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림바르빠 9. 관(觀, Vipashyana 위빠사나) - 무아/색즉시공/정혜쌍수
이 논서는 보살의 육바라밀(六婆羅蜜) 수행을 염두에 두면서 지은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止, Śamatha)를 수행하는 목적은 출세간(出世間)의 관(觀, Vipaśyanā)을 개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止, Śamatha)를 이룬 다음에는 관(觀, Vipaśyanā)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지(止)를 성취하고 나면 관(觀)을 수행해야 하는 데,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즉 “세존의 모든 말씀은 완전한 가르침이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진여(眞如)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으며 진여로 인도하고 있다. 진여를 알고 나면 빛이 나타나 어둠을 물리치는 것처럼 [전도된] 견해의 모든 그물을 피할 수 있다. 지(止)만으로는 맑음을 이룰 수 없고 장애의 어둠도 제거할 수 없으며, 지혜로 진여를 바르게 수행하여야 청정지혜(淸淨智慧)를 [얻을 수] 있다. 지혜만이 진여를 깨우치게 할 수 있으며, 지혜만이 장애를 바르게 제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지(止)에 안주(安住)하면서 지혜로 진여를 완전히 탐구하리라. 지(止)만으로는 만족할 수는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이타적인 생각은 자비심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강력한 이타적인 동기가 생겨야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 등의 선업(善業)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관(觀, Vipaśyanā)에 대해 살펴볼 차례입니다.
궁극적인 실제를 깨닫기 위한 관(觀, Vipaśyanā)을 수행하려면, 먼저 무아(無我)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현상의 본래 성품에 대해 탐구해 나가야 합니다.
단순히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현상에는 “나”라고 할 만한 근본 바탕이 없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세속적이든 종교적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눈으로 현상을 직접 확인하는 것처럼, 논리와 논증식(論證式: 순차적인 논증 방식)을 가지고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형(有形)의 물질적인 대상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기 때문에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분명하고 모호한 현상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논증식(論證式)을 사용해야 합니다.
무아에는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즉 “나” 즉 “아(我)”를 부정하는 것에는 인무아와 법무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인(人)”이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모여 있는 온(蘊: 덩어리)을 말합니다. 일반적인 인식 수준에서는 “아(我)” 또는 “인(人)”이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수준에서의 “인(人)”은 실재(實在)하는 “아(我)”가 있다고 믿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인(人)”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무언가 부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화합물일 뿐입니다. 강한 자기 집착으로 인해, “실재하는 인(人)”을 인식함으로서 “나”라고 하는 자기인식을 가집니다. 이러한 “아(我)”는 부정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 탐구의 과정을 통하여, 이 “나”라고 생각하는 “아(我)”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무아(人無我)를 이해하면, 이에 대한 지혜가 자라납니다.
법무아(法無我)는 인식의 대상이나 마음에 본래의 성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식대상은 인식하는 마음의 성품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보통 외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외적인 대상에 빠지면 집착과 증오가 생겨납니다.
반면에 본래 존재하지 않는 인식대상의 성품을 바로 보면, 인식하고 있는 마음의 본성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절로 집착과 증오가 줄어듭니다. 본래의 성품이 결여되어 있는 인식대상과 인식주관 그리고 인식작용을 따로 인식하는 것은 거친 수준의 법무아(法無我)입니다.
인식하는 마음 역시 본래의 성품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본래의 성품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마음이 움직여 대상을 만들어 내고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존재의 특성은 그 자신의 내면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이 현상은 자기 내면에서 동요한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의 모든 사물은 텅 비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와 관련한 불교 학파에서 증명해온 미세한 공성입니다. 따라서 나타난 사물의 실재성을 부정함으로서 사물의 속성이 환영(幻影)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물의 실제를 이해함으로서 집착이나 증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 역시 환영(幻影)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결국은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여(眞如)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님 스스로도 궁극적인 진리 즉 진제(眞諦)의 의미를 바로 알고서 깨달음을 성취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철학적 견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른 견해는 오직 궁극적인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바르지 못한 견해를 따르게 되면 중간에 멈추거나 잘못된 길로 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관(觀, Vipaśyanā)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잘못된 견해를 근본 뿌리부터 제거해 나가야 합니다.
진여(眞如)는 무엇과 같은가라고 한다면,
[답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물과 사람과 법의 자성(自性)이 공성(空性)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혜바라밀(婆羅密, Pāramitā) 행으로 깨우치는 것이지 다른 것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세존이시여, 보살은 제법(諸法:現象)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어떤 바라밀행(婆羅密行)으로 파악합니까? 관자재(觀自在) 보살이여, 지혜의 바라밀행으로 파악한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止)에 안주(安住)하면서 지혜를 수행해야 합니다.
진여(眞如)는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를 말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법무아(法無我)를 말합니다. 자세하게 들어가면 학자들 마다 견해가 많이 다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법무아(法無我)를 인무아(人無我) 보다 좀더 미세한 상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人)”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모여 있는 온(蘊: 덩어리)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인(人)”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무언가가 모여져서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인(人)”은 사실 세속적인 차원에서도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자기 정체성에 대해 바르게 이해한 상태를 인무아(人無我)라고 합니다.
존귀하신 스승 샨따락시따(Śāntarakṣita, 寂護)의 수제자였던 위대한 까말라실라께서는 ‘요가행(瑜伽行) 자립논증(自立論證) 중관학파’에 속해 있습니다. 이 학파는 거칠고 미세한 두 가지 차원의 법무아(法無我)를 주장합니다. 주체와 객체가 다르지 않고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이 다르지 않은 것을 아는 것은 거친 수준에서 진여(眞如)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또 모든 현상의 공성을 바로 보는 것은 미세한 수준의 진여(眞如)를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경전들 중에 반야부(般若部) 경전들이 이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깊이를 담고 있습니다.
인무아(人無我)에서 “나”에 대한 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 “나”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법무아(法無我)에 완전히 천착(穿鑿)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나”를 지금 느끼는 그대로 본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슬픔과 행복을 경험하게 합니다.
“나”가 존재한다고 믿는 고대의 다른 학파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 중에 한 인도의 학파는, “나”를 사용하는 주체로 또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모여 있는 이 온(蘊:덩어리)을 사용할 대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학파는 결국 “아(我)”와 대상을 따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학파들은 “아(我)”가 하나이며 영원하고 독립적인 실재(實在)라고 주장합니다. 전생에서 이어진 이러한 “아(我)”는 이 생의 죽음과 함께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모임이 해체되면, 다음 생으로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기독교 같은 다른 종교들도 유일하고 영원하며 독립적인 실체를 믿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종류의 학파나 종교들이 주장하는 것은 “아(我)”가 무언가 의존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 그 실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불교의 4대 학파 중에 어느 누구도 그러한 “아(我)”가 실재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즉 “아(我)”는 단지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모임에 의지하여 나타난 것 일뿐 그 본래의 성품이 있지 않다는 것을 공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불교는 “아(我)”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영원히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은 무엇이냐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렇게 거친 수준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눈에 보이는 “아(我)”가 존재하는 방식을 자세히 점검해 봐야 합니다. 논리적인 분석을 통하여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모임에 의지하여 나타나는 “아(我)”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모임에 대해서는 여러 학파들이 조금씩 다른 차원의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 의지하여 발생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무언가에 의존하여 모임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아(我)”라고 인식하는 것일 뿐입니다.
무엇 때문에 “아(我)” 또는 “나”를 애써서 탐구하고 존재의 실체를 살펴봐야 합니까? 예를 들면 [집착의] 정도에 따라 자신의 편과 다른 편 즉, 두 편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에게 집착하고 다른 이에게 적의를 품습니다. 집착과 적의가 생겨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여러 가지 부정적인 행위를 저지릅니다. 이 모든 부정적인 행위들이 바로 “아(我)” 또는 “나”에 대한 분별 의식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아(我)” 또는 “나”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깊이에 따라 부정적인 행위와 농도의 범위가 달라집니다. 본능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며 집착하는 “나”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모임을 통제하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나”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로 인하여 우리는 끝없이 욕심을 냅니다.
이 욕망들 중에 몇 가지는 아주 독특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누군가의 지성과 미모를 보면 자신의 부족한 면과 바꾸고 싶어 합니다. “아(我)”가 존재하는 실제 형식은 원인과 그에 따르는 조건들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我)” 또는 “나”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스스로 실체가 없는 “아(我)” 또는 “나”에게 강한 집착을 보임으로서 생기는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요가 수행자는 다음과 같이 분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온(蘊)·계(界)·처(處:入)를 제외하고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온(蘊) 등일 수 없는 것은, 온(蘊) 등이라는 것들이 무상(無常)하고 많은 성품(性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항상(恒常)하며 하나의 성품(性品)이라고 다른 이들이 분별(分別)하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을 실재한다고] 믿습니다. 그 자체이거나 또는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실재(實在)할 수 없습니다. 즉 [서로 결합하고 의지하여 존재하는 방식 이외에]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세간(世間)에서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人無我]
정신적이나 물리적인 모임에서 따라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아(我)” 또는 “인(人)”은 없습니다.
즉 “인(人)”은 모임에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습관을 관찰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몸과 다른 모임들이 젊으면 우리는 그 사람이 젊다고 말합니다. 또 늙으면 나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표현은 모임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사람들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법무아(法無我)도 역시 이와 같이 수행해야 합니다. 즉 법(法:現象)이라고 하는 것은, 요약하면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입니다. 여기서 온(蘊) 처(處) 계(界) 그리고 형색(形色:形體)을 가진 것들이라는 것은 결국 마음의 형상(形像) 이외에는 없습니다. 즉 그들은 미세한 입자(粒子)로 부서지며, 미세한 입자들 역시 나누어지는 성품(性品)으로, 각각을 살펴보면 본래의 성품을 분명하게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시이래(無始以來) 형색(形色:形體) 등은 역시 청정한 것이 아니며, 발현(發現)의 욕구가 꿈이라면 보이는 대상(所緣)의 형색(形色:形體)등은 빛과 같은 것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마음의 성품인 형색(形色:形體) 등을 밖에서 끊으려고 하는 것과 같으며, 결국 여기서 형색(形色:形體) 등은 마음의 형상(形像)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저러한 이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唯識)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이러한 법(法:現象)을 분석하여 일체가 마음뿐이라는 것을 알고서, 이들 각각을 분석하는 것이 모든 법의 본성을 각각 분석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의 본성을 각각 점검해야 합니다. 이상(以上)을 이와 같이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법(法) 또는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와 같이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물리적인 형색(形色:形體)같은 이 모든 외적인 대상들은 인식하는 마음과 분리하여 생각할 때 나타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인식하는 마음과 분리된 무언가가 있다면, 현상과 인식하는 마음은 완전히 상관없는 것으로 정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물이 인식하는 마음에서 생긴 것이라는 말과도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인식대상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과 따로 떨어뜨려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물리적인 형색(形色:形體)을 가진 사물들이 외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면, 그 사물을 낱낱이 분해한 다음에도 그대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물은 외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것은 또한 인식대상과 인식하는 마음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학파들에서는 마음의 본성과 다른 외적인 대상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다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물리적인 형색(形色:形體)이 언제나 그대로 있는 것처럼 잘못 인식합니다. 그래서 형색(形色:形體) 등을 꿈에서 볼 수 있는 모습들처럼 마음 밖에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형색(形色:形體) 등은 마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여(眞如) 또는 공성이란 인식하는 주관인 마음과 마음에 의해 인식되는 대상이 본래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리적인 것들을 세분하여 보면 조금 전에 그 모습은 사라집니다. 그렇게 해서 계속 세분해 가면 어느 것도 실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상은 유식(唯識) 학파의 견해입니다. ‘요가행(瑜伽行) 자립논증(自立論證) 중관학파(中觀學派)’의 견해도 몇 가지 미세한 점을 제외하고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견해 역시 중관(中觀)의 마지막 학파에서는 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음 구절에서는 독특한 중관 철학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마음 역시 진제(眞諦:절대 진리)에 부합(符合:契合)하지 않습니다.
즉 거짓 본성인 형색(形色:形體) 등의 형상(形相)을 파악하는 갖가지 심성(心性)이 생겨나서 [인식하는] 것을 진제(眞諦)에서 무엇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형색(形色:形體)등이 거짓인 것처럼, 마음 역시 그 이외에는 없는 거짓 성품입니다. 그렇게 형색(形色:形體) 등은 갖가지 형상(形相)이나 일(一)과 다(多)가 본래의 성품이 아닌 것처럼, 마음 역시 그 이외에는 없음으로 일(一)과 다(多)가 본래의 성품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환영(幻影) 등의 본성(本性)과 같을 뿐입니다.
불교의 여러 학파들 사이에서도 공성의 의미를 해석하는 차원이 조금씩 다릅니다. 유식학파의 해석은 심오한 공성의 철학을 다 드러낸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유식학파의 논사들 역시 공성을 논박하는 자신만의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불교는 부분적으로 보는 것보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조망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본적으로 좀더 낮은 수준의 학파들은 직접 간접적으로 좀더 높은 수준의 학적 견해를 이해할 수 있는 바탕으로서 작용합니다. 위의 구절은 중관학파에서 독특하게 설명하고 있는 법무아(法無我)를 다루고 있습니다. 중관학파에 따르면, 모든 현상은 단지 마음에 의해서 이름 붙여진 것일 뿐입니다.
외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마음이 인식하는 다양한 범주의 현상도 역시 실재하지 않습니다.
중관학파는 이와 같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궁극적으로 모든 현상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상에 본래의 성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나타난 모습과 존재하는 방식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 때문에 현상의 궁극적인 실체를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에는 본래의 성품 즉 자성(自性)이 없습니다.
마음이 그러한 것처럼, 제법(諸法:現象)도 역시 환영(幻影) 등의 본성과 같을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지혜로 마음의 본성을 각각 분석하면 궁극적으로 마음은 내부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외부에서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으며 현재 생겨나는 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생겨날 때 역시 어디서 온 곳이 없고, 사라질 때 역시 어디로 간 곳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파악할 수도 없고 신뢰할 수도 없는 것인데, 형색(形色:形體)을 가지지 않는 것이 본래의 성품인 것은 무엇과 같은가라고 한다면,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가섭(迦葉)이여, 마음을 완전히 탐구하고 나면 발견할 수가 없다.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은 찾을 수가 없다. 찾을 수가 없는 것은 과거에도 없다. 미래에도 없으며 현재에도 생겨나지 않는다.”라고 널리 [법을] 펴셨습니다.
그렇게 분석하면 마음은 시작도 무결(無缺)하여 볼 수 없으며 끝도 무결(無缺)하여 볼 수 없고 중간도 역시 무결하여 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에 끝과 중간이 없는 것처럼 제법(諸法:現象)도 역시 끝과 중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마음의 본래 성품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무언가를 완전히 깨우친다는 것은 공(空)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았다고 해도, 마음이 만든 형상(形相)인 형색(形色:形體) 등의 본래 성품 역시 궁극적으로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지혜로도 제법(諸法:現象)의 본래 성품을 바르게 볼 수 없다면, 형색(形色:形體)이 항상(恒常)한지 무상(無常)한지 공(空)한지 공(空)하지 않은지 번뇌가 있는지(有漏) 번뇌가 없는지(無漏) 생겨나는지(生) 생겨나지 않는지(不生) 존재하는지(有) 존재하지 않는지(無)를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형색(形色:形體)에 대한 구별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수(受)·상(想))·행(行))·식(識)도 역시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차별들 역시 존재할 수가 없으니, 이에 구별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위의 구절은 궁극적인 실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즉 궁극적인 의미에서 대상은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도 같은 맥락의 “무색성향미촉(無色聲香味觸)” 즉 형체도 없고 소리고 없으며, 냄새도 없고 맛도 없으며, 접촉도 또한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 역시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영원하다거나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논하는 것도 의미 없는 일입니다. 궁극적으로 온(蘊:모임) 등을 포함한 모든 현상의 본래 성품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여(眞如) 역시 실체가 없는 현상의 한 속성일 뿐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잘못하면 현상의 실체에 본래의 성품이 없는 것을 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무언가 실체가 있다고 오해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지혜로 사물을 분별하여 요가 수행자가 어떤 사물의 본래 성품이 궁극적으로 확실히 [있는 것이라고] 천착(穿鑿)하지 않을 때, 무분별삼매(無分別三昧)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제법(諸法:現象)에는 본래 성품이 없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위의 구절은 무아(無我)를 깨닫는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아를 깨달은 지혜라는 것은 결국 무아를 확인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我)”에 대한 오해를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마음은 다양한 방법으로 물리적 형색(形色)과 같은 사물들을 인식합니다. 물리적인 모습을 실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마음이 있으며, 실재의 속성으로 인식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또 본래의 성품인 자성(自性)이 없는 것을 인식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더불어 실재에 대한 속성을 어느 것도 분별하지 않고 무분별(無分別) 상태를 그대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아(我)”를 논증(論證)하여 분별하는 것을 분석적인 지혜라고 합니다.
“아(我)”에 대한 논증을 바르게 거쳐야, 무아(無我)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지혜로 사물의 본래 성품을 각각 분석하지 않고 수행을 하게 되면, 생각을 모두 끊기 위해서만 수행하는 분별심 역시 피할 수 없으며 본래의 성품이 없다는 것도 깨우칠 수 없는데, [이것은] 지혜의 빛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바르게 각각을 분석해야 앎의 불이 생기는 것은, 마치 부싯나무(燧木)를 문질러 일으킨 불처럼, 분석의 나무를 태우는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물의 실제 본성을 이해하려면, 검증의 과정에서 지성과 지혜를 활용해야 합니다. 위의 구절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인 활동을 끊으려고만 하면 진여(眞如)에 대한 수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정신의 활동을 쉬는 것만으로도 “아(我)”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무아(無我)를 분별하기에는 무언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지혜의 빛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지(無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아(無我)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지혜의 불꽃을 일으켜야 합니다.
『불설제개장보살소문경(佛說除蓋障菩薩所問經)』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잘못 길들여진 일체의 희론(戱論)을 여의고자 한다면 공성(空性)을 닦는 요가(瑜伽)를 해야 한다. 공성(空性)에 대한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마음을 흐트러뜨리거나 마음을 아주 기쁘게 하는 대상(處)과 그것들의 본래 성품을 완전히 탐구하여 공(空)을 깨우친다. 마음이 무엇인지 깨우치는 것도 역시 본래의 성품을 모두 탐구하여 공(空)한 것을 깨우치고, 그렇게 깨우쳐서 무상(無相) 요가(瑜伽)에 들어간다.”라고 널리 펴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분석을 먼저 하는 것이 무상(無相)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생각을 완전히 끊는다 해도 지혜로 사물의 본래 성품을 분석하지 않고는 무분별(無分別)한 상태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 형색(形色:形體) 등으로 [이루어진] 사물의 본래 성품을 바르고 정확하게 분석하고 나서, 선정(禪定)에 들어 갈 때는 형색(形色:形體) 등에 머무는 선정(禪定)에 들어가지 말 것이며, 기세간(器世間)과 출세간(出世間) 사이에 머무는 선정(禪定)에도 들지 말아야 함은 형색(形色:形體) 등의 [실체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주선정(無住禪定: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않는 선정)이라고 합니다.
지혜로 일체 사물의 본래 성품을 각각 분석한 다음, 무성선정(無性禪定: 대상이나 조건이 없는 선정)에 들어가기 때문에 지혜선정(智慧禪定)이라고 합니다. 즉 『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集大虛空藏菩薩所問經)』이나 『대보적경보만보살회(大寶積經寶鬘菩薩會)』 등에서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관찰을 통하여 인식하는 마음이 공(空)하다는 것을 이해하고나면, 마음의 대상들도 역시 공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과 함께 수행자는 무상(無相)의 요가를 해야 합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면, 물리적인 형색(形色)과 같은 인식의 대상들을 포함한 모든 종속적인 현상 그리고 인식하는 마음은 자성(自性)이 모두 공합니다. 무분별(無分別)의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완전한 분석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별의 지혜로 종속적인 대상들을 살펴보면,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무아(無我)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제대로 된 관점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정신적 활동을 멈추는 것만으로는 무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단순히 “아(我)”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난다고 무아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얻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무아(無我)는 결국 인식하는 마음과 인식되는 대상의 자성(自性)이 궁극적으로 결여되어 있음을 바로 아는 지혜로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지혜는 바른 분석과 분별을 마치고 나서 생기는 밝은 지식입니다.
이와 같이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의 진리에 들어가면, 모든 것은 생각할 것과 관찰할 것이 다르지 않음으로 분별과 분석을 떠나는 것입니다. 말없이 한 곳에 집중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행하는 바(加行方便) 없이 진여(眞如)를 극명(克明)하게 수행하는 데 머무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상태에 머무르면서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산란(散亂)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탐착(貪着) 등으로 마음의 바깥 경계(境界:對象)가 산란해지면 산란한 감각(受)을 빨리 벗어나는 수행 등으로 산란심(散亂心)을 가라앉히고 빨리 본래 상태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마음에 싫증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면 삼매(三昧)의 공덕(功德)을 생각함으로서, 그에 대한 환희심(歡喜心)을 길러야 합니다. 산란함의 허물을 보고서 또한 싫증을 모두 가라앉혀야 합니다.
반면에 혼침(昏沈)과 수면(睡眠)에 굴복하여 흐름이 불분명해지고, 마음이 침몰(沈沒)하거나 침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환희심(歡喜心)의 대상을 생각하여 빨리 침몰을 극복해야 하고, 그런 다음 대상(所緣)의 본래 성품에 아주 견고(堅固)하게 집중해야 합니다. 반면에 이전에 웃고 즐기던 기억으로 인하여 도거(掉擧)나 방일(放逸)할 염려가 있을 때는,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상(無常) 등을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대상에 적용하여 산란심(散亂心)을 가라 앉혀야 하며, 그런 다음 다시 진여(眞如)를 향해 마음을 행하는 바(加行方便) 없이 들어가 머무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위의 구절들은 궁극적인 실제와 관련하여 관(觀, Vipaśyanā)을 수행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여(眞如)에 대한 삼매에 든 마음은 종속된 대상이 사라지고 없는 텅 빈 상태를 봅니다.
마음에는 텅 빈 상태 이외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음은 무지에서 오는 모든 오해를 버리고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분석과 개념에서 자유롭고, 표현할 수 없는 삼매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진여(眞如) 한 곳에 집중하는 상태를 “진여선정(眞如禪定)” 또는 “입주진여(入住眞如)”라고 합니다.
지속적인 수행을 통하여 명료함을 얻으면 산란(散亂)함이 없이 수행을 계속해 나갈 수 있습니다. 무아(無我)를 보고나서는 그것을 이해한 힘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물론 무아를 한번 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분석적인 지혜로 관(觀, Vipaśyanā)의 수행은 발전합니다. 또 관(觀, Vipaśyanā)의 힘에 의해서 정신적 물리적 지복감이 찾아옵니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지(止, Śamatha)을 수행할 때는 침몰(沈沒)이나 도거(掉擧)에 유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분석적인 수행을 할 때, 수행의 대상에 대한 명료함을 잃게 되면, 마음은 다른 대상으로 향하고 맙니다. 즉 예리함과 집중력이 떨어지면 침몰(沈沒)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애가 일어나 수행을 방해할 때는 필요한 대응법을 즉시 취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까말라실라(Kamalaśīla)께서는 집착으로 인해 마음이 외부의 대상으로 향하면, 그 대상에 대해 무상(無常)함 등을 적용하여 물리쳐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행 중에 혼침(昏沈: 몽롱한 무기력)이나 수면(睡眠:졸음) 또는 몽롱함이 찾아오면 부처님의 모습 같은 아주 큰 기쁨의 대상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대응법을 사용함으로서 장애는 가라앉고 수행의 힘은 점점 커질 것입니다.
반면에 침몰(沈沒)과 방일(放逸)에서 멀어진 다음, 정(定)에 들어 진여(眞如)에 대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려면, 정진(精進)을 [조금 느슨하게 하여] 쉬고 [치우치지 않으며] 평등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마음이 정(定)에 들어가고 있는 중에 [너무] 애써 정진하면 마음은 산란해질 것입니다.
만일 마음이 침몰하고 있는 중에 애써서 정진 하지 않으면 아주 침몰하여 관(觀)은 사라지고 마음은 선천적인 맹인(盲人)처럼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침몰하면 애써서 정진해야 합니다.
[또 이미] 정(定)에 들면 [너무] 애써 정진하지 말아야 합니다. 관(觀)을 수행하는 중에 지혜를 아주 강화(强化)하면 지(止)가 약해져서 등불을 바람에 놓아 둔 것처럼 마음은 요동칠 것이며, 그로 인해 진여(眞如)를 극명(克明)하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럴 때는 지(止)를 수행해야 합니다. 지(止)가 너무 강해지면 마찬가지로 그때는 지혜를 수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침몰(沈沒)과 도거(掉擧)에서 벗어나, 진여(眞如)를 극명(克明)하게 볼 수 있는 삼매에 드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석적인 지혜로 진여를 바르게 이해하고 나서도 마음을 진여에 계속 둘 수 있으면, 그 상태를 자연스럽게 계속해서 유지해야 합니다. 침몰하거나 산란하지 않고 계속 수행을 할 수 있다면, 대응법을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진여(眞如)에 대한 관(觀, Vipaśyanā)을 성취할 때까지 분석과 집중을 균형 있게 병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석적인 수행을 통하여 무아(無我)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얻어야 합니다. 더불어 집중력 있는 선정의 힘이 함께 해야 합니다.
지나친 분석은 집중을 방해합니다. 또 지나게 집중하면 분석적인 지혜를 잃고 맙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유형의 수행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점점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의 수행적 합일(合一)을 이룰 수 있습니다.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566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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