들은 해로움의 원인입니다.

실제 우리는 그들에게 적의를 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적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훌륭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관용과 인내를 수행할 수 있는 적과의 기본적인 관계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를 잘 이해함으로서 적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인내와 관용을 수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경전들에서, 자신의 적을 자신의 최고 스승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요약하면, 적을 포함한 모든 유정 중생들이란 직접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을 다양한 방식으로 크게 도와주고 있는 존재들을 말합니다.

그렇게 모든 유정(有情)에 대한 평등심(平等心)을 갖추고 나서 자애(慈愛)를 기릅니다.

자애의 물로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적시어 비옥한 대지(大地)처럼 [만들고 거기에] 자비(慈悲)의 씨앗을 심으면 아주 빠르게 흠 없이 잘 자랄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자애롭게 하고 자비를 길러야 합니다.

자애와 자비를 기르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까말라실라께서는 곡식을 기르는 것에다 비유를 하셨습니다. 씨앗은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땅에 심어야 잘 자라듯, 자비심 역시 자애를 바탕으로 기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유정 중생들을 향한 평등성을 기르려면, 그들을 수많은 생에 함께 했던 친구나 친척으로 보아야 하며 또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바라는 우리와 똑같은 존재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마음을 다스리면 점점 중생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하나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개개의 유정 중생들을 보면 볼수록 그들에게 마음이 이끌릴 것이며, 그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등성에 대한 수행을 하려면 먼저 자애(慈愛)를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자애의 물로 촉촉이 적신 다음, 자비심의 씨앗을 심으면 아주 빠르게 잘 자라날 것입니다.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561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