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 보리심 수행

곰림바르빠 7. 지관겸수, 정혜쌍수, 사마타 & 위빠사나, 칠지작법

수선님 2020. 3. 22. 13:01

곰림바르빠 7. 지관겸수, 정혜쌍수, 사마타 & 위빠사나, 칠지작법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은 어떻게 해야 동시에 수행할 수 있습니까?

이에, 먼저 요가 수행자가 편하고 빠르게 지(止)와 관(觀)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止)와 관(觀)의 자량(資糧)을 증장(增長)시키는데, 의지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으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선행 조건이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지(止)의 자량(資糧)이라는 것은, 적절한 장소에 머물며, 탐심(貪心)을 줄이고, 만족할 줄 알며, 집착 등의 분별심(分別心)을 완전히 버리고, 계율을 청정히 하는 것입니다.

다음 구절에서 저자는 수행에 필요한 행위와 환경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공덕을 모두 갖춘 적절한 장소가 있는 곳을 알아야 하는데, 의복과 음식 등을 어려움 없이 얻을 수 있거나 얻기 쉬우며, 악한 사람과 적 등이 거주하지 않아 머물기에 좋고, 질병이 없는 땅이라 터가 좋으며, 계율을 수지(受持)하고 견해가 같은 좋은 친구(道伴)가 있으며, 낮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지 않고 밤에는 잡음이 없는 곳이 좋은 곳입니다.

탐심을 줄인다는 것은 법복(法服) 등이 좋거나 많다고 특별히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은 법복(法服) 등이 좋지 않은 것을 얻었어도 항상 만족하는 것입니다. 많은 활동(分別心)을 완전히 떠난다는 것은 사고파는 등에서 악업(惡業)을 모두 떠나고, 재가자(在家者)나 출가자(出家者) 누구든지 너무 가까이 하는 것을 완전히 떠나며, 의약(醫藥)과 점성(占星) 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입니다.

위의 구절은 무의미한 농담이나 모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점성(占星)이나 의약(醫藥)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수행에 큰 도움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수행자는 이렇게 세속적인 것들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계율을 청정히 한다는 것은 두 가지 율의(律儀:戒行) 모두 성죄(性罪: 자체로 무거운 重罪)든 차죄(遮罪:행위 규범 위반)든 지니고 배운 것(遮戒學處)을 위반하지 않고 방일(放逸) 하더라도 신속하게 참회(懺悔)하여 여법(如法)하게 하는 것이며, [또] 성문(聲聞)의 율의(律儀)에서, 바라이죄(波羅夷罪: 승려자격 박탈의 최고 중죄)는 개차(開遮: 참회용서)하여 회복할 수 없다고 설하셨지만, [혹시라도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또한 참회하여 이후에는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업(業)을 지었든 그 마음에는 본래의 성품이 없다는 것(心無自性)을 각각 분석하든지 제법(諸法:現象)은 본래 성품이 없다는 것(法無自性)에 익숙해짐으로써 그의 계율이 청정해 질 수 있음을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아사세참회대승경(聖阿闍世懺悔大乘經)』에서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그렇게 참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수행에 확실하게 매진해야 합니다.

두 가지 유형의 율의(律儀)란 별해탈계(別解脫戒)와 보살계(菩薩戒)를 말합니다. 또, 출가(出家) 수행자의 계율과 재가(在家) 수행자의 계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래의 구절은 집착과 욕구의 무익함을 보고 세속적 행위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모든 잘못된 이해 즉 분별(分別)을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집착(執着)도 역시 이 생과 다음 생에 다양한 허물을 마음에 짓게 하므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분별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의 모습으로 윤회하는 사물은 아름다울 수도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은 [끝내] 소멸하는 법으로 불안정합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 모든 것들은 나(我)에게서 머지않아 떨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나(我)에 대해 어찌하여 [그렇게] 지나치게 집착하는가라고 곰곰이 생각하여 모든 분별을 버려야 합니다. [더불어] 관(觀)의 자량(資糧)이라는 것은, 성현(聖賢)께 의지하여 많이 듣고 완전함을 추구하며 적절히 사유하는 것입니다.

즉, 세속적인 것과 궁극적인 것의 대해 사유하는 수행을 말합니다.

다음은 정신적인 스승들의 특징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어떤 성현(聖賢)을 의지해야 하는가라고 한다면, 다문(多聞)하시고 말씀이 분명하며 자비심을 지니어 어려움을 잘 견디시는 분을 말합니다.

“말씀이 분명”하다는 것은 법을 설하는데 능숙하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자비심이 없이는 그렇게 오래가지 않습니다. 자비심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배움도 크게 유용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스승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자비심 즉 따듯한 마음을 꼽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펴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인내와 관용을 가지고 제자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대해 설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에, 많이 듣고 완전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세존께서 십이분교(十二分敎: 열두 가지 가르침의 형태)하신 요의(了義: 확실한 뜻, 正見)와 불요의(不了義: 불확실한 뜻, 外見)를 겸양한 자세로 진지하게 듣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필요한 만큼 듣지 않는 것은 관(觀)의 장애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경전에서, “관(觀)은 듣고 사유하여 생긴 바른 견해(正見)라는 원인(因)에서 생기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연천소문경(那羅延天所問經)』에서도, “듣는 것이 갖추어지면 지혜가 생겨날 것이며, 지혜가 갖추어지면 번뇌가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라고 설하셨습니다.

위의 구절들은 잘 듣고 사유하여 폭넓은 지식을 얻는 중요성에 대해 아주 간결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풍부하고 다양한 지식을 담고 있는 경전의 가르침에 대한 설명입니다.

적절히 사유한다는 것은 요의(了義) 경전과 불요의(不了義) 경전 등을 바르게 판단하는 것으로, 그와 같이 보살의 의심이 사라지면 수행이 한 곳에 분명해 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심스런 의혹은 커져만 가서 마치 돌 계곡 길을 건너는 사람처럼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들었던지 그것에 대해 잘 사유하고 확인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잡한 교차로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주제를 모호하게 설명하거나 가르침이 능숙하지 못하면 저절로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위의 구절에서는, “요의(了義) 경전과 불요의(不了義) 경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요의(了義)의 가르침과 불요의(不了義)의 가르침은 무엇을 말합니까? 또 요의(了義) 경전과 불요의(不了義) 경전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들은 불교의 철학적인 면과 중요한 관련성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처님께서는 세 번의 법륜(法輪)을 굴리셨다고 말합니다.

제일 먼저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가르침의 수레를 굴리셨습니다.

사성제는 불교의 기초이자 기본적인 틀입니다.

사성제에는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두 번째 법륜을 굴리실 때는 멸제(滅諦)에 대한 의미를 모두 밝히셨습니다.

이 시기의 가르침들은 반야부(般若部) 경전에 담겨 있습니다.

내용이 워낙 심오하고 정교하기 때문에 이 가르침의 시기에는 많은 잘못된 견해가 생겨났고, 무아(無我)에 대한 오해가 생겼습니다. 따라서

세 번째 법륜을 굴리실 때는 무언가에 속해있는 귀속현상(歸屬現象)과 무언가에 의지하는 의존현상(依存現象) 그리고 완전히 검증된 확정현상(確定現象)이라는 맥락에서 무아(無我)에 대해 좀 더 분명히 설하셨습니다.

(*역주: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귀속현상(歸屬現象), 의존현상(依存現象), 확정현상(確定現象)의 용어들은 의미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용어들이다. 이 단어들에 상응하는 불교 용어들을 보면, 귀속현상은 변계소집성(遍計所集性), 의존현상은 의타기성(依他起性), 확정현상은 원성실성(圓成實性)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 귀속현상은 본래 자신에게 속해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라는 말입니다.

- 의존현상은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아라는 말입니다.

- 확정현상은 어떠한 것도 궁극적인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굴리시던 법륜의 내용을 담은 『여래장경(如來藏經)』과 같은 특정한 경전들은, 객관적인 대상의 맑은 빛(淨光明)과 함께 주관적인 마음의 맑은 빛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두 번째 법륜을 굴리실 때 설명하셨던 완전무결한 공성에 대해 다시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세 번째 법륜에서는 마음의 특성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성제의 네 번째 진리인 도제(道諦)에 대한 설명을 더 깊고 심오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저절로 밀법(密法, Tantra)의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펴신 목적은 오직 듣는 이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근기에 맞추어 좀 더 넓고 심오한 가르침을 펴거나 좀더 좁고 구체적인 가르침을 펴기도 하였습니다. 지적인 수준에 따라 다양하게 펼치신 가르침은 조금씩 다른 교학적 체계로 발전하였습니다.

결국 네 개의 주요한 불교학파가 성립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몇몇 학파들은 부처님께서 처음 법을 펴신 초전법륜(初傳法輪) 동안 가르치셨던 사성제의 열여섯 가지 모습(十六行相)(*역주: 보통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네 가지 진리로 알려진 사성제는 다시 각각 네 가지의 구체적인 모습이 있다.

이것은 유부(有部)의 학파에서 주로 다루고 있다. 각각을 살펴보면, 고제(苦諦)에는 비상(非常), 고(苦), 공(空), 비아(非我)가 있고, 집제(集諦)에는 인(因), 집(集), 생(生), 연(緣)이 있으며, 멸제(滅諦)에는 멸(滅), 정(靜), 묘(妙), 리(離), 그리고 도제(道諦)에는 도(道), 여(如), 행(行), 출(出)이 있다.)만을 주장합니다. 이 학파들에게는 공성이나 무아(無我)에 대한 가르침이 거의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몇몇 경전들은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경전들을 결정적인 가르침과 해석적인 가르침 즉 요의(了義)의 가르침과 불요의(不了義)의 가르침으로 분류합니다. 이러한 용어들에 대한 정의 역시 학파들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유식학파(唯識學派)는 결정적인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해석적인 가르침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립논증(自立論證) 중관학파에서는 결정적인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궁극적인 진리로 인정하고 직접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 이외의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해석적인 가르침으로 분류합니다.

궁극적인 진리인 미세한 공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공성에 대한 주제를 허물없이 잘 드러내고 있는 경전과 논서들을 따라야 합니다. 결국 경전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지 아니면 결정적인 내용인지에 따라서 적절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이러한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스승들이 먼저 분류해 놓은 것을 따라서, 어느 것이 결정적인 내용이고 어느 것이 해석적인 내용인지 하나씩 공부해 나가다 보면 공성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까말라실라께서는 결정적인 경전인 요의(了義) 경전과 해석적인 경전인 불요의(不了義) 경전을 모두 함께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본문은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을 위한 일반적인 준비사항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요가 수행자는 언제나 생선과 고기 등을 피하고 가까이 하지 않으며 [수행자에게 맞는] 적당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수행자들은 육체적인 건강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적절한 음식은 필수적입니다. 그런가 하면, 마음은 맑고 강건해야 합니다.

이 또한 육체적인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따라서 생선이나 고기, 마늘, 양파 등을 먹지 말라고 제안합니다. 수행 중에는 수행에 도움이 되고 소화에 무리가 없는 적절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과식을 하면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보살은 지(止)와 관(觀)의 모든 자량(資糧)을 쌓음으로서 수행에 들어가야 합니다.

수행 중에는 밤의 처음과 밤의 마지막에 잠을 자지 않는 수행이 있습니다. 이러한 수행을 할 때는 한밤중에 잠을 자는 동안에도 억념(憶念)의 상태에서 적절한 자세를 유지합니다.

채식만으로도 영양섭취가 충분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아주 좋은 삶의 방식입니다. 완전한 채식을 하기가 힘든 경우도 되도록이면 적당한 양의 고기만을 섭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남방 불교의 몇몇 학파에서도 육식을 엄격히 금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동물을 도살한 고기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이지 않고, 그 동물에 대해 잘 모르며, 자신을 위해 동물을 죽였다는 의심이 없는 “청정한 고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대승 불교에서도 육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입능가경(入楞伽經)』과 같은 경전에서는 육식을 하는 것이 아주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아짜리야(Ācarya, 傳敎師) 바바비베까(Bhavaviveka, 淸辯)의 『중관심송(中觀心頌)』같은 경전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야바라밀(般若婆羅蜜)과 관련한 대승 경전에서도 주로 육식을 금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세 가지 하급 밀교(密敎) 수행에서는 육식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무상요가(無上瑜伽) 계열에서는 다섯 가지의 고기와 다섯 가지의 감로(甘露)(*역주: 오종육(五種肉, ꇅ Sha lnga, sha chen sna lnga)은 보통 코끼리고기(象肉), 인간고기(人肉), 말고기(馬肉), 개고기(狗肉), 소고기(黃牛肉)을 말한다. 그러나 말고기 대신에 새고기(鳥肉)을 포함할 때도 있다.밀법의 오감로(五甘露, ꇅ bdud rtsi lnga)는, 신성한 소의 다섯 가지 생산물인 오줌, 똥, 우유, 버터, 커드(curd)를 말하는 오정(五淨, ꇅ ba byung lnga)과는 달리, 오방불(五方佛) 중에 보생불(寶生佛)을 피(血)로, 무량광불(無量光佛)을 정액(精液)으로, 불굥성취불(不空成就佛)을 인육(人肉)으로, 부동불(不動佛)을 소변(小便)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대변(大便)으로 여기는 것을 말하며, 대변, 소변, 백보리(白菩提), 적보리(赤菩提), 골수(骨髓)의 다섯 가지를 말하기도 한다.)를 특별한 수행의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육식은 일반적인 한도 내에서 필요에 의해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만을 섭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자신만을 위해 동물을 희생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관심 있는 수행자들은 지(止, Śamatha)에 대한 수행을 하기 전에 필요한 것이 갖추어져 있고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장소 등을 먼저 준비해야 합니다.

===== 아래는 실제 수행 방법 및 과정에 대한 내용입니다 ======



1. 이에 요가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는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든 모두 완전히 구족(具足)해야 하는데, 변(便)을 보고 나서, 번잡한 소리가 없어 마음에 흡족한 곳을 찾아, “내 모든 유정을 깨달음의 정수(精髓:心要)에 이르게 하리라.”라고 생각하며, 일제 중생을 구경에 이르게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비심(大悲心)을 시현(示現)하여 시방(十方)에 머무시는 불보살님들께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한 다음,

2.자기 눈앞의 허공중에 관상(觀想)으로 불보살을 모시고 가피를 청하는 기도를 올립니다.

이것은 보통 현교(顯敎)에서도 하는 수행입니다.

밀교(密敎)에서는 먼저 서언존(誓言尊) (*역주: 서언존(誓言尊, ꇄ Samayasattva, ꇅ Dam tshig sem dpa')은 밀교의 수행에 있어사 자기 자신을 본존으로 관상하여 생기한 본존을 말한다. 주로 생기차제(生起次第, ꇄ Utpattakrama ꇅ bsKyed rim) 수행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을 일으키고 그 다음 지혜존(智慧尊)(*역주: 지혜존(智慧尊, ꇄ Jñānasattva, ꇅ Ye shes sem dpa')은 밀교 수행에서 실제로 관상하는 대상을 말한다.)과 합일하는 방식으로 스승을 청합니다(請師).

은 몸의 다섯 군데 즉 이마와 두 손바닥과 두 무릎이 땅에 닿도록 하는 것이 전통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쁨으로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흉내만 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신(身)·구(口)·의(意)를 대표하는 상징물들을 단(壇) 위에 배치합니다. 아니면 허공중에 그대로 관상을 하여도 좋습니다. 공양(供養)은 하던 방식대로 올리는 것이 좋습니다. 가진 것이 넉넉하다면 풍족하게 올려도 무방합니다. 불상이나 다른 것들이 없으면 억지로 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정하게 유통되는 탱화(幀畵) 등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바르고 적절하게 준비하면 됩니다.

산 중에서 홀로 정진하는 수행자도 굳이 너무 많은 불상이나 장식을 소유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둑들의 호기심만 자극할 뿐입니다. 옛날에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위대한 성자 밀라레빠(Milarepa)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밀라레빠께서 동굴에 사실 때, 어느 날 밤 무언가 훔칠 거리를 찾아 도둑이 들었습니다. 이를 본 밀라레빠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내 눈에는 벌건 대낮에도 아무것이 보이지 않는데, 이 야심한 밤에 무엇을 찾는단 말인가?” 이와 같이 정신적 발전을 찾아 내면을 탐구하는 것 이외에, 밖에서 찾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종교적인 수행을 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화려하고 값비싼 단(壇)을 차리는 데만 열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애써 차린 불단(佛壇)은 아무 의미 없이 집안의 화려함만을 장식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적절하게 단(壇)을 꾸미려면, 먼저 불법을 처음 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상(佛像)을 모십니다. 또 가르침을 상징하는 경전들 즉 지혜를 상징하는 『반야경(般若經)』이나 보살의 삶을 상징하는 『화엄경(華嚴經)』 등을 모실 수 있습니다. 또 부처님의 마음을 상징하기 위하여 그에 맞는 경전을 모실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구할 수 없어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으면 적절히 모시는 것이 좋습니다.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상이나 탱화를 모시고 주변에 수행의 본존(本尊)들과 부처님의 팔대제자 등을 모십니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불상들을 모실 때 물리적인 값어치를 따라 모신다면, 그냥 귀중품을 소유한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목적과 의미를 잘 이해하고 순서에 맞게 단(壇)을 꾸며야 합니다. 성스러운 불단(佛壇)에 절을 하고 공양을 올리십시오. 공양은 항상 “청정한 것”을 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청정하지 않은 것”을 올리면 부정적인 업을 짓게 됩니다. 여기서 “청정하지 않은 것”이란 사기나 거짓말 등으로 얻은 물건을 말합니다. 이것은 특히 재가 수행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경전이나 불상 또는 부처님의 사진을 개인의 이익이나 사업적인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아주 부정적인 업을 짓고 있는 겁니다. 반면에 부처님의 법을 전하기 위해 경전을 보시하고 책을 출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때도 순수한 목적을 가진 이들의 도움으로 함께 선한 행위를 쌓아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만큼 “청정한 것”을 가려서 공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티벳에는 청수(淸水) 즉 맑은 물이나 버터 등(燈)을 공양 올리는 관습이 있습니다. 이 역시 바르게 존경심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헌공의식(獻供儀式)을 수행할 때는 칠지작법(七支作法) (*역주: 칠지작법(七支作法, ꇄ Saptāṅga pūja, ꇅ Yan Lag bDun)은 티벳 불교의 가장 일반적인 기도 수행 방법으로, 정례지(頂禮支) 공양지(供養支) 참회지(懺悔支) 수희지(隨喜支) 권청법지(勸請法支) 소청주세지(所請住世支) 회향지(回向支)의 구조로 되어 있다. 각각의 지(支)는 간단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① 정례지(頂禮支): 법계(法系)의 스승들께 절을 올리며 예경(禮經) ② 공양지(供養支): 향·꽃·등불·산개(傘蓋) 등을 공양 올림 ③ 참회지(懺悔支): 신·구·의 삼업으로 지은 탐·진·치 삼독에 대한 참회 ④ 수희지(隨喜支): 시방에 계신 스승의 공덕에 수희 동참 ⑤ 권청법지(勸請法支):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께 법을 청함 ⑥ 소청주세지(所請住世支): 항상 중생과 같이하기를 바람 ⑦ 회향지(回向支): 이 수행 기도 공덕으로 쌓은 복덕을 중생에게 회향. 이 칠지작법은 의례의 내용과 수행의 방법에 따라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모두 같다. 졸고, 『가톨릭과 티벳불교의 의례비교』(계간 『불교평론』, 통권 13호의 논단 부분) 참조.)을 따라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주 심오한 깨달음을 얻으신 분들도 공덕을 쌓기 위해 이러한 수행을 계속합니다.

불보살의 존상(尊像)이나 탱화(幀畵) 등을 앞에다 모시거나 [또는]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하며, 그들에게 정성껏 헌공(獻供) 찬탄(讚歎)하고 나서, 자신의 허물을 참회(懺悔)한 다음, 일체 중생의 공덕을 따라서 향수(享受)해야 하며,

수행자는 먼저 칠지작법(七支作法)을 행해야 합니다.

- 아주 편안하게 앉아서 주존(主尊) 비로자나(毘盧遮那)의 결가부좌(結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 눈은 너무 크게 뜨지도 감지도 말며 코끝을 향해 두고,

- 몸은 너무 앞으로 기울거나 뒤로 기울지 않게 똑바로 세우며,

- 생각은 안으로 돌려 머물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어깨는 같은 높이에 두고, 머리는 젖혀지지도 않고 한쪽으로 기울지도 않게 하며,

코에서 배꼽까지 일직선이 되게 합니다.

이(齒)와 입술도 자연스럽게 합니다. 혀도 윗니 부분에 닿게 합니다.

호흡의 들고 남(氣息出入)도, 소리가 나거나 너무 세거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고,

어떤 것에도 끌리지 않게 천천히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숨을 들이 쉬고 내 쉬어야 합니다.

수행자는 호흡을 제어하는데 아주 주의해야 합니다. 너무 거칠고 소리가 나는 호흡은 해롭습니다.

부드럽고 깊게 호흡하십시오. “천천히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숨을 들이 쉬고 내 쉬어야 합니다.”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564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